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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 작성일 2019-12-01
  • 조회수 2,100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중편소설]



휴거



박송아




*


소녀는 집 안의 전기가 나가고 나서야 비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시야를 덮친 새까만 광경 속에서 빗줄기가 지면을 때리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예고가 없었던 비 소식에 소녀는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전화와 인터넷 모두 연결이 끊겨 있었다. 정전이 되면서 통신망에 장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때 오른편에서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깜깜해졌어?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파랗게 빛나는 수조 앞에 꼬맹이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집 거실 한구석에 비치된 수조에는 보조배터리가 연결되어 있어서 정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수조의 조명에 어렴풋하게 비치는 꼬맹이는 입을 벌린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순간 닥친 어둠에 겁을 먹은 눈치였다. 저거, 물고기, 물고기 봐, 라고 소녀가 말하자 꼬맹이의 눈이 수조로 향했다. 희멀건 잉어 한 마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하파파파······
잉어의 입 모양을 흉내 내는 꼬맹이에 소녀는 일단 안도했다. 정전과 같은 돌발적인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어떻게든 관심을 돌려놓아야 했다. 지난 2년간 꼬맹이를 돌보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방식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물을 것이고 아무리 대답을 해줘도 좀처럼 이해를 하지 못해 계속 묻다가 결국에는······. 소녀는 피로감을 느끼며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불통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정전이 이어질 모양이었다.
왜애애?
갑자기 꼬맹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소녀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꼬맹이가 씩 웃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유치가 빠져 군데군데 구멍이 생긴 치열이 드러났다. 소녀는 말없이 몸을 숙여 핸드폰을 찾았다. 꼬맹이는 소녀의 등을 작은 주먹으로 두드리며 집요하게 물었다.
깜, 깜, 한,
그만
거, 왜!
그만 해.
별거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아무리 달래도 꼬맹이는 막무가내였다. 말리면 말릴수록 더욱 요란스러워졌는데 도대체 무엇에서부터 심통이 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기어코 꼬맹이가 드러누웠다. 그리고 맹렬하게 뒹굴었다. 몸을 통통 튕기기까지 해서 거실 바닥이 울렸다. 또 시작이었다. 소녀는 버둥거리는 꼬맹이의 몸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면서 동시에 현관문이 있을 방향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제발, 아기가 깬다고요.
아래층 여자였다.
막 돌을 넘긴 아래층 여자의 아기는 자주 울었다. 아래층 여자는 그 이유를 바로 위층인 소녀의 집, 정확하게는 꼬맹이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아래층의 옆집엔 시끄러운 쌍둥이 형제를 키웠고 아래층의 아래층에선 시도 때도 없이 베란다로 나와 뒈져라, 뒈, 뒈져! 라고 고함을 지르는 중년 남성이 살았다. 그러나 아래층 여자는 매번 소녀의 집만 찾아왔다.
아래층 여자의 노크는 계속되었고 꼬맹이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으므로 소녀는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꼬맹이의 허벅지를 잡아챘다. 손아귀에 잡힌 살은 부드러웠고 체온이 한껏 올라 뜨거웠다.
소녀의 손이 허벅지 가장 안쪽 부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살을 꼬집어 올렸다.
끄압, 압, 압, 압!
꼬맹이가 비명을 지르자 현관문을 두드리던 아래층 여자가 조용해졌다. 소녀는 꼬맹이의 비명이 괴상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이용하곤 했다. 곧이어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는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두려웠던 것이리라. 닫힌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에 관여하는 순간, 온전한 남의 일은 더 이상 남의 일만은 아니게 되는 것이니까. 그건 책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책임은 정말이지······ 번거로우니까.
소녀는 손에 힘을 풀었다. 꼬맹이가 힉힉거리며 숨을 고르다 이내 헤헤, 하고 웃었다. 소녀가 이용했던 것처럼 꼬맹이도 소녀를 이용할 줄 알았고 그 사실 또한 소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꼬맹이의 차례였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시 울게 될 것이다. 그래, 뭐할까? 라고 소녀가 먼저 물었다.
꼬맹이는 놀이터에 가자고 했다.


*


정전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늦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던 참이었고, 단상에 서 있는 목사의 축도가 끝나자마자 교회를 나서기 위해 핸드백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예배시간은 5분 정도. 문득 그녀는 어제를 떠올렸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몇몇 신도들과 식사 겸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다가 자정 직전에 귀가했었다. 불도, TV도 켜지지 않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수조 앞에 앉아 있는 꼬맹이가 바로 눈에 띄었다. 잉어를 키우게 된 이후로 곧잘 목격했던 광경이어서 그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꼬맹이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피라미가 자꾸만 불러.
피라미가 아니라 잉어.
잉어가 아니라 피라미.
매번 정정해 줘도 꼬맹이는 내키는 대로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나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구두를 벗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꼬맹이가 말을 이어 갔다.
맨날 맨날 그렇게 늦어.
뭐?
무책임하긴.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꼬맹이는 오늘도 아빠랑 잘 거야! 라고 외치고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동안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평소 꼬맹이가 쓰는 단어도, 쓸 법한 단어도 아니었다. 지능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특히 언어능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라 제 또래보다 미숙한 어휘와 어투를 사용했다. 무책임은 분명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다. 그녀는 안방과 딸의 닫힌 방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밤을 새웠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최근에 책임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누구나 그렇듯 살아가다 보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최선을 골랐다고 믿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 결과에 뒤따르는 책임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났다. 지금의 남편은 꼬맹이를 이유로 들며 그녀와의 재혼을 망설였었고 중학생 딸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엄마의 재혼을 반대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할 수 있다고 설득했던 사람은 그녀였다. 하지만 결국 꼬맹이로 인해 남편과 그녀는 크게 다투곤 했다. 미리 설명했었잖아, 그럴 거라고 우리 꼬맹이 그럴 거라고, 괜찮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몰랐던 것처럼 마치 내가 사기라도 친 것처럼 굴지 마, 라고 남편이 말했을 때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근래에 교회를 자주 찾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긴 축도를 마친 목사가 아멘을 외치자 신도들도 따라 외쳤다. 아멘.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꼬맹이를 통해서 남편일지도 혹은 딸일지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진심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난데없이 교회 안이 먹물을 끼얹은 듯 어두워졌다. 신도들은 당혹스러워했다. 어둠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정전인가? 라고 묻거나 정전이겠지, 라고 답하며 웅성댔다. 비좁은 교회 안 여기저기에서 핸드폰을 이용한 불빛들이 켜졌다.
정리가 되지 않은 소란 속에서 차분한 음성 하나가 뚜렷하게 울렸다.
떠오릅니다, 네, 그때도 그랬죠.
그 소리는 단상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바깥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옥상으로 올라온 소녀는 놀랐다. 너무 어두워서 끝없는 허공 속을 막무가내로 헤매는 기분마저 들었다. 소녀는 무서웠지만 꼬맹이는 신이 나서 자꾸만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싶어 했다.
우비를 입고 나섰던 소녀와 꼬맹이는 정전으로 운행이 중단된 엘리베이터 앞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꼬맹이는 계단으로 내려가자고 했지만, 소녀의 집은 꼭대기 층이었고 계단과 계단 사이의 통로에는 자전거나 유모차나 재활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다 다쳐, 다치면 병원 가잖아, 라고 소녀가 말하자 꼬맹이는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옥상 위로 올라가 다른 동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가 한 번 고장 났을 때 그런 식으로 옆 동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던 적이 있었고 그걸 꼬맹이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다 똑같아.
다를 수도 있어. 그건 괜찮은 거야.
꼬맹이의 대답에 이번엔 소녀가 머뭇거렸다. 뭔가를 알고서 그러는 건지 그냥 아무렇게나 튀어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 꼬맹이가 내뱉는 말들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결국 소녀와 꼬맹이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비상시를 위해 옥상 문은 늘 열려 있었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면서 소녀와 꼬맹이는 옆 동의 옥상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싸아아아, 하는 소리만은 또렷했다. 세상엔 때로는 비처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 라고 2년 전에 만나 아빠가 되어 준 남자가 말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말이 많았는데 어디선가 읽거나 전해 들은 이야기를 소녀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 이야기들은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말하는 남자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딱히 싫지는 않았다. 2년 전에 만나 딸이 된 소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어떤 노력처럼 느껴졌었다.
빨리 가자. 빨리빨리, 응?
꼬맹이가 소녀의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소녀는 자신의 눈높이보다 아래에 있을 꼬맹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꼬맹이의 형체가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이 모든 어둠이 도통 눈에 익질 않았다.


*


단상 위에 서 있던 목사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날이었죠.
왠지 모를 위압감에 신도들이 저마다 자리를 찾아 다시 앉기 시작했다. 그녀도 엉거주춤하다가 착석하고 말았다. 교회 안을 비추던 핸드폰 불빛들도 사라졌다. 주변이 정돈되자, 목사가 하던 말을 이어 갔다.
목사는 그날을 회상했다. 재난처럼 정전이 찾아든 오늘이 1999년 그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약 20여 년 전 겨울의 그날은, 그가 아직 목사가 되기 전이었다. 당시 그는 직업이 없었다. 목적도 없었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었다. 그날 목사는 새벽부터 분주했었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비롯한 신도들이 차근차근 준비해 왔던 집회였다. 집회의 시작과 함께 멸망도 시작될 것이었다.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갈라지고 물이 메마른 자리에 용암이 흘러들어 세상을 집어삼키게 될 예정이었다.
그래도 걱정 없었다. 지옥 같은 멸망이 세상을 덮치기 직전, 하늘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내려와 그들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구원해 줄 것이었다.
설레는 경험을 앞두고 목사는 너무 흥분해 있었다. 그래서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섰다. 밤새 내린 눈으로 새벽길은 꽁꽁 얼어붙었었다. 골목을 비춰야 할 가로등이 꺼져 있어 주위가 어두웠다. 그에 잠깐 고민했다. 구두 대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로 바꿔 신을 것인지,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려 시야를 확보한 뒤에 출발할 것인지를. 결국 목사는 그냥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언 지면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대로 미끄러졌다.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났고 머리와 온몸으로 뜨겁고 찌릿한 감각이 슉 훑고 지나갔다. 눈동자가 돌아가 흰자를 번뜩이며 입가에 부글부글 거품을 물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목사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차 직원에 의해 간신히 발견되었다.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하기까지는 꼬박 반년이 걸렸다. 목사는 병상에서 집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집회가 끝나고 나서도 세상은 변함이 없었다고, 아주 멀쩡했다고 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 목사는 얼마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침묵을 깨고 교회 안 신도들 중 누군가가 물었다.
저기 목사님, 목사님.
네, 말씀하시죠.
무슨 이야기인 줄은 알겠는데요.
네,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목사님.
이번엔 단상 쪽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킥, 크킥, 킥, 킥. 그녀는 아주 작게 혀를 찼다. 진중하지 못하긴. 전체적으로 두툼한 몸집과 어울렸던 목사의 중후한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어둠 속에선 간사하고 가벼웠다.
별안간 그녀는 의심스러워졌다. 애초에 열한 평 남짓한 공간을 교회라고 선전했던 것도 미심쩍었다. 남편과 딸이 사이비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며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했었는데 그 근거들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역시나 아파트 단지 옆 사거리에 있는 큰 교회로 옮겨야 할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이 지체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었다. 그 순간,
콰콰콰콰쾅!
그녀는 깜짝 놀라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교회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교회 안의 모든 핸드폰 불빛들이 일제히 목사 쪽으로 모아졌다. 목사는 손바닥으로 단상을 연달아 내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더니 소리쳤다.
내 뒤통수가 바닥에 쾅 하고, 응? 뼈가 드러나도록 세게 부딪쳤잖아요? 한겨울 길바닥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응답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죽는구나 싶었을 때, 피를 철철 흘리면서 바닥에 온몸을 비볐을 때!
어느새 그녀의 두 손이 겹쳐지며 깍지를 꼈다.
구원이 일어났다, 그 말이에요.


*


놀이터가 왜 좋아?
소녀가 묻자 꼬맹이가 활달하게 대답했다.
애들이 있어.
비 내리고 컴컴한 날에는 없어.
애들은 언제나 있어.
친구들이 있어서 좋은 거구나.
친구는 없어.
꼬맹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소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해? 라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고 다시 걸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꼬맹이는 친구를 사귀었고 생일파티에까지 초대되었다.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남자는 꼬맹이의 손에 제법 값이 나가는 로봇 장난감을 선물로 들려 보냈다. 꼬맹이는 새끼손가락만 한 물고기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건 피라미래, 나는 물고기 박사! 라고 좋아하던 꼬맹이를 위해 작은 어항을 마련해 준 것은 소녀의 엄마였다.
그런데 그건 피라미가 아니었다. 급격히 몸집이 커지는 물고기를 엄마는 질색했고 친구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낸 뒤에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엄마는 퇴근해 돌아온 남자와 밥을 먹으며 말했다.
저거 잉어래, 자기들은 피라미 안 키운대, 아니 분명 꼬맹이가 피라미라 했고 우리는 피라미라고 해서 키운 거라고, 그 한 마디 했거든? 그 여자 대뜸, 달라고 달라고 그렇게 달라고오 해서 줬더니, 응? 그러더니 끊더라고?
남자는 된장국을 떠먹으며 뭘 그런 걸 가지고, 라고 한 마디 하며 넘어갔다. 그러나 꼬맹이가 더 이상 친구와 어울리지 않게 되자 뭘 그런 걸 가지고 따졌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 보니 아마 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놀이터는 꼬맹이가 하루에 꼭 한 번은 방문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소녀는 놀이터가 싫었다. 작년부터 소녀가 사는 아파트 동을 포함한 몇 개 동에 놀이터 접근 금지령이 떨어졌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앞으로는 가지 마, 시끄러워지니까, 라고 엄마는 말했고 소녀는 미소만 지었다. 재혼을 결정한 뒤 남자와 엄마는 꼬맹이와 놀아 주는 일이 소녀의 몫이라고 했고 그것이 누나로서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매일 놀이터에 가고 싶어 하는 꼬맹이를 챙기는 사람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온갖 투정을 받아내야 하는 사람도 소녀가 되었다.
같은 주소지를 사용하면서도 누군가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우습게 느껴졌다. 접근 금지령이 떨어졌다고 했지만 딱히 막아서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소녀는 전과 다르지 않게 꼬맹이와 놀이터를 방문했다. 하기야 고작 놀이터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했었고 우스워했지만 겪어 보니 웃을 수 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얼마 전의 일로 소녀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가을의 볕이 잔잔하게 내리쬐던 오후였다. 어김없이 꼬맹이를 데리고 나왔던 소녀는 놀이터 근처에서 아래층 여자를 발견했다. 유모차를 끌고 있던 아래층 여자 앞에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경비원은 허리를 숙여 유모차 안에 있는 아기를 바라봤고 아래층 여자는 몹시 지친 얼굴을 하며 물었다.
여기도 안 돼요?
경비원은 끝까지 놀이터 산책로를 가로막고선 비켜 주지 않았다. 아래층 여자가 애원이 섞인 항의를 이어 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경비원이 아래층 여자만큼이나 지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그뿐이라고.
아래층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놀이터를 떠났다. 그리고 자신의 아파트 동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소녀는 꼬맹이의 손을 잡고 방향을 돌렸다. 꼬맹이가 악을 쓰며 아스팔트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에 경비원이 다가왔고 소녀는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꼬맹이의 발목을 잡고선 그대로 질질 끌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꼬맹이의 몸 곳곳에 쓸린 상처가 생겼고 피도 났다.
엄마는 소녀에게 화를 냈다. 뭐라고 설명할래?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엄마는 꼬맹이의 상태보다는 곧 퇴근할 남자를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긴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뜨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엄마 대신 소녀는 꼬맹이에게 연고를 발라 줬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엄마는 모습을 추스르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래층 여자가 좀 드셔 보세요, 라고 말하며 호박전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다짜고짜 말을 쏟아냈다.
여기 사는 거 어떠세요? 오빠랑 저, 딱 계획을 잡고 들어온 거거든요. 분양 마음먹으면 못 가는 건 아닌데요, 그래도 앞으로 계획이 있으니까요.
엄마는 팔짱을 낀 채 그릇을 받지 않았지만 아래층 여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변했어요, 정말 모든 게 다요.
아래층 여자는 이 아파트로 옮겨온 뒤로 아기가 변했다고 했다. 조막만 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배고파서 울고, 안아 주지 않아서 울고, 졸려서 울고, 초인종이 울려서 울고, 수도꼭지나 샤워기를 틀었다고 울고, 아파트 위로 비행기가 지나다녀서 울었다. 수많은 울음들은 아파트 안을 산책하면서 나아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며 울상을 짓던 아래층 여자는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여기가······ 문제거든요. 바닥을 구르고 내리찍는 소리가 자주 나던데, 뭐 공사하세요? 그러자 심드렁한 표정만 짓고 있던 엄마가 피식 웃었다.
우리 집 꼬맹이예요. 걔가 발버둥을 치는 거예요. 되지도 않는 것을 투정하면서요.
아아.
애가 모자라서 미안해요.
아, 그렇게까지 말하실 필요는······.
꼬맹이가요, 3급이에요.
네?
많이는 아닌데 어쨌거나 모자라다구요. 좋아질 수는 있는데 평생 모자라다고.
저기요.
말짱한 사람들이 아무리 느리게 가도오, 우리 꼬맹이는 죽어도 못 따라잡는다고오.
저기, 잠깐만, 잠깐만요.
미안해요. 모자라서 미안한데에, 그거 알아?
엄마가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머리를 마구 긁었다. 벅벅벅벅벅.
나보다 힘들어요? 응?


*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벌렸다. 눈을, 콧구멍을, 입을, 팔을 벌렸다. 목은 쭈욱 뺐다. 몸을 지탱하는 뼈마디가 쑥 빠져나갈 것 같은 기세로 힘을 줬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교회에 있는 신도들도 그랬다. 벌려진 구멍마다 질금질금 물이 샜다. 눈물이, 침이, 오줌이, 땀이 나왔다. 고통이 극단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건 어떤 환희를 불러일으켰다. 놀랍게도 그랬다. 더, 더, 더! 단상 위의 목사가 소리쳤다. 목사는 지금 이 바스러지는 고통을 기억하라고 했다.
내가요, 한겨울 땅바닥에서 피에 젖은 사지를 파득파득 떨고 있었을 때, 정말 끝장인 줄 알았단 말입니다?
목사가 격양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가 싸늘한 바닥과 일체가 되었을 때, 세계는 놀랍도록 태연했지만 그의 세계는 무너졌었다. 와장창 부서지는 자신의 세계에서 그는 몸부림쳤다. 살고 싶다, 발이 미끄러져 죽는 건 싫다, 창피하고 아프지만 살고 싶다, 살 수만 있다면 살아 보고 싶다, 이 절망으로 새롭게 살아 보고 싶다. 그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도리어 죽음과 멀어졌다. 그리고 그가 깨어났을 때, 그는 더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내 목사가 시커먼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흔들었다.
나요, 원래 쓰레기였어요. 개새끼도 그런 개새끼가 없었다고요, 내가. 근데 여러분, 지금 나를 봐요. 여러분의 스승이죠? 여러분의 아버지잖아요.
아멘!
당신의 바닥이 곧 당신의 구원입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미친 듯이 박수를 쳤다. 지금껏 그녀가 살면서 듣고 싶었던 단 한 마디의 말이었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지독한 바닥들이 구원으로 맞바꿀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바닥을 딛어도 상관없었다. 교회를 옮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엔 꼭 꼬맹이를 데리고 올 것이다. 가능하다면 남편도 그리고 딸도.
그녀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목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딪치는 두 손바닥이 후끈거렸다.
자, 말씀 들어갑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짝짝짝짝짝짝
더 고통스러워하세요. 더 울부짖으세요. 더, 더, 더!
짝짝짝짝짝짝
명심해요, 여러분의 바닥이 뭐다?
구원이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


옆 동 옥상 문은 잠겨 있었다.
꼬맹이는 견디지를 못했다. 아까처럼 그대로 엎어져서 옥상의 축축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꼬맹이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던 소녀의 몸도 사정없이 휘청거렸다. 소녀는 불편한 자세를 어떻게든 편하게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비가 내렸고, 정전이 왔고, 못 가게 되어 있는 놀이터를 가기 위해 옥상에 왔지만 그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 편해질 리가 없었다.
소녀는 온 힘을 다해 꼬맹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제발, 응? 뭘 더 할 수 있어, 쫌, 쫌! 하고 애원을 해봤지만 꼬맹이는 재차 드러누우려고 몸부림을 쳤다. 소녀의 손이 또 한 번 꼬맹이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끄압, 압, 아파, 빠, 아빠, 파! 라고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힘을 풀지 않았다. 지긋지긋해, 라고 나직하게 말하며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꼬맹이가 지긋지긋해서가 아니었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지겨웠고 꼬맹이를 달래기 위해 터득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 순간, 꼬맹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17점!
뭐? 소녀가 되물으며 꼬맹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는 꼬맹이의 얼굴을 어렴풋하게 볼 수 있었다. 꼬맹이는 아주 똑바로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17점이 뭐야?
소녀는 꼬맹이의 양 손목을 세게 잡고 물었다.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꼬맹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녀는 한 손으로 꼬맹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래도 반응은 없었다. 다시 꼬맹이의 양 손목을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소녀가 재차 물었다. 그게 뭐냐고. 그러자 꼬맹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욕하면 1점! 때리면 2점! 둘 다면 3점!
뭐라고?
아빠가 그랬어. 나쁜 말 하고 때리고 그러면 숫자를 세랬어.
거짓말하지 마.
진짜 그랬어.
정말로 그랬다고?
아빠가 누나는 엄마랑 똑같이 나쁜 년이래.
하하! 하고 꼬맹이가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17점.


*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홀가분했다.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찬송가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짙은 어둠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아 꼭대기 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그렇게 통로에 놓아 두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이 놓아 둔 물건들 때문에 넘어지고 비틀거리면서도 힘들지 않았다. 그래, 바닥은 구원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진창에 구르기만 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의 빛은 남들의 빛이 소멸되어 갈 즈음에 홀로 고고히 빛날 것이다.
그녀는 계단을 뚜벅뚜벅 밟았다. 좋다, 아, 좋아. 꼭대기 층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아랫집인 15층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아해하며 한 층 더 올라간 그녀는, 자신의 집 문 앞에서 서 있는 어렴풋한 인영을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해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래층 여자였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아래층 여자를 비춰 보며 조금씩 다가갔다. 아래층 여자의 몰골은 산뜻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정하게 묶고 다니던 긴 머리가 풀어헤쳐져 있었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층 여자의 품에는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귀신 같은 행색의 여자와는 달리 잠든 아기가 내뱉는 숨소리는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경계를 하듯 아래층 여자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우리 꼬맹이가 또 난리였나 보네. 미안해요.
알아요. 그래도 때리는 건 좀.
때려요? 누가요?
그 집 아들이.
꼬맹이가요? 꼬맹이가 누굴?
아니 그 집 아들을요.
네?
누가······ 아니, 아주머니가 때린다는 말은 아닌데. 아까 와보니까 자지러지더라고요. 방금도 그랬고. 비명 같은 거. 끄압, 압, 압, 압, 그런 거.
그녀는 도대체 아래층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래층 여자는 시종일관 횡설수설에,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혹시 딸인가 싶어 현관문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그러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휴대폰 불빛으로 여기저기를 비춰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돌려 현관 쪽에 서 있는 아래층 여자에게 물었다.
방금도 그랬다고? 언제?
방금 전······.
우리 애들 없는데. 꼬맹이도 누나도.
아니에요, 분명 방금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애가 깼거든요.
그럴 리가 없다며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 아래층 여자를 그녀가 막아섰다. 그리고 찬찬히 아래층 여자를 훑었다. 하여튼 간에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석 달 전에 이사를 와서 떡을 돌렸을 때까지만 해도 명랑했었다. 그러나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집집마다 방문해서 서명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나, 온갖 관공서에 탄원서를 제출하지 않나, 방송국을 끌어들이질 않나. 게다가 고작 하나뿐인 아기는 어찌나 울어대던지.
하지만 그녀는 아래층 여자를 달래 주기로 했다. 방향을 잃은 눈동자를 힘없이 굴리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여자에게 기꺼이 조언도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손이 아래층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그럴 때가 있지. 남 탓만 하고 싶을 때가 있어.
그게 아니라요.
힘들 땐 다 그래.
그게······.
지나갈 거야. 구원될 거야, 아기엄마.
그녀는 아래층 여자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준 뒤 현관을 나섰다. 문을 닫고 애들을 찾아본다며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그녀는 힐끗 뒤를 돌아봤다. 아래층 여자는 미동이 없었다.


*


아래층 여자가 들고 온 호박전을 받지 않고 돌려보낸 엄마는 대충 옷을 껴입고선 교회에 가버렸다. 소녀는 꼬맹이가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을 해줬지만 꼬맹이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남자를 보자마자 매달렸다. 꼬맹이는 남자의 품에서 소녀를 노려보며 손가락질했다.
아프다고 해도, 막, 나를 막,
어떻게?
질질, 질질질,
남자는 소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꼬맹이만 바라봤고 이내 꼬맹이랑 똑같이 손가락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실수였을 거야, 그치?
꼬맹이가 고개를 가로젓자 남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수였어, 사고였어, 그치?
미워.
아빠 틀린 적 없잖아.
응.
실수였어, 딱 한 번.
한참을 칭얼거리다 잠이 든 꼬맹이를 방에 눕혀 놓고서 남자는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러고선 꼬맹이가 먹지 않은 김치볶음밥을 먹어치웠다. 소녀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남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안방으로 들어가기 전, 소녀에게 지폐 몇 장을 건네줬을 뿐이었다.
그랬구나.
소녀는 꼬맹이를 마주 본 채로 말했다. 이제 알았지? 라고 꼬맹이가 말하자 이제 알았어, 라고 말해 주었다. 남자는 다 알고 있었다. 앞에서는 실수라고 용돈을 건넸으면서도, 뒤에서는 믿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꼬맹이의 눈을 보고 몰래 말했겠지. 욕하면 1점, 때리면 2점, 둘 다 하면 3점. 꼬맹이에게 말하는 법도 가르쳐줬을 것이다. 누나는 나쁜 년, 엄마도 나쁜 년, 아빠는 너만의 아빠. 이러한 사실에 소녀는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참을 수는 없었다.
병신.
이제 18점!
바로 그 순간, 시야 앞이 하얗게 폭죽이 터지듯이 밝아졌다. 빛이 너무 밝아서 소녀는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꼬맹이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보지 않아도 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빛 속은 차가웠다. 줄곧 괴롭히던 지겨움이 사라졌고 표현을 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가 빠르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소녀는 실감했다.
소녀가 눈을 떴을 땐 세상은 밝았고 모든 것은 뚜렷했지만 꼬맹이는 보이지 않았다.


*


놀이터 쪽으로 걷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불빛들에 눈을 찌푸렸다. 단지 내 모든 불빛들이 한꺼번에 켜진 것이었다. 빛은 너무나 아팠다. 그녀는 두 손으로 황급히 눈을 가렸다.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났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은 뒤 손을 뗐다. 시야가 한층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선명한 시야 속으로 추락하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뭐가 떨어지네, 라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퐉! 하는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녀는 위를 올려다봤다. 아래층 여자가 베란다 난간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채 두 팔을 흔들고 있었다.




* 본 작품은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가의 작품입니다.















박송아

작가소개 / 박송아

1988년 광주 출생.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문장웹진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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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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