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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작성일 2015-09-01
  • 조회수 1,586



노래




김경은



삽화-김경은-노래



1.


락커가 죽었다. 진은 완의 차 안에서 락커의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어쩌다 보니 음악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발단은 락커의 죽음이었다.
올 겨울은 눈보다 비가 더 잦았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 난반사하는 불빛으로 도로는 번들거렸다. 미처 처분되지 못한 은행잎들이 인도와 차도 위로 마구 흐트러지며 바람에 날렸다. 그들의 얘기도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흩날렸다. 누군가 한 가지 이야기를 던지면 짧게 답하고 잠시 침묵, 다시 무언가 던져지면 단답형으로 받고는 다시 고요. 그 속에서 화제는 우연히 음악으로 넘어가게 된다. 전방의 시야가 뿌예지자 완이 창문을 내렸다. 차 소리만 비집고 들어올 뿐 연말인데도 거리는 조용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진은 확신을 가지고 외쳤다.
“잘 들어 보세요. 노래가 없어요. 노래가 사라진 거예요.”
거리에는 그 흔하던 크리스마스 캐럴 하나 퍼지지 않았다.
“음원 사용료를 내야 하잖아요.”
완이 무심히 내뱉는다. 아아, 소소한 깨달음에 진은 길게 탄식했다. 음악을 듣는 방법이 달라지자 거리 풍속과 인심도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울한 얘기네요.”
진은 차창 밖으로 손끝을 내밀며 낮게 읊조렸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한두 달 전부터 캐럴송의 볼륨을 높이는 게 상술일지언정 한 해를 마무리하는 거리의 선심이었던 것도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서 분위기 띄우지 못해 안달해야 할 이들이 손 놓고 있다. 간판을 내걸어 놓고서 연말의 거리를 달구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다니 심각한 태업 아닌가.
“좀 추워요.”
음악이 없는 세상을 진은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음악이 있는 일상을 심하게 의식한 것도 아니다. 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창문을 올리면서 말했다.
“어제는 집에 들어가는데 노래가 하고 싶더라구요.”
완의 말을 들으면서 집 안에 음악을 틀어 놓은 게 언제지? 그러고 보니 노래도 잘 흥얼거리지 않았다는 데 진은 생각이 미쳤다.
“저번에는 1차 끝나고 2차를 또 술집으로 가기 뭣 해서 노래방에 가자고들 하는데 그냥 집에 갔거든요.”
“거봐요. 그때 갔으면 될 걸 왜 안 가 가지고…….”
진은 마음에 이는 결하고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한 곡씩 돌아오는 차례에 부르고 부르고…… 피곤하잖아요.”
노래방? 진은 그런 데를 가본 게 언제인지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요즘도 노래방 가는 사람들이 있나 봐요?”
계속 그렇게 말할 거야? 진의 머릿속으로 경고등이 켜진다. 하긴 시큰둥하게 반응한 건 요즘의 그런 삶이 반영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진은 생각했다. 진의 시큰둥한 반응은 다름 아닌 진의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이 진이다. 적어도 요즘의 진은 시큰둥이다. 음악을, 노래를 의식하지 않는 생활은 시큰둥한 삶인가. 거리에서 사라진 음악과 상인들의 태업이 무슨 상관이람. 진의 생각은 이어지고 완의 말도 이어진다.
“왜 그런 때 있잖아요, 가끔 노래하고 싶을 때.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실컷. 근데 혼자는 안 가지더라구요.”
노래방을 같이 가고 싶어서 완이 그런 화제를 던진 건가 싶었지만 진은 두 사람이 노래방에 있는 모습을 떠올리다가는 잠자코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시 침묵, 그러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락커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였다. 진은 락커의 죽음을 아나운서가 아니라 완의 목소리로 듣는다. 차는 진의 아파트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까운 사람 하나 갔네. 괜찮은 가수였는데,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으니 잘산 거야, 그죠? 저런, 나쁘지 않은 삶을 살다 갔다구. 멋진 삶을 살았으니 됐지, 뭐.
그의 말이 보태질수록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나오는 것 같아 진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 잡아 노래방 가서 그의 노래만 불러 볼까요?”
차는 진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고 진은 인사를 하면서 내렸다. 완은 진의 제안에 대답할 새가 없었다.
화단을 지나 건물 입구로 걸어가다가 진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콧노래였다. 진은 자신이 어느 결에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관문을 따면서도 부르는 바람에 번호의 흐름을 놓치고 집 안으로 입장하는 암호 주위로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액세서리를 풀고 옷을 갈아입으며 세안을 하며 이를 닦으며 진은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진은 자신이 흥얼거리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노래방에 가고 싶다고 한 게 누군데…… 바로 차를 몰아서 가도 되는 거야? 그 생각을 해버리자 자존심이 상했다. 그 생각을 방해하려는 자의식이 진을 흥얼거리게 한 것이다. 참 답답한 사람이지 뭐야. 수도꼭지를 한껏 올리며 진은 뱉어버리고 만다.
세면대로 물이 쏟아진다. 물은 이상 없이 잘 나왔다. 자칫하면 거금을 들여 거실부터 욕실까지 온통 바닥을 헤집어 놓고 며칠 공사하느라 한겨울이 심난할 뻔했다. 경비 아저씨 김의 감식력과 청년들의 진단법은 견적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벌어졌다. 건네받은 숟가락 하나로 새는 지점을 지적해 내다니. 벽에서 튀어나온 파이프 말단만 찾아다니며 김은 숟가락으로 가만히 두드려 보았다. 김은 그렇게 벽 속에 감춰진 수도 파이프에 집중하며 문제를 진단했다. 이게 말하자면 청진기지, 청진기. 대공사에 비용도 만만치 않아 일단 젊은 기술자들을 보내 놓고 김에게 하소연한 보람이 있었다.
이게 통하면 어젯밤 사모님 꿈자리가 좋았던 거고.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진은 한 귀로 흘렸다. 아줌마라는 말에서 뭇매를 맞고 쫓겨나 방황하던 기혼 여성(통념상 기혼이어야 하는 나이의 여성까지 싸잡아서)의 호칭이 어머니에 정착하는 추세지만 불합리하기 그지없다. 싱글족이 늘어나는 사회에서 어미라는 의미를 담은 호칭은 사회의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준다. 아이의 선생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누구의’를 생략한 것이니 그렇다 치자. 아이가 옆에 없는데도 가게 점원이건, 의사건, 간호사건, 심지어 길에서 부딪히는 구도자들까지 온통 “어머니”, “어머니”다. 또래도, 몇 살 아래거나 몇 살 위 혹은, 훌쩍 윗세대로 보이는 여자도 남자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면서 호칭 하나로 자식이 되겠다고 난리 아닌가. 아이도 안 낳은 여자한테 걸핏하면 어머니라니, 어미는 인구감소 추세의 땅에서 거리에서 그렇게 쉽고도 흔하게 증식되고 있었다.
김이라고 몇 세대 아래인 진을 원뜻으로 사모님이라 부르는 건 아닐 테니 피차일반이었다. 진은 김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김의 싱거운 농담을 들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아래층 여자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는가. 김의 진단이 적중한 것이다. 덕분에 욕실 세면대 벽면만 뜯어낸 채 수도 파이프를 교체했다.
소리가 암시하는 의미를 가려내는 김의 관록은 진에게 감동이었다. 술값만 쥐어 주고 넘어갈 수 있다니, 뒤늦게라도 좋은 꿈이나마 꿔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수박을 디벼 봐야 그 속을 알 수 있는가, 워디? 백 번 지당한 말이다. 속을 도려내서 새빨갛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건 하수 중의 하수다. 어쩌면 완은 진이 생각한 만큼 과감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랐다. 특히나 이성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서툴러서 처음에 다짜고짜 용감했기 십상이다. “좋아해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듣고 진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나 담백한가 말이다. 고수라면 그런 식으로 질러버리지 않는다. 진은 완의 바로 그런 점에 끌렸었다. 요컨대 완은 전력으로 에너지를 끌어올려 그 말을 한 것이다. 맥박이 심하게 뛰었겠지만 진이 그런 것까지 알아차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 에너지 배분을 못 하고 시작에 그렇게 쏟아 부으니 다음 진도에서 삐거덕거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진은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머리 꼭대기부터 더운물을 뒤집어쓰며 일을 간단하게 만들어준 아저씨에게 담배 한 보루 더 사다 바쳐도 아니, 의향만 확인된다면 전자담배를 선물한대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날을 계기로 진은 자주 콧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입에 올린 노래의 제목이 무엇인지 한참을 그러도록 떠올리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사실 제목이랄 것도 없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멜로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다른 노래가 되었고 그러다가는 내키는 대로 흥얼거렸으니까 세상에 없는 노래다. 아니, 진이 어떻게 이어서 흥얼거려도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음률의 조합이었다.
어떤 때는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입술을 오므리고 바람을 일으키면서 진은 새의 부리를 연상했다. 뾰족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해 보았지만 휘파람에 집중하느라 새부리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때면 진은 새가 된 기분에 취했다. 진의 휘파람은 입안에서만 맴돌았고 그다지 힘차지 못해서 아름답지 않았다. 휘파람보다는 노래가 낫지? 콧노래를 하다 보니 혼잣말도 자주 지껄이게 되었다. 진은 갑자기 완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문자를 누른다. 『노래방에 언제 갈까요?』 진은 이내 지우고 다시 작성한다. 『뭐 하세요?』 어쩐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지우고 잠시 멈췄다가 빠른 속도로 입력한다. 『노래하고 싶어요』 전송.



2.


효의 말솜씨가 화려하지만 않았어도 일은 그렇게까지 뻗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진은 효와 조우한 순간만 하더라도 효를 향한 마음이 어떤 종류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깊이 묻혀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진의 감정은 이를테면 발굴과 복원 과정이 필요했다.
“환유와 은유의 간판스타는 단연 왕과 왕관, 내 마음과 호수 아니겠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진의 주의를 끈 것은 목소리였다.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들을 하느라 로비는 왁자지껄했다. 진이 계산한 대로 휴식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비유는 그야말로 클리셰지.” 정확한 발음으로 어조를 높이는 법도 없이 던진 한마디가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말재주가 돋보였다. 우리말연구회 동아리에 들어온 신입생이 있었다. 남자 동기나 남자 선배들은 주로 그를 재수 없어 했다. 선후배 가릴 것 없이 여학생들은 그에게 관대했으며 남자 후배들은 대체로 그를 따랐다. 효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가 퍼붓는 말 세례를 기대했다.
“교수님, 그럼 참신한 스타는요?” 질문하는 여학생의 목소리에는 흠모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좋은 질문이야. 답변자를 빛나게 해주는 그런 질문.” 농담을 섞어 가며 유려한 말솜씨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는 효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티타임을 갖는 무리들 가운데서도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주로 대학원생들이었다. 진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날 우리 어머님이 손녀한테 그러시는 거야. 망설임 좀 사올래? 우리 딸은 눈만 멀뚱거렸고 내 여동생, 그러니까 아이한텐 고모, 웃느라 정신없었지. 아이스 슬러시 말이야. 동생의 통역이 가능했던 이유가 뭘까? 어머니와 손녀 사이, 이들 세대에 놓인 거리 중간에 동생이 위치한 때문 아니겠어? 그러니까 환유가 삼대의 거리를 확인시켜 준 셈이야.”
법대생이던 효는 신입을 훌쩍 지나서 뒤늦게 동아리에 들어왔다. 우리말다움을 살려 법조문을 죄다 뜯어고쳐 놓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효는 세미나 시간보다는 뒤풀이 시간에 진가를 발휘했다. 자신의 능력을 의식하는 그가 대화의 매뉴얼을 상비하고 있었다는 걸 진은 그때는 알 리 없었다. ‘그럼’, ‘그럼’. ‘그럼’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작두를 타듯 그의 말본새는 현란하고 아찔해졌다.
“그럼 은유는요?” “아직 이르다구. 거기서 끝나면 재미없잖겠어? 망설임과 설레임은 심박동수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어.” 좀 뜸을 들인 다음 “어머니의 착각은 오랜 세월이 키워낸 직관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거든. 우리 딸과 이 직관 사이는 너무 멀어 멀뚱거릴밖에. 동생은 어머니와 밀착돼 있진 않지만 조카만큼 멀지도 않으니까 의미를 알아챈 거야. 망설일 때나 설렐 때나 사람들은 부단히 감정을 교차시키고 심박동수가 수고롭게 증가하지. 두근두근, 쿵쿵-쿠궁. 감정 병목현상이 일고, 두 단어는 심장을 매개로 이웃한다구. 표준어는 설렘이지만 오르내리는 감정에 더 가까운 단어는 한 글자 늘린 설레임 쪽이라구.”
사소할수록 열광한다. 유치하고 가벼워야 한다. 대중성이란 게 그렇다. 하찮은 일상에서 발휘되는 적당한 통찰력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그는 구슬을 꿰듯 사람들을 꿸 바늘을 지니고 있었다. 진은 이제 그가 효라고 단정했다. 살갗이 찔린 듯 따끔거리며 진의 심장이 가볍게 뛴다. 두근두근, 쿵-쿠궁! 무리 가운데 누군가 머뭇거리는 진을 향해 걸어왔다.
진은 한 달 전에 전혀 안면이 없는 모 학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은유와 환유의 생태학’이요? 도시학, 지리학, 건축학, 인문학 등에서 한두 분씩 발표자로 나서는 거예요. 주제 범위가 너무 넓지 않나요? 전화를 받고 처음에 망설였던 건 제목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표자들께 자율권이 많이 주어지는 거죠. 이내 진은 바로 그 제목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선생님은 연구 분야인 문학을 텍스트로 발표해 주시면 되구요. 뭐 영화도 괜찮아요.
“아 네, 선생님…….” 명이 진을 알아보며 큰 소리로 반긴다. 명이 떨어져 나온 중앙의 요란한 무리가 그들을 주목했다. 마치 물길이 갈라지듯 무리 가운데로 길이 터지고 다시 누군가 걸어 나온다. 어, 너…… 운을 떼면서 손을 내미는 얼굴은 대화를 이끌던 주인공, 효가 맞다.
“이야, 여기서 너를 만나다니…….” 십 년 만이냐고 확인하는 효에게 더 됐을 거라고 답하면서 진은 웃어 보였다. “모임에도 나오고 좀 그러지. 너는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야. 어쩜 얼굴 보기가 그렇게 힘드냐?” 반색하는 효를 보면서 진 역시 반가움을 나타냈다. “너, 내 이름이나 기억하니?” 효의 이 말에 진이 “사람을 바보로 아는 건 여전하구나.” 유쾌한 어조로 받아넘기자 무리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팬덤의 성원처럼 반응에는 거품도 끼었다. “너 정말 나 만나서 기쁜 거야?” 진의 말에 효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럼.” 활짝 웃으면서 “농담도 할 줄 알고 세월의 힘이네.” 하며 어깨를 친다. 왜 어디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진은 말을 해놓고는 놀랐다. “나중에 보자.” 명을 앞세워 가는 진의 등 뒤로 “그래, 뒤풀이 때.” 하는 소리가 꽂혔다.
오후 발표가 시작되고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대회장으로 들어왔다. 눈으로 훑어 가는 자료 속에서 진은 ‘은유’, ‘환유’만을 속속 솎아낸다. 불쑥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말이 있다. 너 가. 맞다, 그랬었다. 효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농담을 잃지 않았고 다름 아닌 그 힘으로 좌중을 쥐락펴락했다. 모임이 있으면 둘러앉아서 효가 하는 말에 웃을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진은 그 말 또한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얘가 미쳤나, 어디로 가라고? 효가 동을 집요하게 갈구고 동의 표정이 변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선배들 있는 자리에 건방지게 후배 녀석이 따라오고 말이야. 효의 말투가 거칠어졌고 동의 표정은 의기소침하게 변해 갔다. 저러다 정말 간다고 일어설 태세였다. 니네들 왜 그러니? 당황한 진은 동을 설득하다가 효를 만류하면서 우왕좌왕했다. 그날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더라면 어쩔 뻔했나? 한동안 진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진이 발표할 차례였다. 진은 홍의 영화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행동 패턴을 분석했다. 그들은 채집된 곤충처럼 한 점에 꽂혀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복되는 실수와 제자리걸음하는 감정은 한 치도 못 나간다. 길을 잃고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윤형방황. 감독은 인물들의 고통을 즐긴다. 한없이 찌질하고 비겁한 주인공들의 행동은 관객을 웃기고 안심시킨다. 감독의 고통 명부에는 관객도 올라 있다. 기승전결이 없고 장삼이사의 일상을 끊어다 놓은 에피소드로 닦달한다. 완고한 현실에 유화제를 타는 낭만의 기미도 일말의 동정도 없다. 어쩌다 불쑥 튀어나오는 인물의 행동은 불편하고 맥락이 잡히지 않는다. 단골로 등장하는 꿈은 또 어떤가? 다만 사랑에 끌려 다니는 이들에게 꿈은 불륜의 장소이긴 하다. 때로는 꿈을 통해 감독의 이전 사랑들을 옥상 건물에서 옥상 건물로 건너 타듯 방문하지만 꿈에서조차 사랑은 지독히도 불화한다.
반복된 스토리라인은 익숙한 구멍을 파놓고 웃게 만들어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을 어느새 연대시킨다. 패턴은 클리셰일지언정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구도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다. 그런 그의 작품도 어느새 나이를 먹으며 편안해지고 있다. 서서히 변화해 왔기 때문에 그의 팬들도 젖어들었다. 매주 보는 개그콘서트가 웃음의 포인트를 지나쳐 버린다면, 서부영화가 서부영화답지 못하고 홍의 영화가 홍의 영화다움에서 돌연 벗어난다면 관객은 화를 낼 것이다. 거리는 중요하다. 노화는 확장된 영역을 효과적으로 줄 세워 통제하는 힘이 약해지면서 환유의 영역을 더욱 넓혀 놓는다. 때문에 효의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삼대의 환유는 통제 불능의 거리로 달아나고 효의 동생을 매개로 번역되었다.
오늘 학술대회 구성원과 진의 거리는 무한정 멀다. 진은 자신이 속한 은하계에서 그들 세계를 인식한 적 없었다. 물론 그런 일로 발표를 더듬을 정도로 진의 연구자로서의 경력이 얕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진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열정과 깊이 면에서 준비가 덜 된 대회였다. 지인들이 구축한 언어의 모자이크를 조준하자니 서로가 민망했을 것이다. 그들의 생태계에 날아든 외래종은 맞춤한 표적이 되어 준다. 진은 질문을 받느라 바빴다.
은유는 거리가 멀수록 효과적이다. 함부로 외부의 촉수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세포막이 의미를 감싼 채 내부를 결속시킨다. 홍의 영화에 익숙한 팬들이 거뜬하게 막을 뚫고 그의 영화 내부로 진입하는 이치로 이해하면 빠르다. 질의, 응답 과정에서 진은 틈입 곤란한 막을 느낀다. 질문은 자칫 적대적이기조차 하다. 계통과 인접으로 구분되는 은유와 환유를 진은 아파트 이웃에서도 발견했다. 2, 3층으로 층이 구분된 진과 진의 아래층은 무엇 하나 스며들면 안 되는 관계였다. 천장으로 물이 샐 때나 마주칠 수 있었던 아래층과는 불쾌하지만 비로소 소통하게 되었다. 그나마 복도식 구조의 아파트에서 양옆 집은 엘리베이터를 타면 인사 정도는 나누는 어쨌든 이웃이었다. 꿈, 은유, 환유, 불륜, 장소 따위의 어휘를 들먹여 가며 진은 질문에 답변하고 있었다. 오, 세상에나! 이토록 까무룩 잊고 살 수도 있다니, 한동안 얼마나 자책이 컸는데. 매개 없이 훌쩍 지나간 세월 탓일까? 진은 얼굴로 열이 쑥 치미는 걸 느낀다.



3.


“누구나 자신만의 구역을 갖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
효는 공루 끝까지 진출했을 때 자신의 유년기는 막을 내렸다고 했다. 진은 어떤 기분에 사로잡혀 효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 뒤풀이 자리를 고대로 떠서 실어온 익숙함 그리고 놀라움에 그가 특수 양탄자라도 품고 다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장롱 속에도 들어가는 거고 우리 딸 보니까 자기 방에다 텐트를 치더만. 나한텐 다락이 그런 세계였지. 그게 완전한 세계였던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죽음의 충동이라면 나한테는 그게 다락이었고. 다락에 갇혀 그 끝에 이르렀을 때 한 세계를 마감하고 다시 태어난 거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우리말다움으로 법조문을 뜯어고치겠다던 효는 우리 주거다움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진은 효가 유학을 떠났다는 얘기까지는 들었다. 건축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효는 한옥의 대중화에 관심을 두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근황을 묻자 효는 한옥 사랑을 펼쳤다. “짜 맞추기에 흠씬 빠진 거야. 이음새에 필요한 못조차 끼워 넣는 방식으로 한다니까. 물론 나무못이지. 헌데 지금은 완벽하게 재현할 장이들이 사라지고 있어서. 그야 한옥은 단점도 많지. 어휴, 겨울에 너무 춥잖아? 자재들이 표준화 규격화돼 있지 않아서 대중화도 난망하고.” 한 벌의 카드가 딜러의 손에서 놀아나듯 효의 지난날은 관중 앞에서 기승전결로 펼쳐졌다.
뒤풀이 자리는 공터에 방치된 덤불 뻗어 나가듯 힘차고 요란하기 마련이다. 처음엔 학술대회의 연장으로 비교적 절제되고 계산된 얘기가 오간다. 술잔이 채워지고 건배와 건배사 같은 의례행사를 해치운 뒤에도 아주 잠깐 중앙의 힘은 작용한다. 이내 올이 풀리듯 여기저기로 화제가 풀려 나가고 작건 크건 다들 언어로 한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은 중구난방 소란스러워진다. 음식을 먹어치우고 술잔을 비우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생산한다. 그들은 먹기 때문에 이야기를 토해 내는 것이다. 음식과 술은 쓸려 들어가고 화제는 쉴 새 없이 갈아치워진다. 옆사람이나 앞사람만으로는 모자라 두세 군데 화제에 간섭하면서 얽히고설켜 돌아간다.
이야기는 그들을 그 자리에 지탱시켜 주고 그들은 그 힘을 견뎌내느라 회전한다. 빅뱅 이래 점점 멀어지는 별들처럼 뒤풀이 자리라는 커다란 덩어리는 별수 없이 쪼개진다. 그 속에서 효는 좀 달랐다. 분명 진과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어느새 회전하는 행성들 가운데 효의 주변을 도는 위성들이 늘어나면서 그가 모두를 향해 이야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바람에 진의 얘기까지 덩달아 모두의 화제로 오르고 말 상황으로 접어든다. 진은 갈수록 낙담스러웠다.
“안방 아랫목에는 벽장문이 있지. 문을 열면 벽장은 불쑥 다락으로 도약하고 공루로 뻗어 나가. 공루는 부엌 천장에 해당하는 곳이거든. 이 공루에는 그야말로 고려짝 골동품까지 다 모여 있었어. 대개 옛날 부엌은 광으로 연결돼서 무한정 넓잖아. 바깥에서 보면 안방과 부엌, 광으로 연결되는 그 구역이 넓기는 해도 실체는 분명하지.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사정은 전연 달라지게 돼. 그야말로 굉장한 곳이야, 유년기 다락의 발견.”
아득히 어딘가를 헤매던 그의 눈빛도 되돌아온다. 한옥의 구조상, 삼분의 일 지점에서 정점을 찍고 공루는 점점 좁아지는데, 빛이 드는 중간까지 쌓여 있는 잡동사니를 샅샅이 확인하는 데만도 몇 년은 족히 흘러가더라고. 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더 더뎌졌는데 지연의 주범은 문자였다. 글을 읽게 되자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들의 일기와 군대에서 나올 때 받아온 비망록, 외설잡지 따위를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차츰 시들해지면서 점점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지붕 서까래는 꺾이고 그 끝은 칠흑 어둠이었다. 효의 이야기는 주변에 산재한 청각을 끌어 모았고 효도 이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왜 한옥에 관심을 가졌느냐는 물음에 자기 구역이라는 욕망을 대뜸 들이대고는 유년기와 다락의 발견을 거치고 나서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회는 모든 걸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틈과 빈구석이 많은 구조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진은 문득 의문이 일었다. 그것도 틈일까? 지금 회에게는? 진에게서처럼 까마득하게 잊힌 틈, 혹은 여태 돌보지 않는 빈구석?
이년아 남자라고 다 우리 같은 줄 알아? 남자 동기 환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는 동아리에 늦게 들어온 효와 대학 신입생 때 가입한 멤버들을 그런 식으로 갈랐다. 한동안 진은 환의 말이 박혀 그 사건을 당할 뻔한 사태로 여겼다.
빈구석이 그렇게 아름다운 거야, 정말로? 진은 뒤늦게 학술대회 참가 사인을 받으러 다가온 학생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냈다.
그날 진이 동을 따라 나서지 않은 것은 남자 동기의 무모한 행위를 막아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을 문제 삼을 생각조차 안 했던 것이다. 동이 사라지자 효는 한 마리 짐승으로 돌변했다. 효를 상대하는 건 난감했지만 여전히 진은 자신이 있었고 그렇게 되었다. 미쳐 날뛰던 효는 어느 결에 코를 골기 시작했다. 진은 기운이 빠지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여기저기 근육이 쑤셨다. 효가 진의 설득에 넘어갔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효의 획책에 진이 넘어가지 않은 덕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문은 열었지만 진은 무엇을 물을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질문을 더듬느라 주변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날 왜 따박따박 따지지 못했을까. 정신이 들자 효는 자진해서 간밤 일을 폭로하고 다녔다. 효가 예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진은 미처 할 말을 못 찾고 당황했다. 적기를 놓친 뒤 진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지나간 그 일을 왜 다시 꺼내야 하는지도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말도 못 찾았다. 굉장한 누명을 쓴 것은 아니니 반드시 해명하고 넘어갈 만큼 절실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은 것에 눌려 속이 개운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중대한 문제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때 진은 꼭 실어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점점 더 제때 할 말을 못 하고 살았다. 그러므로 오늘 그 해묵은 일을 효에게 따져야 할까? 진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참, 진 선생님, 우리 교수님은 어땠어요?” 이 말은 발화점이 된다. 기대어린 눈빛은 일제히 눈총으로 발사된다. 진은 무어라고든 호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굉장했죠.” 어쩐지 그 정도로는 부족해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덧붙이고 만다. “재미있는 얘기 해드릴까요?” 저절로 터진 말이다. 박수를 치는 소리에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어댄다. 멀어졌던 별들이 굉장한 기세로 다가오자 진은 힘을 얻어 떠밀려간다.
“이십대 청춘 한 무리가 술을 마시다가 셋만 남았어요. 그래서 여관에 갔죠. 아차, 그들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였거든요. 선배 둘에 후배 하나였나? 다른 상상은 하지 마세요. 아무튼 밤도 너무 늦었고 각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도 한 사람 택시비도 안 나왔거든요. 그중 하나가 시외에서 통학했기 때문에 택시비가 아무튼 장난 아니었대니까요. 거기서 선배인 남자애 하나가 후배 남자애를 선배의 권위로 내쫓아버렸어요. 여자애는 두 남자애한테 다 화가 났어요. 같이 잔다고 들어와서 후배를 내쫓는 동기 녀석이 나쁜 건 말할 것도 없구요, 붙잡는 여자 선배를 두고 가는 비겁한 후배 녀석도 원망스러웠죠. 동기 녀석은 후배 놈이 가버리자 수컷으로 돌변해 버렸어요. 하지만 동기 녀석이 어떻게 나와도 진정시킬 자신이 있었고 자신감이 승리한 밤이었죠.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으니 문제 삼을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이 일을 몇몇 친구가 알고 있는 거예요. 이상하죠? 누가 그랬을까요?”
진은 효의 얼굴을 보며 숨을 삼킨다. “뭐 그것도 아주 이해 못 할 심리는 아니에요. 그날 여자애가 동해서 일이 벌어졌다면 그냥 넘어갔을 일인데 이번엔 녀석이 오히려 난감해져서 당황한 거죠.” 그는 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디 끝까지 해보라는 듯 뜻 모를 미소까지 지은 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랬을 거라고 이해했다는 얘기예요. 그때는 어떻게 생각해도 화가 났죠. 그런데 까짓 그런 일도 이해 못 할 게 뭐겠어요. 벌써 이십 년 가까운 얘기니까요. 갓 스물이 넘은 어린애들이잖아요. 뭘 알겠어요? 상대방 감정을 알겠어요, 사과하는 방법을 알겠어요. 남자애도 당황했다는 증거잖아요, 그렇죠?”
그녀를 주목하던 사람 가운데 절반 정도만 얘기를 듣고 있는 상황이 다행인지 아쉬운 건지 진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느새 우주는 덤불에 정복된 뒷마당 공터처럼 난장판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자기 우주를 구축한 사람들은 절대 남의 말을 새겨듣는 법이 없었고 거대한 우주는 한줌으로 욱이면 우물에 던져진 돌처럼 거뜬해질 수 있는 신기한 존재였다. 외로운 우주들은 더욱 열심히 노래할 수밖에 없다. 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어디랄 것 없이 뻗어 나가던 별 하나가 마침 진에게 근접했다가 진이 둘러메는 가방에 맞고 쓰러진다. 어쿠, 비명이 튀어나왔고 그가 든 맥주잔이 바닥에 엎어지며 깨진다. 일순 적요해진다.
맥주는 소리 없이 바닥을 뒤덮고 기세에 눌려 “어머, 정 교수님” 하는 말조차 바람 빠지는 소리로 쪼그라든다. 진을 잡으려는 건지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는 건지 효가 일어나느라 의자 끌리는 소리만 잠시, 다만 사뿐하게 사그라졌다. 어색한 고요, 우주들은 노래할 생각도 못 하는 가운데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린다. 넘어진 정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휴대폰을 타고 새가 운다. 진동과 벨소리를 동시에 설정한 정의 스마트폰은 바닥을 울리면서 힘차게 지저귀고 있다.
“나쁜 자식,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댔지. 너 그때 내 말에 넘어왔으면 가만 안 뒀어. 한 번 더 노래해 보시지?”
“미안하다.” 효가 말했고 “그러게 이렇게 얘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진은 말한 뒤 걸어 나간다. 문을 밀고 나와 뒤를 돌아본다.
거기 우주인지 우물인지, 공터인지 모를 세계가 서 있었다. 잡초인지 별인지, 돌인지 모를 존재들이 한바탕 외롭다고 지저귀느라 건물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4.


진은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요즘 진은 자주 노래를 하고 싶었다. 진의 머리에는 효가 아니라 새 박사가 떠올랐다. 최근 알게 된 새 박사는 이번 프로젝트의 규모를 부풀리는 데 여러 모로 기여했다. 그렇다고 진이 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새를 구분하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대개는 그들을 노래로 알아본다. 가장 손쉬운 식별법이면서 새를 구분하는 가장 식상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노래로 새를 알아본다는 것은 실상 새를 구분할 의지도 능력도 안 된다는 의미다.
인간도 새소리를 낼 때가 있다면 노래할 때와 무리지어 떠들 때다. 노래는 멜로디 아니면 가사다. 멜로디에 끌려서 노래를 좋아할 수도 있고 가사가 귀에 감겨서 혹은 멜로디와 가사가 적당한 비율로 섞여서 이 노래와 저 노래를 구분하게도 된다. 리듬이 도드라지는 노래는 몸을 일렁이게 한다. 그러나 멜로디도 의미도 리듬마저 부재하면서 새소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말의 덩어리로 엉켜 무슨 의미인지 하나하나 떼어낼 수도 없는 혼돈의 상황 말이다. 진은 요즘 들어 회의 시간에도 자주 그런 경험을 했다.
“페널티를 주는 걸로 마무리 짓죠.”
그 말은 진이 들을 성격의 얘기는 아니었다. 진은 이번 분기에 추진한 프로젝트의 실무 책임자였다. 운영위원들이 직접 보고를 요구하여 그들의 회의에 불려왔다. 잔기침을 하고 막 보고하려는 찰나였다. 교수 변이 미처 마무리되지 못한 안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바람에 진까지 그 얘기를 듣게 되었다. 얘기를 다 듣지 않아도 현을 도마에 올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현이 이 속에서 누구의 계보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연말에 맞춘 연차평가에서 영향력 있는 교수들은 칼춤을 추곤 했다. 원장은 이번에 직계 제자를 데려오고 싶어 했다. 누군가 하나 떨어져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벼랑에 걸쳐진 줄의 맨 마지막에 매달린 현에게 사망표지 하나가 추가된다. 견고한 자기 우주를 구축한 존재들인지라 교수들은 한마디씩 보태면서 막대한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현은 논문 실적이 모자랐지만 모자란 걸로 치면 흠 잡힐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페널티를 제안한 변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원장은 당신 계보를 밀어 넣을 생각이 앞선 것이다. 결국 변이 원장에게 유연한 방식으로 물을 먹였다. 변은 합리적으로 일을 해결했지만 현에게는 그럼에도 유감스런 결정이 되고 만다. 가계를 온통 뒤흔드는 감봉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쾌한 징벌이다. 페널티를 먹게 된 현은 계획을 불가피하게 수정할 일이 남았다. 몇 년째 벼르고 있다는 승용차 갈이를 중고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은 지방대의 교양학부 강의 전담 교수로 가겠다고 이 기회에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도 있겠다. 현이나 진이나 잘리지 않은 상황을 마냥 감사하다고 말할 근거는 그들이 비정규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세계이므로 근거에다가 감히 ‘진리’라는 수사를 붙인다고 흠이 될 리도 없다.
진은 갑자기 모멸감을 느꼈다. 자기들끼리 할 얘기를 진을 불러 앉히고 하는 것은 심판을 봐달라는 뜻은 분명 아니었다. 진은 그 자리에서 지워지는 중이었다. 진의 귀와 입은 진의 지도교수인 강에 귀속돼 있었다. 강이 버티고 있는 한 그의 은하계에서 진은 강의 막강한 권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진에게 든든한 물리력이고 힘으로 작용했으므로 진의 우주이기도 했다. 그 자리의 우주들은 이 하찮은 먼지 진을 염두에 둘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자기 은하계를 깔고 말하는 한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간신히 교통할 수밖에 없었다. 이종의 언어가 한꺼번에 쏟아지자 회의 공간은 돌연 새소리로 가득 찼다. 그 일이 있고 효로부터 다시 사과를 받으면서 그의 말 주변으로 퍼지는 새소리를 제거하느라 진은 애를 먹었더랬다.
문득 진은 지난번 몸담았던 연구소가 떠올랐다. 그때 진은 연구소 소속 대학에서 현의 입장이었다. 진을 보고 누구는 망망대해에 띄워진 거룻배 신세라고 동정했다. 그건 지나치게 안이한 비유였고 그래서 시적인 표현이었다고 진은 생각한다. 그 학교에서 윗선 하나 확보하지 못한 채 타 대학 출신인 진은 그야말로 끈 떨어진 운동화였다. 추한 속살이 다 드러나면서 고단하게 이어진 일상은 진의 가슴 한복판에 상처를 새겨 놓았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건만 여간해선 지워지지 않을 모양이다. 때마다 진의 의식을 감고 들어오며 뜨끔한 감각을 일으키곤 한다. 진은 그러고 난 다음에야 다음 감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윽고 진의 가슴으로 안도의 한숨이 훑고 지나간다. 먼지, 진은 우주를 떠다니는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고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자 새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엔 새 박사의 아들을 만나기로 했다. 진은 시간에 쫓기며 약속장소로 날아간다.



5.


새 박사는 팔순의 소년이었다. 행사 기간 내내 진의 에스코트를 받으려 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진의 팔에 얹히는 새 박사의 손은 새의 날개처럼 가벼웠다.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은 새를 사랑해서인지 많은 점에서 새를 연상시켰다. 동행한 섬에서 다가가도 훌쩍 날아가지 않는 새들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 박사는 만나는 새 종에 맞춰 다른 소리를 내면서 말을 걸었다. 새를 안심시키며 다가가는 새 박사의 걸음은 가뿐했다. 새 박사는 어릴 적 후투티새를 알고 사랑하게 되면서 새 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단다. 회의 자리에서 교수들은 새 박사가 내던 소리와는 다른 소리를 내면서 새가 되었다. 만약 후투티를 본다면 사람들은 새를 울음소리로 알아낸다는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에 얹은 왕관하며 몸통에 두른 우아한 깃의 후투티새를 한번 본다면, 새 박사를 꿈꾼 감성이 아니더라도 그 자태에 홀리고 말 것이다.
대회 때 발간한 자료집을 보완해서 책자로 출간하는 일은 진의 몫이었다. 비주얼이 보강되어야 했고 새 박사가 가지고 있는 사진 자료들을 협찬 받기로 했다. 아카이브 관리인이라는 지위는 대단한 특권이었다. 새 박사의 사진들은 모두 필름 형태로 보관돼 있었고 아버지의 자료를 현상하기 위해 승은 집 안에 암실을 차려 아버지 새 박사의 사진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대를 이어 조류학자가 된 승은 아버지만큼 현장의 새에 열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새 박사의 아들은 아버지의 든든한 은하계에서 살아가는 천운을 누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현장의 새 박사, 새의 친구, 새의 보호자로서 아저씨 같은 소박한 풍모를 보인다면 그의 아들은 어엿한 이론가, 연구자로 비쳤다. 이대에 걸쳐 완성되는 지위는 무엇보다 안정된 역할 분담을 통해 가능했고 경쟁 종족을 따돌리기에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아버님이 여간 깐깐하신 게 아니라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세요.”
여유롭고 지적인 자세로 승은 아버지가 끼쳤을 신세를 미안해하고 대회 사흘 동안 아버지를 잘 보살펴준 일에 대해 고마워했다.
“아니에요, 귀한 시간 내주시고. 저희로서도 영광이지요. 많이 배웠어요.”
“연세가 있으셔서요. 같은 일을 여러 번 하게 하세요.”
새 박사가 진에게 몇 번 전화했던 일을 그도 알고 있었다. 새 박사는 이따금 기억을 깜박하는 치매기를 보였다. 오히려 그런 증세는 새 박사의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들었다. 노학자의 이력에 누가 되기는커녕 존경스럽되 친근감을 갖게 했다. 한평생 한 길에 전념한 이로부터는 숭고함이 배어 나왔다. 어디를 가나 먼저 챙기게끔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진은 새 박사로부터 받은 호감을 떠올리고 강조하며 승이 보이는 감정을 누그러뜨려 주려고 애썼다. 막상 얘기하다 보니 공연히 피로가 몰려왔다.
일평생을 새에 바친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노학자의 행동은 아름다웠다. 다들 빈약한 경제를 건설하겠다고 나서던 성장시대에 생계형 직업과 거리가 먼 일에 종사하는 일은 관조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무언가 뿌듯했다. 그가 입지를 굳혔을 당시만 해도 새 박사라는 독특한 학자로서의 이력은 세상이 후투티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를 각인시켰다. 어느 순간 새 박사는 어디를 가도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어디서나 대접받는다는 것은 프리패스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달리 말하면 ‘공짜’로 얻는 게 많아진다는 걸 뜻한다. 결국 특권이란 거지근성과 통한다는 걸 진은 노학자 곁에서 목격했다.
새 박사는 하필 사람이 몰려 있는 곳만 택해서 그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소박하게도 새 박사는 재래시장의 나이 많은 상인들이 몰려 있는 장소를 점지했다. 진은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연예인과 동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와, 새 박사님이다. 아유 박사님, 돈은 무슨 돈이요. 그래도 그게 아니지……. 바지 주머니에 채 들어가기도 전에 지상으로 늘어지는 손. 새 박사의 손은 새 박사의 말을 유연하게 배반한다.
새 박사의 아름다움만 골라서 얘기하자니 진은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떠드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되자 지껄이고 있다는 기분만 들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골라서 다니는 새 박사에 이끌려 진은 인파를 헤쳐야 했다.
“어찌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신지, 그걸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일일이 답례하고 서운하지 않게 주는 대로 다 받아 챙겨서 나오시더라구요. 그 모습이 얼마나 소탈하시던지.”
내가 지금 무슨 새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진은 이런 소리를 멈추고 싶어졌다.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무리지어 떠드는 것도 아닌데 새소리가 될 수도 있군. 진은 노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되는 대로 마구 지껄이는 소리 말고 진짜 노래 말이다.
“나중에는 박사님 뒤에서 물건 값 치르기 바빴다니까요.”
순간 승의 낯빛이 굳어지는 걸 진은 포착한다.
“지금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아버님이 좀 어린애 같은 데가 있으세요. 주변에서 받기만 하셔서…….”
“대부분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마지막 말은 잊어 주세요.”
진은 승이 서류봉투에 넣어온 사진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외투를 입을 새도 없이 서둘러 카운터로 달려갔다. 찻값을 계산하고 승과 헤어졌다.
진은 내지르듯 노래가 부르고 싶었지만 선뜻 노래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진은 완이 떠올랐다. 혼자 들어가는 노래방은 어색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무작정 걷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인파에 부딪히며. 그러다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멈추어 섰다.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품에 안으면 따뜻한 그 느낌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느껴졌었어…… 진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노래였다. 그것은 분명 노래였다. 거리에 음악이 흐르고 있던 것이다. 슬픈 눈으로 날갯짓하더니…… 노래를 조준한 화살처럼 진의 몸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쏘아진다. 진은 편의점 앞에 가서 선다.
노래가 멈췄다. “어, 말해. …… 시끄럽고 나 중요한 일 있으니 끊고 나중에 얘기해.”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노래는 거기서 나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끈 남자가 이어폰을 꺼내는 사이 흘러나온다. 이어폰을 귀에 꽂다가 자신에게 박힌 시선을 느낀 남자가 진을 쳐다본다. 휴대폰과 남자를 번갈아 보는 진에게 잠자코 이어폰 한쪽을 내밀며 가까이 있는 의자를 당겨 앉는다.
진은 다만 느낄 뿐이었다. 그는 남다른 심장을 가진 락커였다. 비록 생전에는 그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분명 느끼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도 진은 그대로 있었다. 적당한 멜로디 심장한 가사로 꽂히게 하는 노래는 문학의 한 장르이자 콜라보였다. 이윽고 진은 이어폰 한쪽을 정중하게 내밀고는 꾸벅 인사했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진은 가볍게 흥얼거리며 건들건들 걸어간다.



작가소개 / 김경은(소설가)

- 인천 출생. 2005년 《실천문학》 등단. 단편 「절연구간 건너기」, 「독버섯이었을까」, 「의사가 없다」 등. 중편 「개항장 사람들」. 장편 『딜도』 발표.
외유하느라 인하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에서 문화콘텐츠를 공부하고 2014년부터 계간 《작가들》을 여럿이 즐겁게 만들고 있다. 소설을 좇을 땐 소설만 빼고 다 되더니 소설에 거리두기 시작한 뒤 소설이 친근해지면서 뒤늦게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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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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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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