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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 작성일 2023-02-01
  • 조회수 2,284

가벼운 마음

김연희


아내는 알람이 울리자 끄고 밖으로 나갔다. 자는 척하고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댔다. 닫힌 문을 통해 아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드레스 룸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이동했다.
창가에서 잠을 자던 재용과 용진이 깨어났다. 녀석들은 말티푸 형제였다. 말티푸는 말티즈와 푸들의 혼합 견종으로 말티즈의 귀여운 외모와 푸들의 곱슬곱슬한 털이 섞여서 인기가 많았다. 그는 2년 전에 전문 브리더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재용과 용진을 분양받았다. 개들은 창가의 쿠션에서 침대로 뛰어 올라왔다. 그가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개들이 꼬리를 홱홱 흔들었다.
아내는 재용과 용진이 지서를 닮았다고 했다. 지서는 아내의 약국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국문과를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었다. 그도 국문과를 나와서 지서를 후배로 여겼다. 아내는 재용과 용진의 크고 까만 눈동자와 얼굴형이 어딘지 모르게 지서와 닮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데 지서는 얼마 전에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서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지서가 쓴 소설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인터넷 판 신문에 전편이 실려 있었다. 소설 제목은 『시크릿 우먼』이었다.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사는 아기 엄마인 두 여자가 아파트 층간소음의 원인을 파헤치는 내용이었다. 두 여자에게 아파트는 끝없는 미로이고,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통로이고, 지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괴상한 소설이고, 아무 내용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여운이 길었다. 거의 30년 만에 소설을 읽은 그는 충격을 받았다. 30년 전에 읽은 소설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소설들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반면에 지서의 소설은 다른 세계의 계시처럼 읽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었다. 아내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가 욕실로 갔다. 그가 샤워하는 동안 재용과 용진이 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기다렸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주방까지 따라왔다. 그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개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다리 주위를 맴돌고, 뒷발로 일어서서 그의 다리를 긁었다.
그는 개들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아내가 자주 이야기해서인지 개들을 보니 지서가 떠올랐다. 그가 지서에게 했던 말들도. 그는 전직 제약회사 CEO로서 지서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한 말들은 평범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나처럼 CEO가 될 수 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해야 앞서 나갈 수 있다, 성공은 멀리 있지 않다.
개들이 큰 소리로 짖었다. 그가 조용히 하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개들이 원하는 건 소고기 특식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개들에게 특식을 만들어 주었다.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는 소고기를 삶아서 깍둑 썰거나,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서 야채를 곁들이거나, 간 소고기를 익혀서 아보카도나 블루베리를 섞어 주었다. 아내는 자식 키울 때보다 정성이라며 못마땅해 했다.
아내가 못마땅해 하든 말든 그는 정성껏 개들에게 특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갑자기 특식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게 의아했다. 곰곰이 이유를 따져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소설가를 닮은 개들에게 소고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치기는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소고기 특식을 주지 않아도 개들이 굶을 일은 없었다. 그가 고심해서 고른 사료가 소파 앞 개들의 식기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사료를 고를 때 그는 여러 사료 회사 카탈로그를 구해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호주의 유명한 유기농 사료 회사의 제품을 골랐다. 그 회사는 호주의 시골 가정에서 방목해 키운 닭, 태평양에서 잡은 청어,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기른 감자, 당근, 사과, 곡류 등 여섯 가지 재료를 혼합해서 사료를 만든다고 광고했다. 전 재료가 유기농인 만큼 수입 개 사료 중 가장 비쌌다.
그런데도 재용과 용진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소고기 특식을 달라며 그의 바짓단을 물고 주방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안 가고 버티자 개들은 식탁 위로 뛰어올라 큰 소리로 짖었다. 그는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각자 캐리어에 넣어버렸다.
개들은 캐리어 안에서도 항의하듯 오래 짖었다. 그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커피와 베이글 샌드위치를 가지고 식탁으로 갔다. 그와 아내는 요즘 베이글에 이즈니 버터를 넣어서 아침으로 먹었다. 베이글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아내에게 톡이 왔다. 스타벅스에서 커피 좀 사다 줘. 졸려. 아내는 아침마다 비슷한 톡을 보냈다. 그가 출근할 때 사가라고 잔소리를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내는 커피뿐 아니라 당근 케이크, 초코 꽈배기, 붕어빵 같은 것들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가 번 돈으로 약국을 차렸지만, 현재 돈을 버는 사람은 아내였다.
커피를 한 잔 더 내려서 마시며 그는 하루의 계획을 세웠다. 어젯밤에 갑자기 골프 약속이 취소되어서 아직은 계획이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내서 메모장을 열어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적어 둔 메모를 뒤적였다. 다음 학기에 새로 시작하는 강의에 필요한 자료를 조사해야 했고,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낚시터에 가보고 싶었고, 집에서 한강까지 탄천을 통해서 걸어 가보고 싶었고, 옛 친구 철성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가 철성의 소식을 들은 건 골프를 함께 치는 대학 동창을 통해서였다. 대학 시절 그는 철성과 친했는데, 십 년 전에 철성이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대학 시절, 철성은 늘 주머니에 시집을 넣어 가지고 다녔고, 방학 때는 도보로 전국을 누볐다. 그는 철성을 좋아해서 기숙사가 문을 닫는 방학 때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지냈고, 도보 여행에 동참한 적도 있었다.
한참 동안 철성의 전화번호를 바라보다가 그는 문자를 보냈다. 기홍이다. 잘 지내지? 그의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철성은 편하게 답했다. 잘 지내지. 우리 졸업한 대학 앞에 우동 가게를 오픈했어. 그가 이미 알고 있다고 하자 시간이 되면 식사하러 오라고 했다. 기홍은 오늘 그쪽에 갈 일이 있는데 들러도 되느냐고 물었다. 철성은 창가 쪽에 제일 좋은 자리를 비워 두겠다고 답했다.
접시와 컵을 설거지해서 엎어 두고, 그는 외출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재용과 용진의 캐리어를 현관으로 옮겼다. 애견 유치원에 재용과 용진을 맡기고, 약국에 커피를 4잔 가져다주고, 자주 가는 화원에 들러서 철성의 우동 가게에 개업 선물로 줄 화분을 고르려면 서둘러야 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공간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와 아내가 지내는 공간과 긴 복도로 연결된 다른 공간에서 지냈다. 그 공간에는 방 두 개와 거실, 주방이 있었다. 어머니는 3년 전에 치매가 발병했는데, 절대로 요양원에 가지 않겠다고 누차 말했다. 그는 총기 넘치던 어머니가 기억을 소실해 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영민해서 주변에서 무당처럼 미래를 물어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렸다. 작년부터는 삼키는 것조차 잊었는지 먹는 걸 힘들어해서 목에 삽관을 했다. 요양보호사가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목으로 음식물을 흘려보냈다. 게다가 계속 누워 있다 보니 등과 허벅지에 욕창이 생겼다. 작은 욕창이 점점 커져서 언젠가 블랙홀처럼 어머니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아침마다 그는 나가기 전에 현관에서 어머니가 있는 공간 쪽을 바라보곤 했다. 들러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두 달째 가보지 않았다.


*



지서가 약국 아르바이트에서 하는 일은 간단한 청소와 알약을 반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약국 일의 매력이었다(누군가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일을 돕는 것이니까). 게다가 누구도 허드렛일을 한다고 지서를 무시하지 않았다. 약국장이나 황 약사나 김 실장 모두 지서가 막냇동생이라도 되는 듯 다정하게 대했다.
10시가 되면 국장은 직원들을 불러서 재용과 용진의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재용과 용진은 국장의 개인데, 아침에 애견 유치원에 등원하면 선생이 사진을 찍어서 전송했다. 사진의 콘셉트는 매일 달라졌다. 핼러윈 코스튬처럼 배트맨, 아이언맨, 슈퍼맨 같은 히어로 콘셉트부터 소방관, 경찰관이나 특이한 모자 같은 것들까지 동원되었다. 오늘의 콘셉트는 펭수였다. 펭수 모자를 쓴 개들이 순하게 렌즈를 바라보았다. 원래 귀여운 개들을 작정하고 꾸며 놓으니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국장은 개들이 펭수 모자를 쓰고 있으니 지서와 더 닮아 보인다고 말하며 웃었다.
재용과 용진의 귀여움은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지서는 따라갈 마음을 먹은 적도 없지만,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최근에 국장은 개들이 지서를 닮았고, 지서가 소설가이니 개들이 소설가를 닮은 게 아니겠느냐는 말까지 했다. 국장은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논리가 재미있는지 거의 매일 반복해서 이야기했고, 그때마다 지서는 도망가고 싶어졌다.
지서는 신춘문예로 등단은 했지만, 이제껏 소설은 딱 한 편 써보았다. 그것도 지난 학기에 들은 ‘단편소설의 이해’라는 과목의 숙제였다. 그 과목은 시작할 때 단편소설을 쓰고, 학기 내내 수업을 들으며 수정했다. 종강하고 나니 제법 그럴듯한 소설 한 편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다.
반쯤은 장난으로 보낸 소설이 새해 첫날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서야 지서는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고, 어머니는 신문 수십 부를 사서 주변에 돌렸다. 그리고 저녁에 상기된 얼굴로 돌아와서 지서를 천재 딸이라고 불렀다. 지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천재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서의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서에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고,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머니는 천재를 못 알아봤다고 말했다. 기대에 차서 이왕 소설가가 되었으니 베스트셀러를 써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어머니는 베스트셀러를 좋아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서점에 가서 당시의 베스트셀러를 한 권씩 사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 책들을 느리게 읽었다. 어머니의 방에 있는 2단짜리 나무 책장에는 그런 식으로 모은 베스트셀러들이 꽂혀 있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도가니,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82년생 김지영 등 문학 작품에서부터 정의란 무엇인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 누가 내 치즈를 옮겼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인문사회 책까지. 어머니는 말했다. 베스트셀러 별거 아니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거야. 사람들은 달콤한 사랑 이야기, 통쾌하게 해결되는 범죄 이야기, 부자들이 불행해지는 이야기를 좋아해. 요즘은 판타지도 인기가 있는 것 같더라. 해리포터 시리즈 알지? 그거 쓴 여자 갑부가 되었잖아. 안경 쓴 소년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이야기일 뿐인데.
할 수만 있다면 지서도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K. 롤링처럼 갑부가 되어서 편하게 살 수 있다면.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감도 안 왔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로 지서는 가끔씩 허공을 노려보곤 했다. 거기에 중요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설의 소재는 떠오를 것 같다가 사라졌고, 지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했다.
지난주에는 건너건너 아는 친구가 지서에게 글을 청탁했다. 미대에 다니는 친구인데, 전시에 지서의 글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주제는 토끼였다. 지서는 처음으로 청탁을 받은 거라 일주일 내내 머리를 싸맸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원고료는 전시 초대권이었다.
원고를 넘기고 보름 뒤에 지서는 전시에 갔다. 성수동의 어느 지하에 갤러리가 있었다. 주소를 찍고 갔는데도 갤러리 입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주변을 서너 바퀴 돈 뒤에야 화장실 문처럼 생긴 입구를 발견했다. 열고 들어가니 좁은 계단이 이어졌다. 지하실은 페인트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역한 냄새가 났다. 지서는 속이 울렁거려서 입으로만 숨을 쉬며 지하실을 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어둠침침한 지하실 여기저기에 독특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반짝이가 뿌려진 휴대폰, 깨진 유리컵, 천장까지 쌓아올린 꽃병, 조화로 장식되어 있는 삼각형 등등. 갤러리 맨 안쪽 구석에 지서가 쓴 글이 있었다. 글은 누덕누덕 기워진 토끼 위에 매달려 있었다. 지서의 글 말고 다른 사람의 글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글은 한두 문장인데, 지서의 글만 스무 줄이 넘었다.
지서는 그림을 좋아해서 가끔 전시회에 가곤 했다. 샤갈, 마티즈를 좋아했고, 최근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전도 인상 깊게 보았다. 그래서 갤러리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의 갤러리는 그런 이미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나쁘지는 않았다. 젊고 참신한 기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마음이 자꾸 초라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지서는 재용과 용진을 떠올렸다. 국장이 재용과 용진이 지서를 닮았다고 한 뒤로 자주 개들에 대해 생각했다. 재용과 용진은 넓은 집에서 편하게 살면서 소고기 특식과 최고급 사료를 먹고, 좋은 유치원에 다녔다. 재용과 용진의 애견 유치원 원비는 한 달에 200만 원이 넘었다. 지서 어머니의 월급과 비슷한 액수였다. 지서와 어머니는 어머니의 월급과 아버지가 보내 주는 양육비로 생활했다. 늘 쪼들리다 보니 아끼며 사는 게 뼛속까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국장은 아낀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개들에게 아침마다 호주산 소고기를 한 팩씩 먹이고, 펫 스타일러, 펫 전용 샤워기, 펫 인식표, 펫 쿨매트, 펫 가방, 펫 유모차, 펫 백팩에다 수입 바람막이 점퍼까지 색깔별로 구입해서 산책할 때마다 갈아입혔다.
지서는 재용, 용진이 부러웠다. 재용, 용진은 편히 사는데, 지서는 걱정거리가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가을 학기에 졸업하면 아버지의 양육비가 끊어지는 것이었다. 지서는 3학년 2학기 때 6개월 동안 몽골로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를 다녀와서 가을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지서의 계획은 졸업 전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보니 소설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머니의 말처럼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재능을 버렸다가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단편소설의 원고료는 100만 원이었다. 보통 회사의 초봉이 300만 원쯤 되었다. 액수를 맞추려면 한 달에 단편소설을 3편씩 써야 했다. 3편을 쓴다 해도 매달 3편의 단편소설을 사줄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팔 만큼 좋은 소설을 매달 3편씩 쓸 자신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첫 달에 괜찮은 소설을 3편 쓴다고 해도 퀄리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



그는 30여 년 전에 졸업한 대학교의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웠다. 빈자리가 없어서 주차장을 세 바퀴나 돌았다. 자동차를 세우고 단골 화원에서 산 난초 화분을 옆구리에 끼고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대학 시절, 그가 주로 수업을 듣던 인문 사회동 건물은 허물어졌는지 보이지 않고, 대신 유리를 사용한 거대한 현대식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학생회관은 오래된 시계탑을 살리는 방향으로 리모델링해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인상을 주었다. 정문으로 향하는 넓은 길 양쪽으로 디지털 펜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디지털 펜스 화면에는 과거와 현재의 대학 외관이 교차 편집되어 흘러갔다.
정문 옆에 새로 생긴 우주선처럼 거대한 건물을 지나서 그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지도상으로 보면 정문에서 우동 가게까지는 20분 거리인데, 주택가 안쪽 길을 이리저리 꺾어야 해서 멀게 느껴졌다. 한참을 헤매다가 찾은 우동 가게는 간판과 벽과 문을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서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가게 앞에 줄이 길었다. 그는 줄의 맨 끝으로 가서 섰다. 잠시 뒤, 가게에서 나온 남자가 사람들을 세기 시작했다. 남자는 사람들을 세며 점점 뒤로 왔다. 철성이었다. 오랜만에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새를 닮은 얼굴과 구부정한 어깨와 마른 몸. 철성은 그의 다섯 번째 앞에서 줄을 끊고, 재료가 소진되었다고 말했다. 아직 12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는 철성의 뒤를 따라가며 그가 말했다.


- 10시 오픈인데 12시도 안 되어서 재료가 소진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거 먹으려고 먼 데서 왔는데요.


철성이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 죄송합니다. 저희 가게는 하루에 200그릇만 팝니다.


철성이 사과하자 그는 당황했다.


- 철성아, 나다.


둘은 얼싸안았고, 서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철성이 그를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가게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널찍했다. 테이블이 예닐곱 개 있고, 오른쪽으로 오픈 형 주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방에서 노란색 두건을 쓴 남자 두 명이 부지런히 요리를 하고, 홀에서 여자 한 명이 서빙을 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짙은 녹색 앞치마를 둘러서 단정해 보였다. 철성은 창가의 2인용 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메뉴는 색다른 게 없었다. 야채 튀김 우동, 새우튀김 우동, 오징어 튀김 우동, 모둠 튀김 우동과 유부초밥이 전부였다. 우동은 곱빼기로 주문이 가능하고, 유부초밥은 개수를 정할 수 있었다. 그는 새우튀김 우동 곱빼기와 유부초밥 1개를 주문했다.
요리는 금방 나왔다. 새우튀김 우동에 올라간 새우튀김은 큼직했고, 유부초밥은 두툼했다. 그는 새우튀김을 한 입 먹고 미소 지었다. 바삭하면서도 탱글탱글한 새우의 속살이 느껴졌다. 우동 면은 직접 뽑는지 쫄깃쫄깃해서 계속 씹고 싶었다. 유부초밥은 간이 적당하고 감칠맛이 살아 있었다.


- 우동이 걸작이네.


가게 문을 닫고 맞은편에 와서 앉는 철성에게 기홍이 말했다. 철성의 아들이 맥주 두 병과 잔 두 개, 그리고 튀김 몇 조각을 가져다주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들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철성이 입을 열었다.


- 걸작까지는 아니고. 솜씨는 좀 있는 것 같아. 아들이 일본에 가서 배워왔어. 돈 한 푼 안 들고 가서 일하면서 배워왔지.
- 자네가 우동 가게를 열었다고 해서 놀랐어.


철성이 맥주를 마시고 손으로 입을 닦았다.


- 자네는 CEO라고 들었는데. 어디지?
- 이젠 백수야. 정년퇴직했네.
- 그런가. 그래도 성공한 거지.
- 성공인가?
- 성공이지.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는데.
- 나는 자네가 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데.


철성이 다시 잔에 맥주를 따르며 미소 지었다.


- 자네는 항상 그랬어. 나를 추켜세워 주었지. 늘.
- 내가?
- 내가 으스대는 것도 너그럽게 봐주고, 한 학기 동안 재워 주고, 돈도 빌려줬어.
- 내가 그랬나?


둘은 건배하고 튀김을 하나씩 먹었다. 그가 손으로 입에 묻은 튀김 부스러기를 닦으며 말했다.


- 나는 자네가 시인이 될 줄 알았어.
- 시인?
- 늘 주머니에 시집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않았나. 윤동주. 박목월.
- 그건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폼만 잡은 거지. 어느 잡지인지, 책에서 본 걸 걸세. 나는 자네가 문학도가 될 줄 알았는데.


철성의 말에 그가 웃었다.


- 그런가?
- 자네가 나보다 시에 대해 더 많이 알았으니까. 소설도 많이 읽었고. 자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네.


철성이 여자 때문에 시집을 들고 다녔던 것처럼 그도 좋아하는 누나 때문에 책을 읽었다. 그 누나 때문에 국문과에 갔고, 그 누나 때문에 책을 읽었는데, 그 누나는 그가 대학 4학년 때 교사와 결혼을 했다. 누나의 결혼 소식에 절망해서 폐인처럼 지내는 그의 이력서를 제약회사에 보낸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인간은 누구나 늙게 마련이고, 늙으면 약이 필요할 테니 제약회사가 좋을 것 같았다고 했다.


- 그랬던 것도 같은데. 자네는 꿈이 뭐였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철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때 기자가 되기를 꿈꿨고,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사건을 파고들고 사람을 만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 자네 신문사에 취직했었지. 기자가 꿈이었나?
- 꿈은 무슨. 자네 골프 치나?
- 치지. 자네는?
- 한동안 쉬다가 다시 연습장에 나가네. 요즘은 골프 치는 낙으로 살아.
- 나도 매주 두 번은 치네.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순간에는 현실이 풍요로워졌다. 철성도, 기홍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둘 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 골프를 치지만 그 기분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초록색 들판이 원시 시대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지, 골프채를 휘두르며 공을 쳐서 멀리 날려 보낼 때 스트레스까지 실려가 버리기 때문인지, 친구나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채 함께 늙어 가고 있다는 – 하지만 골프를 칠 만큼 여유롭다는 – 사실에 안도할 수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골프 약속을 했고, 그 덕에 성공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헤어졌다.


*



골프의 유래는 여러 가지지만, 보통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스코틀랜드어로 ‘Goulf’는 ‘치다’라는 의미인데, 그것이 골프의 어원이라는 거였다. 골프 경기는 골프채로 공을 쳐서 홀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을 티 그라운드에 놓고 치기 시작해서 18번 홀에 공을 넣으면 경기가 끝났다. 18홀의 표준 타수는 72이고, 전체 길이는 5,944m 이상이 필요했다.
지난밤에 지서가 메모해 놓은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여러 번 읽었고, 약국에 아르바이트하러 가면서 지하철 안에서도 읽은 터라 대강은 외웠다. 그래도 지서는 알약을 자르면서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스코틀랜드, 어원, 18홀 같은 말들은 낯설면서도 낯설지가 않았다. 텔레비전을 돌리다 보면 골프를 치는 예능프로그램이 많았고, 같은 과 친구들 중에서도 여럿이 골프를 쳤다.
지서는 그런 친구들과 친하지 않지만, 윤서가 친했다. 윤서는 어떤 친구와도 두루 친하게 지내는 탁월한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께 지서와 윤서는 공원으로 피크닉을 갔는데, 거기서 윤서는 최근에 취업한 친구들이 해외로 골프를 치러 다니고, 명품을 사기 위해 오픈 런을 한다고 알려주었다. (걔네는 원래 집에 돈이 좀 있기도 했잖아. 그런데 벌기까지 하니까 진짜 장난 아니야.) 한 친구는 샤넬 클래식을 사기 위해 백화점이 있는 호텔에 방까지 잡았다. 그 친구는 아침잠이 많아서 걱정을 하다가 호텔 패키지를 구매해서 밤새 놀고 새벽에 나가서 간신히 샤넬 클래식을 구매했다. 또 다른 친구는 롤렉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처럼 롤렉스 매장은 공기만 판다는 말이 돌았다. 매장에 시계가 없어서 몇 달씩 기다리는 건 예사였고, 때로는 매장 직원에게 돈도 찔러 주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모두 윤서가 해준 말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지서도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신춘문예도 되었으니 1년은 마음먹고 소설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가 또 다음 주가 되면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지난주에는 그런 생각에 못 이겨서 대학 내에 있는 취업 센터에 가서 취업 가능한 회사의 리스트를 받았다.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9개의 기업 중에서 ‘골프필드’, ‘영 코스메틱’, ‘시티건설’이 견실했고, ‘골프필드’의 연봉이 가장 높았다. 모집 부서는 홍보팀이었다. 면접이 오늘이어서 지서는 지난 며칠 동안 골프에 대해 공부를 했다.
골프의 역사, 유래, 규칙 같은 것들은 어렵지 않았다. 면접관이 물어 볼 질문을 상상하고 답하는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반복했다. 홍보팀이니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문구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해 줄 것 같았다. 다만 환경 파괴가 마음에 걸렸다. 골프장으로 인한 환경 문제는 오래된 이슈여서 이제는 관심 있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골프장이 건설되고 난 뒤 하늘다람쥐가 자취를 감췄고, 독수리, 금개구리, 맹꽁이 같은 법정 보호 종들이 설 땅을 잃었으며, 골프장을 짓기 위해 베어버린 나무가 100만 그루 가까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골프장 개수는 세계 8위였다. 우리나라 국토 면적이 지구상에 있는 나라 중에서 100위 언저리임을 감안하면 골프장이 너무 많은 건 분명했다.
지서는 약국 조제실 귀퉁이에서 알약을 반으로 자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명품 매장에 오픈 런을 할 것이었다. 지서의 대학 동창이 구매한 샤넬 클래식 백은 천만 원이 넘었다. 지서는 다 자른 알약을 병에 넣고, 새 약병을 열어서 알약을 쏟았다. 지서가 일하는 약국의 국장은 지난주에 남편이 대신 오픈 런을 해서 디올 신상 백을 샀다. 북백이라고 불리는 디올 신상 백은 책을 넣어가지고 다니기 좋게 각이 잡혀 있는데, 가격은 400만원이 넘었다.
잠시 뒤 국장이 다시 한 번 휴대전화를 보며 모두를 불렀다. 등원 사진은 매일 보여주지만, 생활 사진은 보여주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었다. 지서는 시계를 힐긋 보고 국장에게 갔다.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퇴근할 시간이었다. 약품자동포장기 앞에 버려야 할 재활용 종이들이 쌓여 있었다. 지서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퇴근 전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었다.
국장의 휴대전화 속에서 재용과 용진은 현란한 색깔의 꽃 모자를 쓰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재용에게 별 모양 선글라스를 씌웠고, 용진에게는 물안경을 씌웠다. 사진 말고 동영상도 있는데, 개들이 머리만 물 밖으로 내놓은 채 수영을 했다. 개들은 수영을 곧잘 했다. 선생은 개들을 하얀색 백조 튜브에 태워 주기도 했다. 개들은 백조 튜브를 타고 수영장을 한 바퀴 돌았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던 국장이 말했다. 우리 얘들 수영 잘하지? 개들은 나이가 들수록 관절이 약해져서 수영이 필수래. 일주일에 한 번씩 수영시키려면 10만 원 더 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지서는 사진을 보다가 슬그머니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약국을 나섰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보다 기온이 더 떨어진 듯했다. 찬 기운이 피부로 스미자 몸이 떨렸다. 양손에 재활용 쓰레기를 든 지서가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재용과 용진이 수영하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눈동자가 얼어버릴 것처럼 추운 겨울에 개들은 쾌적한 실내에서 꽃 장식 수영모를 쓰고 수영을 하고, 수영을 못하는 지서는 그 모습을 구경했다. 지서의 어머니는 수영을 가르치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특히, 2014년 이후에는 돈이 쪼들려도 수영은 시켰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곳은 건물 뒤쪽 은행나무 아래였다. 은행나무는 목이 졸린 것처럼 줄기 아랫부분이 시멘트로 뒤덮여 있지만, 봄에 풍성한 초록 잎을 만들어냈고, 가을에 노란 은행잎을 떨어뜨려서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는 데 한몫했다. 지서는 이 은행나무가 안쓰러우면서도 정이 갔다. 줄기를 덮고 있는 시멘트를 보면 자신의 목이 졸리는 것 같다가도 무성한 잎 아래에 서면 기분이 좋아졌다. 지서는 은행나무 아래에 재활용 쓰레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제멋대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규칙이 있다고 들었다.
이리저리 뻗은 가지를 눈으로 좇으며 지서는 ‘골프필드’의 면접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골프장으로 인한 환경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한 시간 전에 도착한 이메일 때문이었다. 청탁이 들어왔다. 신춘문예에 등단한 사람들 위주로 청탁하는 곳이었다. 마감은 3월 중순이었다. 당장 단편소설을 한 편 써야 했다. 3개월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혼자 힘으로 단편소설을 완성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원고료는 역시 100만 원이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이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골프필드’의 월급은 다른 곳의 1.3배였다. 놓치면 후회할 게 뻔했다. 면접에 가야 하나, 소설이 급한데. 문득 쓸 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혼한 캐디가 골프장에서 사내아이를 몰래 키우는 것은 어떨까. 아이는 밤에만 나가서 노는데, 야간 골프를 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골프장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게 된다면. 아니면, 아이가 골프장 주인이 키우는 개와 닮았다고 해볼까. 개와 아이는 만나자마자 친해지고, 둘이 놀다가 개를 따라 아이가 집으로 가게 된다면. 성공한 골프장 사장과 아름다운 아내가 사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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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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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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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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