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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2,094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환자분, 요새 아무리 생존율이 높아졌어도 암이 우스우세요?” 

   물론 우습지 않았다. 암이라니. 언제부터 그런 게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지?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신오는 자기 생활을 떠올려 봤다. 술도 담배도 즐기지 않았고, 헬스는 주 3회씩 벌써 5년째 다니고 있었다. 주말에는 등산도 가끔 했다. 주중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한식 위주로 먹고 저녁은 주로 닭가슴살 샐러드를 사 먹었다. 약속이 잡히면 어쩔 수 없이 기름지고 짠 음식들을 먹었지만, 속에 부담 주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먹으려고 했다. 종종 잠을 못 잘 때가 있긴 했다. 위염에 시달리거나 몸살을 앓기도 했다. 어깨와 목이 거의 매일 뻣뻣했고 관자놀이가 당기는 편두통을 달고 살았지만,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증상이었다. 만성적인 피로는 평소에 음식을 많이 먹지 않고 운동은 꾸준히 하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활을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아마 원경과 헤어진 이후였다. 

   원경과 헤어진 후부터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신오는 전신 방사선 동위원소 검사와 그 외 입원에 필요한 여러 검사를 예약하고 병원을 나오면서 결론 내렸다. 원경과 헤어졌을 때 무언가를 예감했음에 틀림없다. 닥쳐올 미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도망치듯이 살아오지 않았나.

   원경은 신오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원경을 떠올리면 물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채워져 있는 컵이 생각났다. 원경과 처음 만났던 식당에서 원경이 컵에 물을 따라 줬을 때 신오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어떻게 물을 저렇게 깔끔하고 적당하게 따를 수 있지. 원경은 그 물컵처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신오는 원경처럼 적당한 사람을 만나 본 적 없었다. 전에 만났던 여자들 중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주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신오와 절대 같은 화장실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신오는 자신이 매우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찾기가 이토록 어렵다는 것에 매번 놀랐다. 원경은 달랐다. 원경의 상식 수준과 감수성의 정도는 신오의 신경에 거슬린 적이 없었다. 잔인한 범죄나, 특히 여자 대상 범죄 뉴스에 과하게 방어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고, 어떤 드라마나 특정 배우에 지나치게 몰입해 신오를 당황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함께 살아도 좋겠다고 신오는 생각했다. 누구를 만나면서 처음 해본 생각이었다.  

   신오는 원경과 4년을 만나고 헤어졌다. 원경과 함께 와인을 마시고 누워 서로를 조용히 더듬고 있을 때 원경이 혹시 내 가슴에서 뭐가 만져지면 알려줘, 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원경의 어머니 쪽 집안 내력이라고 했다. 유방암이. 어머니도 여러 번 재발한 유방암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그때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신오는 어쩔 수 없이 상상했다. 결혼 후 원경이 암에 걸린다.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는다. 신오는 모든 일을 제치고 병원에 있어야 할 것이다. 원경은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항암치료로 원경이 수척해진다. 신오는 원경을 돌보기 위해 요리도 배울 것이다. 몇 년간은 정기 검사를 함께 다니며 괜찮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안도한다. 그러다 다시, 이 모든 일이 반복된다면? 신오가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원경을 다시 돌볼 수 있을까? 원경의 병을 지겨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유전자 문제로 발생하는 암은 끈질기고 예후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신오는 알고 있다. 이런 상상을 해버린 이상 원경과 관계를 계속 이어 갈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 그 사람이 가지고 올 불확실한 미래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신오는 지금까지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 불가능할 것이었다. 신오는 원경과 헤어지고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삶에 집중했다. 연애도 한두 번 했지만 처음부터 언젠가 끝나겠거니 생각했고 실제로 어떻게든 끝이 왔다. 

   병원 밖은 이미 어두웠고 도로에는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붉은 후미등이 눈에 상처를 남기는 것 같아서 신오는 땅을 보고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때 원경과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우습고 근거 없는 생각이었지만 암에 걸리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원경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기는 원경 옆에서 성심껏 그를 돌보고 그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통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간극에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신오는 겸손해졌을 것이다. 자기가 그나마 건강해서 옆에서 원경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오는 집으로 돌아와 보일러를 켜는 것도 잊어버린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속으로 계속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중얼댔다. 신오의 집은 환승역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었고 재개발 논의가 몇 년째 오가는 오래된 빌라 일 층이었다. 집값의 80%까지 대출이 나오던 때였고, 몇 년 거주하다가 재개발이 되면 두 배는 너끈히 오를 것이라는 부동산 중개인의 조언에 다소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89년에 완공한 건물로 내부는 리모델링을 마친 상태였다. 변기가 자주 막히고 벌레가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어왔지만, 방 두 개가 널찍했고 안방은 빛도 잘 들었다.

   원경은 신오의 집에 살다시피 했다. 원경의 직장과 더 가깝기도 했지만 원경은 처음부터 그 집을 좋아했다. 거실에서 보이는 그늘진 공터에 있는 작은 정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쓰레기 투기를 막으려고 빌라 주인이 화단을 만들어 꽃을 심어 놓았는데 꽃이 자꾸 시들자 꽃값도 만만치 않다며 조화로 대체해 놓았다. 아예 가짜 나무와 풀까지 놓아서 그럴듯했다. 저거 가짜야, 신오의 말에 원경은 그래 보여, 라고 말했지만 거실 창 너머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이 정도의 녹음만 있어도 살 만하다고 느껴지는 게 좀 슬프다.” 

   원경은 종종 말하곤 했다. 사시사철 푸르고 화려한 색의 꽃이 핀 정원은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여름에 사라졌다. 

   신오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원경의 이름을 검색하고 괜히 화면을 툭툭 두들기다 결국 문자를 남겼다. 

   - 잘 지내?

   아무리 생각해도, 잘 지내? 라는 빤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원경에게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답이 없는 화면을 잠시 보고 있다가 신오는 습관처럼 샐러드를 배달시켰고 반도 못 먹고 버렸다. 쌉쌀하고 뻣뻣했다. 신오는 자기가 한순간도 채소를 좋아한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샐러드 용기를 헹군 뒤에는 쌓아 둔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재활용 쓰레기를 놓는 전신주 아래에서 체구가 작은 여자가 한 손으로 부지런히 핸드폰을 두드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끊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담배를 물었을 때 혀끝에 느껴지던 아린 맛과 연기를 한 모금 넘기던 순간 뻣뻣하던 근육이 살짝 풀어지는 듯한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신오는 한 골목 떨어진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사서 지금은 사라진 인공 정원이 있던 빌라 건물 사이의 공터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사람들은 거기 언제 작은 정원이 있었냐는 듯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버리고 갔다. 담배의 비닐 포장을 뜯으면서 신오는 담뱃갑에 적나라하게 인쇄된 구강암 사진을 오랫동안 봤다. 가로등 빛이 잘 들지 않았지만 거뭇한 담뱃진 같은 암세포가 뭉쳐 있는 목구멍은 지나치게 잘 보였다. 구강암이라니. 볼이나 목구멍 안에 저런 게 생기는 것보다는 배 속에 있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기껏 포장을 벗긴 담배를 꺼내지도 않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 나 운주에 있어. 

   원경의 답이었다. 운주? 신오가 되묻자 원경이 곧 답했다. 

   - 처리할 일이 있어서. 

   - 이모님 산에?

   - 응. 

   - 일은?

   - 그만뒀어. 

   - 무슨 일 있었어? 

   - 갑자기, 뭐야? 

   신오는 물론 대답할 수 없었다. 원경에게 할 말을 찾는 대신 신오는 집으로 들어가 차 키를 챙겼다. 이모님 산이라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전에 핸드폰 지도 앱에 저장해 두었다. 원경과 하룻밤 그 산에 있는 이모님의 집에서 자고 간 적 있었다. 나무와 흙으로만 만든 집이었고 언뜻 보면 버섯처럼 생긴 황토 찜질방도 따로 있었다. 원경은 허리가 아플 때 버섯방에 누워 있다 오면 가뿐해진다고 말하곤 했다. 신오는 그 무렵 자다가 종아리에 쥐가 나서 깨는 일이 많았다. 병원에 가도 스트레스가 많으면 그럴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약도 먹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소용없었다. 원경은 신오가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버섯방에 다녀오면 나을 거야, 라고, 마치 이상한 종교에 빠진 신도처럼 말했다. 

   거짓말처럼 신오는 그 버섯 방에서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 아침에 늘 무겁고 뻣뻣하던 다리가 가뿐하기까지 했지만 원경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눈곱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눈가를 비비며 신오는 평소와 별 다를 바 없었다고 투덜댔다. 신오는 그 방도 이모님도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나이에 산에서 혼자 사는 것을 보면 분명 외로움과 아집이 굳은살처럼 생활 전반에 박혀 있는 사람일 터였다. 원경이 이모에게 느끼는 친밀함에는 다소 과한 구석이 있었지만 자주 보지도 않는 친척 어른에 대한 감정쯤 너그럽게 넘어갈 아량 정도는 신오에게도 있었다. 

   원경과 운주로 내려가는 길에 신오가 이모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었을 때 원경은 내 편이면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이모님은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삼십 년 동안 일했고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유산으로 연고도 없는 지방의 산 한 채를 물려받은 뒤 정년퇴임 후 산자락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원경은 이모가 여자고, 그리고 딸린 식구도 없는 막내여서 재산 가치도 거의 없고 아무도 탐내지 않는 산을 떠맡게 된 것이라고 했다. 남자 형제들은 외할아버지가 평생 정육점을 해서 마련한 지방의 상가 건물 한 채를 나눠 가졌고 큰이모와 원경의 어머니에게는 각각 고향의 땅과 집이 돌아갔다. 홀몸이고 막내인 이모에게는 빈 암자가 딸린 선산뿐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먼 친척 가문의 묘가 있는 산이라고 했다. 신오가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고, 요새는 유산으로 소송도 많이 하던데, 라고 말하자 원경은 이게 이모의 복수야, 라고 말했다. 

   “지기한테 쓰레기처럼 버려진 산에 이렇게 멋진 집을 지어버린 거. 가족들이 여길 어떻게 오겠어.”

   신오와 원경이 도착했을 때 이모님은 손에 돌을 든 채 그들을 맞았다. 신오가 막연히 상상했던 모습보다 젊었고, 바빠 보였다. 산 풍경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여러 감정을 곱씹거나, 혹은 누군가를 저주하며 보내는 지친 표정의 노인을 떠올렸는데, 이모님은 그해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무너진 축대를 보수하느라 그들과 잠시 앉아 있을 새도 없이 일해야 했고 저녁은 시켜 먹자고 말했다. 배달이 와요? 신오가 묻자 이모님은 웃으며, 우리나라에서 중국집 배달이 안 되는 데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닐 거라고 했다. 그 집에서 보낸 하루는 신오의 예상과 달리 꽤 좋은 기억이었다. 원경에게 끝내 다음에 또 가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의 친척 어른까지 챙길 이유는 없었으니까.


   신오는 새벽녘에 이모님 집 앞 마당에 도착했다. 어스름하게 익숙한 축대가 보였다. 집은 축대 위에 있었지만 어두워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 너머 산은 깊이 도려낸 것처럼 밤보다 검었다.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해 뜰 무렵 신오는 원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 나 이모님 댁 앞이야. 

   빛이 차오르기도 전에 산 그림자가 덮쳐왔다. 신오는 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렸다. 서서히 드러나는 햇볕 아래 기억 속에 있던 그 집을 바라보려고 했다. 버섯 모양의 황토 가마방과 통나무로 뼈대를 쌓은 본채를. 신오는 눈을 다시 비볐다. 해는 완전히 떠올랐고 공기는 축축했으며 그림자는 벌써 깊었다. 그리고 축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오는 간밤에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생각해 봤지만, 잘 닦아 놓은 마당과 축대는 그대로였다. 집을 둘러싸고 있던 무성한 소나무도 살점 한 점 없이 발라 놓은 생선 가시처럼 말라 있었다. 신오는 눈을 끔뻑이며 깨끗하게 사라진 이모님의 집터와 까맣게 변한 산을 한참 더 바라봤다. 바람에 매캐한 냄새가 실려 왔고 눈이 따가웠다. 자기도 모르게 고인 눈물을 닦는데 원경에게서 답장이 왔다.

   - 그럼 온 김에 일이나 도와. 

   원경은 두어 시간 후에 이모네 집 마당으로 가겠다고 했다. 신오는 다시 차에 올라 졸다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원경과 이모님 그리고 처음 보는 이모님 또래 여성분이 형광색 등산복을 입고 신오의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밝은 색 옷 때문인지, 해가 내리쬐고 있기 때문인지 신오는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신오는 차에서 내려서 이모님께 인사했다. 

  “여기는 보살님.”

 이모님이 옆에 있던 여성분을 가리켰다. 보살님은 아무 말도 없이 웃어 보였다. 얼굴에 웃음이 주름으로 굳어진 것 같은 분이었다. 이모님은 살이 왜 빠졌냐고 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을 던지고 어서 산에 오르자고 재촉했다. 원경은 신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심상하고 간단한 인사였다. 

   신오는 오 년 만에 만난 원경과 그보다 더 오랜만에 만난 이모님과 처음 본 보살님과 함께 불이 휩쓸고 지나간 산에 올라 그을린 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이모님과 보살님과 원경은 매일 산에 올라 남은 불씨는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남아 있으면 산불이 다시 번질 수도 있다고, 그사이 눈도 비도 오지 않아 나무들은 여전히 타기 좋은 상태일 것이라고 했다. 2차 산불은 항상 규모도 피해도 더 커지는 법이라고 이모님이 말했다.

   “원래 한 번 당하면 두 번 당하기는 쉽지.”

   보살님은 옆에서 고개를 지나치게 열심히 끄덕였다.  

   “집은 다 탔어요?”

   신오가 묻자 이모님은 한숨을 쉬었다. 

   “홀라당 탔지. 나무랑 흙이었잖아, 애초에.” 

   “지금 어디서 지내세요?”

   “근처 마을에 세놓는 집이 있어서 거기 들어와 있어. 군식구들이 좀 많지만.” 

   이모님의 말에 원경이 우리도 돈 내잖아, 대꾸했고 그들은 같이 웃었다. 

   하늘은 맑았다. 검게 마른 나무들이 푸른 하늘을 겨우 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을이나 초겨울 무렵 산불이 종종 발생하는 지역이긴 했지만 이 작은 산까지 불길이 닿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모님과 보살님이 신오와 원경보다 빠르게 산을 올랐다. 신오와 원경은 그 뒤를 쫓아 길도 없는 등성이를 올랐다. 가끔 형체가 불분명한 검은 뭉치들이 발끝에 차였다. 신오가 혹시 몰라 한 번 더 밟으려고 하자 원경이 신오의 어깨를 자연스레 만지며 말했다. 새나 청설모 같은 동물들 사체일지도 몰라. 

   “저렇게 까맣게 오그라들 때까지 얼마나 뜨거웠으려나.”

   신오의 말에 원경이 신오를 보며 입 꼬리만 살짝 끌어올려 웃었다. 신오에게 너무 익숙한 표정이었다. 기특한 말을 다 한다는, 그런 표정. 신오는 다시 원경과 서로 부드러운 몸짓을 주고받고 싶었다. 그때보다 얼굴이 조금 더 둥글어진 얼굴로 변함없이 웃는 원경을 보니, 신오는 여기까지 원경을 찾아와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5년 전에 자신이 왜 원경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는지 이야기하고 사과해야 했다. 원경의 말에서 시작된 상상까지 모조리 토로해야 했다. 원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그때 내가 오만하게 굴어서 지금 벌을 받은 것 같다고. 그때 내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너무 겁을 먹어서 모든 걸 망친 것 같다고. 신오는 숨을 몰아쉬면서 자기보다 앞서가는 원경의 등을 봤다. 허리가 조금 길긴 했지만 원경은 항상 자세가 곧았다. 그 점도 좋아했는데. 원경이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불면서 잿가루 같은 검은 흙이 흩날렸다. 

   이모님과 보살님이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물을 마시며 뒤처진 원경과 신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오도 이모님 옆에 주저앉아 물을 나눠 마시고 이모님이 건네는 초콜릿 바도 까먹었다. 신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이모님은 너는 어째 그때보다 몸이 안 좋아졌니, 하고 말했고 신오는 헬스를 주 3회씩 하고 등산도 가끔 간다고 변명하듯 대답했다. 원경은 나무에 등을 기대선 채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불길이 이렇게 갔네.” 

   원경이 손을 휘저어 보였다. 중턱쯤 올라오니 곳곳에 살아남은 나무들이 보였다. 불에 전소된 나무들과 앞면만 그을린 나무들 그리고 멀쩡한 나무들 사이에 어떤 선이 그려지는 듯했다. 

   “저쪽으로 소나무 군락을 따라서 이렇게 돌아서 암자까지 덮친 거지.”

   이모님이 말했다. 

   “참나무를 심어야 한대요. 소나무는 빨리 타서.” 

   원경이 말했다. 

   “소나무는 바로 푸르니까 나라에서도 소나무만 심더라. 근데 이제 뭘 심니. 그냥 두면 나무 탄 재가 토양에 영양을 줘서 다른 나무들이 알아서 자란다더라.”

   “어느 세월에?”

   “한 20년 후쯤?”

   “이모는 20년 후가 상상이 돼요? 난 안 되는데.” 

   “내가 있고 없고가 뭐 중요해. 나무들은 알아서 자랄 텐데. 나무 심으라고 정부에서 돈 주니까 탄 나무 멀쩡한 나무 상관없이 몽땅 베어버린다더라.”

   “이모는 그럼 그 돈 안 받을 거예요?”

   “봐서.”

   이모님은 보살님을 보며 웃었다. 보살님도 마주 웃었다. 이모님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들은 바닥을 발로 자근자근 밟아 가며 불에 탄 소나무 숲을 따라 암자에 도착했다. 암자는 완전히 타서 돌로 만든 반석과 터만 남아 있었다. 암자 앞의 너른 마당에 군데군데 좁고 깊게 팬 구덩이와 흙더미가 보였다. 멧돼지인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 삽과 목장갑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일꾼 하나 늘었으니 좀 더 해볼까?”

   보살님과 이모님은 익숙하게 장갑을 낀 뒤 삽을 하나씩 나눠 들고 번갈아 흙을 파기 시작했다. 원경이 주머니에서 신오에게 장갑을 건네주며 말했다. 시내에 있는 철물점까지 가서 사 온 거야. 유달리 붉어 보이는 목장갑을 끼면서 신오는 고맙다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원경은 남은 삽은 하나밖에 없으니 자기가 먼저 파겠다고 했다.

  “삽질 할 때 돌이 제일 거슬려. 옆에서 돌 좀 미리 골라줘.”

  그리고 원경은 익숙한 자세로 삽질을 시작했다. 신오는 쪼그리고 앉아 삽 끝에 돌이 틱틱 부딪칠 때마다 손으로 흙을 파내고 돌을 뽑았다.

   “뭐, 묻을 게 많으신가? 김장철도 아닌데······.”

   신오가 원경에게 묻자 이모님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 묻을까 봐 겁나?”

   “저요?”

   “네가 찼다며. 우리 원경이.”

   신오는 네, 그랬죠, 하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유도 말하려고 했다. 제가 그래서 벌 받았나 봐요. 저, 실은 조금 어려운 암에 걸렸어요. 고통만 받다 죽을 수도 있어요. 

   “이모, 그런 거 아니야.”

   원경이 말했다. 원경은 신오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살님은 비구니 스님만 있던 암자의 유일한 신자였다고 했다. 비구니 스님은 종단에 소속된 스님은 아니었고 버려진 절에 언젠가부터 들어와서 살기 시작해서 그렇게 부른다고들 했다. 처음에 절에 들어왔을 때는 반짝이는 옷에 금목걸이와 진주 귀걸이를 차고 왔는데 어느 날부터 머리도 깎고 승복 비슷한 쥐색 생활 한복을 입고 빈 암자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보살님은 거길 어떻게 알고 찾아갔냐고 물으니, 원경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크게 얘기해도 괜찮아. 이모님이 말했다. 그래도 원경은 속삭이듯 말했다. 

   “실은, 그 비구니 스님 남편이 보살님 남편 돈을 크게 떼어먹고 감옥에 갔던 사람이래. 돈은 이미 감춰 둬서 하나도 못 받았나 봐. 무슨 투자 전문가라고 하고 유령 회사를 만들어서 사기를 크게 쳤나 봐. 보살님이 오랫동안 추적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그리고 그냥 절에 온 척하면서 비구니 스님이 혼자 어떻게 먹고사나 본 거지. 분명히 숨겨 둔 돈이 있을 텐데 하고.” 

   원경이 삽을 놓고 땀을 닦았다. 말까지 하려니 숨이 찬 것 같았다. 신오가 원경이 내려놓은 삽을 들고 이어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근데 땅은 왜······.”

   “보살님이 보셨대. 땅에 금괴를 묻는 거.” 

   “금괴?”

   “골드바. 금. 팔뚝만 했대 사람이 자꾸 찾아오니까 불안해서 금을 묻었나 봐.”

   “그 비구니 스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데?”

   “화재 때 돌아가셨어.”

   “근데 이렇게 구멍을 팠는데도 못 찾았어?”

   “암자가 불에 타고 나니까 어디쯤인지조차 모르겠다고 하셔서. 그냥 파보고 있어. 금괴 나오면 우리도 좀 나눠 주신다고 하셨거든.”

   “오늘 찾으면 보살님이 너도 하나 주신단다.”

   이모님이 외쳤다. 

   땅에는 돌말고도 자잘한 뿌리들이 많았다. 산불이 뿌리까지 태우지는 못한 것 같았다. 삽을 찔러 넣을 때마다 무언가에 걸려서 팔이 징징 울렸다. 금세 관자놀이부터 땀이 고였다. 신오는 입고 있던 패딩을 벗었다. 헬스장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상체는 자신 있었는데 팔이 벌써 떨리고 있었다. 바람이 지치지 않고 불어와 먼지와 재가 날렸다. 입안이 텁텁해져 신오는 침을 길게 삼켰다. 회사에서도 입이 자주 말랐던 일이 불길하게 떠올랐다. 갈증도 병의 전조 증상이었을까. 원경은 계속 말했다.

   “우리 이모는 스파이였어. 보살님이 보니까 암자에서 산 밑으로 내려가려면 제일 빠른 길이 이모님 집 앞을 지나게 되어 있더래. 보살님 생각에 남의 돈을 거저먹고도 뻔뻔하게 잘사는 사람이 가장 빠른 길을 두고 굳이 멀리 돌아서 산을 내려올 것 같지 않아서 우리 이모한테 부탁했다는 거야. 비구니 스님이 산에서 내려가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암자로 올라가는 것 같으면 연락 달라고. 우리 이모 간호사였으니까 기록은 또 전문 분야잖아.”

   “너는 근데 여기 왜 있어?”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인데.”

   신오는 삽질을 멈췄다. 신오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때, 가슴을 만지다가 뭐가 만져지면 꼭 말해 달라고 하던 원경의 말, 그 말에서 시작된 상상, 도망치고 싶었던 미래, 그리고 지금 우습게도 그 미래에 도달한 자기. 신오는 다시 침을 삼키고 말을 시작했다.

   “나 사실 좀 아팠거든. 말기 암이었어. 오 년 생존율이 10%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보다시피, 살아남았어. 어제 정기검진 다녀왔는데 깨끗하대. 너 생각이 제일 먼저 나더라.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을 끊었잖아. 꼭 다시 제대로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어.”

   주위가 조용했다. 신오는 자기가 금세 들통 날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원경이 어쩌면 지난 5년간 신오의 소식을 전해 듣거나 신오의 메신저 프로필을 확인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신오는 그저 파놓은 구덩이만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벌레들이 부지런히 기어오르고 흙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줄기는 타버려서 무엇과 연결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무성한 뿌리들이 너울거렸다. 

   “이제 괜찮은 거 맞아?”

   원경이 속삭이듯 물었다. 신오는 여전히 구덩이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과까지 해.” 

   원경은 잠시 발로 땅을 툭툭 찼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때 네가 애기 안 했으면 내가 했을 거야. 내가 맨날 너네 집에 갔잖아.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왜 항상 내가 너네 집에 가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 너 네가 보고 싶던 영화 보면 그 영화 얘기만 계속하고 내가 보고 싶다고 하던 영화 보면 끝나고 맨날 딴 애기만 했던 거 알아? 그런 것들이 점점 거슬렸어. 문자 하나 남기고 갑자기 연락이 안 되니까 처음에는 황당하긴 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뭐, 이렇게 끝내도 되겠다 싶더라. 같이 있으면 편했지만 떨어져 있다고 불편하진 않았으니까. 네가 그렇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개미떼들이 구덩이에서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신오는 생각해 보려고 했다. 원경과 보냈던 시간들 중 어느 순간에서 원경이 멀어지고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오는 원경과 있던 모든 순간이 좋았다. 원경과 영화 취향은 달랐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원경의 집은 원룸이었고 신오의 집은 그래도 거실과 방이 분리되어 있는 진짜 집이었으니 원경이 항상 자기 집으로 오는 것에 아무 생각 없었다. 신오는 자신이 우스웠다. 내심 신오의 고백을 들은 원경이 자기가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해 주길 바랐었나? 

   원경이 말없는 신오를 힐끗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네가 아픈 걸 알았다면 네 옆에 있었을 거야. 나는 아픈 게 어떤 건지 아니까. 아픈 사람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인내가 필요하니까.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우리 엄마도 큰이모도 유방암으로 돌아가셨잖아. 근데 나한테는 그 돌연변이 유전자가 없대. 회사 건강검진 항목에 유전자 검사가 있길래 받아 봤더니 그러더라. 그때 이모가 항암 중이었는데 나 그냥 회사 그만두고 여기로 내려왔어. 어차피 오래 못 다닐 곳이었고, 이모도 돌볼 겸. 이상하게 나만 그 유전자가 없는 게 빚진 기분이더라.”

   신오는 원경의 말을 믿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신오가 실은 바로 어제 진단을 받았다고. 이미 전이까지 되어 손쓸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면 원경은 신오를 기꺼이 돌봐줄지도 몰랐다. 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원경이 신오와 달리 결코 도망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어?”

   이모님 목소리였다. 원경이 이모님 쪽을 돌아보며, 금 나왔어? 묻자 보살님이 다급히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신오와 원경이 이모님과 보살님이 파던 구덩이 쪽으로 갔다. 꽤 깊게 파진 구덩이 바닥에 흰 막대 같은 것이 빠져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끝이 뭉툭한 뼈 같았다. 

   “사람일까요?” 

   신오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덩이를 더 넓게 파내려갔다. 이모님과 보살님이 한 조처럼 번갈아 삽질을 해가며 한쪽을 넓혀 가고 신오와 원경이 다른 쪽을 파내려갔다. 이번에도 이모님과 보살님 쪽에서 누구의 목소린지 모를 신음이 들렸다. 아니, 이게······. 그때 신오의 삽 끝에도 무언가 텅, 하고 단단한 게 걸렸다. 순간, 흙이 우수수 무너지면서 굵고 가는 뼈들이 넓은 구덩이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라기에는 크고 둥근 갈비뼈들과 이빨이 남아 있는 긴 턱뼈, 그리고 아주 가는 꼬리뼈를 분간할 수 있었다. 누군가 하늘에서 쏟아부은 것처럼 제멋대로 흐트러진 뼈 조각들을 보고 형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멸종한 원시 동물의 잔해 같기도 했다. 

   “돼지인가 보다.” 

   이모님의 말이었다. 

   “이 근처에 돼지 농가가 꽤 있으니까. 구제역 때 살처분했나 보네.” 

   “이렇게 많이요?”

   원경이 물음에 보살님이 합장을 했다.  

   “가여워라.” 

   “부러 절 근처에 묻어 줬으려나.” 

   이모님과 보살님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원경도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신오는 눈을 감지 않았고 손을 모으지도 않았다. 똑바로 보고 싶었다. 저 희고 빛나는 뼈들을. 이모님과 보살님과 원경은 구덩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오는 구덩이에 끌려 들어갈 것처럼 몸을 기울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신오는 이 여자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자기는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신오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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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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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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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나의 힘 문진영 침대에서 겨우 빠져나와 커튼을 걷자 어슴푸레한 빛이 방 안에 드리운다. 고양이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는 사뿐히 침대 아래로 뛰어내린다. 나는 거실로 나가 이번에는 소파에 드러눕는다. 고양이는 곧바로 내 가슴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엎드리더니 골골거리기 시작한다. 소리들이 들려온다. 근처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 아랫집 세탁기가 웅, 웅, 하고 돌아가는 소리. 지금 나는 평화로운가. 권태로운가. 판단하지 못하겠다. 주영은 두 달째 부재중이다. 어젯밤 주영의 책상 앞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구석에 놓인 일력이 주영이 떠난 날짜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일의 날짜와 요일, 그리고 문장 하나가 적혀 있는 일력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 장 한 장 뜯어내기 시작했다. 거기 적힌 문장을 읽고, 종이를 구겨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 구기지 못하고 한참 동안 들여다본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의 탄생은 슬픔의 탄생이다. 장자의 말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 문장에 나는 온 마음으로 동의했다. 과연, 나는 한 시절을 사람의 모양을 한 슬픔과 함께 살았으니까. 그렇다면 잔디는? 한때 우리 — 주영과 나 — 는 잔디가 고양이의 몸을 가진 기쁨 그 자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아니었다. 잔디도 슬픔이었다. 잔디는 함부로 만지는 걸 싫어했다. 여간해선 울지 않았고 골골거리지도 않았다. 말이 쓸데없이 많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 몸을 비비고, 시도 때도 없이 꾹꾹이를 하는 이 작은 얼룩 고양이는 아직 이름이 없다. 나는 천천히 녀석을 쓰다듬는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너도 슬픔이구나. 너를 슬픔이라고 부를까. * 엄청 웃기는 꿈을 꿨어. 그날 아침 샤워 부스에서 나온 주영이 수건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뭐가 웃겼는데? 내 물음에 주영이 기억 안 나,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꿈속에서 깔깔 웃다가 잠에서 깼는데, 실제로도 소리 내서 웃고 있었다고 주영은 말했다. 그렇다는 걸 깨닫는 순간 섬뜩했고 기분이 나빴는데, 언제인지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고. 그런데 막상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불쾌한 기분보다는 그 꿈이 정말로 웃겼다는 것,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진심으로 깔깔 웃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고 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음. 내 생각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데. 네 뇌가 너를 보호······ 주영은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켰다. 내 말끝은 드라이어의 소음 속으로 순식간에 휘말려 들어갔다. 듣기 싫다는 뜻. 주영은 내가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되는 일에 꼭 의견을 덧붙이고 가르치려 든다고 힐난하곤 했다. 나도 그게 좋지 않은 버릇이라는 걸 알았지만 잘 고쳐지지

  • 관리자
  •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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