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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소설_HOTEL③] 아일랜드 페스티벌

  • 작성일 2015-07-14
  • 조회수 1,829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③]



아일랜드 페스티벌




정지향



삽화-아일랜드페스티벌



아일랜드 페스티벌은 그해 8월 처음으로 열렸다. 한여름 꿈의 섬 어쿠스틱 캠핑 나이트. 축제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아직도 이런저런 페스티벌 관련 커뮤니티에는 그날 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글이 올라오는 건 주로 장마철 새벽녘이다. 마찬가지로, 문득 검색창에 ‘아일랜드 페스티벌’을 적어 넣고 그 글들을 하나씩 읽어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 역시 비 오는 여름밤이다. 창으로 들어온 후덥지근하고 진득한 공기가 온몸의 표피에 달라붙어 기억을 깨우는 날. 그것들에 붙들린 채 이불 속에서 오래 뒤척이게 되는 날. 긴 불면과 피로에 시달린 끝에 정말 그런 일이 있기나 했던 걸까? 생각하게 되는 날. 아일랜드 페스티벌은 그해 8월 처음으로 열렸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강과 함께 그곳에 갔다. 여름휴가를 대신해서였다. 처음부터 페스티벌 같은 델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로서는 입사 후 맞는 첫 휴가였고 가능한 한 먼 곳으로, 서울의 사무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강과 나는 각자 경비를 감당할 만한 여행지를 추려 보았다. 생각처럼 먼 곳으로는 ㅡ 그러니까 남미나 유럽은 물론 인도나 몽골에도 ㅡ 갈 수가 없었다. 강은 그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월급의 반을 학자금대출 상환에 쓰고 있었다. 홍콩을 말한 것은 나, 블라디보스토크를 말한 것은 강이었다. 강은 그곳에 있는 고딕 양식 성당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었다. 멋지기는 했지만 나는 왜 러시아에 가서 동유럽풍 건물들을 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홍콩의 골목 펍 테라스에서 종일 칵테일을 마시고 적당히 쇼핑을 하며 휴가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내가 부탁한다면 강이 별 말 없이 홍콩행 비행기 표를 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래전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졸랐을 것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성큼 시간이 흘렀다. 저가 항공사의 휴가철 프로모션 항공권은 모두 동이 났다.
아일랜드 페스티벌 광고를 본 것은 우연이었다. 그즈음 나는 밤마다 침대 위에서 눈이 뻑뻑해지도록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일찍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과 밤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했다.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누르자 아기자기한 일러스트 영상이 시작되었다. 그림 속 사람들은 바비큐 집게를 든 채 공연을 보고, 강가에서 맥주를 마시고, 잔디에 누워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고, 또 아침볕 속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동안 캠프장 옆 무대에서는 계속해서 공연이 이어졌다.
우후죽순 크고 작은 록페스티벌이 생겨나던 때였다. 아일랜드 페스티벌이 열리는 P섬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고, 출연진 중에는 사람들을 끌어 모을 유명 밴드가 한 팀도 없었다. 밤새도록 공연이 이어진다는 콘셉트는 아마 그런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시절의 나는 바로 그 대목을 로맨틱하게 느꼈던 것 같다.


P아일랜드에는 그날 150여 개의 텐트가 설치되었다. 밤새워 메인 스테이지와 사이드 스테이지를 채울 밴드는 총 서른두 팀이었다. 늦은 저녁 잠시 소나기가 지나간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록페스티벌에서 비는 오히려 반가운 손님 대접을 받곤 하기 때문에 누구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P아일랜드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스테이지 앞에 서 있던 관객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와아 소리를 질렀다. 페스티벌 장에 쌓여 있던 열기가 금세 씻겨 나갔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그 비는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졌다. 캠핑장 일부가 불어난 강물에 잠겼고 끝내 공연마저 중단되었다.
P아일랜드 근처의 민박집들에 손님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시각은 새벽 한 시였다. 주인들은 눈을 비비며 벽에 걸린 열쇠를 하나씩 내주었다. 숙박자 중에는 그날 처음 만나 방을 나눠 쓰기로 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P아일랜드의 선착장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간판불이 꺼졌다.
섬에서 삼 킬로미터 떨어진 작고 조용한 호텔에 손님들이 도착한 것은 그보다 두어 시간 더 뒤였다. 무척 오래되었지만, 공을 들여 관리한 데서 오는 고상함이 있는 그 호텔은 산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어 어딘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비가 내린 그날 새벽엔 주변으로 둥글게 안개가 껴서 더 그렇게 보였다. P아일랜드가 있는 C시의 유일한 호텔이었다. 일찍이 체크인한 손님들이 모두 잠든 사이, 비에 젖은 사람들이 하나둘 호텔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혼자였다면 우비를 벗어버리고 대충이나마 옷매무시를 고쳤을 것이다. 호텔은 주황빛 조명에 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밝은 색 벽돌로 외벽이 꾸며진 단정하고 작은 건물이었다. 어느새 가늘어진 비가 사선을 그리며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산 바로 아래인 데다 한바탕 비가 쏟아진 뒤여서인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맑은 풀냄새가 났다. 커플이 앞섰고, 그 뒤를 남자와 내가 따랐다. 조금 전 만난 이들이었다. 모두 비옷을 입고 배낭을 멘 채 구부정하게 걸었다. 높은 웨지 힐을 신은 여자가 절뚝일 때마다 곁에 선 애인이 부축을 했다. 거울을 본 지 오래였지만 그들의 모습으로 내 몰골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자세를 고쳐 보아도 이내 다리와 허리에 힘이 빠졌다. 너무 오래 길을 헤맨 탓이었다. 주차장 가로 좁다란 길이 이어졌다. 오른편으로 정갈히 꾸며진 정원이 보였다. 네모난 연못도 지났다. 팔뚝만 한 금붕어 세 마리가 유유히 물속을 오갔다. 강을 잃어버린 지 네 시간 만이었다.


강은 화장실 앞에서 사라졌다. 페스티벌 장 내 유일하게 개방된 그 건물은 잠시나마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과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온통 북적였다. 강은 요의가 없다고 했다. 온 김에 들러, 거듭 권해도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피곤이 역력히 묻어났다. 그때 익숙한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건물 안의 웅성거림과 빗소리에 섞여,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아득했다. 신발 광고 음악으로 쓰이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어느 인디포크싱어의 노래였다. 몇몇 사람들이 얼른 짐을 챙겨 건물을 나섰다. 나는 강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뒤돌아보니 그가 창밖을 향해 서 있었다. 도무지 그칠 비 같지 않았다.
화장실은 더 할 수 없이 지저분했다. 휴지통에서 넘쳐흐른 화장지가 질척하게 바닥에 엉겨 붙었고, 사람들이 묻혀 온 흙이 벽이며 세면대까지 뻗쳐 있었다. 진한 암모니아 냄새가 났다. 줄을 선 동안 힐끗 세면대 거울을 보았다. 화장이 번져 얼굴이 얼룩덜룩했다. 나는 손을 들어 눈 아래를 닦아냈다. 찢어진 우비 사이로 비가 들었는지 자꾸만 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마침내 변기에 앉자 서서히 안도가 차올랐다.


어떤 전조도 없이 내리기 시작한 비였다. 섬으로 들어오는 배 위에서 강과 나는 윤슬이 반짝이는 강과 쨍한 푸른빛을 내는 여름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탓에 드러난 어깨가 따가웠다. 배에 탄 사람 중 반 이상이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개인 소유의 P아일랜드는 한때 연인들의 주말 여행지와 수학여행지로 유명했다. 산책로에서 2인용 자전거를 타며 사진을 찍는 일이 유행이었고, 섬 내부에서 재배된 차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칼국수가 인기를 끌었다. P아일랜드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기 시작한 것은 소유자가 중국인으로 바뀌면서부터였다. 언젠가 들었던 대로 섬 입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한류박물관이 들어서 있었고, 매점마다 연예인 사진이 들어간 기념품이 가득했다. 배에서 내린 강과 나는 페스티벌용 약도를 확인했다. 컬러프린트 한 종이를 상수리나무에다 테이프로 꽁꽁 붙여 둔 것이었다. 인쇄 상태가 조악했다. 강은 내리쬐는 햇볕에 눈을 찌푸린 채 한참이나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캠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메타세쿼이아 산책로를 통과해야 했다. 여기저기 멈춰선 유커들과 아무렇게나 놓인 삼각대, 유모차와 자전거 따위로 온통 복잡했다. 강과 나는 손을 놓았다가 붙잡기를 반복하면서 걸었다. 얇은 여름 치마가 다리에 엉겨 하반신의 굴곡이 드러났고,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강이 든 언 생수병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기도 무슨 드라마 촬영지야?”
강이 물었다.
“그럼.”
나는 전혀 모르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데선 다 한 번씩 찍잖아.”
확신한 것이 머쓱해 덧붙였다.
“무슨 페스티벌을 하는데 관광객을 받나.”
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캠프장 주변으로 넓게 펜스가 쳐져 있었다. 강과 나는 입장권을 받아 손목에 걸었다. 곳곳에 펜스를 지키고 선 스태프들이 보였다. 둘씩 짝을 지어 선 그들의 얼굴이 앳되었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인 모양이었다. 록페스티벌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일은 흔했다. 그것을 두고 말들이 많기도 했지만, 비싼 티켓 값을 감당하기는 힘들고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지원자들 덕에 언제나 경쟁률은 치열했다. 이따금 고개를 쭉 빼들고 펜스 안쪽을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주변에 선 스태프가 움찔, 경계했다.
공연은 해가 질 무렵에야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페스티벌 장 안은 벌써 왁자했다. 분위기 덕에 아침부터 고속버스와 택시, 또 배를 갈아타며 얻은 여독을 금방 잊었다. 강변을 따라 페스티벌 로고가 찍힌 텐트가 쭉 늘어서 있었고, 공간을 두고 맞은편에는 무대가 있었다. 스피커에선 곧 출연할 뮤지션들의 대표곡이 흘러나왔다. 걸을 때마다 샌들 사이로 잔디의 감촉이 느껴졌다. 강과 나는 곧장 스낵바로 가 맥주를 한 잔씩 샀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생맥주는 무척 차가웠다. 몸에 가득 쌓여 있던 열기 때문에 금세 취기가 올랐다. 강은 두어 번 만에 맥주를 털어 넣고 페스티벌 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지난겨울 유학에서 돌아왔다. 한강에 투신한 누군가 얼음이 깨지지 않은 덕에 구조되었다는 이야기와 지하철역 앞에서 동사한 노숙자가 출근하던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자주 엮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강이 있던 베를린의 날씨는 더욱 매서웠다고 한다. 그곳의 해는 아침 9시가 다 되어서야 뜨고, 오후 4시면 져버렸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어둡고 긴 겨울이었다. 강은 마지막 한파를 견뎌내지 못하고 유학을 마무리 지었다. 떠난 지 삼 년 만이었다.
나는 처음에 강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광고전화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 한 기업의 리테일 계열사에 취직한 때였다. 부재중 기록에 몇 번 같은 번호가 찍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엔 너무 바빴다. 마침내 전화를 받은 것은 일요일 밤이었다. 한 주 내내 기다렸던 주말이었지만 막상 할 일이 없었다. 냉장고 속에는 금요일 퇴근길 마트에 들러 사온 돼지고기와 파, 브로콜리 따위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과 노트북을 번갈아 들여다보던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은 참이었다. 전화를 받은 순간 난데없이 세상 바깥에서 날아든 소식을 들은 기분이었다.
강과 나는 그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헤어졌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쯤으로 계획되어 있던 유학이었다. 강은 독일에 가서 대안 교육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연애를 했던 오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착실히 준비가 진행되었다. 그러니 그와 공항에 앉아 있던 때도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슬프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 천천히 차올랐기 때문에 둑을 넘을 듯 수위가 높아진 뒤에도 알아차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스무 살에 강을 만났다. 입시생 시절의 한을 하루빨리 풀어버리겠다는 듯 입학을 한참이나 앞두고 자취방을 얻어 막 상경한 무렵이었다. 나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먼 친척이라든지, 어릴 때 전학을 간 친구라든지 여하간 말 그대로 누구도 없었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시절 엎치락뒤치락 순위를 나누던 친구들은 모두 그 도시의 대학에 진학했다. 서울로 가기에는 성적이 어중간했고, 그저 그런 대학에 다니기 위해 유학비를 감당하기에는 집안 사정들이 고만고만하게 어렵기도 했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극심한 분노를 느끼며 서울에 올라왔다. 이전에도 익숙했던 종류의 일이라면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내가 자란 도시에도 있던 패스트푸드점, 대형마트, 프랜차이즈 카페처럼 시시하게 보이는 일자리를 제일 먼저 제외시켰다. 결국엔 밤 열 시에 시작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끝나는 홍대 앞의 라이브 펍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은 강과 그 친구들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강은 나보다 세 살이 많았다.
우리는 곧 연인이 되었고, 나는 자주 그의 집에 들락거렸다.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내게 길을 보여주는 듯했다. 강이 나고 자란 수유동의 이층 주택은 작고 평범했다. 하지만 거실 한편에는 불어로 된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쌓여 있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모든 방에 커다란 스피커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책을 읽는 어른을 처음으로 보았다. 강의 부모였다. 그들은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강의 의견을 존중했고, 사회적 문제에 누구보다 예민했으며, 나와 강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런 사안을 꺼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강은 그들이 캠퍼스 커플 시절에 쓰던 클래식 카메라를 물려받아 썼고, 그들이 대학원 시절 읽던 책들을 읽었다. 강한 진보 성향의 대안학교에서 함께 자란 강의 친구들 역시 대부분 그런 것을 가진 부류였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동기들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부류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20대의 절반만큼, 나는 강의 것들을 나눴다.
“이제 나는 계속 밤을 건너가겠네.”
그날 강은 그렇게 말했다. 공항 흡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그 시간에 공항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비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출국장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거나 피식 웃었을 것이다. 우리는 흡연실을 나와 그대로 헤어졌다. 나는 시내로 나가는 마지막 리무진 버스를 타야 했고, 강은 더 늦기 전에 출국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연락하자, 고 번갈아 말했지만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강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나는 잠이 덜 깬 채 방으로 들이치는 햇빛 속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곧 강이 여전히 시차를 거스르는 밤의 하늘 속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순간 둑은 조용히 무너졌다. 물은 오랫동안 ㅡ 차오르던 때와 비교하자면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ㅡ 꽤 오랫동안 흘러 내렸다. 그사이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매달렸다. 삼 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결코 짧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수업의 반밖에는 알아듣지 못했어.”
강은 앞에 놓인 감자탕의 뼈를 발라 먹었다. 무척 살이 올랐고, 말끔하던 얼굴 곳곳에 여드름 흉터가 져서 묘하게 서양 청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1년이면 될 줄 알았던 어학원 시절이 2년으로 길어졌고, 마침내 원하던 대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결국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강은 나를 자취방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남자 친구는 생겼어?” 자기 발을 보며 걷던 강이 말했다. 차라리 곧장 술을 한잔 하자고 말했으면 뻔뻔할지언정 그다웠을 것이다. 강이 서툴고 어린 남자처럼 보였다. 이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날부터 아련한 추억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부러 강의 전화를 피하곤 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주말이오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서 그의 앞에 가 앉았다. 그는 나 외의 어떤 친구에게도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유학을 끝마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탓이었다. 그것은 강이 겪은 최초의 실패였다. 때로 그는 한심해 보였고, 더 자주 안쓰러웠다. 마침내 나는 아련함으로만 남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몸은 익숙한 것에 저절로 이끌렸고, 감정의 찌꺼기들은 그대로 거기 남아 작은 불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타오를 수도 있었지만, 찌꺼기를 남겼던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다시 타오르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냥 자리를 약간 옮겼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전화기는 방전된 지 오래였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홀 안에는 여전히 페스티벌의 흥분에 젖어 곧 밖으로 다시 뛰어나기기 위해 채비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까의 강처럼 멍한 표정으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화장실 앞으로 돌아왔다. 위층으로 가는 계단에 올랐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알록달록한 비닐 우비들뿐이었다.
그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30분 뒤 배 운항이 있을 예정이니 퇴장하실 분들은 시간에 맞춰 달라는 내용이었다. 스피커 속 여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정기 운항은 끝난 지 오래였고, P아일랜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페스티벌 참가자들뿐이었다. 안내방송이 끝나자 그래서 지금 나가면 환불을 해준다는 거야, 뭐라는 거야, 하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불평이 터져 나왔다.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전달받은 사항이 없어서.”
자원봉사자에게서 돌아온 말이었다. 그들은 그때 비를 맞으며 음료자판기를 천막 안쪽으로 들여놓고 있었다. 낮 동안 초록색 조끼를 입고 페스티벌 장을 어슬렁거리던 스태프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천둥이 쳤다. 페스티벌 참가자들은 반으로 나뉘었다. 짐이며 우산마저 내팽개치고 무대 앞에서 뛰노는 이들과 천막 아래 앉아 비가 그치거나 페스티벌 측이 어떤 결정을 내려 주기를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가로등과 무대 조명이 닿는 곳마다 바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가 하얗게 비춰 보였다. 여름비가 차가웠다.
나는 천막 아래 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사정을 말하자 한 남자가 선뜻 전화기를 내밀었다. 강의 새 전화번호는 다 외우지 못했다. 자꾸만 예전 전화번호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삼 년이나 지난 연락처였지만 어쩌면 전화번호 변경안내가 나올지도 몰랐다. 신호가 한 번밖에 울리지 않았는데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중년의 여자였다. 여보세요? 방금 잠에서 깬 듯 나직하고 느린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 뒤로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한 번 더 여보세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지역을 짐작할 수조차 없는 낯선 사투리였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향수 같은 것을 느꼈다. 훈훈하고 평화로운 거실의 분위기가 순간 몸을 스쳤다. 나는 뒤늦게 놀라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빌려준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까딱 묵례를 했다.
빗줄기를 뚫고 텐트촌으로 향했다. 주변이 어두워 텐트 위쪽에 붙은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매번 몸을 숙여야 했다. 캠프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팽팽하게 당겨진 텐트들이 파르르 떨며 소리를 냈다. 마침내 강과 내가 쓰던 텐트를 찾아냈다. 텐트 안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짐을 챙겨 나온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고여 있던 어둠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언뜻 강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


에어컨이 켜진 호텔 안은 서늘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고동색 가죽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자그마한 로비 너머로 리셉션이 보였다. 프런트에 선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그 호텔만큼이나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 나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살짝 올라간 입 꼬리와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상냥한 시선에서 호의를 느꼈지만, 직업적으로 오래 훈련된 표정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어쩐지 경계가 되었다.
가장 싼 스탠더드 룸을 결제했다. 그것은 내 방 월세의 삼분의 일쯤 되는 가격이었고, 페스티벌 티켓 값보다는 조금 더 비쌌다. 어쨌거나 내가 그동안 숙박을 위해 지불해 본 적은 없는 크기의 돈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강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면, 그리고 끝내 편안히 잠을 잘 수만 있다면 얼마든 상관없다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영수증을 돌려받을 때는 약간 기운이 빠졌다. 다음으로 커플이 방값을 지불했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쭈뼛댔다.
“혹시, 룸 셰어 하실래요? 돈은 뽑아 드릴게요.”
남자는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밝은 곳에서 보니 스물쯤 될까, 짧은 머리를 한 젊은 남자였다. 룸 셰어는 아마 그가 오랫동안 고심해 고른 단어일 터였다. 나는 그의 말뜻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호해 보이지 않도록 잠깐 뜸을 들였다. 이제와 일행이 있다고 하면 틀림없이 둘러대는 듯이 보일 터였다.
“죄송해요. 혼자 좀 쉬고 싶어서.”
내가 말했다. 남자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비에서 쉬다 가셔도 됩니다.”
프런트 직원이 말했다. 그가 로비 안쪽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등받이가 높은 가죽 소파 안쪽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잠들어 있었다. 곁에 배낭을 둔 채였다. 결국, 남자가 로비에 남았다.
커플과 나는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들은 5층에, 나는 11층에 가야 했다.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점점 커지는 전광판의 빨간 숫자를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반가웠어요, 쉬세요, 하는 말들이 오갔다. 다시 문이 닫히자 몸속 깊은 곳에서 커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고 페스티벌을 연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가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강을 떠올리면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았다. 애초에 페스티벌에 가자고 한 사람이 나였으니 그랬다. 페스티벌 이야기를 꺼낸 몇 주 전 저녁을 떠올렸다. 강과 나는 주말마다 내 자취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몇 번 영화관 같은 데 가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방으로 기어들었다. 금요일 저녁에 만나 술을 마시기 시작해 잠을 자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각자 책을 뒤적이고, 섹스를 하고, 또 잠을 자고, 일요일 점심때까지도 틈틈이 술을 마셨다. 무기력은 전염병 같았다. 한쪽이 나아질 즈음에 다른 쪽에게서 옮아붙는 일이 무한히 반복되었다. 강에게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유학 생활을 하며 혼자 사는 데 익숙해진 그는 우선 독립을 하고 싶어 했지만, 아르바이트로는 겨우 용돈 벌이를 하는 정도였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회사 생활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지자마자 곧바로 지루해졌다. 다음 단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취직을 준비하던 때가 나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문득 생각난 듯 페스티벌에 대해 말했다. 강은 곧장 “그래. 그러자.” 했다. 그러고는 다시 읽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을 잇지 않고 빤히 그를 쳐다보자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가자고.” 했다. 나는 처음부터 강이 페스티벌 같은 데는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라도, 바깥으로, 넓은 곳으로 나가 숨통을 틔우고 싶었다. 그뿐이었는데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아일랜드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비틀스의 노래였다. 텐트와 건물을 몇 번 더 오가는 사이에도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캠프장 일부가 물에 잠겼고, 지대가 약해진 탓에 사이드 스테이지의 철골 구조물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야간 공연 예정이던 밴드 몇 팀도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무대 앞에 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잠잠했다가 거세어지길 반복하며 내리는 비와, 페스티벌 장을 오가며 사람들을 모으는 자원봉사자들을 무시한 채 자리를 지켰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는 그들은 무슨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 악에 받쳐 무언가에 항의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랬다. 배정받은 공연 시간이 끝난 밴드 한 팀이 그들을 위해 무대에 남았다. 본인들의 노래를 다 불렀는지, 알 만한 팝들을 이어 연주하는 중이었다.
이젠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모이세요.”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선두에 선 자원봉사자 남녀가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느린 발걸음으로 그들을 따랐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들 뒤로 가 섰다. 펜스를 빠져나오는 사이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선착장까지 걷는 길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샌들 안이 못 견디게 껄끄러웠지만 어떻게 해볼 엄두를 못 냈다. 페스티벌 장 밖은 가로등이 모두 꺼져 사위가 어두웠다. 앞장선 사람의 손전등 불빛을 따라 걸었다. 서늘한 기운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면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 사이를 걷는 중이었다. 낮 동안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보였던 섬이 완전한 야생의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때 등 뒤에서 비틀스의 노래가 들려왔다. 마이크를 쥔 이가 가사를 외우지 못하는지 쳣 소절을 흥얼거리다 멈춰버렸고, 나머지는 멀리에서 여럿 함께 부르는 목소리였다. 무대 앞의 관객들일지 혹은 섬을 걷고 있는 어떤 사람들일지 모를 일이었다. Words are flowing out like endless rain into a paper cup, They slither while they pass, the slip away across the universe…….
오래전 강은 그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나사가 창립 60주년을 맞아 그 노래를 우주로 쏘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MP3 파일로 압축한 그 노래가 북극성에 도착하기까지는 420년이 걸린다고 했다. 제목이 Across the universe라서 우주로 보냈다는 건 너무 단순하지 않느냐, 그런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났다. 무엇도 내 세계를 바꿀 수는 없어, 라고 반복되는 후렴구를 입 속에서 웅얼거리다 보니, 우주를 날아가는 게 노래가 아니라 어떤 영혼처럼 느껴졌다. 강과 내가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 나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앞장선 사람이 낸 발자국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강과 내가 그때 했던 말들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중 무엇이 그의 말이고 무엇이 나의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강과 나의 말투가, 그리고 우리가 자주 쓰던 단어가 거의 같았기 때문일 터였다.
“북극성에 외계인이 있을까?”
“글쎄.”
“만약에 반쯤 왔는데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럼 돌아가고 싶을까? 계속 가고 싶을까?”
“그래도 가지 않을까. 200년이나 왔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도?”
“애초에 외계인이 MP3 파일을 쓰긴 해?”
시 같기도 하고 헛소리 같기도 한 그 노래가 점점 작아져서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귀를 기울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시꺼먼 구멍 같은 하늘이 보였다. 왼쪽 눈에 빗물이 들어갔다.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한참이나 선착장 앞에 모여 서 있었다. 주변의 민박집들은 진즉 만실이었다. 사람들은 단체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함께 서서 주변의 숙소를 검색하고,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댔다. 나는 무리에서 벗어나 선착장에서 대로로 이어진 길모퉁이를 향해 걸었다. 그곳에 편의점이 홀로 불을 밝히고 서 있었다. 물이며 핫바, 컵라면 따위를 사려는 사람들로 번잡했다. 행색만 보아도 이미 주변에 방을 잡은 이들인지, 이제 막 섬을 빠져나온 이들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가뿐하게 샤워를 마치고 반바지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맥주를 사 가지고 편의점을 나섰다. 전화기를 충전할 수 있을까 해서 들어간 길이었지만, 몰려든 손님에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아르바이트생 뒤로 줄줄이 대기 중인 휴대폰이 보았다. 나는 물티슈와 비닐우산을 샀다. 흙탕물이 튄 뒷다리와 손을 닦았다. 편의점 앞 대로에도 사람들이 모여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카풀을 마친 차들이 주차장을 출발했고, 택시를 기다리는 듯 줄 선 사람들이 목을 빼고 시꺼먼 도로를 내다보았다.
나는 무작정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걷는 사람들도 보였다. 낮에 섬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텔을 여럿 본 것 같았다. 십 분쯤 지나 사람들과의 간격이 차츰 벌어졌다. 주위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주 가끔 사람들을 태운 택시가 쌩 하고 지나갔다. 낮에 그런 길을 지났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랬던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점점 가로등 사이가 멀어졌다. 그때 누군가 택시를 멈췄다. 타고 있던 이들은 커플과 남자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벗어 던지고 콘센트를 찾아 충전기를 꽂았다. 완전히 방전되었던 탓에 휴대폰이 켜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우비를 벗어 휴지통에 쑤셔 넣었다. 싱글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인 작은 방이었다. 바닥에는 두텁고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마치 진공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 동안 귀를 울려대던 소음에서 마침내 빠져나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곧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전원이 들어왔다.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채, 카펫에 아무렇게나 엎드려 전화기를 쥐고 있었다. 휴대폰에 남겨진 것은 대학 친구들에게서 온 카카오톡 단체 문자 몇 통뿐이었다. 나는 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내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무언가가 툭 끊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젖은 원피스와 속옷을 벗고 벽에 걸린 가운을 내려 맨몸에 걸쳤다. 그리고 테라스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뜻밖에도 테라스에서는 p아일랜드가 보였다. 지대가 높은 덕일 터였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둥근 섬의 모양대로 붉고 노란 불빛이 번졌다. 조명이 켜져 있다면 아직도 p아일랜드에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일까. 비가 그쳤으니 내가 섬을 빠져나온 후 캠핑이 재개된 것일지도 몰랐다. 담배를 다 피워 갈 즈음엔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알이 바짝 말라 가는 듯한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기다릴 수 없어 들어가 앉은 채 물이 채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어오른 종아리, 다음엔 골반과 허리, 그다음엔 어깨의 통증이 차차 잦아들었다. 저녁 내내 몸을 압박하던 한기가 사라졌다. 아늑한 증기에 둘러싸여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첫 번째 벨소리는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을 때에야 겨우 잠에서 깼다. 나는 어느새 침대 안에 들어와 있었다. 목욕을 하던 그대로 맨몸이었다. 얼른 전화기를 가지러 가야 한다는 생각과, 몸에 부딪히는 푹신하고 가벼운 거위털 이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잠깐 부딪혔다.
“어디에 있어.”
강이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어디야?”
내가 물었다.
“섬 앞 편의점. 방금 휴대폰 충전했어.”
“호텔에 와 있어. 거기서 좀 먼데.”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섰을 때 너무 작지 않나, 생각이 들었던 방이 문득 커 보였다.
“여기 앞에 택시가 엄청 많이 와 있는데.”
“문자로 지도 보낼게.”
그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옷을 입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벗어 둔 원피스는 여전히 축축했고, 가방마저 푹 젖어 속옷이며 티셔츠 한 장까지 못 쓸 지경이었다. 잠들기 전 널어놓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나는 화장대 옆에 놓인 드라이어로 옷을 말려 보았다. 뜨겁고 축축한 바람이 손을 스쳤다. 될 일이 아니었다. 가운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허옇게 부풀어 있었다. 그건 피곤 때문에 생긴 부종이었지만, 하얀 가운 속의 나는 나른한 표정을 한 게으른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열흘은 이곳에서 먹고 자기를 반복한 것처럼 말이다.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욕조의 물을 빼고, 침대를 정리한 채 탁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강은 삼십 분쯤 지나 도착했다. 그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소변을 봤다.
“어디에 있었어?”
내가 문 너머로 물었다.
“건물 바로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잖아. 화장실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에서.”
강이 칫솔을 문 채 대답했다. 욕실 거울로 반쯤 보이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감정이 빠져나간 멍한 표정이었다. 내 물음은 여태껏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이었지만, 묻기에도, 답하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 속옷 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티셔츠 길이만큼 팔이 탄 것이 눈에 띄었다.
“일단 조금 자자.”
강이 말하고 자기 몫의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강의 커다란 몸집의 윤곽이 이불 위로 잠깐 두드러졌다가 이내 풍성한 오리털 아래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나는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다시 내 몫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욕조에서 나와 몸을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이불이 축축했다. 나는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고 사이드 테이블에 손을 뻗어 스탠드를 껐다. 두 개의 침대 사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P아일랜드에서 새로운 록페스티벌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한 글로벌 캠핑 전문 브랜드의 주최였고, 페스티벌의 이름도 기업의 것을 그대로 따 붙였다. 처음부터 시도의 지원을 받아 대형 축제로 기획된 그 페스티벌은, 아일랜드 페스티벌과는 달리 섬 전체에 무대가 세워지고 그 가운데 캠프장이 들어서는 모습이라고 한다. 매해 헤드라이너로 유명 해외 밴드가 여럿 참여하는 그 페스티벌은 이제 마니아들 사이에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여름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 페스티벌과 아일랜드 페스티벌을 연결해 떠올리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아직도 장마철 새벽녘, 이런저런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날 밤의 이야기를 써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날 밤 나는 이불을 헤치고 앉아 인터넷에 접속했고, 새로운 글들을 차례로 읽어 보았다. 그러다 그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냈다. 그는 페스티벌 장에서 있었던 일들보다도, 다음날 아침 호텔의 풍경을 길게 써두었다.
깨끗이 씻겨 나간 대기 위로 햇빛이 고루 퍼져 나가던 아침이었다. 레스토랑의 기다란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일반 숙박객과 뒤섞여 있었지만 페스티벌 참가자들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다른 숙박객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닝 번과 잼, 버터, 정방형으로 잘린 과일들, 삶아 물기를 뺀 햄과 샐러드, 그리고 미역국과 밥이 있는 간단한 조식이었다. 지문 하나 없는 깨끗한 창으로 멀리 북한강과 P아일랜드가 건너다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음식을 앞에 놓고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글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도 또렷이 그날 아침의 풍경이 떠올랐다. 나는 뜨겁고 향이 강했지만 별다른 맛은 나지 않던 커피를 마셨고, 강은 요거트와 수박, 참외를 먹었다. 싸늘한 에어컨 바람이 내가 앉은 쪽으로 불어왔다. 바닥의 흰 타일은 색이 바래 누런빛을 띠었다. 흘러나오던 음악은 드뷔시였다. 강과 내가 함께한 마지막 아침식사였다.




작가소개 / 정지향(소설가)

- 199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4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를 출간했다.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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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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