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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소설_HOTEL⑤] 해피아워

  • 작성일 2015-09-01
  • 조회수 1,544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⑤]



해피 아워




서진



삽화-해피아워-서진


이상하다. 여기가 하와이가 맞나? 하늘이 파랗고 바다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야자수가 길에 죽 늘어서 있고 거대한 나무도 봤다. 내가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다. 하와이에 오면 세상이 달라져 보일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건 풍광 좋은 영화나 티브이의 여행 프로그램이 아니라 리얼한 세상인 것이다. 배경 음악도 없이, 별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세상.
선글라스를 벗고 뿔테 안경을 낀다. 눈물이 날 정도로 눈부시다. 등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는 온통 시선이 물가에서 노는 딸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다. 아이는 플라스틱 삽으로 모래를 퍼낸다. 파도가 밀려와 구멍을 메우는데도 삽질을 계속한다. 나풀거리는 원피스와 검은 타이즈를 입은 여자 둘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일본인처럼 보인다. 금발의 중년 부부는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책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키보다 큰 서핑보드를 들고 바다로 뛰어드는 청년도 보인다. 한 시간에 40달러 하는 서핑 레슨을 받아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무리일 것이다. 보드 위에 올라가는 것도 힘들겠지.
핸드폰을 꺼낸다. 친절하게 양쪽 시간을 다 보여준다. 호놀룰루는 오후 한 시 십 분, 서울은 내일 오전 여덟 시 십 분.
하품이 난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코노미 좌석에서 여덟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는 것이 형벌일 줄은 몰랐다. 창가 좌석을 골랐는데 허벅지를 구겨 넣고 꼼짝없이 처박혀 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을 때, 같은 줄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여자는 이미 잠든 후였다. 실례합니다, 라고 말해도 못 들은 척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들의 무릎을 건드리며 좌석을 건너갈 수밖에.
다행히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어 와이키키 백사장에 앉아 있다. 자외선 차단 스프레이를 뿌렸지만 이놈의 햇빛은 피부를 그대로 뚫고 들어와 뼈를 태우는 것 같다. 땀은 또 왜 이렇게 줄줄 흘러내리는지.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버렸다.
귀에 커다란 헤드폰을 꽂고 막대기를 휘젓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뭘 하고 있는 걸까? 막대기 끝에는 접시 모양의 판이 달려 있다. 무슨 음악을 듣나 했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원형 판을 모래위에 살짝 띄운 채로 백사장을 훑는다. 남자는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를 지나 나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괜찮아?(Are you OK?)"
남자가 영어로 말한다. 또박또박 끊어서, 천천히, 아 유 오케이? 그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데.
"아…… 괜찮습니다.(I am fine.)"
또박또박 세 단어로 답했다. 비싼 돈을 들여 어학연수를 가는 이유가 이해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귀를 쫑긋 세워 상대방의 말을 듣고, 알고 있는 영어를 다 쥐어짜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입국장에서 입국 목적을 묻는 심사관의 질문에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한 단어로 대답했다. 여행(vacation). 심사관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하지만 목적지를 묻는 택시기사에게 호텔 이름을 이야기했는데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가방을 뒤져서 호텔 예약증을 보여주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턱은 수염으로 덥수룩하다. 군데군데 흰 수염도 보인다. 터진 실밥이 군데군데 보이는 야구 모자는 한 번도 세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남자는 헤드폰을 벗는다. 앞으로 생길 일을 대비해서 실전 영여 연습이나 해볼까?
"그건 뭡니까?"
나는 남자가 쥐고 있는 막대기를 가리켰다.
"금속 탐지기야. 모래 속에 숨어 있는 걸 찾아낼 수 있지.”
"어떤 게 숨어 있나요?"
"동전 같은 게 대부분이지만, 운이 좋으면 목걸이나 반지도 나오지."
"네에……."
남자는 나를 천천히 훑어본다.
"어느 호텔에 묵고 있어?"
호텔 이름을 말하려다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이 남자도 나의 발음을 잘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호텔 예약 앱으로 특가 할인을 하는 것을 운 좋게 예약했다. 단, 조식 불포함에 시티 뷰. 리뷰도 나쁘지 않았다. 삼일이면 충분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예약을 해버렸다.
“오, 그곳이라면 괜찮겠군. 해피 아워(happy hour)를 하는 바가 있으니까. 맥주 한잔 어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발길을 옮겼다. 나는 따라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환한 대낮에 별일이야 있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니 뒷머리에서 찡, 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나는 뒷머리를 손으로 살살 주물렀다. 다행히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통증이 사그라졌다.
다들 그을린 어깨를 드러내며 활기차게 걷고 있는데 남자는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굽힌 채로 걸어갔다. 체크무늬 긴 셔츠, 그리고 여기저기 실밥이 튀어나온 청바지는 도무지 와이키키의 거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는 내가 머무는 호텔 입구에 다다라서 로비로 가지 않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도 그를 따라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다. 한국 시간은 오전 아홉 시 오 분. 다섯 번 정도 울릴 때까지 받지 않다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지금 전화를 받으면 이곳에 있을 동안 계속 전화를 받아야 한다.
2층으로 올라가니 남자는 창밖을 향해 난 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유리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창가에는 기둥 몇 개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선을 마주 보고 있지 않으니 편했다. 바람이 불었다. 뙤약볕에 앉아 있을 때는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던 바람이 그늘에 있으니 시원하게 느껴졌다.
식당은 한산했다. 쿵짝거리는 밥 말리풍의 레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유리잔에 가득 담긴 맥주가 나왔다.
맥주잔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남자는 자신의 잔을 살짝 들어 올린다. 이미 반은 비어 있다.
“하와이에 왔으니 코나 맥주 한 잔은 해야겠지?”
“아…… 네.”
맥주를 한 모금 마셔 본다. 평소에 마시던 맥주와는 조금 다른 맛이다. 약간 더 쓰긴 한데 향긋한 냄새가 난다. 기분 탓인가?
“이 식당의 해피 아워는 맥주가 반값이야. 두 잔을 마셔도 한 잔을 마신 거나 다름없지.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니까 기억해 두라고.”
남자는 빈 잔을 든다. 웨이트리스가 순식간에 나타나 금세 가득 찬 새 맥주를 놓아둔다. 나는 아직 반밖에 마시지 않았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회식 자리에서도 나의 주량은 맥주 두 잔. 지금 내 앞에 놓인 컵은 작은 맥주잔으로 세 잔은 될 것 같다.
“아내는 어디 있는 거야?”
“네에?”
남자는 나의 결혼반지를 가리킨다.
“값이 꽤나 나가겠어.”
왼쪽 손에 끼워진 반지를 살펴보았다. 보석의 빛이 바래긴 해도 네 번째 손가락에 그대로 걸려 있다. 신체의 일부분처럼 손에 붙어버린 것 같다. 오른손으로 슬며시 반지를 가렸다.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남자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질문을 했더라도 제대로 답을 못 했을 것이다. 문득 미라는 지금 반지를 끼고 있을지 궁금하다.
“빌, 내 이름은 빌이야.”
“저는 성구입니다.”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더 마신다. 처음 마실 때보다는 덜 차갑다. 레게 음악은 어느새 우쿨렐레 반주로 바뀌었다. 이런 음악을 계속 듣고 있다가는 뇌가 흐물흐물해져서 세상의 모든 걱정 따위는 사라질 것 같다. 공항과 택시에서, 호텔 로비에서 죄다 이런 음악이 흘러나왔다.
“여기에 사나요?”
“응. 저기 뒤쪽에 있는 콘도야.”
남자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하와이에 산다니, 좋겠습니다.”
남자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다.
“그런가? 나는 이곳에 놀러오는 사람들이 더 부러워. 당신 같은 사람 말이야. 하와이에 처음 오는 사람들.”
“처음인지 어떻게 아셨나요?”
“그냥 알아. 일본에서 왔지?”
“틀렸습니다. 한국입니다.”
남자는 피식 웃는다.
“아, 요즘엔 자꾸 틀리는군. 중국 사람과는 구분이 쉬운데 일본인과는 좀 헷갈려. 그나저나 하와이에 온 소감이 어때?”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공항 주변은 공업지대 같았고, 시내로 접어드니 오래된 건물과 홈리스도 보였다. 그러다 순식간에 호텔과 상점으로 가득 찬 빌딩숲이 나타났다. 인공 폭포가 있는 호텔, 온통 핑크빛으로 치장한 호텔, 아무 개성이 없는 대형 관광호텔에 질려버릴 때쯤 짠, 하고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눈부시게 푸르긴 해도 달력에 나온 바다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10년 넘게 살면 그저 그래. 밤에는 취객들 때문에 시끄럽지, 아침이면 쓰레기차 소리 때문에 잠이 깬다고. 다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좋긴 한데……. 더 우울해지기도 하거든.”
남자의 말이 처음보다 조금 빨라졌다. 다행히 단어 몇 개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우울할 때엔 무얼 합니까?”
“캘리포니아에 살 땐 실컷 운전이라도 했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달리다 보면 좀 괜찮아지거든. 여기는…… 고속도로가 있긴 해도 늘 막혀. 고속도로라고 해봤자 끝까지 달리면 한 시간 거리야. 감옥이나 다름없지. 파라다이스의 감옥.”
남자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쓰다 보니 머리가 점점 더 아파 온다.
“실은, 아내를 찾으러 하와이에 왔습니다.”
“응?”
남자는 막 두 번째 잔을 다 비운 참이었다. 한 잔 더 마실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어쩐지…….”
“네?”
“해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우울하게 보이더라고.”
머리에 지잉, 하는 통증이 느껴진다. 정확히는 오른쪽 귀 뒤쪽과 뒷목 사이다. 진통제를 먹어도 아무 효과가 없다. 예전에도 가끔씩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날 이후로는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아내가 사라진 그날 이후부터 말이다.
아내가 사라진 첫날, 친한 친구네 집에 갔으려니 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자고 왔으니까. 배터리가 떨어졌는지 통화는 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날에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나는 처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제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휴우. 먼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는데……. 형부에게는 아무 말 없었어요?”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어?”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죠. 저도 잘 몰라요. 정말로.”
농담이이에요,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비난이 숨겨져 있는 침묵이었다. 나의 사과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언니를 설득해서 데려오라고 부탁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사과할 것도 없었다. 나도 침묵으로 대응하자 처제가 입을 열었다.
“저, 이번에는 꼭 붙어야 하거든요.”
삼 년째 낙방한 임용고시를 말하는 거다.
“두 분 문제로 더 이상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말았으면 해요.”
나는 아내의 친한 친구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언니에게 그렇게 친한 친구가 있었나요? 새로 사귄 친구인가? 저는 잘 몰라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는 결혼하기 전에도 훌쩍 집을 떠난 적이 종종 있었으니까. 세상물정을 좀 모르긴 해도 어이없는 일은 저지르지 않아요.”
내가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처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장모님은 삼 년 전에 돌아가셨고, 장인어른이 계시지만 몸이 불편하셔서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미라의 행방을 물어볼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어디 아파?”
남자가 묻는다. 두통 때문에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시차 때문일 겁니다.”
“그럼, 맥주 한 잔 더 마셔야지. 이번엔 페일 에일이야.”
남자는 웨이트리스를 불러 맥주를 주문했다. 내 앞에 놓인 맥주는 지난번 것보다 색깔이 더 진하다. 남자의 맥주도 내 것과 똑같은 색깔이다.
“잔소리할 마누라가 없으니 맘대로 마셔도 되겠지.”
“결혼하신 적은 있습니까?”
남자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이런 질문은 외국 사람에게 실례인가?
“물론 있지. 작년에 대학에 들어간 아들도 있는걸. 둘 다 못 본 지는 십 년이 넘었어.”
이 남자는 나보다 더 우울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내와 떨어진 지 겨우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다시 만날 수 있지만(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이 남자의 사정은 나보다 훨씬 복잡한 것 같다.
치즈 냄새와 함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마지막으로 먹은 게 비행기에서 아침으로 먹은 모닝 롤과 커피가 전부다. 배가 고파 햄버거라도 먹을까 했지만 귀찮았다. 무엇보다 나는 밥을 먹고 싶었다. 김치와 된장국, 구운 김과 계란 프라이가 나오는 가정식 백반을.
“배고프지? 퀘사디아야. 해피 아워에는 몇 가지 안주도 할인되지.”
반달처럼 생긴 토티아가 피자 조각처럼 잘려 있다. 그 안에 치즈가 들어 있나 보다. 남자는 한 조각을 집어 들더니 함께 나온 붉은 소스에 찍어먹는다. 나도 그를 따라 한 입 베어 물었다.
느끼한 치즈가 입에서 느글거린다. 앗, 입에서 불이 날 것만 같다. 소스에 기분 나쁜 향신료까지 섞여 있다. 휴우, 입김을 분다.
“맵지? 이 집은 살사가 죽이거든.”
나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맥주는 지난번 것보다 더 쓰다. 매운 소스와 기름진 치즈, 쓴 맥주가 목에서 막혀버렸다. 켁켁, 기침을 하다가 맥주를 뿜어버릴 뻔했다.
“어이, 진정하라고 진정해.”
남자는 내 등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쓰다듬는다. 기침은 멈추지 않는다. 눈물이 고여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전혀 괜찮지 않다. 우리나라 고추와는 달리 여기 고추는 미각을 마비시키는 화학 성분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찾을 건데?”
무얼 찾는다는 거지? 나는 내가 영어를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내 말이야.”
나는 영어 실력이 부족하지만 남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도 부족한가 보다.
미라가 늘 말했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밥을 먹을 때, 대화를 할 때,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똑바로 들으라고 했다. 휴대폰을 보는 건 앱 개발자의 직업상 습관이라고 변명해도, 휴대폰을 보고 있어도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고 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한번은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미라가 내 핸드폰을 빼앗아 던진 적도 있다. 나도 모르게 고함과 함께 욕이 튀어나왔다.
“소리 질러서 미…… 미안해.”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미라는 내게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제대로 듣지 않고 이제야 그때의 대화를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자기는 언제까지 계속 연기에 빠져 있을 거야?”
“여…… 연기?”
“어른인 척하는 연기. 회사원인 척하는 연기. 최소한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야 할 거 아냐? 나는 도대체 누구하고 살고 있는 건데?”
미라는 문을 쾅, 하고 세게 닫고 서재로 들어갔다. 휴대폰이 소파에 떨어져서 망정이지 바닥에 떨어졌으면 액정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오리지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범퍼 케이스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이 돈 노.(I don't know.)"
어떻게 미라를 찾을지는 나도 정말 모른다. 해외여행은 처음이지, 영어도 딸리지, 날씨도 덥다. 그늘은 시원해도 덥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셔츠가 땀에 젖어서 나쁜 냄새가 난다. 나의 피부는 지방층이 두꺼워 추위를 잘 타지 않지만 더위에는 젬병이다. 아, 찬바람이 쌩쌩 불던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뭔가 찾는 거라면 내가 전문가니까.”
남자는 냅킨에 삐뚤삐뚤 전화번호를 적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엔 화장실에 간 게 아닐까 싶었지만,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냅킨에 물기가 스며들어 전화번호가 얼룩질 때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빌, 빌이라고 했지.
두 번째 맥주는 반밖에 마시지 못했다. 퀘사디아도 반쯤 남았다. 어떻게 계산을 하지? 미국에서는 계산 영수증을 테이블로 갖다 준다던데. 나는 비행기에서 읽은 여행 가이드를 떠올렸다. 영수증이 영어로 뭐였더라? 어떻게 웨이트리스를 부르지? 번역기를 돌려 볼까? 총 얼마나 나왔을까? 미국 사람들은 주로 더치페이를 한다던데 빌은 술값을 내게 덮어씌우고 가버렸다.
다행히 웨이트리스는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영수증을 갖다 줬다. 맥주 여섯 잔에 안주 하나. 45달러. 왜 이리 비싸? 영수증을 자세히 보니 처음에 마신 맥주만 해피 아워로 반값이 되고 두 번째 마신 것은 할인되지 않았다. 참, 팁을 줘야지. 가이드에는 15퍼센트가 적당하다고 하던데. 휴대폰을 꺼내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 6달러 75센트. 7천 원이 넘는 돈을 강탈당한 기분이다. 합계 총 51.75센트. 나는 지갑에서 50달러 지폐를 꺼내 얌전히 테이블에 두고 나왔다. 팁이 모자란 것 같아 뒤통수가 좀 간지러웠다.
레스토랑을 빠져나오니 수영장이 보였다. 호텔에 수영장이 딸려 있다고 해서 어딘가 싶었는데 2층 야외에 있었던 것이다. 레인도 없고 길이도 십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바다를 놔두고 소독약 냄새가 나는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사람들이 있나 보다.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이 선 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아이 서넛이 풀에서 꺄악꺄악 소리를 치며 물장구를 친다.
다행이다. 나에게 저런 애들이 없어서. 아닌가? 저런 애들이라도 있었으면 미라는 집을 나가지 않았을까?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본다. 바보 같지만, 미라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미라는 내가 이 호텔에 있다는 걸 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메일을 보내 놓았다. 하와이에 도착해서 수신확인을 체크했을 때, 분명 읽었다고 되어 있었다. 체크인을 한 후에 호텔의 호수를 적어 메일을 보냈다. 꼭 만나고 싶으니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그러나 지금은 찾아올 기분이 아닌가 보다.
나는 선 베드에 누워 휴대폰으로 메일에 접속한다. 대출과 보험 광고가 메일함을 가득 채우고 있다.
미라의 답장은 없다.
지금까지 미라에게 총 네 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처음 건 두 줄짜리 화풀이였고, 그다음 두 통은 굉장히 긴 편지였다. 구구절절 잘못했다 썼는데 솔직히 무얼 잘못했는지 몰라서 횡설수설 쏟아 부었다.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것, 주말에 소파에서 뒤적거리는 것,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 그런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미라가 집을 나갔을 리가 없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구절절 토해 놓았다. 수신확인이 되는 걸 확인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삐리릭, 문자가 왔다.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박 팀장님 오늘 출근 안 하세요? 정말 하와이에 간 건가요? T.T’
김 수습이 울상으로 문자를 찍는 게 그림이 그려진다. 나흘 뒤까지 프로그램을 완성하지 않으면 이번 프로젝트는 허탕이 될지도 모른다. 너무 울지 마. 이번 건을 망치면 회사가 당장 망할 것 같지? 아니야. 네가 쓸모 있는 직원이라면 회사가 널 자르진 않을 거야. 나? 나는 절대로 못 자르지. 아무렴. 나는 답장을 보내려다 만다. 로밍 문자 수신은 무료지만 송신은 비싸다.
강 부장에게는 솔직하게 다 말했다.
“그래도 부럽네. 우리 집사람은 나를 포기한 지 꽤 됐는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놀리는 건지 진짜 부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제수씨가 집을 나간 건, 자신을 찾아 달라는 무언의 부탁이 아닐까?”
강 부장은 입사 때부터 나의 사수 역할을 했고, 결혼 전후로 미라와 함께 만난 적도 있다. 회사 파벌에서 유일하게 친인척 계열이 아닌데,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신기하다. 항상 나보다 일찍 출근하고, 나보다 늦게 퇴근하는 건 알고 있다. 가족에게 버림받는 것이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강 부장은 맛있는 거라도 사먹으라고 하면서 주머니에 5만 원짜리 몇 장을 쑤셔 넣었다.
“너무 걱정 마. 정신줄만 놓지 않는다면 일이든 가정이든 어떻게든 굴러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노트북은 꼭 챙겨가라고.”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진다. 애들이 풀에서 장난이라도 치나? 풀에서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온다. 물방울은 그칠 줄을 모른다.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은 아이들과 함께 수건을 사이좋게 덮고 사라진다. 위를 올려다본다.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환한데, 심지어 바다 쪽에서는 햇살이 비치는데도, 샤워 꼭지를 최고로 틀어 놓은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시원하다. 햇살 때문에 뜨거웠던 피부와, 낮부터 마신 맥주 때문에 올라왔던 몸의 열기가 식는다. 쿠쿵, 하고 천둥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계속 비를 맞고 있어도 되는데, 핸드폰이 젖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엘리베이터에는 흠뻑 젖은 남자와 여자 아이가 타고 있었다. 뭐가 좋은지 서로 웃어댔다. 남자가 뭐라고 내게 물었는데, 알아듣지 못하고 나도 그냥 웃었다. 버튼을 누르는 걸 보니 내가 가려는 층수를 물어본 것 같았다. 나는 16층 버튼을 눌렀다. 내가 먼저 내리자 아이가 바이, 하면서 인사를 했다. 나도 인사를 하려다 타이밍을 놓쳤다. 남자는 여자 아이의 인형 같은 손을 꼭 쥐고 호텔 복도로 사라졌다.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혹시나 방문 앞에 미라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카드키가 작동하지 않아서 몇 번이고 키를 집어넣었다 뺐다 반복해야 했다. 포기하고 카운터로 내려가려고 할 때, 초록색 불이 깜빡 켜지면서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가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앙증맞은 플라스틱 통에 들어 있는 샴푸를 한 번에 다 써버렸다. 손에 잡히는 머리카락이 너무 꼬여 있다. 거울을 본다. 오기 전에 머리를 자를 걸 그랬다. 곱슬머리라 한눈팔면 머리가 두 배 정도 커 보일 만큼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콧등에 안경 때문에 생긴 벌건 자국이 나 있다. 이참에 눈 수술을 해버릴까? 김 수습은 눈 수술한 다음날 안경 없이 출근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는데.
배를 만져 본다. 보기 좋게 나온 인격이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이건, 보기 좋은 정도가 아니다. 아래를 보니 고추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진짜로 살을 빼야 한다.
언젠가부터 미라는 안방에서 자고 나는 거실 마룻바닥에서 자기 시작했다. 내 몸집 때문에 침대에서 미라가 불편했고, 항상 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깨우기도 미안했다. 나는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잠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나와 미라가 몸을 섞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거품이 다 씻겨 나갔는데도 계속 물을 틀어 놓고 있었다. 차가운 물로 레버를 돌렸다. 소름이 날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타월은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서너 가지가 갖춰져 있다.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얗게 세탁되어 더럽히기 미안할 정도다. 나는 가장 큰 타월로 몸을 돌돌 말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침대의 높이가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킹사이즈라 나 같은 인간 두 명이 누워도 함께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푹 꺼지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은 매트리스의 느낌도 좋았다.
침구가 고급이라는 호텔 리뷰가 틀리지 않나 보다. 리뷰의 별점은 평균 네 개 정도고 별 세 개짜리 평도 있었다. 나는 별 다섯을 주겠다. 이렇게 혼자, 옷을 다 벗고 대 자로 누워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내가 지금 하와이의 호텔방에 혼자 나체로 누워있는 것만큼, 아내가 나를 버리고 사라졌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나의 손에는 아직도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는데 말이다.
커튼 사이로 창밖의 햇살이 살금살금 들어오다가 사라진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갑자기 멈춘다. 빗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잘 알 수가 없다.
미라의 ‘친한 친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집 안을 구석구석 뒤졌다. 냉장고에는 내가 좋아하는 더덕 무침과 고추와 메추리알이 들어간 쇠고기 장조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냉장고 벽에 메모 같은 게 붙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장보기 목록이 눈에 띌 뿐이었다. 연두색 포스트잇에는 참기름, 마늘, 파, 계란. 그리고 분홍색 포스트잇에는 면봉과 물티슈.
청소 도우미라도 고용했던 걸까? 거실도 평소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깨끗했다. 가끔씩 행방이 묘연하던 리모컨 세 개가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옷방 겸 서재를 살펴봤다. 없어진 옷이 어떤 건가 살펴보았지만 눈에 띄게 줄어든 표시는 나지 않았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미라의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1년 전에 이사 올 때 불필요한 책은 버리자고 했지만 미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학창 시절부터 모아 온 거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읽으면 머리가 아플 것 같은 소설책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몇 권은 침대 맡이나 소파에 늘 뒹굴곤 했다. 혹시 없어진 책이 있나 싶어 살펴보았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아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신용카드 승인 내역을 확인해 보았다. 미라가 갖고 있는 신용카드는 승인이 되면 내게 문자가 온다. 미라가 집을 떠난 후로 한 번도 문자가 온 적이 없었다. 집을 떠나기 전 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한 흔적도 없었다. 점점 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정적인 힌트는 쓰레기통에서 찾아냈다. 쓰레기통을 바닥에 탈탈 털어 하나하나씩 살펴보다 영수증 한 장을 발견한 것이다. ‘알로하 훌라 교습소.’ 지난달 중급반 수강증이었다. 회비는 16만 5천 원. 부가세 포함. 그걸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나를 괴롭힌 건, 혹시나 다른 남자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상상을 하고 말았다. 나보다 호리호리하고, 돈도 많고, 차도 그럴싸하고, 소설책도 많이 읽는 젠틀한(그리고 재수 없는) 녀석과 팔짱을 끼고 러브호텔로 들어가는 모습 말이다.
나는 영수증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학원의 위치를 알아냈다.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한적한 주택단지였다. 1층 주택을 개조한 교습소 입구에는 무지개 그림 위에 ‘Aloha’라고 영어로 적힌 작은 간판이 전부였다. 훌라춤이라면 가슴을 드러낸 채 풀잎으로 만든 치마를 두르고 추는 춤이 아니었나? 잔뜩 긴장을 하고 문을 여니 여자 서넛과 남자 한 명이 슬로모션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동네 마실을 나온 사람들처럼 티셔츠에 편안한 바지를 입고서 말이다. 춤이라기보다는 팬터마임처럼 보였다.
맨 앞에서 춤을 가르치는 선생은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여자였다. 머뭇거리면서 뒤에 서 있다가 수업을 마치고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라 씨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여자는 커피를 건넸다. 하와이의 코나에서 나는 특별한 커피라고 했지만 내 취향은 믹스커피다. 원두커피와 아메리카노는 너무 쓰다.
나는 이곳을 찾아온 용건을 주절주절 읊었다. 아내가 집을 나간 지 나흘이 되었으며 전화도 받지 않고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처제도 행방을 모르고 친한 친구도 없다. 내가 찾아낸 것은 이곳의 영수증뿐이다. 이곳에서도 별 소득이 없으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되면 사람을 찾아 주는 흥신소라도 찾아갈 것이다.
“뭐 그리 급하세요. 잘 찾아오셨네요. 이번 주 수업에 빠져서 저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여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저기요, 보통 아내는 집을 나흘씩 아무 연락 없이 비우지 않는답니다.
은발 때문에 여자가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도 않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군살도 전혀 없다. 뒷모습만 보면 사십대라고 볼 수도 있겠다.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진짜로 가신 것 같네요.”
“네?”
여자는 싱긋 웃으면서 사무실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보았다. 파란 바다가 보이는 풍경의 달력이었다.
“저곳으로 가셨나 봐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력으로 다가갔다. 분화구같이 생긴 산이 바다 쪽으로 나 있고 해변에는 호텔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사진 아래쪽에 적혀 있는 글씨는 너무 작아서 바짝 다가가야 볼 수 있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하와이에서의 삼 년이라고 수강생들에게 말하곤 했거든요. 다들 지겹도록 들었을 거예요. 지난 수업을 마치고, 미라 씨가 하와이에 다녀올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던데…… 진짜였나 봐요.”
“누…… 누구와 간다는 말은 없었나요?”
여자는 푸훗, 하고 웃었다.
6개월 전이었다. 미라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무슨 계기로 이곳에 왔는지는 여자도 모르고, 나도 당연히 모른다. 길을 잃어서 배회하다가 우연히 간판을 봤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처음 미라를 봤을 때는 얼굴이 많이 어두웠다고 했다. 하지만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한 후로는 점점 나아졌단다. 훌라를 배우면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다나. 수화처럼 몸으로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단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산과 바다, 화산과 폭포, 새들과 꽃들의 이야기를.
수업이 끝나면 가끔 수강생들이 모여 식사도 함께 준비해서 먹고, 간단히 술을 마시기도 했다. 미라는 가끔 자고 가기도 했다. 미라의 친한 친구는 훌라 강사였던 것이다. 1층이 강습소고 2층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여자는 혼자 사는 것 같았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여자는 사실을 찬찬히 이야기할 뿐, 우리 부부의 문제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건지, 배려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행복했나요?”
내 입에서 불쑥 그 말이 튀어나왔다.
“하와이에 가면 행복할 수 있는 건가요?”
나는 달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그중 한 명이 미라인 것처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말이다. 해변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행복에 겨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가봐야 알 수 있죠.”
여자가 말했다. 그래서 미라는 하와이에 간 거겠지. 나도 지금, 하와이에 와 있다. 평생 처음으로 여권에 도장을 찍고, 여덟 시간을 날아서 말이다. 나는 달력 속에 있는 수많은 호텔 중 하나에 누워 있다. 행복한가? 글쎄, 잘 모르겠다. 굉장히 피곤한데 기분은 좋다. 맥주 두 잔 때문일 수도 있고, 비를 맞아서 그럴 수도, 샤워를 해서 그럴지도, 나체로 킹사이즈 침대 위에 누워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위잉, 하고 다시 에어컨이 돌아간다.
침대에 누워 새처럼 날갯짓을 해보다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비행기에서 그토록 오지 않던 잠이 우르르 쏟아졌다. 이렇게 달콤하게 자본 게 언제인가? 두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미라는 어떻게 찾아야 하지?
어떻게든 되겠지. 여기는 하와이니까. 귓가에서 우쿨렐레 소리가 들리다가 사라진다. 몸이 아래로 점점 가라앉는다. 괴수가 사는 심해로 천천히 잠수를 하는 기분이다.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짝 겁이 나는 순간 딩동, 하는 벨소리를 들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옆방에서 나는 소리인가? 애들이 장난으로 눌렀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벨소리는 딱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정적이 이어졌다.


Waikiki-Beach-Diamond-Head



작가소개 / 서진(소설가)

- 2007년 한겨레 문학상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등단. 2011년 연작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 홈페이지 http://3nightsonly.com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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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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