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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

  • 작성일 2006-10-11
  • 조회수 4,034

 

[조경란이 만난 사람 3] 알리사 발저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                  

                 



내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중에 '캐비넷 싱얼롱즈'라는 인디밴드의 이런 노래가 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따뜻한 봄이 찾아오지만 그런 봄이 지나가고 나면 무더운 여름이 오죠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면 청명한 가을이 오지만 그런 가을이 지나가면 다시 추운 겨울이 오죠 우리는 늘 만족을 모르죠 라랄라 라랄라 우리는 늘 만족을 모르죠 라랄라 라랄라 라~”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언제나 알리사 발저Alissa Walser 생각이 난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곧이 곧대로의 얼굴, 초록과 갈색으로 빛나는 깊은 눈, 그리고 언제나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 그런 그녀의 얼굴은 이 노래 제목처럼 내게 늘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왜 만족을 모르는 걸까.


*

 

8월 3일 목요일 6시. 베를린, Kurfursten Strasse 58번가에 있는 카페 ‘아인슈타인’에서 알리사 발저를 만나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를 몰고 베를린까지 오면 반나절은 걸릴 텐데. 그러면서도 내가 기차를 타고 그녀가 사는 프랑크푸르트까지 갈 마음은 나지 않았다. 다시 독일에 가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바로 알리사였으면서도 말이다. 날씨가 너무나 무더웠고 나는 거의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였다. 괜찮아, 너는 그런 걱정하지 마. 알리사는 웃었다.   


십 년 전, 1996년에 나는 작은 책 한 권을 샀다. 하드커버였고 표지가 온통 파랬으며 그 전에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한 독일 여성작가의 책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맨 처음 실려 있던 단편 제목이 「아버지의 생일선물」이었다. 지난해 잠깐 S대학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다. 매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단편소설 한 편씩을 소개해주고 그 다음 시간에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이를테면 존 치버의 「다리 위의 천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유디트 헤르만의 「여름 별장, 그 후」, 맥스 슐만의 「사랑은 오류」 등 주옥같은 단편들을 말이다.


강의가 다 끝날 때쯤, 짧고 간결한 문장과 회화적 이미지로 가득 찬 알리사 발저의 「아버지의 생일 선물」을 학생들에게 복사해서 나누어주었다. 그 소설을 처음 읽을 때 나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할까, 생각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십 년 전이면 내가 막 소설가로 등단을 한 해다. 자유로운 글쓰기. 나는 소리 내서 말해보았다. 독자는 모두 그 자신의 책을 읽는다, 내 책을 읽는 게 아니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책을 쓴다, 라고 말했던 독일의 대문호, 마틴 발저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알리사 발저는 그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는 『이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책으로 1992년, 잉게보르그 바흐만 문학상과 베티나 폰 아르님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샤샤가 카페 ‘아인슈타인’ 입구 쪽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틸다’라는 이름의 커다란 개 한 마리도. 우리는 천천히 다가가 서로를 꽉 끌어안는다. 지난 5월에 만나고 헤어졌으니 꼭 삼 개월만이다.


*


그녀가 말하는 그녀.


“스무 살 때 뉴욕에서 시각예술을 공부했다. 주로 그림을 그렸다. 큰 규모의 추상 유화 같은 것들. 6년 후 독일로 돌아와서는 소묘에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규모와 재료를 모두 바꿔서 볼펜으로 작은 인간상을 그리고는 했는데, 이것이 일종의 이야기하기라는 것을 깨닫곤 그 이야기들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펴낸 세 권의 책은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시키고 있다. 아주 강력한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주제 면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이야기에,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본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에,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그들의 삶에 다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이 있다.


지금까지 책을 세 권, 희곡집을 두 권 냈다. 첫 작품은 그림책 『꿈의 결혼식』인데 크고 화려한 그림이 실린 소설이다. 다른 두 권은 단편집으로 『이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와 『세상의 작은 절반』이란 제목으로 모두 로볼트 출판사에서 나왔다. 여기에도 이미지가 실렸으나 삽화라기보다는 글 자체에선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더해주는 작은 소묘들이다.


내게 번역은 하나의 통로이다. 나와 다른 것을 인식하고 타자성을 인식하며 처음 봤을 때 완전히 낯선 것을 인식하는 기회이다. 외국어는 우선 하나의 경계다. 그것이 세상을 인식하는 또 다른, 낯선 방식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경계라는 말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 같다. 목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경계란 손실, 장애물, 귀찮은 것이다. 시간, 돈, 에너지의 손실인 것이다. 그러나 통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그것은 인식과 경험에 이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인식과 경험은 타자화된 자아이다.”


 

*


커피와 사과파이를 먹고 나서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그녀의 남편 샤샤가 팸플릿을 제작한, 타투를 주제로 한 전시를 보러가기로 했다. 샤샤가 운전을 하고 틸다가 그 옆자리에, 알리사와 내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개털이 너무나 많아서 까만 옷을 입은 나는 곤혹스러웠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는 싫어하지만 소나기는 좋아, 라고 내가 말했다. 나는 비도 좋고 소나기도 좋아, 라고 알리사가 말했다. 웃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보기 좋은 사람이다. 게다가 나보다 말을 더 느리고 천천히 하는 사람도 있다니!

“그래서, 베를린에서는 뭘 하면서 지내고 있니?”

“다른 작가들은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하고 있어.”

“왜? 무슨 문제가 있는데?”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어.”

“첫 문장? 그걸 기다린다고? 그게 언제 오겠어. 그러지 말고 그 다음 문장부터 한번 시작해보는 건 어떠니. 첫 문장은 글을 쓰는 동안에 찾아오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 알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오지 않는 ‘첫 문장’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웃고 있었다.

 



 

요즘 그녀는 아버지, 마틴 발저의 새 책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마틴 발저의 팔순 기념에 맞춰 내년 3월 라이프찌히 북페어서 그 부녀가 함께 만든 책이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녀가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한때 마틴 발저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 지금도 가끔 그의 산문집을 뒤적거려볼 때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도 어쩐지 몸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말이다.  


그날 밤, 그녀와 샤샤는 내가 머물고 있는 반제의 LCB(literature colloquium berlin)까지 데려다주었다. 어느 작가의 낭독회가 막 끝났는지 정원에는 맥주나 와인잔을 든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마틴 발저, 그리고 이 년 전엔 그녀도 와서 낭독회를 했던 장소다.

그들은 호텔로 갔다. 샤샤가 함께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녀에게 내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자고 말했을 텐데.  


*

 

야콥 하인과 마찬가지로 지난 5월 ‘서울, 세계 젊은 작가 페스티벌’ 때 알리사 발저와 처음 만났다.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 나는 외국작가 참석 명단을 보다가 알리사 발저의 이름을 발견했다. 십 년 전에 읽은 『이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가 떠올랐다. 그 책에 실려 있던 소묘들이 떠올랐다. 자유로운 글쓰기, 라고 다시 발음해보았다. 페스티벌, 첫날 저녁 만찬 때였다. 나는 내 이름이 씌어진 원형 테이블로 다가갔다. 내 맞은편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각자 자리에 앉은 채로, 우리는 첫 인사를 눈으로 나누었다. 그녀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청결한 평화와 소박함.

그것이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페스티벌 때 우리가 토론했던 주제는 ‘문학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였다. 작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움’을 찾는 것보다 바로 글쓰기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더 큰 문제로 느껴졌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알리사가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게다가 우리는 같은 날 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글을 쓸 때 새로움에 개의치 않는다. 내게 이상적인 글쓰기는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을 느끼고, 어떠한 새로움과 대면하여 긴장감을 느낄 때 이루어진다. 글쓰기에 있어서 일종의 유효기간을 바라면서 말이다. 언어의 실험 가능성을 무시한, 체험이 없는 글쓰기란 지루하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포기하고, 그래도 계속 써나가는 당신은 의욕에 차 있다. 어떤 문구, 이미지, 문맥, 그리고 알아보는 인지의 순간을 어떻게 잘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탐색. 인지란 자각하는 자아 속에 새로움이 구체화되는 것을 말한다. 글쓰기는 외로운 행위이다. 당신이 홀로 되는, 수집하고 축적한 모든 것들의 한가운데 홀로 되는, 이 순간 당신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세계가 열리는 경험인 것이다.”  


*

 

그 다음날, 금요일 오후 3시에 우리는 부란덴부르크 토어 앞에서 다시 만났다. ‘홀로코스트 뮤지엄’에 갔다가 밖에 나왔을 땐 서로 좀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분 전환 할까? 라며 알리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화가 콜비츠Kollwitz의 커다란 동상이 있는 공원이었다. 내가 콜비츠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알리사는 나를 그 동상 앞에 세워두고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에겐 이젠 헤어질 시간만 남아 있는 셈이었다. 공원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다시 베를린에 와서 살고 싶어.”

지금은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 여기서 살았던 적이 있는 모양이다.

“베를린에서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뭔데?”

나는 언제나 이상한 질문만 한다.

“나무와 호수. 그리고 집.”

마치 집이 없는 사람처럼, 알리사가 대답한다.

“음, 그러니까 나무와 호수가 있는 집?”

우리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도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알리사는 크게 소리내지 않으면서 언제나 웃고 있고 나보다 더 천천히, 느리고 여유 있게 움직이고 걷고 말한다. 그 모습이 태평스럽고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리는 걷는 것을 좋아하고 나무를 좋아하고 김치를 좋아하고 채소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요가를 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쩐지 내가 아주 욕심이 많고 조급하고 빨리 말하고 빨리 움직이고 불평이 많고 부족한 게 많고 갖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한다.  

내가 그렇다고 투덜거리자 그녀가 농담처럼 이렇게 되받는다.

너는 아직 나보다 젊어서 그래.



 

그리고 밤 9시.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우리는 다시 작별인사를 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 활짝 웃었다. 알리사는 차창 밖으로 내민 손을 연신 흔들고 있었다. 그녀와 샤샤, 그리고 그녀의 소중한 커다란 개 틸다가 타고 있는 자동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렇게 구식으로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는 외국 친구는 아마 그녀밖에 없을 걸. 혼자 대로변에 남겨진 나는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한번 쓱 문지르고는 얼른 그 거대한 빌딩 숲, 포츠다머 거리로 휩쓸려 들어갔다. 나는 새로 기운이 솟는 게 느껴졌다. 친구는 만났을 때도 좋지만 헤어질 때도 좋다.    


*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따뜻한 봄이 찾아오지만 그런 봄이 지나가고 나면 무더운 여름이 오죠~”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청결한 평화와 소박함. 나이가 좀 들면 그런 것이 얼굴에 묻어날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나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좋다. 이젠 알리사가 『이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아름다운 책을 쓴 작가이기보다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느긋함이 좋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 자신의 내면에 있는 긍정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그 조용한 미소 말이다. 《문장 웹진/ 2006년 10월》









                                                                





알리사 발저Alissa Walser

1961년 태어났다. 뉴욕과 빈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영어 번역가와 작가로 활동 중이다. 1992년에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 잡지 《브리기테》의 베티나 폰 아르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2년 첫 소설집 『이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를 펴냈고 2000년에는 두 번째 소설집 『세상의 작은 절반』을 출간했다. 현재 프랑크푸르트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전통이나 관습이 사라지고 개개인이 각자 결정을 하며 자기만의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시대에 사람 사이, 남녀 사이의 관계, 몸, 현대의 도시생활 등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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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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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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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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