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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이야기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491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는 반려곰인형만 봐도 아무래도 아무 느낌이나 감정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무척 긍정적인 느낌으로 나의 수호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반려곰인형이 도깨비가 된다 한들 혹부리 영감의 혹을 떼어 준 도깨비들과 비슷할 것이란 느낌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세상에는 유독 나쁜 도깨비들이 더 알려진 기분이다. 친구와 나의 경험도 어쩌면 ‘나쁜 도깨비’ 같은 경우일 텐데 아무래도 좋은 사람들보다는 나쁜 인간들을 마주치는 경우가 이 세상에는 더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가령 이런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 누군가처럼······.

   영화 〈메이 디셈버〉에는 대변이 주기적으로 배달되는 집이 등장한다. 그걸 받아든 부부는 놀라지도 않고, 당연한 듯 쓰레기 비닐을 가져와 버리고 또 소독약을 꺼내든다. ‘이전보다는 자주 오지 않아요.’ 놀란 손님에게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그런 취급은 익숙한 사람들. 손님의 눈에는 이들 부부의 모든 행적이 그저 낯설고 수상하기만 하다. 이 부부가 서로 껴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도, 이들 부부의 자식들이 여느 집 아이들처럼 적당히 짓궂고 적당히 약삭빠를 때도, 이들 부부의 이웃이 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 달라고 하는 것마저도······. 이 손님에게는 그저 모든 게 이상하고 기이하게 보일 뿐이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남들과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대부분 이들의 이면을 먼저 떠올리니까.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거야. 뭔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아주 깊은 속내에서 나오는 이런 마음. 나이 차가 많은 커플을 뜻하는 관용구 ‘메이 디셈버’란 제목대로 이 부부 또한 나이 차가 아주 많은 커플이다. 그리고 이들 부부를 찾아온 손님의 정체는 이들 부부를 모티브로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아내 역을 맡을 영화배우다. 당연하게도, 아무 사연 없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영화화 될 리 만무하다. 이들 부부는 아내가 36세에 서로 처음 만났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도 아니다. 요즘 누가 연애에 나이를 따지겠는가.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가 심상찮다. 13세. 그렇다. 36세의 여교사와 13세의 학생. 이들 부부는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감옥에 있었다. 이들 부부를 찾은 손님, 이들 부부에게는 여배우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는 처음 그들을 만나고는 약간은 당황스럽고 조금은 불쾌한 기분까지 느낀다. 환하게 웃고 있는 감옥에서의 사진을 보면서 엘리자베스는 애인에게 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인 것 같다며 험담까지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끔찍이 사랑하는 엘리자베스는 아내 그레이시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기세다. 점차 그레이시에게 일치되는 듯 위태로워 보이는 엘리자베스. 어느 날엔 그레이시가 나가는 꽃꽂이 클래스까지 쫓아가 함께 꽃꽂이를 하며 그레이시에게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으냐고 묻고, 그레이시는 자신은 과거 일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엘리자베스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이후 그레이시의 전남편과 사건의 변호사, 그레이시와 전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차례로 만난다. 엘리자베스가 너무 그레이시 같다고 말하는 그레이시의 전남편. 생각해보면 그가 그레이시에 대해 좋은 말을 할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그레이시처럼 화사하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에게 엘리자베스는 웃어 보이며 최대한 다정하게 대한다. 그러면서도 그레이시에게는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숨 막혔을 거라며 위로하는 듯 말을 건네는 엘리자베스.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그레이시는 누굴 만나든 상관없지만 왜곡하진 말아 달란 식으로 부탁하고 엘리자베스는 당연하다는 듯 응답한다. 하지만 당시 담당 변호사를 만난 엘리자베스는 그로부터 ‘그녀가 이웃들에게 주문 받아 파는 케이크 목록은 전부 아는 사람들’이라며 그녀가 진정 행복한지 잘 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레이시의 첫째 아들이라는 사람은 한술 더 떠서 그레이시에게 숨겨진 트라우마가 있을 거라는 말을 흘린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점차 만족감으로 물든다. 혼란스러워하거나 고민하는 표정이 아니다. 행보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해서 곧 졸업하는 그레이시의 딸의 졸업식에 입고 갈 옷을 고르는 데까지 따라가는 등, 이제는 일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진 사람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 애매함에 기름을 붓는 사람이 바로 어린 남편인 조다. 조는 한국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고 열네 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다. 조는 자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버지이자 그레이시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남편으로 보인다. 예약이 취소된 케이크 때문에 일정을 망쳤다고 우는 그레이시를 달래기도 하고, 아이들과는 허물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레이시에게는 반발하던 아이들도 조는 한없이 가엽게 바라본다. 그러나 조는 핸드폰 어플리케이션으로 끝없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바람을 피우고, 아이들 앞에선 흡연 한 번 안 해본 쑥맥처럼 굴지만, 아버지 앞에선 맞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운다. 물론 그를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이제 그의 나이는 고작 서른아홉이다. 아무리 그가 어른스러웠다고 한들 열네 살에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교사와의 사랑에 충분한 생각을 하고 선택을 했을 거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이 작은 균열들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더 만족스러워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영화 회사에서 그만 돌아오라고 할 정도로 배역이 아닌 현실의 그레이시가 된 듯 그들의 삶에 점점 깊이 관여한다. 

   세상에 분명하게 옳고 그르다 판단할 수 있는 게 몇이나 될까. 특정 범죄를 제외하고 우리 일상에서 그걸 가를 수 있는 건 정말 흔하지 않은 일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운 일이다. 일단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그렇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설 쓰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를 하고 자료 조사를 하면서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듣는 게 아닐까 싶다. 쓰는 사람의 자리에 만족하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거다. 마치 사물에 혼령이 깃들어서 결국 그 사물이 자기 자신인 줄 알고 욕심 부리는 도깨비처럼 말이다.

   극중 엘리자베스는 어느 순간 선을 넘은 사람이 되어 간다. 그레이시의 딸의 학교에 찾아간 엘리자베스가 특강을 하는 장면에서 그것은 좀 더 여실히 드러난다. 어떤 기준으로 배역을 정하느냐는 학생의 물음에 엘리자베스는 착한 인물보다는 나쁜 인물에 끌린다고 답하고, 그 말에 이상함을 느낀 그레이시의 딸은 좋아하는 인물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던진다. 이미 자신의 답에 스스로 취해 버린 엘리자베스는 ‘지금까지 주목 받은 인물들이 모두 악인’이었음을 말하고, 여태 자신의 부모의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는 것에만 즐거워하던 그레이시의 딸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심지어 가족 모임까지 참석한 엘리자베스에게 큰딸은 이 행태가 너무 우습지 않냐고 경고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애써 모른 척 무마한다. 아니, 오히려 딸들이 그런 걸로 그레이시와 반목할수록 좋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서 이미 이 가족은 와해되어 있었고 조는 사랑 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중이며, 그레이시는 사랑을 넘어선 집착 가득한 여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실제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그레이시는 가끔 도가 넘은 슬픔에 젖기도 하고, 당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피하는 데다가 아이들이 자신보다는 조를 가엽게 여기는 것에 심란함을 표출하기도 한다. 조 또한 어느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아이들의 졸업식에서 과할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조의 모습은 단순히 아이들이 떠난 아쉬움만은 아니다. 엘리자베스에게 확신을 주는 건 그레이시의 첫아들이다. 그는 그레이시가 사실 어릴 적부터 오빠들의 학대를 받고 자랐다고 귀띔하며 이 모든 정보를 제공할 테니 자신을 음악감독으로 써달라고 말한다. 과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엘리자베스는 이미 자신이 그레이시의 모든 걸 다 알고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조와 잠자리까지 ‘경험’한 엘리자베스는 조에게 진짜 인생을 찾으라는 조언까지 한다. 조는 그제야 그녀가 연기를 위해 자신을 경험하고자 했다는 걸 깨닫고 상실감에 자리를 뜬다. 영화의 말미, 아이들의 졸업식으로 그레이시를 찾아간 엘리자베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선글라스를 끼고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선 상황, 그레이시는 묻는다. “나를 이해했나요?”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그렇다, 라고 답한다. 순간 그레이시는 그런데 혹시 첫째 아들의 그 거짓말을 설마 믿냐고 묻는다. 왜 늘 그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한 두 번이 아니고 그것은 순전히 거짓일 뿐이라고. 사실 영화 중반 엘리자베스가 변호사를 만났을 때 변호사는 이미 첫째 아들이 조금 불안정하다는 걸 말한 바 있다. 그레이시의 말에 선글라스를 낀 엘리자베스의 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얼굴은 당혹으로 일그러져 간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는 생각이 바뀌었을까. 글쎄, 엘리자베스의 속내 또한 조와 그레이시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니 모두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엘리자베스는 적어도 배우로서는 이미 자기 확신을 넘어 자신이 배역을 지배했다고 믿는 도깨비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레이시의 역할을 연기하는 엘리자베스는 감독이 충분하다고 말하는데도 한 번만 더 해보겠다고 말한다. 마지막 대사는 간절함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진짜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고요. 한 번만 더요.”

   이 영화를 보면서 내 마음 또한 사실 많이 복잡했다. 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서 단순히 괴물 같은 도깨비가 아닌 그 이상을 봤기 때문이다. 

   “혹시 작가님은 보시고 계신 자료와 앞으로 펼쳐질 전개가 잘 맞지 않아서 자료를 고치고 싶으실 때 없으세요?”

   언젠가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SF나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체 역사물을 쓰는 게 아니고 실제 있는 역사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일에 직면할 때가 많다. 나 역시 극중 엘리자베스처럼 가끔은 내 인터뷰이가, 내가 본 자료가 ‘이러이러하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분명히 있다.

   무당과 배우와 도깨비와 소설가를 뒤섞여 생각한 날, 나는 타인과 공감하며 타인의 어려운 점을 오히려 들어 주는 K도깨비가 되는 건 너무나 어려울까, 이런 생각을 해봤다. 뭔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교감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런 도깨비 이야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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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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