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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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흙 묻은 손
흙 묻은 손 임성용 오이 모종을 심어 놓고 밤새 잠 들지 못한다 철판을 잡던 손으로 모판을 잡고 망치를 잡던 손으로 삽자루를 잡아도 손가락 사이 물집 배이는 건 마찬가지구나 잘못 이은 철판은 다시 자르고 부러진 망치는 새로 바꾸면 그만, 이렇게 밤잠까지 설치며 마음 졸일 줄이야 기어코 소나기가 쏟아져 오이밭으로 황급히 달려가는 새벽 어린 모는 땅에 뿌리를 내리기 전에 흙 묻은 손에 먼저 뿌리를 뻗는구나 이토록 흙물 들어 넘치는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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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트럭
트럭 임성용 밤 깊은 고속도로휴게소, 나는 5톤 트럭을 몰고 네 시간 반을 달려왔다 아마 2톤 이상은 과적이었을 게다 과적보다 무거운 것은 갑자기, 눈발처럼 쏟아지는 잠의 중량 잠은 얼마나 위험하게 적재된 낙하물인가 달랑 내 몸 하나 들어가 누울 운전석 뒷자리에 밧줄에서 풀린 잠을 잠시 편안하게 눕혀놓았다 베개를 깔고 동잠바를 덮어 주고 포근하고 행복한 잠의 살결이 스펀지처럼 가벼워질 때까지 나는 그녀의 보드라운 젖을 만져 보았다 그녀는, 내가 지칠 만하면 지방질이 물컹 빠진 젖의 꼭지를 내 메마른 입술에 꼭 한 번씩 물려 주었다 밤 깊은 고속도로휴게소, 배식대를 빠져나온 나를 닮은 사내들이 그녀의 젖에서 흘러나온 구수하고 따끈한 숭늉을 마셨다 숭늉을 마시고도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고장난 후미등에 볼트처럼 매달린 낡은 이빨들 그 어떤 새로운 말도 캄캄하게 막혀 버린 두툼한 입술들 아직 갈 길은 먼데 주먹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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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만석고물상
만석고물상 임성용 만석고물상 고철더미 구석에는 중고 기계들이 우두커니 서 있다 저 공룡처럼 생각을 잃은 것들 탱크가 부서지고 관절이 꺾인 것들 프렌지가 뜯긴 뻥 뚫린 눈으로 멍하니 발톱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들 시커멓게 녹물이 흘러 뜨거운 핏줄을 지운 것들 아니, 상처가 나도 피를 흘릴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것들 울음조차 눈물조차 굳어진 것들 기름 찌꺼기를 고름처럼 껴안고 살아있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는 것들 그 기계들 옆에 가만히 서 있으면 롤러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리는 것 같아 프레스 이빨 찍는 소리가 쾅쾅 고막을 때리는 것 같아 가슴이 뛴다, 공장 나온 지가 벌써 오 년 째 나도 모르게 가슴 속 유압유가 벌컥 차오른다 저 기계들이 내 그리움을 빼앗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면 애인과도 같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러나, 저 포악한 육식공룡 같은 것들 고철로 용광로에 들어갈 때까지 인간의 꿈을 모르는 것들 아직 포장이 뜯기지 않은 기계들마저 버젓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