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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의 삶

  • 작성일 2019-01-01
  • 조회수 3,642

[단편소설]



관조의 삶



천정완




구관조,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 줬다. 지혜로 세상을 비추어 보라는 뜻이 있었지만, 남의 말만 잘 따라해도 밥은 먹고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관조는 '적당히 맞춰 살다가 조용히 가자.'라는 가훈 아래 큰 저항 없이 살았다. 그래서 그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특이했다는 것밖에 딱히 그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관조의 집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집안이었다. 고조, 증조부에서 조부와 아버지까지. 높은 직책까지 올라간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 정년을 채우고 은퇴했다. 관조의 아버지는 종종 스스로를 국가를 위한 작은 부품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관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방향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딱 그만큼의 노력만 하고 살았다. 관조는 도시의 산림을 담당하는 부서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의 주 업무는 일주일에 한 번 할당된 구역에 있는 가로수들의 수량과 종류를 파악하고 서류를 만드는 일이었다. 나무의 수명은 지루할 만큼 길었기 때문에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그의 일은 반복 그 자체였다. 더 높은 자리나 야망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 그도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정년을 채우고 은퇴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관조는 자신의 일에 불만이 없었다. 그는 소요가 벌어지면 그저 한 발 떨어져 그 소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타입이었다. 동요하지 않고 동조하지도 않는 것, 그것이 그의 삶에 세워 놓은 유일한 원칙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늘 잔잔했다. 남과 깊은 관계를 가지기보다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동료들과 마찰도 없었다.
그냥 그런, 보통 사람.
그게 관조였다.


관조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2/4분기 회계자료가 끝나 가는 어느 늦여름이었다. 나는 그와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을 하고 있었기에 간단히 눈인사만 주고받는 사이였다. 업무가 달랐기 때문에 서로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그는 그 특유의 무표정을 풀고 활짝 웃으며 눈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그날은 태풍 예보가 있어서 아침부터 약한 비가 내렸다. 출근 후에 간단히 서류를 정리하고 담배를 피우려고 흡연실에 들어섰을 때 관조가 있었다. 그는 우의를 입은 채 흡연실 한쪽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손에서 얇은 담배가 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흡연실로 들어서자 그는 내게 목례를 하고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거세지고 있는지 창밖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일렁였다.
"태풍이 올까요?"
관조가 내게 말했다.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글쎄요. 예보로는 그렇다고 하는데. 와야 오는 거죠, 뭐."
그는 입만 작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왜 예보 같은 걸 하는지 모르겠네요. 괜히 불안하게."
일기예보를 불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세상에 워낙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건 또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 싶었다. 관조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손가락 사이에 있던 담배의 재를 톡톡 털었다. 그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있을 뿐 한 모금도 피우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내가 왜 그 어색함을 이겨 가며 거기에 서 있었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그와 날씨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나 그에게 호기심이 있지도 않았다. 담배가 다 타자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우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그러고는 내게 눈인사를 하고 문가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그가 문 앞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퇴근 후에 약속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특별한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저랑 맥주 한잔 하실래요?"
관조는 다시 입만 작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얕은 한숨을 쉬며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못 들은 말로 해주세요."
그러고는 돌아섰다.
"마시죠, 뭐."
내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거세진 빗방울이 창을 툭툭 두드렸다. 아마도 예보가 맞는 모양이었다.


관조와 나는 정문에서 만났다. 비는 그쳤고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예보됐던 태풍은 땅에 닿지도 못하고 바다에서 소멸했다. 그럼에도 관조는 여전히 우의를 입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짧게 인사하고 대로 건너에 밀집한 유흥가로 가기로 했다. 함께 걸어가는 동안 그는 2/4분기 회계자료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형식적인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가 꽤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긴 대로 지루한 사람이면 무슨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올까 오후 내내 했던 걱정이 무색해졌다. 심지어 그는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말을 이어 나가는 것에 능숙했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관조에게 그 많은 가로수를 매주 어떻게 세는지 물어봤다.
"안 세요."
그는 싱겁게 웃었다.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120층짜리 신축빌딩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공을 앞두고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아이스크림콘을 거꾸로 뒤집어 땅속에 꽂아 놓은 것같이 생긴 그 빌딩은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대단하죠. 이 년 만에 저런 건물을 올리다니."
"저건 사람이 올린 게 아니라 나무처럼 스스로 자란 것 같아요."
관조는 땀이 흐르는지 얼굴을 한번 쓸었다. 내가 더운데 우의를 벗는 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는 예보를 여전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예보 같은 걸 왜하는지……. 괜히 불안하게."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는 그게 아직도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국 우의를 벗지 않았다.


평일이었음에도 술집마다 만석이었다. 관조와 나는 유흥가를 몇 바퀴 배회하다가 사람이 제일 없는 치킨집에 자리를 잡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무료한 얼굴로 자리를 안내했다. 치킨과 맥주를 시킨 후에 우리는 몇 마디를 나눴다. 친분이 없는 동년배가 마주 앉아 나눌 수 있는 주제들이었다. 스포츠나 정치색이 드러나지 않는 시사, 연예인 따위의 이야기였다. 사실 거의 내가 이야기를 했고 관조는 듣기만 했다. 건너편 테이블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가자 치킨집에는 관조와 나 둘만 남았다. 아르바이트생이 주문한 것들을 툭툭 놓고 돌아갔다. 저렇게 손쉽게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 있다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떠난 테이블을 치우지도 않고 빈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나는 치킨 한 덩이를 관조의 접시에 덜어줬다. 그러나 관조는 손도 대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동안에도 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그는 내가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관조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동공이 살짝 흔들리며 곧 시선을 돌리는 버릇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거기에 용기를 얻었다. 나는 방언이 터진 사람처럼 재잘거렸다. 대화가 끊기면 그 사이를 어색함이 비집고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각자 두세 잔의 맥주를 마시는 동안에도 관조는 치킨에 손을 대지 않았다.
"치킨은 안 드세요? 아, 혹시 치킨을 안 좋아하세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홀의 음악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미안해요. 시끄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여기로 왔는데, 여기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네요."
관조는 괜찮아요, 하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각자 대여섯 잔의 맥주를 마셨을 때 우리는 마침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예상대로 침묵 사이로 어색함이 비집고 들어왔다. 탈출 버튼이 있다면 당장 누르고 싶었다. 술잔의 수위를 재며 일어날 타이밍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빈 잔을 들어 올려 한잔 더, 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마셔도 될까요?"
관조가 부드럽게 물었다.
"네, 그럼요."
내가 대답하는 사이, 아르바이트생이 주문한 맥주를 관조 앞에 툭 놓았다.
"저기, 음악을 조금만 줄일 수 있을까요? 너무 시끄러워서."
아르바이트생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돌아섰다. 볼륨이 미세하기 줄었지만 시끄러운 것은 여전했다. 저 개똥같은 새끼.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관조가 물었다.
"궁금하시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뭐가요?"
"갑자기 제가 술을 마시자고 한 이유가요."
이제 본론인가. 나는 그의 입에서 보험, 돈 같은 단어가 튀어나오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생각했다. 잠깐만 현금이 없는데, 계산은 내가 카드로 해야 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동안 그는 반쯤 넘게 남은 맥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아침부터 기분이 이상했거든요. 그냥 누군가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습니다."
느닷없이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순간, 그는 두 시간 정도 시끄러운 음악을 참아 가며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를 홀로 견디는 것처럼 힘겨워 보였다. 아니, 고독해 보였나.
"그런 날이 있죠. 이유 없이 기분이 이상해지는 날이요. 사람 기분은 예보도 없잖아요. 괜히 불안하게."
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는 껄껄 웃었다. 그가 소리 내서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관조는 자신의 맥주를 비우고 내 것까지 두 잔을 더 시켰다. 그는 오늘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요즘 구제역으로 시끄럽잖아요. 알고 계시죠?"
관조는 도착한 맥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예, 당연히 알고 있죠."
"어제 오늘 그 현장에 파견 갔었습니다."
그가 벗어 둔 우의가 내 눈에 들어왔다. 껍질을 벗어 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의를 입고 계셨군요."
관조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새로 도착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부터 태풍 예보가 있었잖아요. 매장 현장에 콘크리트를 덮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뭔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다행히 비는 많이 안 왔네요."
그는 네, 다행히도,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시간이 없었어요. 어제 오후부터 태풍예보가 있었으니까요."
관조는 취기가 오르는지 이마를 짚었다. "시간이 없었어요, 정말." 하고 그는 되새김질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간이 없었어요. 규정상으로는 약물로 먼저 처리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 시간 동안 천 마리가 넘는 소를 생매장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한쪽에서는 소 주인이 고용한 사람들이 임신한 소들의 배를 갈랐어요. 몇 마리의 새끼를 가졌는지 확인하려고요. 보상 때문에."
달아올랐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혹한의 눈밭을 헤매다 온 사람처럼.
"원래는 커다란 통에 담아 cs가스를 주입해서 매장하지 않나요? 토양오염을 고려해서요."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풍이 오면 며칠이고 기다려야 하니까요."
나는 아, 그렇군요, 하고 그다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모든 일에 원칙이 다 있지만 모든 일을 원칙대로 할 수 없음을 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일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작은 문제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덮어 외면하는 따위의 일은 내게도 흔한 일이었다.
"아침에 비가 내려서인지 콘크리트는 굳지 않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미묘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습니다."
관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 어딘가의 덩어리가 크게 떨어져 나간 사람 같았다. 확실히 그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술기운인가 생각했지만 그는 술에 취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함께 점심을 먹던 현장소장이 그러더군요. 그 소들, 다 그렇게 될 팔자였다고. 모든 게 순리대로 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까의 상황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내가 듣는 쪽이었다.
"그 콘크리트 말이에요, 미묘하게 움직이던. 콘크리트 표면 그 아래에 파묻힌 소들이 살아서 꿈틀거린 게 아닐까요."
관조는 스위치를 켜놓은 전기 포트처럼 매 순간 온도가 달라졌다. 시끄러운 음악을 뚫고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소리는 나와 관조가 앉아 있는 이 공간을 찢는 것 같았다. 꼭 관조가 마음속에서 내지르는 비명소리 같았다.
"어떻게 콘크리트 아래에서 살아 있겠어요.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걸 거예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소들이 살아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렇겠죠, 하고 그는 내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나는 갑자기 피로해졌다. 슬슬 오르는 취기 때문이었을까.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몇 번 더 관조와 내 사이를 긁고 지나갔다. 관조가 손을 들어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나는 해야 할 일을 깜빡했다고 그만 일어나자고 말했다. 할일이 있지는 않았지만 불현듯 그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관조는 그렇게 하자고 말하며 일어났다. 그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은 우의를 챙기면서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자 관조가 오늘 고마웠습니다, 라고 말하고 계산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는 사람의 등이었다.
"종종 이렇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관조는 바깥으로 나오며 말했다. 치킨집 앞에서 그는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좋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관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깜짝 놀라 그를 봤더니 그는 순식간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뒤를 좀 보세요."
관조의 목소리가 한껏 상기돼 있었다. 나는 그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이었다.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120층짜리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다. 관조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사이렌 소리가 모여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빌딩은 계속 불타고 있었다. 진화 작업이 계속됐지만 불길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난대책본부에서는 화재 경위를 파악 중이라고 발표했으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완공 전 건물이고 야간이라 작업을 하던 건설노동자는 없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건물 반경 몇 십 미터가 바리케이드로 봉쇄됐고 통행은 물론 접근도 금지한다는 내용의 재난 문자가 발송됐다. 사람들은 예상보다 큰 동요가 없어 보였다. 뉴스를 유심히 보고 화재의 추이를 궁금해 하는 정도뿐이었다.
사무실에서 불타고 있는 빌딩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출근하면 믹스커피를 마시며 빌딩을 바라보곤 했다. 불구경, 사무실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매 시간 수십 대의 헬기가 불타는 건물을 향해 물을 쏟아냈지만 큰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각종 매체들은 화재 원인에 대해 추측하는 기사와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빌딩에서 뿜어내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관조는 그날 이후로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지만 번호교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연락을 해보지는 않았다. 관조가 출근하지 않은 지 이틀이 지났을 무렵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관조가 일하는 부서 사람을 통해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연차를 쓰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나는 업무를 하다가 가끔씩 관조를 생각했다. 관조가 말했던 콘크리트 저수지를 상상하기도 했다. 정말 그 속에서 살아서 아우성치는 것들이 있었을까. 깊은 우물을 바라보듯 맥주잔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와 숨을 고를 때마다 들썩이던 어깨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술집 앞에서 관조는 타오르는 불길에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자신은 좀 더 있을 테니, 내게 먼저 들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관조는 우의 입은 채로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 술기운이 오르는지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불길을 보고 서 있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왔더니 중앙청에서 공문이 내려와 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빌딩의 일에 대해서 어떤 의견도 내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사회적으로 큰 이목을 끄는 일 혹은 민감한 주제의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특정 의견을 내지 말라는 공문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사무실 사람들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창밖에서 커다란 빌딩이 불타고 있었지만 사무실 안에는 고요히 일상적인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사람들은 업무를 하다 말고 가끔씩 창밖을 바라볼 뿐 불타는 빌딩을 주제로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없었다. 퇴근을 조금 앞둔 시간 즈음에는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업무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창밖의 그것은 가까운 듯 먼 풍경이었다. 유리창 건너에 펼쳐진 풍경이 비현실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같이. 자치예산 관련으로 보고해야 할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때 누군가 엇! 하고 소리를 질렀다. 큰 창 앞에 자리가 있는 과장이었다.
"다들 이리 와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과장이 사무실 사람들을 불렀다. 사무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모여들었다.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직원이 과장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과장이 가리킨 것은 건물 꼭대기에 있는 조형물이었다. 유명한 설치미술가의 작품이라고 언론에서 보도했던 거대한 횃불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시민단체에서 그 장식물을 건물 꼭대기에 설치하는 것을 안전을 이유로 반대했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측의 공식 입장과 함께 설치는 강행됐다. 어느 신문에서 밑에서는 시위를 하고 위에서는 헬기로 조형물을 설치하던 것을 한 프레임에 찍은 사진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게 아이스크림처럼 불길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것 봐. 저게 녹고 있어."
과장은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을 보며 말했다.
"뭔가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직원 한 명이 짜증스럽게 말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과장과 함께 횃불 모양의 조형물이 축 늘어져 녹고 있는 것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지금 조사 중이라니까 곧 알지 않을까요?"
과장은 입을 삐죽거렸다. 상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는 흥미가 떨어진 듯 의자에 풀썩 앉았다. 나를 포함해 창밖을 보던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누군가, 장관이네, 살면서 저런 광경을 또 볼 수 있을까, 하고 말했다.


각종 매체의 보도에서 빌딩 화재에 관한 이슈는 점점 줄어들었다. 불타는 빌딩의 전경을 한 번 비추고 화재진압이 매우 어렵다는 짧은 멘트 그게 전부였다. 이제는 사람들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불이 생각보다 크고 그 불을 끄기가 어렵구나, 정도였다. 재난대책본부에서도 확실한 피해 상황은 화재가 진화돼야 알 수 있다는 발표가 있을 뿐이었다. 한 언론사가 그 빌딩에서 야간작업을 하던 수십 명의 노동자가 있지 않았냐는 추측성 보도를 내놓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무실 사람들도 창밖에서 불타고 있는 빌딩을 바라보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니 올림픽 성화의 기념물처럼 마치 예전부터 그 빌딩이 불에 타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관조를 다시 본 것은 우리가 치킨집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진 지 딱 일주일 만이었다. 빌딩의 진화작업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던 날 점심이었다. 나는 증빙자료들을 전달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흡연실에 들렀다. 금연캠페인이 한창이었으므로 늘 그렇듯 흡연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담뱃불을 붙이는 순간 관조가 들어왔다. 그는 몰라보게 살이 빠져 있었다. 일주일의 변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을 주지 않은 화분처럼 몸속의 수분이 다 빠진 사람같이 푸석해 보였다.
"관조 씨, 오랜만이에요."
나는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흡연실 한쪽에 있는 2인용 소파에 앉았다. 예의 그 환한 표정의 눈인사가 아니었다. 그는 가방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 얹어 놓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사과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불과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는데, 관조는 다른 세계에서 흡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 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병가를 내고 쉬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관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과가 신기한 물건인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사람을 면전에 두고 대꾸도 하지 않고 사과만 쳐다보고 있는 관조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약간 상했다. 그래서 피우던 담배를 서둘러 껐다. 흡연실을 빠져나오려는데 관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시간이 좀 있으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는 사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내게 말했다.
"그러시죠."
내가 맞은편 소파에 앉는 동안에도 그는 사과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차분히 앉아서 그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동안 사과를 보던 관조가 마침내 사과에서 시선을 떼고 나와 눈을 맞췄다. 예전에 눈을 피하던 그 버릇은 간데없고 내 눈이 사과인 양 빤히 바라봤다.
"괜찮으시면 이 사과를 한번 봐주세요."
관조는 말하면서 사과를 집어 들어 내 얼굴 가까이 내밀었다. 나는 사과를 받아들고 나서 대수롭지 않게 훑어봤다.
"사과네요."
"아니, 조금 더 자세히 봐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 이 부분을."
관조는 사과의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썩은 부분이었다. 썩기 시작한 지 조금 됐는지 그 부분이 깊숙이 패어 옆으로 번지고 있었다.
"썩은 부분 말입니까."
"네, 그 부분이요. 어때요?"
관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애원하듯 내 대답을 기다렸다.
"썩었네요."
나는 사과를 테이블 위에 얹어 놓으며 말했다.
"그렇죠, 썩었습니다."
관조는 그게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사과를 집어 들어 그 썩은 부분을 다시 관찰했다.
"우리가 함께 맥주를 마신 다음날 아침에 냉장고 야채 칸에서 이 사과를 발견했습니다. 언제 사놓은 지도 모르는 이 사과를 말이에요. 출출하기도 했고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집어 들었는데, 먹으려고 보니까 이렇게 썩고 있었습니다."
관조는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사과의 썩은 부분을 내 쪽으로 돌렸다.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사과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썩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과가 썩어 가는 것도 몰랐어요. 아니, 심지어 이 사과가 냉장고 속에 있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사과가 썩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요?"
관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요?"
"어째서라뇨?"
"먹지 않았으니까요. 당연히 썩는 게 아닌가요."
관조는 내 말을 듣고 허탈하게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내가 그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 줬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자연스럽다는 말입니까? 이 사과가 썩고 있는 것도 이치고 자연의 섭리라 자연스러운 일인가요? 이 사과를 썩게 만든다는 것들, 미생물? 박테리아? 하여간 그 작은 것들이 만들어진 것도 섭리이자 이치입니까? 이 사과는 냉장고에서 썩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입니까. 정말? 정말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그의 얼굴은 마치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다시 사과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는 동안 쉼 없이 땀이 흘렀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흥분을 했어요. 좀처럼 이러지 않는데, 요즘은 자주 이러네요."
관조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 사과가 나타난 이후로 내 삶이 전부 썩어 가기 시작했어요."
그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 이후에도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흥분을 식히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사과가 이렇게 썩고 있어요."
관조는 내가 일주일 전에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이 아니었다. 표정, 말투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그날 이후로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어요.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의문이 생겼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고 머릿속에 이 사과 한 알만 남은 것 같습니다. 썩고 있어요. 나는 썩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였다.
"보세요. 이제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아요. 저렇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마치 이 사과가 썩고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나한테는 이제 자연스럽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아요.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마치 나를 이물질처럼 생각하겠죠. 그저 치워버리고 싶을 겁니다. 사과가 썩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그의 들숨과 날숨이 느껴졌다. 관조의 어깨가 불규칙적으로 들썩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순식간에 쏟아낸 질문들에 단 하나도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음과 이해할 수 있음의 경계에서 나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꾸준히 훈련해 온 나를 지키는 방법들 중 하나였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예 멀리 치워버리거나 그러지 못하면 도망치는 것, 나는 항상 그런 선택을 해왔다. 창밖에서 불타고 있는 저 빌딩을 대하는 나의 마음처럼. 관조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조는 울음을 멈추고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도대체 무엇이 미안한지, 사실 나는 잘 몰랐다. 나는 그가 미안하다고 하니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이 순간 서로 편해지기 위해서였다.
"저기, 저 큰 게 불타고 있어요. 그런데 왜 아무도,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요? 저렇게 활활 타고 있는데. 저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관조는 사과를 가방에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일은 잊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창밖의 비현실적인 것이 갑자기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와 연결된 어떤 것이 타고 있는 것처럼 뜨겁고 화끈거렸다. 타고 있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조는 내게 인사를 하고 흡연실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나는 그가 흡연실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조는 이틀 만에 그가 일하는 부서의 사무실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이 돼 있었다. 관조와 같은 부서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종종 그를 헐뜯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식당 한구석에서 식판을 멀찍이 밀어 놓고 사과를 들여다보고 있는 관조를 봤다. 그 주변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계속 그를 관찰했다.
"돌았어요. 저 사람."
누가 내 앞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관조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는 종종 휴게실에서 만나 커피를 함께 마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관조가 병가를 내고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알려준 이도 그였다.
"구관조 씨요?"
"네, 구관조 씨. 이름만 좀 이상했지 사람은 참 괜찮다 했는데, 완전히 맛이 갔어요."
그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 허겁지겁 떠 넣으며 말했다.
"병가 다녀오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난리 났었잖아요. 화재 있잖아요. 그 건물 사측에 진상해명 하라고 메일을 수십 통 보내고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배하고. 청와대에도 민원을 넣었어요. 그 화재 왜 진상을 밝히지 않느냐고. 자기 소속이랑 이름이랑 다 써서 위에서 난리 났잖아요. 얼마 전에 공문도 내려왔는데요. 지침 교육 다시 하라고 과장하고 계장하고 불려가서 까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니 국이 왜 이렇게 싱거워."
그는 식탁에 비치된 소금을 국에 뿌렸다. 그러더니 다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말했다.
"아니 무슨 대단한 투사 나셨어요. 그죠? 그걸 지가 왜 신경 써? 나는 구관조 씨가 오지랖이 그렇게 넓은지 몰랐네요. 그 회사에 주식이라도 했나. 하여간 우리 부서만 본청에 교육 가게 생겼어요. 저 사람 때문에. 썩은 사과는 왜 들고 다닌대. 썩었으면 버리던가 해야지."
관조의 시선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사과에 고정돼 있었다. 그는 식당에 사과와 단둘이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에 올라와 정신없는 오후를 보냈다. 급하게 넘길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때 파티션 너머에서 고성이 들렸다.
"아니 그렇게 걱정되면 구관조 씨가 가서 끄세요. 못 끄면 입을 좀 다물던가."
관조가 근무하는 산림과의 과장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저걸 그냥 둡니까?"
관조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허, 글쎄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내가 불을 질렀어? 관조 씨 책임 아니면 가만히 있어. 조직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의견만 내세웁니까. 불이 나고 못 끄니까 계속 타는 거야.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심플하게 생각해. 심플하게."
고성이 오가자 다른 부서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그 속에 섞였다. 산림과 과장은 흥분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저 안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관조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뉴스에서 없다잖아. 뉴스에서. 설령 있다 칩시다. 그래서 관조 씨가 청와대에 민원 넣고 그쪽 회사 게시판에 도배하면 그 사람들이 살아 나온답니까. 불 난 지가 벌써 며칠째야. 생각을 좀 해봐요. 다들 멀쩡하게 잘 있는데 왜 혼란을 만들어요. 관조 씨, 우리 조직은 시스템이야. 관조 씨 같은 작은 부품 하나만 삐걱해도 전체가 선단 말이야.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데, 그걸 왜 굳이 지금 멈춰서 확인하려고 해. 왜 혼자 그래."
"사과가 썩고 있어요."
"뭐?"
"사과가 썩고 있다고요."
"그럼 버려."
관조는 그 길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과장은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관조의 자리에 새로운 직원을 앉혔다. 관조는 무기한 발령대기를 받았다. 관조가 무단결근을 한 지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을 하고 나는 잔업이 있어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관조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간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공백은 말끔하게 메워졌다.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길은 여전히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저렇게 오랫동안 맹렬한 기세로 타고 있는 것일까. 저 불은 무엇을 연료로 타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사람의 것인 듯한 거친 숨소리만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그게 관조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화기 너머에서 이쪽으로 목소리가 전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구관조입니다."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시간이 괜찮으면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 시간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구제역 현장에 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의 한숨소리가 얇은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어디서 무엇인가가 조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아직 굳지 않았습니다."
"설마요."
작업을 한 지 열흘이 훨씬 넘은 콘크리트가 굳지 않을 리는 없었다. 나는 그가 처음에는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예의 그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콘크리트가 아직 굳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어요. 콘크리트 아래에서."
"구관조 씨, 그럴 리가 없잖아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흡연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분명히 꿈틀거리고 있어요. 제가 들어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 또 함께 맥주를 같이 마실 수 있으면 좋겠군요."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 파티션 너머에 있는 구관조의 부서로 달려갔다. 모두 다 퇴근을 하고 없었다. 벽에 붙어 있는 비상연락망에서 그의 동료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고 그가 받았다.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노래방인 것 같았다. 순간, 새로운 직원을 환영하는 회식을 한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이 기억났다.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구제역 현장이 어디인지 물었다. 술에 취한 그는 구제샵? 구제샵이요? 나는 구제는 안 입는데 따위의 말을 하다가 마침내 구제역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었다. 술김이라 그런지 순순히 현장의 주소를 알려줬다. 아마도 얼른 전화를 끊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알려준 구제역 현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현장으로 달리는 동안 비상연락망에서 메모해 온 관조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찰이나 구급대에 신고를 해볼까 생각을 했지만 먼저 확인을 해보자는 생각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 관조의 말을 믿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믿지 않았다.
관조가 말한 구제역 현장은 허탈할 정도로 도시와 가까웠다. 멀리 대단지 아파트의 불빛이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국철이 다니는 역이 멀지 않게 있는 곳이었다. 현장 진입구에 포클레인 몇 대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포클레인 뒤에 주차하고 내렸다. 발을 내딛자 물렁한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현장에는 진입금지 차단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었고 콘크리트가 덮여 있었다. 관조가 설명한 대로 꼭 저수지 같았다. 관조를 불러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관조는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둘러쳐져 있는 차단 테이프를 넘어 콘크리트를 향해 내려갔다. 콘크리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콘크리트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왜 물컹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 아래 묻혀 있을 천오백 마리의 아우성 때문이었을까. 나는 손을 거두며 생각했다. 콘크리트는 관조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움직였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안도인지 아니면 회한인지 모르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단단하게 굳은 콘크리트를 바라보며 이제는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돌아서려는 데, 거기 사과가 있었다. 한쪽이 이미 다 썩어버린 사과. 관조의 것이었다.


며칠 후 빌딩이 무너졌다. 빌딩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사무실 사람들은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굉음이 들렸고 진동이 몇 초간 지속됐고 지진이다, 라고 소리치며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간 직원도 있었다. 과장이 엇, 저것 봐, 하고 소리를 쳤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우왕좌왕하다가 과장이 가리키는 쪽으로 모두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풍경이 있었다.
한동안 뿌옇게 시야를 막고 있던 먼지 구름이 걷히고 난 그곳에는 엄청난 잿더미뿐이었다. 결국 불은 진화하지 못했다. 그 거대한 빌딩이 무너지면서 스스로 꺼졌다.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수색작업을 벌였다. 언론사에서 제기했던 각종 의혹이 루머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재난대책본부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였으며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소방 관련 법규를 마련하고 초기 진화에 만전을 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언론에서 책임자를 가리라는 기사가 일제히 쏟아졌고, 결국 책임자는 책임을 지고 재판을 받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었다. 마치 이제 그만 하자, 라고 약속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 불길에 대해 잊어 갔다. 관조도 함께 잊혀졌다. 경찰은 그의 행방을 공식적으로 실종으로 처리했다. 구제역 현장의 콘크리트는 그날 이후 흙으로 덮였다. 비가 한번 거세게 내렸고 칡덩굴이 그 위로 빠르게 번졌다. 아무도 그 아래 천오백 마리의 소가 묻혀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그 칡덩굴 더미를 파보지 않을 테니까.


그날 치킨집 앞에서 불길을 바라보던 관조는 말했다.
"제가 격렬하게 반대했다면 일이 달라졌을까요."
"아니요."
나는 대답했다.
"그렇겠죠?"
"예. 알고 계시잖아요. 관조 씨도."
"맞아요. 알고 있죠. 저도."
알고 있죠. 저도. 그는 그렇게 한 번 더 말했다. 나는 그 순간 그가 어떤 불행한 사실을 이 세상에서 혼자 알게 된 사람처럼 외로워 보였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 빌딩처럼 불타고 있었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서서 하염없이 혼자 타고 있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발길을 돌려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유흥가 한 중간에 멈춰 서서 한 곳을 응시하는 그를 계속 돌아봤지만 그에게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내가 그때 그에게 돌아가 몇 잔의 맥주를 함께 더 마셨더라면 일이 달라졌을까.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가끔 관조를 보곤 한다. 그는 물컹한 콘크리트에 반쯤 잠긴 채로 사과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콘크리트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나오세요, 얼른."
내가 말하면 그는 대답이 없다. 그저 사과를 응시하면서 콘크리트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가 가라앉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다. 그를 구출하러 들어갈까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나는 용기가 없다.
어떤 때 관조는 내게 말을 한다.
"저게 저렇게 불타고 있는데, 저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고 그는 콘크리트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린다. 썩어 가고 있는 사과 한 알과 함께. 나는 서서 콘크리트가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본다. 그 속에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관조가 이미 가라앉고 없는 그곳을 바라만 보고 있다. 내가 그를 꺼낼 수 있을까 생각만 한 채로, 나는 그 앞에 서 있다.


나는 이제 무엇인가를 후회할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계속 그럴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작가소개 / 천정완

경북 문경 출생. 2011년 「팽- 부풀어 오르다」로 창작과비평사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과 희곡을 쓰고 있으며 창작집단 독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장웹진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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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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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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