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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치유의 나르시시즘: 새로운 연대를 위한 가능성

  • 작성일 2017-09-01
  • 조회수 3,209

[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소통과 치유의 나르시시즘: 새로운 연대를 위한 가능성



김서영





1. 나르시스 칸타타: 연대의 가능성을 위하여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나르시스 칸타타(Cantate du Narcisse)」에서 나르시스를 사랑하는 님프는,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의 모습에서 “물의 맑은 수의의 싸늘함(le froid du limpide linceul de l’onde)”1)을 느낀다. 귀찮게 구는 님프에게 역정을 내며 나르시스는 “그대는 나의 고독을 온통 더럽혀 놓았어(Vos avez corrompu toute ma solitude).”2)라고 말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서설』3)을 정확히 요약하는 장면이다. 프로이트는 왜 이 논문의 제목을 서설(Einführung/introduction)이라고 지었을까? 나르시시즘에 관련된 본론을 집필하기에 앞서 서론적 해설을 썼다는 말일까? 그러나 프로이트 전집 중 나르시시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개진되는 작품은 이 논문 단 한 편뿐이다. 그렇다면 서설의 의미는, 어떤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나르시시즘이라는 키워드를 도입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어떤 내용’이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체계 전체를 뜻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출발하는 중심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이러한 사유의 여정을 거치며, <문장 웹진>, ‘비평in문학’ 코너에서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나르시시즘’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나르시스 신화에서 그리고 있는 자기애적 폭주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혁명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로 제시한 오르페우스와 나르시스의 긍정적 함의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밝히고, 그러한 이론 체계 속에서 정신분석이 오랜 비판들을 돌파할 수 있도록 조력하여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혁명의 시간을 사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이론적 동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실천적 도구이다. 남근선망, 거세공포를 넘어 우리의 이야기는 나르시시즘에서 시작된다.
2017년 한국해석학회 제118차 춘계 학술발표회에서 강호숙은 「보수교단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 신학적 고찰: 여성신학적 성서해석과 여성을 위한 설교를 중심으로」4)를 발표했다. 나는 발표자의 주장에 동의하며,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이 글은 무엇보다 먼저,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의 실천적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이론적 기반을 제시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아래 내용은 결코 발표자 또는 질문자의 편을 들어 다른 쪽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질의응답 시간에 제시된 문제에 관련하여, 정신분석학 전공자로서 포착할 수 있었던 개념적 활용에 대한 보완적 지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강호숙은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사회문화적 원인에 대해 설명하며, “남성의 나르시시즘은 자신들을 흠 없는 존재로 보존키 위해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죄책을 전가시켜 왔다.”5)라고 말한다. 이 문장 중 ‘나르시시즘’에 대한 각주에서 그는 “원래 이 용어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여성성의 특징으로 규정한 것이다.”6)라고 부연했다. 질의응답 시간의 코멘트는 정신분석학에서 나르시시즘은 여성보다는 남성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그것을 여성성의 특징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 전공자가 답해야 할 듯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나는 나서지 않았다. 혹시라도, 발표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마음과 달리 비판적 뉘앙스를 전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중심으로, 나르시시즘 개념을 정신분석학 속에서 해방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폴 발레리, 「나르시스 칸타타」, 『발레리 선집』, 박은수 옮김, 을유문화사, 137쪽.
2) 같은 책, 136쪽.
3) Freud, S. “On Narcissism: An Introduction” in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J. Strachey (trans.), 1914, London: The Hogarth Press, pp. 73~102. 이후 인용은 이 책의 쪽수이다.
4) 강호숙 「보수교단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 신학적 고찰: 여성신학적 성서해석과 여성을 위한 설교를 중심으로」, 『해석과 주석 그리고 번역』, 2017년 한국해석학회 제118차 춘계 학술발표회 프로시딩, 29~44쪽.
5) 같은 글, 34쪽.
6) 같은 글, 34쪽.



2. 물의 맑은 수의(壽衣)의 싸늘함: 고립, 단절, 정신병


나르시시즘은 여성성과 관련되는가 아니면 남성성과 관련되는가?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여성성의 특징으로도 규정했고, 동시에 남성성의 특징과도 관련지어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외부 대상보다는 자신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는 나르시시즘적 유형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자신을 모델로 사랑 대상을 선택하는 남성과 관련하여 ‘나르시시즘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프로이트는 동성애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단순화된 단안적 시각은 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 심리학 일반에 만연된 고착적 사고였으며, 동성애는 장애로 인식되었다.7)
그러나 이 부분들은 모두 나르시시즘을 설명하는 지엽적 항목들이며, 나르시시즘은 무엇보다 먼저 정신병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론적 필요성이 제기된 개념이다. 「나르시시즘 서설」에서도 시작과 끝, 본문의 중심 부분은 모두 정신병과 연관된다.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코 유토피아적 이미지나 신화적 장면이 아니며, 자기애적인 이기심이나 자신에 대한 관심도 아니다. 정신분석에서 나르시시즘은 1차적으로 ‘정신병’의 구조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한 인간을 물의 맑은 수의에 감싸 싸늘한 공간에 고립시키는 기제를 이르는 개념이다. 외부와의 소통이 전무하고, 한 줄기 빛도 새어들지 않는 마음의 폐허, 그 정신병적 고립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에너지는 내부에 침잠되고, 나가는 이도 들어오는 이도 없이 죽음과 같은 폐허가 끝없이 이어진다.
「나르시시즘 서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가 1차적 나르시시즘과 2차적 나르시시즘8)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발성 치매(크레펠린)나 조현병(블로일러)을 리비도 가설로 설명하려 했을 때 그 이론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9) 프로이트는 이 환자들에게서 과대망상과 무관심이라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관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그들은 “사람이나 사물 등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그들이 “외부 세계의 사람과 사물로부터 리비도를 회수한 듯 보인다.”10)라고 설명한다. 어떤 소통도,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은 채 한기 어린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정신병 병례인 슈레버 사례 분석을 통해 프로이트는 그러한 폐허 속에서 환자가 삶을 지속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찾은 마지막 수단이 바로 망상이라고 말한다. 외부와 단절된 폐허 속에서는 이야기가 쓰이지 않는다. 이야기가 없던 곳에 이야기를 쓰는 불완전한 방식이 바로 환자의 망상이다. 그것은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 사연을 생성할 수 없기에, 재료 없이 혼자 이야기를 닮은 구조를 얽어내는 행위이다.
프로이트는 강박증이나 히스테리와는 구분되는 정신병의 이 특성 ― 리비도의 회수 ― 에 주목한다. 리비도의 회수란 외부 에너지를 내부로 전회 시킨 상태라기보다는, 근원적인 에너지 자체가 내부에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과대망상으로 표현되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병적 상태가 아니라 근원적인 기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적 에너지의 일부가 외부 대상에 부착될 때 인간은 이 근원적 나르시시즘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다시 이상한 질문을 제기한다. 과대망상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 낯선 증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고의 전능성과 같은 마술적 믿음은 어린아이나 원시부족에게서 관찰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병리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성장과 발달의 일상적 단계에 안배될 수 있는 삶의 출발점이다. 이때 프로이트가 직면한 문제는 이와 같은 설명이 그의 이론적 구도와 상치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아와 성을 구분하고 자아 편에 자기보존 충동을,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편에 리비도를 안배했다. 그런데 자아의 기원에 근원적 자기 사랑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아와 성을 대극 구도로 분리할 수 없게 된다. 나르시시즘 가설에 의해 프로이트는 자아와 성, 자기보존과 리비도가 한편에 존재하는 이론적 혼돈을 대면했다. 프로이트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기존의 이원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론을 고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리비도가 내부에 고인 채 절멸의 상태로 치닫는 고립의 구조를 치유 이론으로 돌파하는 것이었다. 「나르시시즘 서설」은 프로이트가 이 두 가지 문제들을 풀어 가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7) 1973년에 출간된 DSM(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제3판에 와서야 동성애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된다.
8)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1차적 나르시시즘’으로, ‘일반적인 나르시시즘’은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번역했다. 프로이트는 이를 아메바와 위족으로 구분하는데(프로이트, 1914, 75쪽), 원래 존재하던 에너지 자체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에 관련되고, 대상에 부착되었다가 다시 회수한 에너지는 일반적/일상적/2차적 나르시시즘에 관련된다.
9) 프로이트, 1914, 74쪽.
10) 같은 글, 74쪽.



3. 정신병의 구조 대 정신병적 구조: 정신병적 구조에 대한 이의 제기


프로이트는 삶에 대한 의지나 감동적인 치유론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는 환자가 칠흑 같은 내부의 어둠을 뚫고 외부로 손을 내밀게 되는 계기를 관찰해 낸다. 이는 두 번째 문제에 관련된 부분인데, 우리는 우리의 논의를 여기에 한정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그 후 6년 동안 이론적 교착상태에 관련된 첫 번째 문제에 대해 고민한 후 1920년이 되어서야 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제시하는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이라는 두 번째 이원론을 뜻한다. 즉, 자아와 성의 대립에서 삶과 죽음의 대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라플랑시(Jean Laplanche)는 『삶과 죽음의 정신분석학적 함의(Life and Death in Psychoanalysis)』11)에서 나르시시즘을 중심으로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의 구도로 재편되는 프로이트의 이론적 체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다시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와, 정신병적 고립에 대해 프로이트는 ‘사랑’이라는 유사-해답을 제시한다. 물론 이 역시, 희생하는 숭고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나르시시즘의 연장선상에서 개인을 외부 대상으로 이끄는 필연적 우연의 계기를 뜻한다. 나르시시즘적 여성 유형에서도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만은 그가 외부 대상일지라도 자신의 일부로 인식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프로이트는 이를 부모의 사랑 일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부모의 사랑이란 매우 고귀한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 기반은 매우 유치한데, 그것은 부모가 가진 나르시시즘이 대상 사랑으로 전환된 것”12)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이미지를 대상으로 그것과 동일시하는 과정 역시 그 기반은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다. 「나르시시즘 서설」의 마지막 부분은 내면의 이상을 가리키는 자아 이상에 대한 논의로 구성된다. 1923년에 자아 이상은 초자아로 개념화되어 자아, 이드, 초자아의 구도를 형성하게 되지만, 서설의 차원인 이 논문에서는 나르시시즘의 연장선상에서 자아와 외부의 소통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으로 설명되며, 이 기제를 운용하는 정신 기관은 양심으로 명명된다. 프로이트는 심지어 양심의 목소리를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정신병의 망상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나타난 문제 중 하나는 정신병과 신경증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양심의 목소리와 정신병의 환청을 동일한 기제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초자아가 이론화되는 지점에 오면 해결되는 문제이긴 하지만13), 진단의 구분에 대해서는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호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나르시시즘 서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로이트는 자아 이상에 대한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구분하여 전자를 논문의 이전 부분과 연결시키고 후자를 초자아의 전신으로 준비하는데, 이 구분 역시 리비도의 회수에 의해 고립되는 정신병의 구도를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르시시즘 서설」의 두 번째 장을 시작할 때도 프로이트는, 정신병에 대한 연구가 나르시시즘에 접근할 수 있는 중심적 통로라고 말하며, 기질적인 질병이나 건강염려증 등의 사례를 통해 에너지가 정체되는 이유를 추적하고 있지만, 그는 왜 그러한 고립이 초래되었으며, 그것이 신경증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리고 신경증과 다른 어떤 치유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신경증의 구조와 정신병의 구조가 명확히 구분된다. 그는 세상에 첫발을 내딛지 못한 상태를 정신병으로 정의하며, 이 구조는 삶 속에서 변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신병의 구조를 가졌으나 발현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신경증의 구조에서 정신병의 구조로, 또는 그 역으로 바뀌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번 세상의 어긋남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정신병과 유사한 증상을 보일 수는 있지만, 결코 정신병적 고립의 상태, 즉 정신병의 구조로 정신 구도가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늑대 인간 사례 분석에 관련된 진단의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분석가들은 동일인을 신경증으로 진단하기도 하고 정신병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경계선’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모호함에서 나오게 된 개념이다.
이를 감안하고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 본문을 읽으면, 그가 말하는 나르시시즘적 정신병의 구조는 ‘정신병의 구조’와 더불어 신경증자의 ‘정신병적 구조’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는 상태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논문에서 나르시시즘적 상태란 소통과 이해가 차단된 내적 고립 자체를 일컫는 듯하다. 그렇다면 편견과 차별이라는 고착된 사고는 이와 같은 상태의 전형을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자만과 교만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과대망상적 상태들이다. 이는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의 유아적 고립 상태를 뜻한다. 정신병의 구조에서 망상이 회복을 위한 노력을 뜻한다면, 정신병적 구조의 나르시시즘적 리비도 회수는 소통과 배려를 배우지 못한 이들의 자기 고립을 위한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외부 세계의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며, 외적 사물과 교감하지 않는다. 정신병의 구조에서와 달리 정신병적 구조를 가진 이들의 경우, 그러한 고립은 선택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어른들로서 과대망상적 믿음 속에서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

11) Laplanche, J. Life & Death in Psychoanalysis, 1985,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2) 프로이트, 1914, 91쪽.
13) 이드가 외부 세계와 맞닿는 면이 자아로 분화되며, 외부 대상과의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의 부분이 초자아로 명명된다. 즉 자아 이상이 내적 에너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나르시시즘 서설」의 설명과 달리, 이후 초자아는 외적 대상과의 조우 이후에 형성되는 작인으로 이론화된다.



4. 치유를 향한 여정: 소통의 나르시시즘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제시한 ‘사랑’이라는 유사-해답 역시 정신병의 구조보다는 정신병적 구조에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병적 구조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치유책을 제시하는데, 그가 내부와 외부를 잇는 상위 기제로 설명하는 이 치유책은 ‘승화’이다. 그는 승화를 ‘비상구’14)라고 부른다. 승화란 에너지를 운송하는 통로의 질적 변환을 의미하며, 프로이트의 설명대로, “억압과 관련되지 않은”15) 기제이다. 승화는 고립된 내부가 외부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신비 자체를 설명한다. 「나르시시즘 서설」에서 프로이트는, 눈앞의 이익과 관심이 아닌 그 너머의 목표로 전진하는 마음의 상태를 은자 또는 수도사의 사례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는 이들의 삶의 방식을 병리적이라 부를 수 없으며, 그들은 나르시시즘적 성향에 의한 대상 선택에 굴복하지 않으며 “신성, 자연, 생명에 대해 더욱 고양된 관심”16)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이들이다.
라캉은 스물세 번째 세미나에서 프로이트가 신경증에 대해 제시한 승화라는 답을 정신병의 구조에 관련해서도 적용했다. 그가 정신병적 승화 기제로 고안한 개념은 ‘생톰(sinthome)’이다. 생톰에 의해 정신병의 구조를 가진 이들도 폐허와 같은 내적 상태를 벗어나 외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경우를 제시한다. 라캉에 의하면 조이스는 정신병적 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폐허 속에서 삶을 소진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생톰이라는 고양된 소통 방식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생톰은 ‘글’이었다.
「나르시시즘 서설」을 찬찬히 읽다 보면, 프로이트가 소통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의 정신분석학 개념들이 늘 그렇듯이, 그것은 인간 정신의 숭고함과 위대함보다는 관찰에 의해 획득한 삶의 전제와 관련된다. 그가 원시부족이나 아이들에게서 나르시시즘적 현상이 자연스럽게 관찰된다고 말한 부분은 인간이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리비도라는, 자아의 힘과 구분되는 에너지가 외부와의 관련성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리비도라는 나르시시즘적 에너지가 자아 속에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2차적인 것이 아니다. 정신병의 경우 환자는 1차적 에너지 속에 갇히게 된다. 신경증자의 경우, 그 에너지는 외부 세계의 사람과 사물에 연계되며 확장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로이트는 에너지가 확장되는 가장 기본적인 기제로 다시 나르시시즘적 대상 선택이라는 과정을 설명했다. 자신의 닮은꼴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 경험이 자아의 확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캉은 어머니라는 최초 대상이 처음에는 아이의 내면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거울 단계에 관련된 논문을 통해, 그러한 구분이 명확해지는 지점에서 자아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어떻게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 내가 모르는 것과 관계를 맺겠는가? 모든 관계와 소통은 당연히 내 리비도가 부착된 부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내 리비도가 부착될 만한 이유를 가진 대상과만 소통한다면, 그 세상의 모습은 「나르시시즘 서설」에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정신병적 고립과 폐허에 닮아 있을 것이다. 그런 구조 속에서는 나와 무관한 대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시선이 온통 나와 닮은 것들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승화란 그 너머로 나아가 타자의 공간에 머물 수 있는 시선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라캉은 성인이 되기 위해 모든 인간은 반드시 나와 닮은 세상이 파괴되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프로이트의 ‘거세’ 개념이 뜻하는 바라고 설명한다. 거세는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뜻하며,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이르러, 거세 너머에서 승화된 나르시시즘의 상태를 가정해 보기도 했다. 그는 『문명 속의 불쾌(Das Unbehagen in der Kulture)』에서 이를 “대양적 감성(ozeanisches Gefühl/oceanic feeling)”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가 교감하고 나르시시즘적 리비도가 에로스로 확장되는 이상적 상태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무너지고, 내 아이와 남의 아이가 똑같이 소중해지는 상태,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상태, 그 이상향이 승화된 나르시시즘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거세라는 결단이다. 내게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 내가 사수해야 하는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타인의 손을 잡을 수 없다. 거세되지 않은 나르시시즘이 정신병적 고립을 초래한다면, 거세된 나르시시즘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된다. 후자는 한 번도 야단맞지 않은 어른들, 아이로 남은 어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다.
정신분석은 소통하지 않는 이들, 과대망상에 갇힌 나르시시즘적 유형들과의 전투에서 그들이 기를 쓰고 사수하는 마지막 보루를 공격하는 유용한 무기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정신분석이 가진 남근중심주의적 사고를 파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늘 그랬듯이, 만약 정신분석의 작업이 충동에 대한 더욱 적절한 가설을 제안할 수 있게 된다면 기존의 가설을 포기할 것이다.”17) 「나르시시즘 서설」에 의해 정신분석의 기본 축이 변경된다는 것 역시 그러한 결단에 해당된다. 프로이트는 “관찰만이 모든 것의 근거이다.”18)라고 말한다.
모든 멈추어진 것들과 모든 고착된 사고에 저항한다는 원칙이 없다면, 인간의 치유 자체가 불가능하다. 타 영역과 연대할 수 있는 정신분석의 가능성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타 영역들과의 연대 속에서 정신분석이 소통과 치유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는 날 우리는 함께 나르시스의 고독을 더럽힐 것이다.

14) 프로이트, 1914, 95쪽.
15) 같은 글, 95쪽.
16) 같은 글, 80쪽.
17) 같은 글, 79쪽.
18) 같은 글, 77쪽.














정은경
작가소개 / 김서영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교수, 정신분석학자. 저서에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프로이트의 환자들: 정신분석을 낳은 150가지 사례 이야기』, 『내 무의식의 방: 프로이트와 융으로 분석한 100가지 꿈 이야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무의식에 비친 나를 찾아서』, 『프로이트의 편지: 새로운 삶을 위한 동일시 이야기』가 있고, 옮긴 책으로 『라캉 읽기』, 『에크리 읽기: 문자 그대로의 라캉』, 『시차적 관점』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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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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