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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톨게이트

  • 작성일 2016-06-01
  • 조회수 2,250

[단편소설]



톨게이트



김종옥



교육생 원부를 꽂아 넣고, 운전학원 사무실을 나왔다. 아주 잠시였지만 실내의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밖으로 나온 탓인지,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습하고 무더운 공기며 따가운 햇볕 등이 새삼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여름의 한복판이었다. 파란색 셔츠 유니폼 차림의 운전강사들은 그늘이 드리워진 건물 입구에 모여 서서 차가운 캔 음료수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수강생들도 햇볕이 들지 않는 자리에 서서 교육을 기다리고 있었고, 교육을 마친 수강생들은 이마 위에 얇은 책이나 접은 신문 등을 대고 빠른 걸음으로 학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직사광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운전연습장 이곳저곳에 버려진 듯 놓여 있는 연습용 노란 자동차들과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은 운전학원 뒤편에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것 같은데, 나무 잎사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나뭇잎은 아주 약한 바람에도 자신의 몸을 실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끊임없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잎새들을 비볐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위로를 건네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괜찮아, 이미 그건 지나간 일이야, 그래, 알아. 나무들은 미소를 띠고,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기억은 잘못되었다. 나는 그해 여름 내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새 소리를 들었을 리가 없다. 운전학원 뒤편에 나무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자주 그 나무들을 바라본 것도 맞다. 하지만 분명 그때 내 귀에 들리고 있었던 것은, 그 여름 한창 유행하고 있던 신인그룹의 댄스음악이었다.
별 대단한 그룹은 아니었다. 10대를 겨냥한 전형적인 남녀 혼성그룹으로 뚜렷한 음악적 경향도 없고, 음악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타이틀곡은 댄스곡이지만, 앨범에는 느린 발라드도 몇 곡 포함되어 있다. 1집을 내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2집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앨범을 사곤 한다. 노래 대부분이 터무니없이 발랄하거나 감미로워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세상은 어쩌면 굉장히 행복한 곳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해서 나는 거리의 음반매장에서 테이프를 산다. 대개는 타이틀곡을 제외하면 들을 만한 게 없다. 몇 번 워크맨에 꽂아서 듣다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카세트 수납장에 버려졌다가, 결국 기억에서도 멀어진다.
나는 중학교 친구의 집에서 이들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어째서 내가 그날 그 친구의 집에 가게 됐는지, 그 전후사정은 잘 기억할 수가 없다. 이른 아침 우리는 나란히 바닥에 누워서 케이블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한동안 입시준비를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뒤부터 광고 촬영의 조명 보조부터 시작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카드 영업, 우유 배달 일을 차례차례 하다가, 결국 동네에서 비디오 가게를 차렸다. 당시는 카드 영업을 그만두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음악채널에서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왔다. 여름의 해변 가를 배경으로 젊은 남녀들이 즐거운 듯이 뛰어놀고 있다. 바다는 짙은 남색으로 출렁거리고, 백사장은 눈부시게 하얗다. 나는 다음날 그 그룹의 테이프를 샀다. 음반 매장을 나오자마자 비닐 껍질을 벗기고 테이프를 워크맨에 끼워 넣었다.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귀에는 시끄러운 그들의 댄스음악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름이 끝날 때까지, 그 테이프를 워크맨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 테이프만은 일주일 만에 버려지는 운명을 피했다. 어째서였을까? 나는 아직도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가끔씩 그들의 노래가 몹시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 여름 내가 다니던 운전학원 뒤편의 나무들이 떠오른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의 나도 나무 타기에 참 소질이 없었다.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카메라를 세로로 세워 찍은 그 사진은 커다란 나무를 한 프레임에 가득 담고 있다. 사진의 위편에는 굵은 나뭇가지에 두 명의 어린아이가 제각기 의기양양한 포즈로 올라서 있는 데 반해, 아래편으로 한 명의 어린아이가 지면에 발을 디딘 채 서 있다. 그 아이는 한 손으로 나무를 붙들고 있었는데, 나무를 한 컷에 다 담기 위해 조금 멀리서 찍었기 때문에 얼굴의 표정 같은 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막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게 나였다. 사진의 정확한 배경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몇 살 때였는지, 그게 어디였는지, 누가 찍었는지, 그리고 나무에 올라가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그래도 사진을 보는 순간, 마치 방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사진 속의 아이, 바로 몇 십 년 전의 나였던 그 아이의 심정만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아무도 그 아이를 나무 위로 올려 주지 않았을까?


그해 여름 내가 다니던 운전학원은 집에서 멀었다. 전철로만 한 시간 정도 걸렸고, 그것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택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곳이 내 대학 동기 중 한 명의 아버님이 경영하는 학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등록하러 가던 날, 직접 그 친구가 학원까지 따라와서, 정확하지 않지만, 수강료를 십만 원 가까이 할인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학원이 ‘경찰청 지정 학원’이기 때문이었다. 지정 학원의 경우 수강료가 비쌌지만, 학원 내에 시험장을 자체적으로 운영해서 면허를 취득하는 전 과정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합격률이 높았다. 그런데 지정 학원이, 말 그대로, ‘지정’을 받으려면 학원의 규모가 일반 학원의 두 배는 돼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정 학원은 땅값이 상대적으로 싼 시 외곽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만일 지정 학원을 다니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집에서 먼 것쯤은 각오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면, 나는 오히려 멀기 때문에 그곳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전철보다 삼십 분이나 더 걸리는 버스를 이용했다. 나는 버스 타기를 좋아했다. 창밖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그냥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는 것도 좋다. 그렇다고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히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움직이는 이동일 뿐이다. 목적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개는 전철을 이용하지만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도 간혹 버스를 이용할 때가 있었다. 나는 정문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내려오다, 전철역과 버스정류장이 갈라지는 길목에 멈춰 선다.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거나 거리가 보고 싶어지면,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꺾었다. 정류장 앞 조그만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한 캔 사서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한다. 맥주를 다 마실 때까지 버스를 타는 법은 없었다. 몇 대의 버스를 보내고, 맥주의 빈 깡통을 손으로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버린다. 밤의 버스는 내부가 항상 어두워서 꼭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광화문에서 내렸다. 그때쯤 해서는 혼자 마신 맥주 한 캔의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오른다. 광화문 버스정류장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안내 표지판에 쓰인, 내가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수많은 버스의 번호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고는 했다.
나는 그 광화문 사거리의 버스정류장에 대한 얘기를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그건 내가 여자와 멀리 떨어져 다른 도시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곳도 참 아름다운 도시지만, 나는 자주 그 광화문 사거리에서 바라보던 밤의 풍경들이 떠오른다. 돌아가면, 꼭 너를 데리고 그 정류장에 가고 싶다. 이렇게 썼다. 그녀의 답장에는 그 대답이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약속을 한 건 나였다. 약속을 잊어버린 것도 나였다. 내가 우연히 다시 그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을 때, 그제야 그 약속을 기억해 냈다.


내가 운전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건 대학의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후인 7월 말경이었다. 여름방학에 나는 운전학원 말고도 영어와 일어학원에 등록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나는 그 여름을 부지런하게 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곧잘 집이 가까운 운전학원 사장 아들 녀석을 불러내 동네에서 술을 마셨고, 다음날 눈을 뜨면 오전 열 시가 훌쩍 지나 있기 일쑤였다. 그러면 운전학원은 고사하고, 오후의 영어와 일어학원도 가지 않고 집에 박혀 있었다. 등록하는 날, 친구가 너 정말 그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진작 오후 타임으로 시간을 바꿨어야 했다.
처음 얼마간은 그래도 제 시간에 학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를 담당했던 운전강사는 젊은 남자였는데, 얼굴이 조그맣고 새까만 게 꼭 오소리나 너구리를 연상시켰다. 대뜸 내 나이를 물어 보기에 스물여섯 살이라고 했더니, 자신의 나이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첫날 교육은 자동차의 출발과 정지였다. 운전석에 강사가 앉고 조수석에 내가 앉았다. 시범을 보이기 전에 강사가 물었다.
“운전 해본 적 있어요?”
나는 없다고 했다. 면허 없이 운전해도 되나? 강사는 시동을 걸었다.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1단으로 넣고 - 이게 1단입니다 - 클러치에서 서서히 발을 떼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시동을 걸고, 클러치를 밟은 채 기어를 넣고, 천천히 클러치에서 발을 떼는 겁니다.”
나는 잠자코 1단 기어를 어떻게 넣는지, 클러치와 브레이크의 위치는 어디인지 살펴보았다. 운전석 발밑에는 세 개의 페달이 있었는데,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클러치, 브레이크, 액셀러레이터였다. 나는 속으로 클러치, 브레이크, 액셀러레이터 하고 되뇌었다.
“정지할 때는 먼저 클러치를 밟고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정지입니다. 그러고 나서 후진기어를 넣습니다.” 그는 후진기어를 넣었다. 차는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출발했던 곳까지 차를 후진시키고 차를 멈췄다. “할 수 있겠죠?”
우리는 자리를 바꿨다. 시동, 클러치, 1단 기어, 클러치에서 발을 떼자, 시동이 꺼져 버렸다.
“클러치에서 너무 급하게 발을 떼지 마세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을 떼야 합니다. 엔진에 갑자기 무리한 힘이 걸리면 시동이 꺼집니다. 다시 한 번 해보세요.”
나는 왼발에 잔뜩 힘을 주고, 최대한 천천히 발을 떼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사는 그런 식으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자, 여기까지 와서 정지하세요. 이번에는 후진입니다.”
후진했다. 간단했다.
몇 번인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고 아무 문제가 없자, 강사는 차에서 내렸다.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나 혼자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어느새 태양은 머리 위까지 올라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자동차의 커다란 앞 유리를 통해 곧장 내 얼굴에 닿았다. 강사는 그늘에 쪼그려 앉아 다른 강사가 뽑아온 캔 음료를 홀짝홀짝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중간에 차가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 바퀴가 노란색 줄이 쳐진 안전 블록에 닿을락 말락 하자, 그가 다시 와서 핸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계속 왼발에 힘을 주고 있으려니까 쥐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시험 삼아 클러치에서 발을 떼는 속도를 조절해 보았다. 얼마큼 천천히 발을 떼야 시동이 꺼지지 않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속도를 조금만 빨리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동은 여지없이 꺼졌다. 그저 아주 천천히 떼어야 시동이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끝내 그 중간점을 찾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이따금 코스 연습장에서 핸들을 급하게 꺾을 때 나는 노면과 바퀴의 마찰음이 들려올 뿐 주위는 조용했다. 언제부터인지 매미가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와 언제 헤어졌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그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언제 우리가 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5월 초 - 대학의 중간고사가 막 끝났을 무렵 - 여자와 나는 전화로 말다툼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가 나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도서관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그녀의 회사로 전화를 했다. 처음에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으려 하더니 -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희미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받아 없다고 해서 나는 아무 말 않고 바꿔 달라고만 했다. - 전화를 받았다. 여자는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이게 첫 번째였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늦은 시각 여자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로 찾아왔다. 지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데리고 카페 뒤 커피 자판기가 있는 골목으로 갔다. 우리는 커피 한 잔씩 뽑아들고, 문을 닫은 전자제품 대리점 앞 보도 턱에 앉았다. 상품 진열대를 비추는 하얀 불빛이 바닥에 그녀와 나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골목에는 담배 불빛처럼 이따금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다른 편 끝으로 사라졌다. 나는 몇 마디 농담을 건넸고,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왜 전화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전화하지 말랬잖아, 하고 내가 대답했다.
“끊을 때 전화하겠다고 그랬잖아요.”
나는 내가 뭐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는 시골로 내려간다고 했다. 원래 그녀는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서 외할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셔서 시골로 내려간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친어머니는 그녀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 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으셨고, 동시에 그녀는 이복오빠가 생겼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교가 멀다는 이유로 그녀는 외할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내가 다른 도시에 있을 때, 그녀는 학교를 자퇴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어째서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내가 그녀에게 그런 걸 물어도 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서울에 있는 게 의미가 없어졌어요……. 우리 헤어졌으니까.”
나는 다 마신 종이컵을 찌그러뜨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빈 컵을 달라고 해서 두 개의 종이컵을 포갰다. 신호등 앞에서, 전철역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됐다고 말했다. 신호가 바뀌고 그녀가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가 반대편 보도에 닿을 때까지 서 있다가 돌아섰다. 종이컵은 버리지 못하고, 집까지 들고 왔다. 다음날 나는 전화를 해서 시골로 내려가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는 채로 전화를 끊었다.
세 번째 역시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외국에 나가 있던 형이 서울로 돌아와서 내 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형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마루에 있는 전화기로 전화를 돌리면서, 만일 끊기면 꼭 다시 전화하라고 말했다. 며칠 뒤 우리는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에서 다시 만났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얼마간 밝아져 있었다. 시골에 내려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뒤 몇 번인가 약속이 어긋났고, 주말에 전화를 하기로 한 그녀가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몰랐다. 월요일, 회사로 전화를 했을 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회사 직원에게 화를 냈다. 너무 화가 나서 뒷일은 생각도 못 했다. 화가 난 채로 그녀 삐삐에 음성을 남겼다. 네게 보냈던 편지를 돌려받고 싶다고 했다. 며칠 뒤 내가 일하는 카페의 직원이, 어느 여자 분이 맡기고 간 거라며 종이가방을 주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여자를 처음 만난 게 그 전 해 8월이었으므로, 우리가 만난 기간은 1년에서 꼭 한 달이 빠졌다. 그러니까 1997년 8월에서 다음해 1998년 7월까지였다.


1998년은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해였다.
그해 1학기 내내 나는 친구의 차로 등교를 했다. 군에 있을 때 집이 이사를 했는데, 그게 요행히 같은 과 동기 녀석의 집 근처였고, 그 친구는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영업용 미니승합차를 구한 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1학기에 복학하는 친구로, 뜬금없이 행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해서 그 덕에 나도 수업에 상관없이 내게는 거의 한밤중이라 할 수 있을 아침 여섯 시 반부터 일어나서 일곱 시까지 친구의 집 앞으로 달려가야 했다.
우리는 강을 건너자마자 강변도로를 탔다. 아침 어스름에 달리는 강변도로의 풍경은 근사했다. 강 건너편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환한 총천연색 화면의 대형 전자광고판을 보고 있으면, 새삼스레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한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에어컨은 고장 나 있었지만 오디오는 훌륭하게 제 몫을 해서, 매일 아침 우리는 볼륨을 크게 하고 길거리에서 산 최신가요 테이프를 들으며 한껏 드라이브의 기분을 냈다.
친구는 그 후 몇 번인가 행정고시 1차에 떨어지더니, 졸업하자마자 바로 컴퓨터 학원을 차렸다. 졸업할 때 친구의 성적은 과 수석이었는데, 참고로 얘기하면 우리가 다니던 학과는 국문학과였다.
학교에 도착하는 건 여덟 시쯤이다. 우리는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맡아 가방을 내려놓고 로비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씩 뽑아서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햇빛은 멀리 도서관으로 올라오는 길모퉁이에 걸쳐져 있었다. 가지를 길게 뻗은 나무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어 그곳은 마치 어딘가의 입구처럼 보였고, 햇빛은 그 안으로 들어오려고 살짝 발을 걸친 것처럼 보였다. 햇빛보다 먼저 학생들이 그 길을 따라 올라왔다. 그들 중에는 동기 녀석들도 섞여 있었다. 동기들은 하나같이 우리처럼 열람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와 우리 옆에 앉았다. 이미 복학해서 한 학기를 다닌 친구도 있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이번 학기에 복학하는 친구도 있었다. 너를 도서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하고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나는 웃으며, 앞으로도 줄창 도서관에서 나를 보게 될 거라고 말했다. “줄창 말이야.”
동기들이 커피를 다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거나 아홉 시 수업을 들으러 문리대로 올라가면, 나는 도서관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일찍 나와서 사무실 청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몇 마디 농담을 지껄였다. 전화를 끊고 나도 동기들을 따라 도서관이나 문리대로 올라갔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모이는 장소는 도서관 앞 돌계단 외에 또 한 곳 있었다. 문리대 건물 5층에 있는 예비역 협의회실이었다. 줄여서 ‘예협실’이라 부르는 곳이었는데, 나는 대학교 1, 2학년 때 건물 안에 그런 공간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대체 예비역들이 모여서 무엇을 협의한단 말인가? 원래는 문리대 내 모든 학과의 예비역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간이었지만, 처음 우리가 그 공간을 발견하고 진을 치기 시작한 이후로 다른 과 학생들은 거의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제 1층에 있는 학생회실은 출입하지 않았다.
공강 시간에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의자에 드러누워 잠깐씩 눈을 붙이는 장소로도 예협실은 훌륭한 역할을 했지만, 확실하게 자기 몫을 할 때는 아무래도 중간고사니 기말고사니 하는 시험기간 때였다. 일단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 자리를 잡기가 힘들었을뿐더러, 개인적으로는 시험과목의 노트필기며 족보며 예상문제와 그 답을 정리한 프린트물을 잔뜩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무척 요긴했다. 아무리 넓은 시험 범위고 어려운 과목이라 해도, 그들이 정리해 놓은 프린트물을 한 번만 읽고 들어가기만 하면 말이 되든 안 되든 답안지를 빼곡히 채울 수 있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3학년 1학기의 내 성적은 경이로운 3.9대였는데, 그것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성적이었다.
그렇게 예협실에 모여들었던 동기 녀석들 중 몇몇은 대학원에 진학했고, 몇몇은 교직을 이수해서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고, 누군가는 유학을 갔고, 또 누군가는 잡지회사의 편집부에 취직했다.
그러나 1학기 동안 학교생활이 내내 유쾌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고,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둘 다 술로 인한 실수였다.
어느 날 동기 중 한 녀석이 자신이 쓴 소설이라며 내게 보여주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할 일이 없어서 썼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군대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만 기억하고 있다.
군대에 가기 전 나도 소설을 썼었다. 나는 학과 내의 소설창작 모임에 들어갔고, 창작집에 작품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쓰지 않는다. 2학년이 되어서 나는 소설 모임에 아무 이유 없이 나가지 않았다. 2학년 2학기에 나는 두 개의 교내 문학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했지만, 둘 다 예심에도 오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하나는 내가 있던 창작 모임의 두 선배가 공동 수상했고, 다른 하나는 후배가 수상했다. 두 선배가 공동 수상한 문학공모전의 시상식이 끝나고 나는 동기와 당구를 쳤는데, 그 친구는 내게 실망했냐고 물었다. 나는 당구를 이겼다.
공동 수상한 두 명의 여자 선배들은 이제 소설을 쓰지 않는다. 한 명은 학교선생이 되었고, 다른 한 명의 소식은 모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은 어느 여자에게 주었고, 파일은 지워버렸다. 내가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의 소설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술자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소설에 대해 혹평을 했다. 술이 엄청나게 취해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소설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서도 심한 말을 내뱉었다.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나는 사과를 했지만, 그는 나의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 둘은 어쩌다 같은 자리에 앉게 돼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는 그 뒤에 소설을 쓰지 않았고, 졸업하고 한동안 소식이 들리지 않더니 최근에야 어느 대기업의 홍보실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실수는, 그 전후사정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나는 학교 앞에서 술을 마셨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찾으러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도서관에는 등교를 같이 하는 친구가 늦게까지 행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의 차를 타고 얌전히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도서관의 수위와 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 나는 한 달 동안 도서관 출입금지를 당했다. 한 달이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어도 다시는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운전학원을 다니기 시작하고 한 달 정도 지난 8월 말경 우연히 학원에서 동기형을 만났다. 삼수를 해서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으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의 일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오전에 입학식과 오후에 신입생 환영회가 있던 날이었다. 입학식장에서 나는 국문과 선배들을 만났고, 그들을 따라 환영회가 벌어지는 술집으로 갔다. 술집은 지하에 위치했는데, 그 지하로 내려가는 벽면에는 어느 운동가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젊은이여 분해 당하지 말라.’ 그러나 그 구호와는 반대로 술집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주인이 바뀌고 철저하게 분해 당했다.
내 앞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요량으로 주변 사람들과 별 대화를 나누지 않고 묵묵히 술만 마셨고, 그 역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삼수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도 나도 처음으로 참석하는 국문과 술자리였다. 그날 나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학생회실에서 눈을 떴을 때 맞은편 소파에는 그가 누워 있었다. 2학기에 그는 중앙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수업 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동아리에서 영화를 찍을 때 함께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특별히 무슨 스태프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경을 한다는 것이 이틀 밤을 함께 꼬박 새며 따라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앞에 서 있던 피에로 인형이 소재였던 것은 생각난다. 그것이 아마 미제국주의를 상징했던 것 같다. 나도 엉겁결에 단역으로 한 장면 출연했다. 촬영이 끝나고 그는 영화가 완성되면 꼭 내게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더빙이니 자막이니 하는 후반 작업에 들어가는 돈을 구하지 못해서 영화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2학년 때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충무로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내가 군대를 막 제대했을 무렵, 나는 그의 이름을 영화포스터의 제작부 스태프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교육을 마치고 우리는 당구를 치러 갔다. 제작부 일을 하다 보니까 면허증이 없으면 정말 불편하더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 작품이 흥행에 성공해서 - 나도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봤다 - 이번 작품에서 그는 제작부장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이번 작품은 아직 개봉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영화에 대해서 물었다.
“형편없어, 감독이 해외유학파인데, 정말 아무것도 몰라. 영화는 코믹 멜로인데, 난데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오우삼 감독에 대한 오마주라면서 영웅본색의 주제가를 삽입하자고 우기는 바람에 그거 뜯어말리느라고 혼났다. 보지 마라.”
“형도 영화 찍어야지.”
“그래야지.”
그는 당구대를 한 바퀴 돌며 공의 위치를 가늠하더니 다시 허리를 숙여 자세를 잡았다.
“근데 유학 안 갔다 오고, 영화과 같은 데 안 나온 나 같은 놈이 영화 찍으려면, 이 판에서 스태프로 구르면서 시나리오 열심히 써서 그걸 들고 도는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는 다음 영화 작업 들어가기 전에 빨리 면허를 따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일단 제적은 막아 놨는데 아주 짐 같다고 대답했다. 게임이 끝나고 시내에서 약속이 있다고 해서 금방 헤어졌다. 게임은 그가 이겼고, 예전 규칙대로 내가 돈을 냈다. 운전학원을 갈 때마다 유심히 사람들을 살펴보았는데, 그 후로 학원에서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몇 년 뒤 단편영화를 하나 찍었고, 그해 티브이에서 방송되는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문리대로 올라가는 길에, 그가 속해 있던 중앙 동아리의 이름으로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나는 아홉 시 수업에 늦어 걸음을 재촉하다 그 플래카드를 보았고, 그날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얼마 뒤 나는 교육 시간을 다 채우고, 장내기능검정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남은 건 도로주행 교육 열 시간과 검정뿐이었다. 그 무렵 이미 학교는 2학기 개강을 했고, 나는 교육 시간을 오후로 잡았다.
사실 그녀와 완전히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나는 그녀의 삐삐에 음성을 남겼다. 회사로 전화도 몇 번 걸었지만, 매번 다른 직원이 받았고 나는 슬그머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먼저 그날 화를 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화가 났던 이유에 대해서는 너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제 와서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래도 네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 설명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해명이다. 그것 외에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네 입으로 설명을 듣고 싶다. 그럼 그다음에는 깨끗하게 사라져 주겠다.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회사와 우리 집은 상당히 가까웠는데, 걸어서 이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나는 담배와 동전 몇 개와 워크맨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어느새 여름의 더위도 한풀 꺾여서 나는 하늘색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스웨터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맨살에 닿았고, 그 느낌은 내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신호등을 건너 한 길로 죽 걸어 내려갔다. 중간에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어느 빌딩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동네 친구 녀석과 술을 마시고 밤에 헤어질 때면 항상 커피를 뽑아 마시던 자판기였다. 비록 인스턴트 커피였지만 분말이 아닌 고급스런 알갱이 커피로, 막 뽑아냈을 때 채 녹지 않은 그 알갱이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자판기 커피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판기 커피’라고 불렀다. 나는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계속 걸어 내려갔다. 주유소를 지나고 몇 개의 꽃집을 지났다.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가 나왔다. 길을 건너면 그녀의 회사가 있다. 나는 길을 건너지 않은 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커피를 마시며 반대편에 서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길 건너편이 그렇게 먼 줄 몰랐다. 막상 그곳에 서서 그녀 회사 입구에서 나오는 여자들을 바라보자, 도저히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보도 안쪽 빌딩 앞에 서 있다가,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가서 차도 앞까지 나가 섰다. 여섯 시 반이 넘어가면서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때가 되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나는 단 한 번 그 자리에서 그녀를 보았다. 어쩌면 이전에도 몇 번쯤은 그녀를 보았을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언제나 너무 빨리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녀가 회사에서 나오더니 신호등 반대편에 서서 내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하지만 길을 건너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나와 헤어질 때보다 머리가 더 길고, 여성스러워졌다. 시간이 흐르고, 신호가 몇 번인가 바뀌었다. 나는 그동안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문득 나를 향해 고개를 고정시키는가 싶더니 가방에서 안경을 꺼냈다. 나는 그녀가 나를 발견했다는 걸 알았다. 신호가 바뀌면 건너가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호가 바뀌기 전에 어떤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남자를 아는 체했다. 이윽고 그녀와 남자는 길을 조금 올라가더니, 그곳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차가 출발하자 그 차를 따라 반대편 길을 달렸다.
그날 밤 늦게 무슨 말을 남겨야 할지 모르는 채, 그녀의 삐삐 번호를 눌렀다. 삐삐 배경음악이 달라져 있었다. 전람회의 “새”였다. 나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음반 매장에서 전람회의 테이프를 샀다.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텅 빈 예협실에 혼자 앉아서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그 가사를 읽고 또 읽었다.


내 손에 플라스틱 재질의 딱딱한 운전면허증이 쥐어진 건 그해 10월 1일이었다. 면허증에 그 날짜가 정확하게 쓰여 있다. 오전에 네 시간의 시청각 안전 교육을 받고, 교육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교육관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호명해서 운전면허증을 나눠주었다.
도로주행 시험은 기능 시험보다 훨씬 간단했다. 기능 시험과 마찬가지로 학원에서 도로주행 교육을 받았던 코스가 바로 시험 코스였는데, A, B, C, 세 코스를 연습해서 그중 한 코스를 시험 보는 것이었다. 교육 중에는 거의 실수가 없었지만 막상 시험을 볼 때는 긴장한 탓인지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감독은 그대로 합격시켰다.
“이제 정말 운전을 하게 될 텐데, 그때는 정말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2학기 강의 중에 굿을 취재해서 리포트를 작성해야 하는 과목이 있었다. 그날 나는 같은 조의 동기들을 설득해서 굿이 벌어지는 종로까지 내가 운전하는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조원들 중에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가 끼어 있었고, 특별히 운전학원 사장을 아버지로 둔 녀석도 리포트와 상관없이 동행하기로 했다. 그 둘은 모두 군대에 있을 때 운전병 출신이었다. 좌회전 신호 제일 앞에서 시동을 꺼트려 뒤에 줄줄이 서 있던 차들도 다음 신호까지 기다리게 만든 점을 제외하고는 별 사고 없이 종로까지 갈 수 있었다. 돌아올 때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야 했기 때문에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친구가 대신 운전했다. 그날 우리는 굿을 취재하면서 사진을 두 통쯤 찍었는데, 남은 필름으로 우리끼리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들은 아직 가지고 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은 내 독사진으로, 나는 하늘색 스웨터를 입고 노란색 꽃밭을 배경으로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사진의 왼편에는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날이 막 저물 무렵이라 플래시가 자동으로 터졌는지, 내 얼굴의 윤곽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손에는 굿판의 팸플릿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다물고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10월이 끝날 무렵, 중학교 때 친구 녀석이 갑자기 잠적을 해버렸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전화를 해봤더니, 핸드폰도 삐삐도 모두 끊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연락을 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집 전화번호도 주소도 몰랐다.


내가 혼자 차를 제법 운전할 수 있게 된 건 그해 가을도 훨씬 깊어서였다. 길가에는 손바닥보다도 훨씬 큰 낙엽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이따금 나는 그 큰 이파리들을 발로 밟아 보곤 했다. 그러면 아주 듣기 좋은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동 쪽에 살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그 친구 집까지는 죽 한 길로 가면 되는, 비교적 초보운전자에게는 편한 코스였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겠다는 그 친구를 굳이 내 차에 태웠다.
“괜찮아, 이제 나 운전 잘한다니까.”
집 앞 골목을 빠져나와서 도로에 올라선 뒤로, 한 번도 좌회전 우회전 없이 직진만 했다. 저녁 무렵이라 도로는 차들로 가득했고, 신호대기에 걸릴 때마다 차를 멈추고 나는 친구 쪽을 바라보며, “나 운전 잘하지?” 하고 농담을 걸었다. 몇 번인가 일부러 끼어들기도 해보고, 차가 멈추었을 때 장난삼아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공회전을 시켜 보기도 했다.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는 집 앞에서, “커피나 한잔 할래?” 하고 물었다. 우리는 골목에 차를 세우고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운전면허를 따면, 꼭 이렇게 골목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고 싶었어.” 하고 내가 말했다.
“옆에 여자를 태우고 말이지.” 친구는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 말을 받아 몇 마디 농담을 더 지껄여댔다.
친구는 차에서 내리기 전, 집으로 돌아가는 더 빠른 길을 알려주었다. 정작 본인은 운전을 할 줄 모르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차를 운전하고 다녀서 그 동승 경력만 십 년이라고 했다.
“이 길로 죽 가서 우회전을 하면 1차선의 좁은 길이 나오는데, 거기는 아파트 단지 바로 옆이라 요철이 많아. 계속 가다 보면 우측으로 올라가는 진입로가 나오고 거기로 올라가면 바로 둑방길이거든. 둑을 따라 계속 달리란 말야. 그게 우리가 왔던 길 아래편으로 이어져서 너희 집 근처까지 가.”
나는 알겠다고 말했다. 친구는 손을 흔들고는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차의 시동을 걸고 담배를 껐다. 나는 친구가 설명해 준 대로 차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직진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설명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길을 잘못 찾은 건지, 그날 나는 길을 잘못 들어서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까지 나가게 되었다. 우회전을 했을 때 1차선의 좁은 도로가 나오는 건 맞았다. 그 길이 아파트를 끼고 있어 요철이 많은 것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우측으로 올라가는 진입로가 아무리 가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고 방향을 바꿀까 싶을 때쯤, 진입로 비슷한 좁은 길이 우측에 나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좁은 길에 올라섰는데, 놀랍게도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차가 있었다. 그 차는 신경질적으로 상향등을 깜박였다. 나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입으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차를 후진시켰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방향을 돌리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아파트 단지가 끝나고 길이 넓어졌다. 나는 안심하고 표지판을 확인하기로 했다. 첫 번째 표지판이 나왔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명이 하나도 없었다. 차를 멈추고 물어보고 싶어도, 길가에는 상점 하나 없었고 지나가는 행인도 없었다. 양옆으로 조금 높은 지대에 주택들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2차선의 넓은 도로임에도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는 일단 첫 번째 신호등에서 유턴을 하기로 작정하고, 1차선에 차를 붙였다. 그러나 일이 틀어지기로 단단히 맘을 먹었는지, 아무리 달려도 좌회전 신호만 있을 뿐 유턴 신호가 없었다. 이제 생각하면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어느새 그저 앞 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앞 차가 우회전을 하자 나도 우회전을 했다. 좁은 길이 이어지더니 다시 길이 넓어졌고,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3차선 도로가 나왔다. 도로 전방 멀리 보이는 게 주황색 칠의 톨게이트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체념하고, 속도를 줄이면서 톨게이트로 들어섰다. 통행권을 받아들면서 나는 톨게이트의 여직원에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다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의외로 여직원은 하나도 놀라지 않고, 십오 분 정도 달리면 용마로 빠지는 진입로가 나오니 그쪽으로 들어갔다가 유턴해서 다시 나오든지 국도를 이용하든지 하라고 설명했다.
“표지판은 빨리 나옵니까?”
“예, 안 놓치실 거예요.”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라디오의 주파수가 잡히지 않았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지만 마땅하게 잡히는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가방에서 워크맨을 꺼냈다. 그 안에 있는 테이프를 꺼내 차의 오디오에 집어넣었다. 여름 내내 들었던 바로 그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시트를 뒤로 젖히고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다시 또 한 대를 물었다. 금방 차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찼고, 나는 연기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고속도로 위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의 바퀴소리와, 어느새 차가워진 밤의 공기가 새삼 내가 아직 도로변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공기 중에는 첫눈의 예감이 스며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희미하지만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하늘은 별 한 점 없이 컴컴했다.
지난겨울 눈이 많이 내리던 밤이 떠올랐다. 그건 첫눈은 아니었다. 어둑어둑해지면서부터 갑자기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발로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는 함박눈이었다. 나는 종종걸음을 치며 여자의 회사 근처까지 갔다. 회사 앞 사거리 신호등 건너편에 여자가 보였다. 눈발이 거세고 두터워서 여자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고작 저녁 여섯 시를 막 넘겼을 뿐인데도 도로 위는 이상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비록 눈이 내리고 있다 해도, 그 정도로 차들이 없다는 건 이해 못 할 일이었다.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모습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신호등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나, 단둘만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았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고 나는 그녀 쪽으로, 그녀는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간까지 와서야 그녀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보도 위로 올라서자 그녀는 내 코트의 깃을 올려 주고 목도리를 바싹 당겨 매주었다. 그때 나는 맨손이었는데, 그녀는 손목 부근에 하얗고 보드라운 털이 달린 장갑을 벗더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날 우리가 어떻게 약속을 했고, 그다음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녀를 데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판기 커피’가 있는 빌딩이 있는 데까지 걸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이야, 이 커피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판기 커피라고.”
그녀는 빌딩 처마 밑에서 한 손에는 빨갛게 언 내 손을 잡고, 한 손에는 하얀 김이 올라오는 자판기 커피를 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 맛있네.”
여자는 헤어질 때면 항상 내게 열까지 세어 보라고 말했다. 열까지 세면, 그럼 이제 가요, 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나중에 열까지 세어 보라고 하면, 나는 일부러 천천히 센다거나, 엉터리로 아홉 다음에 다시 하나를 세는 둥 장난을 치곤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그녀는 열까지 세어 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한 일이었다.
나는 담배를 끄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차를 움직이지? 운전학원의 첫날 내가 배운 게 뭐였지? 그렇지. 왼쪽부터 클러치, 브레이크, 액셀러레이터. 나는 왼발로 클러치를 밟고 1단 기어를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왼발에 힘을 잔뜩 주고 마치 첫날 교육 때처럼 발을 떼었다. 나는 여전히 중간점을 알지 못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힘차게 오른발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왼쪽 깜박이를 켜고 갓길을 벗어나 고속도로 위로 들어섰다. 그녀와 헤어지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운전학원을 등록하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운전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원하는 곳이 어디든지, 이제 나는 그곳으로 그녀를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이다.


톨게이트의 여직원이 말한 진입로가 나올 시간은 훨씬 지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표지판도 진입로도 보지 못했다. 이미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초록색 도로표지판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하고, 도시의 불빛도 보였던 것 같다. 내 시선은 줄곧 바로 앞 노면만 향해 있었다. 문득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처음으로 나는 마음 깊이 행복감을 느꼈다. ■




1_소설가 김종옥

작가소개 / 김종옥 (소설가)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수료, 2012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장웹진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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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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