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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358

[에세이]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 긴 시간의 미로를 살피는 시, 김행숙의 눈


양경언



장훈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냐고. 글쎄,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일까. 말을 고르는 사이 답이 돌아왔다.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


- 진달래, 「[산 자들의 10년]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정치에 밀려난 과학, 

아빠가 붙잡았다」 부분, 《한국일보》 2024년 4월 25일.


   

   수학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 아이들이 탔던 배가 왜 침몰했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십 년 동안 분투 중이라는 장훈 님(‘4·16 안전사회연구소’ 소장)의 인터뷰를 읽다가, 불가능한 바람이 담긴 저 답변 앞에 오래 멈추어 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이 가능한가.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요청된다. 이뤄질 수 없으므로 간절해지는 것이다. 떠나간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고 안고 싶은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너를 마주하고픈 바람이. 

   죽은 남편과 아이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나는 그런 엄마가 내내 애달팠다. 그런 바람이, 엄마가 당신 스스로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엄마, 죽은 아빠도 오빠도 살아 돌아오진 못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안타깝지만,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면 애당초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편이 나아. 나는 이편이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가.

   그게 정말인가.

   

   어째야 하는가. 참사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할수록 ‘벌어져선 안 됐던 사건’이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는데, 내내 드는 저 불가능한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는 바람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심경을. 



   김행숙의 소시집 『1914년』(현대문학, 2018)은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2018년에 발간된다. 2014년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의 시간이 시집 제목으로 소환되고 있으므로,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한 권의 시집에 ‘1914년’이란 이름을 부여한 셈이다.

   누군가는 시가 품은 말들의 속성인 ‘애매성(ambiguity)’ ― 시어에는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있어 다양한 갈래의 해석이 만들어진다는 특징 ― 에 기대어 먼저의 언급을 꺼릴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1914년’이라는 말 자체로부터 얼마나 많은 해석이 가능한데 시집이 세상에 놓일 닻으로 굳이 2014년 4월 16일의 참사를 삼아야만 하나, 그러한 접근은 김행숙 시가 그간 벌여 왔던 시적 우주의 확장과 연결되지 못하는 해석을 낳지 않겠는가 하며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문학만의 독보적인 자리를 마련해 주고자 세상의 공기를 애써 차단하려는 시도는 그것대로의 부자연스러움이 있다. 2014년의 사건을 깊은 슬픔으로 겪은 한국 사회의 일원이라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반응을 별난 것처럼 치부하는 일도 진실을 지우는 방식의 하나일 것이다. 

   시집의 제목을 경유할 때 당연히 꺼낼 만한 얘기에 다양성을 내세우며 나른한 상대주의에 빠진 채 이도 저도 아닌 얘기로 응수하는 대신, 시집의 첫 번째 순서로 배치된 시 「1914년 4월 16일」을 살피며 1914년과 2014년 사이에 놓인 백 년의 시간을 헤아려 보기로 한다. 이 시에서는 1914년에 태어난 사람이 ‘4월 16일’을 조명한다. 



   나의 생년월일입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친구들이 나를 홀로 21세기에 남겨두고 떠난 게 아니라

   죽은 친구들을 내가 멀리 떠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온 것같이

   2014년 4월 16일입니다.


   - 김행숙, 「1914년 4월 16일」 전문, 『1914년』 현대문학, 2018, 9쪽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1914년 4월 16일”로 소개하면서, 자신이 “죽지 않은 사람으로” 2014년을 맞이했을 때를 가정한다. 그이에게 100세가 된 날은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고 기쁨을 누리는 생일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온 것 같”은 아득함, 자신의 “친구들을” “멀리 떠나온” 것 같은 고립감이 드는 날에 더 가깝다. 백 년의 시간을 다 겪고서 도착한 곳이 많은 이들의 삶을 앗아간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자리라면, 어쩌면 그이는 살아 봤자 아무런 보람도 없는 삶 살아서 무엇 하냐는 허무한 생각에 빠져들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삶의 끝자리에 꼭 잔칫상이 차려지진 않는다는 것은 지금 세상이 품고 있는 매정한 비밀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독특한 절망은 저 아득함과 고립감이 덮치고 있는 자리를 한 사람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끝이라 말하는 데 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온 것같이/2014년 4월 16일입니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오늘”이 “2014년 4월 16일”이란 사실을 돌려받아야 비로소 시대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새겨 놓는다.

   1914년과 2014년 사이에 놓인 시간을 상상하는 일은 그 시간을 직접 산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일. 혹은 그 사람이 “죽은 친구들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던 경위를 짐작하는 일. 그런 사람이 삶에 대한 온갖 기억을 끌어안은 채 당도한 ‘2014년 4월 16일’을 일컬어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온 것 같”다고 말할 때, 우리는 기나긴 시간 동안 온갖 천재지변, 역사적 풍파를 겪은 이라 하더라도 ‘4월 16일’의 일은 그이 내면의 지반이 무너져 내릴 만큼의 절망을 안기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시는 백년 전의 목소리를 앞세워 참사로 인해 슬픔의 늪에 빠진 이들의 심경을 느끼게 해주는 한편, 그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어 괴로운 이들을 위해  하나의 대안적인 표현 방법을 내어준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절망이란 “죽지 않은 사람”이라면 내내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임을 일러주는 것이다. 



   김행숙의 시에서 ‘오늘’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미래로 움직이는 흐름의 한가운데서 형성된다. 얼핏 당연한 얘기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기나긴 삶을 오늘 하루하루로 축소시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은 그저 ‘오늘’일 뿐, 어제로부터 와서 내일로 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사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행숙은 오늘을 ‘오늘’로 살피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태도, ‘줌인(zoom-in)’만이 아닌 ‘줌아웃(zoom-out)’을 통해 기나긴 시간을 감지하는 방식을 시에 들인다. 멀리서 볼 때 아름다운 야경을 이루는 빛도 가까이 다가가면 참혹한 폭력의 파편일 수 있듯이(숲이 불타고 있습니다./단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활활 타고 있습니다./불이라면, 불의 군주라고 하겠습니다.//“오늘따라 서울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불빛에 도취한 연인의 독백이 독재자의 것처럼 느껴져 나의 사랑이 무서워졌습니다. -「다른 전망대」, 같은 책, 38~39쪽), 시인은 시간성을 기나긴 범위로 상대할 때야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인간의 시야보다 몇 뼘 높이 있는 까마귀의 눈으로 ‘오늘’이 놓인 시간의 미로를 훑고자 한다.

「1914년 4월 16일」이 특정한 사안을 계속해서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 그것을 ‘미래’로 라벨링함으로써 과거로부터 온 목소리가 거기에 당도하게끔 만드는 시간성을 활용하고 있다면, 「우리가 재난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117~118쪽)는 아직 살아 보지 않은 시간인 ‘미래’를 미리부터 어떻게 기억할지 묻는 이의 ‘습관적 과거 라벨링’을 문제 삼는다.



   2020년 1월, 너는 실직을 하고 시간이 늘어나고 생각이 많아지고, 우리는 우리가 2025년을 살아 본 사람 같고, 2030년을 지나 2040년을 살아가는 사람 같기 때문이다.


   기억하면 너무 괴로워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의 그, 그날의 비명 소리 같은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우왕좌왕하는 우리는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2050년, 그러나 잊혀진 기억들은 정확히 자기 집을 찾아 돌아오는 중이다. 자, 심장을 열고 이 불쾌한 손님의 얼굴을 똑똑히 보아라. 기억의 댐이 무너지고 너는 입을 틀어막고 마침내 보고야 만다. 우리를 그토록 슬피 울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꺼이꺼이, 한바탕 울음소리 같은 큰 새의 날갯짓 소리가 어쩐 일인지 창가를 떠나질 않는구나. 


   2020년 2월, 주구장창 재난영화만 보고 있는 이유는 저 70인치 검은 액정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쓸어 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너는 지옥문을 지키는 외로운 문지기처럼 소파에 앉아 TV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지평선에 거의 다다른 눈빛이다. 다들 어떻게 여기가 지옥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아무도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지옥문 앞에서 한 마리 개가 세 개의 대가리를 치켜들고 사납게 짖어대는 이유는 지옥을 보물섬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다. 2023년 여름의 폭염은 이 개의 이름, 케르베로스라고도 불렸다. 20년 전, 2023년 여름은 그래도 살 만했지, 길에서 잠이 깬 한 노인이 추억에 잠겨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집을 하염없이 그리다가 햇빛 환란 속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그는 오래된 일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는 내일 저녁 약속처럼 말해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2020년 가장 유명한 바이러스의 이름은 코로나, 왕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 김행숙, 「우리가 재난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부분,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시는 살아 보지도 않은 몇 십 년 뒤의 시간까지도 “살아 본 사람”처럼 대하는 이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런 이를 향해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미래를 과거처럼 만드는’ 일은 자신의 상황을 “재난영화”처럼 구경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곧 자신이 있는 곳을 “세상의 모든 불행”이 담긴 “지옥”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게 만들어 저 자신을 “지옥문을 지키는 외로운 문지기”로 취급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2023년 여름은 그래도 살 만했지”라고 중얼거리며 “천천히 죽어”가는 “노인”의 등장은 그러므로 노인 이전의 얼굴로 자신에게 닥친 시간을 겪어 보지 않으려는 이의 (먼 훗날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초상인 셈이다. 

   시는 스스로를 “노인”처럼 다스리는 이로 하여금 ‘오래된 미래’와 같은 오늘을 말하게 함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든다. 이때 ‘오늘’은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일의 연원 중 하나이되, “산 자가 미래로 행진하는 도정에서 제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닌” 것이 된다(한나 아렌트, 서유경 옮김, 『과거와 미래 사이』 한길사, 2023, 88쪽). 그러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샅샅이 헤아리기도 전에 다 살아 본 것처럼 굴지 말 것. 지레짐작하지 말 것. “그, 그날의 비명 소리 같은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오늘을 모조리 다 겪을 것. 무엇보다, 겪어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을 믿을 것. 우리가 진정 과거로부터 와서 미래로 이행하는 중이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기억 사이사이에 흉터처럼 남겨진 공백을 단지 공백으로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아무래도 시인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참혹한 사건들 역시도 기나긴 시간의 도정 위에서 살필 때야 그 진면모가 드러난다고 일러주려는 게 아닐까. “세계가 무너진 후에”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밤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이는(「지하철 여행자 2084」, 『1914년』 20쪽), “한 줌의 흙을 뿌리처럼 움켜쥐고 이게 뭘까, 이게 뭘까, 이게 뭘까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잃어버린 “당신이 거인이 될 때까지,” “당신이 내 먼 미래에 닿을 때까지, 꿈을, 꿈을, 꿈을” 꾼다고.(「1914년」, 같은 책, 72쪽)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도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일이겠다. 몇십 년 아니, 몇백 년 정도로 시간의 범위를 늘려 생각해본다면 죽음으로 인한 헤어짐은 지금 잠깐 벌어진 일일 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는 오늘을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오늘을 통과해 내일로 이행함으로써, 오늘을 져버리지 않고 씩씩하게 먼 훗날에 가닿음으로써 그 사람이 먼저 당도한 곳에 도착할 수 있다. 보고 싶었던 그와 떳떳하게 마주할 수 있는 그곳에서 그의 얼굴을 만지고 또 살아 움직이는 그를 안을 수 있다. 먼 미래의 일이라도, 어쩌면 먼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미래는 오늘의 일부분이 된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살기 위해 가지는 지극히 당연한 마음. 허황한 기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


   「그러나」는 『1914년』의 두 번째로 배치된 까닭에 그 바로 앞 순서에 있는「1914년 4월 16일」의 자장 속에서 읽히는 시다. 왠지 시에 등장하는 ‘나’가 ‘1914년 4월 16일’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말하던 ‘백 년 전 사람’처럼 여겨진다. ‘나’는 백 년 전 사람으로서 당연히 백 년 후 사람보다 앞장서서 나아가는데, 그렇다고 해서 매정하게 앞만 보고 가지 않는다. “뒤돌아” 서서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살핀다. 



   뒤돌아서는 순간, 그러나 


   내가 너와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을까. 


   너의 등을 볼 수 없는 세계로 발을 떼는 순간, 눈앞에는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


   네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그러나 내가 죽은 사람과 거의 다르지 않다면 망자의 기억을 나누어 가진 사람이 모두 망자와 거의 다름없는 세상,


   그러나 어렵지 않게 버스를 탔고, 어렵지 않게 식당과 화장실을 찾았고, 어렵지 않게 건널목을 건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혹처럼 태양을 등지고 네가 내 앞에서 걸어오고 있다, 내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하며 나는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


   거대한 화농이 터진 듯이 이 세상은 무섭도록 아름답다 


   - 김행숙, 「그러나」 전문, 『1914년』(현대문학, 2018) 10~11쪽 



   “존재하지 않는” ‘너’가 ‘내’ 뒤에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언젠가는 뒤돌아서서 ‘너’와 마주할 수 있는 방향인 “너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자 한다.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향한 ‘나’의 발걸음은 ‘내’ 뒤를 따라오는 “너”와 무관한 방향이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나아간다(“어렵지 않게 버스를 탔고, 어렵지 않게 식당과 화장실을 찾았고, 어렵지 않게 건널목을 건넜다”). 이렇게 가다 보면 지구의 둥근 둘레를 따라 ‘나’는 ‘너’의 등이 보일 때까지 가게 될 테고, 이때 “태양을 등지고 네가 내 앞”으로 걸어오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 “내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너”라는 그 이유로 “나는” 얼마든지 “똑바로 걸어”갈 수 있다. 내내 “너”를 떠올림으로써 “나”는 지금의 삶을 “똑바로” 꾸릴 수 있다. 살아 있는 채로 망자의 기억을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이에게 “이 세상은” 끝까지 “무섭도록 아름답다”. ‘너’를 잃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자신을 책망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너를 존재하지 않게’ 만든 세상에 그냥저냥 묻히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살아가겠단 다짐이 오늘의 감각을 이토록 생생하게 만든다. 


*


   이 글의 제사(題詞)로 삼은 인터뷰에서 장훈 님은 ‘하지만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일은 뭘 해도 생길 수 없’다고 말을 잇는다. 단지 ‘나 같은 불행한 유족이 다시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자신은 연구소 일을 할 수밖에 없으며 10년 전 떠난 아이 ‘준형’도 그걸 바랄 것이라고. 참사가 벌어지기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바뀐 이의 명확한 현실 인식 속에서 ‘그런 일’은 ‘생길 수 없는’ 일로 설명되었지만, 지금 나는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고 얘기하고 싶어진다. 그가 하는 일의 근거가 ‘10년 전 떠난 아이’의 바람을 짐작하면서 마련되었으므로, 지금 그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해 꺼내어진 모든 말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일’과 마냥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불가능한 일은 삶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이를 위해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건너뛰는 것과 같은 기상천외한 대안이 소환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먼 후일 “태양을 등지고” “내 앞”으로 올 사람을 안아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오늘을 “똑바로” 살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 단지, 그것. 시간의 미로를 두려워 않는 것. 어떤 삶은 먼 훗날을 예비한 만남을 기대하면서 이어진다. 기다림은 삶의 형식이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엄마는 말했다. ‘아버지한테 아이와 아이 아빠를 만나면 잘 지냈는지 물어봐달라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따로 말씀 안 드렸어도 그렇게 하시겠지?’라고. 그날 나는 “무한히 자라”나는 “시간의 길”을 따르라는 (「시간의 미로」, 『1914년』 현대문학, 2018, 95쪽) 시의 당부가 유난히 사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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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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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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