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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 작성일 2013-08-01
  • 조회수 2,966

 

 

‘속’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최민석

 

 


 

 

속시티투어버스를-탈취-삽화

 

    이 소설은 본인이 데뷔한 소설, 「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의 후속작으로서, 전작의 인물과 사건만 빌려올 뿐 그 성격과 성질은 물론, 싸가지까지 전혀 다름을 천명한다. 전작은 이 땅의 문학 중흥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으나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으니, 본인은 제아무리 열심히 써봐야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되는대로 쓰기로 작정하였다. 하여 있지도 않은 전작의 아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자 하는 문학적 자학의 시기에 당도하였으니, 본래 동생은 형과 반대로 나가는 법. 후속작인 이 작품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모두 본인의 손에서 태어났으나 그 목적은 물론, 성깔과 싹수까지 판이하게 다르니 굳이 표현하자면 배다른 형제라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이 소설을 쓴 시기의 나는 예상치 못한 김태희 양과의 이별로 심한 충격을 받아, 밀물처럼 밀려오는 좌절감과 썰물처럼 쓸려갔던 희망을 맥없이 바라봐야 했다. 따라서 이 원고가 개차반이라면 그건 모두 김태희 양 때문이다.

 

 

  1

 

    때는 바야흐로 2013년 4월 1일.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초이아노프스키’는 그의 형인 별, ‘스타로프스키’와 함께 탈레반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여기서 잠깐, 위대한 전작의 요점 정리 시간.

    우선, 무지한 시대의 안개에 덮인 이 비운의 소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단 어떡하든 원고의 분량을 채워보려 했던 작가의 꼼수 탓에 이름이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쟌 스타노크라스카 제인바라이샤 코탄스 초이아노프스키’로 무턱대고 길어진 주인공은, 현실적 이유로 ‘초이아노프스키’ 혹은 ‘초이’로 짧게 불리어지기도 한다. 작가의 꼼수이기도 하나, 다른 측면에서도 나름의 의의는 있었으니, 그 긴 이름이 생겨난 연유는 이러하다.
    주인공은 조국인 키르기스스탄에서 이름난 용사 가문의 후예로서, 자신의 선조들은 하나같이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그 땅을 지켜낸 영웅들이다. 따라서 선조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이름을 하나씩 붙여서 만들다보니, 주인공 초이아노프스키의 이름이 이토록 길어진 것이다. 피곤할 정도로 길었던 건 사실이지만, 주인공 초이아노프스키는 외세에 항거한 역사의 증거인 자신의 이름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단지 ‘초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꾸 자신을 ‘최씨’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안산의 가발공장 사장 ‘안면수’다. 그렇다. 초이아노프스키는 가세가 몰락해 한국에 있는 안산의 가발공장에까지 돈을 벌러 온 것이다.
    이쯤에서 어쩔 수 없는 소설의 당위성을 위해 핍박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 와중에 콩고에서 온 ‘주글레리’가 떡 먹다 목 막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사실, 단순 사고사가 아닌 사장 안면수가 빨리 먹고 작업을 하라고 닦달한 결과였으나, 경찰은 주글레리의 죽음을 단순 사고사로 치부해버린다. 게다가, 이를 신고한 동료 노동자들마저 불법체류자 신분이 탄로나 추방당하고야 만다.
    결국 용사의 후예 최씨, 아니 초이아노프스키는 위악적인 한국 사회에 불만을 품고 청와대를 테러하기로 결심! 탈레반인 자신의 형, 스타로프스키가 공수해온 폭탄을 싣고,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한 후 청와대 춘추관에 가서 폭파시킬 계획을 수립한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 네팔인 쿠마리 구씨와 몽골인 바타르 박씨가 합류한다. 그러나 형 스타로프스키의 입국이 좌절되면서 계획은 꼬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탈취한 시티투어버스는 시대의 산물인 버스중앙차선 때문에 청와대로 꺾지 못하고 직진만 하게 된다. 버스 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맘 좋고 사람 좋은 작가는 이들이 테러를 연기하기로 했다고 어영부영 결론내리고 원고료를 날름 챙겨 먹는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작가는 이제 세상의 때가 잔뜩 묻었고 자본에 영혼까지 시원하게 팔아먹은 터라, 전작의 도덕성과 개연성 따위는 모두 전당포에 저당 잡아버렸다. 이제 본격적인 새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둥두둥두둥.

 

 

  2

 

    초이아노프스키는 알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흡사 장기 어딘가가 결락된 듯한 공허감이었다. 3년 전 테러에 실패한 후, 비자가 만료되어 곧장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영혼 어딘가에 실패라는 문신이 새겨진 것 같았다. 그 문신은 새겨진 것이 끝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안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는 두통과 현기증, 이에 따른 구토와 공복감, 이에 따른 폭식, 이에 따른 체중변화, 이에 따른 자신감 저하, 이에 따른 대인기피증, 이에 따른 고독감, 이에 따른 인생무상을 느꼈다. 이 허무한 고리의 시발을 끊지 않고선, 그의 삶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역사 속의 모든 실패가 그러하듯 그의 실패 역시 이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실패를 반복하는 이들이 그렇듯, 그들은 항상 원래의 목표를 포기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그 역시 실패를 반복하는 무수한 군상 중의 한 명인지라, 또 한 번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이번엔 국회다!’
    (그렇다. 이제 서사의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다.)

 

    그는 자신의 형인 스타로프스키(이하 ‘별’)와 함께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저번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일단 한국어부터 철저히 학습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자신이 공부에 꽤 소질이 있음은 물론, 공부가 적성에도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문 기사를 읽음은 기본, 원태연의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을 읽으며 시원하게 발기할 정도도 됐다. 명망 있는 매체들의 오타를 발견해 독자투고를 한 후 상품까지 탔고, 생활회화 역시 거뜬히 소화해 ‘니미럴’과 ‘염병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문·구어체를 모두 습득하자 입에서 절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란 말이 나왔다. 내친 김에 ‘공부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에세이를 출간할 목적으로 명문대학까지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염병할 정도로 비쌌다. 물론, 반값등록금 촛불 시위에 나섰다.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선 사납기로 소문난 일당이 국내 예금 1위 은행의 본점을 털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영화라면 화면 분할을 하여 한 팀은 시티투어버스의 탈취를, 다른 한 팀은 은행 강도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줄 텐데, 애석하게도 이것은 소설이다. 본문을 2단으로 나누어 써볼까 생각도 했지만, 편집자의 정신건강을 위해 참았다. 어쨌든, 경찰에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인적구성은 이렇다.
    도박빚에 시달린 주산·암산학원 승합차 기사(침입과 도주를 맡았다),
    경제사범으로 감옥에서 은행털이 수법을 배운 전과자(작전을 짰다),
    전직 은행원(은행 보안 정보를 맡았다).
    이 셋은 최상의 조합이라 자평했으며, 이 조합이 은행강도에 적합하다는 걸 증명하듯 범행에 사용될 주산·암산 학원의 승합차 뒷유리엔 ‘신속·정확’이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한편 전작에서 주인공 ‘초이아노프스키(이하 작가 마음에 따라 ‘최씨’)’를 괴롭혔던 가발공장 사장 안면수는 이름 그대로 세상에 안면몰수한 자다. 그는 예의 그 안면몰수한 자세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부를 이뤘고, 그 부로 건물을 사들였다. 그 건물을 되팔아 더 큰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몽땅 집권당의 정치발전기금으로 바쳤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예의 안면수 특유의 태생적 아부정신으로 그는 집권당 대표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응당 시중 이야기가 그러하듯, 그 역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 필자는 우리가 자주 잊고 마는 사실을 하나 조심스레 언급하고자 하는데, 그건 바로 국회의원도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안면수 역시 일을 해야 했으니 그는 오로지 놀러 다니겠다는 심산으로 ‘문화체육관광분과위원’을 지원했다. 이미 당대표의 집부터 숟가락까지 모두 사다준 안면수의 집요하고 꼼꼼한 로비 덕에 그는 당연히 관광을 담당하는 분과위원이 됐다. 이 나라의 관광 사업이 마더파더젠틀맨 수준이 된 것은 모두 안면수 탓이다. 마더파더젠틀맨.

 

    전작에서 탈취된 시티투어버스의 통역관을 맡았던 오이는 본격적인 통역을 공부하기로 했다. 동시통역대학원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으나, 등록금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예상했듯이, 당연히 학부생들이나 하는 반값등록금 시위에 오이도 한 몫 하러 나섰다. 차가운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고, 시대 앞에 자신의 존재도 흔들리는 순간, 강력한 존재가 자신을 잡아 주었다. 그는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으며, 폭풍 속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자신을 굳건하게 붙잡아 주었으며, 촛불처럼 미미한 자신의 존재를 횃불처럼 타오르게 만들었다. 아울러 그의 눈동자 역시 대형 산불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둘이 재회한 자리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타는 냄새까지 진동했다. 당연히, 그것은 바로 최씨와 오이의 심장이 타들어가는 냄새였다.

 

    바타르 박씨(이하 작가 내키는 대로 ‘박씨’)와 쿠마리 구씨(역시 마음대로 ‘구씨’)는 가발공장에서 여전히 인생을 저당 잡힌 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박고 있었다.
    -반드시 데리러 올 거야.
    구씨가 쓸데없는 희망에 부풀어 말하자, 박씨가 반박했다.
    -너밖에 모르는 바보. 우리 때문에 떠난 거라고. 그때 우리가 밧줄로 최씨를 결박하고 주문진으로 차를 돌리지만 않았으면 테러에 성공했을 거야. 그럼, 우리는 영웅이 되거나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거나 적어도 둘 중하나는 이뤘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맘을 바꾸는 바람에 심판에 실패한 거고, 결국 최씨는 배신감을 떨쳐내지 못한 거야.
    남성용 가발의 가르마를 정확히 3:7로 맞추며 구씨가 되받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말했잖아. 좀 더 잔인한 탈레반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말이야. 그때까지 누구도 청와대를 테러할 수 없게 우리보고 잘 지키라고 말이야.
    완성한 가발을 의욕 없이 바구니에 던지며 박씨가 말했다.
    -그게 벌써 3년이야. 우리에게 실망한 거라고. 최씨를 배신한 대가가 저주가 되어 우리를 어둡게 누르고 있다고. 우리는 이제 평생 남의 머리카락이나 붙여야 하는 신세란 말이야! 이 불공정하고 억압적인 세상 속에서 말이야.
    박씨가 고함을 지르듯 외치자, 구씨는 울상이 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이 점차 더 일그러졌고 마침내 눈물을 터트렸다. 박씨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구씨에게 사과를 하려 했다. 그러자 쿠마리 구씨가 말했다.
    -뒤를 봐. 뒤를…….
    수년째 고통 속에 시달린 노동자 바타르 박 씨의 등 뒤에 최씨, 아니 키르기스스탄 용사의 후예 초이아노프스키가 씨익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엔 오이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찰싹 찰싹.

 

 

  3

 

    시간관계상 성급히 밝혀두는, 이번 테러 계획은 이렇다.
    a. 별, 즉 스타로프스키가 폭탄을 준비한다.
    b. 위장한 가방에 폭탄을 감추고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한다.
    c. 폭탄을 실은 버스는 여의도 국회로 돌진하고, 일당은 모두 뛰어내린다.

 

    “어째서 전편과 작전이 똑같으냐(!)”고 타박한다면, 네 맞히셨습니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짝짝짝. 그래도 요번엔 국회랍니다. 호호호호.

 

    3년 전 여권의 이름과 실제 이름이 다르다며 입국 거절을 당했던 별은, 이번엔 제대로 이름이 기재된 여권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지난번엔 비닐에 싼 폭탄 재료를 삼켜서 반입하느라 항문이 터질 뻔했다. 이번엔 그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탈레반으로부터 직접 폭탄 제조기술까지 배워왔다. 그 덕에 그는 입국할 때, 심사원에게 ‘독도는 한국땅’이라며 넉살좋게 농까지 건네며 들어왔다. 입국한 후에는 청계천과 용산전자상가를 돌며 공수한 재료로 거사를 치를 폭탄을 제조했다. 세 번의 걸친 실험 끝에 폭탄의 효과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신월동 반지하에 살았던 그가 실험한 첫 번째 폭탄은 불과 밥상 하나를 부러뜨릴 정도의 미미한 위력을 가진 것이었으나, 그 소음만큼은 1층에 거주하는 섬세하고 예민한 귀의 소유자인 인디뮤지션 김완형 씨의 고막이 떨어져나갈 정도였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한국 사회의 첨예한 층간소음 문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필자는 지난 2013년 2월 면목동에서 발생한 층간소음 살인사건으로 인해 별이 감당해야 할 조바심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있다. 사람 좋고 마음 좋은 작가는 광활한 사막에서 시원하게 방귀뀌듯 마음껏 폭탄을 뿡뿡 터트려온 별이 신월동 반지하에서 층간소음으로 인해 앉은뱅이 밥상 다리 하나 부러뜨릴 폭탄을 터트리며 마음 졸였을 때의 간 건강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다 간 때문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가뜩이나 재개발 때문에 생활터전을 잃을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신월동 주민들은 이제 수용할 수 있는 심리적 여유라는 것이 더 이상 없었으니, 별은 눈치를 보며 동네놀이터에서 작은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역시 폭발력은 작았으나 엄청난 굉음에 두꺼비 집을 짓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아앙’ 하며 울음을 터트렸고, 갑자기 토끼 같은 5-6세 여아들이 저주 품은 손가락으로 별을 가리키며 눈물 흘리는 것을 지켜본 엄마들은 다급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또 한국 사회의 심각한 여아 폭행 사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필자는 조두순, 고종석 등의 흉악범으로 인해 딸 가진 부모의 걱정을 십분 백분 이해하고 있다. 역시 사람 좋고 마음 좋은 작가는 아버지가 곧 하늘인 중근동 지역에서 넘어온 별이 받았을 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그의 간 건강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 간 때문 아닌가. 어쨌거나 민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타고 슬금슬금 기어온 순경을 보고, 별은 행여나 싶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래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밭이나 공터에서 폭탄의 위력을 실험해 보는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다.

 

    안면수는 어영부영 국회의원이 되긴 했으나, 천성적으로 타고난 무식함과 쥐똥만큼도 없는 센스로 인해 국회에서 눈엣가시였다. 같은 여당의원들조차 안면수를 부끄러워했고, 안면수에게 공천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당대표의 신뢰마저 처참하게 추락했다. 그건 모두 안면수가 전생에 머리를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안면수는 전생에 칭기즈칸의 기마부대로 징집당한 소년병이었다. 당시 안면수의 이름은 소치겔이었다. 기마부대라면 당연히 말을 잘 타야 하는데, 소치겔은 어린 시절 이웃사촌인 남색가(男色家) 아저씨로부터 엉덩이의 순정을 잃은 후 말을 보면 기겁을 했다. 옆집 아저씨의 얼굴이 말상이었고, 총각인 작가가 부끄럽게 밝히자면 그의 신체 특정부분이 말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전생의 안면수, 즉 소치겔은 만약 윤회가 존재한다면 다음 생엔 기필코 말 탈 일 없이 마차만 타는 인생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불끈불끈. 기왕이면 마차 중에서도 가장 큰 마차를 타야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뒤통수를 처참히 가격 당했다. 빠바바박. 소치겔의 동글동글하고 맨 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뒤통수는 마더 테레사라도 때리고 싶을 정도로 인근 인류의 손길을 불렀다. 안면수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자는 이 부대의 중대장인 ‘죨라게’였다.

 

 ① 필자와 함께 전설의 밴드 ‘시와 바람’에서 활동 중인 있는 기타리스트다.
현재, 그의 앨범 ‘Solo'가 각종 음원사이트에서 무서운 속도로 외면 받고 있으니,
지금과 같은 외면, 계속 유지해주시기 바란다.

 

 

  4

 

    초이아노프스키와 바타르 박씨, 그리고 쿠마리 구씨는 다시 한패가 되었다. 사랑은 닥터지바고의 예를 보더라도, 혁명과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타오르는 법. 촛불과 물대포가 난무하는 시대의 울음 속에서도 속전속결로 사랑에 빠진 오이는 초이아노프스키와 한패가 되었다. 부창부수를 몸소 실현하는 이 국제 테러단은 다시 한 번 이 땅에 억눌린 영혼들과 그동안 죽어나간 노동자들의 혼령을 달래는 심정으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기로 했다. 그것만이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이들과 고통 끝에 먼저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제가 되리라 여겼다. 이번에는 탈레반에서도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 별이 직접 이 땅에 지원을 왔으니, 이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다. 쿠마리 구씨와 바타르 박씨는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며, 3년 전의 그날처럼 4월 1일에 거사를 다시 치르기로 했다.

 

    거사의 날이 다가오자 별은 좀 더 진지하게 폭탄의 위력을 실험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서울을 지나 일산을 지나 경기도 어딘가에 버려진 듯한 공터를 발견했다.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도로가 있고, 옆으로는 철조망이 있어, 누군가 올 일이 없는 게 폭탄실험의 장소로는 최적이라 느꼈다. 별은 드디어 폭탄의 성능을 제대로 실험해볼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일주일 뒤에 있을 버스 테러를 위해서 더 이상 실험을 미룰 수 없었다. 광활한 대지 위에 전사의 출현을 반기는 바람이 한 자락 날아와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는 바람에 화답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 낡고 해진 긴 스포츠 가방에서 검은 철제 물질을 꺼냈다. 별은 이 세상에 심판을 가져올 그 검은 물질을 공터의 한 복판에 꽂은 뒤 멀찍이 떨어졌다. 이쯤이라면 누구나 지을 법한 회심의 미소를 또 한 번 지은 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어 바람 속에 연기를 날려 보냈다. 별은 더럽게도 홍콩영화를 많이 본 자였다. 그리고 입술에 물고 있는 담배가 다 타들어가 거의 필터만 남게 되었을 즈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동기의 붉은 버튼을 눌렀다. 순간, 지진이라 해도 될 정도로 지축과 지대, 지각이 요동쳤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 곳에 응축됐다 할 정도의 굉음이 덮쳤다. 별은 그 자리에서 혼절해버렸다.

 

    3인조 은행 강도단은 범행을 저지를 날을 두고 옥신각신 논쟁을 벌였다. 우선 경제사범이 범행 저지르기에 돈 안 드는 날이 좋다고 한 술 떴고, 운전기사는 차 안 막히는 날로 하자고 한 술 더 떴고, 엘리트 출신의 전직 은행 직원이 ‘타깃 액세스’, ‘스트라테지 플랜’,‘ 로지스틱스’ 따위의 몹쓸 용어를 섞어 한 술 더 뜨는 바람에 이야기는 산으로 가고 있었다. 영차영차. 생산성 없는 대화가 지속되자 전직 은행 직원은 급기야 회의를 주재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적합한 범행 날짜를 정하기 위해 우이동 힐링 센터로 워크숍을 떠났다. 기분 좋은 햇살이 바싹 마른 면 이불에 몸을 누인 세 사람의 눈을 간질였고, 아침이면 바흐의 교향곡이 모닝콜 음악으로 상큼하게 울렸다. 수제 요구르트에 방울토마토를 찍어 먹으며 미소를 지었고, 조식 쿠폰으로 호텔 1층에서 써니 사이드 계란 후라이와 토스트를 먹으며 이대로 살고만 싶다는 충족감에 젖었다. 흠뻑흠뻑. 아, 이런 게 회의를 빙자한 외유성 행사의 행복이구나, 하고 엉겁결에 느꼈다. 그래 가끔은 회의를 하자. 그러나 이 행복을 계속 느끼고 싶었지만, 이 행복을 유지하느라 지출한 비용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행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를 겪으며, 결국 인생은 행복을 위해 불행을 감내하는 것이라는 이율배반적 깨달음을 얻었다. 그나저나 거의 모든 회의와 워크숍이 그렇듯, 2박 3일간의 일정 동안 뚜렷한 안이 나오지 않자 결국은 마지막에 내놓은 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말았다. 은행 직원이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예의 그 쓸데없는 관료적 경험주의자의 설(說)을 풀어놓았다. 만우절에 범행을 저지르면 장난인 줄 알고 바로 보안버튼을 안 누를 수 있으며, 그 사이 보안직원을 잡아두면 된다고 했다. 경제사범과 운전기사가 의심을 표하자, 그는 “내가 해봤단 말이야. 썅”이라며 회의 막판에나 있을 법한 또라이 엘리트 특유의 어거지를 놓기 시작했다. 실제로 퇴사직전 만우절에 미래의 범행을 위해 자신이 강도 이벤트를 벌인 적이 있었으며, 당시 직원들은 기분 좋게 껄껄껄 웃으며 넘어갔다고 막무가내로 우겨대자 경제사범과 운전기사는 마지못해 만우절인 4월 1일을 범행일로 잡았다. 물론, 그것은 구라였다. 은행 직원은 몹쓸 구라를 치다가 은행에서 잘린 것이다.

 

    안면수는 책상 위에 산적한 관광개발안을 뒤적이며 니미럴을 연발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행정용어들이 문서 위에서 춤을 췄고, 어느 하나 자신의 노동 욕구를 자극하는 제안서가 없었다. 그러다 거의 모든 문서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 마지막 제안서를 펼쳤을 때, 알 수 없는 충격과 호기심, 그리고 열정이 마치 그를 뒤집어쓰듯 덮쳤다. ‘서울시티투어버스 관광계획안’이라는 노란 철이 된 문서를 보는 순간, 괄약근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들뜨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는 전생에 칭기즈칸의 기마부대에서 말을 못 탄다는 이유로 중대장 ‘죨라게’에게 졸라게 뒤통수를 가격당하며 다음 생에는 반드시 마차만 타야겠다고 결심을 한 이였다. 가급적이면 큰 마차를 타고 싶다며 전생에 뒤통수를 가격당할 때마다 다짐을 한 터라, 새빨간 색상의 육중하고 쌔끈한 시티투어버스를 보는 순간 오줌을 지릴 정도로 흥분을 느끼고 말았다. 그는 당장 보좌관을 호출해 제안서를 작성한 공무원과 함께 시티투어버스를 타러 가보자고 발정 난 강아지처럼 졸라댔다. 멍멍. 안면수에게 당할 대로 당한 보좌관은 당장 관광청에 전화를 했다. 보좌관에게 당할 대로 당한 관광청은 당장 정상운행 스케줄 외에 별도의 시티투어버스를 준비했다. 그것은 안면수만을 위한 버스였다.

 

 

  5

 

    별은 어리둥절했다. 눈을 떠보니 쇠창살이 보였고 조명은 어두컴컴했다. 드넓고 햇살이 충분했던 광장은 어느새 좁고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신분이 탄로 난 건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머리를 벽에 쿵쿵 박고 있을 때,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 제대로 빡이 돈 상병이 나타나 시원하게 별의 얼굴을 놀이공원 두더지처럼 가격했다. 영창에서 근무 중인 상병은 기세 좋게도 군부대 옆에서 사상 규모 100여 명의 사제폭탄을 실험한 별을 감시중이었다. 시내였다면 경찰서로 끌려갔겠지만 군부대 옆이었기에 군부대 파괴 음모설, 북한 연루설, 북한과 결탁한 제3국 개입설, 종북 세력의 지원설 등 순식간에 제기된 무수한 가능성들이 군재판부에서 밝혀질 때까지 별은 일단 영창에 수감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별의 주머니 속에 있는 붉은 별 모양의 스티커가 그를 인민세력으로 오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붉은 별 모양 스티커는 오이가 어머나!를 연발하며 벼룩시장에서 사서 미래의 시아주버니에게 헌사한 선물이었다. 오이는 더럽게 눈치가 없는 여자였다.

 

    쿠마리 구씨와 바타르 박씨는 초이아노프스키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심판일이 사흘도 남지 않았는데, 폭탄이 준비되기는커녕 별이 어디에 있는지 행방조차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3년 전에 폭탄 공급에 실패한 전력이 있는 별이었기 때문에 동료들 간에 합리적인 의심이 발동했다. 전생에 15세기 영국 판사로서 잔 다르크의 화형을 주도한 적이 있는 쿠마리 구씨는 예의 그 몹쓸 마녀사냥을 재개했다(그는 15세기에 마녀사냥을 행한 벌로 지난 5세기 간 다섯 번에 걸쳐 사하라 사막의 낙타로 환생했으며, 지금은 서비스 차원으로 머리가 불탄 민둥산 같은 대머리에, 얼굴은 애교차원으로 탄 감자처럼 검게 태어난 것이다). 그는 별이 애초부터 심판에 관심이 없었으며 탈레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초이아노프스키의 입국을 변명삼아 한국에 온 것이며, 이제는 동생도 찾을 수 없는 한국 어느 산간에 도주해버린 것이라며 음모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스토리텔링이라면 대하소설을 써도 모자람이 없을 바타르 박씨 또한 별이 도주를 위해 평소 지도를 펼쳐 서울은 물론 경기도 일대에 수상쩍게 붉은 펜으로 표시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며 한 술 더 얹었고, 이에 사랑에 빠져 아직 정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 오이는 고작 별 모양의 스티커를 하나 선물했을 뿐인데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있다 했으니, 그게 다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이 그리워 그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했다. 다시 말하지만 오이는 더럽게 눈치 없고, 착각도 잘하는 여자였다. 어쩔 수 없이 작가가 개입하자면, 이것은 모든 사건을 자신의 시각 내에서 받아들이는 인간의 선택적 지각과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 보유하고자 하는 본성 때문이다. 어찌됐든 동요가 일자, 키르기스스탄 용사의 후예인 초이아노프스키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진정 폭탄 없이 맨몸으로 버스를 탈취해 뛰어내릴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지 않고서는 박씨와 구씨가 형의 명예는 물론 자신의 본의까지 의심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이는 헤라에게 입을 함부로 놀려 몸은 사라지고 메아리만 남게 된 에코처럼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오이는 눈물을 닦고 어느덧 잔 다르크가 될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덧붙이자면, 오이는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좌우지간, 심판의 날이 야금야금 다가오고 있었다.

 

    만우절 아침, 어이없게도 전직 은행원의 말처럼 세상물정 모르고 철없는 신입 행원이 강도 이벤트를 벌였다. 30년간 보안업무를 담당해왔던 베테랑 직원은 신입 직원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치고 껄껄껄 웃었다. 머리를 맞은 신입 행원은 투덜대며 속으로 ‘행장이 되면 반드시 저 새끼부터 잘라야겠다’고 다짐했다. 신입 행원은 30년이 지난 훗날, 행장이 되어 자신의 회고록에 용감하게도 이 고백을 하지만 베테랑 직원은 해고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조금만 있으면 밝혀진다. 그건 그렇고, 제 자리에 앉은 신입 행원 앞으로 두건을 쓴 세 명이 신문지에 싼 긴 막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행원은 나지막이 “내가 먼저 했어. 새끼야”라고 읊조렸으나, 순간 귀 방망이가 날아갔다. 30년간 보안업무를 담당해왔던 베테랑 직원은 이번에도 시원하게 껄껄껄 웃으며 두건을 쓴 녀석의 뒤통수를 휘갈겼다가, 죽어버렸다. 꽥. 이번에는 진짜 총이었다. 순간 은행 안에는 광포한 소음과 소동이 일어났으며 귀 한쪽이 떨어져 나간 신입 행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라며 금고 쪽으로 안내했다. 그는 30년이 지난 훗날 행장이 되어 자신의 회고록에 죽을 위기의 순간에도 친절을 몸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친절이 가장 쉬웠어요. 얼떨결에 총을 쏜 경제사범은 총을 쏘는 순간 몸에 퍼지는 짜릿한 전율을 경험했다. 순간 눈이 크게 떠지며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고 귓가엔 16mm 에로비디오에 나올 법한 침실무드 음악이 들려왔다. 사실, 경제사범은 한때 올림픽 사격 꿈나무였다. 그리고 멈춰 있는 타깃을 맞추는 것보다 움직이는 타깃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순간 온 몸에 강력한 볼트가 흐르자, 그는 파리 떼처럼 시야에 떠다니던 우수고객 열세 명을 맞췄다. 빵야빵야. 윗공기를 마시고 있던 우수고객 파리 떼 열세 명이 에프킬라 마신 파리 떼처럼 바닥에 쓰러져 파닥거렸다. 헌데, 그는 올림픽 꿈나무이긴 했으나 치명적인 실수로 88올림픽에 나서지 못했으니, 그것은 한 번씩 엉뚱한 걸 맞춘다는 것이었다. 저 멀리서 창구직원의 풍만한 가슴을 지켜보고 있던 운전기사의 머리가 토마토처럼 터졌다. 오 마이 갓. 이 광경이 연출되자 은행은 삽시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훗날 행장이 될 신입 행원을 비롯한 전 행원들이 대동단결한 모습으로 친절히 금고를 열어드려 현금을 각까지 잡아가며 자루에 담아드렸고, 자루 위에는 서비스로 20년 된 보르도 와인까지 끼워 드렸다. 그 와중에도 신입 행원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훗날 ‘베스트 스마일 직원상’을 받게 된다. 다행이 더 이상 토마토가 터지는 일은 없었고, 훗날 30년 뒤 행장이 된 신입 행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토마토라고 밝힌다. 첨언하자면, 회고록의 제목은 「 토마토-인류의 적」이다.

 

    안면수는 보좌관, 시청공무원과 함께 시티투어버스에 올랐다. 기다란 버스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야릇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손님이 거의 없는 기다란 버스가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느껴졌고, 이상하게도 그 안에 타자마자 몇 번의 생에 걸쳐 느껴왔던 갈급함이 충족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안면수 일행을 제외한 승객은 한 명밖에 없었다. 어, 어째서 승객이 한 명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시간을 30분 전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별칭이 재키로 통하는 육척 장신의 흑인은 한국어를 도통 모르는 관광객이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옵 옵 옵 오빤 강남스타일. 그는 강남 스타일의 뮤직비디오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래서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촬영장소를 방문했다. 자신의 긴팔을 이용해 45도 우측 상단에서 아래로 내려다 찍는, 간단히 말해 얼짱각도로 찍은 셀카를 페이스북에 올려서 ‘좋아요’를 흠뻑 받고, 남들 다한다는 인사동에서 떡볶이 먹고 ‘오 마이 갓’ 하며 십대처럼 눈을 하트 모양으로 뜨고 찍은 셀카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는 ‘좋아요’를 더럽게 사랑하는 남자였다. 한국어는 전혀 몰랐지만, 강남 스타일의 가사만큼은 모두 외우고 있었기에, 의사소통이 안 되면 막무가내로 강남스타일의 가사를 읊었다. 그런데 그게 또 발음이 어찌나 정확하고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졌는지, 구경하는 상인들은 ‘허허. 그 양반 참…’ 하며 서비스로 반찬도 더 주고 밥값도 깎아줬다. 재키는 강남스타일이면 다 통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뮤직비디오에 나오지만 해보지 못한 유일한 경험, 즉 관광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것은 당연히 안면수가 독점 대여한 바로 그 시티투어버스였다.
    국회의원이 탄다는 말에 바짝 긴장한 운전기사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자칫 실수했다간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국회의원에게서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른다고 톡톡히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긴장감에 난데없이 마빈 헤글러같이 생긴 흑인이 버스에 뛰어오르며 “오빤 강남스타일”이라 하자, 자기도 모르게 아는 유일한 영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양키 고 홈
    순간 빡이 제대로 돈 흑인은 눈동자가 쏟아질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욕설을 쏟아 부었고, 버스 안은 재키가 쏟아낸 욕으로 가득 찼다. 만약 퍼큐를 날렸다면 이원생중계로 토마토가 터질 분위기였다. 생전 처음 영어로 백과사전 분량의 욕을 들은 기사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제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했다.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버스기사는 훗날 행장이 될 신입 행원의 삼촌이었다. 피는 못 속여.

 

    그러고서 안면수가 버스에 탄 것이다. 안면수가 버스에 타고 보니, 마빈 헤글러 같은 흑인 한 명이 헤드폰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흑인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랩을 중얼거렸는데, 그와 눈이 잠시 마주치는 순간 안면수는 자신도 모르게 항문의 모든 근육이 수축되면서 앉은키마저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스쳐지나간 그 동공이 알 수 없는 폭력과 치욕을 선사했다. 재키는 전생의 안면수, 즉 어린 소치겔의 항문을 무지막지하게 학대한 ‘말의 남자’ 옆집 아저씨였다. 이히히힝.

 

 ② 도날드 캠벨(1960)이 주장한 ‘선택적 기억, 보유(Selective retention)'란 개념으로,
최민석의 역사적인 석사논문〈 중도주의자의 실종 〉에 잘 나타나 있다.

 

 

 

  6

 

    최씨와 구씨, 그리고 박씨와 오이, 이 4인조 시티투어버스 탈취단은 다시 한 번 4월 1일 만우절에 광화문 광장에 섰다. 그리고 바람 부는 광장에 일렬횡대로 나란히 서서 거사의 제물이 될 시티투어버스를 응시했다. 버스는 시동이 걸린 채로 그르렁그르렁, 마지막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곧 죽게 될 운명의 버스를 바라보며 초이아노프스키는 말했다.
    -심판의 날이 왔다. 동지들이여, 목숨을 함께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쿠마리 구씨와 바타르 박씨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오이는 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에 빠지면 남자만 보이는 오이는 일이 이렇게 커질 것이라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태분간을 잘 못하는 사이, 최씨가 으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버스로 뛰어올랐다. 박씨도 구씨도 삽시간에 따라 뛰어올랐다. 생전 처음 백과사전 분량의 영어 욕을 잡숴 드신 운전기사는 정신이 오락가락해져 있던 터라, 넉살좋게 “허허허. 한국인 다 됐습니다. 급하시긴~” 하고 웃어젖힌 후, 곧장 “출발합니다”라며 시동을 걸었다. 오이는 최씨의 손에 이끌린 채 엉겁결에 버스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움직이고 있었다. 부릉부릉.

 

    안면수는 소리를 지르며 버스에 탄 이들을 ‘뭐야. 이놈들은’ 하며 보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며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땀이 더욱 비처럼 쏟아지며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재키 덕에 이미 땀을 흘린 데다가 더 땀을 흘리니 마치 안면수의 하늘 위로만 폭우가 쏟아지는 듯했다. 안면수는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오한,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사람 좋고 맘 좋고 친절한 작가가 밝히자면, 바타르 박씨의 전생의 이름은 ‘죨라게’였다. 그렇다. 죨라게는 다름 아닌 소년 안면수, 즉 소치겔의 뒤통수를 졸라게 후려쳤던 칭기즈칸 기마부대의 중대장이었다.
    바타르 박씨가 가발공장에서 일할 당시 사장이었던 안면수가 왜 박씨를 알아보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이 눈치 채어서는 안 될 하나의 비밀을 눈치 채는 순간 연이어 비밀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항상 공장에서 억눌려 있던 박씨가 심판의 각오를 다지고 버스에 뛰어든 오늘 별안간 그 모습에서 전생에 걸쳤던 용사의 기운이 빛을 발했는지는 모른다. 어찌됐든, 안면수는 오늘에야 사실을 인식했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보좌관이 묻자 안면수는 떨면서 대답했다.
    -그, 근데, 저 저 새끼는 내 공장에서 일하던 놈인데

 

    별안간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최씨, 박씨, 구씨, 그리고 오이는 엉겁결에 관광객처럼 버스에 얌전히 앉아 있게 됐다. 그나저나, 원래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버스에 올라타는 녀석들 중에 혹시나 반항할 싹수가 보이는 놈들을 가려낸다.
    그런 녀석들이 있다고 추정되면 그 녀석들의 자리 주변에는 가지 않는 동선을 짠다.
    오이는 승객들의 고개를 모두 숙이게 한 후, 경찰이나 외부에 알릴 수 없도록 휴대전화를 거둬들인다.
    쿠마리 구씨는 운전기사 대신 운전을 하고, 초이아노프스키는 제일 앞쪽에서 승객들을 위협한다.
    바타르 박씨는 제일 뒤쪽에서 승객들을 감시한다.

 

    이런 시나리오였으나,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일단은 관광객처럼 가만히 앉아서 서울투어 코스를 관광하고 있다.
    그런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말이 들렸다.
    -근데, 저 저 저 새끼는 내 공장에서 일하던 놈인데.

 

    셋은 일제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면수였다. 자신들에게 단 십 분의 휴식시간도 주지 않고 비열하고 몰인정하게 착취했던 안면몰수, 안면수. 동료였던 ‘주글레리’를 죽음으로 내몰고서도 안면몰수했고, 그래서 실패한 3년 전의 테러를 시작키로 결심하게 하고, 지금 다시 오늘의 테러를 시작하게 한 그 원흉, 바로 그 주인공이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다.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노에 가득 차 고함을 질렀다.
    -모두 손 머리 위로! 실시!

 

    동일한 시각, 은행털이에 성공한 강도단은 차 안에서 보르도 와인을 꿀떡꿀떡 마시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가 그냥 이렇게 흘러간다면 미래 16종 국어교과서에 공동으로 실릴 이 소설의 도덕성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 향후 30년 뒤 행장이 될 신입 행원의 기지가 발휘된다. 그는 행여나 있을 은행의 보안 문제를 위해 보르도 와인에 ‘오한, 불안, 발열, 기침, 구토, 발기불능 및 경도저하’는 물론이고 공격성이 강화돼 체내에 한 번 흡수되면 주변의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앞서 언급한 ‘오한, 불안, 발열, 기침, 구토, 발기불능 및 경도저하’가 해소되지 않는 신약을 투여한 것이다. 이를 알 턱이 없는 전직 은행 직원은 운전 중인 경제사범의 죽빵을 호기롭게 날렸다. 순간 오한이 사라졌다. 신기한 효능을 체험한 전직 은행 직원은 다시 한 번 호기롭게 경제사범의 아구창을 날렸다. 이에 기침이 사라졌다. 이에 신기를 체험한 엘리트 출신의 은행 직원은 다시 한 번 싸대기를 날렸다. 이에 나머지 ‘불안, 발열, 구토와 발기불능 및 경도저하’가 사라졌고, 그의 토마토도 터져버렸다. 뿌지직.
    올림픽 꿈나무였던 경제사범은 총구에서 나오는 연기를 휘파람으로 휘익 불어 사라지게 한 후, 계속 운전을 했다. 어느덧 수십억에 달하는 돈을 독차지하게 된 경제사범은 축배를 들기 위해 자신도 축배를 들었다. 물론 20년 된 보로도 와인이었다.

 

    -모두 손 머리 위로! 실시!
이 공포의 말이 버스 안에 울려 퍼지자 이미 겁에 질려버린 안면수만이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보좌관과 시청공무원은 ‘어허. 저 친구들 행위예술하나’ 하는 호기심으로 보았고, 혹시나 싶어 ‘Everybody Hands up’이라고 통역한 오이의 말을 들은 재키는 ‘세이 예에. 세이 호오’를 연발하며 손을 허공중에서 휘저었다. 그 와중에 ‘옵 옵 옵 오빤 강남스타일’이라고 했다. 재키도 눈치가 더럽게 없는 녀석이었다. 오직 안면수만이 분위기 파악을 하고 낮게 보좌관에게 읊조렸다.
    -아, 됴때다. 숀 도로 인마.
    안면수는 겁에 질리면 더럽게 혀가 짧아지는 습성이 있었다.
    이 말을 알아들었을 리 없는 보좌관과 시청공무원이 “거, 참 의원님. 농담도 잘하십니다. 하하하”라고 안면수의 손을 내리려는 순간, 보좌관과 시청공무원의 뒤통수에서 ‘빠바박’ 불꽃이 튀었다. 이 둘의 뒤통수를 가격한 이는, 바타르 박씨였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앞을 응시하니, 어느새 최씨, 아니 초이아노프스키가 총을 천장으로 치켜들어 테러가 시작됐음을 알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진 운전기사가 차를 가변도로에 세워 쿠마리 구씨에게 운전대를 넘기는 게 보였다. 다소 엉켰지만 오이가 계획대로 휴대폰을 거둬들였고, 최씨는 능숙한 한국어로 선언했다.
    -이 버스는 탈취되었다. 이제 우리가 명령하는 대로 이 버스는 움직일 것이며, 우리의 지시에 불응하면 즉시 사살할 것이다.
바타르 박씨가 공포감을 더욱 조성하기 위해, 전시용으로 안면수의 뒤통수를 한 번 가격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친숙함과 포근함, 고향을 찾은 듯한 따뜻함, 아울러 잃어버린 이산가족을 되찾은 듯한 만족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박씨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에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마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물론, 안면수는 790년간 잊고 지냈던 설움과 더럽게 친숙한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여기서 잠깐 신을 만나고 온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원래 전생에서 죽을 만큼 고생한 안면수는 사실 이번 생에 복을 누릴 기회를 잡고 태어났다. 그러나 안면수의 본성에 약간의 회의를 가지고 있었던 신은 안면수를 한 번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생에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죨라게’를 안면수의 기나긴 생의 길에 한 번 만나게 한 후, 그에게도 자비를 베푼다면 안면수에게 복을 내리고, 만약 그를 괴롭힌다면 안면수의 복을 거둬 오리라 생각했다. 이제 와서 밝히자면, 이 때문에 위대한 전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안면수는 위대한 전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에서 그만 죨라게의 환생인, 바타르 박씨를 박해하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박씨뿐 아니라 그 주변인물은 물론 나아가 그를 믿고 표를 던져준 유권자들마저 속일 생각뿐이었으니,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지사 인과응보라는 자명한 결과였다. 너무 교훈적이라고 여긴다면, 이 소설은 미래 16종 국어교과서에 실릴 예정이라는 것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어찌됐든, 바타르 박씨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번 손을 대자 그 손이 자동으로 안면수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있었으니, 때리면 때릴수록 손에 착착 감기는 것이 그립감도 좋고 살 오른 두피로 인해 쿠션감도 좋았다. 바타르 박씨는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행복감을 느끼고 말았다.

 

 

  7

 

    한편 경찰국장은 은행이 털렸다는 당대미문의 사건을 접한 후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강도들이 타고 도주한 차량은 ‘신속ㆍ정확’ 스티커가 부착된 주산학원 승합차였으나,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춰버렸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CCTV에도 잡히지 않았다. 친절하고 고독한 작가가 또 한 번 개입하자면, 3인조 은행 강도단의 주산․암산 학원 승합차는 위장용 스티커였던 것이다. 그들은 범행 직후 CCTV가 없는 지역으로 잽싸게 빠진 후, 차량 전체를 뒤엎고 있던 스티커를 단번에 떼어냈다. 그러자 차량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회색 승합차가 되어버렸다. 다시 경찰국장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자기는 물론 자칫하면 장관과 관련자 전원의 목이 날아갈 판국이었고, 이 와중에 유학 간 딸내미 등록금마저 떠올랐다. 낭떠러지에 몰린 심정으로 경찰국장은 울음보를 터트리기 직전이었으나, 이때부터 30년 후 행장이 될 신입 행원의 활약이 시작된다. 그는 출동한 경찰들에게 중요한 정보가 있으니 국장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경찰들은 아무리 채근해도 국장을 만나기 직전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장을 만나게 된 신입행원은 훗날 성공가도를 달려 행장이 될 인물이었으니, 그는 국장에게 건넨 첫 인사를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카드하나 트시죠. VIP로.
    어찌됐든, 그는 마치 예언가라도 되는 양 국장에게 다음 말을 했으니,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강도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둘 다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둘 다 죽지 않았다면 한 명이라도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만약 살아서 도주중이라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몹쓸 폭력을 행사해 신고가 접수될 것이다.
    넷째, 아무런 신고가 없다면 혼자서 차를 타고 도주중일 테니, 그 차는 심히 흔들리며 어디서건 폭주를 일삼고 있을 것이다.
    신입행원은 뻔뻔하게도 국장 앞에서 점성술사처럼 이런 말을 했는데, 마침 회색 승합차 한 대가 심히 흔들리며, 중앙선을 침범하기도 하고, 접촉 사고를 내고도 도주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국장은 행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에 행원은 다시 한 번 뻔뻔하게 말했다.
    -연회비 없는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3년 후 행원은 실적왕이 된다.

 

    구씨가 이번엔 용케도 운전을 잘하고 있었다. 운전수 뒷좌석 쪽에는 안면수와 보좌관이 고개를 숙인 채 나란히 앉아 있고, 그 뒤편에 흑인과 시청 공무원이 역시 손을 머리에 얹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안면수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데 묘한 쾌감을 느낀 바타르는 자기도 모르게 계속 뒤통수를 때리고 있다. 안면수는 아이처럼 신음을 연발하고 있다. 아야, 아야, 아야야. 사랑은 야야야야야. 버스는 어느덧 목적지인 여의도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고 있다. 뛰뛰빵빵.

 

    그 시각, 폭력성이 잔뜩 발현된 경제사범은 회색 승합차를 광포하게 몰며 도심을 질주하고 있었다. 신입 행원의 놀라운 기지의 발현으로 어느덧 경찰차들이 승합차에 따라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간과된 것이 있으니, 승합차를 몰고 있는 경제사범이 사격 올림픽 꿈나무가 되기 이전의 장래희망이 카레이서였다는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에 카레이서를 꼬박꼬박 적어낼 만큼, 자동차 경주에 흥미와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꿈이 택시기사로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자동차를 빨리 몰아서 생기는 것은 벌금밖에 없지 않은가.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카레이서의 꿈을 마음 한 편에 숨겨둬야 했던 경제사범은 밥을 굶어서라도 용돈의 전부를 자동차 경주 오락에 쏟아 부었다. 그가 자라던 시절의 자동차 경주 오락이 비록 조악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두뇌가 그려낼 수 있는 모든 가상 시나리오를 써가며 오락에 임했다. 그렇기에 추격전은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기쁨을 선사했다. 슈욱슈욱.
    때문에 사이렌을 울리며 추격하는 패트롤이 그를 따라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어느덧 승합차는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시티투어버스가 마포대교를 넘어 여의도 국회 쪽으로 향하자 만개한 벚꽃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어찌나 만개해 있었던지 거사의 기운을 누그러뜨릴 만큼, 푸른 하늘과 분홍 벚꽃이 한껏 어우러져 있었다. 심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미 전작에서 밝힌 바대로 운전기사가 꿈이었던 쿠마리는 운전만으로도 행복에 흠뻑 젖어 있었다.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이에게도 벚꽃은 보였다. 오이는 어쩌다보니 멜랑꼴리한 기분이 되어 납치극 도중에도 밖을 보라며 최씨에게 거리를 가리켰다. 오직, 박씨만이 ‘마침내 격전지인가’ 하는 심정으로 거리를 응시했다.
    얌전하게 있던 재키도 벚꽃을 보자 어쩐지 안면수가 탐스러워보였다. 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내, 안면수의 엉덩이를 보며 침을 삼켜왔다. 꼴딱꼴딱.
    마침 최씨와 오이가 딴 짓을 하고 있자, 재키는 이때다 싶어 손을 쓰윽 뻗어 안면수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기겁을 한 안면수가 으아악 비명을 내질렀고, 곧장 바타르의 손이 뒤통수를 가격했다. 빠박빠박.
    -죽을 준비나 하거라. 안면수!
    그러고 그가 다시 거리를 보자, 이번엔 재키가 안면수의 엉덩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보좌관은 겁에 질려 그저 보기만 했고, 재키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그래 너 hey 그래 바로 너~
    안면수는 식겁하며 비명을 질렀고, 예의 그 친숙하고 익숙한 감촉의 손찌검이 그의 뒤통수를 작렬했다.
    -죽기 싫다고 발악해도 소용없다. 이제 이 버스는 국회로 돌진하고 너희는 버스의 폭발과 함께 죽을 것이다.
    이번엔 안면수와 보좌관, 시청 공무원이 소년 합창단처럼 삼중창으로 울었다.
    엉엉. 엉엉. 엉엉엉.
    -원하시는 게 됸입니까. 됸이라면 뎨 비자금 모두 털어서 드리게뜹니다.
    안면수는 며느리도 모른다는 비자금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고백에 보좌관도 시청 공무원도 깜짝 놀랐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지역구 거주 기업인들에게 비자금을 악랄하게 받아냈고, 그 금액은 3선 국회의원이 작정하고 모았다 해도 어림없을 거금이었다.
    그러나 바타르 박씨와 쿠마리 구씨, 그리고 초이아노프스키와 사랑에 빠져 눈먼 오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발 살려달라며 그들을 향해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미 등으로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쉼 없이 맞은 탓에 뒤통수가 도톰히 부풀어 있는, 그의 엉덩이는 사랑스럽게 젖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인은 자신의 탐욕을 자극하는 그 부위를 격정적으로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꿀꺽꿀꺽.

 

    사람 좋고 맘 좋은 작가가 힌트를 주자면, 그 시간 경제사범이 모는 승합차는 여의도로 진입해 떨어지는 벚꽃을 배경으로 마치 한 마리의 말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떨어지는 벚꽃을 피해간다며 쿠마리 구씨는 자동차를 핸들을 이리저리 꺾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시간의 틈이 잠깐 벌어져, 흑인에게 전생의 영혼이 이생의 영혼 위에 덮치듯 내려왔다. 순간 재키의 눈동자는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오로지 안면수의 엉덩이만이 확대되어 보였다. 꿈틀 꿈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마침내 이웃집 소년 소치겔을 탐했던 전생의 자신이 되돌아왔다. 재키의 눈동자는 이미 불덩이가 되었고,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통제할 수 없는 기운에 휩싸여, 안면수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순간에도 그는 마치 가미가제특공대처럼 이렇게 외쳤다.

 

    나는 사나이! 점잖아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사나이!
    때가 되면 완전 미쳐버리는 사나이!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
    그런 사나이!

 

    안면수는 기겁하며 운전석 쪽으로 쓰러졌고, 그 순간 운전중이던 구씨의 머리에 부딪혔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구씨의 핸들이 왼쪽으로 홱 꺾였고, 맞은편에서 오던 떨어지는 벚꽃을 배경으로 말처럼 달려오던 회색 승합차와 그만,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아무리 추적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회색 승합차는 전복된 채, 연기를 피어 올렸다. 모락모락. 그 뒤로 수십 대의 패트롤카와 기동순찰대, 그리고 기동타격대의 버스가 줄지어 있었다. 바타르 박씨와 초이아노프스키가 정신을 차리고 추돌 사고의 현장으로 나오자 어릴 적 영화를 많이 본 경찰국장이 흥분하여 경례를 올려붙였다. 예썰!
    아쉽게도 결론을 말하자면, 최씨 일당은 결단을 못 내린 운전기사를 대신해 강단 있게 은행 강도를 검거한 사상 최초의 외국인 용감한 시민이 되었다. 비자금을 실토한 안면수는 입을 막기 위해 보좌관과 시청공무원, 그리고 운전기사와 재키에게 적당한 돈을 떼어주어야 했다. 안면수에게 시달림을 당했던 보좌관과 직장 생활에 염증이 났던 공무원은 그날 밤 퇴직서를 쓸 꿈에 부풀었다. 운전기사는 심리치료를 받고도 남아도는 돈으로 세계일주를 떠났다. 훗날, 재키는 나중에 입금된 계좌의 금액을 보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뛰는 놈, 그 위에 나는 놈, 베이베 베이베, 나는 뭘 좀 아는 놈”
    승합차는 이제 소설이 끝이라는 듯 아쉬움의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아쉬움의 연기가 여의도 국회 앞에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그때, 나타난 훗날 행장이 될 신입행원은 검거에 성공한 경찰국장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마이너스 통장 하나 트시죠. VIP 급으로.

 

 

 

   《문장웹진 8월호》

 

최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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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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