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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 작성일 2024-07-01
  • 조회수 94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세계 시의 이해>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 물으면, 돌아오는 건 텅 빈 눈빛과 침묵뿐.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본다. 하얀 두루미 한 마리 푸근한 구름 속으로 날아든다. 흰 두루미처럼 나는 내 존재와 침묵의 조화를 배웠다. 그리고 가만히, 순간을 위해 강에서 기다린다. 물고기가 다가온다. 나는 살아 펄떡이는 그것을 찔러 목구멍으로 삼킨다. 이 순수한 황홀.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신다. 이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지우개 머리 2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고 하지만 지난주 한 학생의 질문은 너무 어리석어서, 나는 그의 머리에 지우개를 던져야 했다. 다행히 지우개는 펠트 면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다른 학생들이 분노했을 거라 예상하겠지만 그들은 몰래 책상 아래 핸드폰을 보고 있었으므로 수업은 평소처럼 아무 일 없이 진행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어리석은 질문을 한 학생이 나에게 왔다. 그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바보 같은 질문을 준비해 왔다. 가설: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는 극도로 어리석은 질문으로 깨질 수 있을까? 네, 그래요. 그건 인내심의 한계를 깬다. 이 실험의 예상치 못한 결과: 나는 어리석은 척하는 학생들은 존나 악당이라는 걸 배웠다. 또 다른 예상치 못한 결과: 악당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든, 그들은 C보다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



   의견 없음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학생에게 묻는다. 침묵만 흐른다. “다른 의견 있어?” “우린 의견을 가지도록 배운 게 아니라 단지 배운 걸 반복하고 다시 또 반복할 뿐이에요.” 미나 학생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의견을 냈을 때 교수님 의견과 우리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는 너무 많은 위험을 짊어져야 해요.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교수님은 우리더러 우리가 배워 왔던 교육을 그만두라고 하시는 건가요? 우리가 배운 것을 잊어버리라고요?” 학생들이 나를 가리키며 묻는다.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경에서는요” 외국인 학생이 말한다.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해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제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잘 알아볼 수는 있는데 이해는 못 하겠어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게다가 오늘은 수요일이에요. 매주 수요일마다 학교 식당에서는 샐러드와 구운 생선이 나오거든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러니까 나가 봐도 될까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인다. 뒷줄에 앉은 몇몇 학생은 여전히 팔에 머리를 파묻은 채로 자고 있다.



   교환학생 그렘린


   출석을 부르던 중, 벽에 검은 차원의 문이 열리고 불꽃 머리와 뾰족한 귀를 가진 회색 피부의 그렘린이 ‘위이이이이’ 소리를 지르며 미나의 책상으로 달려들었다. 미나와 첫 줄의 여학생들, 한 학기 내내 엎드려 잔 남학생까지도 고개를 들어 그렘린을 바라봤다. 그렘린이 눈을 깜박깜박. 이 교환학생은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그의 전공은 뭔가요? 교환학생들의 이름은 종종 출석부에 적혀 있지 않다. 사실 그들의 이름 대부분은 한글로 표기할 방법이 없다. 수업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참여한 것처럼 군다. 우리가 공통 언어로 소통할 수 없더라도 그들이 성적 분포 곡선에 영향을 주지 않기에 나는 항상 그들에게 B학점을 준다.



   동시 다중현실


   “우리는 다른 현실에서 동시에 살고 있어요.” 학생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유일한 선택지란 선택지가 없는 선택을 선택해야 하는 것과 같아요.” 학생들은 과제를 잘게 조각내 책상 위로 떨어트린다. 에어컨 바람은 차가운 공기를 불어 조각난 종이를 바닥으로 흩날린다. 미나 학생이 서 있다. 그녀는 입고 있는 빨간 드레스를 머리 위로 끌어올린다. 드레스 밑에는 하얀 드레스가 있다. 가슴에는 검은색으로 프린트 된 U N I Q U E라는 글씨가 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우리가 원하는 건 딱 하나예요.” 미나가 말한다. “우리는 이제 필요한 것만 하고, 요구되는 건 안 할 거예요.” 학생들이 환호한다. “이제 요구된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한다. 필요한 것과 요구되는 것, 뭐가 다른가? 안경을 내리고 시계를 쳐다본다. 12시 36분. “교수님의 성공과 우리의 성공은 달라요.” 학생들은 말했다. “우리는 다른 현실에서 동시에 살고 있어요.”



   꿈 대화


   “교수님, 시간 되실 때 상담 신청해도 될까요?” 커피를 마시는 것보단 머그컵이 커피를 채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타고 싶은 것보단 설탕과 우유가 커피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물론 학생의 질문이 학점에 대해서나 어떻게 꿈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학생이 질문 아래 있는 질문을 찾고 확인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질문 있어?” 내가 학생에게 묻는다. 침묵: 대답 없는 질문의 쓰임은 어디에 있나? 바깥에서 학교 관리인들의 발밑의 잎이 바스락대는 소리. 당신이 떠나고 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일 것이다. 바스락. 침묵. 바스락. 바스락. “만약 질문이 더 없으면, 여기서 마무리하자.”



   능숙한 태도


   매년 눈을 반짝이며 그들이 온다. 사 년간,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나? 모든 것을 준다. 그러면 그들은 임신한 풍선처럼 큰 꿈을 안고 착취의 세상으로 나선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 나는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메일을 받는다. 교수님! 제 풍선은 바람이 빠졌어요. 아니면 더 나쁘게, 제 풍선은 터져버렸어요. “더는 골프 옷은 그만!” 나는 말하고 싶다. 골프 옷은 골프 칠 때 입으세요. 그러나 나는 언제나 능숙한 태도를 가진다. 나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이 또한 지나갈 겁니다.” “물론, 당신은 너바나 노래를 듣지 않아도 너바나 티셔츠를 입을 수 있죠.” 나는 윙크한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단어 뒤에 숨은 의미를 알아차린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그 사이의 침묵을 파악한다.



   만능 흡수


   어떤 날은 눈을 크게 부릅뜨면 나의 눈동자는 나무, 하늘, 붉은 벽돌, 까치, 벌레, 청소부, 학생들이 비집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두 개의 양동이가 된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 채 나는 모든 분자를 맛보려 한다. “교수님, 괜찮아요?” 한 학생이 묻는다. 나의 답변은 똑같다: 만능 흡수, 날 따라와. 이 셔츠는 흰색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비우고 남은 것이다. 나는 사람 크기의 스펀지이자 남자 모양의 면봉이다. 나는 창조자가 아니다. 나는 캔버스이자 트랙이자 무대다. 위대해지기 위해 환경이 되어야 한다. 모든 걸 흡수한다.



   고장 난 프로젝터


   어제는 됐는데 오늘은 안 된다. 종종 프로젝터는 고장 나 있고, 비어 있는 옆 강의실은 빔을 바꿔야 하고, 비어 있는 옆 강의실의 옆 강의실은 스피커가 연결되지 않는다. 68% 72% 84%. 때로는 컴퓨터 로딩 화면이 업데이트를 끝내지 못한다. 나는 머그잔에 든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모든 버튼을 두드려 보고 클릭하고 또 클릭하고 있었는데, 거의 포기하기 직전에 마법이 일어났다. 여러분 모이세요. 스크린 각도는 이상하고 스피커 케이블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너희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때, 그건 마치 고대 성인들이 쓴 신성한 경전처럼 초록색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미나 학생이 묻는다. “글쎄, 미나 학생. 기술은 죽음처럼 우리가 홀로 여행해야 하는 여정이야. 이는 믿음과 용기, 사용자 인터페이스 소프트웨어의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해.” “인터페이스 소프트웨어 좆까.” 앞줄의 한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감정의 무의식적 흘러넘침. 분명 수마트라 원두 때문이다.



   필독서 호랑이


   필독서는 한국 고대 호랑이다. 굽은 나무가 빼곡한 산속에서, 초가집 지붕에서, 가끔은 저습지에서, 귀신이 가득한 동굴에서, 마을 사람들은 필독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사람들이 없을 때는 닭, 소, 양을 먹는다. 사람들이 장총을 갖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필독서 호랑이를 멸종시켰다. 현대인들은 이제 필독서 호랑이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이든 뭐든, 도서관은 3-D프린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낡고 먼지 쌓인 책 표지를 꺼내면 전율이 인다. 당신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라. 페이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나는 커피 한 모금 마신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을 것이다.



   젖은 기억


   동료들과 친밀한 관계를 쌓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화장실 옆 복도에 정수기가 있다. 인터넷에 따르면, 정수기는 직장 동료들이 비공식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 모이는 비공식적인 장소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나는 정수기 옆에 서 있다. 동료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는 날씨와 뉴스에 대해 친근하고 명랑하게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수기는 사르트르나 유교,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소가 아니다. 정수기는 카프카. 고만고만한 아주 멋진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이 복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내 손에는 눅눅한 종이컵이 들려 있다.



   강원도 컨트리클럽 교직원 수련회


   러시어학과 교수인 나의 동료는 우리 테이블 위로 몸을 기댄다. KGB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지만 그들은 적어도 고문하기 전에 네 시간 동안 버스를 타게 하진 않았다. 철학과 교수들은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에서 산만하게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나와요: 우리는 실재하는가?” 건축학과 교수가 답한다. “아마 우리는 건축가의 디지털 랜더링 속 무작위 스프라이트일 거예요.” 언어학 교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시나리오를 산산조각으로 쪼개고 기계로 데이터를 만들고 패턴을 분석해 봅시다.” 스페인어 교수는 쿵쿵 테이블을 친다. 스페인어 교수는 손가락으로 언어학 교수를 가리킨다. “노 부에노.”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노 부에노, 진짜.



   거울에 반사된 거울 반사에 관한 학술지


   어제의 우리는 오늘의 회의 시간을 잡기 위해 모였고 오늘의 우리는 다음 회의 시간을 잡기 위해 모였다. 편집장이 우리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다. “항상 우리의 첫 번째 안건은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 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건 결정됐으니 다음 미팅은 언제로 잡을지 결정해 봅시다.” 편집장이 말했다.  “저는 우리가 투표로 정하는 것에 투표하고 싶습니다.” 편집부장이 말했다. 보조 편집자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말한다. “연구실에 가는 길에 매일매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나가요. 헴록의 잔을 마시려는 결연한 표정의 소크라테스와 울부짖으며 깊은 슬픔에 빠진 표정의 그를 따르는 학생들을 보고 나는 잠시 멈춰 서곤 하죠. 의미가 있나요?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의 존재 의미는 의미가 있나요?” 다른 보조 편집자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손을 든다. “전 화요일 오후에 투표하고 싶어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나는 잎이 된다. 나는 유약이 되고, 나는 자기 머그잔이 된다. “우린 이 세상과 다음 세상 사이에 놓인 밧줄 다리예요.” 나는 말한다. “우리는 검은 화면을 가로질러 손가락에 묶인 실이에요.” 편집장과 편집부장, 보조 편집자들과 조교, 모두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래요.” 편집장이 말했다. “결정됐어요. 화요일입니다.”



   연구 가시성 셔츠


   당신의 경력을 높이기 위해서 연구 가시성을 높여야 한다. 몇몇 교직원들은 발표된 논문의 요약문을 출력해 자신의 연구실 문에 테이프로 붙였다. 그들의 연구실을 지나갈 때, 그것을 보고 나는 그들이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중요한가? 얼마나 혁신적인가? 발표 요약문을 문에 테이프로 더 많이 붙이면, 당신은 더 잘 보이게 되는가? 나는 톰 웨이츠의 흑백 사진을 연구실 문에 붙인 적 있다. 청소부는 톰 웨이츠가 중요한 연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이제 톰 웨이츠가 없으니까. 연구 가시성이 낮아 괴롭거나 고용 보장과 신뢰성이 위태롭다고 느껴질 때, 나는 연구 가시성 셔츠를 입는다. 그 영향력은 대단하다. 복도를 걸어가면 동료들은 나를 향해 박수를 치고, 수업에 들어서면 학생들은 90도 이상 굽히며 인사한다.



   우주


   화요일 아침마다 나는 일찍 일어난다, 새벽이 되어 사라지기 전 밤하늘 속으로 손을 뻗기 위하여. 푸른 별, 가스 구름, 별과 별 사이 돌들의 달그락거림. 나는 모든 빛과 색깔과 우주의 형상을 휘저은 뒤, 커피를 만들고 몇몇 이메일에 답장을 쓴다. 학생들에게, 당신이 무언가 배우고 싶다면 이것을 알아야 한다; 시간은 짧다. 무한을 잡아라.



   잉크 먹는 사람


   악몽: 세상의 커피가 바닥났다. 기근 때문일까? 아니면 전쟁? 혹은 기후위기? 꿈에서는 보통 설명되지 않는다. 원인은 없고 결과만 있다. 난 내 펜을 뒤틀어 반으로 분질러, 잉크 스틱을 꺼내고 끝을 뜯어 잉크를 비웠다. 검은 입으로 하루 종일 나는 머그잔에 든 잉크를 홀짝이며 마셨다. 학생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 상황은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어요.” 한 학생이 말했다. “그건 너무 심하잖아.” 내가 말했다. 꿈 밖에서 커피 없이 살아가는 것. 빨간 야구 모자를 쓴 코끼리 머리 학생이 코끼리 코에서 종이 조각을 발사했다. 왜? 꿈에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으니까.



   네 개의 주머니


   대체로 한 개나 두 개면 충분하다. 대체로 엉덩이나 허벅지 부근에 있다. 그러나 오늘은 더 많은 주머니가 필요하다. 가슴 위쪽 주머니 두 개. 배 양쪽 주머니 두 개. 대체 무엇을 넣고 다니려고? 나는 너무나 많은 감정을 가져서 때로 그것들이 가득 차서 넘치기도 한다. 나의 가슴 밖으로 나온다. 나의 배 밖으로 나온다. 나의 학생들에게 내 주머니들은 비어 보인다. “폰 쳐다보지 마!” 내 작은창자 근처 주머니에 든 실망이 말한다. “사랑해.” 나의 폐 바깥쪽 주머니 속에서 부푼 자부심이 말한다. 너는 내 하찮고 허무한 노동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 심장이 있다면 많은 주머니가 필요하다.



   새떼


   발 없이 태어나 새떼는 바람 위에서 잔다. 날개 없이 태어나, 나는 인터넷에서 복사해 온 시험지를 복사하는 복사기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파란 혀를 가지고 있어서 기린은 타는 듯이 뜨거운 잎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커피가 너무 뜨거워 내 혀가 타버린다면, 나는 발 없이 태어난 흰 새가 되고 싶다. 바람 위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파란 혀를 가진 흰 새. 생물학적 확장. 나는 무수히 날개를 펴는, 작고 하얀 새떼다. 날 수 없어, 나는 기린의 축축하고 거대한 파란 혀 위에서 미끄러지고 미끄러진다.



   중년 남성을 위한 슬픈 노래들


   내 뇌의 95퍼센트는 처리되지 않은 감정이다. 나머지 5퍼센트는 처리되지 않은 감정의 고대 숲에서 맹인 기사의 어깨에 올라탄 얼룩 고양이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했기에 나의 학생들 아무도 본 적 없는 영화에 대해 농담을 던질 때, 처리되지 않은 감정의 숲속 형체를 알 수 없는 나뭇잎은 두꺼워진다. 내 전두엽 표면의 불쌍한 얼룩 고양이는 맹인 기사를 빛으로 이끌고자 노력하지만, 실망의 안개가 너무도 짙은 것이다. 시간 유령 무리의 잔인한 탁탁 소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폴리 쇼어. 밀리 바닐리. 출구 없음.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 “저는 데이비드 보위를 좋아해요.” 한 학생이 말하면 그곳에 있다. 길 위의 달빛.



   업보  


   카프카의 업보는 무엇인가? 커피의 업보는 무엇인가? 소시지에 머스터드를 바를 때의 업보, 절망에 빠지는 업보,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업보는 무엇인가? 공허한 기도, 동료의 차나 아내를 탐내는 것, 재활용하지 않는 것, 학생의 머리에 지우개를 던지는 것은 어떤 업보를 불러오는가? 업보에 대한 대학 정책은 무엇이며 행정실은 그들을 어디에 묻는가? 부도덕적 행동을 행동하지 않고 부도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의 업보는 무엇인가? 업보 때문에, 나는 강의를 녹음하지 않고 말하는 동안엔 강의실의 벽을 바라본다. 업보 때문에, 나는 해고되거나 승진을 하거나 암에 걸릴 것인가? 업보 때문에, 가끔 F를 받아야 하는 학생이 B를 받거나 지각한 학생이 지각처리 되지 않거나 상처받은 패배자는 친구를 만든다.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예수는 그것이 자신의 업보 때문인지 궁금했을까? 혹은 그런 짓거리는 때때로 그냥 일어나는가? 내가 예수에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업보는 또 무엇인가?



   길에서 침뱉기와 바카스 


   남자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얼마나 많은 가래를 뱉을까? 태국 마사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이 남학생들 중 누가 마초가 될까? 내가 어떻게 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진정한 남성은 심지어 상처를 입은 뒤에도 여전히 정에 약하다. 그들은 벽을 치지 않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며 개를 때리지도 않는다. 할아버지들이 공원에서 바둑을 두며 담배를 피우고 소주를 홀짝인다. 모자를 쓰고 모시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금반지와 목걸이를 잔뜩 찬 채로. 너무 거칠다. 마치 첫 독재자가 국가의 얼굴을 산산이 깨부순 다음 리프트와 코 성형수술을 명령한 것처럼. 모시 셔츠는 마치 역사로 단단해진 껍질과 같으며 공감을 위해 뻗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손. 모시는 투명하다. 옷을 볼 때 집중한다면, 그것은 보이게 된다. 벌거벗은 남자의 겸손한 마음이 아래에서 뛰고 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인간


   사랑에 빠질 때마다 나는 심장을 키우고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음식물 쓰레기에 심장을 던진다. 음식물 쓰레기가 썩지 않도록 나는 그것을 버리기 전 냉동고에 보관한다. 나는 매 순간 사랑에 빠진다. 로맨틱하게, 우애적으로, 심지어 떨어지는 잎사귀나 지나가는 구름에게도. 사과 껍질, 양파 껍질, 과일 껍질 사이에서, 당신은 언제든지 냉동실에 꽁꽁 얼어붙은 나의 심장 두세 개쯤 찾을 수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가지러 갔을 때, 나의 꽁꽁 얼어붙은 심장의 일부를 발견하면 얼마나 이상할까? 내가 사랑하는 학생이 주어진 책을 읽지 않았을 때, 내 냉동고 자리는 충분하지 않다. 내 얼어붙은 심장 봉지들은 밤새 거리에 놓여 있다.



    섹스문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 밤하늘과 구름 사이, 무겁게 매달려 있는 것······. 진동. 아니. 거의 고동치는 것. 맹렬하게 밝고 둥글며 파도를 당기는, 하나의 거대한 자석. 낮 동안 나는 출석률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원시의 짐승이 내 안을 휘젓지. 타오르는 숲, 지진, 저린 땀으로 얼룩진, 가쁜 호흡, 섹스문 아래서 밤새도록.



   류이치 사카모토 줄무늬


   삼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산사에 매달린 놋쇠 물고기 종이 되었다. 나는 바람에 실려 공중에 줄무늬를 남긴다. 당신은 궁금한가? 내가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또한 공중에 줄무늬를 남기는 외부의 소리가 될 수 있는지. 내 삶이 거의 절반쯤 지나고서 나는 그 굴곡과 쇠퇴, 그 진동과 고리를 발견했다; 나의 삶은, 신성한 빛이었다. 산사에 매달린 놋쇠 물고기 종  위에 스러지는 저녁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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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에세이]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 긴 시간의 미로를 살피는 시, 김행숙의 눈 양경언 장훈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냐고. 글쎄,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일까. 말을 고르는 사이 답이 돌아왔다.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 - 진달래, 「[산 자들의 10년]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정치에 밀려난 과학, 아빠가 붙잡았다」 부분, 《한국일보》 2024년 4월 25일. 수학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 아이들이 탔던 배가 왜 침몰했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십 년 동안 분투 중이라는 장훈 님(‘4·16 안전사회연구소’ 소장)의 인터뷰를 읽다가, 불가능한 바람이 담긴 저 답변 앞에 오래 멈추어 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이 가능한가.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요청된다. 이뤄질 수 없으므로 간절해지는 것이다. 떠나간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고 안고 싶은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너를 마주하고픈 바람이. 죽은 남편과 아이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나는 그런 엄마가 내내 애달팠다. 그런 바람이, 엄마가 당신 스스로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엄마, 죽은 아빠도 오빠도 살아 돌아오진 못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안타깝지만,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면 애당초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편이 나아. 나는 이편이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가. 그게 정말인가. 어째야 하는가. 참사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할수록 ‘벌어져선 안 됐던 사건’이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는데, 내내 드는 저 불가능한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는 바람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심경을. * 김행숙의 소시집 『1914년』(현대문학, 2018)은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2018년에 발간된다. 2014년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의 시간이 시집 제목으로 소환되고 있으므로,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한 권의 시집에 ‘1914년’이란 이름을 부여한 셈이다. 누군가는 시가 품은 말들의 속성인 ‘애매성(ambiguity)’ ― 시어에는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있어 다양한 갈래의 해석이 만들어진다는 특징 ― 에 기대어 먼저의 언급을 꺼릴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1914년’이라는 말 자체로부터 얼마나 많은 해석이 가능한데 시집이 세상에 놓일 닻으로 굳이 2014년 4월 16일의 참사를 삼아야만 하나, 그러한 접근은 김행숙 시가 그간 벌여 왔던 시적 우주의 확장과 연결되지 못하는 해석을 낳지 않겠는가 하며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을 거란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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