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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

  • 작성일 2023-05-04
  • 조회수 2,380

꽃섬

김재영



1.

  섬의 동쪽 끝. 연홍이 보기에 그해에는 모든 바람이 그리로 부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제주행이 결정되었다. 살고 있던 강변의 아파트는 세를 내놓자마자 임차인을 만났고, 당장 생활비를 벌 일감도 생겼다. 일감이라야 출판사로부터 의뢰받은 번역이지만, 장소에 매이지 않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기에 그녀에겐 적격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래되었지만 아직은 쓸 만한 바닷가 이층집을 싸게 얻을 수 있었다. 집 뒤에는 널찍한 채마밭과 허름한 별채도 달려 있었다. 연홍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쳤다.

  “걱정 마.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번역을 해서 먹고살 거야.”

  마침내 마주한 바다 앞에서 연홍은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죽어 있는 심장마저도 다시 뛰게 할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며 출퇴근을 반복하던 도시의 일상과는 사뭇 달랐다. 허망한 세월처럼 한 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 강물과 달리 바다는 갯벌을 드러내며 멀리 물러났다가도 밤새 돌아와 아침이면 어미가 새끼를 핥듯이 해변을 적셨다.

  파도가 희고 부드러운 거품으로 모래알을 적시는 동안 보말이며 조개, 다시마 같은 숱한 갯것들이 새 생명을 얻듯이 그녀도 바다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없이 잇닿은 그리움인 양 쉼 없이 일렁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연홍은 깊은 잠을 잤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어지럼증도 하루가 다르게 차도를 보였다.

  때때로 차를 몰고 중산간의 곶자왈 숲에 가거나 이름 난 관광지에 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마을 뒤쪽 기생화산인 오름에 오르거나 근처 철새도래지를 둘러보며 지냈다.

  수많은 겨울철새들이 날아와 습지 일대를 가득 채웠다. 어떤 새들은 무리를 이루고, 어떤 새들은 외로이 어디론지 날아갔다. 하루는 온몸이 새까맣고 이마가 흰 새가 연홍의 눈에 띄었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동작이 웃음을 자아냈다. ‘어째서 저리 좌우를 살피는 걸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습성인가? 아니면 천적을 자주 살펴야 할 만큼 불안한 걸까?’ 일순 자기 자신이 철새처럼 여겨졌다.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에게까지 외면당한 채 외로이 이곳까지 날아온 나그네새……. 연홍은 어두운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댔다. 

  찰칵찰칵.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웬 사내가 갈대숲에 숨어 카메라 앵글을 이쪽으로 들이대고 있었다.

  “뭐예요? 당장 치우세요!”

  “쉿! 잠깐만. 조용히 좀 해.”

  “이자가 정말. 어디서 반말이에요?”

  “아, 글쎄 조용히 좀 하라니깐. 에이, 참. 글렀군, 글렀어.”

  사내가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뭐 싼 놈이 큰소리친다더니…….”

  “그쪽 때문에 중요한 장면을 놓쳤잖아요. 지금 막 수리매가 물오리 사냥하는 걸 포착했는데.”

  그제야 연홍은 뭔가 착각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미 흥분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연홍이 발끈해서 톡 쏘아붙이자, 사내가 그제야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 제가 실례했습니다. 사진에 맘을 빼앗기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그나저나 새로 이사 오셨나 봐요. 어디 사십니까?”

  “저기, 끄트머리 돌집에……. 한데 이사 온 줄 어떻게 아세요?”

  연홍은 순순히 물음에 답했다. 마을 사람과 마찰을 일으켜서 좋을 게 없다 싶었다.

  “이 동네 철새가 몇 마리 사는지도 다 아는데, 아무렴 사람을 모르겠어요? 끄트머리 돌집이라면,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서 사시는군요. 전에는 나이든 부부가 민박을 했지만 지금은 연로해서 읍내 아들네로 갔다던데. 맞지요?”

  “동네 사정을 훤히 아시는 걸 보니 주민인가 봐요.”

  “아뇨. 저는 시내 박물관 근처에서 삽니다. 하지만 틈날 때마다 이 일대를 돌며 새를 찍지요.”

  사내는 자신을 새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자세히 보니 허름한 벙거지를 눌러쓰고 얼룩덜룩 무늬가 있는 위장용 점퍼를 입고 있었다. 벙거지 아래 그늘 속에서 사내의 눈이 맑게 빛났다.

  “그럼 새에 대해 모르는 게 없겠군요?”

  “모르는 게 더 많지요. 하지만 알 만큼은 압니다.”

  사내가 농담조로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 까만 오리는 이름이 뭔가요? 종일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모양이 꼭 노망난 할망 같아요.”

  연홍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자, 사내 역시 잇바디를 드러내며 웃었다. 키 크고 깡마른 체구라서 언뜻 차가운 인상이지만 웃는 모습은 천진했다.

  “물닭 말씀이군요. 그건 오리보단 뜸부기에 더 가깝지요. 저기 보이는 게 청둥오리, 쇠오리, 그 옆으로 흰뺨검둥오리, 댕기흰죽지…….”

  사내는 자신을 고병선 박사라고 소개했다. 연홍은 연안 습지에 사는 새들에 대해 더욱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재미랄까. 오랜만에 경험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연홍은 가끔 습지에서 고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망원렌즈로 새들을 관찰하거나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그래서인지 야생의 생명체들을 만날 때마다 새록새록 애정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조류독감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방송국마다 대량 사육되던 수많은 닭과 오리를 강제 살처분하는 끔찍한 영상을 하루 종일 틀어 줬고, 곧이어 철새가 조류독감을 옮기는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연홍이 사는 해안가에서 습지로 가는 길에도 출입을 통제하는 줄이 쳐지고 밀가루처럼 하얀 방역용 약품이 잔뜩 뿌려졌다.

  마침 고 박사를 만났을 때 연홍이 물었다.

  “정말 철새가 조류독감을 옮기나요? 요즘 철새 때문에 관광객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마을 사람들이 속상해 해요. 그래서인지 습지 보호구역을 지정하자는 의견도 쏙 들어가 버렸어요.”

  “죽어 있는 철새를 검사해 보면 종종 조류독감이 발견되기는 해요. 그렇지만 일부만 병에 걸리고 나머지는 건강하게 살지 않나요? 그건 유전자 다양성 때문이에요. 잡다한 병균에 강한 새들이 많다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이 사육하는 농장은 단일 품종을 밀집 상태에서 키우니까 하나가 걸리면 농장 전체가 걸리는 거지요. 때로 그중에도 건강한 녀석들이 있어서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런 품종이 많아져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당장 쉽게 일하려고 살처분하는 거 같아요.”

  고 박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습지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날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동안 계절은 변했고 추운 겨울이 지나자, 습지를 가득 메웠던 새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이 일었다. 그건 철새와의 이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연홍은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육지에서 가져온 번역일은 이미 마무리되었는데, 새로 들어오는 일감은 없었다.


2.

  우도를 돌아 불어온 바람이 해안가 마을을 향해 거세게 불어왔다. 때로 모든 걸 날려버릴 것처럼 거칠게 불어댔지만 육지의 매서운 꽃샘바람과는 달리 세기에 비해 따스했다. 기세 좋게 육지로 올라온 봄바람은 여기저기 새 생명의 기운을 퍼뜨렸다.

  돌담 아래에서 등불처럼 피어난 노란 수선화를 지켜보다가 연홍은 문득 생각했다.

  ‘혼자 적적하게 보내느니 생활비도 벌 겸 카페를 차리는 건 어떨까?’

  그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용기야말로 구원이라지 않던가. 연홍은 아래층을 카페로 개조하고 이층 일부는 객실로 꾸미기로 마음먹었다. 손수 페인트칠을 했고, 싸게 구입한 중고가구는 볕 좋은 마당에서 깨끗이 손질했다.

  섬휘파람새 울음소리와 함께 봄은 한층 다가왔다. 창문 아래 빈터에서는 노란 청갓꽃이 화사하게 피어났고, 정낭 밑에서 멋대로 돋아난 무는 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제비 한 쌍이 처마 밑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보기 힘든 제비라서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난처했다. 새끼를 낳고 똥을 싸댈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긴 막대기를 가져와 제비집을 부수었다.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온 제비 부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집 앞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제비는 또다시 집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전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곧 산란할 시기라서 서둘러야 했던가 보았다. 연홍은 이번에도 이를 악물고 막대기를 휘둘렀다. 속으로는 흥부놀부 옛이야기가 떠올라 죄의식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얘들아, 미안해. 하지만 나도 손님을 맞이해야 해서……. 부디 다른 데 가서 살아라.’

  제비 부부는 몹시 낙담했는지 한동안 전깃줄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늘 붙어 다니던 부부였는데, 그날은 암컷 혼자 저만치 뚝 떨어져 있었고, 수컷이 다가가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 피했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얼마쯤 지나 수컷이 용기를 내어 다시 암컷에게 다가가더니 깃털을 골라 주며 아양을 떨었다.

  이제는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갔겠지, 생각하고 오후 늦게 나가보니 처마 밑이 수상했다. 짓이겨서 붙여 놓은 흙덩이가 아기 손바닥만큼 부풀어 있었다. 제비 부부는 정말이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흙과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왔다.

  연홍은 더 이상 막대기를 들 수 없었다. 스스로가 못된 구렁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막대기 대신 호미를 손에 쥐고 텃밭에 수북이 올라온 잡초를 뽑았다.

  다음날에는 오일장에서 산 상추와 고추, 호박 등 각종 모종을 텃밭에 심었다. 모판에서 웃자란 연둣빛 모종은 땅 기운을 받자 짙은 초록빛을 띠며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흙을 만질수록 쏟아져 나오는 검은 돌처럼 수많은 생각들이 호미 끝에서 생겨났다. ‘어머니는 그 힘든 농사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땀방울에 눈물 섞으며 살았을 테지. 눈물 떨군 자리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면 하루하루 그 낙으로 살아냈을까?’ 다 자란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새처럼 유독 냉정한 어머니였지만 그래서인지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너나 잘살거라’ 할 뿐.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연홍은 자기가 낳은 딸에게만은 원 없이 잘 해주리라 다짐했다. 집안일 하나 안 시키고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온갖 정성과 관심을 쏟았다. 철저한 시간 관리와 엄선된 사교육을 동원했다. 오직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정되게 살기를 바랐다. 그렇게 열심히 길렀지만 결과는 같았다. 모녀간의 불화, 그리고 오랜 단절…….


  여름철새들이 하나 둘 날아왔다. 고니, 쇠백로, 중대백로는 물론이고 희귀종인 노랑부리저어새도 간혹 눈에 띄었다. 한적했던 바닷가에도 다시 여행객들이 나타났고 카페에도 더러 손님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 연홍은 중국인 여자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삼십대 초반의 아가씨인데, 별채에서 장기투숙하기로 했다. 방세가 저렴한 대신 부엌이 따로 없어 카페 주방을 공유했다. 그녀의 이름은 ‘여여’였다. 사성이 들어 있는 중국식 이름을 발음하기가 쉽지 않아 대충 귀에 들리는 대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내 이름으로 굳어져 버렸다. 여여는 얼굴이 희고 살이 통통한 처녀였다. 서른을 넘긴 나이치고는 순진한 구석이 많고 귀염성이 있었다. 다만 어찌 된 일인지 햇빛 보기를 유난히 꺼려서 휴일에도 낮에는 절대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뒷마당에 있는 건조대에 빨래를 널 때는 모자를 쓰는 것도 모자라서 손수 만든 커다란 입마개로 얼굴 전체를 감싼 채 햇볕에 나갔다. ‘비타민 부족으로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저런담.’ 연홍은 가끔 혀를 찼다.

  밤에 대형 식료품점에 갈 때는 여여도 동행했다. 농도 짙은 발효우유는 그녀의 생필품 중 하나였는데, 밤이면 피부 관리를 한다면서 그것을 얼굴에 하얗게 펴 발랐다. 어떨 땐 아니꼬운 생각마저 들었다. ‘먹기도 힘든 걸 매일 피부에 바르다니!’ 연홍 자신은 그 나이 먹도록 피부 관리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혼자 아이를 키우다 보니 세수도 못 하고 잠든 날도 많았다. 한데 일자리를 찾아 남의 나라까지 온 여여가 황후라도 된 양 유난스레 얼굴을 관리하는 게 못마땅했다. 스스로 생각에도 괜한 심술이구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루는 저녁을 먹으면서 자동번역기를 이용해 모처럼 길게 대화하다가, 한국으로 오기 전에 비싼 비용을 치르고 안면 박피 시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여는 햇빛 때문에 다시 기미가 생기는 날에는 모든 계획이 끝장난다고 엄살을 떨었다.

  “여여, 모든 계획이란 게 뭔데?”

  “결혼이요. 무조건 한국 남자랑 결혼해 여기서 살 거예요.”

  연홍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채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그날따라 설거지 하는 여여의 가슴과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심하게 출렁여 보였다.


  손님 중에는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도 많았다. 아이들은 제비집을 발견하면 신기해하면서 주변을 서성였고, 갓 태어난 새끼의 노란 주둥이가 보이면 몹시 기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하얀 똥이 현관 앞에 떨어져 있는 걸 마땅찮아 했다.

  고 박사가 오랜만에 연홍의 카페를 찾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주말 손님을 받을 준비로 다소 부산한 오후였는데, 고 박사가 불쑥 나타났다. 예닐곱 명의 청소년이 뒤따라 들어왔다. 오는 동안 목이 말랐는지 아이들은 제각각 음료부터 주문했다. 풋풋한 청소년들로 북적이니 실내 가득 활기가 차올랐다. 고 박사 손에는 통발처럼 얇은 망을 댄 물건이 들려 있었다.

  “박사님, 물고기 잡으러 오셨어요?”

  “고작 이런 걸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나요? 모기채집기예요. 아열대 모기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들어와서 개체 수 변화를 관찰하려고 하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그냥 뒷마당에 걸어 놓기만 하면 돼요. 작은 전구 하나 켜놓으면 모기가 저절로 찾아 들어오거든요.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마지못해 허락하자 고 박사는 학생들과 함께 뒷마당으로 가서 팽나무 가지에 모기채집기를 매달았다. 덩치가 좋은 남학생 둘은 팔뚝만 한 망원렌즈와 커다란 삼각대를 각각 들고 있었다. 한 남학생이 다가와 자랑스레 말했다.

  “이 망원렌즈는 박사님 거고요, 저희는 돌아가면서 한 번씩 사용해요. 멋지지요?”

  고 박사가 손뼉을 치며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 그럼 이제 새를 만나러 가자!”

  연홍도 호기심이 일어 아이들을 따라갔다. 신이 난 아이들은 날아오르는 새떼를 발견하면 일제히 탄성을 질러댔고, 쉼 없이 떠들어대면서 사진기를 들이댔다. 참고 있던 고 박사가 야단을 쳤다.

  “이 녀석들아, 조용히 좀 해라. 그러다 새들이 다 날아가겠구나.”

  “그럼 우리도 날아가면 되지요.”

  누군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고 박사가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너희들도 새가 되는 거다. 각자 숨겨 둔 날개를 꺼내 보거라. 시작!”

  아이들이 깔깔 웃더니, 하나 둘 팔을 펴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로만 선 채 목을 길게 뺀 아이는 자신을 백로라고 했다. 몸집이 작은 다른 아이는 두 손을 입에 갖다 댄 채 박새처럼 짹짹거렸다. 여학생 하나가 머리를 좌우로 뒤흔들며 물닭 흉내를 내자 연홍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자 달린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학생은 근처 큰 바위 위로 뛰어오르더니, 가마우지라면서 어깨를 잔뜩 치켜 올리고 양팔을 등 뒤로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쁘장한 여학생이 잘린 나무의 밑동 위로 올라가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채 무릎을 감싸 안았다. 연홍이 여학생에게 무슨 새냐고 물었다.

  “긴꼬리딱새요. 꼬리가 길고 우아해서 정말 예쁘거든요. 저처럼. 헤헤.”

  “정말 멋지게 표현했구나.”

  연홍의 감탄에 이어, 고 박사가 한 마디 했다.

  “그런데 긴꼬리딱새는 수컷만 꼬리가 긴데…….”

  그러자 예의 그 덩치 큰 남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민아, 너 남자였구나! 어쩐지……. 큭큭.”

  민아라고 불리는 여학생이 주먹을 불끈 쥔 채 남학생을 향해 돌진했다. 남학생은 재빨리 몸을 피해 달아나다가 넘어질 뻔했다. 아이들이 일제히 자지러지게 웃었다.

  연홍이 고 박사에게 어디서 온 학생들이냐고 물으니, 중산간 마을에 있는 대안중학교 학생들인데 생물 시간에 철새탐조를 한다고 했다.

  “이 학생들은 농사도 짓고 스스로 학비도 벌어요. 기특하지요? 대신 학비가 싸기 때문에 학교 재정은 어려운가 봐요. 그래서 뜻있는 지역민들이 강사비도 안 받고 가르쳐주기도 한답니다.”

  “박사님한테 배우는 생물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자연 속에서 배우고 스스로 노동도 하는 아이들이라니. 대단하네요.”

  순간 연홍은 오랫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한 딸을 떠올렸다. 늘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초조하고 침울하게 청소년기를 보낸 딸과 그 친구들……. ‘어떤 부모들인지 참 용기 있구나. 어째서 난 이런 선택을 못 하고 아이를 입시지옥으로 몰아넣었을까.’ 부러움과 더불어 후회가 밀려왔다.

  가마우지 흉내를 냈던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박사님, 철새들은 어떻게 그 먼 길을 날아서 여길 찾아오지요?”

  고 박사가 좋은 질문이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동하는 철새가 방향을 인지하고 항로를 결정하는 근거로는 태양 컴퍼스에 의한 것, 육지 지형의 기억이나 지자기의 지각에 의한 것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잠시 아이들을 빙 둘러보았다.

  “새들은 말이야…… 종에 따라 서로 다른 능력을 사용해. 분명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다는 거지. 사실 인간이 과학을 통해 알아낸 지식은 극히 일부라서 소라껍데기로 바닷물을 퍼내고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아. 그러니까 조류는 지능이 낮네 높네 하는 말로 쉽게 낮추어보면 될까? 특히 닭대가리라는 욕은 너무…….”

  그때 박새로 변했던 아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박사님,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학업 성적만으로 판단하고 일렬로 줄을 세우는 건 정말 싫어요. 저처럼 수학은 못 하고 노래만 잘하는 학생은 언제나 밀려나거든요.”

  그러자 연홍이 끼어들었다.

  “맞는 말이야. 나에게도 딸이 있는데, 입시지옥을 거치면서 사이가 아주 나빠졌단다. 게다가 대중음악 하려는 애를 내가 억지로 행정학과에 진학시켰더니…… 지금은 집에도 잘 안 들어와.”

  이번엔 외발이 백로가 되었던 소년이 말했다.

  “에이, 우리 엄마도 만날 공부타령만 했는데……. 이 학교로 전학한 뒤로는 참견하지 않고 각자 열심히 사니까 다시 친해졌어요. 아주머니도 그렇게 해보세요.”

  “가르쳐줘서 고마워.”

  연홍은 학생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날 저녁, 연홍은 오랜만에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니?”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뭐. 이번에 음반 계약을 하려 했는데, 대표란 자식이 소식도 없이 사라졌어. 젠장. 그 사기꾼을 그냥…….”

  딸아이는 거친 표현을 써가며 음반회사 대표를 욕했다. 그러려니 하고 들어 주었는데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창문 밖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핏빛 노을 속으로 외떨어진 새 한 마리가 뒤늦게 둥지를 찾아가는 게 보였다. 얼마쯤 지나 딸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웬일이야.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며 심술궂게 소리칠 땐 언제고?”

  “내가 언제……. 그래, 미안하다. 나 이사했어. 여긴 제주도야.”

  딸이 또다시 침묵했다. 노을마저 사라지고, 어둠 속에 누운 바다가 이리저리 몸을 뒤채는 소리만 들려왔다.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이젠 아예 인연을 끊자는 거로군.”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어. 어차피 너는 집에 잘 안 오잖니. 혼자 몸 어디에서 산들 문제이랴 싶어서…….”

  “됐고! 차라리 잘 되었네. 이제는 집에 안 들어간다고 야단맞을 일도 없을 테니. 한데, 제주도 어디야? 아니 뭐, 그것도 됐고! 각자 알아서 잘삽시다. 아프지나 마셔!”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평소처럼 불편한 대화였지만, ‘아프지나 마셔’라는 마지막 말에 가슴이 아려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카드빚을 좀 갚아 주겠다고 할 걸 그랬나? 아니, 낭비하는 버릇 고치라고 따끔하게 야단이라도 칠 걸 그랬나?’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세상일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하려고 신이 자식을 내준다 하더라.”라며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던 어머니……. 연홍이 고향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툭 내던졌던 말이 세월을 건너뛰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3.

  새로 돋은 갈대며 억새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키를 키웠다. 연홍은 혼자 습지 안쪽까지 갔다. 가는 길에 보이는 폐쇄된 양식장이 눈에 거슬렸다. 앙상하게 남은 쇠파이프는 철거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검은 비닐이 흉물스럽게 매달려 있었고, 거대한 원형 시멘트 수조는 메마른 바닥을 드러낸 채 웅웅 소리를 내며 무참히 누워 있었다.

  폐허가 된 양어장을 지나 좀 더 걸어가자 마당 정갈한 작은 절이 나왔다. 대웅전 앞에서 합장을 하고 뒤돌아 나오다가 노승과 마주쳤다.

  “스님, 허락도 없이 들어와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습니다.” 

  “허락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래,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딸아이와 불화가 심해 속상하고, 또 그 애의 앞날도 걱정이 되어 해결책을 알려주세요, 했어요.”라고 하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과거에 붙들린 자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미래를 걱정하는 자는 불안으로 잠 못 든다고 하지요. 그저 사바세계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다 보면 답이 생길 겁니다.”

  절에서 나와 습지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붉은색 벽돌 건물이 보였다. 대문 앞에 적힌 안내표지판을 읽어 보니 문 닫은 양수장이었다. 벽을 타고 자란 넝쿨식물에 휩싸인 오래된 건물은 신비하고 고풍스럽게 보였다. 건물 옆으로 작은 호수가 있었고, 호수 주변에는 수령 높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다. 새로 솟는 용천수 피압면의 대수층에서 지하수가 누출되는 압력으로 땅에서 솟아나는 물.

로 채워져서일까.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물이 맑았다. 물고기가 이리저리 헤엄치고, 작은 새들이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번갈아 목욕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늘 어머니나 딸 때문에 힘들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닐지도 몰라. 언제나 내가 제일 문제였는지도……. 어째서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살았던 걸까?’ 돌이켜보면 어머니도 일찌감치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자식을 키운 가여운 분이었다. 어려운 형편이라 아들 하나 겨우 대학에 보냈을 터. 둘째인 연홍마저 대학에 가겠다고 나서니 난감했을 거다.

  호수에 비친 벽돌 건물이 바람결에 잔잔히 흔들렸다. 흔들리는 수면 위로 야속한 딸아이의 얼굴과 ‘알아서 잘살거라’ 하며 한숨짓던 어머니의 모습이 뒤섞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여여 혼자서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늘 쓰고 있던 입마개도 없이 나온 걸 보면 꽤나 급했던 모양이었다. “여여, 지금 그 모습 정말 예쁘다. 사진 찍어 두고 싶네.” 연홍이 전화기에 장착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자 여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왜 이러세요. 빨리 걷지 않으면 이거 다 젖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지 배시시 웃었다.

  여여 말대로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다.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가득했고 새들은 대지 위를 낮게 날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나 싶더니 곧바로 소나기가 쏟아졌다. 지나가는 차량들도 속도를 내어 빠르게 스쳐갔다. 이런 날씨에 한가하게 찻집을 찾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여여마저 으슬으슬 춥다면서 일찌감치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려서 연홍 혼자 창가에 앉았다. 그때 새끼 제비 한 마리가 그녀의 무심한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찌 된 일인지 처마 밑 흙바닥에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둥지와 전깃줄 사이에서 시험비행 하는 걸 보았는데, 어쩌다가 집에 들어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미 새가 자꾸 울어대며 건드렸지만, 새끼는 몇 차례 움직여 보더니 이내 날개를 늘어뜨렸다. 깃털이 젖어 몸이 무거워진 모양이었다. 어미 새는 안절부절못하며 처마 앞의 전깃줄 위로 날아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가서 도와줘야 하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고 나서려다가 멈추었다. ‘안 돼. 스스로 이겨내야 야생에서 살아갈 수 있다잖아.’ 결국 어미 새도 포기했는지, 새끼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몸을 맞댄 채 가만히 있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요량인 것 같았다.

  기다린다는 것. 지켜만 본다는 것. 연홍에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춘기 딸아이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려 주지 못했다. 지켜보는 대신 번번이 참견했고, 기다리는 대신 억지로 사교육을 시키며 아이를 몰아세웠다. 그렇게 해서 겨우 대학에 진학시켰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느라 몇 년간 고생한 보람도 없이 번번이 시험에서 떨어지자, 딸은 드디어 제 엄마를 원망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더러 이 고생을 또 하라고? 지금까지 내 인생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더? 엄마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야. 성공한 딸이지.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 고급 공무원직을 사랑한 거였어. 이젠 안 속아!” 연홍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 짐을 싸서 나가버린 딸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수의 꿈을 좇겠다며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조여 왔지만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홍은 자식에 대한 모든 기대와 염려를 내려놓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어졌다. ‘아등바등 힘들게 직장 다니며 돈 벌면 뭐 하나. 그저 내 맘대로 살면 그뿐이지.’ 그즈음에 그녀가 이끌린 데가 이곳 섬이었다.

  연홍은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가 그치기를 기도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밀린 부엌일을 마칠 때쯤 비가 그쳤다. 푸른 하늘이 열리고 밝은 햇살이 다시 세상을 환히 비추었다. 창가로 다가가 보니 새끼 혼자 부르르 몸을 털며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잠시 뒤에 어미가 곤충을 물어다 새끼 주둥이에 밀어 넣는 게 보였다. 먹이를 먹고 난 새끼가 다시 날개를 파득거렸다. 깃털 사이로 바람과 햇볕이 스며들어 솜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전깃줄 위에 앉은 어미 새도 더욱 힘차게 울어댔다. 이윽고 바닥에서 몸을 뗀 새끼가 온 힘을 다해 날아올랐다. 테라스 난간에 앉아 잠시 쉬더니 이내 전깃줄 위로 올라섰다. 연홍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고 박사와 학생들은 모기 개체 수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왔다.

  하루는 고 박사가 가슴에 무언가를 품고 나타났다. 그날따라 학생들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둥글게 선 학생들 앞에서 고 박사가 가슴에 품은 것을 꺼냈다. 둘둘 말린 손수건을 펼쳐 보니 죽은 직박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고 박사가 침울하게 말했다.

  “오는 길에 죽어 있는 걸 발견했어요. 자동차 사고였지요.”

  “새도 사고를 당하나요?”

  연홍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요. 이 섬에서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마리가 사고를 당합니다. 과속하는 차량의 유리창에 부딪치기도 하고, 풍경이 비치는 외장재로 만든 건물을 향해 날아가다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노란 모자를 눌러쓴 여학생이 삽을 들고 와 함께 무덤을 만들어 주자고 제안했다. 팽나무 아래 작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직박구리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검은 흙 위에서 새는 고개를 늘어뜨리고 배를 드러낸 채 가만히 잠들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잿빛 솜털이 따뜻한 해풍에 살며시 나부꼈다. “미안하다, 새야!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렴.” 하고 누군가 나직이 속삭였고, 몇몇 아이들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잠시 뒤에 실내로 옮겨 모두 탁자에 둘러앉자 고 박사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청화백자 도자기였는데 원형의 접시 가운데에 특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학생들이 먼저 그 문양에 흥미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운데에 아주 작은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중심으로 상징적으로 보이는 여러 형상이 연결되어 있었다. 눈을 초롱초롱 뜬 채 살피는 아이들에게 고 박사가 무슨 문양일까, 하고 물었다. 아이들이 하나씩 답을 말했다.

  “가운데 구멍 아래 있는 것은 사람처럼 보여요.”

  “구멍 오른쪽은 네 발로 걷는 동물처럼 보이고…….”

  “구멍 위로 그려진 세 가닥 실금은 식물이군요!”

  연홍이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그녀도 답을 말했다.

  “풀 위쪽에 있는 흰 동그라미와 검은 동그라미는 해와 달을 뜻하나 보네요. 한데 구멍 왼쪽은 뭐지요? 새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그제야 고 박사가 설명을 했다. 

  “그건 새와 물고기를 합한 모양이에요. 날개와 지느러미로 물속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생명들이죠. 이 모두를 합해 ‘인드라망’ 문양이라고 불러요.”

  “인드라망이 뭔데요?”

  아이들의 호기심이 최고조에 달하자 고 박사가 인드라망 산스크리트어로 인드라의 그물이라는 뜻. 끊임없이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함.

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생명의 그물이지. 가운데 있는 이 구멍을 그물코라고 생각해 봅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이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그물코예요.”

  긴꼬리딱새를 흉내 냈던 민아가 높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된 그물코니까 작은 생명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옳지, 바로 그거야. 새의 암수 구별도 못 하더니 그새 득도를 해버렸네.”

  고 박사 말에 아이들이 하하 웃자 연홍도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4.

  마당 잔디를 가꾸느라 땀을 잔뜩 흘리고 난 어느 오후, 고 박사가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찾아왔다. 살집 좋고 낯빛이 흰 중년 남자를 그는 장 소장이라고 불렀다. 장 소장은 목소리며 말투가 호쾌했다. 시청 근처에서 아내와 함께 병원을 운영하는데, 봉사활동으로 외국인 인권단체를 돕는다고 했다. 아마도 여여를 도울 일이 있을까 싶어 데려온 것 같았다. 연홍이 대뜸 물었다.

  “장 소장님, 혹시 가까이에 한국어 교실이 있을까요?”

  장 소장은 즉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잠시 뒤에 여여를 불러 옆에 앉혔다. 그는 근처 읍내에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실이 있다면서 약도까지 그려 가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여였다. 여여는 한국어 교실에 다니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여여, 혹시 햇볕 쬐는 게 싫어서 외출 안 하겠다는 거야? 걱정 말아요. 수업은 보통 저녁에 있으니까.”

  “절대로 안 가요, 사장님. 나, 동영상 보면서 혼자 공부할 수 있어요.”

  그러고는 자신의 전화기를 가져와서 한국어 강좌 동영상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연홍은 여여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지켜보던 고 박사가 화제를 바꾸었다.

 “아참, 지난번에 보니까 모기채집기에 구멍이 났더군요.” 

  고 박사는 장 소장더러 여여와 조용히 대화해 보라고 청하고는 실과 바늘을 챙겨 뒷마당으로 나갔다. 연홍도 자리를 피해 줄 겸 따라 나갔다.

  “강풍에 나뭇가지 따위가 날아와 찢어 놓은 모양이에요. 지난번에는 늦어서 그냥 돌아갔지만 오늘은 수선해야겠다 싶어서 들렀어요. 마침 근처 절에 볼일도 있고 해서.”

  “근처 절에요? 혹시 습지 안쪽에 있는 작은 절 말씀인가요?”

  연홍이 산책길에 들렀던 걸 이야기하자, 바느질하던 고 박사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 절이 바로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절에서 태어나요? 그럼 혹시…… 부친이 대처승?”

  고 박사는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가 원래 신방(무당)이었어요. 아실 테지만 섬은 풍랑이 잦아 마을마다 신당이 있고 굿이 흔했지요. 4·3으로 부모님을 잃은 제 어머니를 양녀로 거둔 분도 마을 굿을 관장하던 신방이었대요. 그래서 양어머니에게 저절로 굿을 배웠나 봐요. 한데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굿을 못 하게 했다지요. 마을공동체를 지탱하는 마을 굿도, 풍어제도 못 하게 훼방 놓고 신당은 허물어버렸지요. 심지어 굿하면 경찰서로 붙잡아가기도 했대요. 제주 전통문화는 모조리 낙후한 거라 치부되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도 학교에서 제주말을 쓰면 선생님한테 혼나고 반성문 썼던 기억이 나요. 가끔 회초리도 맞았지요. 표준말을 써야 한다나 뭐라나.”

  늘 침착하던 고 박사지만 옛 기억 앞에서는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조선어 말살정책과 비슷하네요.”

  “그래서 때로 태극기를 달아 놓고 굿을 벌였대요. 친정부 집안에서 하는 굿이니 잡아가지 말란 뜻으로. 참 희한한 세월이었지요. 마을 굿은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문화적 매개였는데 무조건 미신이라 치부하다니…….”

  고 박사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연홍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절에서 태어나신 거예요?”

  고 박사는 바느질하던 실에 매듭을 짓고 나서 천천히 입을 떼었다.

  “태극기 달고 굿을 해도 탄압을 받게 되자 아무도 더 이상 굿을 청하지 않더래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자 살 방도가 없었던 거지요. 만삭의 임산부였던 어머니는 무조건 절을 찾아가서 공양간 일이라도 좋으니 먹여만 달라고 했답니다. 재바르고 눈치 빠른 어머니가 워낙 일을 잘하니까 스님께서는 아이를 낳은 뒤에도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해주었나 봐요. 지금도 기억나요. 어머니는 새벽이면 일어나 절에 가서 일을 하고, 바짓가랑이에 아침이슬 잔뜩 매달고 집으로 돌아와 제 아침밥을 챙기셨어요. 가끔 절에서 천도제나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는데, 그런 날에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셨어요. 전 그런 돈으로 학교에 다녔고요.”

  “그랬군요……. 어머니와는 잘 지냈나요? 사실 전…… 친정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신방 출신에다 공양간 보살인 어머니를 부끄러워한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더군요. 대학 입학원서를 쓸 때 처음으로 내가 제일 잘 알고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자 어려서부터 늘 지켜본 야생동물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방 아들인 내가 과학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안 그래요? 하하.”

  고 박사가 다소 과장되게 웃었다.

  “박사가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셨겠네요.”

  “아마도……. 저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셨겠지요.”

  “아, 미안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괜찮아요. 어차피 어머니와는 함께 살 인연이 아니었나 봐요. 어머니 살아생전에는 공부와 취업 때문에 육지에서 살았어요.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서도 늘 괜찮다, 괜찮다, 하시기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병이 깊으셨더군요. 한때는 불효한 저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며 술로 지낸 적도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꿈결에 나타났어요. ‘난 괜찮다, 괜찮다’ 고개를 끄덕이며 안아 주시더군요. 그때 비로소 깨달았어요. 어머니에 대한 우울한 사모곡조차 집착일 뿐이라는 걸요. 기쁘게 잘사는 게 어머니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도요. 저 둥글둥글한 오름과 드넓은 바다, 축축한 습지와 물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철마다 찾아오는 새들까지……. 이제는 이 자연이 바로 내 어머니라 여겨져요.”

  고 박사는 두 손을 입에 대고 확성기처럼 만들어 크게 소리쳤다.

  “어머니이이, 제 말이 맞지요?”

  “마치 어머니께서 들을 거라 믿는 것 같네요.”

  연홍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일설에 의하면, 인간이 하는 말과 생각은 모두 저 높은 우주에 전달되어 진동을 거듭한다고 합니다. 오래오래 보관됐다가 다시 되돌아온대요. 그러니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거듭되는 진동 속에서 제 말을 들을 수 있지 않겠어요?”

  “입 밖으로 낸 말도, 생각으로 지은 죄도 모두 우주에서 진동한다면, 우주는 정말 시끄러운 곳이겠군요.”

  그렇게 말하고 연홍은 멀리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수평선 너머 먼 곳에 있는 고향 생각이 났다. 드넓은 들판과 큰 강을 끼고 있어 대체로 풍족한 농촌. 하지만 일찌감치 도회지 풍조가 들어와서 그런지 빠르게 인심이 야박해진 고장. 단단했던 마을공동체도 점차 느슨해져 서로가 서로에게 외로운 이방인이 되어버린 곳. 고향마을 뒷동산에 누워 계신 어머니가 아련히 떠올랐다.

  ‘오랫동안 산소에도 가보지 못했구나. 하긴 살아생전에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

  후회와 자책감이 밀려왔다. 고학으로 어렵게 대학에 다니고, 스스로 번 돈으로 혼인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은 세월……. 그 원망의 말이 우주를 진동시켜 딸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걸까? 부모를 미워하며 인연을 끊고 사는 게 집안의 내력처럼 되어버렸다.

  몸집 큰 왜가리 한 마리가 물을 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때 장 소장이 마당으로 나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아무래도 여여를 설득하는 건 어렵겠어요. 고 박사, 그만 갑시다.”

 

5.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자, 바닷가에는 임시 해수욕장이 마련되었다. 모래사장은 피서객들과 텐트로 빼곡하게 채워졌고 마을 부녀회에서 설치한 대형 천막에서는 보말칼국수와 소라회, 토종닭 백숙을 팔기 시작했다. 성수기라 그런지 연홍의 카페도 손님이 부쩍 늘었다.

  숙박 손님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식사를 마쳐야 하는데 여여가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재료를 써서 중식으로 만들어내는 그녀의 요리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그날따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요 며칠 유난히 게으름을 피웠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서 피부는 백옥같이 희었지만, 얼굴이 푸석한 게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아 보여 걱정하던 참이었다. 한 달쯤 전에는 머리가 허연 초로의 남자가 찾아와서 함께 외출을 했다. 여여는 자기를 한국으로 데려온 분이라며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연홍 보기에는 그다지 믿음직한 인상이 아니었다. 여여는 중국어를 사용하기도 하는 그 남자와 함께 귤 농장에서 일하는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면서 나가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날에야 돌아왔다. 

  “여여, 어디 아파요?”

  여여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다. 매일 저녁 발효유를 얼굴에 발라서 그런가 싶었다. 여여는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이마를 만져 보니 뜨거웠다. 연홍은 당장 병원으로 가자고 일으켜 세웠다. 여여가 싫다는 표시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여, 혹시 병원비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요. 내가 내줄게.” 

  여여는 병원엔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어찌나 완강히 거부하는지, 혼자 힘으로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기조차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비상약으로 지녔던 해열제를 가져다 먹였다. 여여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자기를 그냥 놔두라고 했다. 열도 열이지만 얼굴에 상심한 표정이 역력했다.

  연홍은 해수욕장에 마련된 해녀식당에서 보말을 사왔다. 보말죽을 만들면서 혼자 지내는 딸에게도 아프고 배고픈 순간이 있을 텐데,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애달팠다. 부디 누군가의 도움이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죽을 쑤었다. 죽을 몇 숟가락 입에 넣던 여여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무슨 일이 있구나. 숨기지 말고 말해 봐요.”

  그제야 여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진짜로 아무나하고 결혼해야 해요.”

  “무슨 소리?”

  “지난번에 여길 찾아온 나이든 아저씨 생각나지요? 나를 한국으로 데려온 사람인데, 그 사람 말이 내 체류비자 기한이 이미 지났대요. 그래서 잡히면 곧장 추방된다면서…….”

  여여가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연홍이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추방되기 싫으면 늙어 빠진 자기하고 혼인하재요. 그러면서 강제로 나를…… 합법 비자 만들어 준다고 해서 왔어요. 한국 오기 전에 얼마나 많은 돈을 줬는데……. 속상해서 밤에 잠도 못 자요.”

  여여 말을 들어 보니 사기를 당한 모양이었다. 중국 시안의 농가에서 둘째로 태어난 그녀는 독생자 산아제한 조치 때문에 이름조차 호적에 올리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했다. 호적 없는 마사지사로 살던 여여는 이렇게 평생 사느니 해외에 가서 돈이라도 벌겠다 결심하고, 큰돈을 들여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 한국만 가면 무조건 한국인과 결혼하게 해준다는 브로커 말에 속은 여여가 한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시골 처녀가 세상물정 모르고 당한 일이니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어찌 보면 혼자 힘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무작정 상경했던 젊은 날의 연홍 자신을 보는 듯도 했다.


  다음날, 시청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여행객이 몰려드는 계절이라 찻집마다 빈자리가 드물었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온 여여는 사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들고 온 분홍색 가방 하나를 꼭 붙든 채였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셔츠도, 신발도 분홍색이었다.

  “핑크 공주님, 아무 걱정 말아요. 잘 해결될 거예요.”

  연홍은 장난스레 웃으며 여여를 안심시킨 뒤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잠시 뒤, 장 소장이 나타났다. 고 박사는 대안학교 관련해서 문제가 생겨 경찰서에 갔다고 했다. 

  연홍이 “문제라니요?” 하고 묻자 장 소장이 “학생 한 명이 학교를 빠져나가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나 봐요.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었나 본데 그게 발단이 되어…… 행방을 찾는 중이래요.”라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이래저래 답답한 날이었다.

  연홍이 여여와 관련해서 도움을 청하자, 장 소장은 생각보다 별로 어려울 것 없다는 말투로 답했다.

  “나랑 같이 출입국관리소로 갑시다. 마침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이니까 사정을 말하면 아마 선처해 줄 거예요.”

  장 소장 말에 연홍이 놀라 물었다.

  “그럼, 이대로 곧장 출국해야 해요?”

  “아니에요. 아마 오늘 신고하면 하루 이틀 뒤에나 떠나게 될 거예요.”

  “한데, 여여가 열이 오르락내리락 해요.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 원인을 잘 모르겠어요.”

  “여여 씨, 많이 아파요?”

  장 소장 질문에 여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예, 했다.

  “그럼 병원에 들러 건강검진부터 받아 봅시다.”

  일처리 방식이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병원으로 간 여여는 한 시간쯤 지나 돌아왔다. 여여도, 장 소장도 표정이 어두웠다. 장 소장은 “이대로 출국하기는 어렵겠어요. 정밀검사를 해야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있겠지만 급성 질환이 왔나 봐요. 우선 입원할 병원부터 찾아봅시다.”라고 하더니, 여기저기 연락을 취했다.

  여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없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연홍이 여여를 가슴에 안았다.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마는 여여의 등을 마냥 쓸어내릴 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디선가 말라 가는 초목의 옅은 냄새가 났다. 연홍은 숨을 깊이 내쉬어, 가을을 잉태한 쓸쓸한 공기를 밀어냈다.

  그날 밤,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여여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밤늦게 귀가해 겨우 눈을 붙이던 연홍은 힘겹게 눈을 떴다. 천둥번개가 치는 한밤중이었다. 비칠비칠 일어나 얼결에 문을 열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점퍼 차림의 덩치 큰 남자가 안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아줌마, 살려 주세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비에 젖은 점퍼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신발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종아리부터 발까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뒤집어쓴 모자를 벗자, 가마우지로 변했던 철우라는 남학생이었다. 연홍은 우선 수건을 건네고 따끈한 코코아를 한 잔 먹였다. 그러고 나서 자초지정을 물었다.

  “애들이랑 다투고 나서 학교를 탈출해 곧장 곶자왈 숲으로 들어갔어요. 숲이 워낙 깊고 넓어서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아 그리로 갔다가, 마침 숯가마 굽던 동굴을 발견해 거기서 잠을 잤어요. 다음날 돌아갈까 생각했는데 혼날 것 같아서…… 또 너무 창피하기도 해서 그만뒀어요. 그렇게 하룻밤을 더 잤는데, 어제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겨우겨우 숲에서 빠져나와 여기까지 무작정 걸어왔어요. 아줌마, 배고파요!”

  말하는 내내 목소리를 심하게 떨던 아이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혼낼 상황도 아니었다. 연홍은 “잘 왔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고맙다, 고마워.”라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끓여 놨던 보말죽을 덥혀 아이에게 먹인 뒤, 고 박사에게 연락했다. 한밤중이라 전화걸기가 꺼려졌지만 아이를 찾고 있을 학교 선생님들 입장을 생각하면 그게 문제이랴, 싶었다. ‘세상 어디를 가나 누구에게나 어려움 없는 인생은 없는 것 같아.’ 연홍은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내쉬었다.


 

6.

  투명한 가을 햇살을 받은 한낮의 습지가 윤슬로 반짝였다. 온갖 생명을 품어 준 키 큰 갈대숲이 가을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새떼가 이리저리 날아올랐다. 정처 없이 걸으며 그 풍경을 지켜보던 연홍은 지난봄에 처마 밑을 떠나 하루아침에 사라진 제비들을 떠올렸다. ‘제비 가족도 이제는 강남 갈 준비를 마쳤을까?’ 혼자 조용히 살겠다고 시작한 섬 살이. 하지만 제비가 날아들고, 대안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찾아오고, 여여가 함께 살고……. 게다가 계절이 오고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이 다녀갔던가. ‘여여도 지금쯤 고국에서 잘살고 있을까?’ 연홍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랜만에 여여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장 소장 주변 의사들의 도움으로 입원해서 치료까지 마치고 돌아간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청소를 하는데 오랜만에 딸아이한테 전화가 왔다. 가을날의 코스모스처럼 부드럽게 전화를 받으려 애썼다. 그래서일까? 어쩐 일인지 딸이 속내를 털어놨다. 음반회사 대표한테 사기당하고 나서 몸과 마음이 한동안 힘들었는데, 아프니까 비로소 엄마 생각 나더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나아졌어?”

  “응. 다행히 주변에서 도와줘서……. 엄마, 근데 이름이 뭐야?”

  “무슨 이름?”

  “카페 이름 말이야.”

  “꽃섬.”

  “에이, 촌스럽기는.”

  “사랑이 꽃 피는 섬을 줄인 거야.”

  딸이 멈칫하더니, 잠시 뒤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더 촌스러워. 무슨 애정결핍증 같잖아. 내가 이름 바꿔 줄게, 기다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기다리라는 말 때문일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서둘러 단호박빵을 만들었다. 토요일 오후이니 곧 대안학교 학생들이 카페 안으로 들이닥칠 거였다. 빵이 고소한 내를 풍기며 익어 갈 즈음, 학생들이 시끌벅적 안으로 들어섰다. 여름내 농사일과 바깥 활동으로 새까매진 학생들이 광주리를 들고 와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자랑스레 말했다.

  “직접 농사지은 메밀로 부친 배추전이에요.”

  “이건 삶은 감자예요.”

  가마우지 소년 철우가 가까이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이건 제가 담근 쉰다리 제주에서 찬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저농도 알코올 음료.

예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야말로 많은 걸 배웠단다. 정말 고맙다.”

  뒤따라 들어오던 고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더 고맙지요. 덕분에 땡볕도 피하고, 비바람도 피하고. 어디 그뿐인가요? 매번 맛있는 빵과 음료까지 제공받았으니.”

  고 박사와 함께 온 장 소장도 농담조로 말했다.

  “철새와 작별하는 마지막 수업이라기에 저도 따라왔습니다. 아침나절에 산비둘기를 불러 제 음식도 예약했는데……. 소식이 아직 없었나요? 산비둘기 녀석, 땡땡이를 쳤나 보네.”

  장 소장 말에 모두 까르르 웃었다. 배추메밀전과 찐 감자, 쉰다리와 단호박빵을 푸짐하게 나누어 먹고 마지막 수업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은 각자 흩어져 사진을 찍거나 채집해 온 각종 새털들을 늘어놓으며 새 이름 맞추기에 열중했다. 어떤 아이는 습지와 새를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겠다고 도화지를 펼쳤다. 공책에다 그동안 철새를 지켜본 소감을 글로 적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윽고 해가 지기 시작해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장 소장이 팽나무 아래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떼 울음소리가 소란스레 들려왔다. 새들은 무리를 지어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남쪽을 향해 열을 지어 날아갔다.

  “잘 가거라.”

  “내년에 또 보자.”

  “덕분에 행복했어. 길 잃지 말고 잘 가렴.”

  갑자기 연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멀리, 새들이 날아가고 있는 어둑한 풍경 속에서 커다란 생명체 하나가 보였다. 바람을 가르며 성큼성큼 걷는 모양새가 눈에 익었다. 아슴아슴한 저녁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젊은 여성의 실루엣이 확연히 눈에 들어오자, 연홍이 번쩍 손을 들어 흔들었다.

  “엄마! 꽃섬이 왜 이렇게 멀어?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왔잖아.”

  연홍은 짐짓 투덜대는 딸의 목소리에 이끌려 홀린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순간, 쉼 없이 출렁이던 검푸른 바다 위로 달이 떠올랐다. 휘황한 달빛에 의지해 먼 길을 가려는 철새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1)피압면의 대수층에서 지하수가 누출되는 압력으로 땅에서 솟아나는 물.
2)산스크리트어로 인드라의 그물이라는 뜻. 끊임없이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함.
3) 제주에서 찬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저농도 알코올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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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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