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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집

  • 작성일 2014-02-01
  • 조회수 1,955

 

 

유령의 집

 

 

김종옥

 


 

 

 

삽화유령의-집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세심하게 조절된 어두컴컴함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거나 방치되어 그런 게 아니었다. 남자는 그것을 알았다. 바닥에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양탄자가 깔렸고 눈에 보이지 않는 스피커에서 조그맣게 경음악이 흘러나왔다.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 박힌 작고 희미한 안내 등과 천장 모서리 안쪽에서 스며 나오듯 밝혀진 간접 등을 제외하면 다른 빛은 없었다. 방향제 냄새가 났는데, 그럼에도 습습한 천 냄새, 바닥과 벽면 일부까지 덮은, 오래 햇볕을 쬐지 못한 양탄자 냄새를 완벽하게 지워내지는 못했다. 복도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이어졌고, 다 가서 왼쪽으로 꺾여 있었다. 서로 마주 보는 방들은 모두 문이 꼭 닫혀 있었다. 연속된 방 번호들이 지그재그로 이어졌다.
    남자가 앞장서고, 여자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바닥의 양탄자는 푹신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 뒤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고 그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녀도 따라 미소 지었는데 그 이유를 남자는 몰랐다. 왼쪽으로 꺾어지자마자 찾던 방 번호가 나타났다. 그는 카운터에서 받아온 카드 키를 문손잡이 부근으로 가져갔으나 어디다 그것을 밀어 넣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여전히 구멍은 없었다. 마침내 그것이 전자감응식 카드 키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손잡이 아래 부근에 그럴 만한 판대기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카드 키를 그곳에 갖다 대어 보아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다시 여자의 얼굴을 보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웃기는군.”
    “번호 맞아?”
    그는 다시 카드 키 번호와 방 번호를 확인했다.
    “맞아.”
    둘은 그 자리에 서서 서로의 곤란해 하는 표정을 바라보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적절한 타이밍의 미소였다.
    “내가 한번 해볼게.”
    그녀는 그에게서 카드 키를 받아들고 문 앞에 서서 그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문손잡이 부근을 살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결론을 얻었는지 손잡이 아래 판대기에 카드 키를 여러 각도로 갖다 댔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나오는 게 아닐까?”
    “어디서? 이 문에서?”
    “아니 어디든.”
    “그럴 수도 있지. 여기 이렇게 문이 많은데.”
    “근데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지 않아?”
    “시간이 너무 이르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래? 시간이 일러?”
    “잘 몰라.”
    “오빠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나쁜 상상을 했다. 그녀도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었다. 둘은 잠시 열리지 않는 문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마침내 그가 다시 그녀에게서 카드 키를 옮겨 받고 말했다.
    “내가 카운터에 내려갔다 올게.”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려.”
    곧이어 다시 남자가 말했다.
    “같이 내려갈래?”
    “아니, 오빠만 갔다 와.”
    그는 카운터 직원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올라왔다. 복도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기 전까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문득 여자가 그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열리지 않는 문과 마주 보는 벽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그들이 나타나자 등을 떼었다. 직원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처음 입구로 들어왔을 때 직원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어리게 보였다.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하지만 더 어리게 보이는 여자도 많았다. 심지어 교복처럼 보이는 옷을 그대로 입고 온 여자도 있었다. 그때마다 직원은 눈치 채지 못하게 그런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오랫동안 그 얼굴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왜인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그들이 카운터를 떠나자마자 내실로 들어가 CCTV 모니터를 보았다. 고정된 각도로 비쳐지는 항상 똑같은 엘리베이터 안. 여자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니터 화면 안에서 서로 전혀 모르는 무관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손을 잡고 있거나 심지어 몸을 끌어안고 있어도.
    직원은 문제의 카드 키를 받아들고 문을 열어 보려 했으나 여전히 열리지 않자 주머니에서 다른 키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다른 방 카드 키였다. 그 방 문은 쉽게 열렸다. 손잡이 아래 감응판 안쪽에 붉은색 등이 반짝이며 조그맣게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은 바로 내려가지 않고 그들이 방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직원의 얼굴을 쳐다보고 잘 해결되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직원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직원은 곁눈질로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녀도 직원이 자신의 얼굴을 자꾸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이전에 어디선가 보았는데, 그게 어디인지, 아니 정말로 보았던 것인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복도는 어두컴컴하고 여전히 조용해서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졌고 그렇게 서 있는 세 사람은 어쩐지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 이윽고 직원은 뒤돌아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발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안아 줘요.” 문을 닫고 현관 벽면에 달려 있는 키홀더에 카드 키를 꽂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를 안았다.
    “키스해 줘.”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는 키스했다.
    잠시 후 입을 떼고 그녀가 말했다.
    “직원이 날 봤어.”
    “네가 예뻐서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
    그들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얼굴을 바싹 붙여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거짓말. 내가 못생겨서 쳐다본 거야.”
    여자는 웃으며 몸을 떼었다. 남자도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여자는 방이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욕실은 따로 문이 달려 있지 않았고 유리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입구라 할 만한 통로를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욕조와 샤워기가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세면대가 있었는데, 벽면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고 조명이 양 사이드에서 비치고 있어 마치 분장실의 화장대 같았다. 여자는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도 충분한 크기의 욕조를 들여다보고 바깥에 있는 남자에게 들뜬 목소리로 욕조가 정말 크다고 소리쳤다. 거품기도 달려 있어. 세면대 앞에 서서 자기 얼굴을 비춰 보고 좌변기가 있는 좁은 공간을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그동안 바닥에 발을 대고 침대에 가로로 몸을 눕힌 채 담배를 피웠다. 욕실 구경을 마치고 돌아 나온 여자가 이번에는 방의 나머지 부분을 구경했다. 침대 너머로 돌아서 창의 덧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더니 다시 덧창을 닫고 돌아섰다. 유리갓 등이 놓인 사이드 테이블이 침대 양쪽에 있었고 고급스런 2인용 소파 세트도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면에는 얄쌍한 두께의 커다란 티브이 모니터가 달려 있고 그 아래로 낮은 장식장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장식장의 마지막 칸 위에 일반 병보다 작은 와인 병과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난 이렇게 작은 와인 병은 처음 봐.” 여자가 와인 병을 들고 말했다.
    “이거 마셔도 되나? 공짜겠지.”
    “그렇겠지.”
    여자는 병을 한 손에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침대에 누운 남자를 쳐다보고 마치 방의 폭을 가늠하듯이 시선을 좌우로 던지더니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기 몇 평쯤 될까?”
    “몰라.” 남자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린 여자애가 그런 걸 묻는다는 게 재밌었다.
    여자는 병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침대로 다가와 남자 곁에 몸을 던졌다. 침대 쿠션이 출렁거렸다. 남자는 여자의 등에 손을 올렸다. 여자는 얼굴 한쪽 면을 침대에 댄 채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방 번호가 어떻게 돼?”
    “706호.”
    “확실해?”
    “응. 원래 705호였는데 안 열려서 그 맞은편 방 열쇠를 줬으니까.”
    “다음에도 여기로 올 수 있어?”
    “다음에?”
    “응. 다음에도 이 모텔로 올 수 있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럼 꼭 이 방을 달라고 해. 706호로.”
    남자는 웃었다.
    “어느 방이나 마찬가지야. 비슷비슷해.”
    “그래도.”
    남자는 생각했다.
    “다음에 왔을 때 706호가 비었다면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응.”
    “근데 다른 손님이 있으면 안 되지.”
    조금 있다 여자가 말했다.
    “마치 집 같을 거야.”
    “뭐라고?”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맨날맨날 이 방에 오면 …… 여기가 마치 집 같을 거라고.”
    남자는 몸을 돌려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 남자를 보고 있다. 여자가 눈을 깜박였다. 남자는 그녀의 눈 속에 세상 전체가 들어 있어서,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세상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뭐 했어?”
    “한 달하고 12일이야.”
    “그렇게 됐나.”
    “응.”
    “바빴어.”
    “괜찮아.”
    “사실 바쁘지 않았어.”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으냐.”
    둘은 머리를 침대에 대고 고개만 돌린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으냐고?”
    “왜 그래?”
    “하나도 바쁘지 않았어. 그냥 전화를 안 한 거야. 전화하고 싶지 않았어, 아니. 그런 생각조차 없었을지 모르지. 너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지 몰라. 네가 존재하는지조차 잊어버렸어. 그래도 괜찮아?”
    그는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켰고 한 팔로 무게를 지탱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몸을 반쯤 돌려 모로 세운 뒤 귀 밑에 마치 기도하듯이 포갠 두 손을 끼워놓고 그를 올려다봤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아.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도 아니잖아. 그리고 결국 오빠는 전화했잖아.”
    “그랬지.”
    “그러니까 괜찮잖아. 오빠가 나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해서 내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야.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 봐. 내가 이제 오빠 앞에 있잖아.”
    그녀의 눈이 살짝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눈을 바라봤다.
    “거짓말이야.”
    “뭐가?”
    “가끔 네 생각을 했어.”
    “응.”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
    그녀의 눈에 담긴 웃음이 조금씩 커져 갔다. 다시 바라봤을 때 웃음은 그녀의 얼굴 전체로 번져 있었다.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잘 웃었다. 처음 만난 날도 그랬다.

 

    “나 잘 웃죠?”
    그는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멀뚱멀뚱 자기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 잘 웃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좋대요.”
    그녀는 잘 데가 없다고 했다. 이따 자기를 데리러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친구들 만났다가 다시 이곳으로 올게요. 그녀는 말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대꾸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어떤 애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전부를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 전혀 모른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와 길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먹었다. 순대와 튀김도 먹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주인아주머니도 그녀가 어떤 애인지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고작 떡볶이를 같이 먹는 것뿐이지 않은가.
    백화점 정문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유리문 너머는 어두웠다. 지하철역과 기차역으로 통하는 통로에는 아직 형광등 불이 밝혀져 환했다. 계단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광장에는 커다란 원형 화단이 있었고 사람들이 그 턱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맞은편 기다란 주차금지 펜스에 몸에 착 달라붙는 옷차림의 남녀 학생들 무리가 앉아 있었고, 더러는 그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은 일행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 하나는 교복처럼 보이는 치마를 입고 있다. 그녀는 음료수 병에 빨대를 꽂아 마시고 있다. 그들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서늘한 밤바람을 타고 화단에 앉아 있는 그의 귀까지 또렷하게 실려 왔다. 창이 없는 백화점의 커다란 외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맨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었다. 약 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앉아 있는 사람보다 박스를 깔고 누워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줄이 길게 이어졌다. 남자는 괜히 그 줄을 따라 걸어가 보았다. 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안쪽으로 쑥 들어간 넓은 공간이 나왔는데 너머에는 극장과 음식점 등이 있는 상가 건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이 있었다. 군데군데 구조물 위나 아래편에 그럴 만한 공간이 있으면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 마치 그들은 화단에 심어진 나무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밤에만 자라나는 나무였다. 한쪽에는 형광빛 포장지의 과자 등을 뜯어 놓고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무리도 눈에 띄었다. 그는 높다란 건물 벽면에 붙어 있는 거대한 영화 포스터 펼침막을 올려다보았다. 극장은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을 비추는 투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도로에는 아직 차들이 많았다. 연석에 바싹 붙여 세워 놓은 택시는 시동을 켜놓은 채 역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서서 영화 포스터를 보았다. 위에서부터 하나씩 그림을 보고 영화 제목을 보고, 그림 속 배우들의 얼굴을 보고, 배경을 보고,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바닥에 다 피운 담배를 떨어트리고 신발로 밟아 비벼 껐다. 길을 좀 더 올라간 지점에 꽃집이 보였다.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처럼 꽃을 사들고 그녀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였다. 물론 그녀는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꽃집은 문을 닫았고 그는 그녀를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그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여자가 머리 밑에서 손을 빼내 침대에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런 여자의 손을 보고 또 얼굴을 보았다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방을 둘러보았다. 집,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주방이 없잖아. 그는 다시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녀는 누운 채로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가슴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그의 어깨에 붙였다. 한 발을 그의 다리 위로 올리고 다른 다리를 그의 허벅지에 밀착시켰다. 마치 그를 꼭 붙잡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괜찮잖아.” 그녀의 말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문간에 손을 짚고 상반신만 내민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계단으로 통하는 철제 방화 문이 복도 끝에 보였지만 검게 칠해져 있는 탓에 어둠과 뒤섞여 꼭 닫혀 있는지 조금 열려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신경을 집중시켜도, 아니 그럴수록 더욱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시선이 자꾸만 헛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복도의 꺾어진 코너가 보였다. 코너의 바깥쪽 면을 따라서 방문 두 개가 보였는데 하나는 반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면으로는 처음 들어가려고 했었던, 카드 키가 고장 난 방문이 보였다. 어느 것이나 물론 꼭 닫혀 있다. 하지만 안에 사람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특별히 무슨 소리를 들은 건 아니지만 바닥에 양탄자가 깔려 있어 그들이 입만 다물고 있었다면 소리 날 일이 없었다. 어쩌면 코너의 안쪽, 모서리 바로 뒤편에 누군가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바로 지금, 그 안쪽 벽면을 따라 그가 슬금슬금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한다 해도 남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뭔가 들을 수 있을까 귀에다 신경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소리도, 문이 여닫히는 소리도, 멈춰 설 때마다 울리는 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층이 아니더라도 엘리베이터 벨소리는 그 수직 통로를 따라서 꽤 여러 층까지 전달되기 마련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모서리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가 욕실에서 나왔다.
    “뭐예요?”
    “노크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누가?”
    “아무도 없네.”
    여자는 하반신에 팬티 하나만 걸친 채였다.
    “누구?”
    “아무도 없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봐.”
    그녀의 손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욕조가 너무 커서 물 채우기도 어렵네.”
    그는 여자의 하얀 허벅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유령이었는지도 모르지.” 그가 중얼거렸다.
    “응?”
    “유령이 문을 두드렸는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문을 연 사이…….”
    그는 천천히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티브이 네가 껐어?”
    “아니. 켜놨었어?”
    “내가 아까 켰는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아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도 그녀를 마주 보다가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녀가 움찔하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티브이 모니터를 향했다.
    “왜 그래?”
    “왜 꺼져 있지?”
    그녀도 그의 시선을 좇아 꺼진 티브이 모니터를 보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마주서서 그녀의 팔죽지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 발짝 다가섰다. 이제 그녀의 몸과 그의 몸 사이에는 아주 작은 틈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제 그가 그녀의 등 뒤, 침대 위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면 침대 건너편이거나. 돌아보려는 걸 그가 붙잡았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양손으로 고정시켰다.
    “돌아보지 마.”
    “뭐야?”
    그는 그녀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냥 날 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의 등을 두 팔로 감싸 안고 몸을 완전히 밀착시켰다. 마치 그녀를 무언가로부터 보호하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고 고개를 그녀의 어깨 너머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뒷목에 입술을 갖다 대며 한 손을 그녀의 셔츠 안쪽으로 집어넣어 그녀의 맨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다른 한 손은 등을 타고 내려가 그녀의 팬티 속으로 미끄러뜨려졌다. 그녀가 팔을 들어 그의 옆구리에 손바닥을 대고 밀어내려 했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있어.”
    “장난이지?”
    “뭐가?”
    “유령.”
    “아닌데.”
    그녀는 그를 다시 한 번 밀쳐내며 몸을 돌려 침대 위를 보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재빨리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아무것도 없지?”
    “아닌데.” 이제 그의 말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
    그러더니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다리오금 안쪽으로 한 팔을 밀어 넣고 다른 팔로 등을 받치고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몇 발짝 걸어가서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녀가 얕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 위에 엎드려 양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여기 있지.”
    “뭐가?”
    “유령이.”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녀의 눈가가 웃음으로 겹겹이 접혔다. 그는 그녀의 그런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이번에는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눈가에도 입을 맞췄다.
    “내 유령이 여기 있지.”
    “내가 유령이면 오빠도 유령이게.”
    “맞아. 그리고 여긴 유령의 집이지.”
    이제 그녀는 똑바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눈가에는 웃음이 가득해서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는 입을 떼고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기다렸다. 그녀는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다시 웃음이 터졌다.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는 잘 웃었다. 그는 괜히 가슴이 뛰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불이 나기 전 그는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을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평범한 도심 한 귀퉁이에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작은 구역에 불과했다. 사방은 마치 안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것처럼 임시 베니어판으로 꼼꼼하게 둘러싸여 어느 날 문이 열려 있지 않았더라면 안에 그런 공간이 있는 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주변을 빙 둘러본 후에 그곳이 하나의 공백이나 틈처럼, 또는 그것을 절단하는 어떤 것처럼 끼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방으로부터 그곳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어붙여져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반대로 처음에는 조그마한 틈이었다가 점점 자라나서 일상적인 공간을 벌려낸 것처럼도 보였다.
    길 건너편에서 그는 마을로 들어가는 세 개의 출입문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피웠다. 문은 꼭 아파트 현관문처럼 생겼는데 실제로 그런지도 몰랐다. 왼쪽으로부터 번호가 적혀 있었고 세 번째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문에는 아마 3이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담배 한 대를 피울 동안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앞을 몇 사람인가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한 번 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적한 평일 낮 시간이었다. 햇빛은 따사로웠다. 그는 길을 건넜다.
    막연한 예상과는 달리 마을은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비좁을 뿐이었다. 집들은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그 경계가 모호했다. 지붕이 서로 교묘하게 겹쳐 있었고 벽체는 대부분 비슷한 색깔의 베니어판이었다. 전체가 통으로 연결된 건물에 문만 연이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 간격은 무척 좁았다. 문에는 주소를 표시하는 것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고 한자나 한글로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있었다. 회색 프로판 가스통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고, 좁은 창에는 창살이 쳐져 있었다. 대체로 창들은 높이 달려 있어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냉장고와 세탁기, 신발장 등이 밖에 나와 있었다. 어느 문 곁에는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고 뒤집어진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도 보였다. 골목 바닥에는 담배꽁초 하나 버려져 있지 않았다.
    중간 중간 옆으로 이어진 골목이 나왔지만 그는 차마 그 안쪽으로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대번에 그가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란 걸 눈치 챌 것이다. 골목은 한 사람이 몸을 비켜야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폭밖에 되지 않아서 만일 누군가 반대편에서 걸어 나온다면 그는 떠밀려 왔던 길로 내쫓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는 별개로 이상하게 마을은 조용했다. 문 너머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분명 지붕 위에는 티브이 안테나가 세워져 있고 전선들이 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브이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음식 냄새도 안 났다. 빨래가 걸려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마을로 들어서면 그러기로 작정한 것처럼,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양 숨어 있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너무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녁이 되어 주민들이 돌아오면 밥을 지어먹고 티브이를 켤 것이다. 빨래도 하고 자전거를 끌고 나와 동네를 한 바퀴 돌 것이다. 그러고는 꼼꼼히 집 주변을 청소하고 바닥도 쓸고 할 것이다. 그런 상상은 너무 갑작스럽고 선명해서 바로 지금 이 순간 눈앞에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어느 게 진짜인지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방문 너머, 창문으로 넘어다봐도 보이지 않는 집 안의 어느 사각지대에, 또는 안쪽으로 이어진 골목 뒤편 모퉁이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지, 아니면 상상 속에서 나온 유령들처럼 현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그 곁을 돌아다니는지. 자신의 존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양.
    그는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그녀는 웃음을 그치지 않고 그의 가슴은 계속 방망이질 쳤다.
    “밑에서 보니까 오빠 너무 못생겼어.” 그녀가 말했다.
    “너를 봤어.” 그가 말했다.
    “어디서?”
    “어느 마을에서.”
    “어느 마을?”
    “지금은 없어졌어. 불에 탔어.”
    “누가 죽었어?”
    “아니. 아무도 죽지 않았어.”
    “다행이네.”
    “아니 그것과는 달라.”
    “뭐가 달라?”
    “만일 죽었다 해도 죽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을지도 몰라.”
    “왜?”
    “왜냐면 그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없거든. 거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럼 텅 빈 마을이야?”
    “아니, 주소가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주민등록증도 만들 수 없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벽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사람들이 거기에 마을 주소가 쓰여 있는 주민등록증을 그려 놨어.”
    그녀는 웃음을 그쳤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어. 너를 제외하고는.”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마을에 가본 적이 없어.”
    “그 마을 한가운데에는 망루가 있었어.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망루였지. 몇 번이나 망설였지. 저기까지 들어가 볼까 말까,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내가 오르도록 허락해 줄까? 거기에 올라가면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어쩌면 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고. 하지만 그만뒀어.”
    “오빠, 나는 거기에 없었어. 내 말 들었어?”
    “알아. 하지만 널 볼 수도 있었지.”
    “오빤 지금 내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 거야? 어디서 뭘 하며 지냈는지.”
    “아니.”
    “걱정하지 마. 난 잘 지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알아.”
    “오빠 이상해졌어.”
    그는 그녀에게서 내려와서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타고 올라왔다. 그의 허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정말 자신이 이상해졌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고개를 숙임에 따라 머리카락이 후루룩 떨어지며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녀는 한 손을 빼내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고는 다시 넘어가지 않도록 고개 각도를 조절하면서 다시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기분 좋게 해줄게.”
    그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았다. 배와 가슴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몸이 반응했다. 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손을 빼내며 튕기듯 그에게서 떨어져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아, 물.” 그녀는 욕실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욕실 안에서 흘러나왔다.
    “너무 뜨거워. 물을 좀 빼내고 찬물을 채워야 할 것 같아. 아님, 그냥 식기를 기다릴까?”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망루에 대해 생각했다. 불에 타는 마을 사진이 실린 기사를 떠올렸다. 커다란 검은 연기가 마치 하늘과 연결된 기둥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군대에 있을 때 훈련장에서 보초를 서던 기억이 났다. 행군 중에 발을 다쳐서 하루 종일 말뚝 근무였다. 식사도 다른 병사가 식판에 담아 가지고 왔고, 다 먹고 나면 다시 와서 식판을 받아갔다. 따로 초소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주변보다 조금 높은 지대에 참호를 파서 그 안에 서 있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이었다. 햇볕에 바랬는지 하늘 색깔도 왠지 탁한 푸른빛이었지만 구름만은 아주 선명한 흰색이었다. 이틀인가 사흘째 되는 날 공군과 합동훈련이 있었다. 헬리콥터가 마치 어느 보이지 않는 틀에 박힌 듯이 한 자리에 고정된 채 떠 있었다. 아래 위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프로펠러만 빠른 속도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것조차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는 어쩐지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 땅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쾅 하고 들렸는데, 그 첫 번째 소리에 버금가는 소리가 연달아서 터지기 시작했다. 기관총 소리였다. 그 소리만은 분명히 헬리콥터에서 들려온다는 걸 알았다. 한낮인데도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곧이어 무언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렬한 태양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하는 것. 그것은 끊임없이 쏟아져서 멀리서 보았을 때 지면과 이어진 기다란 밧줄처럼 보일 정도였다. 탄피였다. 한동안 사격은 계속되었고, 더 많은 탄피들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에 그는 점점 불안해졌다. 마치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자기 마음속에서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자꾸만 뭔가가 무너졌고 견딜 수 없었다. 어서 사격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불타지 않기를.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갑작스런 벨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선 전화였다. 벨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직 욕실에 있었다. 희미하게 그녀의 형체가 유리벽에 비쳤지만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카운터입니다.” 같이 올라왔던 직원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그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706호죠? 아까 키가 고장 났던…….”
    “예. 그런데요?”
    약간의 침묵이 있은 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계셨던 여자 분에 관한 것인데요…… 혹시 미성년자인가요?”
    그는 가만히 있었다.
    “여보세요?”
    “아닌데요.” 그가 말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너무 어리게 보이셔서…… 근데 증명할 방법은 가지고 계신 거겠죠? 주민등록증이라든지.”
    “미성년자가 문제가 되나요?”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손님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 알겠습니다. 요즘 분위기가 그래서…….”
    그녀가 욕실에서 돌아 나왔다. 무슨 전화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직원은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예.”
    “두 분이 어떤 관계이신지?”
    “예?”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이신지. 애인이나 뭐 그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제가 왜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제 말을 잘 이해하시지 못한 것 같군요. 용돈을 주거나 뭐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묻는 겁니다.”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뇨. 저는 손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아마 욕조에 물이 다 채워졌고 씻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뜨거운 김을 쐰 탓인지 얼굴이 좀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유독 어리게 보이는 목덜미였다. 그는 새삼스레 이 모든 것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졌다.
    “손님?”
    “예.”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여성분을 봤던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생각해 봤는데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저도 봤습니다.”
    “예?”
    “하지만 잘못 본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무튼 저는 돈을 주거나 하지 않습니다.”
    “돈이 아니더라도 여러 다른 지불 방법이 있죠.”
    “그런 건 없습니다.”
    “손님, 저는 일개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합니다. 일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만큼 시급도 적죠. 문제가 생기더라도 저는 그냥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까지 손님에게 하는지 모르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쁘게 되는 걸, 망신당하는 걸 몇 번이나 봤습니다. 알아내려고 한다면 그 친구들은 금방 알아냅니다. 모든 게 기록으로 남고, 다 찍히고 있어요. 그냥 손님만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라고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직원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전화는 끊겼다. 그는 조용히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전화야? 뭐래?” 그녀가 물었다.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아니야?”
    “응. 아니야.”
    그는 그녀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녀는 뭔가 곰곰 생각하는 눈치더니 금방 따라 미소 지었다.
    “와인이나 한 잔 할까? 저거 마시고 싶다고 했지?”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와인 병이 놓여 있는 장식장 앞으로 걸어갔다.
    “욕조에 물 받아 놨는데.”
    “들고 들어가서 마시지.”
    그는 병을 들고 살펴보았다. 코르크 마개가 아니라 트위스트 캡이었다. 그는 캡을 비틀어 열고 엎어진 잔 두 개를 뒤집어 똑바로 세웠다. 그는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그녀는 소파 안쪽으로 엉덩이를 붙이더니 무릎을 세워 양발을 소파 위로 끌어올리고는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는 양손에 잔을 들고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멈춰 서서 장난스럽게 그녀를 감상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 자세는 너무 섹시한걸. 팬티가 다 보여.”
    그녀는 다리를 내렸다.
    그는 테이블에 잔을 올려놓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건배를 권하지도 않고 자기 잔을 들더니 조금 마셨다. 그녀는 잔의 밑받침에 손가락을 올렸지만 잔을 들지는 않았다.
    “팬티를 벗으면 더 보기 좋았을걸.”
    “뭐라는 거야. 징그럽게.”
    “벗어 봐.”
    “왜 그래?”
    “괜찮잖아. 내가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벗어 봐.”
    “싫어.”
    “벗어 보라니까.”
    “왜 그래. 정말.”
    “정말로.”
    그녀는 그를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맞받았다가 잠시 후 시선을 돌렸다. 다시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너 여기 온 적 있어?”
    “어디?”
    “이 모텔.”
    “오빠랑? 처음이잖아.”
    “나랑 말고.”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있어?”
    “없어.”
    “그럼 어디를 갔어?”
    그녀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잔을 들어 와인을 조금 마시고는 다시 잔을 내려놨다. 그는 와인 잔의 기둥을 쥔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자기 잔을 조금 앞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살짝 들어 올리고는 안에 담긴 와인이 회오리치도록 잔을 천천히 돌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려 빙글빙글 잔 내부에서 돌아가는 붉은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싸구려야.” 그가 입을 열었다. “공짜로 주는 거라도 너무 맛이 없어.”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욕조에 담긴 물이 금방 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기 전에 물에 들어가야지, 몸을 씻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식으면 물을 빼고 다시 뜨거운 물로 채우면 된다. 그녀는 그렇게 커다란 욕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티브이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방을 둘러보았다. 넓고, 깨끗하고, 아늑한 방이었다. 정말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순간 방 전체가 욕실이 된 것 같았다. 뜨거운 김으로 뒤덮여진 것 같았다. 내가 물을 잠그지 않은 걸까? 욕조에서 물이 넘쳐 이렇게 방까지 뜨거운 물이 흘러나온 걸까? 그럼 적어도 불에 타지는 않겠네.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물이 넘쳐나니 불에 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남자의 휴대폰 소리였다. 옷걸이에 걸린 남자의 바지에서 소리는 흘러나왔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다가가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귀에 갖다 댔다.
    “맞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잠자코 얘기를 듣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누가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 그녀는 남자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잠시 서 있었다. 소파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학생이 죽었대.”
    “어떤 학생?”
    “우리 학과 학생.”
    “아는 애야?”
    “잘 몰라. 얼굴을 보면 알 수도 있겠지.”
    “얼굴을 어떻게 봐. 죽었는데.”
    “영정 사진이 있잖아.”
    그는 테이블에 전화기를 든 손을 올려놓은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왜 죽었대?”
    “몰라.”
    “어떡해?”
    “학과장에게 전화해 봐야지.”
    “오빠가 왜?”
    “내가 학과 조교잖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고 문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왜 그가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전화 통화를 하는지 몰랐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치고 그는 다시 그녀 앞에 앉았다.
    “병신새끼.”
    “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액정 화면을 껐다. 침대로 다가가서 그 위에 던져져 있는 담뱃갑을 찾아내서 담배 한 대를 꺼내들어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눈으로 계속 좇았다.
    “오빠 대학원에 다닌다며.”
    “응.”
    “근데 어떻게 조교야?”
    “그러니까 조교를 하는 거지.”
    그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그녀도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어디를?”
    “장례식장에.”
    “그럼 나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입에서 떼어냈다. 연기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에서 한 손으로 다른 손 손가락을 세게 잡아 비틀었다.
    “너는 여기 있어.”
    “나 혼자?”
    “병원이 멀지 않으니까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냥 얼굴만 내미는 거야. 상황이 어떤지 잠깐 보고 올게.”
    “그럼 같이 가면 안 돼?”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옷과 자신의 옷이 걸려 있는 옷걸이 쪽을 힐끗 보더니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나 혼자 갔다 올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걸이에서 바지를 내려 입었다.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찾아내서 신었다.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매만졌다. 돌아서자 욕조에 가득 담긴 물이 눈에 들어왔다. 거품이 풀려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김이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물은 아주 따뜻할 것 같았다. 거품은 부드럽게 피부를 감싸 줄 것이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그녀가 아까 자세 그대로 소파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왜 죽었대?”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몰라.” 그가 대답했다.
    “아까 말했잖아. 모른다고. 그냥 죽었겠지. 사람은 그냥 죽는 거야.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해?”
    “오빠는 궁금하지 않아?”
    “알게 되면 전화해 줄게.”
    그는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그녀가 문가까지 따라 나왔다.
    “안아 줘.” 그는 그녀를 안았다.
    “키스해 줘.” 그는 키스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깨 너머로 방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을 놓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담배와 라이터를 방에 두고 온 걸 깨달았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머리 위 계기판에서 점점 떨어지는 숫자를 보았다. 밝아졌다 금방 꺼지는 숫자들. 문득 천장 모퉁이에 달린 반구형 CCTV 카메라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이 포탑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옛날 영화에 등장하는 폭격기 배면에 달린 포탑. 모든 게 기록으로 남고, 모두 찍히고 있습니다. 직원이 말했다. 그는 빙긋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죽은 후에 우리는 그의 앞에 가서 그 기록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벨소리가 울리고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카운터로 가서 직원에게 자동차 열쇠를 받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직원은 그가 혼자 내려온 걸 확인할 것이다. 숙박비는 이미 지불했다. 그녀는 그 방에서 오늘 하루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열쇠를 내줄 것이다. 돈이 아니더라도 여러 다른 지불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는 계속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문이 닫혔다. 그는 7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그 방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그곳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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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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