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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빛소리

  • 작성일 2015-11-15
  • 조회수 2,808



무지갯빛 소리




김재영



ㅅㅎ-무지개빛소리


수연은 어둠 속에서 벽시계를 올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 다섯 시였다. 아침까지 내처 잘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꾸 중간에 깨는 바람에 정작 일어나야 할 시간에 못 일어나곤 했다. 그 때문에 한 달 새에 벌써 두 번이나 지각을 했다.
수연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꿈의 잔영이 잠을 방해했다. 한여름의 혼잡한 해수욕장 같기도 했고, 도심의 광장 같기도 했다. 웅성대는 사람들 목소리 사이로 낮게 반복되는 소음이 들려왔다. 규칙적으로 철썩이는 파도소리 같았다. 달리는 자동차가 아스팔트 위에서 일으키는 마찰음일 수도 있었다. 군중 틈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손을 쑥, 내밀었다. 마지못해 악수를 하니, 상대가 바짝 다가서며 귓속말로 미안해, 하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이 하도 선명해 그녀는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
맑은 가을 하늘 위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꿈결에 들은 속삭임은 수연의 몸속으로 넓고 고르게 퍼져 나갔다. 가슴 언저리가 따뜻해지더니, 이유 없이 눈가가 촉촉해졌다. 도대체 누굴까. 이제는 서로 연락도 않고 지내는, 한때는 사랑했으나 마지막에는 깊은 상처를 안기고 떠난 애인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는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은 친구 두엇이 생각났다. 별일이네. 이제는 서로 연락도 않고 지내는데. 이제야 자기 잘못을 알고 뉘우쳤나 보지? 어쨌거나 꿈속에서나마 찾아와 사과를 해줘서 고맙네. 그것은 말레이시아식이었다. 정확하게는 세노이족 방식이었다. 세노이족은 전날 꿈에 누군가와 싸워서 다치게 했다면 다음날 자기가 다치게 한 그 사람을 찾아가 꽃을 주면서 사과를 한다고 들었다. 꿈에 누구와 사랑을 나눴으면 그 사람에게 가서 꿈 이야기를 하고 사랑을 고백한다고도 했다. 수연은 생각했다. ‘난 누구한테 가서 괜찮아, 라고 해야 하나?’
다시 잠이 든 지 얼마 안 되어 수연은 다시 잠에서 깼다. 이번엔 자기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깼다. ‘정말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뒤로 코고는 습관이 생겼다. 그 사실조차 모르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집에 다녀간 여동생이 “심한 건 아니지만 규칙적으로 내내 코를 골던데.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거 아냐?”라고 말해 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코고는 소리란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코골기는 대개 자동으로 멈춰지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수면 중의 마지막 호흡으로 자극받은 부위의 흔들림이 채 멈추기 전, 먼저 깨어난 청각이 그 소리를 들었다는 건가?
수연은 상념을 떨치려 몸을 뒤채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소화하려면 최소한의 수면시간은 보장되어야 했다.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낮은 숨소리였다. 새근새근.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이 내는 숨소리였다. ‘정수연, 너 도대체 누굴 침대로 끌어들인 거야?’
유치하고도 뻔한 대중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 이 누구였더라? 대머리가 유난히 반지르르한 거래업체 사장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업무의 연장이라 조심스러운 저녁자리였다. 다행히 이차에서 마무리되었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늦은 시간이기는 했다. 이차에서 대머리 사장의 이야기를 아주 오래 들어주어야만 했으니까. 입시생 아들을 둔 사장은 아이한테서 받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타인에게 전가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쪽 귀에서는 여전히 가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민수인가? 대학생 조카는 너무 늦어서 자기 집으로 갈 수 없을 때면, 침대 밑에 요를 깔아 자고 가곤 했다. 하지만 민수는 수개월 전에 군 입대를 했으니, 지금쯤 전방부대의 내무반에서 곯아떨어져 있을 터였다. 일주일쯤 전에 여동생한테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났다. 민수가 속해 있는 군부대에서 축제를 하는데 혹시 갈 수 있느냐는 거였다. 너무 바빠서 면회는 좀 어려울 거 같다고 답했다. 수연은 용기를 내어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가만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없었다. 아무도……. 텅 빈 옆자리.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지, 이건? 설마 이런 식으로 미쳐 가는 건 아닐 테지?’
수연은 침대에서 벗어나 주섬주섬 옷을 꿰입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느니, 아침 운동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집을 나서면서 수연은 노란색 점퍼를 걸쳤다. 솜을 누빈 그 점퍼를 입기에는 조금 이른 계절이지만, 사방이 어두운 새벽인 데다 시민공원까지 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대로를 안전하게 건너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가로등이 있다고는 해도 빛이 흐릿한 데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실제로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그녀 자신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를 상상하면서 종종 몸서리를 치곤 했다. 그녀는 운전자들이 언제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부터가 그랬던 것이다. 운전 중에 종종 졸음을 느꼈고, 걸려오는 휴대전화를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할 때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원고마감을 앞두고는 뻔히 아는 길도 잃을 만큼 정신을 딴 데 두는 경우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도로를 달리는 놈들의 반은 미친 상태라는 것만 알아 둬.”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한 선친의 영향도 한몫 했다. 아버지는 평생 세상을 믿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젊어서부터 이마에는 항상 굵은 주름이 있었고, 다소 화난 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이며 단정한 입매가 품위 있는 노인으로 보이게 했다. 매사에 신중한 아버지였지만 결국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핏속을 이리저리 떠돌던 혈전 하나가 마침내 아버지의 혈관을 막으면서 삶을 삼켜버린 것이다. 다행이라면 맞은편 차량 대신 가로수를 심하게 들이박아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거였다. 가로수는 뿌리 뽑힌 채 보도 블록 위로 쓰러져 있었다. 흰 꽃을 잔뜩 매달고 있는 벚나무였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심하게 헝클어졌고, 늑골도 몇 대 부러져 있었다. 그렇게 망가진 몸 전체를 꽃잎이 하얗게 덮고 있었다. “아버지는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거야, 심장이 먼저 멈추었다니까.”라고 말한 건 여동생이었다. 동생은 어떻게든 불행 중 다행을 찾으려 애쓰는 성격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슬픔이 조금 줄어들었다.
아버지마저 잃은 뒤 수연은 진정으로 혼자가 되었다. 남은 것은 아파트 대출금과 보장되지 않은 노후뿐이었다. 수연은 더 나이 들기 전에 대출금을 마저 갚고 노후 연금이라도 들어야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졌고, 최근에는 전보다 더 많은 일을 무리하게 맡았다.
수연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연은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고모, 삼촌이 가까이 살았고, 가끔씩 이모와 사촌들이 놀러왔다. 이런저런 일로 찾아오는 이웃도 많았다. 학창 시절에는 늘 서너 명의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성인이 된 뒤로는 따라다니는 남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 중에 몇몇은 애인이 되었다가 지는 낙엽처럼 점차 떨어져 나갔다. 단 한 명의 남자가 남편이 되었지만, 최악의 선택이었다. 이혼을 한 뒤로는 다시 재혼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혼자 남겨져 있었다. 멀리 남쪽 바닷가 마을에 사는 여동생 수미만 가끔씩 그녀를 찾았다. 수미는 늦은 밤에 가끔 전화를 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동생의 목소리는 밝은 햇살처럼 쏟아졌다. 동생은 매사에 긍정적인 편이었다. 자신의 슬픔 덩어리를 도대체 어디에다 숨기고 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민수가 사고를 쳐서 고등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을 때도 그랬다. 속으로야 얼마나 쓰라렸을까만 적어도 수연 앞에서는 울음을 보이지 않았다. “약을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뭐. 약 먹고 해롱대는 꼴은 진짜 못 봐줄 것 같아.” 그러면서 피식 웃기까지 했다. 동생의 그런 대범함이 어쩌면 그녀의 운명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돈을 벌겠다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삼학년 이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동생은 방학마다 의상실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 눈썰미가 좋아 금세 시장의 흐름을 읽었다. 드디어는 가을 학기 등록금으로 아주 작은 옷가게를 열었다. 물론 아버지한테는 비밀이었다. 신기할 만치 장사가 잘 되었다. 머지않아 수완 좋은 동생은 빈털터리 주제에 대형 매장의 주인이 되었다. 불과 서른을 갓 넘겼을 때의 일이었다. 혼인도 일찌감치 했다. 민수가 첫돌을 맞기도 전에 곧바로 둘째가 생겼다. 등록금을 엉뚱한 데 쏟아 부은 동생을 나무라던 아버지도 더 이상 잔소리를 퍼부을 수 없을 만치 승승장구했다.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면 동생의 남편이 매번 사법고시에 떨어진다는 거였다. 다 잘 되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동생의 대범함은 사업장을 늘리는 데서 진가를 발휘했다. 대형 매장 서너 개가 동생 명의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동생은 빚에 몰리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급전을 빌려야 했다. 수연과 아버지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수연은 마침 전남편과의 혼인을 앞두고 있던 터라, 자기 이외의 사람들 일에 둔감했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동생네 매장에서 가장 비싸고 맘에 드는 예복을 공짜로 집어 들 수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그 아이보리색 투피스는 지금도 눈에 선했다. 수연이 무척 아끼던 옷이었지만, 몇 번 입어 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다. 혼인한 뒤로 갑자기 체중이 늘어 그 옷의 치수를 늘려 달라고 갖다 줬는데, 옷 수선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동생의 사업이 부도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예복을 잃어버린 탓이었을까. 수연은 머지않아 남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잃었다. 서른다섯에서 마흔 사이. 한겨울의 폭설 속을 헤치고 겨우 목숨만 건져서 살아 나온 것 같았다. 그동안에 동생 수민은 감옥에 다녀와야 했고, 얼마쯤 뒤엔 제부의 고향이라는 남쪽 바닷가 마을로 이사했다. 한순간에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된 아버지만이 부양가족으로 남아 곁을 지켰다.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자식이나 하나 낳지 그랬어.” 이혼한 뒤 새 애인들을 사귈 때는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라더니, 급기야 그런 말까지 하는 동생에게 수연은 흐흐, 웃어 줄 따름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제 곧 폐경이 될 텐데, 그럼 영영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되겠구나, 생각하며 다소 쓸쓸해했다.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사랑이니, 이별이니, 그런 거라면 신물이 났다. 어떤 남자도 완전하지 않다는 걸 오십을 코앞에 두고야 알게 되었다는 게 억울할 따름이었다.
끼이익, 하는 자동차 급제동 소리가 어둠을 찢으며 들려왔다.
자동차는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갑자기 핸들을 확 돌려 달리던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수연의 놀란 눈으로 도로 위에 쓰러져 있는 검은 물체가 들어왔다. 어른의 몸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등골이 오싹한 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인적이란 곤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횡단보도에 발을 내딛어 한 걸음씩 조심스레 다가갔다. 가까이 가보니 강아지였다. 숨을 헐떡이는 걸로 봐서는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 몇 대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차 피해를 막으려면, 게다가 그녀 자신이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어서 강아지를 인도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강아지 옮기기였다. 남들에겐 어이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었다. 수연은 지금까지 한 번도 강아지를 안아 본 적이 없었다. 안아 보기는커녕 손으로 만져 본 적도 없었다.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수연은 사람 이외에는 살아 있는 동물을 만지지 못했다. 물컹대는 느낌이 너무도 이물스러웠다. 이유 없이 그랬다. 타인들에게 굳이 이유를 말해야 할 때면 어린 시절에 옆집 개한테 물린 경험 탓인 것 같다고 대답하곤 했다. 실제로 어린 날에 개한테 물린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옆집 개의 털을 잘라 불에 태운 재를 상처에 발라 주었다. 그런데도 수연은 한동안 나쁜 기억을 씻지 못했다.
수연은 입고 있던 노란 점퍼를 벗어 강아지에게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동물보호단체에 구조요청을 했다. 양편에서 달려오던 자동차들이 불룩하게 솟은 노란 점퍼를 발견하고는 속도를 줄이며 지나갔다.


다산 정약용이 이백 년 전에 했다는, “과거 공부에만 전념하고 도의(道義)를 강론하지 않기 때문에 신뢰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수업을 마쳤다. 자격증과 공무원 시험 따위에만 열을 올리는 요즘 학생들이 안쓰러우면서도 불만스러운 탓이었다. 강의실에서 나오는데 목이 칼칼했다.
종일 피곤한 하루였다. 하필 야간 수업까지 있어서 종일 학교에 붙어 있어야 했다. 중간의 쉬는 시간에는 새로 맡은 잡지의 인터뷰 준비를 해야 했기에 쉴 틈이 없었다. 원로 건축가와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내 눈이 빨개질 정도로 정독을 했다. 건축학 개론부터 풍수지리까지.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다 되었다. 수연은 평소처럼 샤워를 끝내고 침대 위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다리를 올렸다 내리거나 허리를 들었다 내려놓는 간단한 동작이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너무 오래 서 있거나 앉아 있느라 혹사당한 몸이 버티지 못했다.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겼다. 이제 잠들기만 하면 되었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다음날에 있을 원로 건축가와의 인터뷰를 잘 진행하려면 질문지를 좀 더 다듬어야 했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하기로 했다. 어서 잠드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미션이었다.
어두운 한밤의 고요 속에서, 짙은 피로감 속에서, ‘그것’은 또다시 찾아왔다. 낯선 숨소리. 너무나 규칙적인 들숨과 날숨. 누굴까? 수연은 엉뚱한 상상을 했다. 사십칠 년간 자신을 지켜주던 수호신이 기어코 지쳐 잠들어버린 건가?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되는 순간, 삶은 번번이 새로운 어려움을 가져다주곤 했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왔지만 늘 시간은 모자랐다. 게다가 강아지 생각이 잠을 더 방해했다. 구급차에 실려 간 강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주인이었다면 그 결과를 알려줬을 테지. 하지만 수연은 그저 행인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귀에서 소리가 들렸겠네요?”
“네, 맞아요.”
별것 아니로구나.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의사는 쇠로 된 가늘고 긴 기구를 귓속에 넣었다. 금속성의 물질은 공기흡입식으로 안에 있는 귓밥을 빨아들였다.
귓속에서 공기를 흡입하면, 그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게 될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다른 공기가 곧바로 안을 채울 거였다. 아픈 이별 뒤엔 다시 새로운 인연이 찾아와 준 것처럼. 하지만 어느 것도 처음의 그 사람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지병처럼 늘 공허감에 시달려야 했다. 누군가는 아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했고, 누군가는 결혼하지 않는 연애의 후유증이 우울 체질을 만드는 거라고도 했다.
“됐습니다. 귀지가 고막에 붙어 있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던 거예요.”
부스럭대는 소리를 가끔 듣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병원을 찾은 게 아니었다.
“저, 실은…… 귀에서 숨소리가 들려요.”
의사는 ‘이명’ 증상이라며 정밀 검사를 권했다. 검사지를 받아들고, 하나하나 체크해 나갔다. 47세. 50킬로그램. 프리랜서 잡지 기자이자 대학 강사.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 만성 피로. 예전보다 늙고 매력 없다고 느낌.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있음. 죄의식 다소 있음. 그런 것들의 모음이 자신이란 게 낯설었다.
파도소리, 휘파람 소리, 벨소리, 맥박 소리, 숨소리……. 수연은 숨소리 항목에 체크했다. 그러고 나서 추가로 맥박소리 같기도 하다고 적었다.
방음장치가 되어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 정밀 청각검사를 했다. 이마와 귀 뒤에 전기장치를 부착하고, 이어폰을 낀 상태에서 들려주는 소리에 반응을 해야 했다. 처음엔 크고 또렷했던 소리들이 점차 멀어져 갔다. 기적소리를 남기며 멀리 떠나가는 기차처럼 소리는 점점 아득해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수연은 자기 뇌가 넓고 넓어 끝이 없다는 우주를 닮은 것 같다고 느꼈다. 먼 우주로 떠나간,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로 하고 지구를 떠났다는 보이저 호를 떠올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1977년에 지구를 출발한 보이저 2호는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목성과 토성을 지나 안드로메다에 도착했을까.
“우주 맞아. 가끔씩 눈앞에 별이 보이기도 하잖아? 큭큭.”
동생은 대번에 농담부터 했다.
“카오스 상태인 내 머리가 비로소 코스모스 시대로 옮아가려나 봐.”
“그럼 뭐가 달라지는 건데?”
“글쎄. 적어도 혼란에서 벗어나 질서를 잡아 나가겠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지혜롭게 살든가, 아니면 머리를 포기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든가.”
“쉽게 말하자면, 이제부터 규칙적으로 먹고 자겠다는 뜻이잖아. 맞지?”
의사는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한 거라면서 무조건 잘 먹고 푹 쉬라 했다. 신경안정제와 혈액순환제, 소화제가 들어 있는 약을 처방 받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는 스트레칭을 평소보다 열심히 했다. 종일 사용한 근육을 반대로 휘게 하거나 뭉친 부분을 풀어 주는 단순하고 지루한 동작이었다. 마음 근육 역시 그렇다던가.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기. 너무 오래 누군가를 향해 늘어뜨렸던 길고 긴 그리움의 실타래를 감고 또 감아 중심에다 돌돌 말아 두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지막 동작으로 두 손을 아랫배 위에 올려놓고 깊은 호흡을 했다. 호흡을 따라 아랫배를 천천히 부풀렸다가 서서히 가라앉히기를 반복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심장박동도 서서히 느려졌다. 귓속의 숨소리도 그에 맞추어 속도를 늦추어 갔다. 하지만 깊이 잠자는 자신의 수호신을 흔들어 깨울 수는 없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날 위해 조금만 더 버텨 줘요. 하지만 귓속의 요정은 점점 깊은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보름이 지나도록 귀에서 숨소리가 멈추지 않자, 수연은 마침내 회사에 휴가를 신청했다. 조카 얼굴도 볼 겸 가을 여행을 한다, 셈치고 면회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기분전환을 하면 건강이 좀 나아질 거란 기대도 있었다.
며칠 뒤, 수연은 동생이 모는 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군부대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위병소에 나타난 조카는 낯설게 여겨질 만큼 절도 있는 태도로 경례를 했다. 저절로 웃음이 났다. 힘찬 성인 남자로 보여 대견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병정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저토록 앳된 청춘들에게 전쟁의 짐을 지우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릴 적에 보았던, 무척이나 어른스럽게 여겨졌던 군인 아저씨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대에서 나와 곧장 춘천 시내로 갔다. 조카는 닭갈비에 막국수로도 모자라 피자까지 먹고 나서야 배가 부르다고 했다.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무데고 상관없다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스마트폰으로 근처 명소를 검색하던 동생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소양강 댐에나 갈까? 배 타고 청평사까지 가보자.”
춘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이니 특별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조카가 그 제안에 응하는 순간, 저절로 목적지가 정해졌다.
시내를 벗어나 소양강 댐이라고 쓴 이정표를 따라 국도를 달렸다. 음식점과 펜션이 늘어선 강변길은 여느 여행지 입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언니도 소양강 댐은 처음이지?”
“아니. 오래전에 가본 적이 있는데,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아. 엄청 많은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던 것 말고는.”
“나는 처음인데. 뭐야, 어떤 놈이랑 다녀온 거야?”
동생은 마치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가득했다.
“이모, 거기 거대한 폭포가 있어?”
“아니, 그날만 그랬을 거야. 장마 끝이었거든.”
돌과 흙을 쌓아 만든 아주 거대한 댐엔 홍수로 인해 수량이 무척이나 많았다. 수문이 열리자 물은 거대한 폭포를 이루며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그날, 수연은 구경 나온 사람들 틈에 끼어, 물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벼랑 아래로 아득히 떨어져 산산이 부서뜨리고 싶었던 젊음. 그리고 사랑. 오래전의 자신이 낯선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때로부터 어느새 이십여 년이 흘렀고, 벅차게만 여겨졌던 애욕의 감정도 낡고 퇴색해 버렸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를 일으키며 풀썩,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무기력한 나이.
굽이진 도로를 지나니 커다란 댐 구조물이 눈앞에 펼쳐졌다.
“에이, 실망이야. 난 나이아가라처럼 아주 어마어마한 줄 알았지.”
조카는 실망한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스카이라인이 변하는 대도시를 경험한 요즘 아이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수연의 눈에도 댐은 예전만큼 커 보이지 않았다. 조카는 댐 따위엔 관심 없는지 나무 그늘 밑의 벤치로 가 앉더니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이내 자기 세계로 빠져버렸다. 동생은 커피라도 사오겠다며 카페로 향했다.
수연은 방죽 위로 난 길을 천천히 걸었다. 방죽 위에서 내려다보는 물은 형편없이 줄었고, 수위가 내려가면서 훤히 드러난 황톳빛 산허리는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을 하늘만이 유난히 높고 푸르렀다.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증발해 버린 물 대신 쏟아지는 햇빛으로 댐의 공허를 채우려는 듯 보였다.
“다들 안 들려? 배 타러 가자고오.”
양손에 커피를 든 동생이 말끝을 늘리며 소리쳤다. 수연은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조카도 그제야 마지못해 벤치에서 일어났다.
유람선을 운전하는 조종석 바로 옆, 이인용 간이 의자가 겨우 남아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선장이 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사력식 다목적댐이며, 서울지하철 1호선, 경부고속도로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 시대의 삼대 국책사업으로 건설되었다고 했다. 1967년 착공되었다고 했던가. 어떤 숫자는 평생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따라다니며 의미를 만들어낸다. 1967년이나 1976년, 혹은 유월항쟁이 일어난 1987년 같은. 1967년은 그녀가 태어난 해였다. 말하자면 댐의 나이가 자신과 같다는 거였다. 그토록 풍부했던 소양호 물이 줄어든 모양마저 어쩐지 여성성을 상실해 가는 자기 자신처럼 여겨졌다.
“극심한 가뭄으로 지난여름에는 유람선을 띄울 수도 없었는데, 기우제를 지낸 탓인지 얼마 전에 다행히 비가 내렸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운 좋은 승객들입니다.” 이어 선장은 청평사에 대해 설명했다. 아름다운 전설과 폭포, 귀한 문화재가 있는 천년고찰이니만큼 잘 살펴보라는 당부를 덧붙이면서. 선장은 마지막으로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기우뚱하게 인사를 했다. 피에로처럼 보이는 순한 웃음이었다. 야비하게 권력을 노리거나 악랄하게 부를 축적해 온 자들의 웃음과는 영 달랐다.
유람선이 짙푸른 강물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속도를 더할수록 선체 바깥에서 물보라가 높이 튀었다. 수연은 손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작은 물방울들이 손바닥을 간질이며 조금씩 적셔 왔다.
내민 수연의 손을 누군가 살며시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온몸의 피톨이 손끝으로 쏠리는 듯했다. 평생 놓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너무도 오래 잊고 지냈던 그리운 손길.
제이에게. 그 노래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수연도 그 사람 앞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그가, 물보라를 만지며 제이에게를 부르던 자신의 손을 살며시 잡는 순간에도, 보이저 호는 우주 영상을 지구로 전송하고 있었을까.
그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7년, 언젠가 그가 들려준 바에 따르자면 보이저 호가 지구를 떠나 우주를 향한 여행을 시작하던 해였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따라 수연이네 가족이 시골로 내려간 해이기도 했다. 수연이 초등학교 사학년, 그 사람은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그는 환한 미소가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키 크고, 잘생긴 데다 공부까지 무척 잘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마을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집의 맏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서울의 명문대학으로 진학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수연이네도 서울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회사가 다시 회생하기 시작한 데다, 도회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어머니의 고집이 한몫 했다.
수연이 다시 그 사람을 만난 것은 대학에 진학해서였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원치 않는 여자대학에 입학했기에, 곧바로 교외의 연합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리고 단풍이 곱던 어느 가을날, 수연은 연합동아리 야유회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덥수룩한 머리 모양새에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 낡은 청바지를 걸친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그 미소만은 예전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얼굴 전체가 별처럼 빛나고 있었는데, 아마도 더욱 강해진 눈빛 탓인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손에 들린 사탕 봉지에서 젤리를 하나 꺼내더니 선장에게 건네주었다. 선장은 또다시 예의 그 순진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기우뚱하게 목 인사를 했다. 선장은 아이를 무릎에 잠시 앉히더니, 손가락을 펴서 건너편을 가리켰다.
“꼬마야, 저기 선착장 보이지? 거기 내리면 모든 승객들이 가는 큰길로 가지 말고, 아저씨가 가르쳐주는 왼쪽 숲으로 가보렴. 거기 가면 밤을 아주 많이 주울 수 있단다. 어젯밤에 비바람이 불었으니, 지금쯤 알밤이 많이 떨어졌을 거야.”
수연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밤나무로 울창한 숲은 단풍이 한창이었다.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가을 야유회 이후, 같은 과 선배 언니가 만나자고 해서 들어간 찻집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계획된 거였다. “지금도 고향 마을에 가끔 내려가요?”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 일인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가슴이 한없이 두근거렸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그는 안주머니에서 흰색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고향에 갈 일 있으면, 그 봉투를 자기 부모님께 전해 달라는 거였다. 이번에도 수연은 겨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수연은 탁자 위의 봉투를 집어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실 따름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어쩐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서늘하고 투명하고 환한. 가을햇살 같은 눈빛이었다. 그날 이후로 가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고향집에 들러 편지를 전해 주거나, 그를 대규모 시위집회가 열리는 장소로 안전하게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수연은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같은 과 여학생들이 그러는 것처럼 연하게 화장을 했고, 길게 웨이브 진 머리 모양을 했으며, 하이힐을 신는 게 자연스러웠다. 당시의 수수한 운동권 여학생들과는 옷차림이 사뭇 달랐다. 그 때문인지 그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를 만나기로 한 날이면 저절로 차림새에 신경이 쓰였다. 립스틱을 좀 더 진하게 바르고 눈에 띄게 커다란 귀고리를 달았다. 그것은 일종의 위장 행위였다. 수연은 그를 어두운 뒷골목의 찻집에서 만나곤 했는데, 찻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들은 연인 행세를 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고, 경찰은 번번이 그들을 검문에서 제외시켰다. 말끔한 양복 차림에 금테 안경을 쓴 그는 세상과 타협하려 애쓰는 보통의 직장인으로 보였다. 수연은 그의 야윈 팔 안쪽 깊이 자신의 팔을 끼워 넣고 최대한 몸을 밀착한 채 걸었다. 그럴 때 그에게선 언제나 숲의 향내가 났다.
“이리 좀 와봐, 수연 언니. 저 벼랑에 있는 놈 말이야. 어떻게 저런 데서 살지?” 동생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새까만 야생 염소 한 마리가 벼랑에 앉아 있었다. 하찮은 것에 매여 아웅다웅 다투며 사는 인간 세상을 구경하는 듯 보였다.
하위헌스였던가. 지루한 지구에서부터 한참 높이 올라가서 지구를 내려다보길 권한 철학자가? ‘그렇게 고공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수만 있다면 집을 떠나 먼 나라로 여행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집안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진 일들의 잘잘못을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며, 더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를 내려서 결국은 모든 것들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만큼이나 사람들이 잘살고 있고, 잘 꾸며진 세계가 한둘이 아니라 여럿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위대하다 일컫는 것들에 찬미를 보내지 아니 하게 되고, 또 일반 사람들이 정성을 쏟아 추구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오히려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도 더 전의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놀라울 뿐이다. 모두가 아직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던 시절에 혼자 일찍 눈을 뜬 과학자의 생애는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도 종종 말하곤 했다. “역사의 강물에 현재를, 나를 투영해 보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지.” 그의 주문대로 수연은 종종 머릿속으로 역사의 거대한 강물을 상상하려 애썼고, 그 강물 위에 현재의 자신을 비추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눈앞에서 넘실대는 짙고 푸른 강물이었다. 거기에 비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운 이의 모습이었다.
늘 바쁜 그와 어쩌다가 한강의 유람선을 타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 집회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한강변을 배회하다가 유람선을 탔을 게다. 배에는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행사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때 이른 더위를 식히려고 수연은 무심코 손을 내밀어 물보라를 맞았다. 차가운 물방울이 손등을 적셨다. 물방울의 시원함을 즐기며 무심히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강남 일대에 새로 지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높이를 자랑하는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로 언뜻언뜻 새 솜처럼 하얀 뭉게구름이 지나갔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새벽부터 움직인 탓이었다. 그 때, 누군가 자신의 손을 살며시 잡는 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손이 자신의 손바닥을 온전히 덮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아니,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토록 뜨거운 기다림이 자신의 내부에 고여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물보라 속에서 손을 잡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그 사람은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1979년 대서양 표준시로 아침 8시 4분, 목성 위성인 유로파의 첫 번째 영상이 지구로 전송된 이래로 목성은 더 이상 그 옛날의 목성일 수가 없었던 것처럼.
둘 사이엔 이제 아무 비밀도 없게 되었다. 선배 언니를 통하지 않고도 그가 있는 곳으로 언제든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춘천행 기차표를 끊었다가 물리기를 여러 번 했다. 어쩐지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는 것처럼 여겨졌다. 대규모 시위를 여러 차례 주도해 온 그를 잡으려는 경찰의 감시가 극에 달할 때였다. 수연의 이름도 수배 명단에 올라 있을 거라고 귀띔해 준 건 선배 언니였다. 어쩐지 그와 자신의 관계를 눈치 챈 것 같았다. “무조건 조심해. 아무 때나 찾아가지 말고.” 그때처럼 선배 언니가 미운 적이 없었다. 그녀의 귀띔만 없었더라면, 아무 고민 없이 그를 만나러 갔을 테지만, 알고 난 뒤에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미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나중에야 떠오른 생각이지만, 어쩌면 선배 언니의 방해공작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시절엔 남녀 간의 연애조차 비밀 조직의 통제 속에서 엄격하게 제한되곤 했으니까.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로부터 전갈이 왔다. 선배 언니를 통해서가 아닌, 편지로 직접 알려온 거였다. 수연은 기꺼이 소양강 댐으로 갔다.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길고 지루한 장마 끝이어서 하늘빛이 몹시 칙칙했다. 공기마저 덥고 습했지만 배를 타면 지척인 거리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수연은 사람들 틈에서 배가 뜨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배는 선착장에 단단히 매여 있을 따름이었다.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진 댐의 물을 방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진귀한 장면을 보려고 시민과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단한 물 구경을 하게 되었다면서 몹시 들떠 있었다. 흥분한 사람들이 행여 실족사라도 할까 봐 염려한 경찰이 연신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사람들을 안전지대로 몰아세웠다.
드디어 댐의 수문이 열렸다. 오래 갇혀 있던 강물은 거대한 폭포를 이루며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그날 수연은 구경 나온 시민과 관광객 틈에 끼어, 그 물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하필 그런 사람을 사랑하다니. 남의 눈을 피해, 밤고양이처럼 몰래 찾아가야 볼 수 있는. 게다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라니. 댐 아래 물속으로 아득히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싶었다. 그때, 인파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수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따라가면서 슬쩍 올려다보니 챙 모자를 깊이 눌러쓴 그였다.


배가 선착장에 닿자 사람들은 밀치다시피 하며 서둘러 내렸다. 그 와중에 선착장 난간, 튀어나온 철사에 손톱 끝이 찔렸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심하진 않았다. 소양호의 수량이 줄어든 탓일까. 전과 달리 선착장의 위치가 한결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하긴 너무 오래전 일이니 기억이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이십여 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며 수연은 밤나무 숲 언저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날, 청평사로 향해 나 있는 한적한 길을 걸으며 그가 손가락 끝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저쪽 편, 어린 밤나무가 일렬로 심어진 곳 보여? 지난봄에 스님과 함께 묘목을 심었는데 벌써 저만큼 자랐네. 스님께서 언젠가 밤이 열리면 꼭 따러 오라고 했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그는 머지않아 절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경찰에 은신처가 알려진 것 같다면서. 깜짝 놀란 수연이 물었다. “왜 여직 피하지 않았어요? 경찰이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한참을 침묵하던 끝에 그가 말했다. “그냥. 어쩐지 수연이 이곳에 올 것 같았거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편지를 보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얼굴을 붉혔다. 수연은 그를 따라 밤나무가 심어진 곳으로 들어섰다. 허리춤까지 올라온 키 작은 묘목들이 앞으로나란히를 한 초등학생처럼 한 줄로 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그가 수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수연은 의식을 잃듯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오랜 그리움이 어느새 설움이 되어 있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소양호가 하염없이 물안개를 뿜어대는 저녁나절이었다.
조카와 동생은 어느 결에 음식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에서 마주친 낯익은 사람들도 대부분이 한낮의 햇살을 피해 그늘에 들어가 있었다.
“도토리묵 시켰어. 막걸리하고.”
주인이 고사리와 취나물을 담은 접시와 열무김치, 그리고 막걸리 한 통을 먼저 내왔다. 막걸리는 셋이 한 잔씩 나누자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금세 동이 났다. 동생이 한 병 더 시켰다. 수연은 취해서 절에 갈 거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동생이 말했다.
“걱정 마. 부처님은 속이 넓으셔서 다 이해하실 거야. 알딸딸하게 취해서 걸으면 시간이 빨리 가. 눈 깜짝할 새에 절에 올라가 있으면 좋잖아. 그치, 아들?”
“아니. 엄마, 난 지금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어. 모처럼의 외출인데, 금방 지나가면 아깝잖아. 최대한 지루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어.”
조카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수연은 깜짝 놀랐다. 동생 역시 놀란 모양인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늘 컴퓨터 게임이나 클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월을 낭비하던 아이였다. 그렇기에 더욱 의외였다. 군대 생활이 고되긴 고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바람이 훅, 불었다. 누런 잎들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철 이른 낙엽이었다. 심한 가뭄 탓일까. 나뭇잎은 계절을 앞질러 미처 단풍이 들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수연은 생각했다.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꽃봉오리가 져버린, 계절보다 앞질러 가버린 스물두 살의 봄날에 대해.
그날 밤, 사람들 틈에서 불쑥 나타나 팔을 낚아챈 선배와 함께 보낸 곳은 청평사가 아니었다. 절을 지나 한참을 더 오르면 나타나는, 깊은 산중에 있는 낡은 집이었다. 화전민이 살던 귀틀집이라던가. 구멍 난 지붕 사이로 밤하늘이 훤히 보였다. 장마구름이 걷히면서 별이 하나 둘 떠올랐다. 흥부의 아내가 된 기분이 든다고 했더니 그가 하하, 웃었다. 수연도 따라 웃었다. “밤이 되면 가난한 부부는 밥 대신 별을 먹고 살았을 거야. 그래서 별 같은 아이들을 자꾸자꾸 낳았을 거야.” 그렇게 말한 건 그였던가. 아니면 자신이었던가. 기억이 흐릿했다. 하지만 귀틀집을 사진으로 찍어 따로 보관해 놓고 싶다고 한 것은 분명히 그였다. “작지만 공간 효율이 뛰어난 전통가옥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미래형 주택이 될지 몰라.” 그는 전통가옥의 안방을 다용도실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불을 펴면 침실이요, 밥상을 펴면 식당이요, 책상을 펴면 서재요, 둘러 앉아 놀이를 하면 문화공간이지. 최소 공간으로 모든 생활이 가능하니 얼마나 좋아.” 그러면서 그는 우리 건축은 규모를 줄여 자원을 아끼고 환경을 보호하니 친환경적이고, 마당에 동식물을 길러 심신을 편하게 하니 얼마나 생태적이냐고 했다. 수연은 그와 함께하는 삶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도시의 크고 화려한 아파트에서 살지는 못할 거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산속 귀틀집에서 숨어사는 삶? 막막했다. 어째서 그런 처지의 사람이 좋으냐고 수연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건축학도인 그가 산속 절집에 살면서 전통가옥의 매력에 흠뻑 빠진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수연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얼마나 학교로 돌아가고 싶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을 공부하면서 공간적 상상력을 활짝 펼치는 개인적 삶이 왜 그에게는 그토록 힘든 게 되어버렸을까. 수연은 독재 권력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은 잘 알지 못했지만,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건축학도가 산속에 숨어서 살아야 하는 이상한 나라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향해 품은 그의 꿈과 희망을 깊이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 그의 꿈과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수행하듯 온 생을 살아낼 용기가 나지 않은 탓이었다.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철사에 찔린 자리에 천천히 고인 거였다. 수연은 점점 커져 가는 핏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모, 헤모글로빈에 대해 알아요?”
“혈액 속의 붉은 색조?”
“맞아요, 그거. 폴란드 태생의 저명한 화학자이자 시인인 로알드 호프만이 말하기를, 헤모글로빈은 바로크 예술처럼 화려한 분자래요. 원자 일만 개가, 그러니까 주로 수소 원자와 탄소 원자인데요, 그것들이 결합해서 사슬 4개를 이루고, 그 사슬이 얽혀서 헤모글로빈이 된대요. 마치 촌충이 교미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네요.”
“촌충이 아름답다는 건 받아들이기가 좀…… 교미할 때는 아름다워지나 보지?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이 몸 안에 램프를 켠 것처럼 환해지듯이?”
“재미있는 상상이네요, 이모.”
“분자의 세계는 너무 어렵고 복잡해.”
“알고 보면 그다지 복잡하지 않아요. 나름 질서가 있거든요. 얽힌 사슬 사이에 얇은 판 조각 같은 것이 4개 끼어 있는데, 그걸 ‘헴’이라고 불러요. 그 헴들 각각의 한가운데에 철 원자 하나가 홀로 박혀 있지요. 그 철 원자 때문에 헤모글로빈이 빨간색이에요. 우리가 호흡할 때, 헴 하나에 산소 원자 2개가 결합해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조카는 어느새 의젓한 말투로 화학도답게 설명하고 있었다. 사춘기를 유난히 힘들게 보낸 아이가 훌쩍 성장해 있는 모습이 대견했다. 감동어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동생이 놀란 듯이 물었다.
“일만 개의 원자가 동원된다고?”
“네.”
동생이 재차 물었다.
“고작 산소 원자 8개를 간수하려고…… 어쩐지 억울한 느낌 들지 않아?”
“대신 놀랄 만큼 아름답잖아요, 엄마. 아까 말한 사슬이 어떻게 얽혀 있느냐면, 사슬 사이에 주머니가 형성되도록 얽혀 있어요. 그리고 그 주머니에는 폐 속의 산소가 완벽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죠. 마치 승객이 자동차에 타듯이 그 주머니에 산소가 들어가면, 헤모글로빈 분자의 모양이 바뀌어서 주머니가 닫힙니다. 그러면서 색깔도 밝은 빨간색으로 바뀌고요. 산소를 실은 헤모글로빈이 뇌나 근육에 도달하면, 사슬이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면서 산소가 방출됩니다. 그러면 헤모글로빈의 색깔도 다시 어두운 빨간색으로 돌아가고요. 그래서 정맥의 피는 검붉은색이죠.”
설명을 한참 듣던 수연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마치 국화빵틀이 뱅글뱅글 도는 모습 같아. 밀가루 반죽 가운데에 붉은 팥을 넣으면 뚜껑이 닫히고, 잠시 뒤엔 달콤한 빵을 꺼내 먹기만 하면 되지.”
동생이 갑자기 푸하하, 웃음보를 터뜨렸다.
“언니, 벌써 배고파? 그럼 도토리묵이라도 많이 먹어.”
헤모글로빈…….
사실, 조카한테 헤모글로빈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연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국화빵틀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떠오른 건 오래전에 본 주목나무 열매였다. 청평사 대웅전 뒷마당에 심어져 있던 주목나무 열매. 아름드리나무에 매달린 빨갛고 동그란 열매. 붉은 과육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예쁘장한 열매.
수연 자신과 그, 그리고 태중에 있던 아이. 붉은 철 원자 하나에 산소 2개가 붙어 있는 모양. 그 모양은 진정 아름다웠을까.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연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지만 그녀의 결정은 냉정한 것이었다. 아니었다. 냉정히 돌아선 건 그가 먼저였다. 그날 이후로 그로부터 소식이 끊겼다. 청평사로 다시 찾아갔지만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대웅전 뒤로 난 숲길을 혼자 걸어 귀틀집까지 찾아갔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경찰이 배를 타고 오고 있다는 전갈을 듣자, 그는 그 길로 산을 넘어 도망쳤다고 했다. 그러고는 소식이 끊겼다. 찬 서리 하얗게 맞은 주목만이 예전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귀틀집을 뒤로 하고 내려오면서 수연은 결심했다. 평생 숨어 지내거나 감옥에 들락거릴 남자를 기다리며 살진 않겠다고. 몸속에 자리 잡은, 주목 열매만큼 부풀어 있던 핏덩이를 없애고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수연은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전생의 기억을 잊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살겠다고. 오직 미래만 생각하며 살겠다고. 그러려고 무척이나 애썼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수연의 영혼 속 램프의 불은 번번이 꺼져버렸고, 그녀는 매번 검붉은 색조로 돌아와 있었다. 수연은 결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혼한 뒤, 수연은 그의 고향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밝은 빛을 받으며 웃고 있었다. 자기 고향집 대청마루에 걸린 사진 속에서,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채. 그의 죽음은 어느 등산객의 실족사로 처리되어 있었다.
수만 개의 원자들에 둘러싸인 철 원자. 그것은 주목나무 열매처럼 붉고 둥글까? 절집에서 그 사람을 잃고 혼자 내려오던 날, 흐릿한 눈에 비친, 대웅전 뒤뜰에서 저 홀로 붉었던 그 열매들. 첫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충혈 된 눈망울들…….
울창한 숲길을 한참 걸으니 다시 하늘이 파랗게 열렸다. 곧이어 더러운 것을 맑게 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평화롭게 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고찰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많이 변해 있었다.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외관상으로는 천년 고찰의 위엄을 회복한 듯 보였지만,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번잡함과 소란스러움도 늘었다.
일주문이 없는 절은 대신 회전문을 품고 있었다.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회전문은 가운데 한 칸은 통로로 이용되고 양쪽 두 칸에는 마루가 깔려 있었다. 그 뒤로는 아름다운 회랑이 길게 잇대어 지어져서 여느 절과는 다른 특색을 드러냈다.
“아, 뭐야. 난 회전하는 신기한 문인 줄 알았잖아.”
조카가 어이없다는 듯이 큰 소리를 내었다. 곧이어 도착한 동생 역시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수연은 피식, 웃고 나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윤회를 거듭하는 생명체의 삶을 깨우치게 한다는 뜻을 지닌 문이야. 마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제대로 보인대.”
수연의 말에 위안을 받았는지 조카 얼굴이 다시 조금 펴졌다. 그러더니 곧 군복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천진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난 전생에 뭐였을까. 혹시 사슴이나 기린? 내 목이 유난히 긴 것 같지 않아, 엄마?”
“이 녀석아, 뭐긴 뭐였겠니. 내 원수였겠지. 그러니 에미 속을 그리 썩였겠지.”
수연은 내내 토닥거리는 동생과 조카를 부러운 눈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회전문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수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오래전에 그가 직접 심었다는 밤나무 숲이 보일 듯 말 듯 눈에 어렸다. 그와 자신 사이에 생겨난, 그 작은 생명체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느새 스물을 훌쩍 넘겼을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의 램프를 환히 밝힐 나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수연의 인생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보이저 호가 지구로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우주 여행자 보이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듯이, 멀리 떠나간 사람들도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두고두고 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것이 고통스럽든지, 혹은 아름답든지 간에. 오래전, 참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말하던 그 사람은 지금쯤 별이 되어 있을까. 저 우주 멀리까지 올라가 내려다보고 있을까. 목성과 토성을 지나 우주성간을 떠도는 보이저 호처럼? 그는 역사의 긴 강을 내려다보듯 오늘의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우리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숱한 절망과 흐릿한 희망을?
수연은 비로소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휴식이 필요함을 알리기 위해, 더불어 자신을 이리로 데려오기 위해, 그가 찾아온 거라 여기기로 했다. 이제 밤이면 자신의 귀에서 새근새근 잠자는 요정을 일부러 깨우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 머물고 싶을 때까지 머물다가, 어느 순간 다시 먼 우주로 떠나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다시 유람선으로 돌아와 보니, 소년네 가족도 돌아와 있었다. 소년의 손에 제법 묵직해 보이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조카가 그게 뭐냐고 묻자, “밤이요. 토실토실 알밤이요.”라며 자랑스레 봉투를 열어 보여주었다. 소년은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그 봉지를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빙그레 바라보던 수연은 긴급동물보호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휴일인데도 웬 젊은이가 전화를 받았다.
“얼마 전에 사고 당한 강아지를 신고한 사람이데요, 강아지는 좀 어떤가요?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저라도 데려와 키울 수 있을까요?”
선장이 배의 시동을 걸었다. 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푸른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작가소개 / 김재영(소설가)

- 1966년 여주 출생.
성균관대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0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작품집으로 『코끼리』, 『폭식』이 있음.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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