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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

  • 작성일 2011-08-17
  • 조회수 973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

 

박정애



  



 

 

뜨겁게 달군 스테인리스 팬에다, 먹다 남은 갈비찜 국물을 붓는다. 불을 약하게 조절한 뒤, 찬밥 덩어리와 건채 플레이크를 넣고 주걱으로 섞는다. 국물이 밥알들에 잘 녹아들었다 싶을 때 참기름을 넣어 다시 한 번 볶는다. 가스레인지를 잠그다 피식, 웃는다. 어제 저녁 갈비찜을 먹을 때 딸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엄마, 내일 아침 메뉴 맞춰 볼까? 이 국물로 밥 볶을 거지? 맞지? 맞지?

볶음밥 네 주발, 오이냉국 네 대접을 퍼 담는다. 스크램블한 달걀 한 접시, 배추김치 한 접시를 식탁 가운데에 놓는다. 마지막으로 수저 네 벌.

부엌 베란다로 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본다. 남편과 딸아이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남편이 친 공이 기다랗게 포물선을 그리며 다세대주택 3층, 우리 집 베란다 바로 밑까지 올라왔다가 떨어진다. 마음만 먹으면 내 손으로 공을 잡아채서 딸아이한테 던져줄 수도 있을 성싶다. 딸아이가 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달려가 냉큼 받아 친다. 주말 아침마다 아빠한테 레슨을 받고 주중에는 가까이 사는 제 사촌이랑 연습하더니 실력이 꽤나 늘었다.

길거나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왔다 갔다 하는 공을 바라보는데, 별안간 눈앞이 뿌예진다. 요즘 아이들 말마따나 ‘멍 때리는 병’이 도진 것이다. 선생님, 수업시간에 가끔씩 멍 때리고 계시는데…… 그거 아세요? 반장 아이가 며칠 전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었다.

창틀을 부여잡고 눈을 끔벅거리다 머리를 흔든다.

“여보, 민지야, 아침! 아침식사!”

남편이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민지가 보낸 공을 놓친다. 민지가 깔깔깔 웃으며 라켓을 흔든다. 말이 빠르고 몸도 재바른 아이. 욕심이 많은 만큼 다부지게 노력도 하는 아이. 민수가 저 녀석 반만 따라가도 무슨 걱정이 있을까.

창문에서 몸을 떼자 시선이 앞집 파라볼라 안테나에 머문다.

파라볼라, 포물선……

마음의 수면에서 길고 짧은 포물선들이 들쭉날쭉 솟아오른다.

포물선, 쌍곡선, 초점, 준선, 춘희, 동백꽃,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그리고 류똥, 개새끼.

“민수야, 민수야아, 일어나 밥 먹자.”

아들아이 방 앞에 서서 방문을 두드린다. 두드리는 것쯤으로 녀석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그래도 오늘은 일요일, 여유가 있다. 살그머니 방문을 연다. 방문 잠금장치는 제 아빠가 오래 전에 없애버렸다. 걸핏하면 문 잠가 놓고 들어앉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이제 문이야 잠가 놓지 않지만, 일없이 빈둥거리는 버릇은 여전하다.

“민수야아, 엄마는 말이야. 아침부터 우리 민수한테 소리 지르고 싶지 않거든. 얼른 일어나라, 응? 세수하고 밥 먹어야지. 시계 좀 봐. 벌써 아홉 시 반이나 됐지 않니?”

민수는 기지개를 쭉 켤 뿐, 눈을 뜨지 않는다. 입가에 침버캐가 소금가루처럼 허옇게 붙어 있다.

“일어나. 안 일어나?”

목소리에, 그리고 아이한테로 다가가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일어날래, 조금 있다 아빠한테 벌점 받고 일어날래?”

아빠, 벌점. 두 단어에 아이가 눈을 뜬다. 눈만 떴다뿐이지 몸을 일으켜 욕실까지 가는 데에 민지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시간이 걸린다. 아들이 아니라 나무늘보를 키우는 꼴이다. 쯧쯧, 혀를 차려다 겨우 참는다.

통, 통,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민지는 늘 저렇게 계단을 통통거리며 뛰어 올라온다.

“엄마아, 밥! 배고파!”

“그래. 대충 씻고 얼른 먹어.”

뒤따라 들어온 남편이 민수 방을 살핀다. 내가 현관 안쪽에 붙은 화장실을 가리킨다.

남편은 일곱 시에 일어나 거실과 안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해서 널고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민지와 배드민턴을 쳤다. 민지도 아빠와 나가기 전에 제 방을 정리하고 독후감 숙제를 끝냈다. 나는 부엌과 냉장고를 청소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 집에서 제 몫을 못해내는 사람은 아들아이뿐이다.

민지와 남편이 겨끔내기로 안방 화장실에서 씻고 나올 때까지 민수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현관 화장실 앞으로 가서 소리친다.

“민수 너, 1분 이내에 안 나오면 벌점 1점이다. 2분 지나면 2점, 3분 지나면 3점, 분당 1점씩이다.”

“저…… 지금 못 나가는데요.”

“왜? 왜 못 나와?”

“똥 싸는데요.”

식탁에서 민지가 피식, 웃는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남편의 눈초리가 파랗게 화를 낸다.

민수는, 상황이 저한테 불리하다 싶으면, 화장실에 숨는다. 숨어서는, 똥을 싼다고 한다. 밥 먹다가도, 공부하다가도, 청소하다가도, 그놈의 똥을 싸러 도망친다. 일단 싸러 들어가면 함흥차사.

그래도 부모인데 똥 싼다는 자식놈을 문 부수고 끄집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보, 그냥 우리 먼저 먹자.”

내가 남편의 손목을 잡아끈다. 남편이 한숨을 쉬며 따라온다.

“민수 쟤, 오늘 설거지 시켜. 이십 분 안에 못 끝내면 구두도 닦이고 제 교복 다림질도 시키고. 시간 딱 정해 놓고 시간 안에 못 끝내면 하루 종일이라도 일을 시켜.”

남편의 표정과 말투가 신경에 거슬린다.

“알았어, 알았다고. 알았으니 밥이나 먹자.”

알았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설거지든 뭐든 자기가 시키면 되지 왜 날더러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 하는 마음이 뾰조록뾰조록 돋아난다. 어쩌면, 남편의 목소리에 류똥의 지겨운 설교 레퍼토리가 떠올라서일지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왜 시키는 걸 안 하고 지랄이야? 네년들이 지금 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세상은 네년들 멋대로 사는 곳이 아냐. 학교에서 일등으로 배워야 하는 게 뭔지 알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사는 법이야. 네년들이 나중에 시집을 가서도 마찬가지야. 서방이 여기하고 저기 좀 치워 놓으시오, 하면 치워 놔. 안 치웠다가 뒤지게 얻어터지지 말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부인에게 연민을 느꼈더랬다. 우리 역시 류똥에게 걸핏하면 얻어터지지만, 그래도 류똥과 평생 같이 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아빠, 오늘 나한테 2차방정식 활용하는 법 좀 가르쳐줘. 그냥 계산하는 거는 잘하는데 식 세워서 푸는 걸 잘 못하겠어.”

민지의 말에 남편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다.

“그래, 그래. 네 나이 때 아빠도 그거 어려워했어. 알고 보면 쉬운 건데 말이지. 아빠가 우리 민지 백점 맞을 수 있게, 잘 가르쳐줄게.”

남편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나도 민지 같은 아이가 키우기 편하다. 하지만 어쩌랴. 민수도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인걸…….

입맛이 떨어져 밥알을 께적거리며 숟가락 바깥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테인리스 볼록거울 속에 내 얼굴이, 귀를 붙들린 채 대롱거리는 헝겊인형처럼, 걸려 있다.

 

나는 류똥의 양손에 귓바퀴를 잡힌 채 강제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프고 진한 남자 향수 냄새에 숨이 막혀서 정말이지 바깥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밖이 보고 싶었어? 수업시간에?”

아뇨. 그냥 눈앞이 뿌예져서 고개를 돌린 거예요. 창밖이라고 해야 운동장밖에 없는데 보고 싶긴 뭘 보고 싶어요?

“봐라, 봐. 이 새끼야. 내가 이렇게 높이 쳐들어 주니까 더 잘 보이지? 봐. 더 봐.”

마침내 제 팔이 아팠던지 류똥이 손을 놓았다. 다리로는 재빨리 의자를 치워버리면서.

나는 시멘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류똥이 무섭고 내 모습이 부끄러워 신음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 무렵의 나는 느닷없이 가수(假睡) 상태에 빠지는 버릇이 있는, 어딘가 이상하고 예민하고 우울한 소녀였다. 담임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은 그런 나를 이해해 주셨고 다른 선생님들은 나한테 별다른 관심이 없었건만, 유독 수학교사인 류똥만 나를 못살게 굴었다.

나는 그게 내 예쁘장한 짝 춘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류똥은 내 자리에 앉는 걸 좋아했다. 아니 내 자리에 앉아 춘희를, 그때는 그걸 ‘추행’이라는 말로 정의할 줄도 몰랐지만, 추행하는 걸 좋아했다. 류똥은 춘희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곤 꽃향기를 맡듯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러다간 슬그머니 춘희의 귓불을 만지거나 겨드랑이께 연한 살을 꼬집었다. 춘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등허리를 옹송그리면, 류똥은 마치 대단한 위로나 해주는 모양으로 춘희의 목덜미에서 허리선까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얄따란 손바닥은 춘희의 브래지어 끈 주변을 특히 좋아했다.

그 시간에 나는 뭘 했냐고?

나는 칠판 앞에서 류똥이 빼곡히 판서해 둔 문제들을 풀어야 했다. 적어도 다섯 문제 이상, 때로는 열 문제도 풀었다. 하나같이 진저리쳐지는 시간이었지만, 포물선을 배울 즈음이 제일 심했다.

류똥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포물선 여러 개를 그려 놓고 색분필로 꼭짓점을 칠했다. 빵빵한 쌍곡선을 그려 분홍색 꼭짓점을 칠할 때는, 뒷자리에서도 얼마든지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아, 요거, 요거, 빵빵하네. 요런 건 꼭지도 예쁜 분홍색으로 칠할 수밖에 없지! 얘들아, 뒤지게 예쁘다, 그치?”

류똥의 끈적거리는 눈길이 갑작스레 춘희의 가슴에 꽂히면, 춘희는 홍옥처럼 빨개진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한없이 고개를 숙였다. 류똥은 또, 홀쭉한 포물선에 갈색 분필로 꼭짓점을 칠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이건 축 늘어져 갖고……. 쩝. 이런 건 꼭지도 거무죽죽해. 에이, 못생겼어. 안 그러니, 얘들아?”

물론 아이들은 입을 바늘로 꿰맨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 같았으면 동영상을 촬영하여 인터넷에 올리고도 남았을 걸, 우리는 그저 가슴 달린 여자로 태어난 걸 창피스러워했을 뿐이었다. 감히 류똥에게 불만을 제기한다거나 어딘가에 류똥을 고발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류똥도 미워하고 춘희도 미워했다. 둘 다 더럽고 재수 없다고 했다.

나로 말하자면 속마음으로는 춘희를 좋아했다. 얼굴을 뒤덮다시피 한 좁쌀여드름 때문에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나로서는 뾰루지는커녕 땀구멍도 하나 안 보이는 춘희의 매끈한 피부가 너무 부러웠다. 동공이 유달리 큰 맑은 눈과 도톰한 입술, 잘 익은 사과 빛깔의 볼도 내 것이기를 바랐다. 또, 춘희는 착한 짝이었다. 류똥 때문에 내가 매번 지겹게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게 마치 자기 탓인 양, 늘 미안해했다. 내가 지우개나 샤프심을 빌려달라고 하면 제꺽, 기쁜 얼굴로 빌려주었다.

하지만 그런 춘희를, 겉으로는 미워해야 하는 게 내 처지였다. 아이들은 춘희 때문에 제일 고생하는 내가 자기들 기대치만큼 춘희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못마땅해했다. 개중 몇몇은 나한테 대놓고 춘희를 해코지하라 시켰다. 춘희 도시락에 모래를 뿌려 놓으라는 둥, 춘희 가방을 찢어 놓으라는 둥. 나는 버럭, 짜증을 냈다.

“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 네들이 직접 해. 왜, 류똥이 보복할까 봐 무서워? 나도 그래. 류똥이 무서워서 춘희도 못 건드리겠어. 나더러 어쩌라고? 지금도 류똥한테 당하는데 더 어떻게 당하라고?”

 

민수가 식탁에 앉는다. 남편이 벌점 타령을 하기 전에, 내가 낮은 목소리로 민수를 으른다.

“너 오늘 설거지 해. 이십 분 안에 끝내야 해. 시간 안에 못 끝내면 구두도 닦고 교복도 다려야 해. 그러니까 빨리빨리 해. 알겠지?”

“빨리빨리 뭘 하라고?”

민수가 묻는다. 민지가 촉새처럼 나선다.

“설거지, 구두 닦고, 교복 다리고.”

“설거지구두를 닦으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아아아아, 사오정 짓 좀 그만 해! 설거지하고 구두를 닦으랬지, 누가 설거지구두를 닦으래?”

민지가 발끈하고 남편이 미간을 찌푸린다.

“네가 분명히, 설거지구두 닦고, 이랬잖아?”

민수도 가만히 물러서진 않는다.

“내가 언제? 언제? 오빠는 남의 말을 들으려면 좀 똑바로 들어. 왜 만날 딴소리야?”

민수가 숟가락을 움켜쥐고 씩씩거린다.

“됐어. 둘 다 그만! 민지는 다 먹었음 일어나고 민수는 얼른 밥이나 먹어.”

내가 먼저 일어나지만, 민지가 나보다 빨리 제 밥그릇과 수저를 개수통에 담그고 수돗물을 튼다. 그릇이 말라 있으면 설거지하기 어려우니 개수통에 담글 때 물을 받아 놓으라는 말을 어제 저녁에 했는데 당장 오늘 아침부터 실천하는 녀석.

앞집 파라볼라 안테나에 눈길이 간다. 민지는 저 안테나 같은 아이다. 넓은 지역에 쏟아지는 전파를 저한테로 집중시키는 안테나처럼, 민지는 넘쳐나는 정보를 잘 받아들여 제 공부에, 그리고 생활에 적용한다.

민수는 다르다. 감도(感度)가 떨어진다. 느린 것은 둘째 치고 정보 해독을 야무지게 못해 엉뚱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그러니 민지한테서 걸핏하면 사오정 소리를 듣는 것이다. 당연히 공부를 잘할 리 없다. 친구들한테서도 무시당하기 일쑤다.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어서 하위권에서 맴도는 성적과 순탄치 않은 교우관계 때문에 엄청 고민한다. 가끔씩은 밥도 안 먹고 죽을상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집이나 학교에서 큰 말썽을 부리는 법은 없다. 그저, 보는 사람 부아를 돋울 뿐이지.

지금도, 남편까지 일어난 식탁에서 저 혼자 밥알을 세고 앉았으니 부아가 치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남편이 기어코 잔소리를 한다.

“야, 김민수, 지금 뭐하자는 거냐? 얼른 퍼 먹지 못해? 네가 사람이야 굼벵이야? 너, 그 굼벵이처럼 는적거리는 버릇 못 고치고 군대 가면 맞아 죽어. 요행히 군대를 면제 받은들, 그런 굼벵이 같은 페이스로 뭘 해먹고 살겠어? 군대고 회사고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페이스를 맞춰야지 누가 네 굼벵이 페이스를 맞춰 주겠냐?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놈아.”

 

“그래, 내가 많이 봐줘서 70점까지는 노력하면 대학 갈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해 주지. 70점 이하는, 솔직히 말해서, 일찌감치 공장 다닐 준비를 하는 게 나아. 괜히 대학 가겠다고 깝치느라 부모 등골 빼먹지 말고.”

70점 이상, 70점 이하로 나눠 손을 들게 한 류똥이 교편을 흔들며 말했다. 류똥의 눈이 춘희를 향했다. 춘희는 70점 이하였다.

“춘희도 공순이 준비해야겠네?”

춘희가 가지런한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대꾸했다.

“고무신 준비를 하라꼬요?”

아이들이 웃었다. 잔뜩 움츠려 있던 70점 이하 아이들까지 어깨를 펴고 낄낄거렸다.

류똥도 실소했다.

“하긴 춘희는 예쁘니까 공순이를 해도 잘 팔릴 거야.”

춘희가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춘희의 눈빛은, 뭐랄까, 지상에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어떤 순수의 시대, 순수의 공간에서 우리가 사는 이 타락한 세상으로 불시착한 사람의 그것 같았다.

아이들이 더 크게 웃어댔다. 나는 춘희가 가여웠다. 마침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가 쓴 소설 『춘희』를 읽는 중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점심시간.

“공, 순, 이. 공순이란 말, 첨 들어 봤니?”

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에 다니는 여자를 그렇게 불러. 공장에 다니는 남자는 공돌이라고 하고. 지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공순이밖에 못 되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말했겠지, 류똥은.”

“그라마 내가 공순이를 해도 잘 팔릴 거라 카는 말은 머꼬?”

“그건…….”

말문이 막혔다. 공순이를 해도 잘 팔릴 거라니? 아이들은 웃었지만 나는 인상을 긁었다. 분명히 어떤 불쾌한 느낌이 있었기에 그랬다. 그러나 겨우 열다섯 살짜리 중학생에 불과했던 나는 그 느낌을, 춘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건, 군계일학 뭐, 그런 의미 아닐까?”

“군계일학이 뭔데?”

나는 책상 서랍에서 소설책을 꺼냈다. 표지에 탐스러운 동백꽃을 옷깃에 꽂은 흑발의 미녀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한글로 ‘춘희’라고 제목도 떡하니 박혀 있었다.

춘희의 큰 눈이 완전 동그래졌다.

“와아, 이 여자 이름이 춘희가? 서양여잔데?”

“진짜 이름은 아니고 별명이 춘희야. 이런 여자가 보통 여자들 사이에 있으면 어떻겠어? 눈에 확 띄겠지? 그게 군계일학이야.”

춘희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이 여자가 주인공이가? 뭐 하는 여자고?”

“뭐 하냐면…….”

또 말문이 막혔다.

“음……. 연예인 같은 거.”

“멋지다. 사랑 얘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나?”

“아니. 재미없어.”

“행복하게 끝나나?”

“아니. 슬퍼.”

춘희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입맛을 다셨다.

“에이. 그라마 안 읽을란다. 나는, 슬프게 끝나는 얘기는 싫거든.”

춘희가 책을 빌려달라고 할까 봐 조바심을 치던 참이었기에, 나는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이 꽃 이름이 뭐고? 꽃이 이뿌기는 한데, 슬퍼 븨네.”

“동백꽃이야. 보통 꽃은 꽃잎이 하나둘씩 시들고 먼저 시든 꽃잎부터 한 잎, 두 잎 떨어지잖아. 이 꽃은 달라.”

“맞다, 송창식!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그래, 그거. 너도 꽃을 직접 보진 못했구나?”

“응, 생전처음 본다 아니가.”

“난 말이야. 나중에 크면, 동백꽃 지는 모습 보러 선운사에 갈 거야.”

“나도 데려가주라, 응?”

춘희가 송아지처럼 순한 눈망울을 굴리며 보챘다.

“그러지 뭐.”

춘희가 웃었다.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얀 잇바디가 예뻤다.

계집애. 안 예쁜 구석이 없잖아?

내 이는, 치열이 고르지 않고 색깔도 노리끼리하다. 질투심으로 목구멍이 싸하니 아렸다.

춘희는 나랑 부쩍 친해진 기분이 들었던지 생전 안 하던 가족 얘기를 했다.

“우리 큰언니, 작은언니도 다 공순이다. 공부 안 해가 그런 기 아니고 집에 돈이 없어가. 나도 어차피 대학 못 간다. 우리 집, 저어어어어기 영양 산골짝에서 농사 짓거든. 딸이 여섯이고 막냉이만 아들. 우리 언니들은 영양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공장 갔는데 그래도 나는 언니들 덕에 서울서 중학교도 다니고……. 고등학교까지는 언니들이 시키 줄 낀데, 대학은 바래지도 않는다.”

“공부 잘해도?”

“공부 잘하면 명문 여상(女商) 가지. 공부 못하면 따라지 학교 가고. 따라지 나와도 여상만 나오면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다 카데. 하얀 블라우스에다가 감색 치마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거 단정하게 입고 깨끗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기 내 꿈이다. 정란이 니는 꿈이 머꼬?”

“나?”

얘기할까 말까. 목소리를 낮췄다. 누가 듣고 비웃을까 겁이 나서.

“나는 말이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시인. 나, 시인이 되고 싶어.”

“와, 멋지다. 정란이 니, 글 잘 쓰잖아. 니는, 시인 중에서도 군계일학이 될 끼다.”

나는 감격했다. 감정이 지금보다 다섯 배쯤은 풍부했던 사춘기 소녀였으므로. 내 꿈이란 게, 엄마한테서도 된통 비웃음을 산 ‘물정 모르는’ 꿈이었으므로. 춘희의 말투에는 아무런 가식이 없었다. 물정 모르는 나도 남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격려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았다.

그래서 일기장에 적어 놓고 좋아하던 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도화지에 옮겨 쓰고 물감으로 수채화 배경까지 그려서 춘희에게 주었다. 춘희는 그 시화(詩畵)를 코팅하여 제 방에 걸어 두었다고 했다.

 

민수가 느지럭느지럭 설거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불쑥 궁금해졌다. 민수의 꿈이.

“민수야, 네 꿈은 뭐야?”

“닉쿤? 닉쿤은 가수지. 별명은 태국왕자.”

“아니, 네, 꿈, 말이야. 김민수, 네, 꿈. 너, 의, 꿈.”

“음……. 없어.”

민수랑 얘기할 때는 참을 ‘인’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좋아. 그럼 너는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야? 무슨 일을 할 때, 제일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

“그냥 아무것도 안 할 때.”

“아무것도 안 하는 거 말고오오오. 무슨 일을 할 때냐고 물었잖니?”

“만화책 읽으면서 뒹굴뒹굴할 때. 내 방 침대에서.”

복장이 터진다. 민수를 볼 때마다 집안일이라도 하라고 들볶고 시간을 재고 벌점을 매기는 남편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20분은커녕 40분이 지나도 민수의 설거지는 끝나지 않는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거실 콘솔 옆 책장에 낡은 시집들이 꽂혀 있다. 언제부턴가 사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 시집들. 정희성의 시집을 꺼내 들춘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가 눈을 찌르듯 다가온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안방에서 민지를 가르치던 남편이 뭐가 좋은지 하하, 껄껄, 웃는다. 민지가 헤헤, 갤갤, 웃는다. 죽이 잘 맞는 부녀다. 두 웃음 소리가 날과 씨로 만난다.

 

“박정란 91, 이춘희 100, 유분희 25, 김미경 52, 곽지연 7, 이건 뭐야, 70점도 아니고 17점도 아니고 7점? 7점? 야, 곽지연. 너는 그 돌대가리로 문제 푼다고 깝치지 말고 그냥 같은 번호로 찍어. 알아들었냐?”

아이들의 눈은 곽지연에게로 쏠리지 않았다. 호명당한 곽지연조차 춘희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주수정 67점, 전득남 43점, 이경옥 34점…….”

우리 반에서 100점은 춘희뿐이었다. 배배 꼬인 문제가 유독 많았던 시험이었다. 수학공부 죽어라 열심히 한 나도 91점, 우리 반 1등이자 전교 1등인 손신혜마저 94점밖에 못 받았는데.

아이들이 모두 춘희를 노려보고 류똥도 춘희를 힐끔거렸지만, 정작 춘희는 책상에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 시절만 해도 선생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대놓고 엎드려 있다는 건 선생에 대한 공개적인 반항이요 거부의 몸짓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춘희가, 류똥의 시간에, 감히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이춘희, 일어나 봐라. 100점짜리 얼굴 한번 보자.”

류똥이 제 딴에는 다정스런 목소리로 불렀지만, 춘희는 들은 체 만 체했다. 류똥의 싸늘한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내가 춘희의 반항을 부추겼다고 믿는 눈빛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나는, 죽는 게 무언지도 모르던, 그래서 죽는 것보다 매 맞는 걸 무서워하던, 석 달 전에 첫 생리를 시작한 중학생이었다.

춘희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춘희야. 일어나. 너 땜에 우리 반 애들 전부 다 매타작 당하게 생겼어.”

춘희가 흐느적흐느적 팔을 거둬들이고 등허리를 일으키고 고개를 들었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춘희의 동작은 굼뜨고 느렸다. 나는 행여 류똥이 폭발할까 조마조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빨리빨리, 춘희야, 빨리빨리.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춘희의 등과 목에 받침대를 해주고 머리를 빗질하여 류똥에게 진상하고 싶었다.

“야, 박정란, 나와서 시험문제 1번부터 10번까지 판서하고 풀어라.”

류똥이 명령을 내렸다.

“예.”

벌떡벌떡 뛰던 가슴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교단을 향했다. 성급히 교탁을 떠나 내 자리로 오던 류똥과 좁은 통로에서 부딪칠 뻔했다. 온몸에 와르르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정신없이 문제를 베껴 쓰고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하여 문제를 풀었다. 교실이 얼마나 쥐 죽은 듯 고요했던지 내 숨소리가 제일 크게 들렸다. 류똥은, 아마도 하염없이 춘희를 바라보고 춘희의 등을 쓰다듬었을 것이다. 춘희는, 아마도…….

문제를 다 풀고 어색하게 서 있던 나를, 마침내 류똥이 발견했다. 류똥이 일어서다 말고 도로 앉아 춘희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나는 게처럼 옆으로 걸으며 류똥과 부딪치지 않으려 조심했다. 내 책상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춘희가 불쑥 중얼거렸다.

“이번 주 일요일에 비가 올지 안 올지 내가 우째 아노?”

나는,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류똥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주 일요일, 비워 놔. 춘희는 그 말을 이렇게 들었다. 이번 주 일요일, 비 오나.

지금 와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를 해보자면, 류똥 역시나 극도의 불안, 초조, 긴장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춘희의 환심을 사고 춘희에게 그 제안을 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계획하고 애태웠을 것이다. 그랬는데 춘희의 반응이 그다지도 엉뚱했으니.

예민한 청각으로 춘희의 혼잣말을 고스란히 접수한 류똥이, 돌아섰다. 그는 한 마리 미친개처럼 거품을 물고 춘희에게로 돌진했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제격이라는데, 이건 거꾸로 미친개가 함부로덤부로 사람을 물고 뜯는 꼴이었다. 반장이 울며불며 교장선생님을 모셔올 때까지 미친개는 발광을 멈추지 않았다.

춘희는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언니 둘과 사는 춘희네 자취방에는 전화가 없었다. 주소를 들고 담임 선생님과 함께 춘희네 자취방까지 다녀온 반장은, 춘희가 영양 시골집으로 내려갔다는 소식만 전했다.

수학교사 류동하는, 여당 국회의원이 이사장인 그 사립여중의 수학교사로 정년퇴임했다.

 

민수가 현관에 퍼더버리고 앉아 제 아빠의 가죽구두 바닥 틈새에 낀 흙가루를 꼼꼼히 털어내고 마른걸레로 문지른다. 싱크대 그릇장에서는 민수가 설거지해 놓은 그릇들이 반짝반짝 마르고 있다.

부엌 베란다 창턱에 햇살이 소복하다. 상추 화분에 새싹이 빼주룩하니 돋아났다.

식곤증 때문인지 봄 아지랑이 때문인지 창밖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또다시 얼이 빠진다. 앞집 파라볼라 안테나가 겹으로 흔들리다 자전하고 공전하며 수많은 포물선들을 토해낸다. 포물선과 포물선이 얽히고설키며 봄날의 천지를 가득 채운다.

어쩌면, 어쩌면, 인생은 모두 하나의 포물선이 아닐까. 저마다의 초점과 준선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운명의 두 축을 넘나들며 부단히 삶의 좌표를 그려 가는……. 대칭축을 기준으로 반절(半折)하면 기쁨과 슬픔이 반반씩인…….

198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에서 여자중학교를 다닌 이춘희라는 포물선과 박정란이라는 포물선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접점이 인생의 어디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춘희야. 시인을 꿈꾸던 나는 그저 평범한 국어교사가 되었어. 누렇게 바랜 시집처럼 내 꿈도 빛이 바랬지. 너는 어때? 단아한 정장 차림으로 깨끗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니? 아니면 고만고만한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사니? 지난해 안동 하회마을로 휴가 떠났다가 영양 조지훈 생가에 잠깐 들렀을 때, 춘희 네 생각을 했단다. 혹시 이 근처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지 않을까. 사과 빛깔 뺨을 가진 춘희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 옆에 서서 웃으면,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쁠까. 깨끗한 사무실에서든 사과 향내 가득한 과수원에서든, 춘희는, 춘희의 초점과 춘희의 준선을 가지고 잘 살고 있을 거야. 춘희야, 사실은 내가, 내가 시시때때로 초점을 잃고 허둥대곤 해. 내 준선이 흔들거려. 선생으로서, 엄마로서, 내 좌표가 어디인지 모르겠어.

돌아보니, 민수는 여전히 현관에 주저앉아 세월아 네월아 하고 구두 광을 낸다.

“민수야, 대충 해라.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 교복은 언제 다릴래?”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구두 표면에 제 얼굴을 비춰보는 민수.

헛웃음이 난다. 이 아이가 숫제 구두 광내는 일을 즐기는 건가 싶다.

“김민수!”

아이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지금 몇 시간째 그거 하고 있는 거야?”

민수가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만 설레설레 젓는다. 모른다는 뜻이다.

남편이 나를 바라본다. 나도 민수처럼 고개를 젓고 싶지만, 억지로 입을 뗀다.

“설거지 하는 데 대충 사오십 분 걸렸고, 저거, 구두 닦은 지는 한 시간 이상 걸렸을걸, 아마?”

“그럼, 제한 시간을 얼마나 초과한 거야?”

“시간 제한, 안 했어.”

“왜?”

“몰라. 머리가 좀 아파서…….”

말끝을 흐리자, 남편이 비아냥거린다.

“민수 쟤, 매사에 흐리멍덩한 거, 누굴 닮았나 했더니 당신 닮았구먼.”

남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인정한다.

“그래, 나 닮았어. 어쩌라고?”

나하고 언성 높여 봤자 득 될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남편이 민수한테로 돌아선다.

“엄마가 시간 제한을 안 했으니까 지금까지는 봐주지. 하지만 지금부터 20분 이내에 교복 다리는 일까지 마무리하지 않으면 그 다음부터 1분당 1점이야. 오늘부로 벌점 47점인 거 알지? 50점 넘어가면 1점당 한 대씩 맞기로 약속한 것도 알고? 현재 시각 12시 15분이야. 시작!”

가만 놔두면 매타작은 따 놓은 당상. 아이 앞에서 싸우지는 못하고 창고 방으로 들어간다. 남편의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여보, 우리 민수 다그치지 말고 그냥 지켜봐 주자. 제발.

 

뜨르르르르르르. 금세 답신이 온다.

 

지켜보긴 뭘 지켜봐? 저 굼벵이 놀음을 지켜봐? 당신은, 군대 가서 적응 못하고 사고치는 애들이 남의 일 같지? 착각하지 마. 걔들 거의 민수 같은 애들이야. 빠릿빠릿하게 굴어도 살기 힘든 세상이야. 아이를 사회부적응자로 만들 셈이야?

 

당신이 왜 그러는지 나도 알아. 당신의 조바심, 책임감. 민수가 이 사회에서 도태될까 겁나서 어떻게든 미리 준비를 시키려는 거, 안다고. 하지만 민수가 변해? 변하더냐고? 이제 그냥 놔두자. 그냥 지켜보고 기다려주자.

 

당신이 그러고도 선생이야? 어떻게 된 선생이 교육을 포기해?

 

선생도 그냥 지켜봐 줘야 할 때가 있어.

 

그럼 당신이 민수 쟤 평생 책임질래? 책임질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훈련을 시켜야지.

 

책임질 자신……. 당연히 없지. 하지만 누군들 남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까?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아이를 방치하라고 하는 거야?

 

방치가 아니야. 믿고 지켜봐 주는 거지. 민수한테도 자기 초점, 자기 준선이 있는 걸. 그걸 우리 입맛에 맞게 바꾸려다간 민수도 다치고 우리도 다쳐.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어 보이지. 하지만 뜬금없지 않아.

내 초점과 내 준선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 현재의 내 좌표가 가리키는 말이야.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 하는 말이야.

창고 방에 제일 많은 것은 아이들 앨범이다. 민수, 민지, 두 아이의 사진과 그림일기장들이 아기 때, 유치원 때, 초등학생 때로 나눠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민수 앨범을 뒤적여본다.

남편과 내가 까맣게 잊어먹고 살지만, 민수도 어릴 적에는 이 세상 어느 아이 못지않게 귀여웠다. 웃어도 울어도 삐쳐도 예뻤고, 행동이 느린 것도 ‘사오정’ 짓을 하는 것도 다 신통하기만 했다.

남편은 우리나라 남자 치고는 드물게 적극적으로 육아에 동참했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는 일을 좋아했고 아이와 놀아 주기도 잘했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무시로 카메라를 들이댔고.

목욕하고 뽀송뽀송 예뻐진 민수를 핥을 듯이 내려다보며 파안대소하는 남편 사진, 유치원생 민수가 아빠의 등을 타고 앉아 그림책을 읽는 사진,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부자가 다리를 묶고 2인3각 경기를 하는 사진. 그렇게 세 장을 골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전송한다.

 

여보, 이 사진들 좀 봐. 아기 민수, 유치원생 민수, 초등학생 민수, 이만큼 사랑해 줬으면 부모 책임 웬만큼 다 진 거라 생각해. 이제 머리 굵어지고 목소리 변한 사춘기소년 민수는 그냥 지켜봐 주자. 자식도 본질적으로는 남이잖아. 남의 인생, 너무 간섭하지 말자. 백 퍼센트 책임지려고 하지도 말자.

 

휴대전화가 잠잠하다. 남편은 아마도 감탄사를 내뱉고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 키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먼저 한 방, 날린다.

 

여보, 솔직히 말해 봐. 당신도 힘들잖아? 민수 윽박지르고 때리는 거, 죽을 만큼 힘들잖아?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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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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