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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 연대기

  • 작성일 2016-10-01
  • 조회수 3,569


[단편소설]



나이트클럽 연대기



송지현



j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 전날이었다. j와 친구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손에 쥔 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를 정하는 누군가가 그 후의 시간을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해야 할 많은 선택들과 그 책임들에 지쳐있었다. 그런 것들이 자꾸만 많아진다고, 저녁 식사 내내 그들은 이야기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들어선 곳은 나이트클럽이었다. 웨이터가 친구의 팔목을 잡아끌었고,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그만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거절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상황들, 그런 것들도 자꾸만 많아진다고 j는 생각했다.
넓은 홀엔 j의 친구들과 웨이터 몇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홀은 추웠고 옛날 가요가 나왔다. 친구 중 하나가 그냥 나가자며 일어설 때, 과일 안주를 들고 오던 웨이터가 황급히 j의 손을 붙잡았다. 웨이터는 40대 중반정도 돼보였다. 그는 아직 이른 시간이므로 자정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사정하고는, 서비스로 마른안주를 주겠다고 했다. j는 친구들을 쳐다봤다. 친구들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j는 물수건으로 끈적끈적한 테이블을 몇 번 닦았다. 친구들은 시끄러운 음악 때문에 소리를 질러가며 대화하다 지쳐 소파에 널브러진 채 오징어를 씹고 있었다. 몇몇 손님들이 입구까지 들어왔다가 휑한 홀을 보곤 도로 나가기를 반복했다. j는 이모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전날 저녁이었다.
캘리포니아는 여전히 건조하다. 생일 축하한다.
캘리포니아와의 시차까지 고려하면 메시지는 이틀이나 먼저 도착한 셈이었다.


*


j는 10살까지 엄마와 살다가 엄마가 죽은 뒤로는 이모와 살았다. 이모가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었으므로 외할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셋이 살았다. 이모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았고, j가 알기로는 연애도 하지 않았다. 이모는 j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자신의 소유였던 다세대 빌라를 팔고 캘리포니아로 갔다. j의 엄마와 이모는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편이었다. j는 이모가 교복을 입은 채 자신을 안고 있는 사진을 앨범에서 발견한 적도 있었다. j의 엄마는 j가 10살 때 죽었다. 엄마는 예뻤고, 노래를 잘했고, j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j는 그 모든 것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엄마가 남자들을 데려와 아빠라고 부르라 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게 효과가 없을 때는, 술 냄새를 풍기며 j를 껴안고 울던 순간을, 그리고 뒤이어 까르르 웃으며 자빠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 좀 나아지곤 했다.
이모와 j는 잘 맞는 편이었다. j는 이모와 살면서 딱 두 번 싸웠는데, 한 번은 j가 강아지를 키우자고 졸랐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고양이를 키우자고 졸랐을 때였다. 반면 할아버지와 j는 잘 맞는 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j를 보자마자 족보를 외우게 했고, 붓글씨와 다도를 가르쳤는데, 할아버지도 딱히 남을 가르칠만한 실력은 아니었으므로, 결국엔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엄마보다 8년을 더 살았고, 죽기 1년 전에는 거동을 못하고 방에 누워만 있었다.
딱히 j가 할아버지를 사랑해서는 아니었고, 그저 이모의 일을 덜고자 할아버지를 간병하겠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말했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기저귀는 j에게 맡길 수 없다.
이모는 간병인을 고용했다. 간병인 40대의 말이 별로 없는 여자로, j가 등교할 때 왔다가 하교하는 것을 보고는 퇴근했다. 간병인이 할아버지의 기저귀를 가는 것을 문틈으로 본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양손을 다소곳이 모아 성기위에 올려둔 채, 간병인의 말에 잘 따랐다. 고분고분한 할아버지는 이상했고, 할아버지의 나무 껍질같은 알몸보다 그 고분고분한 모습이 더 보기가 싫어서, j는 간병인이 있을 때는 일부러라도 할아버지의 방 쪽은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 번은 j가 두통에 시달리다 일찍 하교한 적이 있었다. 집 안에 낯선 남자가 있었다. 남자도 간병인도 다소 민망해했고, 간병인은 그가 자신의 남자친구라고 소개했다. 그 말은 굉장히 어색하게 들렸다. 아마 간병인이 자신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남자친구라는 단어는 꼭 유아용 언어 같으니까, 그리고 마치 이모에게 남자친구를 소개받는 기분이야, 하고 j는 생각했다.


*


j는 생일인 오늘까지 네 번의 길고 짧은 연애를 쉬지 않고 했으며, 다섯 명의 남자와 잤다. 기억할만한 연애도 있었고, 아무런 추억도 남지 않은 연애도 있었다. 그 중 나이트클럽과 관련이 있던 것은 단 한 번이었다.
친구 하나가 웨이터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j는 보았다. 나이트클럽에 입장할 때처럼 친구는 애매한 표정이었다.


*


j가 처음 나이트클럽에 간 것은 스무 살 때였다. 그것은 j가 스무 살이 되어 한 모든 일 중, 가장 스무 살이 할 만한 것이었다. j는 학창시절 내내 자신이 나이트클럽과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특별활동 교사였던 p의 영향도 있었다. j가 고등학생일 때 전국적으로 특별활동 수업을 시행하는 붐이 일었다. 전교생이 어떤 과목이라도 정해 시간을 때워야하는 수업이었다. 간혹 특별활동의 경험을 통해 진로를 결정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j는 아니었다. j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걸 좋아했다. 그것은 j가 쉬지 않고 연애에 몰입할 것임을 예견할만한 작은 징조이기도 했다.
j는 딱히 준비할 게 없는 전시회 감상반에 들었다. 주말마다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담당교사인 p는 작고 무기력한 여자로, 한 학기 동안 j의 학교에 근무했다. p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고, 그건 j가 p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p는 그저 한 달에 한 번 어떤 전시회를 볼지 정하고, 전시회장 입구에서 아이들의 출석을 부른 뒤, 흩어지게 했다.
j는 그녀가 강사를 그만 둔 뒤에도 종종 p에게 연락해서 함께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했다. p는 j에게 자신은 나이트클럽에 딱 한 번 가보았고, 낯선 사람과 밀착되는 것도, 시끄러운 것도, 불쾌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를 만나고 온 날이면 j는 그녀의 말투나 행동을 곱씹었고 그녀가 경험한 세상이 자신의 세상이 되길 바랐다.
p는 실연할 때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첫 번째 연애가 끝났을 때 그 말이 생각난 j는 미술관에 가보았다. 그곳엔 j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즐비했고 생각보다 심심했으므로 그 뒤로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p의 실연의 방식을 따를 수 없는 것처럼 나이트클럽도 마찬가지였다. j는 친구 쥰의 설득에 이끌려 나이트클럽에 갔고, 생각보다 즐거웠고, 한동안은 주말마다 가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j는, p의 세상이 자신의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 첫 번째 연애를 하게 되면서 p에 대한 j의 마음이 연애감정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연애가 끝나면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는 것도. p를 통해, 자신은 영원히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j는 알게 되었다.


*


웨이터의 손에 잡혀갔던 친구가 돌아왔다. 친구는 씩씩대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 웨이터는 왜 자꾸 저자세로 말하냐? 거절도 못하게.
친구가 간 곳은 2층에 위치한 룸이라고 했다. 문을 열었는데 만취한 중년남자들이 앉아있었고, 친구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몸을 돌려 나오려는 찰나, 웨이터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십분만 앉아 있다가 나오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다. 친구는 다시 들어가서 앉았고, 남자들은 회식중이라고 했다. 친구는 그들과 트로트 메들리를 불렀다고 했다.
-우리 부장님이랑 나이트 온 것 같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친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나이트클럽은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한 몇 안 남은 장소였다. 처음 나이트클럽 온 날은 j가 처음 흡연을 한 날이었다. 그 때문인지 조금 어지러웠고, 가득 찬 사람들과, 열기, 안개처럼 가득한 연기를 뚫으려 노력하는 레이저 불빛들과 높은 구두로 인해 발등에 잡힌 물집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j가 느낀 나이트클럽의 첫인상이었다. j를 나이트클럽에 데려온 것은 고등학교 친구인 쥰이었다. 쥰은 j의 지인 중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별활동 수업으로 진로를 정한 케이스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 때문에 쥰을 만나면 j가 뭔가를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별로 없었고, 그게 편해서 j는 쥰을 자주 만났다. 다만 j가 원하지 않는 일이더라도 쥰이 하고 싶다고 정하면 그건 꼭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날의 흡연도 그런 것이었다. 쥰은 마치 산파처럼 j의 호흡을 이끌었다.
j와 쥰은 즐겁게 놀았고, 아마 그때가 일생에서 가장 많은 수의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밤이었을 거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그들은 남자 일행을 골라 빠져나왔다. 남자들은 j와 쥰과 동갑이었고, 테이블비를 대신 내주겠다고 했다. 나이트클럽의 출구에서 동갑내기 남자애들을 기다리며 j는 이곳에 오는 것은 마지막일 것이라고 예감했지만, 그것은 j의 많은 예감들처럼 역시나 틀리고 말았다. 특히 자신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나이트클럽에서 맞게 되리라는 것을, j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j와 쥰은 함께 나온 남자애들과 술을 더 마시다가, 몇 개의 술자리 게임을 했고, 이제야말로 진짜 집에 가야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남자애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는 j와 쥰을 바라보았고, 둘은 약간 취한 채로 새벽의 거리를 걸어 귀가했다.
쥰은 나이트클럽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고, 한 동안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그날 저녁엔 꼭 나이트클럽에 데려갔다. 그 사이 j에게 첫 번째 남자친구가 생겨서 j는 그에게 몇 번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


j의 첫 번째 연애는 j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것이었다. j는 자신 안에 그렇게 많은 분노와 불안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j의 연인은 아주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들을 잘 참아내는 편이었다. 그와 j는 서로에게 첫 연인이었고, 결혼을 제외하고는 연인들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했다. 둘은 4년 정도를 만나다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j가 느낀 가장 큰 감정은 슬픔보다는 안도감이었다. 자신의 분노와 불안을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j와 그는 헤어지고 나서도 서로의 생일엔 꼭 안부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다른 연애를 하면서도 그와의 기억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 자신과 현재의 남자친구와 그까지, 세 명이서 연애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 기분이 사라진 것은 그가 j의 생일을 잊고 지나간 때였다. 며칠 뒤 그는
-깜빡 잊었어. 와, 잊는 날이 오기도 하는구나.
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감탄사만 없었어도 기분이 이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고, 그 뒤로 j와 그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제야 j의 연애는 온전히 둘이 하는 것으로 변했다. 그래도 가끔 j는 그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j는 자신의 먹먹한 기분을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겨두곤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여러 도메인들이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그러는 사이 그의 기록은 꼭 어디엔가 남아, j가 그의 삶을 유추할 수 있게 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하는 공책들처럼.
j의 두 번째 연애는 첫 번째보다는 무미건조한 종류의 것이었다. SUV를 타고 다니는 남자였고, 그와 헤어지고서 j는 그 브랜드의 SUV를 뒷모습만 보고도 정확히 구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세 번째 연애에서의 데이트 장소는 주로 PC방이었고, j는 그에게서, 게임을 하며 현실의 시간을 빨리 흘려보내는 법을 배웠다.


*


할아버지는 j가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죽었다. 장례식장엔 할아버지를 직접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모의 회사 동료들만 가득했다. 이모와 j는 상주휴게실에 누워 가장 작은 곳을 예약하길 잘했다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병인과 간병인의 남자친구도 장례식장에 있었다. j는 발인식에서 간병인의 남자친구가 조금 우는 것을 보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j는 집안에 있던 가구가 하나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모는 거침없이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는 청소를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누워있던 자리에 늘 깔려있던 이불이 치워지자 방이 훨씬 넓어보였다. 이모는 이불보를 벗겨내어 세탁바구니에 담고, 걸레를 빨아와 방을 훔쳤다. j도 이모를 도와 서랍에 있던 할아버지의 물건들을 꺼내어 정리했다. 곰팡이가 슨 족보와 화선지 뭉텅이들이 나왔다. 한참을 무릎을 꿇은 채 방을 닦던 이모가
-어, 여기에 뭔가 있다.
하고 말했다. 이모는 손으로 장판을 꾹꾹 누르며 j에게도 만져보라고 했다. 이모와 j는 장판을 들춰보았다. 장판에서 나온 것은 지폐 몇 장과 비닐백에 든 푸른색의 알약이었다. 지폐들은 할아버지가 원할 때마다 이모가 준 용돈으로 추정되었다.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자꾸 용돈을 달라고 했다고, 이모는 말했다. 장판에 흩어진 돈을 모두 모아보니 십삼만이천원 정도 되었고, 알약의 정체는 통 알 수가 없었다. 이모와 j는 그 돈으로 외식을 했다. 캘리포니아롤이었고, 이모는 감탄했다. 이모는 그 뒤로도 종종 외식 메뉴로 캘리포니아롤을 선택했다.


*


j가 나이트클럽에서 보낸 많은 밤들 중엔, 크리스마스이브도 있었다. 당시 j는 짧은 두 번의 연애를 막 끝낸 뒤라 연말까지 아무 약속이 없는 상태였다. 마침 쥰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1월에 자신이 호주로 떠나기 때문에 어쩌면 친구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크리스마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나이트클럽 지붕이 열린대. 오늘 살짝 눈이 온 댔는데, 지붕 열리면 멋있지 않겠어?
테이블비는 비쌌고, 사람이 많을 것도 뻔했지만, 딱히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할 만한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고, 또 지붕이 열리는 것도 조금 궁금했으므로, 모두 쥰의 의견에 따랐다. 낡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 거대한 문을 열었을 때, 웨이터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딘가로 무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언니들, 자리가 다 찼대. 잠깐 메뚜기 해도 괜찮아?
쥰은 거침없이 알겠다고 했고, 웨이터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붐비는 홀의 뒤편을 지나, 작은 통로를 지나, 아주머니들이 과일을 깎는 주방을 지나, 또 다시 좁은 복도를 지나, <아리랑>이라고 쓰인 공간이었다. 가로로 긴 테이블이 네 개정도 있었고, 테이블 위엔 모두 비닐로 된 테이블보가 깔려있었다. 젊은 웨이터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여기 우리 직원식당인데, 잠깐 앉아있어. 자리 금방 날 거야. 좋은 데로 줄게. 자, 가방은 나한테 주고. 웨이터 보내서 부킹도 금방 해줄테니까 거기 가서 자기 자리처럼 놀고 있어.
웨이터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쿵쿵대는 비트가 작아졌다. 아니 비트가 작아지다 못해 사방이 적막해졌다. 그제야 그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방구석에 달린 작은 티비에서 나오는 드라마 대사가 들렸고, 얼음제조기에서는 얼음이 후두둑 떨어졌다. 떨어지는 얼음의 소리는 꽤나 무심한 것이었다. 주방 담당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j의 옆에 앉았다.
-아가씨들, 과일 깎아줄까, 응?
j가 대답도 하기 전에, 아주머니는 사과며 바나나며 이것저것 깎아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주었다. 그리고는 j의 일행에게, 아주 예쁠 나이라고 했다. 과일을 많이 먹으라고도 하더니, j의 입에 사과를 하나 넣어주고는 곧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단 한 편으로 모든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여자주인공은 오래 만났다 헤어진 전 남자와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고, 여자주인공의 어머니는 불륜을 저지르는 중이었다. 아주머니는 드라마에서 고용한 방청객처럼 호응하더니, 누군가 부르자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아리랑>에 들어오는 웨이터는 없었다. 사과의 표면이 말라붙어 갈색이 될 때까지도 j의 일행은 그곳에 앉아있었다. 문득문득 얼음제조기에서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랄 뿐, 매우 고요했다. 자리도 나지 않는 것 같았고, 아마 j의 일행을 잊은 것 같았고, 당연히 부킹 또한 하지 못했다. 눈이 온다더니 비가 와서 지붕도 열리지 않았다. j가 잠깐 졸고 일어났을 때 <아리랑>에는 웨이터들이 바글바글했다. 모두가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j의 일행을 알아본 웨이터가 미안하다고 하며 식판을 들려주었다. 아침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메뉴는 제육볶음과 된장찌개였다. 속눈썹을 붙인 여자 웨이터 하나가, 아, 이모 좀 더 주세요, 했고, 과일을 깎아주었던 아주머니가, 허구한 날 다 남기면서 뭘, 이라고 대꾸했다.
집에 가는 길에는 빗물 때문에 싸구려 구두가 다 젖었다. 과일도 먹고 아침밥도 많이 먹어서 배가 불렀고, 술에 취하지 않아서 매우 추운 귀가였다. 로터리에 놓인 커다란 트리에 전구가 둘둘 감겨있었다.


*


할아버지의 유품이었던 푸른 알약이 비아그라였다는 것을 j는 후에 알게 되었다. 쓸 일이 없던 용돈과 마찬가지로, 쓸 일이 없는 약이었다. 그러나 용도와 관계없이, 할아버지가 그것을 어디에서 구했는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j는 이모에게 간병인의 남자친구가 종종 왔었다고, 혹시 그가 준 것은 아닐까, 하고 말했다. 이모는 갸웃하며, 그가 그것을 주었다고 한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대소변도 못 가리는 남자에게 비아그라를 주었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j는 그날 밤 엄마와 할아버지가 그 푸른 알약을 나누어 먹는 꿈을 꾸었다.
-j야, 너도 와서 먹어라.
꿈속의 엄마가 말했고, 그것 때문에 할아버지와 또 싸웠다.
-엄마, 그거 비아그란 거 다 알아.
-j 나이에는 안 먹어도 되나?
j는 꿈에서 깨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엄마와 할아버지가 매우 닮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모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이십대 초반의 일이다. 길을 걷다 낯이 익은 여자애를 만난 거야. 그 여자애도 날 알아봐서 서로 반갑게 인사했지만, 어디서 만났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어. 한참 동안 손을 잡고 방방뛰다가 결국엔 그 여자애도 나도 묻게 된 거야.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더라, 하고. 우린 빵집에 가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린 동창도 아니었고, 동네 친구도 아니었고, 회사에서 만난 사이도 아니었지. 결국 알아내지 못하고 우린 연락처만 주고 받은 뒤에 헤어졌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난 거야.
이 이야기는 j가 나이트클럽에 간다고 한 밤마다 반복되었으므로, j는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모는 꼭 한 박자 쉬며 중대한 비밀을 말하듯 j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만난 곳은 락카페였다. 밤새 신나게 춤추며 남자애들의 무릎에 앉아서 논 사이였던 거야. 난 다시는 그 여자애와 연락하지 않았어. 그 뒤로 내가 락카페에 간 일도 없고.
그렇다고 이모가 나이트클럽에 가는 j를 나무란 적은 없었다. 심지어 가끔은 용돈을 얹어주기도 했다. 이모가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나서도 친구들과 밤늦게 놀러갈 때마다 j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이모와 할아버지는 참 닮은 구석이 없었다.


*


자정이 지나 친구들은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음악소리 때문에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박수를 치기에 j도 따라서 박수를 쳤는데 알고 보니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웨이터가 테이블로 와서 친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고,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자 DJ 부스에서 생일축하 노래가 흘러나왔다. 돌잔치나 술집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싸구려 편곡의 생일노래였다. 홀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음악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고, j는 부끄러워서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j의 무리처럼 끌려 들어온 여자애들 몇몇이 소파에 기대고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j는 입안으로 하품을 삼켰다. 정말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j는 네 번째이자 가장 최근까지 만난 남자친구와 밤새 번갈아 운전하며 여행을 떠났던, 졸음을 참기 힘들었던 밤을 떠올렸다. 여행지는 서울에서 다섯 시간이 넘는 거리였고, 둘 다 퇴근 후에 바로 떠난 길이라 피곤이 몰려왔고, 깜빡깜빡 졸았다. 반대편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비칠 때마다 둘은 가라앉는 의식을 끌어당겼다.
남자와 j는 졸음을 쫓기 위해 시끄러운 음악을 틀거나 간단한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둘은 결국 잠을 깨기 위한 제일 좋은 것이 대화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얘깃거리는 금방 동이났고, 그렇게 해서 최초의 기억부터 현재까지, 인상 깊게 남았던 인생의 사건을 말하기로 했다. 남자는 자신의 첫 기억은 사촌형이 만두를 먹다가 토하던 장면이라고 했다. 토한 만두가 손이며 옷에 다 묻었고 형은 그걸 문에 바르며 울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이상한 광경이며 자신은 형에게 귀신이 씌었던 것은 아닐까, 아직도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j는 형이 그날 왜 만두를 먹었고, 또 왜 토하며 울었냐고 물었고, 그는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j에게 남아있는 최초의 기억은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멀리 떠난 첫 경험이었고, 그날따라 엄마가 다정해서 기분이 좋았다. 봄이었고, 기차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이 따뜻했노라고 j는 그에게 말해주었다. 막상 할아버지와 엄마가 만났을 때 좀 싸우긴 했지만, 그래도 j 자신에게는 잘 대해주었다고, 할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봉지과자며 사탕을 많이 사두었다는 것도 기억한다고 했다.
남자가 자신의 첫 자위에 대한 기억을 말할 쯤에, j는 엄마가 늘 술에 취해있던 일들과 만나던 남자들에게 아빠라고 불러보라고 했다는 얘기를 꺼냈고 남자는 한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그가 말했다.
-그런 종류의 얘기들은 듣고 싶지 않아.
왜냐고 j는 묻지 않았다.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알콜과 도박문제가 있었다고 얘기했을 때, j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동이 틀 무렵에야 둘은 숙소에 도착했고, 겨우 안도하며 짧은 잠을 청했다. 자는 동안 j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아서 몇 번을 소스라치며 깨었다.
둘이 정한 여행지는 p가 사는 곳과 가까웠다. p는 한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출산과, 또 한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고, 지방에 내려가 살고 있었다. p에게 미리 일정을 말해두었는데, 마침 p에게서 연락이 와 그날 점심에 얼굴을 보기로 했다. j가 p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j가 p의 아이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넷은 p의 단골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갈치조림 전문집이었다. 갈치에는 뼈가 많아서 j가 조금 집어먹다 그만 두었고, j의 남자친구가 큼직하게 바른 살을 j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p의 아이는 p와 닮은 구석이 없어보였다. 아이는 쾌활했고, 시종 힘이 넘쳤고, 궁금한 게 아주 많았다. 아이는 j의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둘이는 결혼했어요?
-아니.
-결혼도 안 했는데 왜 같이 여행을 와요?
-친구끼리는 원래 같이 여행하는 거야.
-남자랑 여자가 어떻게 친구야.
-크면 다 친구야.
p는 아이에게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나른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뛰면 안 돼, 라고 주의를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 그들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p의 아이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고, p는 아직 추워서 안 된다고 답했지만, 아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럼 십분 정도 발만 담그고 나오기로 약속하자고 p가 말했고, 아이는 십 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냐고 되물었고, p는 j의 커플에게 바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때 j의 남자친구가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다녀올테니 둘은 카페에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친구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고 아이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j는 남자친구가 아이를 내려놓고 손을 잡은 채 나란히 바다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j는 p에게 우리도 그냥 같이 바다로 갈까요, 하고 물었다. p는 자신은 좀 더 카페에 앉아있겠다고 말했다. 요즘은 커피 한 잔 느긋하게 마실 시간이 없어, 라고도 덧붙였다. j는 그럼 자신은 저 둘을 따라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바다를 향해 걸었다. 까끌거리는 모래가 신발 안으로 들어와 발걸음이 자꾸 지체되었다. j가 문득 뒤돌아서 p를 봤을 때, 그녀는 j에게는 익숙한 무기력하고 나른한 자세로 앉아 j를 보고 있었다. j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후에 그 네 번째 남자친구는 j에게 말했다.
-사촌형들과 얘기해봤는데, 그날 토한 건 사촌형이 아니라 나였대. 큰아버지 부부와 나의 부모님이, 우리만 놔두고 잠시 어딘가 다녀온 날이었대. 그날 저녁으로 우리는 만두를 먹었대. 사촌형들과 나는 TV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고, 내가 그걸 너무 재밌게 보길래 형들은 몰래 방에 숨었대. 한참 TV를 보던 내가 형들을 찾았고, 형들은 방문을 안 열어주며 자기들끼리 방안에서 웃었는데,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 내가 울었고, 너무 울어서 만두를 다 토했대. 참, 어떻게 이 기억을 다른 사람의 것처럼 3인칭으로 기억할 수가 있지?


*


호주에서 잠시 돌아왔을 때 쥰은 역시나 나이트클럽에 가야한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으로 쥰과 함께 한 나이트클럽의 경험이었다. 그날은 뭔가 뻔했고, 지겨웠고, 즐겁지도 않았다. 쥰은 이제는 나이트 대신 다른 것을 찾아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것이 어떤 거냐고 쥰에게 물었고, 쥰은 나이트클럽과 비슷한 다른 것들이 곧 생겨날 거라고 답했다. j는 또 쥰에게, 그럼 우리는 나이트클럽의 어떤 점이 좋았던 걸까, 하고 물었다. 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는 나한테 노력하는 사람이랑 노는 게 즐거워. 진심이 들어있지 않더라도 칭찬받는 게 좋고. 그런데 여기 있는 애들은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칭찬해주고 노력하잖아. 우린 그럼 그 칭찬과 노력만 즐기다 가면 되는 거지. 나는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이런 곳에서 만난 애랑은 잠도 안 자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건 나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야.
이런 곳, 하고 j는 곱씹어보았고, 나이트클럽에서 어떤 남자애를 따라나섰던 일을 떠올렸다. j보다 한 살 어린 공대생이었는데, 그는 j를 보더니 매력적이라고 했고,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은 처음이었고, 기분이 좋아졌으므로 함께 밤을 보냈다. j는 다음날 쥰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쥰은 흥미로워하며 깔깔 웃었다. 어땠냐고도 집요하게 물었다. 그래서 j도 웃었고, 그날 밤을 상세하게 그려주었는데, 또 그런 것들은 사실 별 것 아닌 것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 이야기를 쥰에게 한 것이 자신의 치부를,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일을, 스스로 고백해 버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고만 것이다. 그러자 p가 떠올랐다. 그녀의 무기력함은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고, 문득 이제는 구두를 신어도 물집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새벽 한시가 될 때까지 홀은 텅텅 비어있었다. 이 나이트클럽에 사람이 가득찰 수 있다는 것이, 가득찬 적이 있다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j는 화장실에 갔다가 옆 칸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엄마, 라고 하는 것도 같았고 오빠, 라고 하는 것도 같았다. j는 여자애가 통화를 마칠 때까지 변기에 앉아 있다가 물을 내렸다. 여자애는 j가 나오고 나서도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j는 세면대에서 아주 느리게 손을 씻었고, 그러는 사이 여자애가 나왔다. 여자애에게 괜찮냐고 묻고 싶었는데, 공연한 일인가 싶었고, 여자애는 빨개진 눈을 잽싸게 화장으로 가리더니 서둘러 홀로 나갔다.
j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90년대에 유행하던 발라드가 나오고 있었다. 친구들은 요즘 90년대의 음악이 대세라는 둥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만 나가자고 했다. 웨이터가 가방을 가져다주었고, 허리를 깊게 숙여 배웅을 했으며, j의 일행은 먼저 나갔고 계산을 한 건 j였다. j는 서둘러 여자애가 앉은 테이블을 찾아보았다. 다행인지, 여자애는 친구의 어깨를 투닥거리며 웃고 있었다.
j의 일행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다시 거리를 헤맸다. j는 만두를 파는 트럭을 발견했고, 그것을 사먹자고 말했으며, 말하면서 이 정도의 선택을 주장하는 것은 괜찮겠지, 심하게 맛이 없는 만두라고해도 고작 삼천원이니까, 라고 생각했다. 친구 하나가 만두를 입에 넣다가 소리쳤다.
-나이트클럽의 흥망사를 목격한 기분이라고!
친구가 만두소를 튀기며 말한 탓에 모두 웃었다. 이모에게서 또 다른 메시지가 와있었다. 날짜를 착각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j는 캘리포니아의 해변을 걷는 이모를 상상했다. 캘리포니아의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빨래를 널고, 건조한 기후 덕에 빳빳해진 빨래를 걷는 이모를 생각했다. 생각하다보니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캘리포니아에 캘리포니아롤을 팔까. 3인칭 기억, 그것이 j가 이번 연애를 마치며 배운 것이었다.
이모가 보낸 메시지에는 사진 하나가 첨부되어있었고 j는 그것을 누르는 찰나에 29년이 지나간 느낌을 받았다. j는 앞으로의 모든 삶이 이렇게 지나치리라 예감했다. 그런 것은 언제나 틀렸지만.










송지현 소설가
작가소개 / 송지현 (소설가)

-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현)조울증환우회 ((구) 역류성식도염환우회) 회원.


《문장웹진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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