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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흉악한 문학(적 삶)

  • 작성일 2016-11-01
  • 조회수 3,470


[비평in문학] 2016.11.4. 최종수정 되었습니다.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더럽고 흉악한 문학(적 삶)

: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 변혁을 위한 시론(試論)



허희



1. 배반당한 유언―루카치의 믿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 주는 시대”1) 말이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쓴 루카치도 이런 날들을 살아 본 적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20세기 초 현실의 총체성은 산산조각 나버린 상태였으니까.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는 이렇게 모든 것이 파편화된 상황에서 부각된다. 서사시가 자체적으로 완성된 삶의 총체성을 그려내는 것이라면, 소설은 사라져 버린 삶의 총체성을 어떻게든 그러모으려는 양식이라고 루카치는 말한다. 서사시의 총체성은 완전하지만 닫힌 체계이므로 공허한 반면, 소설의 총체성은 불완전하지만 열린 체계이므로 유기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문학에서 생산된 허구의 총체성이 실제의 총체성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루카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읽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설이 지향하는 유기적 총체성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고, 총체성이 상실된 현세에서 자유를 누릴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현재 루카치의 언명은 설득력을 거의 잃은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와 경쟁하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탓만은 아니다. 애당초 『소설의 이론』을 집필할 때 루카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열렬한 공산당원이 된다.
『소설의 이론』에 몰두하던 시기 루카치는 20대 후반의 문학청년이었을 뿐이다. 그는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현실 변혁을 꿈꾸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여러 소설을 비평적으로 분석하여,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 지옥 같은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진전시키는 방안을 발견하려 했다. 그것을 루카치는 바로 찾지는 못한다. 시간이 지나, 그가 내린 결단은 역사적 사건에서 진리를 찾는 일이었다. 루카치는 자신이 탐구했어야 하는 답을 러시아 혁명으로 대체해 버렸다. 그러나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그가 고른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정답에 가장 가까운 해답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답은 실제로 실행되면서 수많은 오류와 모순을 드러낸 채 오답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루카치의 주장이 오늘날 힘이 없다고 한다면 그 까닭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 있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신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믿었던 것 같다. ‘문학이 창안한 총체적 현실을 접한 개인은 자기를 옭아맨 억압의 사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문제의 정체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능동적 주체로 변모한 그는 폭력적 현실과 불화한다. 이처럼 문학과 만나 무지에서 깨어난 개인이 점점 늘어남으로써 시궁창이나 다름없던 세상은 조금씩 나아진다.’ 헝가리의 문학청년이 옛날에 제기한 이런 명제에 감동할 사람이 21세기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지금 한국 문학의 어떤 불만스러운 양태를 돌아보려는 순간,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물음은 이것이다.


1) 게오르크 루카치, 김경식 옮김, 『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2007, 27쪽.



2. 냉소적 주체의 한국 (소설)


『소설의 이론』에서 주창한 루카치의 문학론을 접한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소설을 읽지 않아도 무엇이 문제의 본질인지 알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탈출구는 달리 없다는 것, 태생적 불평등이 고착화된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생활이 ― 아니 생존이 힘들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해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은 박민규와 김애란의 작품에 내재한 문제의식은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국 역사가 세대를 명명하기 시작한 이후, 최초로 화폐 단위로 이름 붙여진 ‘88만원 세대’는 두 작가의 소설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방귀조차 마음대로 뀔 수 없는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고시원이 청년이 사는 방이었고, 「자오선을 지나갈 때」처럼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량진 학원에서 몇 년씩 공부하는 나날이 청년의 일상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한데 박민규와 김애란이 발표한 소설은 조금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의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은 탓이다. “늘 이런 곳(고시원 ― 인용자)에서 잠을 자야 하다니, 이건 마치 닭이 아닌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 작은 방 안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잠만 잘 뿐이다.”2)라는 괴로움, “계속 원서를 넣을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시간은 자꾸 가고, 나는 또 그 시간 동안 뭘 했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뭔가 될 때까지는 나는 계속 학원에 나가야 된다. 내가 생각했던 나의 경쟁력이란 ‘손가락이 열 개 달린’ 정도의 평범한 조건들이었을까.”3)라는 불안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벗어났을까.
김사과가 형상화한 분열증적 캐릭터들은 어땠나. 그들은 꽉 막힌 현실에 온몸으로 맞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런 원한에 찬 자기파멸적 행위도 세상에 대한 완벽한 복수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이런 체념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 노력해도 소용없어.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노력하지 마, 일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씨발 우리 다 같이 본드나 불자.”4)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쳤는데 조금도 개선되는 것이 없다. 이럴 때 많은 사람은 세계를 바꾸기보다 세계에 적응하는 편이 낫다고 약삭빠르게 판단한다. 다들 사회 개혁 대신 자기 계발에 몰두했다. 우리는 남보다 한 발짝 앞서 가기 위해 ‘열심히’ 산다. 그런데 이상하다. 본인이 ‘잘’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진 않는다.”5) 쉬운 예를 들어 보자. 사례 하나, 끊임없는 산업 생산이 자원을 고갈하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경제 성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따른다. 사례 둘, 평균 임금을 받아서는 자기 집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부동산 가격이 유지되거나 더 올라야 한다는 주장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의 약속은 어떤 특권층만을 위하는 통치의 차별로 공공연하게 작동한다. 냉소하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2) 박민규, 「갑을고시원 체류기」, 『현대문학』 2004년 6월호. ; 박민규, 「갑을고시원 체류기」, 『카스테라』(한국문학전집 20), 문학동네, 2014, 290쪽.
3) 김애란,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255~256쪽. 이 작품은 소설집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에 묶일 때 「자오선을 지나갈 때」로 제목이 수정되었다.
4) 김사과, 「나와 b」,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 김사과, 「나와 b」, 『영이』, 창비, 2010, 137쪽.
5)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62쪽.



3. 시와 정치―감각적인 것의 분배, 아니 ‘그 이상의 것’


그리고 모두가 경험하고 있듯이, 사람들을 살게 하는 정치가 아니라 사람들을 죽게 내모는 통치가 한국에 지속되고 있다. 삶의 가능성을 봉쇄해 버린 암울한 정국이다. 물론 그 와중에 문학이 잠자코 있던 것만은 아니다. 좋은 삶을 향하는 동력으로 문학이 힘을 보태야 한다는 담론 ― 2008년 촛불집회로 재점화된 ‘시와 정치’ 테제는 이와 같은 국면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론적 절합과 실천적 투쟁의 선봉에 섰던 진은영은 이런 고뇌를 토로했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 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6)
난제를 붙들고 진은영은 고민했다. 정치의 운동성과 예술의 미학성을 문학으로 하여금 어떻게 동시에 추구하고 달성하도록 할 것인가? 이 문제는 한국 문학사에 제출된 지는 오래되었으나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은 아포리아였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그녀는 랑시에르가 개진한 문학의 정치론을 참조한다. “정치는 공동체의 공동의 것을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하는 일을 하며, 새로운 주체와 대상들을 공동체에 끌어들이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시끄러운 동물들로만 지각됐던 사람들의 말을 들리게 하는 일을 한다. (……) 즉, 예술의 가시성의 행위들과 형태들이 감성의 분할과 재구성에 개입하는 방식, 공간과 시간을, 주체와 대상을, 공동의 것과 독자적인 것을 분할하는 방식이다.”7)
보인다는 것‧들린다는 것‧만져진다는 것‧냄새를 맡는다는 것‧맛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랑시에르의 입론에 의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조건 아래에서 나뉜다. 정치는 감각의 순치와 배제를 실행하며 재구성된다. 랑시에르는 ‘치안’을 하나의 무리로 사람들을 조직하고, 위계에 따라 각자의 자리와 기능을 분배하는 통치 과정으로 정의한다. 치안 논리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합당한 몫을 소유한다. 부분들의 총합은 전체의 양과 동일한데,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여분이나 공백을 갖지 않고 그 자체로서 온전하게 여겨진다. 또한 치안의 배치 안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반면 ‘정치’는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 해방의 실천이자 평등의 과정으로 정의된다. 정치 논리에 따르면, 치안이 평등을 방해하는 그곳에서부터 정치가 파생한다. 치안 논리에서 온전하다고 여겼던 전체는 실상 많은 요소를 제외하고 있다. 구성원 개인의 합당한 몫이라고 지칭되던 것이, 실제로는 전체의 셈에서 누락된 누군가의 몫을 빼앗은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치안이 행하는 분배는 분란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재분배 ―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통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들리게 하여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되찾는 정치의 역할이 중요해진다.8)
통상적으로 감각은 개별적인 오감(五感)으로, 지각은 감각적 인식들의 총합으로 이해된다. 유념할 점은 이들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주체와 외부의 상호 작용으로 생성되고 변용된다는 데 있다. 감각은 장(場)의 일부로서 다른 것들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므로, 전체로 파악해야 하는 지각과 구분되기는 어렵다. 어떤 대상을 지각하는 행위는 감각의 요소에 더하여 대상이 놓인 장을 함께 받아들인다는 것이기에, 신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우리는 총체적인 지각을 활용하면서 지각의 장인 세계에 거주하게 된다. 이를 간명하게 축약하면 다음의 명제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신체에 의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한, 우리의 신체로 세계를 지각하는 한, 세계의 경험을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소생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9)
이에 따르면, ‘세계-에로-존재(être-au-monde)’를 현현하고 주체와 세계를 연결하는 지향성, 그중에서도 의식적 지향성보다는 신체적 지향성이 전면화한다. 지각은 신체를 가진 자의 경험이고, 지각에 대한 사유는 곧 신체에 대한 사유이기에 그렇다. 신체는 경험성에 바탕을 둔 시간과 운동성에 기반을 둔 공간에 거주하며, 지각을 통해서 세계 내에 머무르는 동시에 세계를 향해 초월한다. 의식과 신체를 통합한 ‘고유한 신체(le corps propre)’는 신체를 과학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객관적 신체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현상학의 신체론은 일반적인 신체의 보편성보다는 단독적인 신체의 특이성을 논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와 소통하는 신체의 본원적 표현 양태 중 하나가 예술이고, “보여주는 것도 말하는 것도 신체이다”.10) 그리하여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을 탐구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신체―감각에 연동한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신체와 세계가 빚어내는 구체적인 양상을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시간들과 공간들,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의 구획 안에 문학으로서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의 정치는 실천들, 가시성 형태들, 하나 또는 여러 공동 세계를 구획하는 말의 양태들 간의 관계 속에 개입한다.”11)
정치의 공간은 특정한 감각들의 재배치를 축으로 열린다. 이때 문학은 감각들의 재배치를 추동하는 결정적 동인으로 자리매김하며 존재 의의를 획득한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되는 방식, 이 가시적인 것이 말해지는 방식, 이를 통해 표명되는 역량들과 무능들이다. 바로 이 점에 입각해서 공동 세계를 형성하는 대상들의 구획, 이 세계를 채우는 주체들과 이 세계를 보고 호명하며 이 세계에 대해 행동하는 주체들이 지닌 역능들의 구획 속에 ‘문학으로서’ 문학의 정치를, 그 개입 양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다.”12)
문학과 정치가 얽힌 복잡한 미로는 랑시에르에 의해 출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건대, 그런 행복한 봉합은 오래가지 않은 듯하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문학의 수행성을 통해 치안에서 정치로 이행하기는 실로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나. 그것을 제대로 의미화한 작품이 쓰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백의 그림자』(2010)를 비롯해 황정은이 쓴 소설들을 랑시에르 이론이 적실하게 구현된 예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소설을 많은 독자가 찾아 읽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끼친 사회적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는 이와는 별개로 취급될 사안이다. 치안이 아닌 정치의 시대는 아직 저 멀리 있다.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체감하다시피.


6)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6쪽. 이하 이 절의 정치미학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박인환 문학의 정치미학적 연구』(성균관대학교, 2015) 서론의 분석에 근거한다.
7)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옮김,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08, 55~56쪽.
8)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정치, 동일시, 주체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도서출판 길, 2008, 133~138쪽 참조.
9) 메를로-퐁티, 류의근 옮김,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지성사, 2002, 316쪽.
10) 메를로-퐁티, 위의 책, 305쪽.
11)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12쪽.
12) 자크 랑시에르, 위의 책, 17쪽.



4. 한국 문학을 낳은 세계의 전복


랑시에르는 문학과 정치를 근사하게 결합시켰다. 그런데 이로 인해 예상치 못한 말썽거리도 생겼다. 어떤가 하면 그의 자장 안에서 모든 문학 작품은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현저하게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품에는 고유한 감각을 진동시키고 새로운 감각을 배분할 가능성을 찾아낼 여지가 있다. 랑시에르가 열어 놓은 지평에서 평론가는 얼마든지 긍정적인 해석을 할 면면을 작품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 이것을 두고 주례사 비평이라니! 평론가로서는 억울할 법하다. 그렇지만 평론가에게 가해지는 이런 종류의 비난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나 같은) 평론가의 주장대로라면, 한국 사회에서 문학에 의한 감각적―정치적 해방은 벌써 몇 번이나 이루어지고도 남았을 테니까.
새삼 다시 부상한 문학과 정치 담론은 랑시에르 철학이 한국 문학장으로 전유되면서 여차저차 마무리되었다. 문학이 미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일 수 있는 예술 형식이라는 데 굳이 비판적 견해를 표출할 이유는 없었다. 날이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던 문학은 오랜만에 스스로의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자문해 보자. 이것은 문학에 몸담은 사람들의 손쉬운 ‘정신 승리법’이 아니었던가. 자기 자신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문학 작품을 쓰고 읽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올바름에 가닿을 수 있다는 인식은 얼마나 단순하고 무책임한 것이었던가. 경제 부양 효과를 기대하고 부자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을 방치했다가 한국이 ‘헬조선’이 되어버렸듯이, 문학과 정치에 관한 랑시에르 테제에 안심했던 한국 문학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요즘 한국 문학에 대한 독자 신뢰도는 급전직하로 추락 중이다. 2015년 신경숙 작가 표절 사태와 그로 인해 불거진 문학 권력 논쟁이 대표적이었다. 작가 개인의 잘못으로 촉발된 스캔들은 기존의 문단 권력을 문제 삼는 데까지 나아갔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 문인들이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사유하며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2008년 열린 담론장은 한국 문학이 새롭게 변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모든 논의가 랑시에르 의견으로 너무 빨리, 너무 편하게 매듭지어졌다. 전환의 매개가 될 수 있었던 사건은 사건 이후의 충실성이 결여되면서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13)
2015년 드러난 문학계의 치부를 혁신을 위한 아픈 ‘사건’으로 삼자는 언급도 있었다.14) 그런 차원에서 현재 한국 문학장을 주도하는 주요 문예지 《창작과비평》《문학과사회》《문학동네》는 편집위원을 교체하는 등 쇄신을 표방했다. 그렇지만 뭔가 나아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전에 한국 문학은 난관에 봉착했다. 불운이라고 변명할 수조차 없는 인재(人災)였다. 2016년 가을, 박진성 시인 등 다 거명하기에 벅찰 정도로 많은 문인의 성폭력 범죄가 ‘뒤늦게’ 세간에 알려졌다. 2015년 스캔들로 한국 문학이 대중 독자를 잃었다면, 2016년 스캔들로 한국 문학은 문예창작학과 학생 등 핵심 독자를 잃었다. “터질 게 터졌다.”15) 이에 대한 문단의 반응이었다.
알고 있었는데, 왜 가만히 내버려두었는가. 그렇게 말한다면 성폭력을 저지른 문인들은 ‘정범’의 책임을 져야 하고, 나를 비롯한 문인들은 ‘종범’의 책임을 져야 한다. 자,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는가? 특히 자신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남성 문인들 ― 우리 말이다. 새삼스레 문학을 한다는 알량한 자의식이 얼마나 쉽게 본인을 자기기만적 연민에 빠지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문학 작품을 읽고 쓴다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지향하는 문학적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국민을 배신하는 정치인의 행위에 문인들이 분노하고 저항적 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문학(적 삶)은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혼자만의 만족일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 문학(적 삶)이라고 한다면, 문학 따위 할 필요 없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공감은 문학의 오래된 주제이다. 실제로 많은 문인이 작품과 에세이에서 타인에 대한 윤리를 강조한다. 그런데 그것을 타인에게만 도덕적으로 요구하고, 자신의 생활이 자신의 글을 배반하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놓아 둘 때, 문학을 한다는 행위 ― 문학은 더럽고 흉악해진다. 그럼 어떡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물음과 마주하여 나는 앞에 서술한 루카치의 통찰을 재차 끌어오고 싶다. 그의 깨져버린 믿음은 오늘날 한국 문학에 대한 불신과 불만 속에서 새로 교직돼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68년, 루카치는 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젊은 시절 썼던 ?소설의 이론?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소설의 이론?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제가 느낀 절망감의 표현이었습니다. (……) 아무리 오류가 많더라도, 이 책에서 분석한 문화를 낳은 세계를 전복해야 한다는 호소를 담았다는 점은 말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혁명적 변혁의 필요성을 이해했습니다.”16) 비할 수 없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루카치는 희망을 모색하려 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혁명적 변혁’으로 희망을 창조하려고까지 했다. 그의 언설을 빌려 나는 호소한다. 지금의 한국 문학을 낳은 세계를 전복해야 한다고. 차갑게 비웃지 말라.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그 실천 중 하나가 한국 문학의 근본적 병폐인 남성 중심주의를 깨부수는 페미니즘의 물결을 기꺼이 환영하고 동참하는 일이다. 당장 이것이 우리가 펼쳐야 할 문학의 정치이다.


13) 내가 거론하는 진리와 주체는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참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지식의 식별을 거부하고 지식의 지형 자체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과거의 지식 전체가 진리로 인해 추방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상황은 이전의 다수가 유지되는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이므로 그 변화는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상황의 일부를 바꾸면서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혀 나간다. 바디우는 ‘사건’에 의해 생산되는 진리를 옹호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개입 및 탐색 같은 ‘주체의 실천’이다.
개입은 이름 없음을 그 이름으로 삼는 사건에 최초로 이름을 부여하여 사건이 상황에 귀속된 것임을 언표한다. 탐색은 진리를 상황 속에 부과하는 중요한 실천으로, 상황의 원소들을 법칙성의 외부에서 분리한다. 사건의 정원외적 이름에 접속된 다수들을 식별하면서, 사건에 접속된 다수와 비-접속된 다수로 상황을 재편하는 것이다. 또한 탐색은 유한한 실천이지만, 그 실천이 지향하는 충실성의 절차는 무한하다. 그렇게 진리는 새로운 다수를 끌어오며 지속되고, 실천에 의해 영원성을 보장받는다. 실천적 과정은 ‘강제의 과정’이기도 하다. 강제는 탐색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충실성의 절차로 진리가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항목으로 위치 지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진리를 위한 장소를 상황 속에 건설해내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후에 확증되기에 진리가 언제 상황에 관철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강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실천이 담보돼야 한다. 알랭 바디우, 조형준 옮김, 『존재와 사건』, 새물결, 2013. ; 서용순, 「바디우 철학에서의 존재, 진리, 주체 : 『존재와 사건』을 중심으로」, 『철학논집』 27,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1, 98~110쪽 참조.
14) 강동호, 「비평의 장소」,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447~448쪽 참조.
15) 박다해 기자, 「“문단 성폭력 고발, 발전 없는 문단·문단권력 폐해 보여준 것”」, 머니투데이, 2016년 10월 23일.
16) 뉴레프트리뷰‧프랜시스 멀헌 엮음, 유강은 옮김, 「죄르지 루카치 : 오류와 단절하기」, 『좌파로 살다 : 좋은 삶을 고민한 문제적 인간들』, 사계절, 2014, 38~39쪽. 루카치가 범한 오류 중 하나는 소설을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으로만 단정한 것이다.










허희
작가소개 / 허희

-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에 「감각적 경계인의 정치적 사색―김경주론」과 「잔혹한 세계 : 청춘의 테제―김사과‧윤이형‧박민규 소설에 나타난 청춘의 양태」가 당선되며 등단.


《문장웹진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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