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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7-02-01
  • 조회수 2,545


[단편소설]





윤해서



나무들이 물들지 못했기 때문일까. 겨울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달력의 숫자가 바뀌었지만 해는 바뀌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속되고 있어.


*


화진은 일주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일주일 새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오늘밤도 힘들 거 같아.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리도록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응, 여보.
화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전 다행히 아내가 전화를 받는다.
어디야?
화진의 목소리에 짜증이 숨겨져 있다.
밖이야. 친구들 만났어.
당신 설마 여기 온 건 아니지?
화진은 마치 당장이라도 아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 틈에 아내가 섞여 있다 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당신 너무 고생한다.
아내가 대답은 하지 않고 말을 돌린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화진은 지금 들리는 소리가 그의 오른쪽 귀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전화기를 대고 있는 왼쪽 귀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잠깐 동안 분간하지 못한다.
오빠, 고생해.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 아내 때문에 화진은 알아차린다. 양쪽 귀에서 같은 노래가 들리고 있다. 아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당신까지 그럴 필요 없어. 충분히 많아. 당신까지 그러지 말고 들어가. 정말 그럴 필요 없다니까.
화진은 아내의 대답을 기다린다.
아내는 잠깐 동안 말이 없다. 화진이 뭔가 더 말을 하려는데 아내가 말한다.
필요할까 봐, 필요해서 나온 거 아니야. 그냥 나올 수밖에 없어서 나온 거야.
아내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럽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더없이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집요하고 완고한 면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게다가 화진은 사실 다정한 남편이 아닌가.
따뜻하게 입은 거지?
화진은 아내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자신의 뜻을 금세 포기한다.
그럼, 고마워. 당신도 잘 입고 나왔지? 바빠도 밥 잘 챙겨먹고요.
아내의 목소리 너머로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노래가 반복되고 있다.
지친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화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 섞인 혼잣말을 한다. 어디에 지쳐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


화진은 무대 뒤편에 있다.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이 힘들다.
나이를 먹으니까 내가 보수화된다는 걸 느껴.
잃기 싫거든. 직장도, 가족도, 사회적 관계도.
그에게 이렇게 고백하던 대학 선배를 떠올린다. 내가 지금 여기서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득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도, 사람들의 함성소리에도 무감해진 지 오래. 오직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잠들고 싶다. 쉬고 싶다. 절망적인 피로를 느낀다.
아내는 어디쯤에서 저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화진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괜스레 시간만 확인하고 다시 집어넣는다. 반대편 주머니에 있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린다. 몇 년 전, 결혼과 함께 담배를 끊고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라이터이다.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고 느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이렇게까지 조용해질 수 있구나. 문득 무대 위가 궁금해진다. 누가 올라온 걸까.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올랐다.
화진은 무대의 뒤편, 검은 가벽만이 보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 뒤를 돌아본다. 무대의 배경이 되는 검은 벽 너머에서 어떤 시간이 화진에게로 갑자기 들이닥친다. 로사다.


*


우주에 우리 둘만 있는 거 같아. 이 방만, 오직 이 방만 있는 거 같아.
로사가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이 속삭였던 말이다.
정말로 우주에 단둘이 떠 있는 것만 같던 시간.


천장이 낮고 어두운 방. 오래된 나무 냄새. 가운데가 뚫린 사각형의 목조 건물. 방의 작은 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던 바닥이 마른 우물. 몸을 뒤척일 때마다 나던 낡은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 도시 전체에, 건물 구석구석에, 욕실 손잡이 하나까지에 있던 수많은 나무 조각들. 욕실에 발가벗고 서면 어김없이 나오던 새하얀 입김. 추위를 이겨 보겠다고 비좁은 싱글 침대에 처음 나란히 누웠던 밤, 가만히 안고 누워서 보낸 꼬박 일주일의 밤들. 시도 때도 없이 방 안을 울리던 로사의 연주. 허공을 흔드는 끔찍하게 슬프고 아름다운 소리들. 화진은 이따금 생각했다. 왜 그때 우리는.


화진은 그 도시에 오래 머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천년 고도.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래된 도시는 하루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마을에 가까운 곳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도시. 깊게 고여 있는 시간에 길을 잃고 헤맨다 해도 반나절이면 가장 큰 사원의 탑을 찾아낼 수 있는 도시. 그곳에서 화진은 로사를 만났다.
화진은 그 도시의 모든 길을 기억한다. 그녀와 보냈던 일주일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그들은 처음 같이 숙소를 정할 때 했던 약속대로 일주일 뒤 공항에서 헤어졌다. 화진은 몇 번이나 달려가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어떤 치기 때문이었을까.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녀가 서 있는 줄이 점점 줄어들고, 그녀가 여권을 공항 직원에게 보여주고, 탑승구로 들어가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그들은 수없이 뒤돌아보았다. 다시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화진은 문득, 문득 그때의 일주일을 떠올렸다.


목조 건물들이 벽을 맞대고 끝없이 늘어서 있는 좁은 내리막길, 관광객이라고는 한 명도 다니지 않는 현지인들의 마을로 건너갈 수 있던 흔들리는 철제 다리, 거리의 노점상들과 흙먼지. 아주 작은 저수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걷던 시간들.
매일 아침을 먹으러 갔던 카페, 카페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던 풍경, 배를 깔고 엎드린 개, 로사의 옆얼굴, 카페에 마주 앉아 나누었던 수많은 말들.


나는 오로지 내 삶을 좋게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내 삶을 더 좋게 만드는 거. 나는 철저하게, 아주 철저히 이기적으로 살 거야. 절대로 내 멋대로 살지 않을 거야.


로사는 생글생글 잘 웃었고, 웃으면서 잘 떠들었다. 화진이 그랬던 것처럼 로사도 화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디에서 왔는지,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 동안 여행을 하고 있는지, 여기를 떠나면 어디로 갈 건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으레 물을 법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것을 두 사람은 뿌듯해했다.


그러다 언니가 기어이 집을 나갔어.
언니는 나보다 언제나 공부를 잘했는데 결국 대학 졸업도 하지 못했지. 우리 언니는 대학교를 세 번이나 들어갔어. 모두 이 년을 넘기지 못했지만. 형부랑이라도 잘살길 바랐는데. 기어이 이혼을 하더라. 나한테 언니는 기어이야. 모든지 기어이 하고 마는 사람. 아버지나 엄마의 기대는 단 한 번도 언니를 막지 못했어. 나는 언니가 거의 종교적이라고 생각해. 종교인들이 그렇잖아. 가족보다, 자신보다,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이 섬기는 신이 중요하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것처럼. 우리 언니는 그런 사람이야. 자신의 삶을 내던진 사람, 가족의 기대를 내팽개친 사람. 요즘 누가 그렇게 살아? 난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나만 생각할 거야. 내 가족만 생각할 거야. 잘 먹고 잘살 거야. 엄마 아빠한테 언니 몫까지 효도할 거야. 내가 다 할 거야.


화진은 정말로 로사가 그렇게 살고 있기를 바랐다. 모든 것과 무관하게, 무심한 마음으로 잘 먹고 잘살고 있기를 바랐다. 어쩌다 로사가 떠오를 때면 로사가 부디 결심대로 살아내고 있기를 바랐다. 반복되는 꿈 때문이었을까.


로사는 혼자 용감하게 노를 저어 간다. 호수 한가운데로.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호수 가운데에. 물 가까이에 누워서. 깊은 물 위에 위태롭게 누워서.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구명조끼도 없이. 어떻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까. 로사가 배 위에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게 한참을 누워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 젓기가 서툰 화진이 타고 있는 배가 로사의 뱃머리를 민다. 두 개의 나무 배가 살며시 부딪친다. 배 주변으로 물결이 인다. 한 사람이 누우면 꼭 맞을 크기의 나무 배. 멀리서 보았을 때 화진은 빈 배가 호수 가운데 떠 있다고 생각했다. 배를 빌려주는 사람이 분명 너희 나라 여자가 혼자 배를 타고 나갔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너도 충분히 혼자 해낼 수 있다고 했었는데.
이건 화진이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다. 화진의 꿈속에서 로사는 항상 그 작은 배 위에 위태롭게 누워 있다. 로사의 두 손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화진은 로사의 손을 붙잡고 싶다고 생각한다. 한 번만 더 로사의 연주를, 꿈결 같은 로사의 연주를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꿈은 화진의 배가 로사가 타고 있는 배의 뱃머리를 미는 순간 끝난다. 어김없이. 배에서 마치 귀신처럼 소리 없이 일어나 환하게 웃던 로사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로사의 두 손이 허공을 떠난다. 허공으로 돌아온다. 로사의 두 손이 허공을 움켜쥔다. 허공을 풀어헤친다. 로사의 두 손이 허공을 내몬다. 허공으로 내몰린다.


*


로사의 두 손이 허공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허공을 연주하는 사람. 로사의 연주가 만들어내는 자장은 로사의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장보다 훨씬 강렬하고 방대하다. 끝을 알 수 없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쏟아진다. 모두 숨을 죽이고 로사의 두 손을, 로사의 두 손이 지휘하고 있는 깊은 밤의 허공을 바라본다. 로사의 손은 마디가 굵고 손바닥이 두툼하다. 로사의 작고 가는 몸에 비해 기형적으로 커다란 두 손. 허공에서 움직이는 손만 본다면 손의 주인이 여자일 거라고 상상하기 힘든 손이다. 로사가 연주하는 허공은 어둡고, 무겁고, 차갑다. 로사의 연주는 텅 비어 있고 동시에 가득 차 있다.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는 저것은 무엇인가. 그녀의 연주가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잠깐 동안 그곳에 모인 이유를 잊는다. 사람들의 두 눈이 텅 빈다. 그녀의 연주는 육체의 안과 밖의 모든 영혼들을 한순간 눈멀게 한다.
한 세계가 열린다. 한 세계에서 또 다른 한 세계로 건너간다.
그녀의 연주가 시작되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의 허공이 펼쳐진다. 넋을 놓고 잠깐 다른 세계에 머무는 수밖에 없다. 두 손이 사로잡는다. 두 손이 사로잡힌다. 그것은 불가항력에 가까워서 그녀의 연주가 들리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무엇을 망설이는지 모르면서 계속 망설일 수 있고, 모든 망설임을 멈출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갑자기 던져져.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녀가 다루는 악기는 흔한 악기가 아니었고 그녀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거의 태어나서 처음 그 악기의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꿈인 듯 들려오는. 한없이 슬프고 아름다운 소리.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는 일)
사람이 사람과 (물결처럼)
사람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사람이 사람과 (간절하게)
사람과 사람이 (어쩌면)
사람이 사람과 (영원이라는)
사람과 사람이 (새까맣게 잊은 것처럼)
사람이 사람과 (끝없는 밤길을 걷다가)
사람과 사람이 (한 번도 목도한 적 없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이
사람이


로사는 단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했다. 로사의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사람과 사람이. 사람이 사람과. 사람과 사람이. 사람이 사람과로 겨우, 겨우 이어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절들뿐이었다. 사람이. 사람이. 사람이. 아주 먼 곳에서 오는 사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힘겹게 도착했다. 사람이. 사람이. 로사는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다가 쓰러졌다. 조금도 초월적이지 않다. 그녀의 목소리는. 주저 없이. 깊은 벼랑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연주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 그 갑작스러움마저도. 로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갑자기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넋을 놓고 있었다. 레퀴엠, 레퀴엠.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목소리. 아주 멀리에서 지는 해. 깊은 그늘 가까이. 장작에 타오르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차갑게 사그라졌다. 쿵, 소리를 내며 무대 위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그녀가 쓰러진 뒤에도 그녀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허공을 바라보았다. 계속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녀가 쓰러진 것에 놀라지 않았다.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화진은 무대 앞에 와 있다. 로사의 눈빛이, 로사의 목소리가, 로사의 연주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 로사가 쓰러지는 것을 본다. 쿵.


밤에 생기는 그림자는 공기 중에 풀어진 영혼 같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


로사가 마지막 밤에 들려준 연주를 떠올린다. 허공을 더듬거리던 너의 두 손. 허공을 어루만지던 너의 두 손. 허공을 가로지르던 너의 두 손.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헤이즈는 달려간다. 무대 위로 달려 올라가면서 가장 먼저 현실로 돌아온다. 가장 먼저 로사의 연주에서 벗어난다. 헤이즈가 무대에서 로사를 안고 내려올 때 뒤늦게 함성이 터진다. 수백만 사람의 함성이 한꺼번에 울린다. 헤이즈는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방금 전에 로사가 내뱉은 몇 마디 반복되는 구절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처럼. 헤이즈는 로사를 빨리 따뜻한 곳에 눕혀야 한다는 생각만 한다. 사람들이 로사를 안은 헤이즈가 행렬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준다. 헤이즈는 로사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본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괜찮아. 로사에게 말한다. 괜찮아. 로사 대신 헤이즈가 대답한다. 로사가 헤이즈 앞에서 쓰러진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빛을 다루는 사람이군요. 그는 그일까요? 그녀일까요?
수년 전, 로사의 길거리 공연에 반해 로사와 친구가 된 몇 달 뒤 헤이즈와 로사는 같이 어떤 전시를 보고 있었다. 물론 로사는 그 전시가 헤이즈의 전시인지 알지 못했다. 헤이즈는 로사에게 너희 나라에 왔으니 만나자고 갑작스럽게 이메일을 보냈고, 로사는 헤이즈의 한국 이름만을 알았다. 아가. 로사는 설치미술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전시장 어디에도 헤이즈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는 없었다.
여자겠죠? 만약 남자라면. 남자라면.
헤이즈는 로사의 다음 말이 궁금했지만 로사는 이 전시의 설치 작가가 여자라고 확신했는지 작가가 남자인 경우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전염병처럼 지나가는 거겠죠.
시간은.
로사가 어떤 작품 앞을 지날 때 이렇게 말했었는지 헤이즈는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로사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귀신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귀신을 본 적은 없고 귀신이 되는 꿈을 많이 꿔요. 귀신이 몸에 들어온다고 해야 하나.
그럴 때 기분이 어때요?
헤이즈가 물었다.
처음엔 무섭고 싫었는데 지금은 뭐 그냥. 들어왔구나. 들어왔나 보다.
나가는구나. 나갔구나. 꿈에서 깨겠지. 그래요.
로사가 잠깐 동안 말을 멈췄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덧붙여 말했다.
죽어야 끝나겠구나.
귀신이 된다는 그녀의 말이 그에게 어떤 위로가 됐던 걸까. 헤이즈는 세 살 때 어머니의 나라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해 말했다. 어쩌면 마침내 어머니의 나라에 돌아왔다는 감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슬로베니아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안개가 얼어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얼어붙은 안개. 저는 그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안개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안개가 언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고요. 그것은 아주 커다란 날개를 가진 새들의 무리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아주 큰 새들이 나무를 둘러싸고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나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게 다예요. 그게 다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난 것은 그때였어요.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어머니의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소리와 냄새, 감촉 같은 것들이었어요. 나는 내 주위를 맴도는 어스름하고 따뜻한 어떤 빛을 기억할 뿐이어서 막연하게, 어쩌면 어렸을 때 눈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옵니다. 냄새가 나요. 따뜻한 젖 냄새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껴요. 부드럽고 따뜻하고 예민한 손입니다. 어머니는 떨고 있어요. 어머니는 나를 돌보는 모든 일에 서툴고 거의 매순간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녀가 고스란히, 그녀가 온전히, 나에게 다가옵니다. 나는 아주 가까이 다가온 엄마의 숨소리를 들어요. 엄마의 심장이 아주 가까이에서 뛰고 있습니다. 엄마의 심장소리, 숨소리와 나는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그 얼어붙은 안개 앞에서 엄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 겁니다.
마침내 피아노 건반을 빠져나온 음처럼.
쿵, 로사가 쓰러졌다.
헤이즈는 그날 로사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는 남자입니다. 그는 기억을 다루는 사람이에요. 그는 세 살 때 입양되었고, 그에게는 처음 자신의 심장과 폐가, 눈, 코, 입이, 두 팔과 두 다리가 생길 때부터 세 살 때까지의 기억이 아주 온전히 남아 있어요. 그가 다루는 기억은 그래서 엄마의 뱃속에서 아이가 느끼는 빛처럼 감은 눈의 바깥에서 어른거립니다. 그 빛은 눈이 부시게 환해지지도, 아주 캄캄해지지도 않아요. 헤이즈는 말할 수 없었다.


로사는 다음날 아침 헤이즈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눈을 떴다.


*


잘 잤어?
로사가 눈을 반쯤 뜨고 헤이즈에게 묻는다. 헤이즈는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로의 차들은 빠른 속도로 무심히 달려간다. 어젯밤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헤이즈는 골똘해진다.
왜 말하지 않았어?
헤이즈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묻는다.
뭘?
음. 그러니까 네가 무대에 올라갈 거라는 거? 연주할 거라는 거? 쓰러질 거라는 거?
헤이즈가 로사를 향해 돌아선다. 환하게 웃는다. 표정이 거의 없는 헤이즈에게 드문 웃음이다.
몇 년 만이지?
3년쯤 됐나.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로사가 헤이즈를 향해 걸어간다.
3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로사가 두 팔을 크게 벌려 헤이즈를 힘껏 안는다.
병원은 다니고 있는 거야?
헤이즈가 제 키의 절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로사에게 안겨 묻는다.
별거 아니야.
로사가 헤이즈를 더 세게 끌어안는다. 신이 난 아이처럼 묻는다.
우리 오늘 뭐 할까? 뭐 하고 싶어?
헤이즈가 로사를 품에서 살며시 떼어내 로사의 양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밝음을 가장하는 로사를 헤이즈는 익히 알고 있다.
어제 너 뭐라고 한 거야?
헤이즈는 들어오기 전에 충분히 많은 기사를 읽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이 나라에 대한 뉴스를 참지 못하고 결국 비행기를 탔다. 에이전시에 곧 있을 전시를 핑계로 대기는 했지만 그가 반드시 직접 들어와야 하는 전시는 아니었다. 로사가 그립긴 했지만 로사와 그는 말이 잘 통하는 친구일 뿐, 그에게는 이틀 전 떠나온 도시에 몇 년째 함께 살고 있는 애인이 있었다. 그는 오지 않을 수 없어서 돌아왔다.


나는 아주 익숙해져 있었지만. 내가 멀리 보내졌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이 나라가 철저히 계급적이라는 것,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의 의미. 내 어머니의 나라 안에 머물러 살았다면 영영 몰라도 좋았을 감정들을 수없이 경험했지만. 나는 지금 참을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것을 느껴. 거의 충동에 가까운 고통 같은 것을. 나는 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곳에 가서 확인해야 할 거 같아.


그는 잠든 애인에게 메모를 남겼고, 거의 충동적으로 떠나왔다.
그를 이끈 것은 거대한 빛 물결이었다. 그는 그날 밤 뉴스에서 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심해 아귀를 본 적 있어요? 심해 아귀는 빛이 없는 1㎞ 바다 속에 산대요. 빛이 없기 때문에 암컷과 수컷이 만나는 일은 쉽지 않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수컷 아귀는 암컷 아귀가 콧구멍으로 내뿜는 페로몬으로 암컷을 찾아 헤엄쳐 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침내 암컷 아귀를 만나면 수컷 아귀는 다시는 암컷 아귀를 잃지 않기 위해 암컷의 몸을 꽉 문다고 해요. 암컷의 몸 깊숙이 이를 박고 꽉 문 상태로 사는 거죠. 수컷은 생식을 위해서 절대로 암컷을 놓지 않아요. 재미있는 건 결국 수컷과 암컷의 피부가 함께 자란다는 겁니다. 수컷이 완전히 암컷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암컷의 피가 수컷의 몸으로 흐르게 된대요.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수컷의 다른 모든 기관들은 퇴화해요. 지느러미를 비롯한 쓸모없어진 신체 기관은 급속도로 퇴화하고, 수컷은 암컷에게 정자를 공급하는 하나의 기관으로 남게 되는 거죠. 오직 정자 공장으로서만 수컷은 암컷의 일부로 남아요.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수컷은 있는 힘을 다해 암컷을 꽉 물고, 암컷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어쩌면 우리 모두 그 수컷 아귀 같지 않나요. 이 거대한 세계의 수컷들이요. 죽는 줄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를 더 악무는 수컷들이요. 거대한 나라들을 꽉 물고 있는 작은 나라들. 직장을 꽉 물고 있는 직장인들, 돈을 꽉 물고 있는 돈주머니들, 내일을 꽉 물고 있는 어제, 죽음을 꽉 물고 있는 삶이요.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윤리란 모든 기관들이 퇴화해 버린 아귀, 정자만 공급하는 기관으로 남은 수컷 아귀의 완전히 퇴화해 버린 아가미 같아. 스스로 숨 쉴 수 없는 아귀는 산 건가? 죽은 건가? 이건 나의 기어이, 우리 언니가 자주 하는 재미없는 농담이에요.
그런데 그건 그렇고. 아귀찜 좋아해요? 이 나라는 다 좋은데 해산물이 없는 게 흠인 거 같아.


쿵. 로사가 쓰러진 다음날 아침에도, 그 다음날 아침에도 화진은 로사가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로사는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로사는 그 도시에 흔한 무너진 석탑 앞에 앉아 있었다. 짐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부려 놓고 두 손을 올려 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한눈에 한국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진은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로사에게 말을 걸었고, 두 사람은 마을을 천천히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어쩌면 로사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로사를 놓아 주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화진은 로사가 아귀 이야기를 할 때, 아귀가 무엇이든 그저 로사를 꽉 물고 싶었다. 멀리서 해가 지기 시작할 때 화진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나는 여기 마음에 들어요. 천 년 전에 지어진 집에서 잠들면 천 년 전에 이 집을 지은 사람이 꿈에 나올까요? 로사가 아무 경계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좁은 숙직실에서 쪽잠을 자다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로사가 떠오른다. 꿈속을 울리는 로사의 연주와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로사의 이야기. 호수 한가운데 위태롭게 떠 있는 텅 빈 배.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화진은 그날 밤 무대 위에 있던 로사를 떠올린다. 로사를 안고 황급히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던 남자를 떠올린다. 지금 내가 꽉 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린다. 반대쪽 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전화를 꺼내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잘 잤어?


*


매일 걷는 길
이 길은 내가 매일 걷는 길입니다
서로의 빛 아래 태어나서 당신이 나를 오해해도 좋다
우리가 매일 걷는 이 시간은
끝나지 않은 재난의 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시간은
재난 이후의 재난, 재난의 한가운데, 멈춘 시간입니다
꺼이, 꺼이 행진하는 폐허
어어, 어어


화진의 아내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새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몇 문장을 썼다 지웠다. 다시 몇 문장을 썼다, 지운다. 전화를 받는다.
그럼, 자기는 좀 잤어?
화진에게 묻는다.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남편이다.
네 팔자가 상팔자지. 나도 돈 벌어다 주는 남편 있으면 시나 쓰면서 살고 싶다.
야근이 잦은 은행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이 그녀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시나 쓰면서. 이 말에 매번 마음이 걸리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는다. 밥벌이의 고단함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도무지 아무것도 쓸 수가 없어.
남편에게 말할 수 없다. 그는 먹고 자는 시간마저 부족한 사람이다.
현실이 삶을 압도한다. 참혹한 세계가 허공을 헤매는 두 발을 끌어내린다. 세계가 나를 집어삼킨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저것은 시가 아니다. 구호도 아니다. 자조이거나 자위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무력하고 부끄럽다.
입을 뗄 수 없다. 남편에게 말할 수 없다. 그는 20대 후반에 경찰공무원이 되었고, 10년 가까이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남편의 성실함이, 남편의 책임감이, 남편의 고단함이 그녀를 현실에 단단히 붙든다.
바빠도 밥 잘 챙겨먹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밥 이야기뿐이다.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을까요?
언젠가 화진과 그녀는 아마도 어떤 우연 속에서 이런 말로 둘의 역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다행히 따뜻한 밥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밥의 길이야말로 우리가 매일 걷는 길이다. 밥의 길이야말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길이다. 때로 밥이 재난 아닌가. 그녀는 생각한다.
오늘은 들어가도록 해볼게.
화진의 목소리가 너무 지쳐서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 힘내요.
화진은 아내의 목소리에 왠지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내도 로사의 연주를 들었을까? 로사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로사를 보았을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반대쪽 주머니에 들어 있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린다.


*


개 같은 년들이 지랄이야. 지들이 뭘 알아. 개 같은 년들. 미친년들이 남자랑 길거리에서 끌어안고 물고 빨고 지랄하는 개 같은 년들이 뭣도 모르는 년들이 지랄이야. 지들이 뭘 알아. 뭘 알아서. 뭘 안다고. 지들이 지금 항의해야 할 게 뭔지도 모르고 지랄이지. 개 같은 년들이. 지금 지하철이 몇 분에 한 대 다니는 줄 알기나 해. 이걸 얼마나 오래 기다려서 탔는지 아냐고. 그럼 지하철 빨리 다니게 해달라. 딱 따져야 될 거 아니야. 미친년들이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미친년들. 이 개 같은 년들이.


헤이즈는 로사에게 묻고 싶어진다. 저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저 사람이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무래도 욕 같은데 대체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이냐고. 헤이즈는 남자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 대체 누구를 향해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저 남자는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고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은데. 저 남자는 지금 어디 가는 길일까. 저 남자도 언젠가 아주 작고 여린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헤이즈는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빤히 바라본다. 곧 깨닫는다. 아무도 남자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무심한 사람들. 전혀 동요하지 않는 사람들. 철저하게 외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본다. 마치 그 남자가 헤이즈의 눈에만 보이는 것처럼, 그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헤이즈의 귀에만 들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지친 것일까. 그들은 무관심한 것일까. 그들은 냉담한 것일까.
개 같은. 남자가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헤이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무슨 말을 그토록 열심히 하고 있는지, 지하철이 몇 개의 역을 통과하는 동안 그 남자가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느냐고. 남자에게 다가서 남자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헤이즈는 체격이 큰 30대 후반의 남자이다. 헤이즈의 키는 190㎝에 가깝고 헤이즈는 십 년 넘게 단 하루도 근력 운동을 쉬어 본 적이 없다. 헤이즈는 어디서나 약한 동양인으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다. 헤이즈의 뜻 없는 행동에 남자는 위협을 느낀다. 미친. 남자가 말끝을 흐리며 헛기침을 한다. 어색하게 눈을 피한다. 지하철 안이 조용해진다. 헤이즈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된다. 그 사람이 당황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영어로 말을 건네도 좋을지 몰라 헤이즈는 난처해진다. 어차피 목적지가 없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그중 어느 한 동네는 내가 살던 곳이 아닐까. 그런 기대가 있어. 함께 가주겠다는 로사의 호의를 굳이 뿌리치고 혼자 나선 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사와 같이 나올 걸 그랬나? 생각하는 사이, 지하철이 다음 역에 들어선다. 헤이즈는 남자에게 눈인사를 한다.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인데 남자는 끝내 헤이즈의 눈을 피하고 만다. 헤이즈는 조금 무안한 마음이 되어서 복잡한 승강장에 내린다. 헤이즈가 일주일 전 묵었던 호텔이 있는 역이다. 역 근처에 헤이즈의 작품 하나가 상설 전시되고 있는 미술관이 있다. 헤이즈는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


*


사방의 빛.
천장이 낮아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방에 들어가면 방은 물로 가득 차 있고, 푸른 물속에 작은 알 같은 것이 떠 있다. 커다란 유리 수조로 만들어진 방 한가운데 작은 구는 사실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방의 입구로부터 반드시 네 발로 기어 들어가야 하는 비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방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벽에는 은은한 빛의 파도가 치고 있다. 스크린 속 빛의 파동은 높지도 낮지도 않다. 규칙적으로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빛 물결이 방을 가득 채운다. 성인 한 명이 기어 들어가서 웅크리고 앉으면 꼭 맞을 작은 구. 반투명한 구의 표면으로 검푸른 빛을 받은 물의 어른거림이 느껴진다. 잠든 어머니의 뱃속에서 들리던 고요. 밖으로부터의 모든 웅성거림이 갑작스럽게 그친 고요의 한가운데. 오직 커다랗게 울리는 심장소리. 쿵.쾅.쿵.쾅.


무너지는 내내 너를 생각했다.
거기 있던 너를.
마모. wear.


방 앞에 헤이즈의 자필로 적힌 작품의 제목이다.


로사는 자주 이 방에 간다. 한동안 머무른다. 거기 있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몸이 기억해 낸다. 무릎을 안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태어나기 오래전. 엄마의 뱃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기분. 쿵.쾅.쿵.쾅. 꼼짝없이.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시는 가족을 잃지 않겠다고. 혼자 늙어 가겠다고 다짐한다.


*


화진이 일하는 경찰서는 이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화진은 이 미술관 앞을 수도 없이 지나간다. 단 한 번도 이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는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온 헤이즈가 화진이 일하는 경찰서 앞을 지나간다. 미술관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어머니를 찾을 생각은 없지만 어머니의 나라에 오면 어머니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우연히 지나친다고 해도 어머니를 알아볼 수 없겠지만 지나치는 모든 여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당신을 결코 미워하지 않는다. 헤이즈는 낯선 얼굴들을 일별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말한다.


내가 헤맨 것은 온통 당신이었다.
아무것도 희미하지 않다.
희미해지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품안에 있다. 엄마가 흘리는 눈물이 내 볼에 떨어진다. 따뜻해. 나는 내가 한없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던 것을 안다. 아가, 아가,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처음 헤이즈, 하고 부르던 그 두려운 순간을 기억한다. 나를 보내기 전날 밤, 엄마는 끙끙 앓았다. 나는 엄마에게 기어간다. 나는 엄마가 거기 있으므로 엄마를 향해 간다. 꿈속에서. 나는 수없이 그 바닥을 긴다. 기어서 엄마에게 간다.


헤이즈는 정처 없이 걸으면서 계속 엄마를 생각한다. 살면서 수천 번도 더 되풀이한 그 3년의 시간을 다시 걷는다. 이 길은 헤이즈가 매일 걷는 길이다. 어느 도시에 있어도 헤이즈의 길은 비좁은 길이다. 엄마의 자궁을 향해 엉금엉금 네 발로 기어가는 길이다.


맨 처음 세상 밖에 나오던 순간을.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따뜻한 가슴에 손을 얹고 엄마의 젖을 쪽쪽 빨던 순간을. 기저귀 갈아 주는 엄마의 얼굴을 향해 오줌을 싸버렸던 미안하지만 신나는 순간을. 내가 싼 똥을 깔고 누워 찝찝함에 점점 더 큰 소리로 울어대던 순간을. 잠드는 법을 몰라 잠들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엄마의 등에 업혀, 엄마의 품에 안겨 느끼던 평화를, 모든 것이 충족되었던 순간들을 기억해. 엄마가 그 시간으로부터, 나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건 내가 결코 엄마를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그 시간 안에 있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엄마는 계속 변명했을 거야. 계속 자책했겠지. 엄마는 결코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엄마가 한순간도 평화롭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부서지게 해.


헤이즈는 천천히 걷는다. 엄마를 찾아서 엄마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나를 혼자 낳고, 젖 먹여 키우는 내내 엄마는 울었다. 어린 엄마의 두려움을 안다. 스무 살이 됐을 때 헤이즈는 깜짝 놀랐다. 아직 이렇게 어린데. 이렇게 어릴 때 엄마는 나를 낳았구나. 그때부터 헤이즈가 걷는 모든 길에 엄마가 있다. 모든 길에서. 헤이즈는 차가워진다. 차가워질 수 없다. 헤이즈는 자신을 망가뜨린다. 망가뜨릴 수 없다. 헤이즈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헤이즈는 어머니의 나라에서 수많은 엄마의 얼굴을 본다. 어디에나 있는 얼어붙은 안개. 나무를 둘러싸고 죽어 있는 투명한 흰 새의 날개들.


*


헤이즈가 낯선 골목을 헤매고 있을 때, 로사에게 문자가 온다.
어디 있어?
귀신이 되면 어떤 기분이랬지?
로사에게 전화를 걸어 헤이즈가 대뜸 묻는다.
로사가 큰 소리로 웃는다. 로사의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느껴진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차라리 진짜 귀신이 되고 싶지.
너 그래서 자꾸 쓰러지는 거 아닐까?
헤이즈가 진지하게 묻는다.
귀신이 되고 싶어서?
로사가 조금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웃는다. 더없이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극복하지 못할 고통을 겪어서 그렇대.
의사가 그러더라. 극복하지 못할 고통 때문이라고.
마치 극복하지 못할 고통을 안다는 듯이.
난 잘 모르겠는데 말이야.
헤이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로사의 고통에 대해 헤이즈는 알지 못한다. 로사가 겪은 일에 대해 헤이즈는 알지 못한다. 헤이즈가 로사에 대해 아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수없이 무너지는 무심(無心). 헤이즈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로사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허공을 유유히 헤엄치는 로사의 두 손을 처음 보았을 때, 로사와 처음 나란히 걸었을 때, 로사와 처음 마주 앉아 이야기했을 때, 알았다. 로사가 그처럼 무표정한 이유, 모든 것에 대해 냉담하게 말하는 이유, 갑작스럽게 지나치게 밝아지는 이유,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듯. 이내 곧 입을 꽉 다무는 이유, 아무것도 잘해 볼 생각 없다는 듯이 구는 이유를.
로사, 오늘은 연주 안 해? 같이 저녁 먹을까?
통화를 하며 천천히 걷는 헤이즈 옆을 화진이 지나쳐 간다. 화진이 헤이즈를 빤히 바라본다. 로사를 안고 있던 남자. 화진은 한눈에 헤이즈를 알아본다. 헤이즈와 화진의 눈이 마주친다.
그럼 춥지만 조금 걸을까?
헤이즈는 로사에게 말하면서 화진을 무심히 지나친다. 낯선 남자가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화진은 멈춰 선다. 뒤돌아 헤이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저기요, 로사를 알아요? 혹시 로사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화진은 묻고 싶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린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멈칫, 한다. 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다. 어머니다.
엄마.
화진이 전화를 받는 소리에 헤이즈가 돌아본다.
엄마.
헤이즈가 화진을 따라 작게 소리 내 본다. 화진처럼.
엄마.
하고, 어머니 나라의 말로.
화진과 헤이즈는 잠깐 다시 눈이 마주친다. 헤이즈가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


구호, 외침, 노래, 함성.
이 모든 것들을 헤이즈는 알아듣지 못한다. 거리는 일주일 전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화진은 무대 뒤편에 경찰 대열을 정리하고 있다. 저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마주 보고 싶지 않다. 마주 볼 수 없다. 무대의 검은 가벽 너머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구호가 들려온다.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자유발언대에 올라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다. 내가 지금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완전히 무감해졌다 생각했던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아무 느낌도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무겁게 움직이는 것이다. 화진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라이터를 오른손으로 꽉 쥐어 본다.


작은 불꽃들이. 무수한 불꽃의 물결들이. 불꽃을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새까만 머리들이 마치 점자 같았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의 밤. 거대한 백지 위에 조심스럽게 솟아 있는 점자들 같았다. 그들이 아무리 큰 함성을 질러도, 노래를 불러도, 구호를 외쳐도 사방은 점점 더 고요해졌어.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절실하게, 뜨겁게 느껴지던지. 그 작은 불꽃들이 모두 손끝에 만져질 것만 같았지. 그때였을 거야. 내가 이곳에 오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헤이즈가 자신의 손에 들린 흔들리는 불꽃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로사와 헤이즈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에 섞여 천천히 걷고 있다. 그들은 종각역 사거리에서 조계사 방향으로 올라가는 무리를 뒤따라 천천히 걷는다. 아주 작은 빗방울들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만. 오늘 딱 하루만. 오래전에 그렇게 생각했었어. 처음 언니를 따라갔을 때. 오늘 하루만? 일주일만? 열흘만? 그런 건 없지. 오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내일은 바로 오늘 하루 이전과 조금도 같은 게 없는데. 오늘 하루가 달라지면 모든 게 달라지는데. 어떻게 오늘 하루 가. 오늘 하루만. 있을 수 있겠어.
오늘, 조금만 더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들고 싶어.
바로 오늘. 아주 조금이라도.
이건 언니가 자주 했던 말이지.
헤이즈는 로사의 두 손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본다. 로사는 지금 악기를 가지고 있지 않고 로사의 손에는 아주 작은 불꽃뿐인데. 로사는 마치 연주를 하는 것처럼 두 손을 천천히 움직인다. 한 손으로 허공을 어루만진다. 흩뿌리는 빗방울들이 너무 소중하다는 듯이.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로사가 두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중얼거린다. 로사의 버릇이다. 연주가 시작되면 무슨 말인가 가만가만 속삭이는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사람과 사람이.


로사는 언제나 자신의 말로, 헤이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머니 나라의 말로 속삭이기 때문에 헤이즈는 그 말들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다. 그 목소리에 실린 물기만이, 바싹 말라버린 땅속 깊이 흐르고 있는 지독한 물기만이 어렴풋이 전해져 온다. 두 사람이 속한 행렬은 이제 안국동에서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얕은 오르막길을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다. 아주 낮은 경사를 지닌 내리막길이라 수없이 이 길을 지나다닌 로사도 이 길이 내리막길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저 멀리, 저 멀리. 아주 멀리. 끝을 알 수 없는 불꽃의 장대한 물결이 한눈에 들어온다. 헤이즈가 멈춰 선다. 로사가 멈춰 선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은 멈춰 선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황홀해.
헤이즈가 가까스로 말한다.
그건 수치였어. 이 나라가 내 어머니의 나라라는 수치. 내가 이 나라 사람이라는 수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수치. 끝내 외면할 수 없는 수치.
로사와 헤이즈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빛 물결 한가운데.
그런데, 끔찍하게, 아름답다.
헤이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로사가 가만히 헤이즈의 손을 잡는다.


엄마의 웃음소리를 기억해.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늘, 여기 혹시 엄마가 있지 않을까. 엄마와 비슷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이렇게 많으니까. 어쩌면 내 엄마가 여기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어쩌면 가까울 수도 있었을 사람이. 기묘하게도 말이야.
이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에 휩쓸리면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엄마의 말을 끝도 없이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느껴. 내가 엄마의 자궁 밖으로 기어 나온 것이 아니라 저 고요한 빛의 물결이 끝없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차갑게 얼어붙은 안개가 이 빛 물결 속으로 흘러나오는 거야. 거리를 가득 메운 저 빛 물결이. 저것들이 동시에 꺼지던 순간. 그리고 다시 하나, 둘 타오르던 순간들을 모두 보았어. 저 불꽃들이 나를 끌어올려. 저 멀리. 저 불꽃들이 나를 끌어당겨. 너는 기억할 거야. 모든 순간을. 너는 기억할 거야. 모든 외침을. 너는 기억할 거야. 모든 침묵을. 너는 가까이 있을 거야. 모든 순간에. 작은 불빛들이. 나를. 떠밀어.


*


얼마 만에 들어온 집인가.
화진은 식탁에 앉아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젯밤 거리의 열기는 거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완전히 지워진다. 찌개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고, 집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가지런히 널려 있는 빨래들. 아내가 밥공기에 그에게 줄 밥을 담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새하얀 쌀밥에서 갓 지은 밥 냄새가 모락모락 오른다. 그는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평화롭다고 느낀다. 로사와 로사의 연주는 아주 멀리 있다. 꿈인 듯 들려오는 그 소리는.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따금 생각이 날 것이다. 꿈속에서 허공을 더듬는 두 손, 허공을 어루만지는 두 손, 허공을 가로지르는 두 손은.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에 아주 가끔 나타나 은밀한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의 삶에서 가장 강렬했던 그 일주일처럼. 곧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또다시 나타나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휘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화진은 아내의 뒷모습을 한없이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현관 앞에 놓여 있는 빈 화분을 바라본다. 흙 속에 마구잡이로 꽂혀 있는 양초들을 바라본다. 타다 남은 길이가 모두 다른 양초들.
화진은 기묘하고 따뜻한 안정감을 느낀다. 아내는 내내 아주 가까이 있었구나.
모두 몇 그루일까. 곧 숲을 이루겠구나.
무심코 생각한다. 자신의 실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아내에게 다가가 막 밥통의 뚜껑을 닫고 있는 아내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당신도 들었지? 그 연주.
아내가 밥공기를 한 손에 들고 화진의 품에 안겨 말한다.
로사?
화진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큰 소리로 로사의 이름을 말할 뻔한다.
아름답더라.
아내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묻어 있다.
화진은 문득 아내의 입을 꽉 물고 싶어진다. 아내를 좀 더 꽉 물고 놓아 주고 싶지 않다. 아내와 한 몸이 되고 싶다.
모든 것이 지속되고 있어. 너무 피곤해.
아내를 돌려 세운다. 아내를 좀 더 세게 끌어안는다. 아내의 젖가슴이 그의 배에 부드럽게 닿는다. 그의 가슴에 아내의 얼굴이 묻힌다.
화진은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다. 한동안 꿈 없는 잠을 자리라.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은. 화진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를 이끌고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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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 윤해서

-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소설 「최초의 자살」이 당선되어 등단.


《문장웹진 2017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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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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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Lk93

    바로 오늘,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은...

    • 2017-02-03 13:25:41
    Lk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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