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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1,898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해?


   난 나무를 못 봐.

   난 나무를 몰라.


   난 나무를 정말 모르는 걸까?


   난 나무를 정말 못 보는 걸까?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날 나무에게 데려갔어. 내게 나무를 만지게 했어. 줄기, 나뭇가지, 잎. 


   나무는 재미없어.

   나무는 말을 못 해. 

   나무는 빨간색이 아니야. 


   “날 나무에게 데려가지 마.”


   난 나무를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오직 하나. 


        

   8 


   “모습이 그려져.”


   그녀 앞에 놓여 있는 작은 돌.


   섬.


   “가지 마.”


   “아직 가지 마······.”



   9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난 내 얼굴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이 가장 예쁘다는 걸 알아.

   내 얼굴에서 가장 예쁜 데는 눈. 

   내 눈은 반달.   


   어릴 때 내 손가락이 자꾸 내 눈을 찔렀어. 엄마가 내 손에 장난감 수갑을 채웠어. 손가락이 자꾸 눈을 찌르면 눈이 꺼지니까.


   내 예쁜 얼굴이 보고 싶지는 않아. 

   거울이 내 얼굴을 봐. 

   내 예쁜 얼굴을 보고 거울은 점점 예뻐져, 딱딱해져.


   “아, 나는 내가 너무 좋아.”


   “아, 나는 내가 가장 좋아.” 


   “아, 나는 나를 너무 좋아해.”


   심장도 빨간색.


   빨간 집을 그리고 나서, 나는 화가가 되려는 꿈을 버렸어. 

   나는 스무 살이 되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로 스무 살이 됐어.



   10


   지금은 내가 가장 좋진 않아.

   내가 싫은 건 아니야. 

   내가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아. 


   자주 머리가 아파, 어지러워.  


   긴 낮. 

   그보다 긴 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새벽 3시, 아빠가 출근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잠들지 못할 때도 있어. 


   안 돼, 안 돼······.


   스무 살이 되고,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말이 안 나와. 내가 너무 좋다는 말이 안 나와요.



   11


   “나는 나가고 싶어.”


   “나는 나가고 싶어.”


   (그녀의 등 뒤 문이 열린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노래는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여.”


   “노래는 보라고 하지 않아.”



   12


   난 날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난 날 아무 곳으로도 데려가지 못해. 


   새처럼.



   13


   모습이 그려져.


   모습이 그려진다는 게 뭔지 몰라, 몰라.


   숲에 가고 싶지 않아. 

   숲에서 내가 뭘 해? 


   다른 집에 가고 싶어. 


   다른 집에는 사람들이 있어. 


   다른 집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는 얘기를 나눌 거야. 


   “사람은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 



   14


   스무 살이 되고, 불편한 내 몸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내 몸이 싫은 건 아니야.

   난 춤을 추고 싶어.


   아무도 원망하지는 않아. 


   내가 슬퍼······. 


   슬픔이 오면 그냥······ 그냥······.


   열여덟 살 때부터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어. 


   슬프다는 감정이 자주, 문득 와. 


   슬픔이 오면 그냥······ 그냥······.


   나는 설레고 싶은데, 날 설레게 하는 게 없어.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15


   슬픔이 깊어져······.


   오직 사랑.


   사랑을 하고 싶은데 못 하니까.


   나는 사랑이 하고 싶은데······. 


   나는 사랑을 해야 하는데······. 


   노래를 들어 주고, 노래를 불러 주고, 함께 노래를 듣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노래, 노래, 노래······ 그게 사랑.


   (그녀의 얼굴에서 터지는 웃음)


   잘생긴 남자하고 사랑이 하고 싶어. 

   목소리가 잘생긴 남자가 잘생긴 남자. 중저음에, 부드럽고, 달달하고······ 노래를 잘해야 해.    


   사랑은 날 설레게 해.


   (그녀의 얼굴에서 터져 넘치는 웃음)


   “아, 목소리가 너무 좋아.”



   16


   나는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아야 해.



   17


   “나는 기다려.”


   빨간색, 심장, 태양, 열정—.

   달이나 별은 모르겠어.


   누가 날 찾아왔으면······.


   스무 살이 되고, 기다림이 시작됐어. 



   18


   나는 밤보다 낮이 좋아.

   낮에는 빛이 있어.

   낮에는 손님은 와.


   밤이 되면 손님이 가버려.


   나는 손님을 기다려.


   아무도 안 와.

   아무도 안 와.


   “나는 그냥 앉아 있어.”



   19


   그렇게 밤이 오고, 


   나는 내 방에 거울처럼 딱딱하게 고여 있어요.


   딱딱하게, 딱딱하게,

   세상에 바람이 불어. 


   나무, 벽, 굴뚝, 버스, 의자, 신발, 사다리, 자전거······ 내가 본 적 없는 것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


   노래를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바람은 내 방에도 불어. 

   바람이 날 흔들어.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출렁여.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가라앉아. 


   내 얼굴은 거울이 돼. 


   그리고 문이 열려.


   내 얼굴에 엄마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봐.


   내 얼굴에 동생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비춰 봐.


   내 얼굴에 아빠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봐.


   그리고 문이 닫혀.


   고요한 밤.

   우울한 밤.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거울보다 더 딱딱해져.



   20


   나는 바다 앞에 누워 있어.   


   나는 바다보다 커.


   나는 바다보다 깊어.



   21


   “만지고 싶지 않아.”


   “안 아파.”


   “두렵지 않아.”


   “내게 보이지 않는 걸 만지는 게 두렵지 않아.”



   22


   날다? 


   날아가다?


   날아가는 소리는 알아.


   “그리워.”


   “사람이 그리워.”


   “나와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

 


   23


   바다에는 바다만 있어.


   바다는 색깔이 없어.

   바다는 모습이 없어.

   바다에는 소리들이 있지만 노랫말이 없는 소리들이야.


   바다에는 빛이 있어.


   엄마는 날 바다에 데려가고 싶어 해. 

   바다에 날 띄우고 싶어 해. 


   바다는 날 만져. 

   바다는 날 보지 못해. 


   24


   내가 아기 때, 

   빛조차도 못 볼 때, 

   밤에도 눈을 감으려 하지 않았대. 


   아무도  


   나는 눈을 감아.


   눈을 감는다는 건 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보고 싶지 않다는 건 뭘까?


   보고 싶다는 걸 뭘까?


   “내 마음을 받아 주세요.”


   보고 싶었어. 


   보면 심장이 뛰었어.


   열다섯 살에 처음 사랑을 했어. 짝사랑이었어. 한국사와 사회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어. 선생님을 보면 심장이 뛰었어.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학교에 가는 게 즐거웠어요.

   선생님이 아프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 

   공개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고백했어. 

   “내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 마음을 받아 주세요.” 


   스무 살이 되면 사랑을 할 줄 알았어. 



   25


   그녀 앞에 굽은 강처럼 놓인 나뭇가지.


   “노래는 내게 보라고 하지 않아요.” 


   나뭇가지는 흐른다,

   흐르다,

   그녀 앞으로 되돌아온다. 



   26


   나는 노래를 좋아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노랫말이 있는 노래. 

   듣기만 해야 하는 음악 싫어. 


   노래는 만지지 않아도 느껴져요.


   슬픈 노래는 날 울려, 슬픈 영화는 날 울리지 않아.  

 

   사랑은 오지 않고, 

   하루가 와,

   매일이 와, 

   인생이 와.


   내 인생이 와.


   보이지 않아, 만져지지 않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 



   27


   나는 바다 앞에 누워 있어.


   나는 바다보다 높이 있어.


   나는 바다보다 멀리 있어.


   멀리······.


   그만큼 


   가까이······. 


   보고 싶다는 갈망이 없었어. 보는 게 뭔지 모르니까······ 보인다는 게 뭔지 모르니까······ 모르면서······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나는 스무 살. 


   보고 싶어······.



   28

 

   내가 빨간 크레파스로 그린 집에는 빨간 심장이 있어. 

   창문도, 문도, 지붕도 없지만 

   내 빨간 심장이 빨갛게, 빨갛게 넘쳐나.


   빨갛게, 빨갛게,

   빨간 심장이 넘쳐나 빨간 집이 돼.


   내 빨간 심장이 뛰어, 빨간 집이 뛰어.


   빨간 집은 비를 맞아도 빨개.

   빨간 집은 눈을 맞아도 빨개.


   빨간 집은 꺼지지 않아,

   차가워지지 않아. 


   빨간 집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빨개져.

   빨간 집에 다녀가는 나비들이 빨개져. 


   구름이 흐르다 빨간 집에 닿으면 빨간 심장이 돼.



   29 


   노래가 없어. 


   듣기 좋은 소리가 없어.


   나는 엄청 솔직한 여자. 

   나는 단순한 여자.

   나는 살아 있는 여자. 

   나는 노래할 줄 아는 여자.

   나는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

   나는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여자.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내 심장을 흙 위에 놓아요.

   내 심장을 나무 위에 놓아요.

   내 심장을 숲속에 놓아요.

   내 심장을 달 옆에 놓아요.


   아직 가지 마······.


   멀다는 게 뭔지 몰라, 

   가깝다는 게 뭔지 몰라. 


   나무는 그냥 멀리 있게 둬.



   30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너무 좋은데 슬플 때가 있어.


   나만 외로워.

   나만 느끼네. 

   나만 몰라.


   나만 몰라, 몰라.



   31.


   “돌은 초록색일 거야.”


   “돌의 나이는 일곱 살? 여덟 살?”


   “까끌까끌하고 삼각형이야.”


   “돌은 산에 있었어, 계곡에 있었어, 나무 밑에 있었어.”


   “누가 돌을 만들지 않을까?”


   “누가 돌을 만들었을까?”

 

   “누가 돌을 나무 밑에 가져다 놓았을까?”



   32


      (그녀의 엄마) 마음을 비워.

      (그녀) 그게 돼?

      (그녀의 엄마) 넌 집착하고, 생각하고······.



   (그녀의 오른쪽 눈에 눈물방울이 맺힌다.) 


   당신을 만나서 감사해. 그 말을 하고 싶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요.


   사랑······.



   33


   “서랍 속에 있을 거야.”


   “서랍 속에 있었어.”


   “서랍 속에 있는 거 봤는데······.”



   34. 나뭇가지


   “난 나무 막대기라고 부를래.” 


   “나뭇가지보다 나무 막대기가 어울리는 것 같아.”


   “초록색이었을 것 같아.”



      (그녀의 엄마) 비바람에 흔들리고 꺾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그녀) 난 안 아파.


      (그녀의 엄마) 난 마음이 아파.

      (그녀) 난 안 아파.




   “나무 막대기에 아무것도 앉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빈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


   “처음엔 새가 와서 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니까······.”



      (그녀의 엄마) 초록 잎이 돋아나고 꽃도 피었으면······.

      (그녀) 빈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 



   “1년 후에 나무 막대기는 없을 수도 있어. 누가 가져가서 그걸 깎아서 뭘 만들었을 수도 있어.”


   “누가 가져가서 뭘 만들려다 버렸을 수도 있어. 뭘 만들기에 나무 막대기가 너무 작으니까.”


   “난 나무 막대기 갖고 싶지 않아.”


   “내게 나무 막대기를 가지라고 하면 내 방 서랍 속에 처박아 둘 거야.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으니까.”


   “나무 막대기를 그냥 가져다 놨으면 좋겠어.” 


   “나무 막대기가 원래 있었던 곳에.”


   “나무 밑에.”


   “나무는 숲에 있어.”


   “숲은 멀어.”


   “나무는 더 멀어.”


   “나무는 집에 없어.”


   “난 숲에 가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이 나무 막대기를 가져다 놓으려 함께 숲에 가자고 하면 갈 수도 있어. 숲에 가고 싶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가자고 하면······.”



   35.


   “실은 빨간색이야.”


   “난 묶는 걸 안 해봤어.”


   봄······ 설렘······ 기쁨······ 즐거움······.


   “내 손가락들이 묶는 건 못 해도 묶여 있는 걸 풀 줄은 알아.”



   36


   노래 가사 제목은 ‘고백’이야.


   (그녀의 오른쪽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흐른다.)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난 안 아파.


   그리고 오늘 밤 나는 노래 가사를 쓸 거야.  


   오늘 밤, 그런데, 


   나는 왜 나에 대해 생각을 안 할까?



1) 선천성 점맹과 지체장애가 있는 ‘최다원’ 씨와 인터뷰 후 쓴 소설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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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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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1-01
숲 바깥쪽으로

숲 바깥쪽으로 김선재 1. 선을리가 서쪽 산의 중턱 어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출발한 지 40분 남짓 되었을 무렵이다. 섬 서쪽은 산세가 험해 동쪽보다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거길 가는 거라고 소영은 말한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확대해 선을리 근방을 훑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낯선 동리나 동산의 지명뿐이다. 선을은 식당이나 카페는커녕 편의점조차 없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위치한 모양이다. 도착하면 투어가 시작되기 전까지 고작 30여 분의 시간이 남는다는 걸 확인한 나는 맥이 빠진다. 30여 분 동안 먹을 수 있는 게 뭘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검색했던 여러 메뉴를 떠올린다. 블로그에서 본 해물찜은 재료가 실해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한치도 한창이라고 했다. 또 해풍에 말린 해초를 주재료로 한 수타 우동은 너도나도 후기를 남길 만큼 유행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지만 30분은 그런 걸 먹기에는 어림도 없는 시간일 거다. 홀쭉해진 배를 문지르며 생각한다. 메뉴를 고르는 건 고사하고 뭘 먹을 수 있기는 할까. 늦은 아침을 먹은 후로 뭘 먹은 기억이 없다. 몇 달 만에 만난 소영과 회포를 푸느라 평상시보다 늦게 잠들었다가 느지막한 시간에야 일어났다. 산책 시간도 여느 때보다 길었다. 날씨 때문이었다. 오늘은 정말 온종일 보기 드물게 시야가 좋고 바람도 잔잔한 날이다. 큰 귀를 펄럭거리며 공을 물고 해변을 뛰어다니는 마이가 너무 즐거워 보여 좀처럼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배를 좀 채워야 할 텐데. 나는 운전 중인 소영이 들을 수 있도록 전방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늦어도 30분 전까지는 입장해야 한다고 했던 거, 잊어버린 거 아니지? 소영이 상기시킨 건 리플릿에 적혀 있던 세 가지 주의사항 중 첫 번째다. 아. 나는 짧은 탄식을 터트린다. 뭘 물으면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게 그 애의 말버릇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소영의 질문은 자주 비난이나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려서 크고 작은 말다툼으로 이어지곤 했다. 네가 삐뚤어져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소영은 종종 그렇게 물었다. 기우는 햇빛이 차 안으로 쏟아진다. 상반신과 무릎 언저리가 뜨겁다. 나는 달려오는 일몰을 선바이저로 가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해안선에 늘어선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수평선이 빠르게 흘러간다. 과감한 디자인의 알록달록한 옷을 걸친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거주민과 관광객은 대개 옷차림으로 구별된다는 걸 이제 안다. 당분간 저 풍경 속에 내가 낄 일은 없을 거다. 오늘의 끼니를 고민하고 마켓에 올라오는 구인 목록을 살펴보다가 해가 질 무렵에는 마이와 함께 동쪽 해안가를 쏘다니는 게 요즘 내 일과의 대부분이다. 생존과 생활. 요즘 나는 밥그릇 앞의 마이가 그런 것처럼 무섭도록 그 단어들에 집중하며 지낸다. 투어가 끝날 즈음에는 문을 연 식당이 없을 텐데. 불안을 삼키며 소영을 흘깃거린다. 흰색 테두리의 검정 선글

  • 관리자
  •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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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양서토

    "내 예쁜 얼굴을 보고 거울은 점점 예뻐져, 딱딱해져."

    • 2024-06-09 12:44:33
    양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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