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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구조_제5회

  • 작성일 2014-05-15
  • 조회수 802

 

 


도덕의 구조(5회)

 

정지아

 

 

 


 

 

6.

 

    그녀는 전도유망했다.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 그녀 스스로 전도유망한 미래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딱히 의심하지도 않았다.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 지금은 그런 고민조차 사치스러웠다. 오늘도 오 분이나 늦었다. 이 달 들어 벌써 세 번째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현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품에 찰싹 달라붙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를 십 분 넘게 달래고 얼른 끝에 겨우 선생에게 넘길 수 있었다. 문을 닫고 나서자마자 현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야멸차게 돌아서 뛰었는데도 지각을 하고 말았다. 세 번의 지각 모두 현 때문이었다.
    시선이 따갑다고 느낀 건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 분 지각했다고 뭐랄 사람도 없고 상급자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상급자에게 보고한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그보다 자신이 지각한 주제에 팀원들의 업무태만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책상에 앉자마자 메일이 날아왔다. 티브이 광고 시안 최종본이었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그녀는 메일을 열었다. 어제 지시한 수정사항이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인물 더 선명하게! 인물 컷마다 0.2초씩 당기기로 했죠? 오전 중으로 수정해서 보고 요!
    메일을 전송하자 황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사무실을 울렸다.
    “어이, 이사! 속도 당기랬지?”
    “왜 이래요? 황사선배. 나한테 하란 지시 없었어요.”
    “이사가 뭐 이리 굼떠? 알아서 착착 해야 이사지.”
    “그러는 황사는 뭐 어디 내려앉아 푹 쉬시게?”
    이사는 뭐고 황사는 뭔지, 키득키득 웃음과 우스갯소리들이 오갔다.
    “시간이 남아도나 보죠?”
    기어이 한 소리 하고 말았다. 황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아, 우리는 오 분도 못 놉니까?”
    팀장도 오 분 늦는데 팀원이 오 분 쉬는 게 뭐 어떠냐는 빈정거림이었다. 뭐라 받아칠 말이 없었다. 이 바쁜 와중에 팀원이 지각을 했다면 그녀 역시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진 씨. 미안하지만…….”
    커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진이 넵, 경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향이 가까워졌다.
    “한 선배님, 월드컵 유머 모르시죠? 요즘 우리 사무실에서 그게 유행이거든요.”
    그녀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연일 야근행군인데 지치지도 않았는지 미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월드컵 선수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대요. 근데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서 자식들 이름을 ‘사’로 지으면 목숨을 구해 주겠다고 한 거야.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축구선수들이 몇 년 후에 다시 모였는데, 이운재 왈, 아 나 진짜 이사가 뭐냐고 이사가……. 김남일 왈, 전 김사입니다. 아니 왜 김을 사래. 유상철은 난 유사다. 유사제품이냐? 그랬더니 안정환이 똥 씹은 얼굴로 전 안사예요. 뭘 안 사 안 사기는.”
    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럼 차두리는 차사? 카 레이서 시키면 되겠네. 이름도 박지성이 젤 낫네. 그래도 박사잖아.”
    뭐가 그리 웃긴지 미진이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같이 웃지 못했다. 복귀한 뒤로 팀원들은 웃는데 엉거주춤 끼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회식을 몇 번 빠진 탓이었다. 그래서 회식도 일의 연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머! 선배님.”
    미진이 비명소리와 함께 황급히 크리넥스를 찾아 건넸다.
    “왜? 커피 흘렸어?”
    “예, 아뇨. 코피! 코피 난다구요.”
    그제야 인중 부근에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코피 정도에 웬 호들갑이야. 나가서 일 봐. 커피, 고마워.”
    그녀는 무심한 듯 휴지로 코를 막았다. 그녀는 오후에 있을 제작 피티 자료를 꺼냈다. 멘트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지만 그녀는 꼼꼼히 조사는 물론 강조할 어휘까지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황이 최종 시안을 들고 왔다. 세 시 반. 고작 삼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뱉는 대신 숨을 단전까지 깊이 빨아들였다. 순간적으로 화를 삭이는 데 가장 요긴한 방법이었다.
    “배경의 바이올렛, 오치드로 수정하기로 어제 최종 회의에서 결정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는 건 폭발 직전의 분노를 누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의 입술이 가늘어졌다. 못마땅할 때의 버릇이었다. 그녀는 똑바로 황의 눈을 응시했다. 삼 초쯤 팽팽한 시선이 얽혔다. 황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말씀하세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는 감정을 전혀 담지 않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오전에 똑같은 시안으로 보고 드렸는데요.”
    말 속에 뼈가 있었다. 그때 발견하지 못한 건 그녀의 책임이라는 의미였다. 오전에는 티브이 시안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거기 정신을 쏟는 바람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황은 입사동기였다. 여자에게 밀린 게 분한 건지 어쩐 건지, 황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뒤에서도 험담을 일삼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남의 잘못을 먼저 공격하는, 저보다 잘난 꼴을 보지 못하는 소인배였다.
    “티브이 시안도 디자인 문제였죠? 사안이 워낙 중요해서 신문 시안까지 신경 못 쓴 책임, 인정합니다. 하지만 책임 소재는 나중에 따지죠. 일단 수정하세요.”
    황 같은 사람에게 꼬투리를 잡혔다는 게, 그녀는 무엇보다 짜증스러웠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초고속 승진에 크게 한몫 했던 박 국장은 그녀를 대처 수상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빈틈이라곤 없던 그녀였다. 빈틈없이 맞물려 있던 톱니바퀴가 어디선가 느슨해지고 있었다. 복귀한 뒤부터였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언젠가도 이런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그녀는 아지랑이 너머의 봄꽃처럼 아른거리는 희미한 기억을 애써 털어냈다. 추억 놀음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 시 사십 분, 그녀는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팀원들은 모든 기기와 자료를 세팅한 상태였다. 수정한 신문 시안의 컴퓨터 데이터를 교체하고 임원진에게 나눠줄 신문 시안 자료만 출력하면 완벽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단 하나만 틀어져도 지난 두 달간 밤잠을 설쳐 가며 노력한 결과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어느 한 조각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 상무였다. 국장이었던 박은 그녀가 삼 개월의 출산휴가와 일 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상무로 승진해 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일 년 삼 개월이라는, 그녀에게는 찰나와 같았던 그 시간이 국장을 상무로, 대리를 차장으로, 평직원을 대리로 만들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세월이었다는 것을. 그 시간 동안 그녀만 멈춰 있었다.
    “기대가 커. 타임라인이…….”
    “한 시간입니다. 모레 오후 두 시입니다.”
    휴대전화 광고는 무려 삼백 억이 걸린 큰 건이었다. 광고회사로서는 자동차와 가전을 제외한 최대 시장이기도 했다. 그녀가 입사하기 전, 회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인 국내 기업 대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기업의 휴대전화 광고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처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그 기업은 2000년대 들면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시장은 확대일로였고, 회사로서는 어떻게든 다른 루트를 뚫어야 했다. 때마침 국내 휴대전화 시장의 최강자인 P 기업이 가을 시즌 새 광고를 두고 공개입찰을 선언했다. 미래를 보자면 회사로서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했을 때, 광고 1국 전원이 휴대전화 비딩에 매달려 있었다. 외부 비딩이 겨우 두 달 남은 상황이었다. 별 성과가 없었는지 박 상무는 그녀의 복귀와 동시에 광고 1국을 두 팀으로 나눴다. 두 팀 간의 경쟁을 통해 외부 비딩에 참가할 팀을 선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중 한 팀을 그녀가 맡았다. 대리로 자기 팀을 꾸린 전례가 없었다. 복귀와 동시에 이런 중책을 맡은 예도 전무후무했다.
    “대처가 모정까지 갖췄으니 이제 천하무적이겠군. 이번 일만 잘 끝내. 성공하면 다시 한 번 레전드가 되는 거야. 알지? 한번 전설은 영원한 전설이다!”
    차장 승진의 암시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가나안의 젖줄 따위에 혹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입만 벌리면 되는 줄 알았던 눈앞의 감을 까치가 채가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는 걸 그녀는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경험으로부터 배운 건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닥친 일에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이번에도 기대가 커.”
    박 상무가 다시 한 번 어깨를 두드리고 제자리에 앉았다. 광고 1국의 두 팀이 붙었던 내부 비딩에서 그녀의 팀이 임원진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카피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리더십도 있구먼.”
    얼굴 보기 힘든 전무의 칭찬까지 들었다. 과한 칭찬이었다. 그녀의 팀만 꾸릴 때보다 그녀에게 패한 나머지 1국 인원과 함께 준비한 한 달이 몇 배는 힘들었다. 입사동기 황은 사사건건 찍자를 붙었고,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는 수수방관, 제 일이 아닌 듯 굴었다. 1국의 화합을 위해 잠 잘 시간도 없는 판에 사나흘이 멀다고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마셔! 원 샷! 을 외치는 동안에도 그녀의 귓가에는 엄마를 찾는 어린 현의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현의 얼굴을 사나흘씩 보지 못한 날도 흔했다. 노력을 알아준 건지, 달리 방법이 없어 포기한 건지, 아무튼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는 마음을 풀었지만 황은 끝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승진에서 밀린 것, 나이도 어린 여자를 상사로 모시는 것, 모두가 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다친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위에 오른 그녀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황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라면 다친 자존심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터였다. 아님 말고, 이게 자존심이 다쳤을 때 상처를 입지 않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대학교 일학년 때, 마음에 품은 남자가 있었다. 먼발치에서 남자의 모습만 보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년 넘게 그랬다. 동기라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친해졌지만 남자는 그녀를 눈곱만큼도 여자로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남자는 우연히 합석한 그녀 고등학교 동창과 눈이 맞았다. 눈치 챈 순간, 아님 말고, 그녀는 남자를 깨끗이 마음에서 밀어냈다. 아님 말고, 가 되지 않은 순간도 물론 있기는 했다.
    해가 저물어 가는 거리에서 그는 우두커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위태롭게 멈춰 있는 그의 곁으로 사람들이 무수히 스쳐갔다.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그 혼자 멈춰선 채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멈춰선 채 세상의 뒤편으로 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성이 작동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가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붙잡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대기 속으로 흩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이성을 압도하는 그런 류의 감상을, 그녀는 그때까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걸음을 옮기려던 그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뒤를 돌아보았고,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안도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비로소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직감했다. 아님 말고, 가 그에게는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 인생에서 이성이 가장 느슨해진 순간이었다.
    이성의 끈을 순간적으로 놓친 적은 있어도 자존심을 다친 적은 없었다. 설령 후배가 그녀보다 먼저 승진했더라도 그녀는 아님 말고, 순간적인 질투와 시기를 금세 떨쳐냈을 것이다. 벌써 몇 년째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황이 그녀는 난감하고 답답했다.
    황이 뛰지도 않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회의 시작 십 분 전이었다. 그녀는 황의 손에 들린 서류를 급히 낚아챘다.
    “미진 씨, 이걸로 교체하세요. 십 분 전이에요.”
    미진은 팀원들 중에서도 동작이 가장 재빨랐다. 미진의 경쾌한 몸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저렇게 능숙하고 재빠른 동작이라면 뭐든 시간 안에 해내겠지, 뭐 그런 마음이랄까. 두뇌회전도 빠른 편이었다. 몇 년 전, 국장이었던 박이 황에게 점심거리를 사오라고 시켰더니 점심시간 끝나기 십 분 전에야 느릿느릿 돌아왔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커피 주문하고 기다려 받고, 햄버거 주문하고 기다려 받고, 김밥 주문하고 기다려 받고, 그러느라 오십 분이나 허비한 것이다. 어지간해서 황을 건드리지 않는 그녀도 그날은 속이 터져 싫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지금이 몇 십니까? 이럴 거면 나가서 먹고 말지…….”
    황은 음식들을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불퉁거렸다.
    “다섯 군데나 들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직접 가보시든가들.”
    박이 황의 등짝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소리만 경쾌하게 내리쳤다. 박이 아니었더라면 너 바보냐, 소리가 입 밖으로 새나올 뻔했다.
    “야 인마. 한진현이는 십 분도 안 걸렸어. 배워라 좀. 근처 식당, 카페, 모르는 번호가 없을걸. 미리 전화해서 주문해 놓고 칼 루이스 급으로 달렸다고. 전설이 달리 전설이겠냐? 너는 인마, 양반놀음도 아니고, 생전에 뛰는 꼴을 못 봤다 내가.”
    그랬다. 신입 시절, 어쩌다 보니 심부름은 죄 그녀 몫이었다. 누가 무슨 일을 시키든 그녀는 군소리 없이 최단 시간에 해냈다. 사소한 심부름일수록 더더욱 빨리. 잡일에 시간 쓰는 게 아까워서였는데, 선배들은 그것까지 업무처리 능력으로 높이 샀다. 뭘 이런 하찮은 걸로 칭찬을 하는지 신입 때는 우스웠는데 미진과 황을 보니 선배들이 왜 그랬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런 단순한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황에게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다. 사소한 것들이 뜻밖에도 결정적일 때가 많다.
    황에게 맡겼으면 임원진이 다 당도하도록 꾸물거리고 있었을 일을, 미진은 불과 오 분 만에 끝냈다. 자리마다 투명필름이 자로 잰 듯 똑바로 놓여 있었다. 십 센티쯤 오른쪽 위로 생수와 음료가 가지런히 놓인 것도 보아하니 미진의 솜씨였다. 역시 ‘믿고 찾는 미진 씨’다웠다.
    임원들이 오 분 사이에 우르르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모레 있을 외부 프레젠테이션의 시뮬레이션으로, 발표순서는 물론 러닝 타임까지 정확히 일치해야 했다. 마지막 연습인 셈이었다.
    네 시 정각, 마케팅 팀장이 발표를 시작했다. 마케팅 전략에 이십 분, 기획 방향에 이십 분, 제작 피티에 이십 분, 총 러닝 타임 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순서는 사십 분 뒤였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손에 땀이 찼다. 앞에 서기 전이면 늘 있는 증상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단상에 서면 증상은 깨끗이 사라지고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그렇다고 무대체질은 아니었다. 무대체질은커녕 사람 많은 자리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집중력이 좋은 편이고 담대한 편이라 긴장할수록 결과가 좋았을 뿐이다.
    담대한 데다 평소의 어투가 사무적이고 목소리에 힘이 있어 신입 때부터 종종 피티를 하긴 했지만 일개 대리가 수백억이 걸린 제작 피티를 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복귀한 그녀를 위해 국장이 기꺼이 양보해 준 자리였다. 이 국장은 박 상무 라인으로, 박 상무와 더불어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에이이(Account Executives : 광고기획자)의 발표가 끝났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이게 삼백 억을 물어올 수 있을까? 허공으로 날려버릴까? 기대와 의심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와 보폭으로 앞을 향했다. 걷는 자세만 봐도 사람이 보인다.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걸어가는 짧은 시간에도 그녀는 머릿속으로 마지막 점검을 끝냈다.
    그녀는 부사장부터 왼편으로 짧게 눈을 맞춘 뒤 발표를 시작했다. 이번 콘셉트는 컬러였다. 말의 빠르기와 강약을 조절하면서 그녀는 머릿속으로 정확하게 시간을 계산했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몇 번이나 연습한 내용이었다.
    발표가 후반부로 접어들 즈음, 느닷없는 노크 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누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황이 회의실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을 향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한 대리님 좀 잠깐만…….”
    그녀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간 계산이 다 흐트러졌다. 여기가 몇 분이었지? 결론을 말하기 직전이었으니까 남은 시간은 사분 삼십 초, 계산하고 있는 그녀 곁으로 황이 달려왔다. 황이 내민 손에 그녀의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제정신입니까?”
    그녀는 휴대전화를 받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아니 그게……. 전화가 하도 울려대서 봤더니, 문자가 여러 통 와 있는데, 애가 아프다고, 아니 의식이 없다고……. 응급실에 가는 중이랍니다. 어떤 상황인지 연락은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오 분이면 끝난다. 오 분 내로 무슨 일이 생길 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알았으니까 가서 기다리세요.”
    그래도 황은 돌아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외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결연하게 대꾸했다.
    “전화라도 해보세요. 무슨 일일지 어떻게 압니까?”
    할 수만 있다면 주먹이라도 한 방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먹은커녕 임원진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뭐라 쏘아붙이기도 난감했다. 그녀는 황을 무시하고 다시 앞을 향해 섰다. 황은 여전히 제자리에 우뚝 서서 무슨 마녀라도 보듯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까 끝낸 부분까지 타임 라인 오십오 분 삼십 초였습니다. 남은 사분 삼십 초 이어서…….”
    “아이가 아프다는데, 연락은 해보지 그래요?”
    부사장이었다.
    “괜찮습니다. 끝나고 하겠습니다.”
    “해보세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별수 없이 그녀는 황과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황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황에 대한 분노 때문에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놀이방 원장의 번호가 십여 차례 찍혀 있었다. 벨이 울리기도 전에 원장이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아휴, 현이 어머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죄송하지만 제가 연락할 때까지 전화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세요. 지금 중요한 발표 중입니다. 끝나고 바로 연락…….”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들어 보지 못한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이었다.
    “아니, 그게 애가…….”
    원장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만이 크레셴도로 고막을 때렸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황에게 집어던지다시피 건넸다. 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단상으로 걸어가는 국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회의실로 들어서기도 전에 부사장이 가보라는 손짓을 보냈다.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눈빛은 차가웠다.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현의 울음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막았다. 그녀는 가만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현의 울음소리만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그녀는 피티를 끝냈을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그녀는 피티를 망쳤고,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애 봐줄 사람도 없나? 이래서 애 엄마는 안 된다니까. 프로가 이러면 안 되지.
    듣지 않아도 그녀가 나간 뒤 오갈 말들이 귀에 선했다. 데자뷔가 아니었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녀의 첫 사수가 사색이 되어 뛰쳐나갈 때, 남은 사람들이 그런 말들을 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심지어 그때의 사수는 발표자도 아니었다. 그저 팀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소한 존재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삼백 억이 걸린 제작 피티를 팽개치고 아이에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상을 당하는 바람에 피티에 참석하지 못한 마케팅 팀장이 있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비난의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비딩에 실패하자 모든 책임은 그에게 돌아갔다. 결국 그는 회사를 떠났다. 이번 비딩에서 실패한다면 그녀 역시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될 터였다. 이미 회사의 컨펌을 받은 시안이고 오늘은 시뮬레이션에 불과하지만, 외부 비딩에서 최종 낙점을 받지 않는 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
    택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모범택시를 잡아탔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면서도 그녀는 끝내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걸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복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꼭 다녀야 돼? 나는 현이 놀이방 보내는 거, 영 내키질 않아. 어떤 사람들인 줄 알고…….”
    그녀도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겼으면 했다. 어머니가 아직 약국을 운영 중이긴 하지만 환갑 지난 뒤로는 고용 약사에게 거의 맡기다시피 해서 시간이 자유로웠다. 어머니도 첫 손녀라 품에 끼고 있고 싶어 했다.
    어머니 의사를 타진한 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대답 대신 담뱃갑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뭐라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싫다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처갓집에 신세 지기 싫은 것일 터였다.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내키지 않는 놀이방에 보낼지언정 장모에게는 맡기지 않겠다는 그의 마음이 그와 그녀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어떤 선을 긋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 그와 통화가 된들 좋은 말이 오갈 것 같지 않았다. 현의 병원행이 결국은 그녀의 직장 문제로 번질 게 불 보듯 환했다.
    병원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멀었다. 다섯 시가 넘은 동부간선도로는 이미 주차장이었다. 빨리 좀 가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지금 가는 중이에요. 정신이 없어서 전화도 못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째 하고 있는 것일까? 참아 왔던 짜증이 일시에 밀려왔다. 그녀가 잘못한 건 아니었다. 아이가 아픈 것도, 제때 연락받지 못한 것도, 제때 가지 못한 것도, 제작 피티를 못 한 것도. 그런데도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급성 장염 같다는데 지금 검사하는 중이에요. 해열제부터 놨으니까 조금 후에 열은 내릴 거라네요. 빨리 오세요.”
    원장 목소리에도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픈 남의 아이를, 그것도 자신에게 책임이 미칠지 모르는 남의 아이를 혼자 돌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얼마나 독한 어미면 자식이 아프다는데 회의랍시고 코빼기도 안 비칠까, 속으로 무슨 욕을 한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이성은 차츰 냉정해졌다. 급성이든 뭐든 장염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열이 내리면 의식도 돌아올 것이고, 사나흘 괴롭겠지만 아무튼 병은 나을 것이다. 이런 판단을 아까 했어야 한다. 부사장이 가라 했어도 제작 피티를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의 병은 흔한 것이고 금세 낫겠지만 한번 버린 기회는 좀처럼 다시 오지 않을 터였다.
    “지금 동부간선도로 들어섰는데 차가 움직이질 않네요. 죄송하지만…….”
    뒷말을 마치기도 전에 빨리 오세요,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툭 끊겼다. 회사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미안하지만 현이 고모가 올 때까지만 있어 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피티야 이미 끝났겠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내팽개치고 가서 돌아가지도 않는 것보다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녀가 책임을 져야 했다. 총만 들지 않았을 뿐, 회사는 전쟁터고 그녀는 이를테면 소대장이었다.
    그러나 전화는 그녀를 비난이라도 하듯 냉정하게 끊겼고, 다시 걸 엄두는 나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 바로 이 지점이 그녀가 가장 높이 오른 고지라는 것을. 명치께가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당황했다. 성공이라는 것을 의식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희망의 끈이 탁 풀려버린 이 순간, 지금까지 느껴 본 바 없는 공포와 허무가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내렸다. 진한 라일락 향기가 순식간에 밀려왔다. 주변을 살펴도 라일락은 보이지 않았다. 강변으로 그녀가 상한 고기 같은 진홍색 철쭉만 징그럽게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라일락 향기는 눈앞에 보이는 철쭉보다 더 강렬하게 사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독문과를 선택한 것은 독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었다. 동기들 몇몇처럼 전혜린에 대한 동경 때문도 아니었다. 토마스 만이나 카프카를 흠모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독일어를 잘해서였다. 독일어를 잘하게 된 건 순전히 큰 이모 덕이었다. 어머니와 열 살 넘게 차이나는 이모는 독일 파견 간호사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이모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호대학에 진학했고, 사 년 내내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한 독종이었다. 의지의 한국인, 그 자체였다.
    이모는 낯선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동생 넷의 대학 등록금을 댔다. 그러느라 혼기를 놓친 탓인지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건지 평생 독신으로 산 이모는 여러 조카 중에서도 그녀를 유독 예뻐했다. 그녀는 외가를 통틀어 첫 번째 아이였고, 어쩌면 이모는 장녀인 자신의 모습을 그녀에게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이모는 크리스마스나 그녀의 생일이 아니더라도 틈틈이 엽서를 보냈다. 거기 적힌 독일어가 그녀의 첫 외국어였다. 독일의 그림책, 오디오북도 자주 보냈다. 어린 그녀는 어머니가 읽어 주는 동화책보다 오디오북의 딱딱한 독일어 억양을 더 좋아했다.
    “Spieglein, Spieglein an der Wand, wer ist die Sch?nste im ganzen Land?(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최고의 미인이지?)”
    슈피글라인, 슈피글라인 안 데어 반트, 베어 이스트 디 쇤스테 임 간첸 란트? 그녀는 오디오북의 억양을 따라하곤 했다. 슈피글라인, 슈피글라인, 소리 내어 읽으면 자신이 낯선 세계 속을 떠도는 가볍디가벼운 먼지처럼 느껴졌다. 그 가벼움이 그녀는 좋았다.
    조금 커서는 이모와 독어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모가 보내 준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 시리즈나 『모모』,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 등을 독어로 읽었다. 그녀가 접한 독일 문학은 겨우 그 정도였다.
    순전히 이모 덕분에 어려서부터 독일어를 접했고, 순전히 그 덕에 남들보다, 아니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이 독일어를 잘했다. 그 무렵의 아이들은 영어 외에 독일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남보다 압도적으로 잘한 건 독일어, 딱 하나였다. 그녀는 그래서 독문과를 선택했고, 부모나 선생들은 독일 문학에 심취한 그녀를 기특히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심취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 무엇에도 심취한 적이 없다. 어쩌면 심취하는 능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클래식 기타에 심취한 그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무것에도 심취하지 못하는 인생이란 좀 쓸쓸한 게 아닌가, 하고.
    대학에 입학한 삼월부터 그녀는 교수 이름으로 나가는 세계문학전집의 일부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원서강독을 담당한 교수가 하필 어느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독일 문학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 사 년의 대부분을 그녀는 그 교수의 연구실에서 번역을 하며 보냈다. 번역이 하도 지겨워 일 년간 휴학을 하고 이모가 있는 독일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번역을 했다. 교수가 물어물어 주소를 알아내서는 편지를 보내 일을 맡겼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교수의 총애를 받는 제자였다. 어느 교수가 정년퇴임하면 그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소문을 그녀도 들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문이 사실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수는 거의 강압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고, 딱히 별다른 꿈도 없어 그녀는 고삐 꿰인 송아지처럼 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서도 번역만 줄기차게 했다.
    그녀는 원래 석사 졸업 후 독일로 유학 갈 생각이었다. 훔볼트 대학의 입학허가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교수 직함을 얻기 위해 차곡차곡 이력을 쌓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그녀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원고더미로부터. 그래서 그를 만난 뒤 가볍게 독일 유학을 포기할 수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조금도 아깝지 않게. 먹다 질린 아이스크림을 내던지는 마음으로.
    지도교수는 그녀가 가난한 그와 결혼하는 바람에 공부를, 교수직을 포기했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총애하는 제자의 미래를 망쳤다는 이유로 지도교수는 역시 지도학생이었던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주례조차 거부했다. 부모나 친구, 대부분이 지도교수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탓이라 할 수는 없다. 그는 공부를 그만두라 한 적 없고, 취직하라 강요는커녕 넌지시 내비친 적도 없다. 취직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서글프게 물었다.
    “내가 설마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니?”
    너무 슬퍼 보여서 하마터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나 특별한 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가난한들 사랑만 있으면 족한 철부지도 로맨티시스트도 아니었다, 그녀는.
    벚꽃이 흩날리거나 라일락 향기 질펀한 교정에서 그가 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따위를 들으며, 그녀는 감상에 젖어 있지 않았다. 그의 연주가 감미로울수록 그녀의 머리는 냉철해졌다. 연봉이 가장 높은 회사에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굳혔다.
    졸업을 앞두고 그녀는 연봉이 가장 높은 회사 세 군데에 원서를 냈다. 세 군데 다 합격했다. 그중 가장 연봉이 높은 회사를 골랐다. 그게 광고회사였다. 그가 공부를 계속한다고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한 회사를 일부러 선택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그는 조용히 담뱃갑을 들고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와 결혼한 뒤로 그녀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잠시도 쉬어 본 적이 없다. 아이를 낳기 사흘 전까지 일했고, 바쁘기로 소문난 광고회사에 다니면서도 매일 아침상을 차렸다. 출근하면서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퇴근 후에는 자정이든 새벽이든 친정에 가 아이를 데려오고, 집안일이든 회사일이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로봇이라도 어딘가 이상이 생겼을 법한 고단한 행군의 나날이었다. 불평도 하지 않았다. 세상은 녹록치 않으니까.
    대체 그녀의 판단 어디에 허점이 있었던 것일까?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일까? 그가 그녀의 부모가 얻어 주려던 아파트를 받았다면 시작부터 편안했을 것이다. 그가 아이 봐주는 아주머니 들이는 것을 허락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런 날 그가 병원으로 달려가 주었다면 그녀는 제작 피티를 성공리에 마쳤을 것이다. 결혼을 했어도, 아이 엄마여도, 그녀는 국장과 상무가 준 기회를 잡았을 테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그의 책임이다, 라고, 그녀는 비난하고 싶었다. 말이 되든 말든 마구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감이라 밤늦게 퇴근할 그는,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면 아내와 딸이 병원에 있는지도 모르고 여느 날과 똑같이 쓰러져 잠들 것이었다. 그에게는 여느 날과 같은 날이지만 그녀에게는 맞물렸던 톱니바퀴가 어긋난, 쉬 잊히지 않는 날이 될 것 같았다.
    “어디 불편하세요?”
    룸미러에 시선을 둔 채 운전기사가 물었다. 타인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즉시 냉정을 되찾았다.
    “아이가 아파서요.”
    저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었다. 인생이 막막해서요, 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고 저런. 몇 살인데요?” “15개월이요.”
    “아이고, 속이 타시겠네. 말도 못 하는 어린 것이…….”
    그녀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대는 것으로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했다. 운전기사는 돌연 비장한 자세로 운전대를 잡고 정면을 주시하며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앰뷸런스나 경찰차로 변신이라도 할 태세였다.
    운전기사의 폭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도착한 것은 거의 여섯 시가 다 되어서였다. 아이는 이미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였다.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원장은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차가 너무 막혀서요.”
    “일이십 분만 일찍 출발하셨으면 안 막혔을 텐데……. 해열제를 맞았는데도 잠도 안 자고 하도 울어서 정말 진땀 뺐어요. 좀 전에야 겨우 잠들었어요.”
    여기서도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원장을 원망할 수도 없다. 원장에게는 원장대로 바쁜 일이 있다. 옷을 챙겨든 채 지갑까지 손에 쥐고 있던 원장은 이내 병실을 떠났다.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문 밖까지 따라 나가 원장을 배웅했다. 조만간 넉넉히 챙겨 줘야 할 듯했다. 마음은 돈의 액수로 표현된다. 살아 보니 그렇다. 부모조차도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보다 두둑한 돈 봉투를 좋아한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표현할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영혼을 팔고 시간을 판다는 건, 슬프고도 잔혹한 현실이다.
    다시 병실로 돌아오는 순간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돌 지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지낸 현은 혼자 있는 걸 끔찍이 싫어했다. 해열제와 진통제로도 외로움을 잠재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도 되지 않는 이마에 푸른 혈관이 곧추선 채 파들파들 떨렸다. 혈관들이 나 여기 있어, 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아이를 안았다.
    아이의 몸은 여전히 불덩이였다. 불덩이인 채로 품에 안긴 현이 뚝 울음을 그쳤다. 엄마가 온 걸 아는 게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아이의 좋은 엄마인 채로, 그것만으로 평생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
    그는 그날 밤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밤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못 했다.
    다음날 새벽, 그녀는 집에 들렀다.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했다. 현은 사나흘 입원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아침까지도 열이 완전히 잡히지 않았다. 시누가 며칠 식당을 쉬고 현을 봐주기로 했다. 시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섯 시 반,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마신 건지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를 빨래 통에 넣고 그녀는 황태국을 끓였다. 취한 다음날이면 그는 밥도 없이 술국 한 사발로 해장을 했다. 국이 끓는 동안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샤워를 마쳤다. 국에 파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어 한소끔 끓인 뒤 화장을 했다. 화장에 삼 분, 머리 말리는 데 삼 분, 옷 갈아입는 데 삼 분. 십 분 안에 출근 준비가 끝났다. 그 십 분이 그녀가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전부였다.
    전철 안에서 그녀는 미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정 지시 없었어?
    미진도 출근 중인지 즉시 답이 왔다.
    배경의 오치드 수정이 너무 거칠다는 지적이 있었고요. 그것 말고는 문제없었어요.
    그럴 줄 알았다. 언제나 황이 문제였다. 그래도 그 정도였다니 천만다행이었다. 일이십 분 안에 끝날 작업이 아니긴 했다. 배경의 빛을 방울방울 오치드와 화이트로 표현하는 것이라 반나절은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러니 오전 중으로 발견하지 못한 그녀의 책임도 컸다.
    국장님이 잘 끝내셨어요. 현이는요?
    회사 사람으로부터 가족에 관한 문자를 받아 본 건 처음이었다. 낯선 미진의 문자를 그녀는 한참 들여다보았다. 모두들 그렇게 묻고 싶을 터였다. 그리고 판단할 터였다. 역시 애 엄마는 안 돼. 한진현이도 별수 없구먼. 걔라고 별수 있겠어? 치마 입은 여잔데. 미진의 걱정이 진심인 걸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했다.
    좀 있다 보자.
    몸이 납덩이를 매단 듯 밑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밤새 현을 안고 서성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머리는 건드리면 쨍 소리가 날 듯 맑았다. 그녀는 출근해서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차창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새벽 기운이 남아 있는 햇살에 잠긴 채 전철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침마다 비슷한 풍경이었다. 평소에는 그녀도 그 풍경 중 하나였다. 어제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시간 맞춰 해열제와 진통제를 투여했는데도 현은 침대에 누이기만 하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품 안에서야 겨우 울음을 멈췄다. 그런데도 황급히 달려온 시누를 기어이 집으로 돌려보낸 건 오늘 낮 시간을 위해서였다. 낮에 현을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황이 수정한 신문 시안은 역시 조악했다. 그녀는 메모지에 꼼꼼하게 수정 사안을 써서 황의 컴퓨터에 붙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그녀는 이 국장 방으로 갔다. 여덟 시, 국장은 이미 출근해 있었다.
    “어, 출근했어? 앉아.” 국장이 보던 서류를 미뤄 두고 소파로 왔다.
    “커피?”
    “네.”
    이 국장이 인터폰을 눌렀다.
    “여기 커피 두 잔. 한 잔은 진하게.”
    서로의 커피 취향을 묻지 않아도 될 만한 세월이 그와 국장 사이에 쌓여 있었다.
    “아이는 괜찮은 거야? 필요하면 휴가라도 쓰지 왜?”
    “괜찮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애가 우선 아닌가?”
    아이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국장 방을 두드릴 때만 해도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품고 있었다기보다는 마저 다 놓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사표를 꺼내 국장 앞으로 밀었다. 국장이 물끄러미 사표를 바라보며 뜨거운 커피를 훌훌 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국장의 마음을 그녀는 자기 마음인 듯 읽을 수 있었다. 국장은 일 중독자였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휴가를 쓰라든가, 애가 우선이라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 국장이 부장이었던 시절, 자동차 광고를 따낸 뒤 밤새 벌어진 술자리에서 잔뜩 취해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아마 하이야트 제이제이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되지도 않는 춤으로 무대 위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진현아! 우리 애들은 어릴 때 아빠 얼굴도 몰랐다! 내 자식이지만 지금도 서먹서먹해. 나는 그냥 돈 주는 기계야! 그래도 말이다. 시간을 돌린대도 나는 이렇게 살 거다. 심장이 뛰지 않냐? 내 광고가 티브이를 도배할 거라고! 사람들이 내가 만든 광고를 보고 차를 살 거라고! 이천짜리 차가 내 카피로 온 국민의 드림 카가 될 거란 말이지. 이게 광고의 맛 아니겠냐? 광고는 마약이야, 마약!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이 국장이 취중에 내뱉은 말을 통째로 기억하는 건 오늘 같은 날을 예상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광고가 마약이라는, 광고에 미쳐 있는 국장이 신기했다.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과연 광고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런 국장이 휴가 운운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었다. 사표를 내지 않으면 추락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은근히 까이고 무시당하고, 승진에서 누락되고, 그런 과정을 모두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 국장은 그녀의 커피 취향뿐만 아니라 완벽주의도, 자존심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사표에 시선을 고정한 채 국장이 물었다.
    “어떻게…… 집에 눌러앉을 건가?”
    “벌어야죠. 시간 널널한 데로 찾아보려고요.”
    “알아봐 줄까?”
    “그 정도는 제 힘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국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그때 연락드리면 도와주실 거죠, 국장님?”
    그녀가 생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제야 국장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지금 부탁드릴 건데, 괜찮으세요?”
    “이건 반칙 아닌가?”
    “그래서, 하지 마요?”
    “해봐. 뭐야?”
    “이번 피티까지 제가 책임질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가능하시다면. 유종의 미는 거둬야죠. 되든 안 되든.”
    “돼야지 무슨 소리야. 자신 있으면 해봐.”
    되고 말고는 클라이언트에게 달려 있었다. 이미 시안은 완성된 상태, 남은 건 피티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 뿐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국장이 자신 있으면 해보라는 건 승낙이었다. 아마 상무나 그 윗선과 논의가 끝난 상태일 터였다. 여기까지가 몇 년의 세월 동안 쌓인 정으로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배려임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이 국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쉽네…….”
    그 말이 아깝네, 로 들렸다.
    그녀는 닫힌 방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집 외에 자신만의 방을 갖기 위해 사람은 죽어라 일하는 것이라던. 이런 방을 꿈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방을 갖지 못할 거라 포기한 적도 없었다. 꿈꿔 본 적도, 포기한 적도 없는 방 앞에서 그녀는 발을 떼지 못했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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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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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꿈꿔 본 적도, 포기한 적도 없는 방 앞에서... 같은 여성으로 문장 하나하나 공감이 갑니다. 출간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4-05-31 18:56:5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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