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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의 현장성: 2020년대 어린이-현실을 수용하기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1,264

[비평 / 2022년 문학비평활동지원사업 선정작]



동시의 현장성: 2020년대 어린이-현실을 수용하기



김준현




높은음자리의 어린이-낮은음자리의 현실


언니들이 눈짓으로 말해요
입술을 벌리지 않고 말을 해요


그러다 심장이 꺾일 듯 방바닥을 뒹굴며 웃어요
웃겨서 못 견디겠다는 듯 울면서 웃어요


마루가 웃어요
벽시계가 웃어요
꽃무늬 이불이 막 웃어요


나도 웃어요
세상에서 제일 큰 소리로 웃어요
십이지장이 다 환해지는 웃음을 웃어요


-최휘, 「세상에서 제일 큰 웃음」부분 (『 여름 아이』(문학동네, 2022))


변성기 이전 어린이의 목소리는 음역대의 한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에서 제일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는 존재, “십이지장이 다 환해지는 웃음”이 가능한 존재는 언제나 어린이다. 그러나 어떤 소리라도 타인의 삶-생활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어른에 의해 제한받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어른의 현실은 기본적으로 낮은음자리에 가깝다. 이를테면 이제 조용히! 아랫집에 들리니까 쉿, 복도에서 울리니까 쉿, 아빠 중요한 전화통화 중이니까 쉿, 영화관이니까 쉿, 버스니까 쉿, 엘리베이터에서는 쉿, 공공장소니까 쉿! 적어도 어린이에 한해서는 떠들썩한 목소리보다는 단정한 목소리로 말하거나 차분히 침묵을 지키는 게 모두를 위한 평화와 안정에 더 가깝다고 믿는 것이 어른들인 것 같다. 그렇게 어른은 어린이가 양껏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축소시키는 과정을 통해 현실의 규율과 제약을 대변한다. 그것이 예절이니까. 사실 어린이가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있는 시공간은 아파트나 공원에 딸린 손바닥만 한 놀이터 정도가 전부이며 그 외에 굳이 찾자면 키즈카페나 놀이공원, 노래방과 같은 공간이 있지만 이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은 모두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다. 이렇듯 어린이의 소리가 소음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현실의 반면에서 어른의 발화 행위는, 적어도 ‘의미’의 측면에서 그 자율성과 가치를 존중받게 마련이라 타인이 쉽게 강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어른은 이미 장소와 시간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해야 한다는 ‘상식적 사고’가, 일종의 미덕으로서 내면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빽빽한 지하철 안에서는 저마다 에어팟이나 버즈, 이어폰을 귀에 낀 채로, 고개를 숙인 채 폰의 액정화면 속에서 손가락 끝으로 조용히 소통할 줄 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럴 수가 없잖아? 그러니 어른의 보호가 필요하지.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지, 라는 생각은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다.)
도로 위 노란 표지판에는 ‘어린이보호구역’이 적혀 있고, 거기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멋진 카페의 입구에는 ‘노 키즈 존’(NO KIDS ZONE)이라고 적혀 있다. ‘어린이보호구역’과 ‘노키즈’존. 일종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단어는 그러나 별다른 긴장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채 잘 공존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두 단어가 모두 ‘보호’라는 동일한 명목-명분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너희를 위한 거란다’ ‘너희 인생을 위한 거란다’ 물리적 보호가 아니라 가치관의 주입 및 내면화를 종용하는 이런 말들-거의 항상 위선에 가까운 말이었음이 들통 나고 마는, 이런 어른의 말들이 적어도 아직 자신의 말을 통해 자신과 타자에 대한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넓고 멋진 외관의 카페에 갔는데 NO KIDS라는 대문자의 거부의사를 마주했을 때. “그런데 여기가 왜 노키즈존이에요?” 라고 묻자 “1층은 괜찮아요. 2층은 아이가 난간이 있어서 위험해서 그래요. 저도 아이 키우는 걸요.”라는 대답. 그럼에도, 단어에 민감한 시인은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찝찝하다. ‘어린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어린이’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NO라는 수식이, 항상 우리의 미래라고 부르는 어린이(KIDS)에 대한 역설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예민한 탓일까?
아이와 갈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한정적이다. 소리를 최대한 낮춰야 하는 공간에는 아이와 함께 가기가 힘든데, 대부분의 공공장소가 그렇다. 모든 넓이가 자본으로 치환되는 현실에서, 아이가 마음껏 소리 지르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넓은 공간은 늘 부족하다. 어린이의 행위 중 상당수는 타인의 삶을 침범한다는 우려에 의해 제재를 받게 마련이고 부모가 이를 잘 통제하지 못할 경우 감정 섞인 시선(연민이든 비난이든 심지어 분노든)을 받게 마련이다. 아이의 활동공간이 점점 게토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적어도 이제야 자기표현의 욕구를 드러낼 나이인 아기들에게 조금 더 관대한 눈빛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그래서인지 아이를 환대하는 시선, 바람직한 육아에 골몰하는 부모를 응원하는 이들의 시선은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다.
-졸고, 영남일보 문화산책 5.9 칼럼 <어린이를 위한 정치>


자기 삶의 주체임에도 자기 삶을 이끌어가기 위한 실질적 행위를 담보하는 이가 어른이 될 때, 어린이는 어쩔 수 없이 대상의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탄생의 순간 한껏 높은 목소리로 울었던 그 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진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우리는 놀이터에 모였어요


별도 죽는 거야?
바람이 서늘했어요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거야
지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죽으면 어디로 가지?
봉희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우리는 둥그렇게 앉은 원을 더 좁혔어요
발바닥 저 아래서 죽음이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그때 갑자기 그네가 삐그덕 흔들렸어요
나는 봉희를 와락 껴안았어요


우리는 집으로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어요
골목을 뛰어갈 때 자귀나무 이파리가 귀신처럼 흔들렸어요


-최휘, 「여름, 죽음」 부분 (『 여름 아이』(문학동네, 2022))


아동문학-특히 동시가 죽음을 다루는 경우 ‘나’와 가까운 타자의 죽음은 곧 애도의 형식으로 연결되고, 회상에 기대 죽은 대상을 추억하거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그 강렬한 정서-파토스로 인해 ‘나’의 자의식이 강해지거나 세계관이 뒤흔들리거나 하는 경험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주체의 발화가 작품 전면을 덮어버리다 보니 ‘죽음’에 대한 다각도의 의문이 발생하는 지점을 짚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휘의 「여름, 죽음」은 “친구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지예” “봉희” “나”가 저마다 죽음에 대해 느끼는 감각을 문답의 형식으로 풀어나가면서, 각자 발화를 분담하면서, 곧장 애도로 이어지는 전개를 지연시키며, 보다 천천히 ‘죽음’을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핍진성을 획득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높은 목소리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 “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어린이들의 음역대는, 그들이 있는 곳이 공공장소여서도 아니고 어른이 강제해서도 아니다. ‘죽음’이라는, 보다 어른의 삶과 밀접하다고 여겼던 관념이 감각으로 전환되는 ‘충격’의 순간이어서다. “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 “죽으면 어디로 가지?” 뒤에는 그 누구도 답을 붙일 수 없음-즉 어른조차도 뚜렷한 근거를 대고 대답할 수 없는 이 당연한 의문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유대-연대로서 “둥그렇게 앉은 원을 더 좁”히는 행위는 소중하고 애틋하다. 서로의 존재가 자기 삶을 확인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 “나는 봉희를 와락 껴안았어요”는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이며 ‘슬퍼하는 몸의 두께’1)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나’는 ‘타자’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정황을 함께 읽은 우리 독자는 그 ‘나’가 실재하는 어린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한다.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어린이. 이것이 동시의 설득력이다. 선언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즈음의 동시를 나름의 애정으로 읽어온 한 독자로서 미약한 목소리로나마 선언하자면, 이제 동시는 더 이상 낭만적 풍경이나 말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세계, 교훈, 전언, 메시지로 치환되지 않는다. 이제 동시는 현실을 말한다. 아니, 이제 동시는 현실이다.


1) 어린이들은 슬픔과 아픔을 어떻게 말할까. 그들의 슬픈 언어를 위해서는 슬퍼하는 몸의 두께를 옮길 번역가가 필요하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입술로, 들먹이는 어깨로, 걷어차는 두 다리로 말한다. 이 비통함을 평평한 말로 옮기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라고 부른다.
김지은, <두툼한 슬픔> 경향신문 2022. 11.22자 칼럼 [숨] 중에서




어린이의 현실-어른의 현실: 여기, 지금, 가장 문제적인 지점에서


좀 오래 전에 나온, 카트(2014)라는 영화가 있다. 마트의 캐셔들이 겪는 불안정한 고용 현실을 고발하는 이 영화는 노조를 만들어 불합리에 대항하는 캐셔들-‘선희’와 ‘혜미’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루아침에 부당한 해고를 당한 이들은 마트를 점거하고 안에서 음식을 해먹고 소소한 연극도 하면서 기업의 횡포를 버틴다. 실제 파업 현장을 가감 없이 반영한 이 영화 속 노동자들은 회사가 마트 내의 전기를 끊어버리거나 시위의 중심인물을 유혹해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간교한 횡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며 자기 권리를 되찾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 ‘선희’와 ‘혜미’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그들의 가정-생계 유지. 더 구체적으로는 고등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의 삶을 지탱해야 하는 가장인 선희와, 역시나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 나이의 아이의 엄마인 혜미. 즉 이 아이들에게 부모는 절대적으로 양육자-보호자로서의 책임을 갖지만, 마트 야간근무까지 해가며 열심히 살아도 그 책임을 다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들의 현실은 뼈아프다. 그러나 내 눈에 더 오래 남은 것은 고군분투하는 ‘선희’와 ‘혜미’보다는 그들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의 현실은 영화의 주된 서사가 아니어서 드문드문 등장한다. 선희의 초등학생 딸은 집에서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지 못하고 라면이나 김을 먹고 있거나 거의 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고등학생인 오빠가 가끔 들여다보고 있으나, ‘잘 있는지’ 확인하는 차원이지 양육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등학생인 오빠는 이제 엄마 ‘선희’의 현실을 알게 되어, ‘엄마’의 곤란-생계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인 아들이 맞닥뜨린 이 현실도 녹록치 않다. 편의점의 점주는 아르바이트 급여를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떼먹으려고 한다. ‘어른’과 ‘미성년자’가 자본을 매개로 만날 때 발생하는 이 불평등에는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다. ‘혜미’의 아이는 더 어리고, 어린이집이 아니면 돌봐줄 사람이 없기에 아예 혜미와 시위 현장에 함께 있다. 즉 시위-파업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겪는 위험에도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함께 있는 어른의 현실은 언제나 고스란히 어린이의 몫이기도 하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동생이
숙제를 내민다


내 방 정리하기


“아빠 내 방은 어디야?”


한눈에 다 보이는 우리 집
방은 따로 없는데


아빠랑 나랑 붉은 담요를 펼쳐서
“네 방은 여기야.”


짠!
움직이는 마법의 방


동생은 이리저리 방을 끌고 다니며
방방 뛰어다닌다


-정지윤 「오늘의 숙제」전문 (『어쩌면 정말 새일지도 몰라요』(창비, 2019))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생존을 위협받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하면 살 만한 것인가? 매일의 끼니를 영양가 없는 인스턴트 음식으로만 해결한다는 것은 잘 살고 있지 않은 걸까? 집안형편으로 인해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을 다닐 수 없으면, 혹은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을 갈 수 없으면 그건 평균 이하의 삶인 걸까? 이토록 많은 질문은, 서글프게도, 생각보다 많은 어린이가 순간순간의 현실과 마주하면서 자문(自問)하게 되는 것들이고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간단한 한 문장 “내 방 정리하기”와 같은 숙제 역시 마찬가지다. 폭력이나 억압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즉 우리가 보편-공통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해 의심해 본 적 없던 한 문장 “내 방 정리하기”가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한 세상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생”의 질문 “아빠 내 방은 어디야?” 자기 몫의 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동생”의 현실은 곧 “한눈에 다 보이는 우리 집”이란 말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아빠랑 나”의 해결책은 “붉은 담요를 펼”쳐 “움직이는 마법의 방”이라는 ‘부정적 현실을 환상-우화로 전복하기’다. “동생은 이리저리 방을 끌고 다니며/ 방방 뛰어다닌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일단 “동생”은 숙제를 잘 마친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의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는 “동생”의 몫도, “아빠와 나”의 몫도, 동시의 몫도 아니며, 현실-구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아침부터 삼각김밥 먹는구나…….” 하신다.
삼각김밥 맛있는데?


“오늘도 컵라면 먹는구나…….” 하신다.
오늘은 참치마요 비빔면인데?


어느 날 저녁
컵라면에 삼각김밥 먹다가


오늘도 내가,
저녁에 내가,
삼각김밥 컵라면 먹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


삼각김밥 맛있었는데…….
컵라면 맛있었는데 …….


-송선미, 「삼각김밥 맛있었다가」 전문 (계간 《시와 동화》 2020년 여름호)


『오늘부터 배프! 베프!』 (지안 글, 김성라 그림, (문학동네 2021))라는 동화가 있다. 사랑스러운 내용이라서 괜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출판사 제공 책 소개만을 인용해 내용을 소개하자면 “급식카드를 처음 사용하게 된 아이의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섬세하게 그리되, ‘가난’이라는 틀 아래 아이를 가두지 않고, 학교에서 집에서, 가족 속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아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씩씩한 문장으로 그리”고 있는 동화다. 여기서도 아이들이 “컵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아이들의 삶을 평균적인 삶의 범주-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 혹은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은 언제나 “아침부터 삼각김밥 먹는구나…….” “오늘도 컵라면 먹는구나…….”에서 은폐된 어른의 심리-말줄임표의 자리에 있다. ‘아침부터’ ‘오늘도’ 같은 말은 이 어린이 화자의 식사 루틴을 일종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후의 저 여운 “……”이 함의하는 부정적 뉘앙스는 어린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급식 카드’로 살 수 있는 품목이 한정되어 있고, 군것질과 같은 것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무지한 배려와 꼭 닮았지 않은가? 게다가 이토록 확신에 찬, 자기 발화의 윤리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어른의 동정은 현실에서는 무력한 주제에 어린이에게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맛있게 먹는 일상을 재고하게 만들고 어린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평균적이지 않은 삶이라고 인지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어른이다. 어른들은 그렇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으로서, 그러니까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을 통해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힌다. “삼각김밥 컵라면 먹고있단 걸/ 알게 되었다”의 앎은 삶의 한 균열이다. “삼각김밥 맛있었는데……. / 컵라면 맛있었는데…….” 어린이는 이제 더는 맛있었던 음식-자신의 일상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어른의 배려 없는 말 한 마디는, 그래서 의도와 무관하게 어린이의 내면을 잠식하고 피폐하게 한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딩동 딩동
주문한 통닭이 왔다


타닥 타다닥 타다다닥
자판을 두드리며 통닭을 먹었다


휘이잉 휘잉
바람에 창문이 흔들려 다시 꼭 닫았다


부릉 부르릉
빗속에 통닭 오토바이가 달리는 걸 보았다


삐요 삐요 삐요 삐요
구급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현식 「태풍 오는 날」 전문 (『오늘도 학교로 로그인』 (창비, 2021))


나는 어떤 문장을 쓸 때 하이픈을 사랑해서 자주 쓰고는 하는데 특히 비평의 문장을 쓸 때 단어와 단어 사이를 잇는 하이픈으로 두 명사 간의 간격을 재고는 한다. 거기서 발생하는 어떤 긴장 관계로부터 많은 의미가 파생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단어만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발생하는 어떤 현실을 다른 단어가 받쳐주는 방식이다. 주체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족이나 친구, 선생님 등이 아니어도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타자가 존재한다. ‘치킨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닭을 키우는 사람과 유통하는 사람, 치킨을 파는 사람과 치킨을 배달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느슨하게,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안전한 자기-현실 안에 있고,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를 받”은 후 시킨 대로 외출을 자제한 채 “타닥 타다닥 타다다닥/ 자판을 두드리며 통닭을 먹”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모든 음성상징어(부르르르 부르르르 딩동 딩동 타닥 타다닥 타다다닥 휘이잉 휘잉 부릉 부르릉 삐요 삐요 삐요 삐요)는 기존의 많은 동시가 음성상징어를 통해 가독의 효과를 겨냥하는 것과는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우선 이 많은 알림-소리는 모두 어떤 사건이나 현실 이전에 발생하고 있는데, 삶이란 결국 의미에 선행하는 감각의 차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화자의 ‘뒤늦은 깨달음’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화자가 직접 대상에 대해 발화하거나, 우려나 걱정을 하거나, 어떤 교훈-메시지로 성급하게 도달하지 않고 정확히 ‘나’의 위치-시점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기에 독자는 ‘나’와 동일한 입장에서 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흔히 선경후정(先景後情)이 고전시가, 특히 한시에서나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기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 ‘선경’이란 독자와 함께 발맞춰 가기 위한, 작가와 독자가 동일한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배려의 장치다.



페미니즘 리부트-여자 아이의 목소리


진희가 머리를 잘랐어.
긴 머리에서 짧은 머리로 싹둑 잘랐어.
검은 야구모자를 쓰고 왔는데
그래선지 얼굴이 더 하얘 보여.


진희의 가늘고 긴 손가락과
한쪽 눈을 가린 앞머리가
진희가 자주 그리던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과 똑 닮아진 것 같아.


진희가 머리를 자른 일로
아이들은 자꾸 진희를 쳐다보고
무슨 일로 갑자기 머리를 잘랐는지
자꾸 진희에게 물어보는데


사실은 나도 자꾸 진희를 쳐다봐.
진희 주변에 일어난 일들이 아주 궁금해.
진희하고만 둘이 조용히 말하고 싶어
진희 근처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했지.


진희는 별말 없이 살짝 웃기만 했어.


진희가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와서
우리 반의 스타가 된 것 같아.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의 스타도.


-정유경, 「진희가 머리를 자르고 온 날」 전문 (『미지의 아이』(문학동네, 2021))




우리 엄마는 점점
아저씨가 되어간다.
머리가 짧아지고
수염이 나기 시작한다.
밥도 많이 먹고
방귀도 크게 뀐다.
목소리도 두껍고
욕도 잘한다.
벌레도 잘 잡고
가구도 잘 든다
예쁜 옷은 없고
바지만 많다.
자주 아빠 옷을 입어서
아빠가 둘인 것 같다.
예쁜 엄마가 좋지만
우리 엄마도 괜찮다.
천둥이 칠 때 같이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섭다.


-김개미, 「우리 엄마」전문 (『레고 나라의 여왕』(창비, 2018))


어린이들에게 외모-외형의 변화만큼 직접적인 것은 없다. 언제나 세계는 돌출된 시각적 이미지로 우리에게 밀려드는 법이다. 군 입대를 위해 한국의 남성들이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는 것처럼 어떤 규율에 의한 경우도 있지만, 외모의 획기적 변화는 언제나 내면의 변화로부터 연유한다는 생각은 이제 상식적인 것이 되었다. 삶의 어느 순간 자기-이미지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일종의 도약이며, 그 순간은 언제나 어떤 용기나 결의가 필요하기에 대개는 빛나는 것으로 인식된다. 정유경 시인의 「진희가 머리를 자르고 온 날」에 나오는 “진희” 역시 그렇게 보이는 아이다. “진희가 머리를 자른 일로/ 아이들은 자꾸 진희를 쳐다보고/ 무슨 일로 갑자기 머리를 잘랐는지/ 자꾸 진희에게 물어보는” 상황인데, 진희가 왜 머리를 잘랐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 ‘비밀’이 진희를 더 빛나게 하고 “우리 반의 슈퍼스타”로 보이게 만든다. 이 시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자리에 있는 화자인 “나”의 목소리가 도드라지는데, “우리”로 묶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말투로 보아 “나”는 “우리 반”의 선생님-어른 화자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 어른 화자가 ‘선생님’으로서 진희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진희”라는 매력적인 어린이의 팬으로서 “진희”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일반적인 어른-선생님 화자가 아니라 어린이와 1:1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스타와 팬의 관계라고 해야할까? 일종의 팬심이 몇몇 구절에서 넘치지 않게, 은연 중에 드러나고 있는 데서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의 스타도”) 주목할 부분은 “진희”의 외모에 대한 화자의 묘사다. “가늘고 긴 손가락과/ 한쪽 눈을 가린 앞머리가/ 진희가 자주 그리던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과 똑 닮아진 것 같”다는 언술. 우선 이 부분에 밑줄을 쳐두고 김개미 시인의 「 우리 엄마」에 나오는, 보다 표면화된 문장을 좀 더 읽어보기로 한다. 이를테면 “우리 엄마는/ 점점 아저씨가 되어간다”라는, 김개미 시인 특유의 현실을 돌파하는 듯한 목소리는 “머리가 짧아지고/ 수염이 나기 시작한다./ 밥도 많이 먹고/ 방귀도 크게 뀐다./ 목소리도 두껍고/ 욕도 잘한다./ 벌레도 잘 잡고/ 가구도 잘 든다/ 예쁜 옷은 없고/ 바지만 많다.”는 “우리 엄마”가 왜 “아저씨가 되어간다”고 말한 근거를 나열하면서, 어린이 화자가 지니고 있는 ‘아저씨’의 전형적 이미지를 환기한다. “예쁜 엄마가 좋지만/ 우리 엄마도 괜찮다” 여기서 “예쁜”이라는 말은 ‘여성으로서의 엄마’ 이미지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데, 화자는 그 맞은편에 “우리 엄마”를 놓고 “괜찮다”고 긍정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엄마”가 “아저씨”가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 화자는 담담하게 진술할 뿐, 부정적 뉘앙스로 말하고 있지 않다. 남성 질서에 의해 주입된 협소한 여성상 “예쁜 엄마”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은 “우리 엄마”의 자연스러운 생활상이다. 특정한 성 역할이나 구도에 갇히지 않은 “우리 엄마”의 삶으로부터, 어린이 화자는 보다 넓은 시야를 획득한다. 그리고 압권은 “천둥이 칠 때 같이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섭다” 여성/남성의 구도에서 남성에 의해 고착화된 여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든든하고 강인한 보호자로서의 면모다. ‘남성’이 전유하고 있던 든든한 보호자 이미지가 ‘엄마’의 것이 될 때 발생하는 이 낯섦은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한 과도기적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낯섦에 대한 긍정이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보다 진보적인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을 닮은 “진희” 역시 기존의 “긴 머리”가 대변하는 이미지의 밖으로 뛰쳐나온 아이다. “진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잘랐는지는 작품이 드러내는 정황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덕분에 독자는 보다 열린 해석으로 “진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남자 주인공”이라는 비유를 통해, 어쩌면 넓게는 “진희”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까지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놓았다. 혹은 “진희”와 같은 친구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고, 또다른 어떤 가능성을 꿈꿀 수도 있겠다. 말해지지 않은 부분-그러나 분명히 지금까지의 동시에서 볼 수 없었던 어떤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場)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부터 자기-현실에 대입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김개미 시와 마찬가지로 성공적이다.


-너는 빨강이니 파랑이니
-너는 빨강도 파랑도 아니구나


빨강과 파랑의 세계에서
나는 보라


빨강들 옆에선 파랑에 가깝고
파랑들 옆에선 빨강처럼 튀는


나는 보라


빨강과 손 잡으면 빨강보라
파랑과 팔짱 키면 파랑보라


빨강빨강보라였다가 빨강보라였다가
파랑보라였다가 파랑파랑보라였대도


보라는 보라


빨강 옆에서 빨강을 알게 하고
파랑 옆에서 파랑을 보여 주며


빨강과 파랑을 만드는


보라


-김유진, 「나는 보라」전문 (『나는 보라』창비, 2021))


세계적인 색채 연구소 팬톤은 2022년 올해의 컬러로 ‘베리 페이’라는 색을 선정했다. 파랑과 빨강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이 ‘베리 페리’(팬톤 17-3938 Very Peri)는 믿음과 일관성을 상징하는 블루와 에너지와 활기를 의미하는 레드를 섞어 이 색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전에 없던 팬데믹의 시기를 거치면서, 창의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인식하는 한 방식을 고민한 결과라는 것이다. “빨강”과 “파랑”은 기본적으로 대립항이며, N극과 S극을 나타내는 자석에서도, 온도 구분에서도, 성별 구분에서도, 심지어 음양을 나누는 태극 문양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이 둘 사이를 잇는 한 매개체로서, 제 3의 가능성으로서, ‘세 번째 사람’2) 으로서, “보라”가 등장한다. “너는 빨강이니 파랑이니”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전제하고 있는 이 질문이 우리에게는 우선 정치적으로 익숙한 질문이며, 대립하는 두 색 중 꼭 한 가지여야 한다는 폭력이 구조화된 현실을 표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보라”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는 화자 “보라”는 다른 가능성 하나를 제안한다. “빨강 옆에서 빨강을 알게 하고/ 파랑 옆에서 파랑을 보여 주”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보라”라는 말-일견 자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 문장의 반복이 그러나 자의식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보라”가 동음이의어로서, 자신 대신 대상 쪽으로 우리의 시선이 향하도록, 주목받는 자리를 양보하고 있는 말-‘look’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보라’ 가 아니라, ‘나는 보라’. 이 순간 서술어로 기능하는 것이 만약 보라(purple)인 동시에 보라(look)라면, 색채를 드러내는 명사인 동시에 단호한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동사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면 이 문장은 어쩔 수 없이 비문이 되고 비약적인 해석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구체적 현실이 아니라 평면-일차원 공간에서 색채를 의인화해 캐릭터를 부여하는 이 시의 독특함은 자꾸만 다른 가능성 하나를 더 발굴하게 만들고, 시를 의미의 중력으로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시적 이미지로 파생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빨강빨강보라” 혹은 “파랑파랑보라”가 될 수도 있기에 어느 쪽으로도 열려 있는 색채인 “보라”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자기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은 바로 “보라는 보라”라는 점에서, 모든 이름-단어는 결국 자기 지시적이다. “보라”와 “보라” 사이에 어떤 수식도 설명도 덧붙을 수 없도록, 다른 말이 침범할 수 없는 여백 하나를 만드는 말, ‘보라’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을 때까지는 아마도 끊임없이 공회전하게 될 이 말 “보라는 보라” 존재가 곧 전부라는 사실을 알 때까지, 소수자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자기를 긍정하기 위해, 그 어떤 논리나 근거를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 “보라는 보라”3)


2) “동화 안에는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의 이야기에서 잘 들려오지 않았던 국외자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세 번째 사람의 목소리라고 부른다. 아동문학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 사회 곳곳에서 고도로 은폐되어 온 세 번째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창비, 2017))의 머리말 부분.
3) 팬톤은 평온한 파란색에 에너지 넘치는 빨간색을 섞어 이번 베리페리라는 새로운 색을 창조했다. 역대 팬톤 올해의 색상을 위해 팬톤이 직접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여태까지는 기존의 자료에 있던 색 중에서 선정했다. (밑줄은 인용자)
출처 : 허프포스트코리아(https://www.huffingtonpost.kr)




학교 혹은 세계


“다시 또 월요일이야.
5일을 또 어떻게 버텨.
이번 주에도 수업은 따분하고
쓸데없이 숙제는 많을 테지.
눈치 없이 계속 장난만 치는
유치한 남자애들은 또 어떻고……”


운동장을 터덜터덜 걸으며
아이들을 따라 나도
이렇게 말할 때
나는 월요일의 앵무새가 된 것 같았다.


앵무새는 앵무샌데
조금 특별한 앵무새다.
난 비밀이 있는 앵무새거든.


공을 차며 운동장을 달리는 그 애를 따라가는 내 눈길과
살짝 올라가는 내 입꼬리를 생각하며
아이들 몰래 잠깐 기뻐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비밀이란 게 나한테만 있진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 중에도 몇은
나처럼 따라 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는 거지.
그러면 누가?


순간 교문은 커다란 새장 문이 되고
새장 안으로 들어오는 앵무새들이 보였다.
제각각 말하고 싶은 뜨거운 것이 있어
가슴이 빨간 앵무새들이었다.


정유경, 「월요일의 앵무새」 전문 (『미지의 아이』(문학동네, 2021))


“앵무새”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주체의 이미지가 뚜렷한 관용 표현이다. 동일하게 주어진 현실 앞에서 보편-공통의 감각은, 휴일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에 “수업은 따분하고” “쓸데없이 숙제는 많”고 무엇보다 앞으로 남은 “5일을 버텨”야 하는 지점이다. 그러니 “앵무새”의 반복되는 말하기는, 반복되는 일상-특별한 무언가가 없는 ‘이번 주’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말하기’ 행위는 결국 합의된 질서-체계를 표면화하는 것으로서, 우리 모두가 동일한 감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 방식이다. 그래서 이 “앵무새”들의 말은 “월요일”에 대한 진지한 원망이나 현실에 대한 적극적 비판이라기보다는 그저 “나처럼 따라 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말하기의 반대편에 위치한 것은 말해지지 않는 것들: “공을 차며 운동장을 달리는 그 애를 따라가는 내 눈길과/ 살짝 올라가는 내 입꼬리를 생각하며/ 아이들 몰래 잠깐 기뻐”하고 있는 ‘나’의 내면이다. 그리고 이 내면은 언제나 단 한 사람의 구체적인 어린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학교’ ‘교실’과 같이 어린이 공동체를 뭉뚱그려 말하는 방식으로는 그 상狀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어른이 쓰는 동시에서 어른 창작자가 1인칭 어린이 화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결코 어린이가 될 수 없는 어른 창작자4) 라는 동시의 한계는 새로운 동시 놀이를 가능하게 한다. 동시의 연극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어린이의 가면(persona)을 쓴 어른(창작자)이 아니라 시인이 섭외한 어린이이기 때문에, 동시―무대 위에 오르는 어린이 주인공의 성별, 나이, 성격, 취향, 사는 동네, 다니는 학교, 지역, 가정의 경제적 환경, 가족 및 교우 관계 등을 세심하게 조직해야 한다. 그래야 동시―무대에 오른 어린이 주인공은 생생한 제 목소리를 지니고 발성할 수 있게 된다. (중략) 김개미 동시집에 등장하는 주연 배우들은 다른 동시집에 카메오나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하는데, 동시집에 산재한 여러 인물을 찾고 모으고 갈라 보는 일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김개미 동시 속 어린이 화자-인물들을 그들이 존재하는 구체적인 시공간, 인물 간 관계, 동선, 사건 등과 함께 상상해 보는 ‘동시 인형놀이’는 김개미 동시가 현재 어린이 독자의 생활공간을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감과 위로, 치유의 놀이까지 가능할지 모른다.5)


인용한 송선미 시인의 평론에서는 김개미 시인의 동시를 통해, 지극히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의 어린이 존재―가능성을, 그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집에 산재한 여러 인물을 찾고 모으고 갈라 보는 일”은 근래 많은 매체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 메타버스(Metaverse)를 연상시킨다. 김개미 시의 화자들이 지닌 말의 핍진성-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은, 몇 년 전 시인 스스로도 이야기한 바6) 있다.


4) 이로써 제기된 것이 어린이 화자 논쟁이다. 이지호의 평론 〈동시를 버려야 동시가 산다〉(《동시마중》 2010년 9·10월호)로부터 제기된 어린이 화자 논쟁은 김유진의 글 〈태도가 관계다〉(《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 창비 2020)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각주는 인용한 평론의 각주를 그대로 재인용하였음을 밝합니다.)
5) 송선미, 「동시 비평의 최근 동향과 새로운 전망」 부분 (격월간 《동시마중》 제 67호)
6) 처음으로 생각한 아이가 《어이없는 놈》의 아이인데요. 그 아이는 아파트에 살아요. 그 아이를 만난 후로 제 머릿속에 한 마을이 생겼어요. 아파트 단지죠. 김준현 선생님이 이야기했다시피 이후 동시집에 나오는 아이들은 모두 《어이없는 놈》의 아이와 연결되어 있어요. 같은 동네 아이들이니까요. 서로 아는 사이이거나 친구의 동생이나 형, 누나예요. 그래서 이 동시집에서 봤던 아이가 저 동시집에도 살짝 나오고 그래요. 한 마을에 사니까요. 《커다란 빵 생각》의 아이는 《어이없는 놈》 아이의 옆 동 사는 4학년 아이예요. 그래서 《커다란 빵 생각》에는 《어이없는 놈》의 102호 아이가 카메오로 나와요(〈토요일 오후〉). 《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토토북 2017)의 아이는 같은 동네 1학년 아이예요. 그리고 이번 《레고 나라의 여왕》 아이는 저한테는 아주 많이 특별한데, 지금까지 나온 아이 중 가장 성숙하고 단단한 아이예요. 이 아이도 처음에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어요. 그런데 인근 빌라로 이사를 가요. 그래서 제 머릿속의 마을이 이제 아파트 단지와 단지 밖 골목까지 확장이 돼요. (김개미×김준현 동시콜라보 제2회 동시인대회 행사 발췌 원고)




어린이 독자와 작가가 함께 만나서 동시를 나누는 교실 현장


“2010년대 후반-2020년대 여타의 아동문학 장르(동화, 그림책)와는 다른 맥락에서 동시 장르가 현장에 밀착되어 자기-표현의 한 양식으로 갖는 유의미는 양적·질적으로 많은 부분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공리적 효용이 윤리-기제로서 작동하는 성향이 강했던 이전 시대의 동시 쓰기의 방식이 변화했다. 더불어 시대의 조류- 페미니즘 담론을 바탕에 둔 성(性) 인식의 변화/ 소수자로서 아동이 겪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조망과 능동적인 개선 의지 등과 같이 현실 인식에 대한 보다 뚜렷한 목소리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시라는 장르-창작층과 독자층 전반의 변화 또한 미약하게나마 감지되었다. 즉, 현재의 동시는 이와 같은 현실을 어떤 형태로 수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린이-독자의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혹은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해보는 것”7) 이 이 글을 쓰기 전의 구체적인 목표의식이었다. 즉, 이 장은 제시한 구상안의 두 번째 부분인데, 물적토대 없이는-일차적이고 실재하는 어린이 그리고 현장에서 강연하는 작가, 동시집 출판의 경험이 있는 출판편집인의 자문 없이는 진행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아동문학은 언제나 어린이 독자라는 구체적인 연령대의 독자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어린이가 아니라, 2022년 현재의 어린이: 그리하여 ‘어린이’라는 개념은 영속성을 갖지 않으며, 시대의 분위기와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유동한다. 시의성을 고려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의 어린이가 세계를 어떻게 인지하고 또 감각하는지에 대해 공감하고 유대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다. 초등학교 강연에 가서 한 교실 전체에, 혹은 한 학년 전체에 동시 낭독을 주문하면, 저마다 제각각의 목소리-높고, 낮고, 발랄하고, 묵직하고, 속삭이고, 큼직하고, 탁하고, 맑은 저마다 가진 고유의 목소리로 동시를 읽는데, 처음에는 각자의 속도로 읽다 보니 노이즈가 발생하지만 어느 순간 모두 같은 속도로 가지런히 읽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각각의 목소리가 지닌 개성이 개별적-단 한 사람의 구체적인 어린이라면, 동일한 속도로 읽는 지점은 바로 조금 전 언급한 ‘공감하고 유대하는’-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어린이의 감각이 조율과 합일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7) 현재 글 최초의 구상안 일부



동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생을, 어느 특정한 한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동(童)이라는 말을 근거로 둘 때, 그 마음의 중심에는 반드시 ‘어린이’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 어린이가 시인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어린이인가, 시인의 유년이 표면화 혹은 내면화된 어린이인가, 시인의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즉 실재하는 어린이인가, 화자의 모습으로 등장해 말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인가, 텍스트의 바깥에서 독자로서 어른의 말을 들어주는 어린이인가, 와 같은 질문 혹은 탐색의 시간을 한 번은 꼭 거쳐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8)


8) 졸고, <어린이 개념으로부터 발생하는 원심력> 부분 (격월간《동시마중》74호)



그러나 독자로서의 어린이는 뚜렷한 상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으며, 언제나 불투명하게 집계된다. 아동문학, 그것도 동시의 경우 저자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어렴풋하게나마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매학기 초등학교에서 진행되는 ‘온작품읽기’라는 방식의 수업일 것이다. 특정한 작품 한 권을 한 학기 동안 읽는 형태의 수업이다. 작가가 실재하는 어린이 독자를 만나는 자리는 ‘온작품읽기’를 통해 작품에 대한 감상과 논의, 그리고 파생되는 다양한 활동 이후에 결말로서, 그리고 또 다른 시작으로서 마련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일방적인 형태로 동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어린이들은 능동적인 독자로서 먼저 동시를 만나고 적극적이고 다양한 읽기 방식-필사, 패러디, 그림, 음악, 질문 등의 형태로 경험한다. 사례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한 학기 동안 끊임없이 어린이를 만나는 자리를 갖고 동시 전달자로서 초등학교 강연을 하는 이안 시인이 어린이와 만나 함께 ‘시’를 나눈 경험과 소회, 그리고 이번 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한 학기 한 권 읽기’의 의의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을 담은 산문을, 조금 긴 인용이 될 것을 무릅쓰고라도 제시하고자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2-3 ○○○입니다. ‘아홉 살 시인 선언’에서 봤어요. 시는 아름다운 거라고. 그래서, “작가님은 참 아름다워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왜 작가님이 좋으냐면요, 저도 작가가 될 꿈이에요. 아마, 저도 크면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월요일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주세요! ○○○ 올림.”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님 덕분에 시를 좋아하게 됐어요. 저는 ‘은’을 좋아해요. 되게 은은하고 잔잔해서 좋아요. 덕분에 시가 재밌다는 걸 알았어요. 1학년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만났네요. 시를 재밌게 써 주셔서 감사해요. 2022년 7월 14일 목요일. 2학년 2반 ○○○.”


“안녕하세요! 저는 2학년 1반 ○○예요. 저는 시인님의 ‘신비로운 사람’ 시가 제일 기억에 남았어요. 원래 시를 좋아하진 않았는데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인지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시인님의 앞을 응원할게요! ○○ 올림.”


최근 만난 경기도 소재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 독자들의 편지다.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 처음 제시되어 2018년부터 교육 현장에 적용되고 있는 ‘한 학기 한 권 읽기’ 프로그램은 대상 도서의 작가를 학교로 초대하여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작가를 만나기 전, 어린이들은 대상 도서를 읽어 나가면서 여러 가지 독서 활동을 한다. 대상 도서가 동시집인 경우, 질문지 만들기, 교실이나 복도에 시화 전시, ‘내가 고른 베스트 5’(반별, 학년별 통계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가 신뢰할 만한 독자 반응이다), 시노래 부르기, 필사와 암송, 좋아하는 구절로 캘리그래피 만들기, 작가에게 편지 쓰기 등. 이런 활동을 마친 어린이 독자들의 질문은 구체적이고 진지하며, 때로는 근원적이다.


“저는 ‘그림자 눈사람’ 시가 제일 재미있습니다. ‘그림자 눈사람’을 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시를 썼나요?” “그림에서는 그림자가 아니라 눈사람이 눈사람을 안고 있는데 그림자여야지 않나요?” “시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도라지꽃 이야기’ 시가 너무 좋은데 무슨 뜻(의미)인가요?” “주로 무슨 마음으로 시를 쓰시나요? 감동인가요? 사랑인가요?” “시인의 생활은 무엇입니까?” “어쩌다가 시인이 되셨나요?” “시가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작가로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인가요?”


질문을 궁리하고 작가의 답변을 들으며 어린이 독자들은 또 한 번 성장한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로 만난 어린이 독자들은 언제나 내가 만난 최고의 독자였다. 훌륭한 독자는 거저 나오지 않는다. 어린이 독자 뒤에는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준비한 교사가 있기 마련이다. 같은 학년 교사들이 서로 도와 대상 도서를 고르고, 작가를 섭외하고, 읽기의 과정과 방법을 구성하고, 학부모의 협조와 참여를 유도하고, 행정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는 일까지 번거로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안 하려면 안 해도 되는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문해력을 높일 뿐 아니라 분절된 교육과정을 넘어 통합적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데 바탕이 되며 교사의 교재 구성력을 높이고 동료 사이의 협력과 학생 교사 학부모로 이어지는 교육 공동체 가꾸기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성명서, ‘2022 개정 국어교육과정에서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지우려는 시도를 당장 중단하라!’ 2022.9.8.) 그리고 무엇보다 한 권의 ‘온’ 작품(집) 읽기를 통해 가정의 격차가 읽기의 격차를 만들어 내는 현실을 개선하고 ‘낱’ 작품 읽기로는 도달할 수 없는 독서교육의 총체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는 온갖 영상 매체가 지배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저항하며 좋은 독자를 기르는 과정이자 좋은 저자의 꿈을 꾸게 하는 장기적이고도 대안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독자가 자라서 저자가 된다. 줄이거나 없앨 게 아니라 더욱 풍부하게 넓혀 가야 한다.


(이안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동시는 장르의 특성상 말해지지 않는 부분을 보다 두드러진 여백의 형태로 갖고 있다. 그 확장된 여백이 질문으로 전환되고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각자의 대답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의 한 총체로서, ‘온 작품 읽기’의 경험은 중요하다. 이안 시인으로부터 구한 자문에서 “‘낱’작품 읽기로는 도달할 수 없는 독서교육의 총체성”이란, 한 가지 정해진 결말을 향해 모이지 않아도 되는 공부로서, ‘동시’ 장르의 특징과도 맞물려 있다. ‘답’- 구체화된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기를 권유하는 기존의 학교 교육이 제시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다. ‘시’의 쓸모없음, 이른바 효용성의 부재를 근거로 ‘시’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현실은 언제나 뚜렷하고 선명한 답을 향해 가는 가지런하고 일차원적인 노선路線의 형태에 가까울 것이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가기-정해진 교훈과 정해진 메시지, 정해진 답을 향해 가는 그 길은 자기 개성을 훼손하고 고유성을 삭제하는 과정과 동일하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지극히 개별적인 행위지만, 읽기 경험을 교실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문학’이 ‘타자’를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을, ‘나’와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님 덕분에 시를 좋아하게 됐어요. 저는 ‘은’을 좋아해요. 되게 은은하고 잔잔해서 좋아요. 덕분에 시가 재밌다는 걸 알았어요. 1학년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만났네요. 시를 재밌게 써 주셔서 감사해요. 2022년 7월 14일 목요일. 2학년 2반 ○○○


동화가 이야기-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라면 결국 동시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단 한 사람의 삶 안에 겹겹이 쌓인 정신사의 한 단면이다. 어른의 목소리로 어린이와 소통하는 이들은 어떤 모습일까? 실재하는 시인과의 대면은 어린이가 동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한 물적 토대다. ‘말’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는 한 동반자로서, 어린이들은 시인을 기다리고, 그 기다림 이상으로 시인은 어린이들을 기다린다.



어린이 독자의 위상


문학계라는, 보다 큰 시장 안에서 아동문학만이 애초에 특정한 독자층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많은 출판물은-저자의 의도 이전에 출판사의 수요 공급 논리에 따라- 다양한 연령대의 대중과 만나기를 지향하기보다는, 특정 세대와 성별 및 기호와 취향을 반영해 책을 제작하고 유통하고 홍보하며 독자를 향해 움직인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한 권의 책을 검색해서 상세 정보를 확인해보면 구매자 분포가 세대 별로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선) 나눠져 있는 걸 알 수 있고, 여성과 남성이 따로 분류되어 있으며 각각의 분포도를 면밀하게 볼 수 있다. 이른바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이라는 수식은 이제 통용되기 힘든 시대이며, 독자는 점차 고유한 취향과 기호를 가진 개인의 자리에서 각각 존재한다. 그러니 이 경우 오히려 ‘어린이 독자’라는 개념은 성인에 비해 덜 개별화된 정의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2018년부터 한겨레교육(/글터/글쓰기·창작·번역아카데미)에서 ‘송선미와 동시집 읽기: 8+8한 동시의 시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는 동시는 함께 나눌 때, 또 한 권의 동시집을 온작품읽기로 나눌 때 숨겨진 결이 드러난다. “동료들과 동시집을 읽으며 통통 튀는 표현력과 아이들 시선을 포착하는 통찰에 매번 놀랐다. 우리는 “요즘 동시가 이랬어?”라는 말을 가장 자주 했다.”1) 는 교사 이유진의 글을 읽으며 크게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8+8한 동시의 시대’에 모인 교사들이 보이는 첫 반응 역시 ‘동시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였는데, 다음으로 보이는 반응은 ‘내일 얼른 가서 아이들과 오늘 배운 동시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과정이 바뀌고 수강생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한결같은 참여 교사들의 반응과 열정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창작자로서 홀로 자신의 창작물과 마주할 때면 되묻게 된다. 아이들은 나의 동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9) (밑줄은 인용자)


9) 송선미, 「동시 비평의 최근 동향과 새로운 전망」 (격월간 《동시마중》 제 67호)



아동문학을 전유하는 것이 비록 장르의 정의 상으로는 어린이지만, 연령대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도서의 선택에 있어 부모, 선생님과 같은 어른의 영향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때 ‘교사·학부모→어린이’ 일방적인 전수 구조는 어쩌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서의 선택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 권위 있는 기관의 추천 도서, 선정 도서, 문학상 수상 도서, 혹은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의 추천사를 홍보 멘트로 쓰고 있는 도서 등의 타이틀이 책에 공신력을 부여한다. 아동문학 장르 중 ‘동시’만이 가지는 도드라진 경향성만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은 언제나 바깥으로부터의 영향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인용한 평론의 도입부 역시 동일한 의문을 품고 있다. ‘작가→성인 독자’ 구조의 동시 장르에 대한 전달은 비록 강의의 형태이기는 하나 동 세대의 언어로, 이해의 측면에서 감상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어린이 독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가능한(‘내일 얼른 가서 아이들과 오늘 배운 동시를 나누고 싶다’) 성인 독자-‘교사’들에게는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창작자의 고민은 결국 ‘아이들은 나의 동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로 연결된다. 독자와 작품의 1:1 만남이 아닌, 시인, 교사, 어린이 독자 간의 교류를 통한 일종의 ‘소개’가 전제된 만남은 그러나 동시 장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필자 또한 동일한 창작자의 입장에서 동시라는 장르를 알게 되고 막 진입했을 때 이와 관련하여 쓴 단상이 있다.


동시를 쓴 시간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독자와의 접점에 무게중심을 두는 쪽과 작품의 실험성―새로운 시도 그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는 쪽의 갈등은 동시를 쓰는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누구와 누구의 대립이 아니라, 동시를 쓰는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다. 갈등이 해소된 이후가 아니라 그 갈등을 그대로 가져온 동시가 더 어여쁘다. 어떤 옷이 남들에게 멋있어 보이는 걸까, 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옷을 입는 행동이 될 수 있고 남들이 다 손가락질을 해도 나는 이 옷을 입고 싶어! 라는 생각은 자신만을 위해 남들의 안구를 테러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시소의 중심―균형점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가 매일 동시를 쓰는 이들의 종이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면서 말끝에 자꾸 생각한다는 서술어를 쓰거나 물음표를 쓰는 것은 무엇도 선언하거나 단정하지 않겠다는, 내 나름의 다짐쯤이라고 봐주셨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책을 내는 출판사는 책을 팔아야 하고, 책의 판매가 곧 어린이 독자의 독서 행위를 의미한다는 걸 놓고 보면 (최소한 어린이 책에 한해서는) 출판사의 상업성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출판사는 어린이 독자와의 접점이 중요하므로 작품이 지닌 실험성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고 판단하면 이를 지양할 것이다. 실험성이란 문학이 지니는 자폐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이를 거두는 것은 ‘문단’, ‘시단’, ‘동시단’ 내부의 작가, 비평가로 구성된 그룹이며 그 내부에서도 이를 두고 비평적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 다소 도식적인 얘기지만, 하나의 입장을 취하면 다른 쪽의 입장은 거부해야 하는 이상한 논리 속에서 살아온 우리는 이러한 논쟁 속에서 결국 자의반 타의반 하나의 입장을 갖게 된다. 그 입장에 따라 작품 또한 제한적 틀을 갖게 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지만, 이런 동시가 옳다는 인식이 작용하다보면 동시 쓰기의 범주를 협소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동시란 결국 자유인데.
문학에서 좋다, 별로다 같은 개인적인 취향의 기준은 있어도 옳다, 그르다와 같은 논리의 세계관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우리 모두 소외된 마당에 다양성 그 자체만큼은 인정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10) (하략)


10) 졸고, <동시와 네 개의 단상> (격월간 《동시마중》 42호)



그러나 이 글의 지향과는 전혀 다른 현실-일종의 역행과도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과거의 나이브했던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최근 개정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발표된 바에 따르면 도덕, 보건 교육 과정의 교과서에서 ‘성소수자’와 ‘성평등’ 용어가 제외되며, 대신 ‘성별 등으로 차별 받는 소수자’, ‘성에 대한 편견’, ‘성차별의 윤리적 문제’ 등으로 대체된다는 사실. 그 개정 배경이 ‘사회적 소수자를 교과서에 명시하는 것 자체가 제3의 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는 부분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현 시점(2022. 11. 10)-2022년 개정 교육과정의 행정예고 기간은 11월9일부터 20일-에서, 12월 30일 최종 고시될 교육개정안은 2024년부터 2025년에 단계적으로 확대 적용될 예정인 최종안까지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진전(전환)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과 이 글이 발표될 즈음 그 짧은 시간 안에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는 가능할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의구심과 동일한 맥락에서 아동문학이 과연 올바른 형태로 어린이 독자에게 가닿고 있는지도 함께 고민하게 된다. ‘아동’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은 때로 ‘어른’이 이미 답을 확정해놓은, 어떤 어른의 입장에서는 이미 해소된 고민의 전달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고민하고, 동시라는 장르를 함께 진지하게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동시가 가닿을 대상의 확대. 동시의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동시도 하나의 장르가 되면 어떨까도 싶습니다. 어른이 읽는 동시집 말입니다. 그러면 시집을 읽지 뭐 하러 동시를 읽어? 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동시와 시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어른을 위한 동시, 어린이를 위한 동시,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어도 좋은 동시와 같은 다양성 말입니다. 하긴 어쩌면 이런 구분이 필요 없을 동시가 나와야 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동시 시장이 협소하다 보니 동시를 쓰는 시인이 모인 문단도 그 층이 얇은 것 같습니다. 아마 이건 전적으로 저의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아마와 프로가 하나의 운동장에서 같이 뛰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아마와 프로 작가가 있겠지만 나름대로 구분됨이 명확하게 보여집니다.


(중략)


브로콜리숲의 경우 지금(2022년 10월 현재)까지 37종의 동시집을 냈습니다.
그 가운데 23종의 동시집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을 비롯한 각 지자체 문화재단의 창작기금을 받은 책들입니다. 그러니까 60% 이상이 기금을 받아 낸 책들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 2쇄 이상 추가 인쇄를 한 경우는 문학나눔이나 세종도서에 선정된 책들인 경우가 전부입니다. 자체 동시집(시인)의 인기나 인지도로 재쇄 발행하게 된 경우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유력 출판사에서 출간한 동시집의 경우는 인지도 있는 시인의 동시집인 경우가 있어서 판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활동 정도에 따라 판매량이 늘어난다고도 합니다.


김성민(시인·도서출판 브로콜리숲 대표)


지역의 1인 출판사이자 아동문학 장르-특히 동시집을 주로 내고 있는 한 시인 겸 출판편집인으로부터 구한 자문의 발췌문에서는 동시의 수요와 독자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부족한 수요에 대한 한 대응책으로 ‘어른이 읽는 동시’ 라는 역설적인 수식이 등장하는데, 이 수식은 사실 ‘동화’ 장르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기에 익숙하다. 조금 바꿔 말하면, ‘어린이’가 읽는다는 인식이,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관성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관성에 빠진 동시는 어린이에게 가닿지 않는다. “얇은” 창작자 집단에서만 통용되고 소비되는 동시는 그리하여 진지한 문학도 아니고 어린이의 즐거운 놀이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쉽게 써야지’ ‘어린이가 읽으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편하게 써야지’라는 인식이, 위에 인용된 것처럼 “아마와 프로”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오해의 방지를 위해 덧붙이자면 여기서 “아마”와 “프로”는 등단이나 출간 이력과 같은 제도적 차원에서의 기준이나 잣대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동시, 어린이 독자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없는 동시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실은 끊임없이 밀려오고, 그 현실은 어른이 전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그러니까 어른은 이 현실11) 을 은폐하기보다는 보다 정확하게 어린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작품을 쓰는 데 있어 기술적 측면보다는 어린이에 대한 태도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것은 분명 옳은 것이지만, 결국 그 태도는 기술적 측면_얼마나 섬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에서 명확해지는 것이기에 불가분의 관계다. 투박하다는 것은 글쓰기에, 사랑에, 무엇보다 어린이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잘 쓴다는 것은, 잘 말한다는 것이고, 잘 사랑할 줄 안다는 것으로 이어져 있게 마련이다.


11) “시인은 끔찍한 현실을 끝내 우회하지 않으면서 비가시화된 아이의 목소리를 대신 드러내 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선 자신이 가진 그 언어의 힘으로 끔찍한 현실에 맞서는 길을 대신 찾아내기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아동문학을 하는 어른들이 짊어져야 할 버거운 짐이자 영광된 자산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기 전에, 시인은 자신이 가진 힘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현실 앞에 아무리 무용하고 무력한 것으로 비치더라도 말이다,”
김제곤, <중심에 맞서는 방법> 부분 (『동시를 읽는 마음』(창비, 2022)에서)



* 이 글은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비평활동지원을 받아 집필하였습니다.















김준현
작가소개 / 김준현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2015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동시 부문), 2017년 제5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2020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평론 부문)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집 『토마토 기준』, 『나는 법』,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흰 글씨로 쓰는 것』, 청소년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를 냈다.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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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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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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