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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든,

  • 작성일 2020-12-01
  • 조회수 2,466

[단편소설]



그게 무엇이든,



임성용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빨리 끝내는 게 낫다.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칼끝에 가늘게 전해 오는 떨림과 예상만큼 가벼운 숨. 근수는 원장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뒤에서 감싸 안았다. 어느 한쪽에 힘이 너무 가해져 멍 자국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썼다. 한쪽 손으로 막은 입에서 피가 역류하는 게 느껴졌다. 곧 피가 기도를 막아 질식할 것이다. 원장의 손톱에 붙은 큐빅이 창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을 받아 파르르 떨렸다. 어두컴컴한 학원의 교무실처럼 원장의 목숨이 푸시시 꺼졌다.
일부러 거칠게 칼을 빼서 주위에 피를 튀겼다. 잡고 있던 원장을 그대로 놓았다. 주저앉으면서 몸이 책상에 부딪혔다. 자연스럽게 멍이 들어야 한다. 원장은 치마가 말려 올라간 채로 책상에 기대앉은 모양이 되었다. 퀴퀴하게 드러난 팬티가 젖어 번들거렸다. 쿰쿰한 오줌 지린내가 피어올랐다. 근수는 원장의 오른손 손톱을 세워 바닥에 기절해 있는 실장의 목을 긁어 생채기를 냈다. 핏자국이 좀 부족해 보였다. 원장의 고개를 살짝 모로 돌려놓으니 입에서 피가 넘쳐 나왔다. 칼 손잡이에 피를 묻혔다. 바닥에 누운 실장의 오른손에 칼을 꽉 쥐어 검지 안쪽에 상처가 나도록 하고 칼을 떨어트렸다. 핏자국이 자연스럽게 튀었다. 하나가 더 남았다. 주머니에서 가루를 꺼내 실장의 콧구멍에 밀어 넣고 나머지는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런대로 그림이 되었다. 지린내가 점점 심해졌다. 아직도 오줌이 나오는지 바닥이 점점 젖어왔다. 근수는 덧신에 오줌이 묻지 않도록 물러섰다. 다시 한번 세팅된 그림을 둘러본 다음 학원을 빠져 나왔다. 건물 1층 화장실로 가서 장갑과 덧신과 모자, 두 겹으로 입었던 겉옷을 벗어 가방에 넣었다. 준비한 대로 주위 CCTV에 걸리지 않는 동선으로 근처의 하천까지 걸어갔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천 풀숲에 미리 놓아둔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가방째 통에 넣고 염산을 부었다.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넣은 것들이 녹을 때까지 산책로를 잠시 걷다가 돌아왔다. 통 안에는 탁한 액체만 남았다. 작은 모래톱에 부어 버리고 통은 하천으로 던졌다. 통은 뒤집히며 천천히 떠내려갔다.
모두 계획대로 되었다. 이번 일은 좀 까다롭기는 했다. 원장과 실장이 학원을 끝내고 정사를 벌이는 것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였다. 그 시간을 맞춰 계획을 짜는 게 번거롭기는 했지만, 원장 남편의 요구는 충분히 반영되었다.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근수는 다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부스럭거리는 낙엽 냄새가 옅어지고 공기가 무거워졌다. 계절이 겨울로 가고 있다. 계속 걸어 큰길에 도착했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원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성 메모로 넘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버튼음을 3초간 눌러 녹음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 부스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안은 찌든 담배 냄새를 눌러 놓은 싸구려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거기에 북소리와 함성이 섞인 소리가 요란하다. 내비게이션 화면에는 아랍에미리트와의 축구 평가전이 한창이다. 기사가 볼륨을 낮추며 말했다.
후반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1대 0으로 지고 있어서 끄기도 좀 그렇고, 좀 켜놓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근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을 조금 내렸다. 바깥바람이 들어오니 좀 살 것 같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뚱맞게 세워놓은 골대에 공을 넣기 위해 잔디밭 위를 죽일 듯이 뛰어다닌다. 그걸 수백 수천만이 지켜보며 열광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이긴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저 새끼 또 안 일어나네. 하여튼 저 새끼들은 안 돼. 도대체가 스포츠 정신이 없어. 에이 더러운 새끼들. 안 그렇습니까?
근수는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아나운서도 매너를 운운하며 시간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웅웅 거리는 응원 소리와 북소리. 밑도 끝도 없이 부풀어 오른 애국심이 택시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열기와 싸구려 향에 섞여 비릿한 냄새가 났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는 감은 눈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기억에 들러붙었다. 근수는 냄새를 타고 88년의 그 소읍으로 갔다.



가을에 열릴 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풀썩거리며 부풀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함부로 복개(覆蓋)한 도로 밑으로 썩은 내가 진동을 해도, 컬러TV 속에서는 알록달록 퍼레이드 연습이 한창이었다.
국도 끝 구석진 소읍도 도회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악취를 풍기며 풀썩거렸다. 국민학교와 면사무소와 지서, 술도가와 다방이 있었다. 선거 전날 이장이 오천 원이 든 노란색 봉투를 돌렸고, 장날이 되면 온 골짜기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터가 흥청거렸다. 다방에는 새 아가씨가 왔다. 가을걷이가 시작될 때쯤이면 언제나 다방에 새 아가씨가 왔지만, 경칩이 낼모레인데 새 아가씨가 온 적은 처음 이었다. 열어 놓은 다방 문에서는 종일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늘게 이어지는 음악소리는 동네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 문은 다른 세계와 연결된 것 같았다. 그 다른 세계에서는 낮에 커피를 팔고, 저녁에는 더 깊은 안채에서 술을 팔았다. 소문을 타고 골짜기에서 내려온 남정네들이 낮에는 커피를 시켜놓고 새 아가씨 엉덩이를 툭툭 쳐대고, 밤에는 안채에 들어 화투패를 쪼아대거나 건넛방에서 니나노를 외치며 낑낑거렸다.
장날이 되면 다방에 남정네들은 사라지고, 어느 골짜기에서 내려온 여인네들이 들락거렸다. 먹어 보지도 않은 커피를 시켜놓고, 여우 같은 새 아가씨의 면상을 째려보면서 자기 집 화상이 어느 구석에 숨었나를 살폈다. 종일 커피만 두 잔 마시고 집에 돌아가 잠을 못 잔 여인도 있다고 했다. 오후가 되면 으레 다방에서 싸움이 났다. 홧김에 막걸리를 한 됫박 마신 어느 골짜기 여인네가 새 아가씨나 마담 머리채를 잡고 악다구니를 했다.
이 갈보년들 어데 할 게 없어서, 보지 팔아가 집에 망쪼가 들게 하노. 어? 그기 어떤 돈인 줄 아나? 하기는, 너거 년들이 알 턱이 없지. 삼복 더우에 담배밭에 쎄빠지게 기어 다니미, 이 손 봐라. 이 담뱃진에 손이 이리 새카매지도록, 내가, 내가 쎄가 만바리 빠지구로 해가 번 돈을, 그기 다 우리 아들 공납금이고 빌린 비료값인데. 니 잡녀르 년들 가랑이에 쑤시 널라고 내가 그래 했는 줄 아나! 이 잡년들아.
아, 이 썅년이 어데 와서 지랄이고. 이거 놔라. 안 놓나. 너거 서방이 좆질하고 노름해가 날린 돈을 와 내한테 지랄이고. 이거 놔라 이년아.
마담도 지지 않고 악다구니를 쓰며 한 몸으로 뒹굴다가, 지서에서 순경이 오면 푸시시 정리가 되었다. 그 후에는 한바탕 울음바다가 터졌다.
아이고, 내 팔자야. 서방이라고 있는 기, 빙신 쪼다 같은 기, 낼모레가 경칩인데 논 갈고 씨 나락 뿌릴 생각은 안 하고, 어데다 씨를 뿌리고 지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좆 대가리는 좆만 한 기, 간 대가리는 태평양이다. 아이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아이고, 우리 아들 공납금은 우짜라고. 아이고.
구경하던 장꾼들은 피식피식 웃다가, 자기 일 같기도 해서 혀를 차다가, 아직 짧은 해가 기울면 슬금슬금 자기 골짜기로 돌아갔다. 장터가 비어가면 장돌뱅이들도 다음 장으로 떠날 채비를 해서 트럭에 차곡차곡 실었다. 자잘한 인사와 농을 뿌리고 트럭이 떠나면 휑하니 남은 장터에 어둠이 내렸다.
해가 지면 장터 옆에 바짝 붙어있는 백천식당도 문을 닫았다. 매일 매일 한가한 백천식당도 장날만은 바빴다. 지실 댁은 도회에는 있고 산골에는 없는 건 뭐든지 떼 와서 팔았다. 가을 겨울에는 핫도그 오뎅 떡볶이 생선을, 봄부터 여름에는 과일을, 장국과 막걸리는 사시사철 팔았다. 팔고 팔고 또 팔아서, 망가진 남편과 근수를 먹였다.
장날 아닌 날은 아침 삼아 막걸리 반 되를 마시고 가는 이 씨와 학교를 파하고 5리씩 10리씩 걸어서 자기 골짜기로 돌아가는 아이들 몇이 주전부리를 위해 백천식당에 들렀다. 가끔 지서 순경들이나 학교 선생들이 회식을 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근수는 물을 끓여서 닭이나 오리, 토끼를 잡았다. 그 외에는 대체로 적막하고 그래서 가난하고, 또 그래서 한심한 생각이 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날도 분명 그런 한심한 날 중 하나였는데, 근수는 그날 그 적막 속에 갇혀버렸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봄의 끝자락, 장터 옆 백천식당은 여전히 텅 비고 적막했다. 텅 빈 공기를 괘종시계가 열두 번 두드렸다. 4B 연필이 삭 삭 스케치북을 지나가는 소리와 방문 너머 거칠고 질긴 숨소리, 시계추가 왕복하며 내는 딸깍딸깍 소리가 기묘한 균형을 이루면서 적막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그 기묘한 균형은 분명 무겁지 않았는데, 근수는 낚싯대를 들고 개울로 나서지도, 자전거를 몰아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지도 못했다. 그저 묵묵히 음영을 새겨내는 연필 소리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첫차로 나가 김천 장을 봐서 열두 시 차로 돌아온다던 지실 댁은 한 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텅 비게 공기를 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그 소리만이 시간마다 연필 소리와 숨소리를 잡아먹었다. 답답한 적막의 무게가 질기게도 계속되었다. 보건소에 가야 할까? 방문을 열어 보아야 할까? 생각과 달리 근수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애써 아버지의 숨소리를 듣지 않으려 연필을 꾹꾹 눌러 가며 미술책 속의 정육면체를 그렸다.
어차피, 기왕이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지나갔으면. 아버지가 휘둘러대는 부엌칼을 피해 물집할매집으로 도망을 다니던 때도, 망가진 몸으로 시원찮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아버지를 볼 때도, 그 망가진 아들과 손주를 며느리 목에 걸쳐두고 가는 게 걸려 반나절 동안 숨을 놓지 못하던 할매를 지켜볼 때도 그랬다. 빨리만 지나갔으면. 어서, 빨리.
하지만 시간은 끝도 없이 오후를 흐르고 지실 댁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꾹꾹 누르며 버틴 시간을 오후 세 시의 괘종시계가 때렸을 때, 근수는 식당 문을 열고 나섰다. 오후 세 시의 땡볕밖에 없는 삼거리 버스정류소로, 머릿속 괘종시계 소리를 가슴팍에 댕 댕 댕 새기며 걸어갔다. 찌륵찌륵 방아깨비가 울고 구구구구 산비둘기가 울고 쩡- 소리를 내며 산이 울었다. 멀리 보이는 애기산 골짜기 위에는 음모처럼 뭉게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구름에서 노루오줌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출입이 금지된 저 골짜기에 가면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난다고 했다. 나무도 하지 않아 무성한 숲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고 했다. 죽은 아이를 먹고 더 크게 자란 짐승들과 더 굵은 더덕이 있다고 했다. 언젠가 저 골짜기에 가보리라. 팔과 다리에 더 힘이 오를 때, 저 골짜기에 서 있으리라. 큰 짐승들을 사냥하고 그 골짜기를 지배하리라. 근수는 타잔 같은 포즈를 취하고 골짜기에 서 있는 자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쿰쿰한 땀 냄새와 골짜기에 있을 아기 울음소리, 노루오줌 냄새가 근수를 감싸며 커졌다. 내리쬐는 오후 세 시의 햇볕과 기다림과 기다림의 냄새. 무겁고 긴 냄새 끝에 버스가 왔다.
세 시 반 버스에서 내린 지실 댁이 보건소를 향해 달려가고, 아직 앳된 보건소장이 달려오고,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의 눈을 까뒤집어 보며 청진기로 심장의 소리를 듣는 동안, 근수는 다시 식당 의자에 앉아 선을 긋고 있었다. 지독한 기다림의 냄새를 연필로 삭 삭 눌러 가며 생각했다. 지나가라. 빨리. 어쨌든 빨리. 네 시를 두드리는 괘종시계가 텅 빈 백천식당을 울렸다. 뎅 뎅 뎅 뎅 소리 사이로 커-허 소리를 내며 꺼지는 아버지의 숨소리가 지나갔다. 그러자 그 답답하고 무거운 냄새가 사라졌다. 가늘게 흐느끼는 지실 댁의 울음소리 너머로 다시 적막이 왔다. 그 적막 속에서 근수는 깨달았다.
사라질 것들은 어차피 사라지게 되어있다. 어차피 사라질 것들을 끈질기게 기다려 주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왕 사라져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빠르게 사라져야 한다. 망설이다가 겁먹고 그것 때문에 또 망설이게 되고, 끝내 공포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건 산 사람들의 세계를 흐트러뜨리는 짓이다. 사라져야 할 것들을 망설임 없이 사라지게 하는 일, 그 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근수는 어쩌면 그게 자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비슷한 일을 해왔다. 물고기와 토끼, 닭과 오리의 목을 자르고 배를 갈랐다. 지실 댁을 대신해서 죽이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죽여서 아버지 하나를 살리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아버지는 죽었다.



아버지를 묻고 나자 지실 댁은 과부가 되었고 근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지만, 먹고 자는 일은 더 편해졌다. 밤에 자다가 물집할매집으로 도망을 가거나 엎어진 밥상을 보며 아쉬워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이 점점 불편해졌다. 아버지가 누워 있던 방이 넓어지자 집도 더 넓어졌다. 마당도 넓어지고 부엌도 넓어졌다. 넓어진 만큼 지실 댁과 근수는 집 안을 서성이고 다녔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서성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네는 그날이 그날같이 매일 비슷했지만, 지실 댁과 근수에게는 조금씩 달라졌다. 새 점방 앞 마루에서 파를 다듬거나 쭈쭈바를 빨던 아줌마들은 지실 댁이 다가가면 딴청을 피웠다. 동네 아이들은 고·백·신1) 편을 나누면서 근수를 빨리 뽑지 않았다. 방앗간 집 작은댁으로 사는 대덕 댁과 30년째 과부인 욕쟁이 물집할매만 지실 댁과 근수를 살갑게 대했다.
늦은 밤에 누군가 담장을 넘어오기도 했다. 마당 구석에 매어 둔 메리가 짖는 소리에 놀라 도망가다가 대문 옆 장독대의 간장독을 깼다. 까맣게 찍힌 발자국을 몇 개 남겨 두고 갔다. 후덥지근한 밤공기에 간장 냄새가 가득 피어올랐다. 그 후 며칠 동안 밤이 오면 지실 댁과 근수는 어떤 공포 속에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버지라도, 칼을 던지거나 밥상을 엎는 아버지라도 다 자기 역할이 있었다고.
그 후로도 가끔 메리는 지실 댁과 근수를 지키려 눈을 부라리며 짖어 댔다. 몇 번 반복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근수는 대문 밖의 저것이 노리는 것에 자신은 없다는 걸 알아챘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한결같이 풍기는 썩은 냄새는 지실 댁을 향하고 있었다. 지실 댁은 지서에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하면 순경이 한번 삐죽 다녀가고 온 동네가 수군댈 것이었다. 근수는 밤이 오면 메리를 마당에 풀어 놓았다. 며칠 후 다시 누군가 담장을 넘어왔다. 지난번 그것인지 새로 온 저것인지 모르겠지만, 풀어 놓은 메리가 다리를 물고 늘어지자 놀라 도망쳤다. 이번에는 핏방울과 함께 신발 한 짝을 남겨 두고 갔다. 신발을 뒤집어 보니 저번에 본 발자국과 달랐다. 메리는 찢어진 신발을 물고 한동안 으르렁거렸다.
며칠 후 오후, 메리가 마당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미친 듯이 뛰기를 반복하다가 창고 구석으로 숨어들어서 낑낑거렸다. 입에는 게거품을 물었다. 지실 댁이 비눗물을 타오고 근수는 메리 입을 벌려서 부었다. 컥컥거리다가 돼지비계 덩이 하나를 토해냈다. 다시 비눗물을 부었다. 메리는 더이상 삼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오줌을 싸면서 울었다. 지실 댁도 울었다. 근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동네에서 가끔 쥐약을 잘못 먹고 죽는 개가 있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지실 댁이 다시 비눗물을 타러 간 사이, 근수는 메리의 머리를 잡고 귀 뒤 동맥과 목의 숨 자리를 눌렀다. 메리는 자잘하게 근육을 떨다가 곧 혀를 길게 빼고 숨을 멈췄다. 선홍색 혀 때문에 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도드라져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한쪽이 부러져있었다. 근수는 부러진 자국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지실 댁을 살리기로. 자신이 이 일을 맡기로.

1) 세 편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조건에서 겨루는 놀이로 고구려의 ‘고’, 백제의 ‘백’, 신라의 ‘신’이 합쳐져 고백신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살리려면 언제나 무언가를 죽여야 했다. 마음을, 시간을, 살아있는 것들을. 메리를 죽인 그것을. 그래야 살 수 있다. 근수는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낼 방법을 생각해냈다. 김천 장이 서는 일요일 아침. 근수는 아침을 먹고 윗동네 끝 집으로 향했다. 어른들은 벌써 논밭에 나가거나 첫차를 타고 장에 갔다. 집에 있더라도 ‘한 지붕 세 가족’2)이 끝나기 전까지는 웬만해서 방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근수는 끝 집부터 마루 밑이나 뜨락 위에 놓인 신발들을 뒤집어 보고 냄새를 맡았다. 한 짝만 남은 신발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차근 차근 한 집씩 확인했다. 마당에 사람이 나와 있는 집은 다른 집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확인했다. 근수는 ‘한 지붕 세 가족’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들의 정체를 다 알아냈다.
근수는 윗동네를 다 돌고 아랫동네 집들을 돌기 시작했다. 은기 집을 지나 재훈이 집으로 갔다. 재훈이 집은 신작로 쪽 바깥채를 고쳐서 다방을 하고 있었다. 마담인 재훈이 엄마는 재훈이를 데리고 첫차로 김천 장을 보러 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다방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근수는 신작로 뒤편으로 돌아가 대문을 통과해서 안채 쪽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살피며 놓인 신발을 뒤집어 보고 있을 때, 다방 쪽에서 겁먹은 강아지 소리가 났다. 낑낑거리는 소리를 따라 조심스레 모퉁이를 돌았다. 다방 뒷문이 보였다. 문에는 살구씨를 꿰어 만든 발이 쳐있었다. 소리는 그 안에서 들려왔다. 조용히 발을 걷으며 다방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자 흘러내린 바지와 벌거벗은 엉덩이가 보이다가, 낑낑거리며 애를 쓰고 있는 벗겨진 뒤통수도 보였다. 종도였다. 근수는 엉덩이 너머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새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새 아가씨는 소파에 불편하게 구겨져서 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아가씨는 종도 등 뒤로 팔을 뻗어 휙 휙 손사래를 쳤다. 근수는 살구 발을 조용히 놓고 돌아 나왔다. 마당을 지나쳐 나오다가 수돗가 세숫대야에 담가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수돗가에 다가가자 뒤집힌 신발 바닥의 문양이 눈에 익었다. 선명한 신발 자국같이 간장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근수는 곧바로 아랫동네 끝 집으로 향했다. 다른 집은 가볼 필요가 없었다. 동네에서 종도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당산나무를 끼고 돌아 농수로를 건너다가 신발 하나를 발견했다. 수로에 난 돌미나리 무지 사이에 메리에게 뜯기지 않은 쪽이 버려져 있었다. 근수는 끝 집 대문을 지나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한 지붕 세 가족’ 순돌이가 엄마에게 혼나는 소리가 들리고, 연이어 등터 댁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하고 댕기마 개한테 다 물리노.
시끄럽다. 고마해라.
신발은 어따 갔다 버리고.
고마하라고 했다!
근수는 만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대문을 빠져 나와서 다시 수로로 갔다. 미나리 무지에 버려진 신을 주워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2) 1986년 11월 9일부터 1994년 11월 13일까지 방영된 문화방송 일요 아침드라마.



종도와 만수는 둘 다 마흔이 넘었지만,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종도와 만수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눈앞에 있을 때만 아재를 붙였다. 그 둘은 동창이었다. 종도가 만수보다 네 살 많았지만 둘은 삼청교육대3) 동창이었다. 둘이 어울려 술이 오르면 무용담을 쏟아내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검은 지프에 실려 가서, 이제 고만 죽겠다 싶도록 맞고 훈련을 받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동향인 서로가 있어서였다고. 동창들은 병신 안 되고 돌아와서 천만다행이라며 술잔을 들고 눈시울을 붉히다가도 같은 대졸이라며, 교육대 나왔으니 선생도 할 수 있다고 낄낄거렸다.
종도는 젊어서부터 한량 짓에 도가 트여서, 스물둘에 분탕질과 노름으로 논 스무 마지기를 해 먹고 아버지에게 내쳐졌다. 몇 해를 객지로 떠돌다가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올 때 요란한 여자를 하나 데려왔다. 오자마자 바깥채를 뜯어고쳐서 신작로 방향으로 문을 내고 다방을 차렸다. 데려온 여자를 마담으로 앉히고 안채를 차지했다. 자기 어머니는 사랑채로 밀어냈다. 동네 사람들은 천하에 몹쓸 호래자식이라고, 이런 촌구석에 웬 다방이냐며 욕을 했다. 그래도 다방에 젊은 아가씨 둘을 들이자 금방 자리가 잡혔다. 이듬해에 마담이 재훈이를 낳고 재훈이 엄마가 되었다.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은 마담을 재훈이 엄마라 불렀다. 종도는 계속 종도라 불렀다.
종도네 안채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니나노에 노름판으로 북적거렸다. 사흘이 멀다고 싸움이 났다. 노름판에 돈 날리고 홧김에 사람을 때리거나, 아가씨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까맣게 그을린 팔뚝을 걷어붙이기도 했다. 종도도 그럴 때만은 쓸모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한량 짓으로 농익은 악다구니로 싸움판을 대충 정리하고 나면, 부엌을 향해 막걸리를 한 사발 내오라고 소리쳤다. 마루 위에 어깨를 한껏 펴고 앉아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고 김치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러고는 집 잘 지킨 개 마냥 한동안 흐뭇하게 앉아있었다.
만수는 종도보다 두 해 늦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회로 나가 건달 밥을 먹고 살다가 그 길도 재주가 시원찮았는지, 나이만 먹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남은 재주라고 순진한 고향 사람들의 등을 쳤다. 이장과 면장에까지 줄을 놓고 농번기에는 비료와 농약으로, 겨울에는 취로사업으로 동네를 흩어 놓았다. 수가 틀리면 웃통을 벗고 술병을 깨서 자기 배를 그었다. 한바탕 쇼를 하고 보건소와 지서를 며칠 들락거리고 나면 다시 얼굴을 빳빳하게 들고 다녔다.
두 동창은 만수가 고향에 돌아온 후부터 종종 짝꿍이 되어서 지저분한 냄새를 풍겼다. 동네 사람들은 초록은 동색이라고, 만수가 사고를 치면 그 근처에 종도가 꼭 있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수도 하나가 풍기는 간장 냄새를 따라가서 근처에 있는 나머지 하나를 찾아냈다. 이 동창들은 지실 댁을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여겼다. 남편 잃은 젊은 과부쯤은 언제든지 자기들의 노리개 거리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하면 나도 한다. 이 정도의 알량한 기개를 위해 번갈아 가며 담을 넘었을 게 틀림없다.

3) 1980년 8월 4일 신군부정권하의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전국 각지의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표, 폭력배와 사회풍토 문란사범을 소탕하고, 이들을 죄질에 따라 순화교육·근로봉사·군사재판회부를 병행하여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재소자에 대해 가혹 행위와 인권 유린이 행해졌다.



근수는 주워온 신을 뜯긴 신 옆에 놓아 보았다. 짝이 맞았다. 그것들을 찾았으니 이제 사라지게 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근수는 어려서부터 수없이 없애 왔다. 잠자리 꼬리를 떼어내고 매미 날개를 뜯었다. 메뚜기 다리를 떼어내고 낫으로 뱀 머리를 잘랐다. 올무와 덫을 놓고 독약을 뿌려 사냥을 했다. 토끼를 잡고 노루를 잡고 꿩을 잡아서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겼다. 그리고 끈질기게 지켜보았다. 공포에 먹힌 눈동자들이 내뱉는 부질없는 버둥거림이나 죽음의 냄새들을. 학교에서 목숨의 크기는 작은 짐승이나 큰 짐승이나 같다고 배웠지만 그렇지 않았다. 부피가 크고 따뜻한 체온이 있을수록, 마주 볼 눈이 클수록, 오래 알고 지낸 것일수록 목숨의 감촉과 냄새는 무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한 방식이 필요했다. 함부로 쥐어뜯거나 잘라내는 방식이 아니라 좀 더 매끈한 방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들키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지실 댁 옆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근수는 좀 더 매끄러운 방법을 고민했다. 방법은 많았다. 어차피 이런 구석진 소읍에서 죽이는 도구와 방법은 수도 없이 널려있다. 그중 하나를 고르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근수는 방법을 정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가 왔을 때 실수하지 않기 위해 대비책까지 준비했다. 기다리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계절의 변화와 함께 근수의 키도 자랐다. 근수는 커진 몸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했다. 찌르고 자르고 조르고 빠뜨리고 태우고 약을 먹이는 법, 그리고 매끄러우면서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봄이 왔다. 동기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핑계로 모조리 도회로 나갔다. 근수는 가지 않았다. 더이상 동기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근수 주위에는 싸움과 성적의 순위에서 밀려나거나, 동네가 정한 도덕적 순위에서 밀려난 집의 아이들밖에 없었다. 함부로 수군거리거나, 타락한 유전자를 도도한 도덕적 눈빛으로 쏘아보곤 했다. 한 놈은 근수에게 지실 댁이 요즘 밤에 집에 없냐고 묻기도 했다. 코피를 터뜨리는 선에서 끝났지만, 더 어울리다가는 누군가를 사라지게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실 댁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동안 지실 댁은 물집할매 만큼 욕을 잘하게 되었지만, 혼자서는 여전히 부족했다.
근수는 버스로 통학이 가능한 가까운 농업고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들에 나가 닭과 토끼를 먹일 꼴을 벴다. 꼴을 벨 때는 재훈이를 자주 데리고 갔다. 이제 4학년이 된 재훈이는 다방 아들이라는 딱지가 붙어 동네 아이들에게 데면데면한 대접을 받았다. 데리고 가서 잔대4)를 캐 주거나 가재를 잡아주기도 했다. 재훈이는 금방 근수를 따르게 되었다.
봄인가 싶었는데 날이 더워지더니 금방 가을이 왔다. 다방에는 또 새 아가씨가 왔다. 어젯밤도 안채에서 노름판이 있었다고 했다. 근수는 저녁을 먹고 장이 끝난 장터로 나가 보았다. 메리가 자주 오줌을 갈기던 기둥을 쳐다보았다. 높아진 하늘에는 은하수가 촘촘하게 반짝였다. 은하수 아래 깔린 적막 속에는 비릿하게 썩은 냄새가 온 동네를 흐르고 있었다. 근수는 좀 더 자란 몸에 힘을 주어 근육을 부풀려 보았다. 서늘한 밤공기와 썩은 비린내가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근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4) 뿌리가 도라지처럼 희고 굵은 약재 식물. 아이들의 간식으로도 이용됐다.



근수는 점심나절부터 재훈이 집 마루에서 재훈이에게 방패연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방패연은 손이 많이 가서 반나절을 꼬박 잡아먹었다. 시루봉을 넘어가는 해가 산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갑자기 소란한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았다. 근수는 만수와 눈이 마주쳤다. 만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다가 사랑채 앞에 벌렁 드러누웠다. 근수는 피식 웃음이 날 뻔한 것을 참았다. 만수가 김치를 먹었다. 하긴 누가 먹어도 상관없었다. 역할만 바뀔 뿐. 만수는 누운 채 거품을 물고 쉭쉭 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근수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재훈이는 다방 쪽으로 엄마를 부르러 갔다. 근수는 부릅뜬 만수의 눈을 계속 지켜보았다. 어차피 사라져야 할 목숨이다. 조금 빨리 보내 준 것뿐이다. 그러니 어서 빨리 가라. 종도가 비누를 푼 바가지를 들고 나타났다. 만수 입에 대고 부어 넣다가 자기가 꿀꺽꿀꺽 마시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역시 동창 간이라 사이가 끔찍하다.
만수야. 야 이노마야. 와이라노. 내도 묵었는데. 니만 이라노. 이거 삼키라. 이거 묵고 토해야 산다. 야 임마.
어림없다. 막걸리에는 쥐약을 김치에는 싸이나5)를 탔다. 꼴로 봐서 만수만 김치를 먹었다. 둘 다 먹는 것보다 하나만 먹는 게 더 낫다. 싸이나는 종도가 지난번 꿩 덫을 놓을 때 쓰고 창고에 처박아 둔 걸 훔쳤다. 근수는 종도 옆으로 갔다.
아재요. 비눗물 더 타올까요?
어? 어. 그래.
근수는 바가지를 받아들며 어수선한 틈을 타서 종도 점퍼 주머니에 싸이나 한 줌을 털어 넣었다. 종도는 만수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다.
야, 임마. 정신 채리라. 야.
입에 거품을 문 채로 팔다리를 부르르 떨고 있는 만수의 눈이 근수와 마주쳤다. 이제 거의 다 됐다. 곧 눈동자가 뒤집히며 자잘한 숨이 멈출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근수의 눈을 가렸다. 근수는 뒤돌아섰다. 지실 댁이다. 그 뒤로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게안나? 안 놀랬나?
게안타. 개 쥐약 묵은 거하고 똑같네 뭐.
야가 머라카노. 빨리 집에 가라.
비눗물 타가야 되는데.
지실 댁은 근수에게 바가지를 뺏어서 수돗가로 던졌다.
시끄럽다. 빨리 안 오나.
뒤통수에서 종도가 다시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수는 뒤돌아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실 댁을 따라갔다.
우짜노, 저 거품 봐라. 쥐약 묵었는갑다.
아이고, 만수는 벌써 눈 돌아삣네. 우짜꼬.
둘이 동창이라고 그리 싸고 돌더마. 이 뭔 일이고.
어제도 노름판에서 싸움이 났다. 동창끼리도 끗발 앞에서는 쌍심지를 켜고 쪼아대다가 종도가 탈탈 털렸다. 홧김에 종도가 던진 맥주병이 벽에서 박살이 나고 돈 꼰 김에 부아가 난 노름꾼들이 옛날 버릇 나온다며 종도를 밟았다. 만수는 딴 돈에 불똥 튈까 신경 쓰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돈만 챙겨 나왔다. 다음날 종도가 만수에게 동창끼리 처신이 그러냐고 지청구를 먹이고, 간밤 일이 맘에 걸린 만수가 술을 사는 것으로 동창의 정을 회복하기로 했다.
근수는 간밤에 종도가 노름꾼들에게 밟혔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움직였다. 아침부터 재훈이 집을 기웃거리며 동창회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점심나절부터 시작한 동창회는 해거름쯤 막걸리 닷 되가 넘어갔다. 얼근한 동창들이 사이좋게 오줌을 누러 간 사이 근수가 다녀갔다.
며칠 동안 지서에서 순경이 나오고 방송국에서 기자들도 다녀갔다. 근수와 지실 댁은 저녁을 먹으며 뉴스를 봤다. 뉴스에 나온 종도는 도박으로 돈 잃고 매 맞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보복 살인을 했다. 김치에 청산가리를 타고, 자신도 피해자 행세를 하려고 미량이지만 쥐약을 타서 마셨다. 죄질이 좋지 않고 과거에도 도박 전과가 있으며,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아 가중 처벌받았다.
지실 댁이 고등어자반을 뜯어서 근수 밥 위에 놓으며 말했다.
쌍놈의 새끼들. 지랄들을 한다.
근수는 고등어를 입에 넣고 씹었다. 짭짤하고 비릿한 맛이 입속에 퍼졌다.

5) 청산가리의 일본식 표현.



북소리와 웅웅 거리는 응원 소리가 사라졌다. 눈을 떴다. 내비게이션은 길 안내를 하고 있고 라디오에서 DJ가 나긋하게 말을 이어 가고 있다. 들어 보니 DJ는 생활과 꿈 사이에서 고민하는 K모 양의 사연을 읽고 있었다. 하나 마나 한 염려와 위로가 길게 이어졌다. 택시는 외곽순환도로에 들어서자 속력을 높였다. 가르릉 거리는 엔진 진동음이 몸을 파고들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가 다 되어 간다. 지금쯤 실장이 몽롱한 상태로 깨어났을 것이다. 마침 전화를 받지 않는 원장을 찾아온 남편이 그 광경을 발견하고 신고를 할 것이다. 남편이 실장을 몇 대쯤 두들겨 팼을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 경찰이 올 것이다.
손바닥을 펼쳐 보니 원장의 자잘하게 떨리던 숨 자국이 아직 남아 있다. 목숨에 의미는 없다. 어차피 모든 목숨은 함부로 죽는다. 꼬리 떼어 낸 잠자리같이. 다리 떼어 낸 메뚜기같이. 함부로 먹고 먹히고 부서진다. 존엄 따위는 인간이 만들어낸 방탄조끼 같은 것이다.
마지막 신청곡이 나오고 자잘하게 떠들던 DJ가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 잘 자요. 음악은 후렴 부가 시작되기 전에 끊기고 두 시를 알리는 시그널 음이 나왔다. 띠 띠 띠 띠- 근수는 길게 끌리는 마지막 음을 들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의 근수는 아직도 텅 비고 적막한 백천식당에 있다. 4B 연필을 꼭꼭 눌러 가며 정육면체의 음영을 새겨 넣으며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오후 네 시의 괘종시계가 먼 메아리처럼 울린다. 댕 댕 댕 댕











임성용
작가소개 / 임성용

경북 김천 출생.
201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맹순이 바당」.
2020년 현진건문학상 추천작 수상. 「지하 생활자」.


《문장웹진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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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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