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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당신의 사라진 미소는 어디에?!②

  • 작성일 2015-09-14
  • 조회수 1,371


[중편연재]



당신의 사라진 미소는 어디에?! (제2회)



김태용



삽화-당신의-사라진미소


16살 이후 나는 버진이었던 적이 없다. * 정말 그런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 누군가를 찾아 나는 뉴욕을 거쳐 볼티모어에 왔다. 그 누군가는 죽었고 더 이상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7년째 살고 있다. 솔랑쥐 때문일까. 모르겠다. 여기선 누구도 내가 버진이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언제까지 버진이었어?”
대답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물음은 이곳에서 금기 같은 것이다. 총이 있다면 쏠지도 모른다.
“한 번만 더 그딴 걸 물어보면 니 똥구멍에 총알을 박아주겠어!”
“I'm gonna shoot your ass if you ask that again!”
아무리 흉내 내도 영어로는 누군가에게 겁을 주기가 힘들다. 다 필요 없고 이 말이면 모든 게 통하는 것 같다.
“You! Fucking Shit! You!”
여기서 손가락으로 You를 가리키는 게 중요하다. You에게 잡혀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잘려도 할 수 없다. 그 누군가는 You가 될 수 있을까. You는 없다. You are not hear. 발음할 수 없다. 발음할 수 없는 억양 속에서, 억양의 영향 아래서 점점 살이 찌고 입술이 두꺼워지고 방귀 냄새가 지독해지고 있다. You가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넌 완전히 토마토버터가 됐구나. 씨발. 나는 말할 것이다.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누군가는 죽어 있었고, ‘The Baltimore Sun’에 기사가 짤막하게 나왔을 뿐이다. 20십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신원미상의 동양인 여자가 볼티모어 웨스트사이드 폐차장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성폭행과 온몸에 구타를 당했고, 설골이 파열되었고 왼쪽 가슴이 통조림 캔 뚜껑 같은 것으로 도려 졌다. 그리고 팔에는 주사 자국이 있었는데 중국마사지업소에서 일하는 여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써 있었다. 연락이 끊긴 누군가의 죽음을 확인하기까지 정확히 11개월 22일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이름 때문이었다. 경찰이 내민 사건 파일에는 이름이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
Ji Chayeong.
이차정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지차영이 됐는지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 이차정을 버리고 미국에서 지차영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다녔나. 성과 이름의 끝만 교묘하게 바꿔서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나. 어쩌면 지차영은 이차정과 다른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라고 되뇔수록 불길한 확신이 들었고 이차정은 지차영이 되어 죽었다. 아니 죽어서 지차영이 되었다. 이차정은 이차정이지 지차영 같지 않다. 이차정의 얼굴, 목소리, 걸음걸이는 지차영이라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의 언니 이차정. 언니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언니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언니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언니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 언니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연결된 자신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언니는 말했었던가. 말하지 않았다면 썼을 것이다. 나는 아직 언니의 글을 읽은 적은 없지만, 읽을 가능성도 없지만, 언니는 그렇게 썼을 것이다. 차라리 너 자신에 대해서만 떠올려. 너 자신에 대해서만 말해. 언니는 썼을 것이다.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적 언니는 이차정이란 이름을 싫어했다.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중학교 교장선생이었던 친구에게 술을 사주고 받아왔다던 언니의 이름을 따라 세 살 아래의 나도 이차미가 되었다. 이차정이나 이차미나 별로 다른 것은 없어 보였다. 자랑할 ‘차(?)’라는 뜻은 모르겠고, 이름과 달리 언니는 정이 없고 나는 아름답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 언니는 이름을 바꾸겠다고, 마음이 약해 결별을 선언하고도 결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부모한테 엄포를 놓곤 했는데 어떤 이름으로 바꿀지는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할 무렵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작가의 이름으로 괜찮다는 생각을 했는지 그런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언니는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아니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가 맞겠지만, 왠지 언니는 글을 쓰는 것보다 작가가 우위에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나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 할 수는 없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그녀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을까. 너는 너도 모르는 말을 하는 버릇 좀 고쳐. 인상을 찌푸리며 언니는 나의 말을 잘랐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어도 그녀는 끝내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의 방은 옷과 책으로 가득했는데, 바닥과 침대에도 무슨 장식처럼 책이 널려 있었다. 모든 책의 첫 장에는 일부러 흘려 쓴 이차정이란 이름의 싸인을 해놓았다. 일종의 책을 통한 허영과 과시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책으로 나의 머리를 때린 적은 없지만 책이라고는 아무 생각 없이 다니고 있던 국제통상학과의 교재들과 토플 책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로맨스 소설 몇 권만 있는 나의 책상을 바라보며 그녀는 혀를 차곤 했다.
현실보다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언니는 행동하곤 했다. 자신의 물건에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나의 물건들을 몰래 사용하는 것도 그런 연유였는지 모르겠다. 사놓고 아까워서 한 번도 신지 않은 파란 구두를 훔쳐 신고 나간 것을 알고 술에 취해 밤늦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에게 화를 내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 발에 맞지 않는 룸메이트의 구두를 몰래 신고 나가 돌아다니다 학교 선배를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다 구두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 다시 혼자가 되어 악취를 풍기는 천변을 걷다가 다리를 삐고 집 앞에서 친구를 마주치게 되는 설정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횡설수설 했다. 자신은 일부러 내 구두를 신었고 나에게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었어. 남자들이 보기에 우리가 구두에 집착하는 거 같지만 정말 그렇지 않니? 너라면 어떡할 거 같아? 둘 다의 입장에서 말이야.”
“넌 좀 미친 것 같아.”
“미친 거 맞아. 소설가가 되면 이 언니가 더 멋진 구두 사줄게. 헤헤.”
“술 냄새나. 꺼져.”
“이 년이.”
“꺼지라고.”
그 정도는 양호한 편이었다. 언니는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언니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그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를 데려오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 내 방에서 둘이 무언가 일을 치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예감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언니가 나의 삶을 알게 모르게 엿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그런 언니의 시선이 몸에 밴 탓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아니라고 부정하겠지만 언니의 유일한 자랑은 나였다. 그 자랑은 위선과 질투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방을 비울 때 침대와 책상에 일부러 물건들을 아슬아슬하게 놓아두곤 했는데 예상대로 위치와 모양이 달라져 있곤 했다. 어떤 호기심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선배의 강제적 권유로 고등학교 방송반 기술부 활동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전자상가에서 휴대용 일제 녹음기를 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다음날이 연휴이고 저녁 퇴근시간이어서 그런지 지하철에 사람들이 가득했고 화장품과 음식 냄새, 땀 냄새가 진동했다.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딱딱한 것이 내 엉덩이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천천히 엉덩이에 대고 비벼대고 있었다. 내가 몸을 비틀자 동작이 멈췄지만 잠시 후 다시 시작됐다. 말로만 들었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창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은 경계가 없이 겹쳐진 상태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정차할 역까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한 정거장을 갈 동안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하철이 멈추고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가자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이미 몸을 떼고 거리를 두고 있던 남자가 서둘러 등을 보이며 문 밖으로 달아났다. 초록색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고 이제 막 미용실에서 나온 듯 뒷머리가 깔끔해 보였다. 남자는 지하철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옆모습도 보이지 않게 몸을 틀어 계속 걸음을 빨리해 걸어갔다. 말랐고 목이 길었다.
“차미는 목이 긴 사람을 좋아하는 구나.”
어릴 적 학교에서 그림을 그릴 때 선생님이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던가. 집으로 돌아와 바지와 팬티를 벗어 한번 냄새를 맡은 뒤 휴지통에 버렸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내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뾰족한 부위를 내 속에 넣고 움직이던 남자들의 얼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집에 언니만 남게 되는 날이면 녹음기를 켜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채 학교를 가거나 외출을 하기 시작했다. 돌아와 녹음기를 켜보면 잡음소리만 들릴 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까봐 소리를 줄이고 침대에 누워 확인을 했다. 어떤 실망감이 나를 더 녹음에 집착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어디에 놓으면 더 녹음이 잘 되는지 위치를 따져보기도 하고 내 목소리를 녹음해 들어보기도 했다. 나의 목소리는 먹기 싫은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듯 어색했지만 녹음의 성능은 나무랄 데 없었다.
녹음기를 들고 침대 아래로 들어가 누워 있었다. 왜 내가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어야 하지. 생각하면서도 먼지를 묻혀가며 몸을 굴려 보기도 하고 침대에 깔아 둔 분홍색 시트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관속에 갇혀 납작해진다는 것,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나답지 않은 감상에 빠졌다. 누워 있다는 것. 누워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바로 눈앞에 있고 그것은 딱딱한 어둠의 속이라는 것.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새삼 신비스럽게 느껴지기만 한다는 것. 손목시계를 차고 있어도 지금이 몇 시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는 것. 결국 나란 인간은 하나의 먼지덩이에 불과하다는 것. 자랑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이 이렇게 침대 밑에 누워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게 삶의 전부인지 모른다는 것. 어떤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어느 순간 이런 게 죽은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 나란 사람, 죽었구나.
언니도 가끔 침대 아래로 들어가 누워 있을까. 엄마도 가끔 침대 아래로 들어가 누워 있을까. 아빠도 가끔 다른 여자의 침대 아래로 들어가 누워 있을까. 헤어진 남자친구들도 가끔 침대 아래로 들어가 누워 있을까. 왜 그들은 한 번도 나를 침대 아래로 데리고 들어가 누워 있지 않았을까.
“우리 침대 아래로 들어갈까?”
“거긴 왜?”
“몰라. 막 들어가고 싶네.”
“좋을까?”
“좋지 않을까? 침대 밑에 함께 들어간다는 건.”
“좋을까?”
“그러고 싶어. 넌 안 그래?”
“나도 그래.”
세제나 락스 냄새가 나는 침대 위에서, 침대 위에서만 그들은 내 몸을 눌렀다. 감정 없는 멜로디 같은 애무가 끝나면 엇박자와 분열된 리듬 속에서 서둘러 누르기만 했다. 그들의 성의 없는 누름과 나의 과장된 목소리는 무엇을 위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을까. 마지막으로 사귄 법대생 남자의 콧김은 지독했다. 그의 뜨거운 콧김이 나의 팬티에 닿을 때마다 불쾌했지만 왜 나는 가만히 있었을까. 심지어 간지럽다고 입을 벌려 덧니를 보여주며 교태를 부렸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줘야 하는 거라고 나는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는 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자랑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이 그랬다. 그 새끼는 여전히 다른 여자의 팬티에 콧김을 불어넣고 있을 것이다. 니 콧김은 정말 더러워. 라고 발로 그의 머리를 밀어 차는 여자가 있다면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 머릿속에 달라붙는 기억을 물리치려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 순간 잠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한동안 누구도 손대지 않는 나의 음모를 만지작거리며 마치 남의 것인 양 아 부드럽다, 아 부드러워, 뭐 이런 게 다 부드럽지, 하다가 더 깊숙이 손을 넣어 어설픈 자위를 한 뒤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고 무언가 딱딱한 것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했다. 지금이 어떤 계절일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 겨울 겨울. 아니. 아니.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계절의 끝에 나는 매달려 있다. 그 사이 몸이 좀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내 몸이 아닌 고깃덩어리를 끄집어내듯 침대 밑에서 나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언니의 방문은 닫혀 있었고, 문틈 사이로 음악 소리가 새어나왔다. Mein Zimmer nicht ber?hren. 문 앞에는 독일어로 내 방을 만지지 말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다. 미친 여자가 확실하다.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실 때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드라마를 보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너 방에 있었니?”
“아빠는?”
“몰라. 아, 이 인간 정말. 엄마 이혼할까?”
“맘대로 해.”
나는 입술 아래로 주스를 흘렸고 엄마는 나 때문이진 드라마 때문인지 깔깔 대며 웃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나의 예감을 실현 시킬 수 있었다. 녹음기를 틀자 한참 있다가 문이 열리고 남자와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일어나 문을 잠근 뒤 한 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았다. 옷을 만지고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부스럭대고 천천히 벗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셔츠의 윗단추를 잠갔다. 웃음소리 뒤에 둘은 서로의 몸을 만지고 핥으면서 시답잖은 문학 이야기를 했는데 당연히 그들의 몸이 발생시키는 소음에 더 집중이 됐다. 목소리와 몸소리는 데시벨이 달라 믹서의 볼륨 조절을 다르게 해야 된다고 방송반 라디오드라마를 만들 때 들었던 말이 왜 그 순간에 떠올랐을까. 둘의 손이 서로의 몸에 닿을 때마다 주파수의 파장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소리에 집중한 적이 있었나. 그렇다. 나는 어떤 가청의 영역에서 육체의 소리에 접촉하고 있던 것이다. 대화로 미루어 짐작하면 일을 치르기 전 나의 침대가 더럽혀질까봐 큰 수건을 깔았고, 그 수건은 남자가 챙겨온 것 같았다.
“왜 검은 색 수건은 없을까?”
“그러게. 하지만 어딘가 있지 않을까.”
“종희씨, 다음엔 검은색 수건을 준비해줘.”
“검은색…… 검은색이라.”
“검은 것이 아름답잖아.”
언니는 남자에게 종희씨라고 부르고 남자는 언니에게 차정씨라고 불렀다. 둘 다 역할놀이를 하는 배우 같았는데 작가들이 변태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나는 그들이 작가 흉내를 어설프게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관도 문장력도 형편없는 3류 작가를 말이다. 저런 게 포르노인가. 친구들의 권유에도 보지 않던 포르노를 이렇게 보는 건가. 아니 청취하는 건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얼마나 상상력의 격차가 있을까. 지금은 포르노를 청취할 시간입니다. 이왕 끌려 들어온 거 방송반에서 아나운서를 하겠다고 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목소리도 허스키하다는 이유로 기술부에 배치되었다. 발육이 남다르고 여드름이 가득한 여자애가 메인 아나운서를 맡았는데 목소리만으로도 교내에서 인기를 꽤 끌었다. 목소리를 훔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점점 거세지는 그들의 격렬한 소음에 입에 침이 마르고 다리가 꼬였다. 언니의 목소리와 신음소리는 너무나 낯설어서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중저음인 종희씨의 음성은 소심하게 들렸고 그 소심함은 상대를 배려해주는 척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여느 남자들이 갖고 있는 적당한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이차정씨는 피부를 스치는 소리 사이사이 이상한 말로 종희씨를 자극시키려 했다.
“천천히. 천천히. 종희씨. 아아. 천천히.”
“어어. 차정씨. 쉽지 않아.”
“댈러웨이 부인의 몸을 상상해봐.”
“불가능해.”
“왜?”
“끝까지 읽지 못하겠어.”
“그럼 램지 부인을.”
“마찬가지야.”
“제길, 차라리 울프 여사를.”
“미쳤어.”
“눈 감지 마.”
“…….”
“너 또 내 동생을 생각하는 거지? 그치?”
“…….”
언니가 종희씨의 몸 어딘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뛰고 내가 뺨을 맞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 둘은 언제부터 그들의 성적 유희에 나를 동참시켰을까. 불쾌하고 불쾌했지만 불쾌함의 우유가 내 안으로 안으로만 쏟아지고 있었다. 종희씨의 얼굴이 몹시 궁금해졌다. 머리는 짧지도 길지도 않겠지. 가느다란 쌍꺼풀이 있고 코는 적당히 오뚝하고 입술은 두꺼울까. 어깨는 약간 구부정하고 손등의 퍼런 심줄이 보이겠지. 성기는? 성기는? 성기란 무엇인가?! 종희씨의 발기된 성기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나를 향해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 내가 남의 남자 성기나 상상하고 있어나 하나. 축축하고 비릿한 두 덩어리의 몸이 나를 꼼짝 못하게 옭아맸다. 이불을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꼈다. 그들은 나를 돌돌이로 만들어놓고 지겨울 정도로 절정의 시간을 미루면서 티격태격 하고 있었다.
“말했잖아. 걘 16살 이후 버진이었던 적이 없어.”
“그건 너 아냐?”
“다시 말해봐.”
“난 너의 말을 못 믿겠어.”
“언제부터?”
“그날부터.”
“그날 이라니?”
“…….”
“뭐해, 묻잖아!”
“…….”
“계속 해!”
“더 이상 못하겠다!”
“씨발!”
나 역시 언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무슨 근거로 언니는 그런 말을 하고 있을까. 성적으로 흥분했던 몸의 찌릿함이 사라지고 허리가 펴졌다. 손 마디 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힌 사람처럼 신경이 곤두섰다. 정말. 무슨 근거로. 미친년이. 그런 말을. 함부로. 자기 동생에 대해. 할 수 있나. 언니가 맞나. 16살 이후. 내가. 버진. 버진. 버진. 나의 일기장을 훔쳐보았나. 나는 일기장이 없어. 일기장이 없으니 일기를 쓰지 않았고. 일기장이 있어도 그림이나 그리다 버리겠지. 다이어리를 선물로 주는 남자들은 다 형편없는 인간들이었지. 어쩌라고. 자기에 대해 좀 쓰라는 건가. 16살 이전과 이후의 나를 알고 싶나. 일기장이 있어도 버진이라고는 쓰지 않아. 일기장. 일기장. 빌어먹을. 미친년이. 일기를 쓰듯이. 일기나 쓰고 자빠졌네. 일기장. 일기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나 쓰는 거지. 변명할 게 많은 거야. 죄를 지어놓고. 변명을 하는 거지. 죄를 짓고. 변명을 하는 거야. 죄. 변명. 죄. 변명. 죄. 변명. 죄. 변명. 죄. 변명. 끝이 없는 거야. 변명을 하기 위해 죄를 짓지. 결국 일기를 쓰기 위해 죄를 짓는 거야. 미쳤어. 병신 같은 짓이야. 언니는 병신 짓만 하고 있지. 일기도 쓰고. 자주 자주. 미친 한 페이지를. 일기를. 마치 보란 듯이. 책상에. 펼쳐놓고. 나갔지. 방을 비웠지. 나는 언니 방을 만졌고. 방을 만지지 말라니. 방을 좀 만져 달라는 거 아니야. 아니냐고. 만지고 싶지도 않은데 만지게 만들고 있지. 미친 년. 일기. 미친 일기. 난 그것을 본 적이 있어. 만진 거야. 앞 뒤 문맥이 없고 가끔 독일어가 뒤섞여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아직도 기억나는 글. 13월 421일. 날씨 없음. 책과 죽도록 섹스. 이게 뭐야. 날짜가 왜 이래. 일기가 맞나. 책을 읽고 죽도록 섹스를 했다는 건지. 책과 죽도록 섹스를 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 그게 그건가. 걸레가 된 책. 찢어진 섹스. 책을 펼쳐 거기다 대고 막 비벼대기도 했을까. 글자들이 젖었을까. 애액 속에서 미쳐 날뛰며 서로의 모음과 자음을 바꿔치기 했을까. 그렇다면 어떤 책으로?! 일기장만한 게 없겠지. 온통 자기에 대해 쓴 글만 있는 책으로 자기의 가장 은밀하고 더러운 부위에 비벼댄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거지. 아니 소설을 쓰고 있었나. 소설이라니. 버진이 찢어지는 소리다. 섹스만 하다 죽어버려. 어떻게. 그런 말을. 나를 팔아서. 나를 자랑삼아. 언니도 아니다. 씨발.
언니는 종희씨를 상대로 또 다른 소설을 쓰고 있던 것이다. 16살 이후 버진이었던 적이 없는 허구의 동생을 등장시켜서 말이다. 글에는 관심이 없지만 고등학교 내내 국어 실력이 뛰어났던 나는 그 말의 문법적 오류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16살 이후 버진이었던 적이 없다니. 16살 이후 영영 버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뭐 그런 뜻인가. 그런 것이 문학적 수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왜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의 입을 찢어야 할까. 구두로 머리를 찍어 버릴까. 찢어진 입 속에 구두를 처넣어 버릴까.
둘은 결국 행위를 멈추고 침묵 속에서 침대를 정리하는 듯한 소리를 만들곤 문을 열고 나갔다. 보이지 않아도 침묵의 잡음 속에서 둘의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뭐야,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나잖아. 그렇다면 내가 원했던 것은 뭐지. 하나의 발소리 뒤에 다른 발소리가 이어졌다. 그녀가 먼저 걸어갔고 그가 뒤를 따라 갔다. 그가 먼저 걸어갔고 그녀가 뒤를 따라갔다. 차정씨는 그녀가 되고 종희씨는 그가 될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적 주인공은 내가 아닌가. 내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절정이 없고 끝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나의 방 같지 않은 공간의 문은 닫혔고 어리석은 연인이 남긴 육체의 잔향이 녹음기의 작은 입력 장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둘의 3류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 것이다. 나는 냉정한 독자가 되어 녹음기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려 잠갔다. 침대의 시트를 걷어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마른 뺨을 비비다 거울을 보며 머리 스타일을 바꿔볼까 하면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숱이 너무 많다. 언니는 나의 숱을 부러워했지. 남자들도 나의 숱 많은 머리뭉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움켜쥐곤 했지. 나는 왜 그런 것들을 내버려뒀을까. 넌 긴 머리가 좋아. 넌 짧은 머리가 좋아. 너의 머리라면 다 좋아.
“왜 머리카락이라고 하지 않고 머리라고 해요?”
선생님에게 물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고 내 머리를 쥐어박았지. 22살의 머리카락을 갖고 9살의 머리 시절을 생각한다. 난 좀 모자란 열등생이었나. 이 모든 게 미친년 때문이다. 미친 언니. 미친 머리의 소유자. 언니와 나는 한 번도 같은 시기에 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적이 없다. 어릴 적 머리카락을 뽑아 싸움을 하면 내가 항상 이겼다. 헝클어진 머리를 들고 창문을 열었다. 적당히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아파트 11층에서 내려다보는 창밖은 어두웠고 간간히 차들이 지나갈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언니가 말해준 무슨 무슨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어져 있고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자주 보던 풍경이 무섭고 슬프게 보였다. 이런 걸 에피파니라고 하나. 언니는 습관적으로 말했다. 이 집에서는 에피파니를 기대할 수가 없어. 에피파니라니. 우유 접시를 엎는 털 많은 고양이의 이름에나 갖다 붙이라지. 셔츠의 윗단추를 풀었다. 셔츠를 벗고 맨가슴 만졌다. 왼쪽과 오른쪽 가슴 크기가 같은 여자도 있을까. 창틀에 가슴을 짓누르며 젖을 짰다. 이차정. 너는 도대체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한동안 언니가 나를 부를 때마다 죄를 지은 것처럼 깜짝깜짝 놀래서 은근슬쩍 피해 다녔다. 한편으로는 언니를 마주치고 언니의 방을 지날 때마다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언니의 방에 녹음기를 숨겨둘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언니에 대한 적의가 오히려 더 이상 나의 악취미를 지속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역시 비슷한 심리적 상황에서 녹음된 소리를 삭제하려다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남자와 돌돌이가 된 채 오로지 육체적 명령에 따라 녹음기를 틀고 성적 유희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언니의 침대 아래서 벙어리장갑이이 된 손으로 서로의 성기를 덮고 그럴 수도 있었다.
“오해하지마. 16살 이후 버진이었던 적이 없는 건 우리 언니지 내가 아니야. 그녀는 소설을 쓰고 있는 거야. 제 정신이 아닌 거지.”
남자들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을까. 우리들의 성적 체험은 이전보다 황홀해질 수 있을까. 살아가가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한번쯤 운 좋게도 빗겨나갔다면 그 당시의 일이 그랬다. 그날 이후 언니는 종희씨를 집에 데리고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것 역시 나의 예감이지만 뭔가 잘 안 풀리는 언니의 심정이 얼굴과 행동에서 드러났다.
“좀 천천히 먹어라.”
러닝셔츠에 올이 늘어난 회색 카디건을 걸친 아빠가 말했다. 언니는 평소 냄새가 난다고 잘 먹지도 않은 꼬리곰탕에 밥을 말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엄마는 꼬리곰탕을 한 솥 끓여놓고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 오랜만에 아빠와 식사를 하고 있는 일요일 저녁이었다.
“글은 잘 돼가?”
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뻘건 양배추김치 조각이 밥그릇에 담겨 있었다. 침묵 속에서 다시 밥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의 얼굴에 날카로운 그늘이 져 있었고, 그 그늘에 나는 더 진한 연필로 칠을 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도 글 쓴다고 했니?”
“…….”
“연애는 양배추 같은 거다.”
“그만 일어날게요.”
언니가 젓가락을 식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차야.”
언니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빠를 보았다. 어릴 적 아빠는 우리 둘을 차차, 라고 부르곤 했다. 마치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을 부르듯 그랬다. 차차, 라는 소리를 십년 넘게 들어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 이혼한다. 이 꼬리곰탕은 좀 생각이 나겠지만.”
“…….”
“…….”
“차차야, 연애는 양배추 같은 거다. 조심해라.”
“조심하세요.”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릇을 들고 일어나 개수대에 소리 나게 던져 넣은 뒤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뭐 또 일기나 쓰겠지. 아빠는 감출 수 없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언니와 사이좋게 지내라.”
“어디서 살아요?”
“상하이.”
“누구랑?”
“…….”
“축하해요.”
“놀러 와라.”
아빠와의 마지막 저녁 만찬은 그렇게 끝났다. 언니에 대한 호기심이 아빠한테로 옮겨갔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둘 다 양배추 문제일 뿐이다. 이미 합의가 끝난 부모의 법적 관계는 엄마가 돌아오자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집과 위자료를 받은 엄마는 아빠와 함께 쓰던 그릇들과 은수저 세트까지 버렸고 아빠는 동그란 양배추가 되어 초고속으로 상하이로 날아갔다. 상하이의 여인이 누구일까 궁금했고, 놀러 오라는 말이 진심인지도 알고 싶었지만 잊을만하면 언니와 나에게 오는 전화와 편지에는 그저 형식적인 안부만 있을 뿐 놀러 오라는 말은 없었다. 엄마는 식료품을 비롯한 일상용품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인 것에 대해 분개를 했고, 중국관광객들을 볼 때마다 징그럽다고 욕을 하곤 했다. 설마 아빠가 중국 여인과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회사에서 상하이 출장이 잦던 이유로 그저 더 넓은 곳에서 더 눈에 안 띠게 생활하고 싶어 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일 년이 지날 무렵 아빠의 존재는 거실 벽지의 누런 흔적으로만 남았다.
대학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던 언니는 갑자기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뉴욕에 대학 선배 부부가 살고 있는데 거기서 반년정도 머물러 글을 쓰고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겠다고 했다. 진로와 모색이라는 말이 언니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아 거짓말처럼만 들렸다. 식탁에 앉아 물두부와 갓김치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던 엄마는 맘대로 해라, 라고 하며 자신도 이제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탈출하다시피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진주에서 아버지를 만나 서울로 온 엄마는 텔레비전에 제주도 풍경만 나와도 채널을 돌리거나 꺼버릴 정도로 고향을 경멸했었다. 엄마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술주정을 하듯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미소는 아빠가 짓던 미소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할머니가 꿈에 나왔어. 맨발이었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흰옷을 입고 곶자왈을 걷고 있었지. 덤불에 걸려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발이 찔려 피가 났지만 일어나 계속 걸었지. 모습은 처녀 같았는데 이가 하나도 없었어. 입을 열어 바람을 먹었는데 바람이 뭉텅 뭉텅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어. 정말 그랬다니까. 바람이 잘려나가다니 말이야. 바람이 잘려나가는 소리 속에서 꿈은 끝났지만 나는 곶자왈 곶자왈이라고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리고 있었지.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 머리맡에 둔 물을 마셨는데 물이 참 달고 맛나더라. 잠이 덜 깬 상태에서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들이 떠올랐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야기. 아마 너희들을 키우느라 그 이야기를 잊고 말았지. 아니 그건 핑계였는지 몰라. 섬을 떠날 때 그 이야기도 바닷물 속에 던져 버렸을 거야. 무섭고 지겨웠지. 지긋지긋한 이야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 귀에 박힌 못이 녹슬어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가 다시 살아난 거야.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곶자왈에 가서 나물을 뜯으며 그 이야기를 해주곤 했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 왜 근데 이야기를 계속 했던 걸까.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지만 결말은 똑같았지. 마을에 불이 났고 총소리와 죽창 소리, 자동차 소리, 비행기 소리 속에서 아니 그건 소리라기보다는 소음이겠지. 소음 속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내리고 팔 다리가 분리 됐지. 끔찍했는데 듣기 싫어서 딴 생각을 하거나 멀리 하늘에 시선을 두기도 했지. 사람들이 산속으로 동굴 속으로 도망갔던 이야기 말이야.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경찰들이 노인들을 엎드리게 하고 처녀들을 태워 기어 다니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할머니의 어린 동생도 마을의 노인 등에 탔는데 계속 울고 있었대. 노인은 얼마 가지 못하고 쓰러졌고 동생은 무서워서 오줌을 싸고 말았대. 노인의 등과 엉덩이도 오줌으로 축축해졌는데 노인도 오줌을 싸고 말았을 거야.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할머니의 동생은 총에 맞아 죽었지. 할머니의 첫 번째 딸, 그러니까 나의 언니, 너희들의 큰 이모와 함께 말이야. 나의 언니는 일곱 살이었어. 죽었지만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대. 말을 하는 순간 따라 죽게 되는 거니까. 이야기가 이야기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닫게 만들었지. 몸속에 고인 이야기를 먹고 내가 태어났지. 할머니의 두 번째 남편인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할머니를 때릴 때마다 어떤 날은 무장대와 붙어먹은 년이라고 하고, 어떤 날은 토벌대와 붙어먹은 년이라고 윽박을 질렀지. 나는 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지. 다음날 군불을 지피고 각재기국을 끓이는 것도 할머니의 몫이었지. 할아버지가 각재기국을 한 그릇 다 비우면 나머지는 우리가 먹었지. 그 비릿하고 심심하고 시원한 맛이 너무 생각나. 내가 늙은 거지. 내가 늙은 거야. 어릴 적 할머니와 가던 곶자왈에 가고 싶기도 하고 그 이야기를 할머니의 목소리로 다시 듣고 싶기도 해. 그럴 수 없지만 그러고 싶어. 언젠가 나도 할머니가 되면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줘야 되지 않겠니. 그때까지 이제 나도 혼자 좀 지내보자. 차정이는 알거야. 혼자 보내는 시간이 신의 축복이라고 누가 책에 썼잖아?!”
“혼자 보내는 시간이 신의 축복이라고 누가 그래? 정말 그 말을 믿는 거야?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 좀 고쳐. 나이가 들어도 고칠 건 고쳐야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엄마는 또 화를 내고 나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말을 하려다 실패하고 실패가 분명한대도 실패가 아니라는 듯 실패를 곱씹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실패의 쓴 잔을 들고 입에다 털어 넣겠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 엄마가 모르는 이야기. 모르는 이야기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어. 우리는 모르는 이야기에만 끌리지.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모르는 이야기야. 얼마나 더 모르는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엄마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어. 엄마가 해준 할머니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을 때까지 믿어야 하는 이야기지만 믿을 수 없어. 엄마는 그 이야기에서 달아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나는 또 엄마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달아나야 할까. 이야기가 엎어지면 나는 죽을 수도 있을까. 모든 이야기는 죽고 죽이는 이야기잖아.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죽어가게 될까. 나에게 이야기라는 것이 있을까. 나는 작가가 되기 전에 모든 이야기를 끝낸 것만 같아. 이게 가능할까. 시작도 하기 전에 이야기가 끝난 거야. 모든 이야기는 실패야. 실패의 이야기지. 나는 어린 나이에 쓸데없이 많은 책을 읽었어. 엄마는 내가 책을 읽게 내버려두지 말았어야해. 나는 더 이상 책을 읽고 싶지 않아. 아니 나는 더 이상의 책을 읽고 싶어. 나는 아무 것도 읽지 못했어. 읽었지만 읽지 않은 거야. 읽을수록 읽지 않는 게 더 많아 지는 거야. 실패. 실패. 실패야. 쌰이턴(scheitern)! 쌰이턴(scheitern)! 쌰이턴(scheitern)! 실패야. 책을 찢는 소리가 들리고 책을 태우는 소리가 들리고 실패 실패 하면서 책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려. 실패의 소리 속에서 실패의 불길 속에서 실패의 어둠 속에서 할머니가 나타나 나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나의 뺨을 후려칠 수도 있겠지. 무엇을 하든 그 손은 부드럽고 아름다울 거야. 그런 거야. 나는 그 손에 대해 쓰고 싶은 거야.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손. 내가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는 손. 이렇게 나는 엄마를 깔아뭉개고 나의 이야기를 확보할 수 있을까. 내가 차지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하지. 말을 계속한다는 건 사고가 흐려지는 거야. 흐려진 사고의 흐름 속에서 고집만 남아서 이야기가 아닌 것을 이야기라고 우기면서 끝을 향해 나아가는 거지. 엄마는 그것도 모르면서 이야기에 확신을 갖고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거야. 흐름을 완전히 놓친 거지. 엄마. 고승자씨. 엄마. 그런 표정은 짓지마. 엄마, 이건 내말이 아니야. 지금까지 했던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야. 엄마는 또 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두부를 으깨듯이. 두부를 으깨듯이. 두부가 으깨지듯이 우리의 이야기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있을까. 될까. 이야기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정작 이야기는 사라지게 되어 있어. 나는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없는 이야기의 중심 없음이 되고 싶은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생각해? 혼자 있는 시간이 신의 축복이 맞다면 그런 거겠지. 그게 맞아. 하지만 난 아직 아니야. 모르겠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아. 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엄마는 나를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어.”
언니는 한 번도 미소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되어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언니가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엄마가 방귀를 꼈는데 방귀 소리는 식탁을 쪼갤 정도로 요란 했고, 냄새 또한 지독해서 둘의 이야기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 지긋지긋한 이야기 싸움.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려던 찰나에 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고, 언니가 웃음을 터뜨렸고, 내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언니가 웃음을 터뜨렸고,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일부러 한쪽 엉덩이를 들고 다시금 방귀를 끼며 웃음소리를 바꿨고, 우리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이번엔 언니가 아 못 참겠다고 정말 이라고 말하며 오줌을 싸기 시작했고, 뒤이어 내가 그렇다면 나도 하고 오줌을 쌌고, 엄마가 매정한 년들 하면서 오줌을 쌌는데, 엄마의 오줌은 언니와 나의 오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이어서 우리는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듯이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오줌으로 젖은 궁둥이를 들썩이며 식탁 아래로 기어 들어가 엄마의 다리를 잡고 물고 핥고 빨고 깨물고 말았다.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를 느끼며.
방귀소리.
웃음소리.
오줌소리.
울음소리.
엄마소리.
음악이 될 수 없는.
나는 지금 겨울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녹음기를 듣고 있다. 시간의 구멍이 있다면 그 구멍은 비좁고 어두울 텐데 그 구멍 속으로 과거의 소리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제 녹음기의 말들을 외울 정도이고,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고, 소음 속에서 나의 방을 그려볼 수 있다. 나의 방 침대 밑에서 아주 먼 나라의 포르노를 듣고 있는 것이다. 한국말이 그리울 때면 녹음기를 튼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있으면 한국말이 다시 싫어진다. 그날 날씨는 어땠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겨울공원은 겨울공원이다. 겨울공원이라는 이름은 솔랑쥐가 지었는데 겨울공원에 눈이 내린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는데 솔랑쥐는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라고 대답했다. 나는 녹음기를 손에 쥔 채 솔랑쥐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여름이고 겨울공원에는 녹음(綠陰)이 한창이다. 녹음기의 녹음. 녹음의 녹음기. 솔랑쥐에게는 이 말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지만 그 간극이, 번역 될 수 없는 언어가 솔랑쥐와 나를 더 가깝게, 뜨겁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랑쥐, 난 16살이 이후로 버진이었던 적이 없대.”
솔랑쥐는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나의 엉덩이를 벌린 뒤 그 깊고 주름지고 탐스러운 부분을 길고 차가운 혀로 핥아 줄 것이다. 솔랑쥐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내 항문 옆에 작은 점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처음 그것을 보고 솔랑쥐는 you you cute cute dot dot 이라고,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치열이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처음 입을 맞추고 서로의 옷을 벗기고 솔랑쥐가 그 어떤 남자보다 많은 양의 아밀라아제를 분비하며 클리토리스를 살짝 살짝 피해 나의 음부를 빨던 날 나의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 거기를 곶자왈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got-ja-wal. 떠돌이개가 짖듯이 말했다. 그 이후 솔랑쥐는 곶자왈 곶자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듯 검은색 가슴을 흔들며 나에게 다가오곤 한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고 언니는 말했다. 나는 지금 솔랑쥐가 ‘블랙블랙 미스터리’ 상으로 받은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검은 색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다. Don’t write! 가슴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데 물론 안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솔랑쥐가 어서 와서 곶자왈 해주길 기다린다.




작가소개 / 김태용(소설가)

- 2005년 《세계의문학》 봄호로 등단. 소설집 『풀밭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 장편 『숨김없이 남김없이』, 『벌거숭이들』 출간. 한국일보문학상. 문지문학상 수상. 텍스트사운드 그룹 「A.Typist」멤버로 활동 중.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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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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