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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요, 언제나요.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285

[에세이]


   자라요, 언제나요. 


권여름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나는 장편소설 초고를 쥐고 있어야 했다. 지난겨울,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의 처음, 중간, 끝이 있었다. 그걸 바탕으로 처음 몇 줄을 썼다. 시작이 반이니 이미 절반을 쓴 것 아니겠냐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다녔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묻어 있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그전보다는 빠르게 장편소설 한 편을 뚝딱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편소설을 쓰는 데 장애물이 없겠냐만, 무엇을 만나더라도 씩씩하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일렁였다. 막 두 번째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고무된 소설가의 자기효능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더욱이 내게는 겨울 방학이 있지 않은가. 성긴 시놉시스를 촘촘하게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초고를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 장편소설 출간 직후 크고 작은 일정도 서서히 마무리되면서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으니 타이밍이 좋았다. 온 우주가 나의 세 번째 장편소설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호기롭게 세 번째 장편소설을 시작하려던 겨울 방학, 두 돌짜리 조카아이가 우리 집에 왔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겨울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안해하는 동생 부부에게 아기의 짐을 건네받으며 나는 소설 쓸 시간을 계산했다. 순둥이 조카아이는 꼬박꼬박 낮잠을 자고, 저녁이 되어 8시 30분에 씻기면 바로 잠이 든다고 했다. 아이의 낮잠 시간과 저녁 9시 이후를 활용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이를 재우며 나도 함께 스르륵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카와 잠들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 온전히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조카아이가 잠든 사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기 전용 세제로 옷을 빨고, 젖병을 씻어야 했다. 아이가 여기저기에 숨겨 놓은 물건을 찾아 제자리에 놓으며 청소도 했다. 재채기 한 번에 아이의 코에서 누런 콧물이 입술까지 내려온 날부터는 더 분주해졌다. 아이는 밤에 통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 깨어나 울었다. 주먹만 한 작은 얼굴 어디에 이렇게 많은 콧물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소아청소년과 병원의 대기 시간이 그렇게나 길다는 것, 예약 앱이 따로 있다는 것 등 새로 알게 된 것투성이였다. 아이를 낳고 길러낸 나의 자매들과 동료, 친구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나는 조카들이 많다. 특히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초등생 조카들은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고, 금요일은 대부분 우리 집에 와서 잔다. 조카들이 우리 집에 오지 않을 때는 내가 자주 놀러 간다. 주변 친구들은 나를 ‘조카 바보’라 부르며 나의 조카 사랑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한 발 떨어져 그들을 지켜본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이틀 놀아 주는 것과 함께 지내며 먹이고 돌보고 재우는 일은 차원이 달랐다.

   겨울 방학을 꽉 채우고, 2월 27일에 조카아이는 무사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함께 양육을 담당한 막냇동생과 나는 다짐을 했다. 앞으로 어디 가서 시간 없다는 소리를 하지 말자고 말이다. 그건 진심이었다. 아이를 길러낸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고 동생과 나는 입을 모아 말했다.

   조카를 보내고 얼마간 꽤 허전하고 울적했다. 그동안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찍어냈다. 하지만 서운한 만큼 가뿐하기도 했다. 이제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며칠 뒤면 개학이었다. 직장 일과 소설 쓰는 일을 병행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음에도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내게는 루틴이 있으니까. 심란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동안 출근 전 새벽에 글을 썼다. 새벽 4시에서 7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오롯한 쓰기 시간이었다. 개학 직전, 수첩에 집필 계획을 써내려가며 초등생 조카들처럼 내뱉었다.

   “좋아, 가보자고!”


   그러나 겨울 방학 동안 가동을 멈춘 루틴에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출근 전 쓰는 그 루틴은 차로 4분 거리의 학교에 출근할 때의 루틴이었다. 올해 3월 새로 발령받은 학교는 40분 넘게 운전해서 도착할 수 있는 인근 도시에 있었다. 출근 소요 시간을 감안해 일단 아침 쓰기 시간을 1시간 줄이고, 추후 적응이 되면 1시간 일찍 일어나 원래대로 최소 3시간은 책상에 앉아 있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 자신과 타협했다. 

   ‘인간적으로 개학 첫 주는 좀 쉬고.’

   그랬던 것이 3월 내내 새벽에 눈을 뜨지 못했다. 새 학기, 새 학교, 거기에 더해 한 번도 맡지 않았던 새 업무에 적응하는 일은 꽤 고되었다.

   “나,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이런 말을 쉽게 내뱉으며 주변 친구들에게 징징대기까지 했다. 목적어도 없이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하면 어떤 이는 직장을 또 어떤 이는 소설을 떠올리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새로 맡은 업무에서 3월은 그야말로 공문의 계절이었다.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물건 내려오듯 차례차례 쉴 새 없이 공문이 내려왔다. 내 업무처리 능력으로는 야근을 해야 겨우 마감 기한을 지킬 수 있는 정도의 속도였다.

   겨우 기한에 맞추어 결재를 올리고, 마감 기한 순으로 적어 둔 공문 리스트 중 하나에 힘을 주어 가운뎃줄을 그었다. 어두운 학교 주차장에 홀로 서 있는 차에 올랐다. 집에 도착해 늦게라도 봐야 할 다음날 수업 자료를 조수석에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 30초의 예열 시간도 아까워 시동을 걸자마자 액셀을 밟고 핸들을 돌렸다.

   뻑뻑해진 눈을 가늘게 뜨고 집을 향해 달리다 보면 직장 일의 이런저런 걱정은 조금씩 옅어지기는 했다. 대신 그 자리에 다른 상념이 자리 잡았다. 몇 줄 시작만 하고 멈춘 나의 세 번째 장편소설. 그것의 마감 기한이 떠오르며 순간적으로 아뜩해진다. 감사한 마음으로 수락해 버린 다른 계약들도 덩달아 떠오른다. 이번 장편소설이 멈춰 있다는 건 앞으로 내가 써야 할 다른 장편소설들도 차례로 같이 멈춰 있다는 걸 의미했다. 나의 멈춤과 상관없이 시간은 충실하게 흐르고 있고 말이다. 심란함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를 달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솔직히 3월은 어쩔 수 없잖아. 4월부터 시작하자.’


   4월이 되자, 드디어 공문이 좀 줄었다. 대신 출장이 늘었다. 출장을 가려면 나 대신 수업을 해줄 선생님을 찾아 수업 교체를 부탁해야 한다. 수업 교체를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전 교사 시간표의 빈칸을 찾는다. 겨우 찾아낸 동료에게 미안해하며 수락을 구한다. 비슷한 처지에 다들 흔쾌히 수락하지만 나 때문에 1, 2, 4교시던 수업이 1, 2, 3, 4교시 연강이 되어버린 동료에게 허리가 절로 깊게 수그러진다.

   한낮의 주차장이 낯설다. 아까 수업 교체 때문에 미안했던 마음, 출장 후 줄줄이 보강해야 할 수업, 책상에 쌓아 둔 일들은 잠시 잊기로 한다. 밤이 아닌 봄날의 한낮에 차에 오르자 묘한 해방감에 가슴이 일렁인다. 어쩐지 엔진이 시원하게 걸린다. 

   ‘교권 침해 관련 업무 담당자 연수.’ 출장지 강단에 걸린 문구를 보자 잠시 시원했던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수의 마지막에는 교권 침해 사안 보고서 쓰는 법을 배웠다. 상해와 폭력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강사가 물었다. 상해라는 말은 신체의 생리적 결함이 생겼을 때 쓸 수 있다고 강사는 말한다. 신체 접촉을 하였더라도 생리적 문제에 결함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것을 상해라고 쓰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폭력의 경우는 달랐다. 신체 접촉을 하지 않았어도 눈앞에서 물건을 던지거나 때리는 시늉만 해도 폭력에 해당한다. 이 날 강사가 힘주어 한 말은 놀랍게도 ‘판단하지 말라’는 거였다. 신고 대상의 행동이 ‘과격했다’, ‘위험했다’, ‘불손했다’라고 판단해서 쓰지 말고, 구체적인 행동을 쓰라는 거였다. 그것은 마치 소설 쓰기 수업 같기도 했다. 설명하지 않고 장면으로 보여주라던 수업 말이다.

   사안 보고서에 들어갈 단어를 함부로 쓰지 말 것도 강사는 당부했다. 예를 들어 협박이라는 한 단어를 보고서에 쓰려면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널 해치겠다’라는 말을 백 번을 해도 그건 협박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해치겠다는 명확한 고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두세 음절밖에 되지 않는 한 단어는 이렇게 몇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뒤에나 지면에 쓸 수 있었다. 그동안 내게 허락된 소설 지면에 흩뿌려진 나의 단어들을 떠올렸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진다.


   출장이 끝나고 퇴근길에 초등생 조카네 집에 갔다. 초등학교 2학년인 조카가 미술 시간에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작은 그림책을 수줍은 표정으로 내게 건넨다. 양면이 펼쳐진 책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내민 앙증맞은 두 손바닥 같다. 아기 씨앗이 좋은 이웃들을 만나 싹을 틔우고 조금씩 조금씩 자라는 이야기. 어디서 본 것 같은 구성이긴 하지만 고사리손으로 정성을 들인 그림과 또박또박 써낸 문장이 사랑스럽다. 감탄하며 책을 덮자, 조카는 고개를 젓는다.

   “아직 안 끝났는데, 이모?”

   뒤표지에도 글이 있었다.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문장. 그것에 오래 눈길이 멈춘다. 

   ‘우리는 숙숙 자라요, 언제나요.’

    조카는 된소리를 아직 혼동해서 쓴다. 아마 ‘쑥쑥’을 쓰려던 것이겠지. 혹시나 하여 어학사전을 찾았지만 ‘숙숙’은 없었다. ‘쑥쑥’보다는 천천히 그러나 제법 분명하게 자라는 모양새 같다. ‘우리는 숙숙 자라요, 언제나요.’ 내가 이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또박또박 읽었다. 

   “너무 멋지다. 이모는 이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들어!”

   내 말에 조카가 환하게 웃는다.

   한참 초등생 조카들과 노는데 영상통화가 왔다. 저녁 8시쯤 울린 영상통화 알림음에 조카들이 반색하며 내 휴대전화 앞으로 몰려든다. 군산에서 잠시 지낸 그 두 돌짜리 아이. 겨울 방학 동안 정이 더 담뿍 들어버린 덕에 사촌동생과의 영상통화는 쟁탈전이 된다. 조카아이는 그동안 눈에 띄게 자랐다. 신기하게도 아이 입에서는 완성된 문장이 나오고 발음도 명확해졌다. 한참 영상통화를 하던 중 아이의 한마디에 모두가 ‘꺅’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이모,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집으로 돌아가는데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어느새 자라 그림책을 만들어 보여주는 초등생 조카도,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 문장을 뱉는 세 살 아이도 사랑스럽다. 우리는 자라요, 언제나요. 아까 그 문장을 내 입술에 얹는다. 나도 언제나 자라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지금껏 언제나 자라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돌 조카의 기저귀를 갈던 순간에도, 조카아이가 내 이마에 자기의 작고 따뜻한 이마를 대던 순간에도 말이다. 공문을 발송하고, 상해와 폭력을 구분 지으며 미간을 찌푸린 출장지의 시간에도. ‘쑥쑥’은 아니어도 ‘숙숙’. 

   덩달아 내 안의 이야기도 조금씩 언제나 자라는 중이라는 믿음. 이 멈춤의 시간이 실은 자라는 시간일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이 시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겨우내 방에 있던 컴퓨터를 베란다 책상으로 옮겼다. 5월 첫날이 되어서야 올해 들어 처음 새벽에 눈을 떴다. 봄인데도 밖이 어둑하더니 세수와 양치를 하고 의자에 앉는 사이 금세 날이 밝았다. 베란다 창을 열자 공기가 제법 차다. 평소에 잘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들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컴퓨터 전원이 켜진다. 한글을 열자 흰 종이 바탕에 검정 커서가 깜박인다. 

   자판을 두드리지 못하고 커서를 노려본다. 커서는 멈출 생각이 없다. 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흘러가는 시간 같다. 아무래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출근할 것 같다. 커서의 리듬을 재촉이라고 여기지 않기로 한다. 엔진 부품의 마모를 막기 위해 자동차의 예열이 필요한 것처럼. 내게도 예열이 필요한 것이라고 나 자신을 다독인다. 깜박이는 커서에 맞춰 읊조린다. 우리는 자라요, 언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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