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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성(제2화)

  • 작성일 2019-12-15
  • 조회수 2,041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중편소설]



금속성(제2화)



민병훈




운전사가 먼저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조수 역시 옷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당분간 이곳을 조사하면 됩니다.
조수는 운전사가 자신만 두고 가는 것이 내심 불편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회색 건물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방을 감싼 빗물방지용 천이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수는 천을 들어 올려 가방을 다시 덮었다. 유난히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일주일 뒤에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진 여기서…….
운전사는 무슨 잘못이라도 지은 것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건물 뒤에 자리한 숲이 어둠 속에서 흔들거렸다. 조수는 고개를 위로 들며 작업복 앞섶을 잠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탓인지 하늘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고, 조수는 말했다.


운전사가 알려준 길을 따라, 조수는 한참을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조금만 가면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올 거라고 했다. 그보다 먼저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리 경비 초소라고 적힌 팻말이 보였다. 사람은 없었지만 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초소 처마 밑에 걸린 색색의 천과 깨진 창문도 보였다. 여기가 아닌가, 조수는 잠깐 고민했지만 설마 다른 곳에 내려 줬을까 싶어 그대로 걸었다. 원래는 빨간색이었을 페인트가 벗겨져 그 속의 기둥이 뼈처럼 드러나 보였다. 문이 흔들릴 때마다 초소 안쪽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조수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열쇠를 꺼내 자물쇠에 맞춰 보려 했지만, 자물쇠가 없었다. 무릎까지 자란 잡초를 밟으며 돌아 나왔다. 등 뒤에선 여전히 끼익끼익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걷자 곧바로 운전사가 알려준 건물이 나왔다. 8층으로 된 건물이었고, 회전문은 잠겨 있었지만 바로 옆 비상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중앙 바닥이 움푹 꺼져 있었다. 안내데스크라고 적힌 테이블 앞에서 헛기침을 크게 했다. 가방을 올려 두고 숨을 고르는 사이, 테이블 뒤의 문이 열리며 불쑥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수는 놀라진 않았지만 행색이 수상쩍었다고 말했다. 첫눈에 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초췌한 모습이 꼭 극심한 노동에 시달린 사람 같았다. 눈자위와 입이 유난히 들어간 탓에 마치 어두운 구멍처럼 보였다.
조사를 하러 온 분이시죠?
빈 건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수는 전달사항을 잘못 들었나, 자신을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운전사가 잘못 내려 준 것 같다고 다시 생각했다. 남자는 조수의 등 뒤로 시선을 던지며 주위를 살폈다. 입고 있는 옷은 넝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남자가 안내데스크 문을 옆으로 밀자 드르륵 소리가 났다. 방을 안내해 준다며 앞서 걸었다. 기다란 복도에 방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은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걷다 보니 철로 제작된 문이 보였다.
조수는 짧게 목례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촛대가 책상 앞에 놓여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통해 한기가 전해졌다. 씻고 싶었지만 잠이 쏟아져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때까지 남자는 조수를 계속 바라봤는데 볼일이 남았는지 할 말이 있는 건지 나가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급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조수는 이불을 덮으며 남자가 있던 문을 바라봤다. 남자의 실루엣이 문틈에 비쳤다가 사라졌다. 벽을 통해 바람이 새어들었다. 밤은 계속 깊어 갔고, 구름들이 빠르게 창밖으로 무리지어 지나갔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풀벌레들이 문에 부딪히는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잠을 방해했다. 마치 숲의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것 같다고, 조수는 생각했다.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 쓰며 겨우겨우 잠에 들었다.


조수는 여기까지 말하고 냉장고로 가서 술을 가져왔다. 그사이에 나는 잠깐 졸았는데 이야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계속 눈에 힘을 줬다.


한밤중에 그를 깨운 건 사람들의 대화소리였다.
그냥 가자니까. 아파 보이는데. 누구지. 자는 중이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릴 듣고 있는 것 같은데요. 깨우지 마. 그냥 가요. 자게 내버려둬. 움직이는데. 잠결에 뒤척거리는 거야. 여긴 왜 왔지. 일어나면 뭔가 물어보려 할 거야. 얼른 가자. 가지 마요. 창백해. 자꾸 움직이는데. 어디로 갈 건지 정해.
눈을 뜨자 더 이상 대화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살폈다. 날카로운 바람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조수는 벽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벽을 쓰다듬어 보았다. 오돌토돌한 게 꼭 파충류의 피부 같았다고, 조수는 말했다. 잠이 덜 깨 머리가 몽롱했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 조수는 선 채로 눈을 감고 고민했다. 방 안에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수는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문 옆에 깔았다. 그러곤 문을 한 뼘 열고 밖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동이 트고 아침이 한참 지났을 무렵, 어떤 여자가 방을 찾아왔다. 조수는 밤잠을 설친 탓에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봐요, 일어나 봐요. 아직까지 자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여자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래도 문을 열지 않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 조수를 흔들어 깨웠다. 겨우 정신이 든 조수는 화들짝 놀라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잠시 시간을 준다면 준비해서 나가겠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손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여자는 자신을 이곳에 먼저 조사 나온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직원이 왜 찾아왔을까, 처음에 의아해하다가 생각해 보니 그건 의아해할 일이 아니란 걸 떠올렸다.
그나저나 이 건물은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직원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조수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폐건물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다곤 하지만 어제와는 전혀 다른 곳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둘러봤다. 녹색으로 번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방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조수는 그간의 일을 설명하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가 있었는데, 말을 하며 주머니를 뒤졌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불쑥 나타나서는 이 방을 안내했다는 말이죠?
직원이 재차 물었고 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못 들어오는 곳인데.
직원은 말을 뱉곤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단 같이 갈 데가 있으니 나가죠.


여긴 수치가 높은 편인가요?
직원은 대답 없이 걷기만 했다. 낙엽이 발밑에서 으스러졌다. 이렇게 많은 낙엽이 쌓여 있다니, 조수는 신기했다. 근처에 나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헐벗은 민둥산에 가까웠다. 그 민둥산을 가리듯 낙엽들이 쌓여 있었다. 어떤 곳은 발이 움푹 들어갈 정도였다. 조수는 일 얘기는 하지 말 걸 후회했다. 왠지 직원에게 밉보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는데, 왜 그런 건지는 따로 말해 주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걸었고 중천에 뜬 해가 그들의 머리 위를 비췄다. 직원은 뭔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다가, 땅만 보고 걷다가, 다시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조수도 직원의 행동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가 내렸다.
이상하네, 여기 어디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낙엽 부스러기가 허공에 흩날렸고 직원의 얼굴을 덮었다. 직원은 입에 들어간 부스러기를 퉤퉤 뱉었다. 조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보려던 찰나, 그들 앞에 높은 철책이 나타났다. 오래전에 지었는지 군데군데 철창이 빠져 있었다. 직원은 있는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빡빡한 탓에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힘을 썼고, 그제야 비명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뭐 해요, 안 들어오고.
조수는 여러 형상의 철상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래도 잘못 따라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턱대고 따라오다니 경솔한 것 같았다. 왠지 찜찜하고 불편한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사람과 비슷한, 팔 부분이 유난히 긴 철상을 올려다봤다. 한 손에는 긴 채찍이 들려 있었다. 그 철상을 지나자 머리에 투구를 쓴 다른 철상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말의 머리가 있었다. 돼지도 보였고 닭도 보였다. 철상들 대부분이 동물의 머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원은 나무꼬챙이를 하나 줍고는 바닥 여기저기를 찔러 보며 걸었다. 꼬챙이가 닿을 때마다 낙엽이 부서졌다.
뭘 찾는 겁니까.
여기에 장비를 두고 가서요.
조수가 아무 말이 없자 머쓱했는지 하던 일을 계속했다. 길옆으로 도열된 철상들을 지나자, 여기서부터 공동묘지입니다, 라는 팻말이 보였다. 길이 끝나는 곳에 수십 개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자란 풀들이 무덤들을 더 크게 보이게 했다. 조수는 직원을 뒤로 하고 무덤들 사이를 걸었다. 발자국처럼 땅바닥에 박힌 묘비들을 구경했다. 이름과 기일 따위가 적혀 있었고 망자를 기리는 문장들도 더러 보였다. 조수는 왠지 자신이 숙연해져야 할 것 같아 난감했다. 그리고 숙연해지지 않는 자신 때문에도 난감했다.
저는 제가 조사해야 하는 곳들만 보고 떠날 겁니다.
조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직원은 여전히 꼬챙이로 바닥을 쑤시고 있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범위도 넓어졌다. 화가 난 것처럼 바닥을 쑤셨다. 그러다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꼬챙이가 부러졌다. 부러진 꼬챙이를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조수는 직원이 그러거나 말거나 공동묘지를 빠져나왔다. 무덤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풀들이 바람에 맞춰 일정하게 흔들렸다.


그때 봤던 것들을 그려 줄 순 없냐고 묻자 조수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혼잣말을 했다. 그러는 사이 팔콘이 소파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잠투정을 하려나 했는데 무릎을 베개 삼아 눕고는 다시 잠들었다. 나는 조수가 뭔가를 자꾸 빠트린 채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설명을 원했다간 말을 멈출 것 같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조수는 마을로 내려와 곧바로 식당을 찾았다. 배가 너무 고파 어지럽기까지 했는데 꽤 오랜 시간 걸었다. 겨우 찾아 이마에 손을 얹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금이 간 시멘트벽이 보였다. 식당 안에는 남자 여럿이 둘러앉아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각자 손에 뼈를 든 채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 모두들 입가가 기름 범벅이었다.
저쪽이랑 같은 걸로 주세요.
물을 내온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저 음식은 다 떨어졌으니 다른 걸 시키라고 말했다. 지금 저는 뼈를 발라먹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하고 묻자, 뼈로 국물을 낸 국이 있으니 그걸 먹으라고, 더 이상 투정을 부린다면 내쫓아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놨다. 조수는 시무룩한 기분으로 수저를 들었다. 국물을 수저로 떠서 입에 넣었다. 알고 있던 맛이 아니었다. 다른 음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전에도 먹어 본 것 같은데,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다. 식사를 마친 남자들이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살점 하나 없는 뼈다귀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조수는 다시 국밥을 먹었고, 수저로 깍두기를 쪼개려다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주인이 그가 앉은 테이블 위에 행주를 던졌다. 얼룩이 남지 않도록 테이블을 꼼꼼히 닦았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조금은 기분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서둘러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얼른 시작해야지, 하고 길을 따라 걷는데, 그때 길 옆쪽에서 수십 명으로 이뤄진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 맨 앞에 선 누군가가 보폭에 맞춰 소리를 질렀다. 행렬은 점점 조수가 서 있는 곳과 가까워졌다. 모두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다. 조수는 걸음을 멈추고 행렬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사람들은 잠든 것처럼 걸었다. 점프슈트 곳곳이 해져 구멍이 뚫렸고 불에 그슬린 듯한 부분도 보였다. 건물이 있던 쪽과는 반대편으로 행렬은 나아갔다. 어림잡아도 족히 쉰 명은 되는 것 같았다. 행렬의 끝을 졸졸 따라가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어지는 행렬을 보며 조수는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수는 가방에서 장비를 꺼내 가는 곳마다 수치를 기록했다.
빨간 불이 한 번 깜빡, 하면 기준치,
빨간 불이 두 번 깜빡, 깜빡, 하면 미만,
빨간 불이 세 번 이상, 반짝이면 기준을 초과한 수치였다.


마을의 중심부가 어디일까 생각하며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보려 했으나 행렬 이후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색을 잃어 가는 풍경만이 무기력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쨌건 계속 걸었고, 한 남자가 불현듯 조수의 곁에 다가왔다. 어젯밤에 본 사람이었다. 간밤에 잘 잤느냐고 남자는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어 통 잠을 못 잤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묻지도 않은 길을 조목조목 알려줬다. 그러곤 반대로 걸어갔다. 조수는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으나 다음에 만나면 묻기로 하고, 그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가게 안은 안개가 짙게 낀 것처럼 시야가 탁했고, 조수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찾았지만 문을 제외하곤 사방이 막혀 있었다. 가게 구석에는 기다란 온도계가 반쯤 기울어진 채로 벽에 기대 있었다. 진한 알코올 냄새 때문에 코가 얼얼했다. 칸칸마다 마스크가 진열된 전시대 뒤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 모습에 주인도 놀랐고, 장난 좀 친 건데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며 조수에게 사과했다. 조수는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스크를 좀 살까 하는데요.
주인은 뒷짐을 지곤 가게 안을 돌아다녔다.
어떤 마스크?
입과 코를 막는 마스크 말입니다.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대신 천천히 전시대를 구경했다. 주먹만 한 것부터 얼굴 전체를 가리는 큰 것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전시대 옆에는 위아래가 한 벌로 연결된 옷들이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주인은 살 거면 만지고 안 살 거면 손도 대지 말라고 말했다.
방진복입니까.
조수는 한번 입어 보고 싶었으나 이내 생각을 접었고, 마스크만 하나 챙겨서 계산대에 내밀었다. 주인은 한 장씩 침을 묻혀 가며 돈을 셌다. 가게를 나서려는 조수를 붙잡곤 라디오처럼 생긴 작은 기계품을 줬다. 자기 전에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맑아질 거라고 말했다. 조수는 기계품을 주머니에 넣곤 가게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가게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게 이거예요.
조수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나는 조심히 그 물건을 살펴봤다. 더 이상 작동이 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 보는 구조였고, 정교했다. 뭔가를 축소해 놓은 듯한 형태였는데, 부피를 달리하면 더 작게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용도를 묻자 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리만 나와요. 뭔지 모를 소리만.
음량을 조절하거나 다른 채널로 바꾸진 못하고, 그저 전원을 켜고 끄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주로 지직거리는 기계음과 단발적인 타격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짐승이 낮게 우는 소리 등을 들었다고. 분해를 해볼 생각은 없었냐고 묻자 갑자기 술잔을 급하게 내려놨다. 그러곤 울상을 지었다.
어디를 열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돌풍이 멎었는지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게를 나서자 한 아이가 조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몸을 돌려 지나치려고 했으나 아이는 계속 조수를 붙잡았다. 물에 젖었는지 겉이 너덜너덜한 박스를 들고 있었는데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아이는 다짜고짜 박스를 들이밀었다. 조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아이는 박스를 흔들어댔다. 할 일이 태산이라고, 이곳에 온 이유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설명하려다가 관뒀다. 그때 뭔가가 보였다. 아이 뒤에 자리한 길 옆 덤불에서 누군가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무척 하얗고 생기 없는 얼굴이었다. 입을 오물오물 하는 것이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긴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는 뒤를 돌아 다른 아이를 바라봤다가 다시 조수를 바라봤다.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조수는 자신이 마치 그들 앞에서 지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스를 들고 있는 아이와 덤불에서 나온 아이는 그가 있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얘기했다. 뭔가를 상의하는 것 같았으나 자세히 들리지 않아 그마저도 알 수 없었다. 조수는 물을 한잔 얻어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갈증이 나 목이 따가운 참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조수를 안내했다.
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문을 열자 어둠침침한 조명 탓에 내부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한 아이가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대화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다른 아이에게 불을 좀 켜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는데 별안간 또 다른 아이가 뛰어나와 조수의 손을 붙잡았다. 조수는 끌려 들어가다시피 집으로 들어갔다. 큰 방이 보였고 그 안에 아이들이 둘러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을 가지러 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키가 큰, 아이라고 하기엔 몸집이 컸지만 얼굴은 앳된 아이가 조수를 올려봤다. 얇은 옷 겉으로 드문드문 등뼈가 보였다.
여긴 왜 왔어요?
목이 따가워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손을 들어 올려 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아이는 쯧쯧 혀를 찼다. 구석에 가서 앉아 있으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조수는 말을 무시하곤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탓에 아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보는 것 같기도, 뭔가를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인기척을 내자 무리 중 몇몇이 슥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물을 가지러 간 아이가 어느 순간 다가와 가로막았다. 국그릇만큼 큰 사발을 들이밀었다. 조수는 숨도 쉬지 않고 물을 들이켰다. 반 정도는 입 옆으로 흘렀다. 소매로 입을 훔치며 방 안을 기웃거리자 아이는 나가라고 재촉했다.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다. 어둠침침한 방만큼이나 음산한 소리 같았다. 등을 떠밀리며 그곳을 나오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거리는 어두컴컴한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조수는 아침에 나왔던 건물로 되돌아갔다. 석연찮은 기분을 떨치기가 힘들었고 뭔가를 확인해야만 조사가 순조로울 것 같았다. 건물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는데, 제일 꼭대기 층의 창문에서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파란 불빛이 점점 옅어졌다가 다시 짙어졌다. 방으로 돌아가 짐을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아 숨을 돌렸다. 누군가 따라오는 기분이 들어오는 동안 재빨리 걸었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에는 안개 속을 거의 뛰는 것처럼 걸었다. 신발에 돌이 들어갔는지 발바닥이 따끔따끔했다.
조수는 간단한 장비와 손전등을 챙겨 방에서 나왔는데, 무섭거나, 두렵거나, 긴장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건물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제어실에는 처음 보는 계기판이 많았고 모두 작동을 멈춘 듯했다. 숫자를 가리키는 바늘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그대로였다. 밖에서 봤던 꼭대기 층의 방으로 가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겠지, 라고 판단했다. 어떤 곳은 커다란 물탱크가 3층가량의 높이로 세워져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파이프가 잔뜩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로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니, 뭔가가 서 있었다. 조수는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게 주인에게 받은 장비를 켜자마자 잠이 들었다. 너무 빠르고 깊게 잠든 탓에 꿈과 현실이 분간이 가질 않는 거라고, 조수는 생각했다. 로비에 서 있던 그것은 조수를 보곤 몸을 움직였는데 따각따각 구두소리가 메아리처럼 사방을 가득 메웠다. 자세히 보니 구두가 아니라 말발굽이었다. 말이 로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재밌는 꿈이라고 조수는 생각했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말의 모습이 지나치게 뚜렷하게 느껴졌다. 말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나, 떠올려 봤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갈기며, 우람한 가슴 근육이며, 허연 입김이 새어 나오는 콧구멍을 본 적이 있었던가. 아직도 말을 타는 사람이 있나. 왜 말이 여기서 저러고 있나. 조수는 생각을 중단하고 말에게 다가갔다. 말에 올라타기 위해서.


조수는 수치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수치를 기록하고 수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 말이 우리 머리 위에서 날뛰는 것 같았어요.
— 비가 내리고 먼지가 가라앉았어요.
— 마르코가 기차역에 도착했다면 곧바로 기차를 탈 수 있었을까.
— 오염된 곳과 오염되지 않은 곳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 장비는 어느 곳에서나 작동돼요. 다른 사람의 꿈속에서도.
— 자연적인 기계.
— 기계적인 자연.
— 숲의 공터에는 가지 말아요.
— 그곳에는 낙엽도 없어요.
— 매일 아침을 여관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 봐요.


말을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아팠다. 나는 되도록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세상모르게 자는 것만이 최선의 바람이었다. 말은 자꾸 느려졌다. 옆구리를 발로 차도 반응이 없었고 속도가 빨라지지 않았다. 쉬고 싶은 눈치였다. 말에서 내려 강변을 향했다. 강바람이 세게 불었다. 낙엽이 말과 나에게 날아왔다. 말을 세워 풀을 먹였다. 시커먼 강물이 일정한 높낮이로 출렁였다.
머리가 맑아졌다. 집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왔던 길을 세 번 정도 왕복할 만큼 가야 집 근처였다. 멀리 강 건너를 바라봤다. 눈에 힘이 풀렸다. 그러다 눈을 의심했다.
물살에 뭔가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잘못 본 줄 알았으나 그것은 물에 팅팅 부어 멀리서도 형체가 확연했다. 사람이었다. 이 야밤에 시체라니. 그것도 강물에 떠내려가는 시체라니 등골이 오싹했다. 잠깐 세워 둔 말은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몸이 떨렸다. 갈대들이 잎을 부대끼며 스슥스슥 소리를 냈다. 시체는 물살에 밀려 내가 있는 곳과 가까워졌다.
시체는 깨끗하다는 표현 이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물에 깨끗이 씻긴 것 같았다. 물에 불었을 뿐 흉측하지는 않았다. 앞쪽이 물에 잠겨 얼굴의 전체적인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시체라고 가늠만 했지 실제로 마주하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힘에 부쳤으나 홀린 듯 시체를 둑에 올렸다. 그러곤 구덩이를 파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이 있었더라면 시체를 옮기기 훨씬 수월했을 텐데 아쉬웠다.
땀이 쏟아졌다. 강 옆에 자리한 구릉지로 시체를 옮겼다. 낮은 풀이 바지 밑단에 스쳤다. 벌러덩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시체와 나란히 누웠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비가 내리길 바랐다. 비가 내리면 몸을 식히고 땅파기도 수월할 텐데. 등에 닿는 땅이 너무 푸석했다. 일어나 뾰족한 돌을 주웠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땅을 팠다. 파고 또 파도 끝이 없구나 생각할 때쯤 뭔가가 툭, 하고 걸렸다. 허리 높이 정도 팠을 때였다. 모래를 손으로 쓸어 봤다.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다른 시체가 보였다. 왜 자꾸 시체가 나타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앙상한 뼈에 붙은 살점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홀로 빛나고 있었다. 냄새가 고약했다. 방금 나온 시체와 구덩이 옆 시체를 번갈아 봤다. 그간 팠던 구덩이를 다시 흙으로 메웠다. 번거롭지만 다른 구덩이를 파야 했다.


저희 경찰서가 자랑하는 최고의 부서입니다. 다른 서에는 기동대가 있는데, 어차피 기동대라고 해도 워낙에 기동력이 부족하니까요. 말은 조금만 교육을 시키면 제 몫을 아주 톡톡히 치릅니다. 유지비도 적게 들죠. 요새는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기름값이 오르지 않습니까? 마구간은 건물 뒤에 만들면 되는 일입니다. 풀만 주면 돼서 끼니 걱정도 없죠. 저희 경찰서는 기병대 덕분에 다른 지역 경찰들보다 사건 현장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차로 꽉 막힌 도로에서도 말들은 요리조리 잽싸게 달리죠. 갑자기 긴급 데모 같은 사건이 터져도 걱정 없습니다. 재빠르게 현장에 가서 말들이 떡하니 전열을 갖추면 모두 멈칫하니까요. 시각적으로도 위협을 줄 수 있습니다.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말똥이니 뭐니 해서 조롱 받기 일쑤였는데, 지금 보십시오. 연일 도시로 출동을 나가지 않습니까.
그 일이요? 별일 아닙니다. 종종 있는 일이긴 한데. 그냥 당신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작업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이런 건 왜 궁금한 겁니까? 이틀 전이었나요. 아침에 보고를 받는데 기병대에서 말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연이어 세도 자꾸 수가 안 맞는다는 거였죠. 근무를 교대하던 마부가 처음 상황을 알았고, 바로 저한테까지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새벽에 근무를 섰던 마부는 지금 조사를 받고 있어요. 모르긴 몰라도 감봉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병력을 총동원해서 수색을 했습니다. 일부러 담을 높게 지었는데, 새벽 사이에 그 담을 넘지는 않았을 거고. 이상한 일이었죠. 기병대 말 중에서 제일 어린놈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근데, 사방팔방 다 뒤져도 이놈의 말이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전문가까지 동원해서 수색을 했는데 글쎄 말똥은커녕 털 한 올도 찾지 못했습니다. 상부까지 보고가 들어가서 아주 난리가 났죠. 배고프면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 부러 문을 열어 놨는데도 오질 않더란 말입니다.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습니다. 없는 사건을 하나 만드는, 뭐 그런 거였죠. 경찰서를 빠져나간 말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강에 빠져 죽었다, 수색 끝에 강물에 떠내려오는 말을 발견했고, 거기서 끝입니다. 몰래 다른 마을 목장에 연락해서 말 시체를 한 마리 구해 왔죠. 결국 일은 그렇게 마무리됐습니다. 근데 아직도 궁금합니다. 도대체 말이 어디로 간 건지. 제 생각인데, 아마도 누가 잡아다가 먹거나 키우지 않을까 합니다. 그니까 보이질 않는 거겠죠. 안 그렇습니까? 키운다고 해도 길들이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아니면 혼자 돌아다니는 중일까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걸까요? 혹시 보신다면 제게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별안간 단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송전탑 하나가 벼락에 맞아 쓰러졌다고 했다. 방송하는 사람은 피곤한 말투로 다른 소식들도 전했다. 나는 작업장에 초가 있는지 떠올려 봤다. 창고 서랍장 어디에 뒀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방송이 끝나고 인파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송전탑이 쓰러지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봤으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소리만 크게 났을 것 같았다. 고철을 팔기 위해 모여든 작업자들과 송전탑을 설계하고 설치한 공무원들, 근처에서 송전탑의 상태를 점검하던 관리자들, 경비원들, 근방 주민들, 송전탑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 모여 송전탑에 대해 말을 주고받지 않을까, 상상했다.


이봐요, 진짜라니까 그러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지금 당신이 자꾸 되물으니까 그러죠. 알았어요, 알았어. 다시 차근차근 말해 볼게요.
그날따라 다들 송전탑으로 구경을 간다고 해서 나도 가게 문 닫고 가볼 생각이었어요. 막판에 양초 한 상자 팔고 오늘은 글러먹었구나, 해서 셔터를 내리는데, 글쎄, 도로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처음엔 잘못 들었구나 싶었죠. 근데 소리가 자꾸 커졌어요. 느낌이 이상해서 가만히 서 있는데, 어째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들리더라고요. 비명 같다고 해야 하나.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보려고 했더니, 마침 또 아무도 없더라고요. 겁은 나는데, 또 궁금하기도 하고,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하나 어째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죠. 원래 내가 겁이 많았는데, 어릴 때 산에 한번 갔다가 길 잃고 밤을 꼴딱 새고 나온 적이 있거든요. 그 뒤론 겁이 없어져서 웬만한 일 가지고는 눈 하나 깜빡 안 해요. 그래서 슬금슬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봤죠. 안 들키게 눈으로 보기만 해야겠다, 했는데 갑자기 소리가 뚝 하고 끊긴 거예요. 울음소리가 이제 안 들리더라고요. 역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돌아가려는데, 그때 저쪽에서 누가 걸어 나왔어요. 경비원이요. 손에 망치를 들고. 평소에 쳐다보는 눈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말도 잘 안 섞는 편이라 친하지는 않아요. 그냥 느낌이 싫었다고요. 사람 대하는 느낌이. 아무튼 망치를 들고 이쪽으로 오는데, 글쎄, 뭐가 망치에서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어요. 괜히 전화 받는 척을 하면서 그냥 서 있었죠. 그 사람이 지나가고 다시 가보니까 세상에, 피가 떨어져 있더라고요. 새빨간 피가. 내가 그 사람을 평소에 싫어해서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짜예요. 진짜 피가 있었다니까요.


그는 자신이 전근을 갈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기병대 1기 마부인 내가 좌천을 당하다니. 그는 생각할수록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전근을 통보 받은 날, 동기 몇이 찾아왔다. 그는 마스크와 방진복을 챙겨 일할 자신을 생각하자 울화통이 치밀었다. 도망간 말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당장에 때려죽이고 싶었다. 연거푸 술잔을 들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동기들은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급은 세 달치가 감봉됐다.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마지막으로 남은 동기에게 나가서 한잔하자고 권했으나 손사래를 쳤다. 오전 근무라 아침 일찍 말들에게 풀을 먹여야 한다고 했다.
손님이라곤 그 혼자였고, 주인은 알아서 그가 자주 줬던 술을 가져왔다. 그는 병째 술을 들이켰다. 주인이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혹시 그 일 알아요?
그는 입가에 묻은 술을 닦으며 무슨 일을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주인은 엊그제 강변에서 시체가 발견돼 동네가 떠들썩했는데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줬다. 그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경찰들은 뭐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동네 무서워서 마음 편히 장사도 못 하겠다, 주인은 계속 혼잣말을 했다. 이제 자신의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모른 체했다. 아마도 신고가 들어온 시간 기병대가 출동했으리라. 그는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 전, 말에 직접 안장을 올리고 말의 콧등을 쓰다듬던 옛날을 떠올렸다. 말들은 그럴 때마다 더운 콧김을 내뿜었다. 말굽의 상태를 살피고 기병대 마크가 수놓아진 가리개를 이마에 씌우면, 그제야 기수들이 달려 나왔다. 말들을 달리기 위해 연이어 뒷발로 땅을 두드렸다.
그는 여태 말을 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병대 근무를 오래 했으나 그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심지어 기수 뒤에 타본 적도 없었다. 그는 말타기를 무서워했다. 말을 키우면서 말을 믿지 못했다. 말을 타면 전해지는 근육의 출렁거림과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몸의 반동을 꺼렸다. 말만 잘 키우면 됐다. 말과 거리를 뒀다. 가끔씩 낙마한 기수가 병원으로 호송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는 두려웠다. 그럴 때면 말은, 자신이 키우던 동물이 아닌 전혀 다른 동물로 다가왔다. 만지기도 낯설었다. 기수를 떨어뜨린 말이 오면 이 말이 그 말이 맞나 의심됐다. 그래도 말은 만져 달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면 마부 일을 그만 할 때도 된 듯싶었다. 술을 세 병이나 비웠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는 지폐를 잘못 셌다. 주인은 초과된 술값을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깰 겸 집까지 걷기로 했다. 그러곤 강으로 향했다.


네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이 처음인 것은 알겠다만, 그래도 일을 관둔다고 한 건 성급했던 것 같다. 나는 지난달까지 세 번을 낙마했다. 처음에는 팔이 부러졌고 두 번째에는 앞니가, 세 번째에는 머리가 깨졌다. 말에서 떨어지는 그 공포감은 물론 나도 잘 알고, 그것은 어떤 추락과도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이다. 한 몸 같았던 말 위에서 떨어지는 것. 몸이 아픈 것보다 말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큰 법이다.
어제 네가 탔던 말이 경찰서에서 도망쳤다. 기병대장은 나를 시켜 너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너는 사라진 말에 대해 단서가 될 만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사온 과일바구니를 풀며 같이 먹자고만 했다. 다른 환자에게 빌린 과도로 사과를 깎았다. 과도를 든 네 손에서 투명한 사과즙이 흘렀다. 너는 그걸 잘도 핥아먹었다.
너는 어려서부터 승마술을 익혔다고 들었다. 지역에서 꽤나 알아주는 기수였고 대회에 나가 상도 몇 번씩 탔다고, 너의 이력에 적혀 있었다. 너는 연습 때조차 말에서 떨어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낙마에 대해 이해를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는 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너는 너의 말을 잘 돌보지 않았다. 근무 때 빼고는 전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네 말은 항상 혼자 있었다. 아니면 전임 마부가 옆에 붙어 털을 빗겨 줬다.
적적할까 싶어 선물한 책을 읽었는지 어쨌는지 침대 옆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봤다. 심심하지 않을까 해서 한 권 샀는데 역시 너는 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한 번 읽은 책이었다.
그 책은 우리 딸이 독후감 숙제로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나더러 대신 읽어 달라고 딸은 부탁했다. 내가 읽고 얘기해 주면 독후감은 자기가 쓰겠다고 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 막무가내였다. 아내는 도와주라고 말했다. 책을 읽으려고 첫 장을 넘겼는데 별안간 정전이 됐다. 아내와 딸이 놀라 거실로 나왔고 우리는 초를 찾았다. 책은 다음에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경비원이 곧 비상발전기가 돌아갈 거라고 방송했다. 나는 그때 어두워진 병실에 있을 너를 떠올렸다. 병원은 정전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다음날 찾아갔으나 너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너는 혼자 있고 싶다며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당겼다. 이불을 잡은 너의 손이 보였고, 왼손 새끼손가락에 껴진 반지가 반짝였다.


나는 송전탑이 있는 산에 올랐다. 점검은 새벽 두 시와 세 시 사이에 해야 했다. 본사에서 지급 받은 케이블을 어깨에 두르고 산에 올랐다. 계속 땀이 났다. 산을 오를수록 경사가 가팔랐다. 엉킨 나뭇가지들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낀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시내를 바라보자, 그것은 마치 빛으로 된 덩어리 같았다. 나는 계속 산을 올랐다. 빛이 나는 덩어리에서 멀어지고 싶은 것처럼 쉬지 않고 정상으로 향했다.
송전탑은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꼭대기에 단 피뢰침이 뾰족하게 하늘을 가리켰다. 짐을 풀어 바닥에 내려놨다. 땀이 흥건한 윗옷을 벗었다. 생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무전기의 전원을 켜고 허리에 찼다. 송전탑에 자주 올랐으나 매번 오를수록 처음처럼 느껴졌다. 헬멧 전구에 불을 켰다. 발 앞에 웅덩이 같은 빛이 번졌다. 선임은 급한 일이 있다며 하루만 대신해 달라고 전화로 얘기했다.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벌써 네 번째였다.
차근차근 올라갔다. 아래로는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위로는 잡을 곳을 확인했다. 전선을 점검할 부분은 다행히 얼마 높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 가게 근처 전봇대를 점검할 일이 있었다. 마침 내가 출장을 갔다. 가게 옆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전선을 교체하다 감전이 됐다. 전선 끝 피복을 너무 벗긴 것이 원인이었다. 전압이 약했으나 정신을 잃어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놀란 어머니가 서둘러 119를 불렀다. 전봇대가 높지 않아 크게 다치진 않았다. 전선에 조금만 손을 더 대고 있었다면 다시는 전봇대에 오르지 못했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다. 어머니는 안심했다. 일을 관두고 가게 일을 도우라고 말씀하셨으나, 여태 그랬던 것처럼 못 들은 체했다. 어머니는 전기검침원 같은 보직도 있는데 왜 그 일은 못 하냐고 물었다.
점검은 쉽게 끝이 났다. 교체할 부분이 마땅히 없었다. 전류검사기를 허리에 꽂고 내려갈 준비를 했다. 숲에서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가 밟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내려가다 말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다. 풀이 흔들렸다. 말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 한 마리가 다가왔다. 나를 보곤 길게 울었다. 익숙한 곳에서 살아 있는 말을 보자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매달려 있는 송전탑도 낯설었다. 눈을 비롯해 모든 걸 의심했다. 말은 별안간 송전탑에 달려들었다. 머리로 들이받았다. 부딪힐 때마다 갈기가 흔들렸다. 마치 송전탑을 넘어뜨리려는 것 같았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옆으로 몸을 기운 이상한 자세로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잠들었던 걸까. 조수 역시 소파에서 자고 있다. 분명 조수의 얘기를 잘 듣고 있었는데. 돌풍이 완전히 멎었는지 쨍한 햇빛이 테이블을 비추고 있다. 테이블의 절반을 차지한 술병들과 아무렇게나 뜯은 과자 봉지, 물기 빠진 과일들, 볼펜, 석유 랜턴, 리모컨과 장갑. 돌풍이 다녀가긴 한 걸까. 문을 열고 나가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전부 그대로다.


조수에게 말이 등장하는 꿈을 꿨다고 하자, 자신도 꿈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팔콘을 도시에 데려가기로 했다. 수소문한 사람의 사무실은 도시 한복판에 있었고, 하는 수 없이 이런저런 준비를 서둘렀다. 도시는 성가신 곳이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선, 도시로 가기 위한 이유보다 더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나 검문을 하는 자들은 대체로 거드름을 피우고 사람을 깔보기 때문에 화도 참아야 한다. 조수가 걱정이다. 가방에 몰래 스패너를 넣는 걸 보고 잔소리를 했다. 최대한 빈손으로 가야 한다. 팔콘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도시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다른 지역보다 발전했다거나 생활이 윤택한 것은 아니다. 매일 흘러나오는 오수와 쓰레기 더미,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이동수단, 반파된 간판, 뭔가에 취해 있는 사람들, 길바닥을 뒤지는 개들과 날이 갈수록 굴곡이 심해지는 도로까지. 증식과 확장을 멈춘 도시는 점점 기능을 잃어 가는 중이다. 평원을 지나 산맥을 넘어가면 도착하는 분지에 조성되어 있다.
조수는 운전에만 집중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간밤에 너무 많은 말을 지껄인 것 같다고 후회하는 중일까. 뒷좌석에선 팔콘이 코를 고는 중이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콧물이 시트를 적시고 있다. 검문소가 많이 설치된 길로 가야 시간을 덜 허비할 텐데. 조수는 앞만 보고 있다. 도시와 가까워지자 차가 점점 많아진다. 눈 깜짝할 새에 정체가 시작된다. 나는 졸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떨쳐낼 수가 없다. 검문소 너머로 보이기 시작한 도시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


오래전 의식만 남은 채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을 때,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의식보다는 나의 몸에 대해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나의 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의식만 남은 육체로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을까, 남은 시간들을 멀쩡하게 보낼 수는 있을까, 걱정보다는 의문이 들었고 누워 있는 내내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답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고, 누워 있는 게 고작이었지만, 나의 몸에 대해 고심했던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 감각이 돌아오고, 몸의 모든 기관과 장기들이 제 역할을 되찾았을 때, 나는 몸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감쪽같이 잊어버렸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몸은 그런 것이라고, 청진기를 가슴에 가져다 대며 의사는 말했다. 쉽게 기억하고 쉽게 망각하는 게 몸뚱이라고. 나는 당시에는 그의 말을 흘려들었지만, 나중엔 잊을 만하면 간간이 생각나곤 했다.


그때 들었던 말을,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이, 거의 비슷한 맥락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혹시 그때 나를 담당했던 의사인가 싶었는데,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고 소개했고, 생김새가 약간은 닮은 것 같아 이것저것 물어보려다 그만뒀다. 그보다는 팔콘에 대한 진단과 향후 회복 방법에 대해 물었는데, 자신을 기술자라고 소개한 그가, 누가 봐도 거친 손길로 팔콘을 만지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조수를 밖으로 끄집어내느라, 제대로 된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밖에서 서성였다.
여러모로 수상한 사무실이었다. 처음 보는 공구들이 벽에 걸려 있고 상장이 담긴 액자나 상패 같은 것들이 벽 하나를 전부 채우고 있었다.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고 조수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과시가 아니라 결과가 아닐까?
그게 그거예요.
식사를 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계단에서, 어깨를 마주친 사람에게 사과했다. 그는 은색 점프슈트를 입고 서둘러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쫓아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우리가 처음으로 의뢰를 받아 찾아간 곳이었다. 침실에서 뭔가가 자란다고 철거해 달라던 그 집. 은색 점프슈트를 입은 자는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 준 사람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주위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우리는 담벼락 뒤에 숨어서 그들을 바라봤다. 굳이 숨을 필요까지 있을까 싶어 아무렇지 않게 집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차들이 집을 포위하듯 주차되어 있었고,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 건지 창문으로 파란 불빛이 옅어졌다가 진해기를 반복했다. 조수는 제자리에 멈춰 저 불빛을 예전에도 봤다고 소곤거렸다.
우리는 집 앞으로 가서 안을 기웃거렸다.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일을 하는 중인지 묻고 싶었지만 삼십 분이 넘도록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조수에게 문을 두드리라고 시키자 곧장 두드려 조금 놀랐다. 몇 번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손잡이를 돌리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있다. 침대 옆에 굴이 있고 굴을 드나든 흔적이 있다. 모래가 굴 옆에 쌓여 있다. 굴은 이제 막 만들어진 것처럼 매끄럽다. 하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다. 허벅지만 한 넓이다. 들어갈 수가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기가 도는 방바닥에 누워 있다. 창문으로 주차해 놓은 자동차의 타이어가 보인다. 누워 있다. 시간을 멀리하자 방은 완벽해 보인다. 사람들이 벽에서 벽으로 지나간다. 벽이 세워진 이전으로, 벽을 세운 이후로 드나든다. 굴은 자라는 중이다. 넓어지는 중이다. 의자가 있다. 테이블이 있다. 그림이 걸려 있다. 옷걸이가 있다. 은색 점프슈트와 방진복이 걸려 있다. 마스크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나는 마스크를 주워 귀에 걸어 보지만 치수가 맞질 않는다. 수치가 맞질 않는다. 장비가 보이질 않는다. 모로 돌아, 다른 방향으로 누운 사람을 바라본다. 등이 보인다. 삐쩍 말라 척추의 모양을 그대로 드러낸 등이 뭔가를 말하고 있다. 그 옆에 누운 사람을 본다. 배가 홀쭉하다. 그 옆에 누운 사람을 본다. 귀가 움직인다. 뒷사람을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몸인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다. 조수는 천장에 매달려서 누운 사람들을 바라본다. 가방에서 스패너를 꺼내 허공에 휘두르고 있다. 굴이 좁아지고 있다. 파란 빛이 진해졌다가 옅어지고 있다. 초인종이 울린다. 개가 두 발로 서서 들어온다. 말이 두 발로 서서 들어온다. 움직일 때마다 기름이 떨어진다. 기름 냄새가 고약해 누워 있는 사람들 모두 인상을 찌푸린다. 개와 말이 차례대로 누운 사람들에게 발길질을 한다. 아프다고 상상한다. 아프지 않다. 감각이 돌아오고 있다. 조수는 천장에서 내려와 개와 말을 쫓아낸다. 굴을 쫓아낸다. 굴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다.


기술자는 어디 갔다가 이제 왔냐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팔콘의 다리에는 새로운 의족이 맞춰졌고 어색한지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꼬리마저 길어져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꼬리를 만져 보려 손을 내밀었지만, 꼬리에 손등을 찰싹 맞을 뿐 가까이 가지 못했다.
24개 마디로 이루어진 제품입니다. 예전만큼 빠르게 움직이진 못해요. 꼬리는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꼬리는 바닥에 늘어졌다가, 돌돌 말렸다가, 항문을 감쌌다. 팔콘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걱정되는 것은 다리였는데, 예전보다 훨씬 두꺼웠고 단단해 보여서 제어를 할 수 있는 일에 들이는 기간이 길어질까 하는 것이었다. 팔콘은 자신의 몸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자주 고개를 내려 이리저리 둘러봤다.
처음 봤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죠. 처음 연결해 본 건데.
내가 만든 의족은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조수는 쭈그리고 앉아 팔콘을 살펴봤고 나는 서둘러서 기술자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는 긴 머리를 정수리로 말아 올리며 말했다.
교체할 일은 없을 거예요. 주기적으로 연결 부위에 윤활유만 칠해 줘요.
기술자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사무실로 들어와 팔콘을 데리고 나갔고, 나와 조수는 기술자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배가 고팠지만 왠지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검문소에서 여기로 전화가 왔거든요.
왜죠?
저야 모르죠.
무슨 말을 했습니까?
수상하다고요.
수상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까?
조심하라고요.
수상하고 조심할 사람은 보통 검문소에서 걸러내지 않나요?
도움이 필요했나 보죠.
도움은 저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로 왔죠.
작업장에 간 적이 있어요.
고개를 들어 기술자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녀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수가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슬쩍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기술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에요. 일을 의뢰하러 갔었어요.
그래서요?
해결해 줬어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있죠.
제가요?
기술박물관에 와달라고 했거든요.
나는 잠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자 조수가 옆에서 대신 말을 했다.
안 온 걸로 아는데요?
구경은 했나요? 당신이 일했던 곳이잖아요.
제가 일했던 곳은 다른 도시에 있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고 기술자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나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통화소리가 들렸는데, 저녁은 어디 가게에서 먹을까, 휠을 바꿀까, 사무실을 정리하고 다른 일을 할까, 손님을 받지 않을까 등 지속한다면 끝도 없이 늘어질 수 있는 대화 같았다. 이제 나가 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한쪽 손으로 전화기를 막으며 곧 작업장으로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가는 길에 술집에 들렀다.


…… 명령을 듣고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귀를 의심했죠. 정말인가. 정말 버튼을 누르라는 건가. 그럼 안 되지만, 저는 되물었습니다. 무전을 다시 보냈죠. 얼마간 조용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어요. 아래를 내려다봤습니다. 해상을 지나면 바로 육지가 보이는 지점이었어요. 조종간에서 잠시 손을 뗐다가 다시 잡았습니다. 장갑 안에 땀이 차고 있었습니다. 욕지기도 일었지만 참았습니다. 전에 과음을 한 상태로 조종석에 올랐다가 그대로 산소마스크에 토를 했거든요. 나중에 사출반 녀석들이 흘겨보더군요. 전시라는 건 간혹 좋은 구실이 됩니다. 그만한 구실이 없죠.
도시를 향해 날아가던 중이었습니다. 도시를 없애기 위해서요. 정해진 지점에 폭탄을 낙하시키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도시는 속히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서 폭탄을 떨어트려라, 품으로. 버튼은 동그랗고 귀엽습니다. 엄지손톱보다 작아요. 정말 쉬운 일입니다. 꾹 눌렀다가 다시 떼면 되는 일이에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는 겁니다. 지금은 이렇게나 운전대를 잘 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대로 전역을 했습니다. 그때 명령을 들었다면 여긴 사라졌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를 살린 거라고요. 그런데도 나한테 이렇게 대우는 안 해주고 내가 어떤…….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 그의 하소연. 푸념. 버튼. 버튼에 대한 이야기. 버튼과 도시에 대한 이야기.


조수와 팔콘과 나란히 앉아 TV를 봤다. 시리얼과 사료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동굴에 사는 사람이 나오는 다큐멘터리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설명하자면,


그는 동굴에 산다.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나 빗댄 말이 아닌 단어 그대로의 동굴, 동굴에 살고 있다. 동굴 전체가 그의 집은 아니다. 동굴은 넓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전체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통행금지선이 그어진 곳 너머로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가 먹고 자는 곳은 매우 한정적인데 통행로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 아직 그 누구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예감한다. 누군가를 만날 것 같다. 이곳에 사는 사람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키가 한 뼘이나 자랐다. 관리인은 그를 볼 때마다 손대중으로 자신과 가늠한다. 관리인을 내려다본 지 꽤 됐는데도 말이다. 관리인은 자주 고맙다고 말한다.
오늘도 고맙네. 별일 없는 거 알지만.
그러곤 갈 길을 간다. 어디로 가는지 그는 물어본 적이 없다.
눈을 뜨면, 울퉁불퉁한 어둠이 보인다. 손전등으로 비춰도 빛이 닿는 곳은 한정적이다. 어둠을 가로질러 천장 끝에 닿지 못한다. 그는 누운 채로 손잡이만 까닥까닥 움직인다. 한 번이라도 동굴이 밝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어둠을 밀어낸다.
관리인은 그들을 관광객이라고 불렀다.
돈을 내고 여길 오니까. 돈을 낸다고.
그는 그들이 다녀간 뒤에 방에서 나온다. 방이라고 하니까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그는 생각한다. 동굴 속의 동굴이라고 해야 할까. 통행로에선 그가 있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침구류와 간단한 식기, 앉은뱅이책상, 그 위에 펜과 노트 정도가 있다. 위쪽이 뻥 뚫리고, 돌로 지어진 울타리. 입구는 기어서 드나들 정도로 좁다.
동굴은 이제 막 잠에 든 공룡의 배 속 같다.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마치 쌔근대는 숨처럼 들린다. 관광객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야 그는 움직인다. 동굴을 달래듯이 동굴을 살핀다. 관리인들 중 일부는 그에게 처음 이 일을 맡길 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래야 몸이 편하고, 퇴근을 할 수 있고, 사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고, 하루를 정리한 뒤, 잠에 들 수 있을 테니까.
야간 순찰이라고 했지만 사실 낮인지 밤인지는 알 수 없다. 동굴은 끊임없이 어둡다. 태양이 기준이라면 동굴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규칙적으로 설치된 조명과 야광등만이 동굴에서 조악한 빛을 만들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의 크기가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걷는다.
관광객,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렴풋하게 그들의 행렬을 본 것 같다고 그는 떠올린다. 잠에 취한 채로 방을 벗어나 통행로를 바라봤는데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각자가 바라보고 싶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까마득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오갈 때 그가 잠에서 깨는 법은 없다. 그것이 그와 관리인 사이의 규칙이다. 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을 억지로 끈다. 습관처럼 해오던 일이다. 그에게는 오히려 나은 일이다.
통행로의 초입을 따라 쭉 걸으면 좌우 벽에 걸린 액자들이 먼저 보인다. 액자는 이 동굴의 발견 당시부터 발전 과정, 유명인사의 방문, 국제적 행사 당시의 사진들을 담고 있는데 크기가 너무 큰 탓에 부담스럽다. 게다가 벽이 기울어져 있어 액자를 보려면 몸을 뒤로 젖혀야 하는 수고도 겪어야 한다. 그는 사람들이 벽 가까이에서 전부 몸을 젖힌 상상을 한다. 액자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종종 바닥에 떨어진 액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관리인은 말했다.
깃발 같은 거야.
액자들은 잘 꽂혀 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액자들을 뒤로 하고 계속 걷는다. 돌아볼 곳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정말 동굴에 사는 사람일까? 연출 아냐? 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씩 고개가 떨어지는 걸 보니 조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TV는 왜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는지 궁금했다. 자주 끊기기는 하지만 아예 망가지지는 않았다.


그는 꿈에서 기계들을 바라봤다. 기적을 생각하는 날들이 수차례 지나간 것 같다. 어떤 흔적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무엇이었을까. 여길 나가길 바랐을까. 어떤 기적을 생각했을까. 그는 떠올리지 못하지만 안도감을 느낀다.
어디선가 물이 뚝뚝 떨어진다. 동굴에서는 작은 소리마저 길게 들린다. 돌고 도는 소리는 내벽에 부딪혀 사라진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익숙한 정적이 들어선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멈추고, 다시 떨어지고. 그 사이를 그는 걷는 중이다. 손전등을 발 바로 앞까지만 비춘다. 철로 만들어진 계단을 어느 정도 오르면 큰 공터가 나타난다. 관광객들을 위한 행사는 주로 공터에서 개최된다. 무용단이나 서커스단, 오페라 가수, 음악회 같은 행사가 진행된 걸로 알고 있다. 그는 실제로 보지 않았다. 모두 빠져나간 공터에 간혹 전단지가 떨어져 있었다. 비슷한 행사를 주기에 맞춰 반복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일종의 레퍼토리처럼.
공터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그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세운다.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대 쪽으로 걸어가 손전등을 비춰 본다. 먼지가 수북하다.
처음 무대에 올랐던 날, 먼지 한 톨 없이 무대가 매끄러웠다. 몇몇 관리인이 멀뚱히 서서 그를 바라봤다. 뭐라도 해보라고 했는데, 그는 그저 가만히, 그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누런 천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국가의 무슨 기념일이라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는 하고 싶은 것도, 보여주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실망한 눈치였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더 실망감을 주고 싶었다. 무대 조명이 빠르게 바뀌었다. 스모그가 서서히 뿌려졌고 무대가 스스로 움직였다.
공터의 순찰은 대개 무대에 걸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끝나는 일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커다란 구의 모양으로 형성된 공터는 다른 곳과 냄새가 다르다. 항상 맡는, 물기가 눅눅히 밴 냄새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호흡을 거칠게 내쉰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공터를 벗어난다. 인공조명이 거의 없다. 석고 자체에서 발산하는 자연적이고 옅은 빛이 희미하게 통행로에 펼쳐진다. 종유석과 석순이 많이 보이고 길이 좁아졌다가 넓어진다. 관리인에게 듣기로는 예전에 용암이 드나들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내벽의 결이 물길처럼 느껴진다. 그는 항상 그 결을 바라보며 걷는다.
걷고, 또 걷고, 동굴에 있다는 사실과 흘러가는 시간도 잊은 채, 계속 걷다 보면, 익숙해진다고 그는 생각한다. 통행금지라고 적힌 팻말까지가 그의 순찰 경로다.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는 팻말 앞에 앉아 철로 된 사슬 너머 어둠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관리인이 말하길 그쪽은 아직 탐사되지 않았거나 무용한 곳이라고 했다. 당연히, 그는 믿지 않는다. 꽤 오래 생각했다. 별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고 그저 마음만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이제 사슬을 넘을 생각이다. 그들이 출근하기 전까지만 돌아오면 된다. 위험하단 생각도, 어떤 공포도, 설렘도, 막연한 기대감도 없다. 사슬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땀이 식는다.
그는 반복적인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 객실을 나와 문 옆에 서 있는데, 돌풍으로 집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돌풍은 순식간에 마을 하나를 먼지와 재와 쓰레기로 만들었다. 어두웠고 안개가 점점 번져 가는 중이었다. 기차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던 중이었는지, 혼자였는지 동행이 있었는지는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차 좌석에서 창밖을 바라보거나 잠에 들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같은 기억을 떠올린다. 가까운 날의 일이었던 것처럼.
그는 이제 사슬을 넘어간다.


다큐멘터리가 끝날 즈음, 조수와 팔콘은 아예 드러눕고 코를 골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 기지개를 켰다. 밤하늘 사이로 몇 개의 위성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한동안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작업장을 둘러보기 위해 옷을 챙겨 입었다. 자전거를 탈까 하다가 걷기로 했다.
타이어가 잔뜩 쌓인 곳을 지날 때는 고무 냄새가 심하게 난다. 타이어들을 녹여 다른 용도로 뭔가를 만들어 볼까 했는데 시도에만 그쳤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하루 종일 누워 있기도 했다. 간혹 무기류도 보인다. 총구가 구부러진 윈체스터랄지, 길이가 3미터나 되는 칼과, 아이 몸집만 한 탱크. 컴퓨터 본체들도 줄을 맞춰 세워져 있다. 가림막이 없어 비가 오는 날이면 구정물이 웅덩이를 만들 정도로 줄줄 샌다. 조수가 사용하는 컨테이너는 한쪽이 찌그러져서 멀리서 보면 육각형으로 보인다. 왜 저런 곳을 고집하는지 알 수가 없다. 컨테이너마다 내용물이 다른데 아직 열어 보지 않은 것들도 많다. 작업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시간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트럭이 와서 고철을 사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젠 그마저도 뜸해졌다.


철로를 따라 걸었다. 잡초가 무성해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걷다 보니 꽤 멀리 와버렸다. 누군가가 말려 놓은 하얀 천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개가 짖는 소리도 들렸다. 멀리 불빛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장 접근 금지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각자 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거대한 기둥이 움직였다.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 어디까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말을 걸어 보고 싶었지만 방해하는 것 같아 멀찍이 지켜봤다. 허허벌판에서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조수를 데려와 함께 구경하고 싶었다. 그곳을 지나 다시 철로를 따라갔다. 가끔 진동을 느꼈지만 기차가 오진 않았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오는 중일 거라고 생각했다.


피스톤.
톱니바퀴.
망원경과 공중을 떠다니는 원반형 물체들.
바퀴가 없는 수레.
수레를 끄는 말과 오토바이.
관람차.
진공관에서 헤엄치는 개구리.
카메라 셔터가 눌릴 때마다 수직 날개를 좌우로 흔드는 수송기. 조종사의 조종복. 선글라스와 목에 두른 머플러.
개를 사랑하는 도시인들.
어색한 TV탑.
아크릴판으로 외형을 감싼 기차와 그 앞에서 라디오를 듣는 아이.
밀링으로 세공한 반지를 약혼자에게 건네주기 위해 철교를 건넌 사람은 꿈속에서 비가 내릴 거라는 암시를 느꼈지만 서서히 깎여 나가는 몸짓으로 공중전화를 찾고.
몸을 파고드는 쇠의 느낌.
금속의 공간.
폐품을 해체하거나, 조립해서 넘겨주거나, 다른 기계물품과 교환하는 시간.
수치와 그래프.
나는 보이는 것에 열중했다. 시간이 갈수록 폐선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나는 악착같이 뛴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나를 쫓는다. 병실 창문을 통해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담당의가 반대쪽에서 뛰어오고 있다. 환자복이 갑작스런 돌풍으로 가슴께까지 말려 올라간다. 아랑곳 않는다. 시계를 선물 받았다.
혼자 죽거나, 둘이 죽거나, 심지어 몇 백 명이 죽었다.
운항 일정이 끝난 해양에는 광출력이 강한 등화들이 각양각색으로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멀리서, 탕, 공포탄이 발사됐고 나는 그곳으로 갔다.
파편들이 많아졌다.
돛 없는 보트가 떠내려온다.
해변이 밀려온다.
수은이 없는 온도계.
구경꾼과 운동 상태.
다시 동굴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는 조수가 내게 준 장비를 분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열지 못했다.
방아쇠를 조립하는 순간 팔콘의 털갈이가 시작됐다.
열네 번째 위성.
우리는 로켓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끔 생각했다.
방 안에는 죽은 고래가 TV 화면처럼 떠다니고 있다.
전단지를 새로 만들었다.
먼 친척은 어디로 갔을까.


검문소에서 잠시 붙잡혔다. 직원은 밖으로 내리라고 말했고 옷을 수색한 뒤 트렁크를 열었다. 팔콘이 으르렁대서 반가웠다. 조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직원을 계속 바라봤다. 뒤에서 다른 차들이 계속 경적을 울렸다. 시간이 지체됐다. 햇볕이 뜨거워 얼굴을 가렸다. 땀은 나지 않았다. 다른 검문소 직원들이 밖으로 나와 우리를 바라봤다. 운전자들도 창문을 내려 고개를 내밀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기분이었다. 새 것에 가까웠던 자동차가 낡은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은색 보닛에 금이 가고 바퀴 사이로 주황색 물이 흘러나왔다. 직원의 머리도 새하얗게 변해 가는 중이었다. 평원이 사라진 자리에 건물들이 채워지고, 산이 사라지고 있었다. 지평선이 멀어졌다. 구름이 몰려와 곧 돌풍이 불 것 같았다.
갑자기 팔콘이 종아리를 물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직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경적소리가 줄어들었다.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조수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봤다. 백미러로 검문소 직원과 눈을 맞췄다. 아스팔트 열기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온갖 자동차들과 트럭, 오토바이, 버스가 지나갔다.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이대로 도착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도시가 계속 생겨났다.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 본 작품은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가의 중편소설입니다.















김혜진

작가소개 / 민병훈

2015년 《문예중앙》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문장웹진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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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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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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