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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버스데이

  • 작성일 2021-10-01
  • 조회수 5,757

[단편소설]



해피 버스데이



윤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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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벽에 윤석이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휴대폰 화면 가득 꽃가루가 날렸다. 그걸 보자 윤석이랑 같이 보았던 불꽃놀이가 생각났다. 군 입대를 앞두고 우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갔었다. 그때 보았던 불꽃놀이. 그걸 보며 윤석은 말했다. “제길, 이렇게 멋진 풍경을 너랑 보러 오다니.” 그래서 나도 말했다. “다음에는 애인이랑 와라.” 제대 후 윤석은 사진 동아리에서 만난 후배와 연애를 했다. 12월 31일에는 가요대제전을 봐야 한다는 후배를 설득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갔다. 후배는 춥다고 투덜댔지만, 종이 울리자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후배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나니 돌아갈 버스가 끊겼다. 윤석은 여섯 시간을 걸어서 집에 돌아오다가 일출을 보았다. 그걸 보자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기도를 하자 미래를 꿈꾸어야 할 것 같았고, 그래서 공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고시원에 들어간 지 이 년째에 이별을 했고, 삼 년째에 1차에 합격을 했고, 사 년째에 최종 합격을 했다. 합격 발표를 들은 날 우리는 동해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비가 와서 일출은 보지 못했고 비만 맞았다. 그리고 어느 식당에 들어가 곰치국을 먹었다. 국물이 어찌나 시원했는지 술 생각이 절로 났고 그래서 소주를 마셨다. “간이 생생해서 그런가. 술술 들어가는데.” 윤석이 말했다. 윤석은 고시원에 들어가면서 합격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독한 놈.” 내가 말했다. 윤석이가 입원을 결심했을 때도 나는 똑같이 말했다. “넌 독한 놈이니 끊을 수 있어.” 윤석이 두 번째로 입원을 했을 때도 그랬다. “알지? 넌 독한 놈이니 할 수 있어.” 하지만 세 번째로 입원을 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윤석의 메시지를 읽어보았다. 어째서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알고 있는 걸까. 음력 생일도 아니고 주민등록상 생일도 아니었다. 나는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윤석이 말했다. “나 술 마셨을까 봐 전화한 거지? 걱정 마, 안 마셨어.” 나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내가 묻자 윤석은 헬스장을 다섯 시 반에 열어야 해서 다섯 시면 일어난다고 했다. 지난달에 윤석은 알코올 치료센터에서 퇴원을 한 뒤 여동생이 살고 있는 순천으로 내려갔다. 여동생의 남편이 운영하는 휘트니스 클럽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돕기로 했다며. “나 운동도 시작했어. 이게 마지막 기회 같아.” 윤석은 말했다. “응. 넌 할 수 있어. 할 수 있지.” 나는 말했다. 말하면서도 그렇게 뻔한 말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싫어졌다. 전화를 끊기 전에 윤석이 생일 축하한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는 생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쯤 생일인 척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생일 선물은 왜 안 주냐고 농담을 했다. “놀러 와. 짱뚱어탕 사줄게.” 윤석이 말했다. 안 마셨다는 말에 속지 말 것, 마지막이라는 말에 속지 말 것.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다시 잠들면 지각을 할 것 같아 텔레비전을 틀었다. 채널을 1번부터 148번까지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에서 알코올 중독자 형사 역할을 했던 배우가 나온 퀴즈 프로그램에서 멈추었다. 처음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웜벳이라는 동물이 어떤 똥을 누는지 맞히는 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네모난 똥이었다. 세상에! 네모난 똥이라니 화면에 나온 똥 사진을 보니 똥이라기보다는 돌처럼 보였다. 그걸 보자 어렸을 때 동생과 했던 내기가 떠올랐다. 소똥으로 집을 만든다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뉴스를 보다 동생이 말했다. “나는 소가 네모난 똥을 누었으면 좋겠어.” 소똥을 벽돌처럼 쌓을 수 있으면 더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거 아니냐고 동생은 말했다. “바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내 말에 동생이 한참 생각을 하다 대답했다. “똥꼬가 네모나면 쌀 수 있겠지. 어쩌면 네모난 똥을 누는 동물이 세상엔 있을지도 몰라.” 어렸을 때 우리는 뭐든지 내기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프로야구의 승리팀 맞히기 게임을 해서 진 사람이 방 청소를 하기도 했다. 월드컵이 열리면 한 달 용돈을 걸고 우승팀 맞히기 게임도 했다. 때론 황당한 내기도 했다. 먼저 대머리가 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차를 한 대 사준다는 내기 같은 것들. 네모난 똥이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아주 스케일이 큰 것을 내 걸었다. 우주여행. "네모난 똥이 정말 있다면 내가 너 우주여행 시켜 준다." 나는 그렇게 호기롭게 큰소리를 쳤다.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했던 내기는 술집에서 술값을 내는 사람들 맞히기였다. 같이 술을 마시는 나이가 되면서 우리는 그 내기를 종종 했다. 열에 일곱은 동생이 이겼는데 나중에 동생이 비결을 말해 주었다. “구두가 깨끗한 사람이 1순위야. 그다음에는 안주를 주문하는 사람. 그다음에는 술을 마시며 자주 웃는 사람.” 성공한 사람의 버릇을 맞히는 문제가 나와서 구두를 깨끗하게 닦는 것이라고 답해보았다. 땡. 정답은 침대 정리를 한다. 나는 세수를 하고, 침대 정리를 한 다음, 출근을 했다.


2


오늘 구내식당의 메뉴는 미역국과 잡채였다. 생일상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웃자 앞자리에 앉은 부장님이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오늘이 생일이거든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박주임이 큰소리로 생일 축하한다고 외쳤다. 그 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따라서 생일 축하를 해주었다. 나는 잡채를 미역국에 넣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미역국에 잡채를 넣어서 먹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 잡채도 부드러워지고 미역국 국물도 더 진해졌다. 동생은 그걸 아주 싫어했다. 나는 국에 밥을 조금 말아서 김치를 올려 먹었다. 그렇게 먹는 데 갑자기 목이 메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당황했다. “어머니 생각나서 그래?” 부장님은 올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조문을 갔더니 얼굴이 닮은 다섯 형제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고, 요 며칠 어머니 생각을 한 적도 없지만,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네모난 똥이 생각나서 울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다른 동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식판을 들고 배식구로 가서 국을 더 달라고 말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국을 떠주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다시 자리를 돌아와 나는 밥을 마저 먹었다. 꾸역꾸역. “그러다 체할라.” 고개를 들어보니 아주머니가 동그랑땡이 담겨 있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생일이라며.” 아주머니가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동그랑땡에는 케첩이 하트 모양으로 뿌려져 있었다. 하트 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나는 동그랑땡을 한입에 먹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똥이 동그라야지. 네모난 게 말이 되는가. 점심을 먹은 다음 바람을 쐴 겸 건물 밖으로 나왔더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가며 배드민턴 경기를 구경했다. 열다섯 번 랠리가 오간 뒤에 오른쪽 청년이 이겼다. “졌네. 졌어.” 왼쪽 청년이 아쉬운 듯 배드민턴 라켓을 허공에 휘두르며 말했다. 경기에서 진 청년에게 나는 한 게임만 하자고 말했다. “오 점 내기요. 진 사람이 치킨 사기. 어때요?” 내 말에 청년이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했다. 한 점도 내지 못하고 내가 졌다. 청년이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일 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시합을 구경하던 청년들이 모두 웃었다. 나는 오늘 저녁 여덟 시에 공장 기숙사로 치킨 한 마리를 배달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랬더니 청년이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했다. 생일 선물 잘 받겠다고. 그래서 나도 청년에게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말했다.


퇴근 무렵에 부장님에게 며칠 회사를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곧 추석인데. 이때가 제일 바쁜 거 알면서.” 부장님은 말했다. 그러면서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몇 년 전부터 효도 선물로 안마의자 인기가 높아지면서 추석과 설이면 정신없이 바빠졌다. “어머니는 건강하세요.” 내 말에 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만 건강하면 모든 것이 다 괜찮다는 얼굴로. 나는 동생과 했던 내기에서 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동생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가서 빚을 갚고 와야 한다고. 부장님이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저녁 약속 없으면 나랑 술이나 한잔할까?” 내가 좋다고 하자 십 분 뒤에 정문 앞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정문 수위실 옆에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 서서 부장님을 기다렸다. “근사하죠?” 수위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건넸다. “네, 매일 보는데도 매일 근사해요.” 내가 말했다. “그게 당단풍나무에요. 내가 삼십 년 전에 심었어요.” 수위 아저씨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저씨가 심으셨다고요?” 내가 되묻자 수위 아저씨가 깔깔깔 웃었다. 그때 부장님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수위 아저씨도 부장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디가?” 수위 아저씨가 물었다. “개천집이요.” 부장님이 말했다. 그러자 수위 아저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 좋은 날인가 보네. 우리 김 부장이 아무나 개천집을 데려가지는 않거든.” 그래서 나는 오늘이 생일이라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술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단풍나무를 수위 아저씨가 심었다는데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부장님은 그 나무의 비밀도 알고 있다고 했다. “시주하러 다니는 스님이 공장 앞을 지나가다 물을 한 잔 달라고 한 거야. 그래서 수위 아저씨가 물을 주었더니 그 물을 마시고 스님이 묻더래. 아픈 아이가 집에 있느냐고.” 당시에 수위 아저씨에는 사대 독자인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걷지를 못했다.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녀 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스님이 지금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는 그 자리로 걸어가더니 거기에 아이 신발을 심으라고 했대. 그리고 그 위에 예쁜 나무를 하나 심으라고.” 여기까지 말하고 부장님이 검지를 흔들면서 비밀이라고 속삭였다. 개천집에 도착해보니 가게 이름과 달리 주변에 개천이 없었다.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부장님이 말했다. “주의사항이 있어. 주인 할머니를 이모나 고모라고 부르지 마. 절대 안 돼. 그러면 음식을 아주 아주 맛없게 해주거든.” 가게에 들어가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노란색 앞치마를 한 할머니가 주방에서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 갑자기 전화해서 고사리 조기찌개를 끓이라니. 조기 사 오느라 늦었어.” 부장님이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쟁반을 들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따라 일어났다. “자네는 냉장고에서 소주 꺼내오고.” 나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밑반찬은 무생채와 콩나물무침과 어묵볶음이었다. “원래는 반찬이 더 많은데 지난주에 가게 문을 닫았거든.” 부장님이 내게 소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가게 문을 닫았다니요?” 내가 묻자 부엌 쪽에서 할머니가 소리쳤다. “여기를 뿌시고 새 건물을 짓는대. 여기가 오십 년도 더 되었거든.” 공사가 미뤄지면서 단골들이 전화하면 그때마다 문을 열고 잠깐씩 술을 팔고 있다고 부장님이 마저 설명했다. 부장님이 잔을 들었다. 나도 잔을 들었다. 건배를 하며 무생채와 콩나물무침과 어묵볶음 중 어느 것으로 첫 안주를 할까 고민하는 순간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몸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 순간 연을 날리던 동생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펼쳤다. 동생의 연은 색동 꼬리를 단 가오리연이었다. “형. 내 연이 제일 높아.” 동생의 목소리가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3


어머니는 칼국수를 끓이다가 나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밀가루 냄새가 역겨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열여섯 살 때부터 일했던 나드리 미용실 원장은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에게 칼국수를 끓이게 했다. 비가 오면 파마를 하는 손님이 없었고, 원장은 어머니가 노는 꼴을 보지 못했다. 속이 메슥거려서 어머니는 칼국수를 얼마 먹지 못했다. 달고 신 게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미용실로 전화가 왔다. 아버지와 같이 상경한 고향 친구였다. 아버지의 친구는 공장에서 사고가 났다며 아버지가 크게 다쳤으니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나를 지워야 하는지 고민을 했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스물둘. 중풍으로 쓰러진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던 어머니는 환자에게서 나는 냄새가 지겨웠다. 어머니는 꽃무늬 벽지에 달콤한 향기가 나는 신혼방을 가지고 싶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아직 프러포즈도 하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누가 아파요?” 어머니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남편이라고 말했다. “난 아들. 택시를 모는데 사고가 났어요.”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청포도 사탕을 하나 주었다. 어머니가 사양하자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손주가 한 봉지씩 사줘요. 이걸 녹여 먹는 동안은 걱정이 사라져.” 그 말에 어머니는 청포도 사탕을 받았다. 어머니는 천천히 사탕을 녹여 먹었다. 사탕이 너무 커서 입천장이 까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사탕을 먹으니 미식거리는 기분이 사라졌다. 사탕을 다 먹은 다음 어머니는 하나만 더 달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사탕을 하나 더 주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손녀가 대기실로 들어와 할머니를 불렀다. 수술이 끝났다는 거였다. 할머니가 떠나고 어머니는 사탕 하나를 더 먹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포도야, 아빠는 괜찮을 거야. 그래서 내 태명은 포도가 되었다. 아버지는 육 개월을 입원했고 퇴원한 뒤에도 일 년을 넘게 요양해야 했다. 어머니는 오 년 넘게 부은 적금을 깨서 아버지의 병원비를 냈다. 원장이 미용실 옆에 딸린 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방에 누워 파마를 하러 온 여자들의 수다를 들었다. 대부분은 시어머니나 남편의 흉이었다. 집안 이야기를 밖에 나와서 하다니. 아버지는 시댁 욕을 하는 여자들을 욕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여자들이 욕을 하는 시댁 사람들을 같이 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보험외판원 아주머니를 기다렸다. 그 아주머니는 올 때마다 보험사기를 치다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망 보험금을 노리고 박카스에 독약을 타서 배다른 여동생을 죽인 사건이나 남편이 내연녀랑 짜고 아내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인 사건 같은 것들. 빚에 허덕이던 남자가 죽어서 자식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기려고 했지만, 자살인 게 밝혀져 보험금을 받지 못한 사연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어찌나 슬프게 울었는지 아버지는 한 달도 넘게 우울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창문이 없는 골방에서 너무 오래 누워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는 다방이라도 가라며 아버지를 밖으로 내쫓았다. 돈이 아까웠던 아버지는 요구르트를 하나만 사서 근처 초등학교로 갔다. 아버지는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한나절을 보냈다. 아이들이 달리기를 하는 것을 보니 지팡이를 짚고 걷는 자신이 노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루에 열 바퀴씩 운동장을 걸었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나자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여섯 달이 지나자 아버지는 동네 뒷산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약수터에서 만홧가게를 운영했다는 노부부를 알게 되었다. 노부부는 훌라후프를 아주 잘했다. 부부가 훌라후프를 하면 아버지는 그 앞에 앉아서 박수를 치며 구경을 했다. 어느 날부터는 요구르트를 세 개씩 사서 약수터를 갔다. 아버지가 요구르트를 드리면 노부부는 아버지에게 쑥떡을 주었다. 노부부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을 웃게 하려고 훌라후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허리를 흔들며 훌라후프를 돌리는 게 신기했나 봐. 내가 훌라후프를 하면 그 애가 까르르 웃었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아들보다 오래 살고 말았네.” 옆에 있던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도 노부부처럼 내가 울 때마다 훌라후프를 하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더 울었다. 몇 달이 지나자 노부부는 아버지에게 자기들의 만홧가게를 인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그래서 이참에 세를 준 만홧가게를 팔아 시골로 내려가려 한다고. 만홧가게 인수 제의를 받은 날 아버지는 커다랗고 하얀 상아를 지닌 코끼리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뒤 꿈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가 태몽인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의 태명은 코끼리가 되었다. 그 꿈을 꾸고 사흘 뒤 아버지가 다녔던 회사에서 뒤늦게 사고 보상금을 지급해주었다. 사고를 당했던 다섯 명의 노동자 중에서 변호사가 된 조카가 있었는데, 그 조카가 무료로 소송을 걸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가게를 인수했다. 아버지는 만홧가게 이름을 코끼리 만화방으로 바꾸었다. 나는 보행기에 탄 채로 만화방을 누볐다. 손님들은 만화책을 읽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보면 발로 보행기를 밀었다. 손님들이 발로 보행기를 밀 때마다 나는 까르르 웃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배에 손을 올려놓고 자주 이 말을 했다. “아주 운이 좋은 녀석이 나올 것만 같아.” 몇 년 후에 건설회사에서 찾아와 아파트를 짓는다며 비싼 가격에 가게를 사겠다고 했다. 만홧가게를 판 돈으로 이 층 짜리 건물을 산 부모님은 건물 일 층에 미용실과 지물포를 차렸다. 코끼리 미용실과 코끼리 지물포. 어머니의 단골손님이 솜씨가 좋은 도배 아주머니들을 소개해주었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소주 세 잔씩을 반주로 마셨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우리 운 좋은 아들이 한 잔 따라봐.” 그러면 동생은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동생은 운이 좋았다. 유치원 때는 아이들이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동생만 유일하게 무사했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그날따라 괜히 달걀찜이 먹기 싫었다는 거였다. 중학생 때는 늦잠을 자서 늘 타야 할 마을버스를 놓쳤는데 그 버스가 트럭과 충돌해서 두 명이나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동생에게는 그런 에피소드가 무수히 많았고 어머니는 그 중 몇 개의 사연을 라디오에 보내서 경품을 받기도 했다. 간 이식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소식을 전하며 어머니는 말했다. “니가 수술만 해주면 이 집은 너에게 다 주마.” 나는 싫다고 했다. 어머니는 못난 놈이라고 욕을 했다. 못된 놈이 아니라 못난 놈이라니. 나는 그 말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나는 부모님이 주말농장을 만들려고 사둔 땅이 동생 명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땅이 수십 배 올랐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잘 못 알고 있었다. 동생은 늘 운이 좋았고 그래서 동생 옆에 있으면 나는 늘 운이 나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게 무서웠다.


4


의사는 내게 운이 좋다고 했다. 주방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나는 가게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 바람에 오른팔에 금이 갔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에 얼굴을 다쳐 몇 군데를 꿰맸다. 부장님은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러 수술 중이었고 할머니는 중환자실에 있는데 아직까지 의식이 없다고 응급실 의사는 말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한 다음 나는 병실로 옮겨졌다. 병실에는 깁스를 한 사람 천지였다. 목에 깁스를 한 사람. 두 다리에 깁스를 한 사람. 허리에 보호대를 하고 엉거주춤 걷는 사람. 나는 문 옆에 있는 침대에 배정되었다. 내가 자리에 눕자 옆 침대 남자가 물었다. “뭐 배달하다 다쳤어요?” 남자는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다. “네?” 내가 되묻자 남자가 오토바이 아니냐고 물었다.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토바이 환자라고. “나는 초밥 배달하다가.” 창가에 있는 남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환자들도 저마다 소리쳤다. “"나는 떡볶이요.” “나는 쌀국수.” “나는 배달 끝내고 돌아가다가.” 내 옆 남자는 치킨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치킨 배달을 해주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청년은 내 욕을 하고 있겠지. 거짓말쟁이라며. “가스 폭발이요.” 내가 말하자 옆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허리를 만지며 에구구 소리를 냈다. “운이 좋네요. 가스 폭발이라니.” 그러면서 밤에 목이 마르면 자기 음료수를 마시라고 했다. 남자가 침대 옆에 있는 사물함을 열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온 음료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가 이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병문안 온 친구들마다 사 왔는데 이 다리를 하고 화장실 가는 게 힘들어서 못 마셔요.”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보니 갈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하나를 꺼내 마셨다. 하나를 다 마시고도 여전히 목이 말라 하나를 더 꺼내 마셨다. 그걸 본 남자가 웃었다. “그만 마셔요. 자다가 오줌 마려워요.” 남자의 말대로 나는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깼다. 화장실을 갔다 왔더니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서 사람들이 코를 고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알 수 없는 잠꼬대를 했다. “거기 아니야. 거기 아니야.” 깁스를 한 여섯 명의 사람들. 병실을 둘러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깁스를 해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요의가 느껴져 화장실에 갔지만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로비로 내려갔다.


병원 로비에는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었다. 한 남자가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홈쇼핑 채널이었는데 눈에 좋다는 영양제를 팔고 있었다. 쇼호스트가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여러분. 이렇게 되는 건 한순간입니다. 지금부터 관리하세요.” 텔레비전을 보던 남자가 한순간, 이라고 따라서 중얼거렸다. 한순간입니다, 라고 나도 따라서 중얼거려보았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개천집 주인 할머니가 서 있었다. “깨어나셨어요?” 할머니가 내 옆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이리역 폭발 사고 때도 살아남은 사람이야.” 할머니와 나는 한동안 홈쇼핑 채널을 보았다. 그러다 할머니가 문득 말했다. “나는 아직까지 돋보기 없이도 글을 읽어.” 내가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침마다 십 분씩 눈 운동을 한다는 거였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눈동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려보았다. 그리고 위아래로. 그리고 대각선으로. 그렇게 서른 번씩 반복한 다음 할머니는 두 손을 비빈 다음 따뜻해진 손바닥을 두 눈에 댔다. 나는 한쪽 팔에 깁스를 해서 따라하지 못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 눈에 대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주변에 개천도 없는데 왜 개천집이라고 지었어요?” 내가 묻자 할머니가 손바닥을 떼면서 대답했다. “개천에서 용난다. 그 말도 몰라? 내 음식 먹은 사람들 전부 성공하라고 그렇게 지었지.” 나는 할머니에게 아쉽게도 할머니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퇴원하면 고사리 조기찌개를 한 번만 더 끓여달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싫다고 했다. “그건 자네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 나는 은퇴야.” 홈쇼핑은 이제 다른 쇼호스트가 나와 뼈에 좋은 약을 팔기 시작했다. “골다공증에 걸리면 키도 작아집니다.” 호스트가 말했다. 할머니가 자기는 뼈도 튼튼하다고 말했다. “내가 아침마다 홍화씨 달인 물을 마시거든. 그래서 내가 허리가 안 굽었잖아.” 할머니는 나보고 퇴원을 하거든 매일 홍화씨 달인 물을 마시라고 했다. 그러면 뼈가 금방 붙는다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할머니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요. 왜 이모나 고모라고 부르면 맛없게 음식을 해주는 건데요?” 내 말에 할머니가 웃었다. “우리 이모랑 고모가 음식을 못 했거든.” 그러면서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할머니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스무 살을 못 넘기고 죽었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는 마흔아홉 살. 삼 년을 어느 절에 들어가 공양주 보살로 지내다가 주지 스님에게 앙심을 품은 수행승이 대웅전에 불을 지른 사건을 계기로 다시 속세로 나와 개천집을 차렸다. “그때부터 손님들에게 할머니라고 불러 달라고 했어. 얼른 늙어서 우리 딸한테 가고 싶어서.” 그렇게 빨리 늙는 게 소원이신 분이 매일 눈 운동을 하고 홍화씨 달인 물을 마시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화를 냈다. “꼿꼿하게 가고 싶어서 그랬다.” 나는 할머니에게 사과했다. 할머니가 내게 아이가 있느냐고 물어서 나는 아이는 없고 조카만 한 명 있다고 했다. 그 조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 커다란 박스를 들고 부모님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자동으로 빨래를 개는 기계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카가 박스를 뒤집어썼다. 박스에는 구멍이 두 개 있었다. 어머니가 위쪽 구멍에 수건 두 개를 넣자 잠시 후에 아래쪽 구멍으로 반듯하게 갠 수건 두 개가 나왔다. 부모님은 조카가 태어났을 때보다도 더 환하게 웃었다. 동생은 어릴 적에 공사 현장을 발견하면 시멘트가 굳기 전에 몰래 자기 발자국을 찍어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수첩에 발자국 찍은 곳을 적어놓았다. “나중에 내 아이가 생기면 그때 같이 찾아다니려고.” 동생은 말했다. 동생은 조카와 그 발자국을 찾으러 다녔을까. 할머니가 하품을 했다. “이제 자러 가야겠네. 잘 있어.” 할머니가 두 손으로 다치지 않은 내 왼손을 꼭 잡고 말했다. 할머니의 손은 차가웠다. 내 두 눈을 만졌을 때 느껴진 온기가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 말을 했다. “김부장은 걱정 마. 자네보다 더 오래 살아.” 할머니가 떠난 다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 데스크로 갔다. 거기에는 제복을 입은 남자가 졸고 있었다. 남자를 깨워 나는 전화 한 통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 비밀번호를 누른 다음 내게 주었다. 막상 전화를 걸려니 동생의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번호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휴대폰을 개통하면서 없애버린 집 번호만 생각났다. 나는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석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야.” “뭐야? 이거 누구 전화야? 무슨 일 있어?” 윤석이 물어서 나는 휴대폰이 고장 났다고 말했다. 아무 일이 없다고도 말했다. “생일 축하해.” 나는 윤석에게 말했다. 윤석은 생일은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 생일처럼 지내라고 했다. 점심에 미역국도 사 먹으라고.


5


나는 이틀 뒤에 퇴원했다. 퇴원을 하는 날 윤석이 찾아왔다. 윤석은 나랑 통화한 뒤 내 말대로 그날 하루를 생일처럼 지내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다섯 시 반에 운동을 하러 오는 회원에게 큰소리로 아침 인사를 했다. 다른 기구는 안 하고 러닝머신만 한 시간을 뛰다 가는 회원이었다. “뭐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회원이 물어서 윤석은 생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회원이 생일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도 오늘도 생일이라고 했다. 아주 좋은 날 태어났다고. 그 말을 들으니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윤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헬스장 청소를 했다. 점심에는 미역국을 파는 백반집을 찾아 식당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창가 자리에 앉아서 미역국을 먹고 있는 손님을 발견했다. 식당에 들어가 미역국을 달라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오늘의 국은 미역국이 아니라 육개장이라고 했다. 윤석은 미역국을 먹고 있는 손님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인데 생일이라 미역국을 끓여준 거라고 했다. “저도 오늘이 생일이거든요.” 윤석이 말했다. 아주머니는 윤석에게도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윤석은 미역국과 불고기를 먹었다. 계란말이도 먹고 분홍색 소시지 부침도 먹었다. 오후에 동생이 조카를 데리고 헬스장에 왔기에 생일인데 선물을 사달라고 농담을 했다. 그랬더니 동생이 사과했다. 오빠 생일도 모르고 있었다고. 윤석은 동생의 생일을 알고 있었지만 나도 니 생일 몰라, 하고 거짓말을 했다. 동생이 케이크를 사왔다. 조카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생일 축하 노래였다. 자기 전에 윤석은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내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자 윤석은 내가 새벽에 걸었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내가 입원한 환자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온 거지.” 윤석은 말했다. 퇴원하고 우리는 병원 앞에서 설렁탕을 먹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윤석은 모든 게 해장국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날 과음을 한 윤석은 해장을 하러 순댓국집에 갔다. 아침 일곱 시도 안 되었는데 아저씨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해장하러 왔다가 술만 더 마시네.” 아저씨들의 말에 윤석은 동해에 가서 곰치국을 먹었던 아침이 떠올랐다. 그래서 윤석도 소주를 한 병 시켰다. 딱 한 잔만 마셔보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순댓국이 맛있어서 세 잔을 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출근했는데 아무도 윤석이 술을 마신 줄 몰랐다. 몸이 가볍고 머릿속이 더 선명해졌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어느 날은 두 잔. 어느 날은 세 잔.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고. 세 잔은 네 잔이 되고 네 잔은 한 병이 되고. “이제 아침은 무조건 빵이야. 빵을 먹으며 술 생각이 안 나거든. 너니까 오늘 특별히 설렁탕을 먹는 거야.” 윤석은 설렁탕에 커다란 무 섞박지 서너 개를 넣었다. “참, 그놈 죽었어.” 윤석이 밥을 말면서 말했다. “누구.” “약국 새끼.” 백세약국 집 큰아들. 우리 반 아이들은 그놈을 병 주고 약 준다고 해서 약국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성공해서 빌딩도 사고 외제차도 사자고. 그리고 그때 약국 새끼 앞에 나타나자고. 그게 진짜 복수라고. 열여덟 살 때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약속했다. “자다가 그냥 죽었대. 심장마비.” 나도 윤석처럼 설렁탕에 석박지 몇 개를 넣었다. 밥을 한 숟갈 먹고 미지근해진 무를 한 입 먹었다. “밥 남기지 마. 이거 먹고 오래 살자.” 윤석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적우적 밥을 먹었다.


윤석을 바래다줄 겸 기차역까지 따라갔다. 역사에 빵집이 있기에 들어가 빵을 잔뜩 샀다. “아침은 빵이라며.” 나는 빵을 윤석에게 주면서 말했다. 윤석이 떠난 다음 나는 역 건너편에 있는 휴대폰 가게로 가서 새 휴대폰을 샀다. 고장 난 휴대폰을 건네주었더니 직원이 데이터를 옮기는데 삼십 분쯤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쿠폰 한 장을 주었다. 옆 카페에 가서 무료로 차를 한잔하라는 거였다. 옆 카페에 갔더니 가게 주인과 얼굴이 똑같이 생긴 사람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내가 쿠폰을 건네자 가게 주인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했다. “쌍둥이입니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러게요. 똑같아서 놀랐어요.” 그러자 가게 주인이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쌍둥이니까요.”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창밖에 노란색 꽃이 핀 화분이 있었는데 벌 하나가 꽃 주변을 맴돌았다. 벌이 꿀을 빨아 먹는 걸 보고 싶어 한참을 보았다. 하지만 벌은 꽃에 앉지 않고 그냥 주변만 맴돌았다. 새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어머니가 세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 않 받네.' '바쁘니?' '몬일 있니. 전화해라.' 나는 맞춤법이 틀린 메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고, 엄마가 해준 만둣국이 먹고 싶다고, 답을 보냈다. 몇 분 후에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았더니 언제든지 먹으러 오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지금 간다.” 내가 말했다. 어머니가 내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 “그럼 지금 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터미널로 가서 버스표를 끊었다. 버스에서 꿈을 꾸었다. 아기 코끼리가 코로 내 등을 긁어주는 꿈이었다. 꿈속이었지만 등이 시원했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택시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앞을 지나갔다. 핸드볼팀이 전국체전에서 고등부 금메달을 땄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적에는 핸드볼팀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지나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를 지났다. 초등학교 앞에 있던 서예 학원은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한의원이 들어서 있었다. 짜장떡볶이를 참 맛있게 하던 집이 있었는데.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무엇인가가 생각났다. 나는 기사 보고 내려달라고 했다. 택시에서 내려 초등학교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랬더니 간판이 바뀌었지만 이름이 같은 떡볶이집이 있었다. 홈통이 있던 쪽이었는데. 홈통은 보이지 않았다. 왼쪽 귀퉁이를 봤더니 거기에는 없었다. 오른쪽 귀퉁이에는 종이 박스가 쌓여 있었다. 나는 박스를 치워보았다. 떡볶이 가게에서 남자가 나와 박스는 가져가시는 할아버지가 있으니 주워가지 말라고 했다. “뭐 하나만 확인하고 다시 제자리에 놓을게요.” 내 말에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박스를 치우니 거기에 발자국이 있었다. 동생의 발자국. 내가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봐요. 내 동생 발자국이에요.” 나는 말했다. 동생과 짜장떡볶이를 사 먹고 나오는데 떡볶이집 아저씨가 시멘트를 개고 있었다. 뭐하냐고 물었더니 홈통에서 나오는 물 때문에 바닥이 깨졌다고 말했다. 아저씨가 시멘트를 바르고 사라지길 기다린 다음 동생이 발자국을 찍었다. 나보고도 하라 했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새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생의 발자국에 발을 대보았다. 남자도 나를 따라 했다. “작네요. 몇 살이었어요?” 남자가 물어서 나는 아홉 살 때였다고 말했다. 삼십 년도 더 된 일이라고. “삼십 년 전이요? 그럼 이 시멘트를 우리 아버지가 발랐나 보네요.” 남자는 떡볶이집의 아들이었다. 아주머니가 맨날 업고 있던 그 아이. 나는 발자국을 없애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발자국의 주인이 얼마나 운이 좋은 아이였는지 말해 주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만두를 자주 빚었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은 와사비를 넣은 매운 만두를 하나씩 만들어 섞어놓았다. 동생은 단 한 번도 매운 만두에 걸린 적이 없었다. 늘 나만 걸렸다. 고등학생 때는 수학 시험을 크게 망친 적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가 미리 유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취소가 된 적도 있었다. 동생은 재시험을 아주 잘 보았다. “심지어 나보다 공부를 못했는데도 좋은 대학에 갔어요. 현명한 여자를 만나 결혼도 했고 예쁜 아기도 낳았어요. 그렇게 운이 좋은 녀석의 발자국이니 이 가게도 아주 잘 될 거예요.” 내 말에 남자가 그 덕분인지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살고 있다고 말했다. “짜장떡볶이 지금도 팔아요?” 남자는 그건 팔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짜장떡볶이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 그걸 다시 팔아달라고. “알았어요. 다시 팔게요. 약속해요.” 나는 남자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집 앞에 도착해 베란다를 올려다보니 빨래가 널려 있었다. 바람이 불어 빨래가 흔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네모난 똥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생이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난 진작 알고 있었지. 우주여행 잊지 마.” 동생이 말했다.











윤성희
작가소개 / 윤성희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베개를 베다』, 『날마다 만우절』이 있으며, 중편소설 『첫 문장』과 장편소설 『구경꾼들』, 『상냥한 사람』이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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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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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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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서울

    작가님 소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 신작도 아주 잘 읽었습니다. 생일이 아닌데 친구의 생일 축하 연락을 받고 하루를 보낸 '나', 그 주변 혹은 더 멀리에서 벌어진 무수히 많은 죽음과 그것에 대한 서술, 간극, 아이러니가 정말 좋았습니다. 다만 몇몇의 오타와 오류가 있는 것 같아서 댓글 남깁니다. 4번 두번째 문단 11줄 뼈가 금방 붓는다고 -> 붙는다고 5번 첫번째 10번줄 뭐든 게 -> 모든 게 5번 두번째 문단 10줄 짜장떡복이 -> 짜장떡볶이 5번 두번째 문단 밑에서 8줄 아주머니가 맨날 엎고 있던 -> 아주머니가 맨날 업고 있던 자세히 보면 맞춤법이나 오류 부분이 더 나올 것 같습니다. 정정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2021-10-06 09:45:51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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