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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 여자들의 희망 2009

  • 작성일 2009-02-23
  • 조회수 2,890


살인자, 여자들의 희망 2009

  

 

김종호

 

 


등장인물:

       여자

       남자

       형사

       목소리

       인형1:실물 크기의 실리콘 인형

       인형2:실물 크기의 마리오네트

 

 


※ 이 제목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의 1909년 작 동명의 단막극에서 따왔다. 이 글이 희곡이라면, 연출 의도에 따라 각각의 장을 순서대로 상연하거나, 1장과 2장을 한 무대에서 동시에 상연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자와 남자, 인형1ㆍ2가 서로의 이중체(Double)인 것처럼, 1장과 2장 역시 서로의 이중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연이 아니라 낭독을 위한 경우 역시 따로/같이 낭독해도 무방하다. 그 둘 모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대체 이 글이 소설이든 희곡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장. 살인자 2장. 여자

 

어두운 실내. 오른편에 낡은 침대가 놓여있고 왼편에는 역시 낡은 1인용 소파와 낮은 탁자. 탁자에는 두 잔의 식은 커피와 재떨이. 재떨이 위 불붙인 가느다란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침대에는 시트와 같은 재질의 얇고 하얀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 올리고 모로 눕혀진 인형1. 인형1의 머리맡에는 알람 기능이 있는 소형 라디오 한 대. 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남자의 한숨.


남자와 인형1에게만 둥근 조명



남자

(마른기침) 담배 안 피울 거면 꺼라.

인형1

(대답하지 않는다. 이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형1의 대사는 없다. 인형의 특징을 최대한 살릴 것. 대사와 행동이 필요한 경우, 남자의 도움에 의해서만) …….

남자

내 말 안 들려? (신경질적으로 소파를 박차고 일어선다) 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불만 있으면 말을 해!

인형1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

남자

(소파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래, 알아, 알고 있어. 모를 리가 없지. 그럼. 그렇고말고…….


한동안 침묵


남자

(재떨이 위의 담배를 비벼 끈다)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어. 오해야, 오해라니까. 다 말했잖아, 오랜만에 만난 후배였을 뿐이야. 설마 했는데, 아직도 그 일을 맘에 담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다 거칠게 기침을 밭아낸다) 이렇게 쓴 걸 왜 피우는 거야, 대체!

인형1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


한동안 침묵. 불안한 듯 손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제스처. 침대와 탁자 사이를 서성거린다. 다시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먹거린다. 누가 봐도 울먹거리는 것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도록. 벽시계 똑딱거리는 소리 크게 울리다 잦아들면,


남자

(얼굴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내쉰다) 정말 바보 같구나! 난 너밖에 없는데, 넌 내가 그렇게 싫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남자, 침대 쪽으로 걸어가 누워 있는 인형1을 일으켜 앉힌다. 무릎을 꿇고 볼을 쓰다듬으면서 울먹인다.

경쾌한 핸드폰 벨 소리.

인형1의 조명 꺼지고,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온 남자에게만 조명.


남자

그래, 나야. 쉿, 아무래도 알아차린 것 같아. 이제 어쩌지? 그래그래, 지금은 통화하기 좀 그러네.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나중에 전화할게, 사랑해.


남자, 당신들을 향해 씨익, 음침한 미소를 짓고 다시 침대 쪽으로 걸어간다. 남자, 다시 울먹이는 표정.


남자

(인형1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우리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잖아. 잘 생각해 봐. 넌 수줍게 웃고 있었고, 난 열정적이었지. 기억나니? 난 지금도 기억할 수 있어. 네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 자락. 네 주위에서 소용돌이처럼 돌돌 말려 올라가던 공기. 내 열정들이 배경들을 하얗게 탈색시켰었지. 오직 너만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냄새……, 그래 냄새까지 기억나. 냄새를 맡을 때마다 심장이 화끈화끈거렸었지. 넌 내 가슴을 쓰다듬었고……, (인형1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게 키스를 했어. (인형1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키스를 하려다, 인형1의 얼굴을 잡고 도리질 친다. 마치 키스를 거부하려는 것처럼) 왜, 왜 그래? 정말 그럴 거야? 너야말로 뭘 숨기는 건 아냐? 남자 생겼어? 아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고개를 돌리고 혼잣말) 너 같은 멍청한 년이 그럴 수나 있겠니.

인형1

(남자, 여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대신) 남자라니! 말도 안 돼! 나 지금 기분 몹시 안 좋거든.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남자

(서둘러 인형1에게 다가가서) 미안해, 미안해. 내가 흥분했어, 미안해. 용서해 줘.

인형1

뭘 혼자 중얼거리니? 정말 내게 미안해하는 거야? 믿을 수 없어. 내가 인형 같니? 네가 하는 말을 그냥 듣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인형 같지? 늘 그랬던 것처럼 네 변명을 믿고 용서해 줘야 하는 거니?

남자

(희망이 생겼다는 표정으로 인형1의 어깨를 움켜쥐면서) 그래, 믿어야 돼. 정말이야,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어!


남자, 인형1에게 키스를 한다. 인형1도 남자의 머리를 감싼다. 남자, 더욱 격렬하게 키스를 하면서 침대 위로 엎어진다. 서둘러 인형1의 젖가슴을 헤치고 애무한다. 인형1의 약한 신음.


인형1

(남자를 억지로 밀쳐내면서) 잠깐, 잠깐. 제발 저리 가.

남자

왜? 왜 그러는 거야?

인형1

매번 이런 식이야. 오늘은 안 돼, 이젠 속지 않아.

남자

(인형1의 손을 들어 옷매무새를 고친다) 역시 그렇구나. 딴 남자가 생긴 거야. 어떤 놈이야? 어떤 새끼야? 내가, 내가 죽여 버릴 거야, 그 새끼 죽여 버린다!

인형1

대체 왜 이러니, 이러면 좋니? 그러면 내가 미안해서 네게 용서를 빌 것 같아? 내가 뭘 잘못한 거야? 그래, 딴 남자 생겼다. 어쩔 거니? 어쩔 건데! 머저리 자식아!

남자

(갑자기 자세를 바로하고) 다시 말해 봐.

인형1

왜? 기분 나쁘니? 머저리 자식.

남자

(음침하고 무거운 목소리) 다시 한 번 말해 봐.

인형1

머저리 자식…….


암전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악! 인형1의 비명.

다시 조명

남자의 한 손에는 바람이 빠져 쭈글쭈글해진 인형1이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피가 뚝뚝 듣는 커다란 식칼.


남자

(침착한 목소리) 머저리라구? 제 주제도 모르는 년. 뒈져서도 한 번 말해 보지? 어서, 어서 말해 봐.


남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침대 맡의 작은 라디오의 알람이 울린다. 그리고 노이즈와 함께,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남자

(짧은 신음과 함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뭐, 뭐야! 이게 뭐야!


라디오를 집어 들어 바닥에 세게 던져 깨뜨린다. 무대 천천히 암전. 여전히 스피커에서는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집어던지는 소리, 깨뜨리는 소리. 점점 커지는,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머저리 자식.


조명.


무대 중앙에 목이 매달린 채 흔들거리는 인형2. 바람이 불 때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리오네트.


다시 암전

경쾌한 핸드폰 벨 소리


여자

(스피커를 통해 여자의 목소리만) 나도 보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은 곤란해. 나오라구? 안 돼, 안 돼. 조만간 결정을 내릴 거야. 그동안은 우리 아기, 참아야 해요. 나중에 전화할게, 사랑해.

 

다시 어두운 실내. 세트의 위치가 바뀌어 왼편에 낡은 침대가 놓여 있고 오른편에는 역시 낡은 1인용 소파와 낮은 탁자. 탁자에는 두 잔의 식은 커피와 재떨이. 재떨이 위 불붙인 가느다란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재떨이 옆에는 알람 기능이 있는 소형 라디오 한 대. 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인형2. 침대에는 시트와 같은 재질의 얇고 하얀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 올리고 모로 누운 여자의 뒤척거림.


여자와 인형2에게만 둥근 조명



여자

(뒤척거리면서) 거기 담배 좀 갖다 줄래.

인형2

(대답하지 않는다. 이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형2의 대사는 없다. 인형의 특징을 최대한 살릴 것. 대사와 행동이 필요한 경우, 여자의 도움에 의해서만) …….

여자

내 말 안 들리니? (신경질적으로 담요를 걷고 일어나 재떨이의 담배를 물고 빨아댄다) 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내가 싫어? 싫으면 그만 오면 될 거 아냐!

인형2

(턱을 괸 채 소파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

여자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담배를 꽁지까지 빨고 다시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래, 난 다 알아, 알고 있어. 모를 리가 없지. 그럼. 그렇고말고…….


한동안 침묵


여자

(벽시계 소리, 똑딱. 시계를 쳐다본다) 그건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그러겠지. 오해였다고 그러겠지. 그래, 정말 오해였다고 치자구. 그게 어쨌는데? 그으래!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새삼 왜 그 얘길 꺼내는 거야? 맘에 그렇게 걸렸어? (탁자로 걸어가 담배를 끄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정말 잘났다, 잘났어.

인형2

(턱을 괸 채 소파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


한동안 침묵. 말하기 싫다는 듯 인형2 쪽을 외면하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다시 분을 못 참겠다는 듯 침대와 소파 사이를 왔다갔다 서성거린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쉰다. 벽시계 똑딱거리는 소리 크게 울리다 잦아들면,


여자

(여전히 인형2를 외면하면서) 정말 날 사랑하긴 한 거니? 나밖에 없다고 매번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그냥 입에 발린 소리였구나?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여자,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아 있는 인형2의 양쪽 어깨를 잡고 침대로 들고 와 앉는다. 인형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쓰다듬게 한다. 여자, 거칠게 인형2의 손을 쳐 낸다. 인형2의 목, 툭 꺾인다.

경쾌한 핸드폰 벨 소리.

인형2의 조명 꺼지고,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온 여자에게만 조명.


여자

전화하지 말라니까. 나도 보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은 곤란해. 나오라구? 안 돼, 안 돼. 조만간 결정을 내릴 거야. 그동안은 우리 아기, 참아야 해요. 나중에 전화할게, 사랑해.


여자, 당신들을 향해 가벼운 냉소를 보낸다. 혹은 음탕한 표정으로 손키스를 보내고, 다시 탁자 쪽으로 걸어간다. 인형2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여자

(인형2를 경멸하듯 쳐다보며) 좋은 시절? 좋은 시절이라고 했니? 넌 정말 네 좋을 대로, 멋대로 상상하는 버릇이 있어. 그 버릇 개도 못 주지. 사실대로 얘기해 봐, 그 웃기는 기억, 내가 교정해 줄까? 먹지도 못하는 술 억지로 먹였던 건 기억나니? 너한텐 좋은 시절이었을지 몰라도 난 정말 소름끼치고 끔찍해. 내가 아무리 네 가슴을 밀쳐내도 짐승처럼 달려들고, 냄새나는 침을 질질 흘리던 널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니. 내 팔자도 참 기구하다. 그때 경찰에 고발해 버렸어야 했는데, 어쩌다 너 같은 짐승하고 살게 됐는지 말이야. (인형2의 두 손을 가져다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게 만든다. 진저리를 치며 인형2를 밀쳐낸다. 힘없이 소파에서 굴러 떨어지는 인형2. 여자, 혼잣말) 우리 그이가 기다리고 있단다, 어서 빨리 나가 버려라, 제발.

인형2

(여자, 남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대신) 어떻게,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 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거구나. (여자가 대신 인형2의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도록 도와준다. 혼잣말) 이상하게 떨리지도 않고 가슴이 아프지도 않네. 단지 외롭기만 하네, 너무 외로워서 죽고 싶지도 않네. 외롭기만 할 걸! 언제까지나 외롭기만 할 걸!

여자

(인형2의 안색을 살피면서) 괜찮니? 미안해, 진심이 아니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리와 봐, 안아 줄게.


여자, 인형2의 볼에 키스를 한다. 인형2도 여자에게 키스를 하면서 안는다. 여자, 침대 위에 인형2를 눕히고 온몸을 입과 혀로 애무한다. 인형2의 짐승 같은 신음 소리.


인형2

(여자에게 더 달라붙으면서) 잠깐, 오, 오늘 괜찮아? 잠깐. 잠깐 기다려 봐.

여자

왜? 어디 가는데?

인형2

(침대 밑을 뒤지면서) 이, 이거. 이거 해보자, 이, 이리와 봐.

여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뭐 하는 거야?


인형2, 여자의 도움에 의해. 팔뚝만큼 굵은, 지나치게 과장된 목각 남근, 바이브레이터, 채찍, 눈가리개, 재갈, 밧줄, 빨간 하이힐, 망사 스타킹, 여학생 교복, 간호사복 등을 차례차례 꺼내 늘어놓는다.

바이브레이터의 윙윙거리는 소리, 장이 끝날 때까지, 점점 더 크게.


여자, 비명을 지르면서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인형2

왜, 왜 그래, 우리 사진도 찍자, 우리 동영상도 찍자, 사랑해, 사랑하니까 다 해보자, 헉헉, 흥분 돼, 못 참겠어, 흥분돼서 못 참겠어, 사랑해, 사랑해, 날 외롭게 만들면 안 돼, 외로운 건 싫어…….

여자

악! 이 변태 새끼! 저리 꺼져! 나가 뒈져!


마치 원숭이가 몸에 착 달라붙는 것처럼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인형2. 여자의 비명과 몸부림, 욕설과 저주. 마침내, 겨우 떼어낸 인형2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짓밟는다.

암전

인형2의 신음, 점점 잦아들다 마침내 끊기고, 잠깐 동안 침묵

다시 조명


여자

(발로 인형2를 툭툭 건드려 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야, 일어나, 일어나 봐 병신자식아. 일어나, 제발!


여자, 무대 중앙에 쭈그리고 앉아 울기 시작한다. 여전히 장내에는 바이브레이터의 윙윙거리는 소리.


여자

(한참동안 울다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이 변태 새끼,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바이브레이터를 들어 바닥에 세게 던진다. 무대 천천히 암전. 여전히 스피커를 통해 윙윙거리는 소리, 뭔가를 집어던지고 깨뜨리는 소리. 점점 커지는 소리, 윙윙. 점점 크게.


조명.


무대 중앙에 목이 매달린 채 흔들거리는 인형1. 뒤집혀 말려 올라간 치마 안쪽에 반쯤 벗겨진 팬티. 그래도 여전히 웃고 있는 실리콘 인형.


다시 암전

경쾌한 핸드폰 벨 소리


남자

(스피커를 통해 남자의 목소리만) 그래, 나야. 쉿, 아무래도 알아차린 것 같아. 이제 어쩌지? 그래그래, 지금은 통화하기 좀 그러네.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나중에 전화할게, 사랑해.

 

 

3장. 희망


원형 회전 무대 위에는 긴 등받이 의자가 두 개 당신들을 등지고 있고, 딱딱한 철제 책상 위에는 낡은 타자기, 그 앞에 앉아 열심히 타이핑을 하는 형사. 가끔 골치 아프고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누르거나 담배를 깊게 빤다. 장이 끝날 때 회전 무대는 정확히 180도 회전할 수 있도록, 천천히.


형사

(담배연기를 가쁘고 길게 내뱉으며) 남자. 이름. 이름 없어? 말 안 해? 그래 넘어가자. 나이. 나이 몰라? 이 새끼야, 너 몇 살이냐고, 한국말 모르냐? 좀 크게 말해 봐! 우물거리지 말고! 그래, 마흔셋. 낫살이나 처먹은 새끼가. 왜 죽였어? 뭐라고? 안 죽였다고? 야 이 새끼야, 증거가 있잖아, 니 손에 들려 있던 칼이랑 피 묻은 옷! 통화 내역도 보여 줘? 치정살인이지? 여자가 알아버린 거지? 아니야? 알 리가 없다고? 그래그래, 여자가 알았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니가 바람피운 거는 인정하는구나? 머저리 새끼. 어? 어쭈 너 지금 나 꼬나봤냐? 이 새끼야 정신 차려, 여기 경찰서야, 경찰서! 너 직업이 뭐야? 없어? 여자 똥구멍에서 단물만 빨아먹었구나? 뭐? 소설을 썼어? 참나 이런 새끼가 소설을 썼단 말이지? 야 이 새끼야,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을 머저리라고 하는 거야. 그래,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그딴 구라나 풀면서 사기를 치니? 사기가 안 먹히니까 짜증났지? 돈 벌어 오라니까 되레 밖에서 바람피운 거구. 바람피울 때 돈은 누가 냈니?


형사,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거칠게 푼다, 약간 과장되게. 단추가 떨어져 굴러간다. 엎드려 엉금엉금 기면서 단추를 찾는다, 약간 과장되게. 아니 많이 과장되게.


형사

(단추를 찾아 주머니에 넣고 투덜거린다) 아, 씨팔! 이게 뭔 짓이야. 밖에선 첫눈이 온다는데, 난 이게 뭐야! 살인자 새끼들! 아니 살인자 연놈들! 니들은 윤리란 것도 모르지? 도덕이 무너졌어! 그렇지? 야, 여자! 넌 이름 뭐야? 너도 몰라? 몰라? 말 안 해? 나이는, 나이는? (책상을 쾅, 친다) 아, 올해도 약속을 못 지키는구나. 첫눈인데. (다시 담배를 길게 빨면서 뭔가를 책상 밑에서 꺼내 늘어놓는다) 좋아, 이봐, 여자. 왜 죽였는지만 말해 봐. 내가 보기엔 그 남자 새끼가 변태였던 거 같아, 맞아? 그래 맞겠지. 이런 걸 바이브레이터라고 하지? 하, 그래. 요즘은 이런 거 인터넷으로 쉽게 구할 수 있나 보더군. 양심도 없는 새끼들, 다 철창에 잡아 가둬야 하는데 말이야. 채찍에 눈가리개라. 이건 뭐지? 이렇게 작은 교복은 어떻게 입는 거니? 안 입어 봤다고? 다 그 남자가 사 모은 거라고? 그래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크게 웃는다) 푸하하하, 이거, 이거 고개 끄덕이는 거 봐라. 야 이 썅년아, 너네 때문에 이런 구질구질한 취조실에 앉아 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응? 첫눈이란 말이야, 첫눈! 솔직히 불어 봐,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응? 그래 늬들, 한 대 맞고 시작하자!


암전.

각목 끌리는 소리

때리는 소리

남녀의 비명, 경우에 따라 비음 섞인 신음 소리

거친 형사의 호흡

남녀의 흐느낌, 경우에 따라 높은 신음 소리

조명


형사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는다) 씨팔 연놈들! 나를 놀려 먹어? 첫눈인데, 날 놀려 먹는다는 거지? 개 같은 것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핀다. 길게 연기를 내뿜고) 그래그래, 담배 맛은 좋군. 희망이라곤 이 담배밖에 없어. 내 사랑도 이제 참을 수 없을 거야. 벌써 몇 번째 약속을 어기는 거야. 제기랄. 야 이 새끼들아, 이게 뭔지 알아? 알기나 해? 반지야, 반지! 첫눈 오는 날 프러포즈하려고 했는데, 하필 이런 일을 맡을 줄 누가 알았겠어? 불쌍하지? 불쌍해 안 해? 말해 봐, 썅! 늬들은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도 몰라, 여긴 무덤이야 무덤, 내 청춘의 무덤이지. 킥킥. 무덤…….


책상에 엎드려 운다

외로워서 잉잉 운다

겨울바람 잉잉 분다


형사

(훌쩍거리면서 타자기 앞에 앉아 자세를 다시 잡는다) 자, 미안했다. 다시 시작하자. 조금만 협조해라. 빨리 끝내고 우리 점심이나 먹자. 지금 시킬까? 그래 먹고 하자.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짬뽕 먹을래? 넌 짜장? 아무 거나 먹어, 둘 중에 빨리 골라 봐. 그래, 통일시켜. (전화를 건다) 여기 분실이야! 분실이 어디냐고? 야 이 새끼들아 몇 번 말해야 알아듣냐, 대외비야 대외비! 그래, 이제 알아듣는구만. 여기 짬뽕 둘하고 잡채밥 하나 빨리 갖고 와. 뭐? 늦기는 뭐가 늦는다고 그래? 뭐? 길이 미끄럽다고? 첫눈이라고? 이 새끼들이, 뭐? 이게 엇다 대고 소리를 질러? 엉? 안 팔아? 팔지 마 새끼들아! (남자와 여자의 낮은 웃음, 키득) 이 새끼들 웃었어? 웃겨? 지금이 웃을 때야? 이 살인자 새끼들, 엎드려 새끼들아!


암전

때리는 소리

비명 소리

각목 부러지는 소리

채찍 소리

더 이상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길고 오랫동안

때리는 소리

조명


형사

(한쪽 자락만 바지에 구겨 넣어진 채 헤쳐진 셔츠) 늬들은 모를 거야, 희망, 희망에 대해서 말이야! 첫눈이 왜 희망인줄 알어? 모든 더러운 걸 덮어 주기 때문이지. 단지 덮어 줄 뿐이라고? 아니야, 새로 시작하는 거지. 백지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녀가 그 자식만 어떻게 떨쳐 버리면 되는데……. 그리고 첫눈이 오면 만나기로 했단 말이야! 그럼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우린 멀리 떠나간다, 바이바이! 큭큭큭, 이런 게 희망이야, 새끼들아! 알기나 해? 그런데 너희들이 다 망쳤어! 망쳤다구! 왜 하필 첫눈은 이런 때 오는 거야? (잠시 생각하다가) 아! 그래! 첫눈은 아직일지도 몰라! 첫눈은 단지 겨울이 시작된다는 전조일 뿐이지! 첫눈으로 이 더러운 것들을 덮기엔 어림도 없지! 암! 폭설이야, 폭설이 필요해! 완전히 하얗게 세상을 덮으면! 그때 만나기로 해야지, 지금 당장 만나서 희망을 연기(延期)하도록 하자!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스피커에서는 상대편 여자의 목소리

떨리는 형사의 목소리


형사

다, 당신이야? 지금 첫눈 내리지? 우리 약속 조금만 더 미루자, 눈이 더 많이 내려야 해! 우리의 희망은 첫눈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그렇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지금 만나서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해 보자! 보고 싶어, 많이많이 보고 싶어. 뭐? 뭐라고?

목소리

나도 보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은 곤란해.

형사

지금 나와, 지금 보고 싶어. 나, 일 다 했어. 바쁜 일 다 마무리했어. 우리 얘기하자, 우리들의 미래를! 우리들의 희망을! 뭐가 곤란해? 곤란한 일이 대체 뭐야? 그 자식이랑 같이 있는 거야?

목소리

나오라구? 안 돼, 안 돼. 조만간 결정을 내릴 거야.

형사

아직도 결정을 안 내린 거야? 제발 빨리 결정을 내려 줘. 그러니까…….

목소리

그러니까, 그동안은 우리 아기, 참아야 해요. 나중에 전화 할게, 사랑해.

형사

나도 사랑해! 사랑하니까 지금…….


전화 끊어지는 소리 뚜― 뚜―

형사, 고개를 떨어뜨리고 핸드폰을 쥔 손

바르르 떨린다

바르르 계속 떨린다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다시 부러진 각목을 쥔다


형사

이, 이 새끼들, 늬들이 희망을 다 꺾어 놨어. 맞자, 좀 더 맞자! 맞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러다가 멈칫) 어, 어? 야이 썅연놈들아! 죽었냐? 죽었어? 빨리 일어나! 이 새끼들이 왜 이래? 정말 이럴래, 너희들? 더 맞을래? 빨리 눈 안 떠? 빨리!


회전 무대, 완전히 돌아가면

높은 등받이 의자에 널브러지고 터진

인형1과 인형2

형사, 뒤돌아 무대 중앙에 서서


형사

아아 희망이 없어, 희망도 없이 이 무덤을 지키자. (자신의 왼손과 오른손을 맞잡으며, 다짐하듯이) 그러자. 무덤을 지키자, 그러자. 희망도 없이…….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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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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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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