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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1,436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해?


   난 나무를 못 봐.

   난 나무를 몰라.


   난 나무를 정말 모르는 걸까?


   난 나무를 정말 못 보는 걸까?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날 나무에게 데려갔어. 내게 나무를 만지게 했어. 줄기, 나뭇가지, 잎. 


   나무는 재미없어.

   나무는 말을 못 해. 

   나무는 빨간색이 아니야. 


   “날 나무에게 데려가지 마.”


   난 나무를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오직 하나. 


        

   8 


   “모습이 그려져.”


   그녀 앞에 놓여 있는 작은 돌.


   섬.


   “가지 마.”


   “아직 가지 마······.”



   9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난 내 얼굴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이 가장 예쁘다는 걸 알아.

   내 얼굴에서 가장 예쁜 데는 눈. 

   내 눈은 반달.   


   어릴 때 내 손가락이 자꾸 내 눈을 찔렀어. 엄마가 내 손에 장난감 수갑을 채웠어. 손가락이 자꾸 눈을 찌르면 눈이 꺼지니까.


   내 예쁜 얼굴이 보고 싶지는 않아. 

   거울이 내 얼굴을 봐. 

   내 예쁜 얼굴을 보고 거울은 점점 예뻐져, 딱딱해져.


   “아, 나는 내가 너무 좋아.”


   “아, 나는 내가 가장 좋아.” 


   “아, 나는 나를 너무 좋아해.”


   심장도 빨간색.


   빨간 집을 그리고 나서, 나는 화가가 되려는 꿈을 버렸어. 

   나는 스무 살이 되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로 스무 살이 됐어.



   10


   지금은 내가 가장 좋진 않아.

   내가 싫은 건 아니야. 

   내가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아. 


   자주 머리가 아파, 어지러워.  


   긴 낮. 

   그보다 긴 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새벽 3시, 아빠가 출근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잠들지 못할 때도 있어. 


   안 돼, 안 돼······.


   스무 살이 되고,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말이 안 나와. 내가 너무 좋다는 말이 안 나와요.



   11


   “나는 나가고 싶어.”


   “나는 나가고 싶어.”


   (그녀의 등 뒤 문이 열린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노래는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여.”


   “노래는 보라고 하지 않아.”



   12


   난 날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난 날 아무 곳으로도 데려가지 못해. 


   새처럼.



   13


   모습이 그려져.


   모습이 그려진다는 게 뭔지 몰라, 몰라.


   숲에 가고 싶지 않아. 

   숲에서 내가 뭘 해? 


   다른 집에 가고 싶어. 


   다른 집에는 사람들이 있어. 


   다른 집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는 얘기를 나눌 거야. 


   “사람은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 



   14


   스무 살이 되고, 불편한 내 몸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내 몸이 싫은 건 아니야.

   난 춤을 추고 싶어.


   아무도 원망하지는 않아. 


   내가 슬퍼······. 


   슬픔이 오면 그냥······ 그냥······.


   열여덟 살 때부터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어. 


   슬프다는 감정이 자주, 문득 와. 


   슬픔이 오면 그냥······ 그냥······.


   나는 설레고 싶은데, 날 설레게 하는 게 없어.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15


   슬픔이 깊어져······.


   오직 사랑.


   사랑을 하고 싶은데 못 하니까.


   나는 사랑이 하고 싶은데······. 


   나는 사랑을 해야 하는데······. 


   노래를 들어 주고, 노래를 불러 주고, 함께 노래를 듣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노래, 노래, 노래······ 그게 사랑.


   (그녀의 얼굴에서 터지는 웃음)


   잘생긴 남자하고 사랑이 하고 싶어. 

   목소리가 잘생긴 남자가 잘생긴 남자. 중저음에, 부드럽고, 달달하고······ 노래를 잘해야 해.    


   사랑은 날 설레게 해.


   (그녀의 얼굴에서 터져 넘치는 웃음)


   “아, 목소리가 너무 좋아.”



   16


   나는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아야 해.



   17


   “나는 기다려.”


   빨간색, 심장, 태양, 열정—.

   달이나 별은 모르겠어.


   누가 날 찾아왔으면······.


   스무 살이 되고, 기다림이 시작됐어. 



   18


   나는 밤보다 낮이 좋아.

   낮에는 빛이 있어.

   낮에는 손님은 와.


   밤이 되면 손님이 가버려.


   나는 손님을 기다려.


   아무도 안 와.

   아무도 안 와.


   “나는 그냥 앉아 있어.”



   19


   그렇게 밤이 오고, 


   나는 내 방에 거울처럼 딱딱하게 고여 있어요.


   딱딱하게, 딱딱하게,

   세상에 바람이 불어. 


   나무, 벽, 굴뚝, 버스, 의자, 신발, 사다리, 자전거······ 내가 본 적 없는 것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


   노래를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바람은 내 방에도 불어. 

   바람이 날 흔들어.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출렁여.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가라앉아. 


   내 얼굴은 거울이 돼. 


   그리고 문이 열려.


   내 얼굴에 엄마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봐.


   내 얼굴에 동생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비춰 봐.


   내 얼굴에 아빠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봐.


   그리고 문이 닫혀.


   고요한 밤.

   우울한 밤.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거울보다 더 딱딱해져.



   20


   나는 바다 앞에 누워 있어.   


   나는 바다보다 커.


   나는 바다보다 깊어.



   21


   “만지고 싶지 않아.”


   “안 아파.”


   “두렵지 않아.”


   “내게 보이지 않는 걸 만지는 게 두렵지 않아.”



   22


   날다? 


   날아가다?


   날아가는 소리는 알아.


   “그리워.”


   “사람이 그리워.”


   “나와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

 


   23


   바다에는 바다만 있어.


   바다는 색깔이 없어.

   바다는 모습이 없어.

   바다에는 소리들이 있지만 노랫말이 없는 소리들이야.


   바다에는 빛이 있어.


   엄마는 날 바다에 데려가고 싶어 해. 

   바다에 날 띄우고 싶어 해. 


   바다는 날 만져. 

   바다는 날 보지 못해. 


   24


   내가 아기 때, 

   빛조차도 못 볼 때, 

   밤에도 눈을 감으려 하지 않았대. 


   아무도  


   나는 눈을 감아.


   눈을 감는다는 건 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보고 싶지 않다는 건 뭘까?


   보고 싶다는 걸 뭘까?


   “내 마음을 받아 주세요.”


   보고 싶었어. 


   보면 심장이 뛰었어.


   열다섯 살에 처음 사랑을 했어. 짝사랑이었어. 한국사와 사회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어. 선생님을 보면 심장이 뛰었어.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학교에 가는 게 즐거웠어요.

   선생님이 아프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 

   공개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고백했어. 

   “내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 마음을 받아 주세요.” 


   스무 살이 되면 사랑을 할 줄 알았어. 



   25


   그녀 앞에 굽은 강처럼 놓인 나뭇가지.


   “노래는 내게 보라고 하지 않아요.” 


   나뭇가지는 흐른다,

   흐르다,

   그녀 앞으로 되돌아온다. 



   26


   나는 노래를 좋아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노랫말이 있는 노래. 

   듣기만 해야 하는 음악 싫어. 


   노래는 만지지 않아도 느껴져요.


   슬픈 노래는 날 울려, 슬픈 영화는 날 울리지 않아.  

 

   사랑은 오지 않고, 

   하루가 와,

   매일이 와, 

   인생이 와.


   내 인생이 와.


   보이지 않아, 만져지지 않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 



   27


   나는 바다 앞에 누워 있어.


   나는 바다보다 높이 있어.


   나는 바다보다 멀리 있어.


   멀리······.


   그만큼 


   가까이······. 


   보고 싶다는 갈망이 없었어. 보는 게 뭔지 모르니까······ 보인다는 게 뭔지 모르니까······ 모르면서······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나는 스무 살. 


   보고 싶어······.



   28

 

   내가 빨간 크레파스로 그린 집에는 빨간 심장이 있어. 

   창문도, 문도, 지붕도 없지만 

   내 빨간 심장이 빨갛게, 빨갛게 넘쳐나.


   빨갛게, 빨갛게,

   빨간 심장이 넘쳐나 빨간 집이 돼.


   내 빨간 심장이 뛰어, 빨간 집이 뛰어.


   빨간 집은 비를 맞아도 빨개.

   빨간 집은 눈을 맞아도 빨개.


   빨간 집은 꺼지지 않아,

   차가워지지 않아. 


   빨간 집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빨개져.

   빨간 집에 다녀가는 나비들이 빨개져. 


   구름이 흐르다 빨간 집에 닿으면 빨간 심장이 돼.



   29 


   노래가 없어. 


   듣기 좋은 소리가 없어.


   나는 엄청 솔직한 여자. 

   나는 단순한 여자.

   나는 살아 있는 여자. 

   나는 노래할 줄 아는 여자.

   나는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

   나는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여자.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내 심장을 흙 위에 놓아요.

   내 심장을 나무 위에 놓아요.

   내 심장을 숲속에 놓아요.

   내 심장을 달 옆에 놓아요.


   아직 가지 마······.


   멀다는 게 뭔지 몰라, 

   가깝다는 게 뭔지 몰라. 


   나무는 그냥 멀리 있게 둬.



   30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너무 좋은데 슬플 때가 있어.


   나만 외로워.

   나만 느끼네. 

   나만 몰라.


   나만 몰라, 몰라.



   31.


   “돌은 초록색일 거야.”


   “돌의 나이는 일곱 살? 여덟 살?”


   “까끌까끌하고 삼각형이야.”


   “돌은 산에 있었어, 계곡에 있었어, 나무 밑에 있었어.”


   “누가 돌을 만들지 않을까?”


   “누가 돌을 만들었을까?”

 

   “누가 돌을 나무 밑에 가져다 놓았을까?”



   32


      (그녀의 엄마) 마음을 비워.

      (그녀) 그게 돼?

      (그녀의 엄마) 넌 집착하고, 생각하고······.



   (그녀의 오른쪽 눈에 눈물방울이 맺힌다.) 


   당신을 만나서 감사해. 그 말을 하고 싶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요.


   사랑······.



   33


   “서랍 속에 있을 거야.”


   “서랍 속에 있었어.”


   “서랍 속에 있는 거 봤는데······.”



   34. 나뭇가지


   “난 나무 막대기라고 부를래.” 


   “나뭇가지보다 나무 막대기가 어울리는 것 같아.”


   “초록색이었을 것 같아.”



      (그녀의 엄마) 비바람에 흔들리고 꺾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그녀) 난 안 아파.


      (그녀의 엄마) 난 마음이 아파.

      (그녀) 난 안 아파.




   “나무 막대기에 아무것도 앉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빈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


   “처음엔 새가 와서 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니까······.”



      (그녀의 엄마) 초록 잎이 돋아나고 꽃도 피었으면······.

      (그녀) 빈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 



   “1년 후에 나무 막대기는 없을 수도 있어. 누가 가져가서 그걸 깎아서 뭘 만들었을 수도 있어.”


   “누가 가져가서 뭘 만들려다 버렸을 수도 있어. 뭘 만들기에 나무 막대기가 너무 작으니까.”


   “난 나무 막대기 갖고 싶지 않아.”


   “내게 나무 막대기를 가지라고 하면 내 방 서랍 속에 처박아 둘 거야.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으니까.”


   “나무 막대기를 그냥 가져다 놨으면 좋겠어.” 


   “나무 막대기가 원래 있었던 곳에.”


   “나무 밑에.”


   “나무는 숲에 있어.”


   “숲은 멀어.”


   “나무는 더 멀어.”


   “나무는 집에 없어.”


   “난 숲에 가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이 나무 막대기를 가져다 놓으려 함께 숲에 가자고 하면 갈 수도 있어. 숲에 가고 싶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가자고 하면······.”



   35.


   “실은 빨간색이야.”


   “난 묶는 걸 안 해봤어.”


   봄······ 설렘······ 기쁨······ 즐거움······.


   “내 손가락들이 묶는 건 못 해도 묶여 있는 걸 풀 줄은 알아.”



   36


   노래 가사 제목은 ‘고백’이야.


   (그녀의 오른쪽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흐른다.)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난 안 아파.


   그리고 오늘 밤 나는 노래 가사를 쓸 거야.  


   오늘 밤, 그런데, 


   나는 왜 나에 대해 생각을 안 할까?



1) 선천성 점맹과 지체장애가 있는 ‘최다원’ 씨와 인터뷰 후 쓴 소설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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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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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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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양서토

    "내 예쁜 얼굴을 보고 거울은 점점 예뻐져, 딱딱해져."

    • 2024-06-09 12:44:33
    양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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