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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평온한 식사

  • 작성일 2013-12-01
  • 조회수 1,684

 

 

평온한 식사

 

 

이재웅

 


 

 

 

삽화_평온한식사

 

 

   1.

    대성아파트 102동 엘리베이터에, 하루는 새로운 공고문이 붙었다. 그 공고문은 관리사무소에서 붙여 놓은 것으로, 아파트 후문 쓰레기 처리 및 주변 미화작업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아파트 주민은 몇 월 며칠 아침 9시까지 관리사무소 앞으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대상 20세 이상 55세 이하 신체 건강한 남성. 당일 선착순 10명. 8만 원 지급. 사전 문의는 관리사무소 이경찬, 대성아파트 발전위원회 위원장 홍창일.
    승재는 엘리베이터가 8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무단쓰레기 투기자를 신고 조치하겠다는 경고문과 가을 천일염을 구입할 분의 문의를 받는다는 안내문 사이에 부착된 그 공고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8층에서 내릴 때, 공고문 하단에 칼로 구획 지어 놓은 쪽 하나를 뜯어 손에 쥐었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803호로 갔다. 거실에 서서 관리사무소 이경찬에게 전화를 넣었다.
    “몇 사람이나 모였어요?”
    “모르지요. 당일 선착순이라고 돼 있잖아요. 저한테 전화해 온 사람은 네 사람이네요. 위원장님한테도 몇 사람 전화했겠지요.”
    “몇 시까지 일해요?”
    “예정된 것은 여섯 시까지예요. 그런데 위원장님이 관리감독해요. 그 양반 맘이지요. 점심은 따로 안 드려요. 자비로 사먹어야 됩니다.”
    “무슨 일 하는 거예요?”
    “공고문에 나와 있잖아요.”
    “그게 구체적이지가 않아서.”
    “아파트 후문 공터에 무단으로 투기된 쓰레기 아시죠? 그거 치우는 거예요. 그리고 지난 장마 때 후문 배수구가 막힌 것도 들어내야 하구요. 다른 작업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그리 대수로울 것이 없어요.”
    “8만 원은 그날 바로 주나요?”
    “그럼요. 일 끝나면 저희가 바로 드릴 거예요.”
    통화는 몇 분 만에 끝났다. 승재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그는 38살의 실업자였다. 대학 졸업 후 28살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총 여섯 번 이직을 했다. 그것은 노동 시간이 너무 많거나 노동 강도가 높거나 월급이 적거나 했기 때문이었다. 비전이나 인간관계의 불협화음 같은 것도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다닌 직장은 작은 구두공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사무원 겸 영업판매원으로 일했는데, 1년 2개월이었고,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평균연봉보다 천 이백만 원이 적은 연봉을 받았다. 담배가 늘었고, 퇴사하기 두 달 전에 위염 진단을 받았다.
    그는 착실히 돈을 모아 왔다. 그래서 통장에는 아직 6백여만 원의 돈이 있었다. 하지만 6개월여를 쉬는 동안 700여만 원이 줄었고, 그는 과거에 비해 생기를 잃은 육체적 상태와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2.

 

    그는 이틀 후 아침 8시 10분에 집을 나섰다. 여름 햇볕은 뜨거웠다. 밤새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주차장의 차들은 거의 빠져나갔고, 몇몇 사람은 출근을 위해 막 차문을 열거나 운전석에 올라앉고 있었다. 놀이터 앞 보도블록 위에는 고추가 널린 돗자리가 놓여 있었다. 그 옆 벤치에는 노파가 앉아 있었다. 일상적인 아침이었다.
    그는 관리사무소로 갔다. 관리사무소의 문은 닫혀 있었다. 그보다 먼저 도착한 사내들은,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아직 문도 열지 않은 관리사무소 앞 화단 쪽에 일렬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군가는 화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웠다. 누군가는 보도블록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아 주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맨 앞줄의 사내는 쉰 중반쯤으로, 배가 나온 작은 체구에 우둔한 인상이었다. 그는 피곤을 달래려는 듯 화단에 기대어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승재는 아홉 번째였다.
    승재가 다가가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승재는 대성아파트 102동에서 3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낯익은 얼굴은 없었다. 승재는 키가 작고 몸이 부은 듯 살이 찌고, 큰 얼굴에 수염이 거칠게 자란 사내 옆으로 갔다. 그리고 조용히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 있자니 배급소 앞에 줄을 서 있는 빈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몇 분쯤 지나서, 두 명의 청년이 승재 뒷순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104동 쪽에서 주차장을 가로질러 왔는데, 둘 다 건장한 체격이었고, 한 명은 헐렁한 트렁크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며 한 명은 역시 헐렁한 트렁크 셔츠에 칠부 바지,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들은 줄 가까이 와서는 잠시 쭈뼛거렸다. 그러더니 한 청년이 눈으로 줄 맨 앞부터 승재까지 한 사람씩 세어 갔다.
    “아홉 명인데?”
    그는 다른 청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다른 청년 역시도 입을 미세하게 달싹거리며 눈으로 사람의 머릿수를 헤아렸다.
    “아이씨. 글렀네.”
    그는 혼잣말을 하듯 했다.
    “그냥 가자.”
    다른 청년이 말했다.
    “그래 가자.”
    다른 청년이 말했다.
    두 청년은 방향을 바꾸더니 줄에서 멀어졌다. 승재를 비롯한 아홉 명의 사내들은 그것을 무연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의 침묵에는 미세한 모욕감이 깃들어 있었다.
    두 청년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십대 후반, 아니면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키가 작았고 몸집도 지나치게 말라 있었다. 심지어 얼굴도 어린 시절 성장이 멈추어버린 것만큼 작았다. 그는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남방과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팔다리가 나무젓가락처럼 말라붙어서 네 개의 소매는 작은 바람에도 물속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마냥 퍼덕거렸다. 그는 지독한 근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렌즈가 두꺼운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렌즈의 굴곡이 심해 눈언저리 부분만 기괴하게 축소되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두 눈은 개구리눈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세상에 노출된 것이 한없이 곤혹스럽고 난처하다는 듯 얼굴은 극도의 수치에 사로잡힌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가끔씩 오른손으로 오른쪽 눈썹 위를 긁어댔다.
    그는 그 상태로 어떤 위협적이고 무서운 대상에게 다가서는 것처럼 심하게 쭈뼛거리고 눈치를 보면서 승재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쪼그려 앉더니,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고개를 길게 늘어뜨린 채 보도블록만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아홉 시가 가까워지자, 관리사무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의 수는 급격히 많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두 청년이 그랬듯이 줄을 지은 열 명의 주민들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다만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두 사내만은 인원 추가의 행운을 기대하며, 줄에서 조금 떨어져, 화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관리사무소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홉 시 이십 분이 되자, 대성아파트 발전위원회 위원장인 홍창일과 관리사무소 이경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재를 비롯해 줄을 지어 앉아 있던 사내들은 그제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여기에 성함하고, 주민, 계좌번호, 그리고 동호수 좀 적어 주세요.”
    이경찬은 일렬로 늘어선 사내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더니 볼펜을 나눠주고, 또 파일 하나를 화단 위에 얹어 놓으며 말했다. 열 명의 사내들이 움직였다.
    “딱 열 사람이어야 돼요?”
    열 명의 줄에 서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40대 중반 사내 중 한 명이 물었다.
    “공고문에 열 명이라고 했잖아요. 돌아가세요.”
    이경찬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두 명의 40대 중반 사내들은 멋쩍어하기도 하고, 또 마뜩찮게 이경찬을 쳐다보더니 이내 걸음을 돌렸다.
    “저것들은 공고문도 안 보나? 10명이라니께니.”
    그들이 멀어지자, 발전위원회 위원장인 홍창일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리고 열 명의 사내들에게 어떤 생색을 내듯이 “계좌번호 적으면서 내 말 들어요. 거 이번 일은 본래 외부청소업체에다가 하는 것인데, 내가 관리소장님한테 말씀을 드렸어. 아니 우리 아파트에도 일없어서 노는 사람이 천지인데, 아파트 위한 일을 꼭 밖에서 찾아야 되느냐고. 이치가 그렇지 않어요? 아파트 위허고 돈도 벌고 좋지 뭘. 요즘 노는 사람이 좀 많아야지. 여하튼 지간에 내가 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이상은 이런 일을 자꾸 만들라고 그래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알아주시고, 여름이라 날도 뜨겁지만 내 사는 아파트 위헌다 하고 내 말 좀 잘 들어주시고 그러셔요.” 하고 말했다.
    열 명의 사내들 중,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경찬이 펼쳐 놓은 파일에 자기 이름과 동호수, 그리고 계좌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나가기에 바빴다.
    기재는 몇 분 만에 끝이 났다. 그러자 이경찬은 볼펜을 거둬들이고, 파일을 접어서 손에 쥐더니 “그럼 수고들 하세요.” 하는 인사를 남기고는 관리사무소로 돌아갔다. 그제야 어수선한 분위기도 얼마쯤 가라앉았다. 홍창일은 다시 작업 설명을 했다.
    “오늘 할 일은 별것이 아니고 후문 쪽 쓰레기를 좀 싹 치워야 돼요. 거기가 본래 깨끗한 자리였거든? 근데 어떤 놈들이 거 스티커 값 몇 푼 하지도 않는 걸, 가구 갖다 버리고 상 갖다 버리고, 고장 난 라디오 갖다 버리고, 벨것을 갖다가 다 버려. 특히 후문에 상가건물 새로 지어지면서 건축폐기물까지 쌓였다니께. 여하간에 그 바람에 거기가 인자 산이 돼버맀어요. 마트 간다고 후문 왔다 갔다 한 사람들은 봤을 거여. 거 폐가 같어. 마음 같아서는 그거 휘발유 몇 통 쏟아 붓고 불이라도 확 싸질러버렸으면 좋겄는디, 그것이 또 상가랑 주택가랑 붙어 있어 갖고 안 돼야. 법이 그렇댜. 긍게 그것을 일일이 분류허고 들어 갖고 트럭으로 져 날려야 혀. 트럭은 벌써 와 있어. 또 하나 할 일은 이번 장마 때 비가 너무 많이 왔어요. 쓰레기가 썩었는디 그것이 빗물에 싹 씻긴겨. 그리 갖고 흙하고 같이 쓸려 갖고 길 옆 배수구를 다 막아버맀어. 여러분도 알지만 비 많이 오면 거기가 넘쳐요. 그리고 맑은 날에는 악취가 진동혀. 모기 새끼도 득실득실 허지. 내가 그거 동에다 말을 했거든. 그맀더니 담당자 말이 그 배수구가 정식 허가가 난 것이 아니랴. 허가도 안 났는디 아파트에서 낸 거랴. 돈도 없댜. 거 개좆같은 말을 허고 있어. 아파트에서 냈건 나라에서 냈건 국민이 필요가 있으니까 냈을 판인디 자기들이 허가 내준 것 아니라고 안 돌보면 그것이 공무원이여. 사무원이지. 돈 없다 지랄하는디 지들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가겄지. 내가 열이 뻗쳐서 관두라고 그맀어. 어디 좆같아서 말허겄어. 허긴 대통령이건 장관이건 말을 들어 처먹질 않으니 동에 저런 것들도 위세지. 여하간 그려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 합심히서 거길 좀 집중적으로 치우고, 시간이 좀 되면 아파트 주변 청소도 좀 하고 그럴 생각입니다. 시간은 여섯 시거든요. 근데 일찍 끝나면은 그냥 끝낼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내 일 아니라고 요령들 피우지 마시고 오늘 힘들 좀 쓰셔요. 그러면 설명은 여기까지 허고, 시설자재 과장한테 장갑이랑 삽을 몇 개 준비해 달라고 했거든요. 그것들 챙겨서 갑시다.”
    홍창일은 설명이 끝난 후에 승재를 비롯한 열 명의 사내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뒷짐을 지더니, 관리사무소로 걸음을 옮겼다. 승재를 비롯한 열 명의 사내들은 선생을 따르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그를 뒤쫓았다.

 

 

   3.

 

    쓰레기는 공터 전반에 걸쳐 산재해 있었다. 작은 쓰레기들이 풀숲 위에 뿌려진 모래들처럼 흩어져 있었고, 무덤 크기의 쓰레기 더미가 예닐곱 개, 사람 키만큼 쌓인 쓰레기 더미가 두 개였다. 트럭은 용달 석 대였다. 운전사들은 트럭을 길 가장자리에 바싹 붙여 주차시켜 놓은 다음,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작업은 도착하자마자 시작되었다. 홍창일은 처음에는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거좀 빠싹 들어.” 하거나 “이짝 것부터 드러내야지. 거기서 깨작깨작…….” 하는 식으로 감독 행세를 했다. 하지만 여름 햇볕이 점차로 강렬해지자, 종이컵과 함께 페트병 사이다와 코카콜라 하나씩을 사와, 그것을 한 잔씩 돌리더니 “그럼 작업들 하고 계셔요. 내가 급한 용무가 있어 갖고 쫌 있다 다시 올 테니까.” 하는 말을 남기고는 아파트 쪽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열 명의 사내들은 묵묵히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들은 분류하고 들어내고 적재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혼자 들어내고 옮길 수 있는 크기의 쓰레기들만 골라 운반했다. 하지만 점차로 무거운 쓰레기들이 나타나자 삼삼오오 짝을 지었다. 말은 없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눈빛과 표정, 동작으로 소통했다.
    그렇게 이십여 분쯤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내가 “씨발!” 하고 억눌렀던 짜증을 폭발시키듯이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관리사무소 앞에서 줄의 네 번째에 서 있었던 사내로, 서른 초반쯤이었고, 큰 키에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낀 목장갑은 붉게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덥석 물고 있는, 동시에 손을 야금야금 깨물고 있는 어떤 생명체를 조심스럽게 거둬내듯이 목장갑을 벗겨냈다. 손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병원 가야겠는데?”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손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큰 키에 갈색 머리의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비극을 내려다보듯이 피가 흥건한, 그리고 여전히 피가 고이고 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그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손에 몰려 있는 혈액을 한꺼번에 쥐어짜 내듯 주먹을 꽉 쥐더니, 주먹으로 무엇인가를 내려치는 시늉을 하면서 손바닥의 피를 떨궈냈다.
    그는 쓰레기터 한쪽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쓰레기터와 그곳의 다른 아홉 사내들을 외면하듯이 등지고 서더니 담배를 물었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작업에 복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승재를 비롯한 나머지 아홉 사내들은 그저 침묵한 채로 다시 쓰레기를 들어내고, 옮기고, 적재할 뿐이었다.
    그들은 한 시간 이십여 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휴식시간을 가졌다. 누가 지시하거나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이 쉬고, 두 명이 쉬고, 그것이 네 명과 다섯 명으로 불어나 어느덧 열 명이 함께 쓰레기터 옆에 앉거나 서서 홍창일이 사둔 음료수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웠다.
    그때쯤에는 몇몇 사람이 난 몇 동에서 살아요, 전 이름이 뭡니다, 나이가 어찌 돼요? 올해 서른넷인데요, 하는 대화들을 주고받았다.
    승재에게도 한 사내가 말을 건네 왔다. 중키에, 고생에 인생이 닳아 왔으며, 앞으로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그런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저기 103동에 사시지 않아요?”
    “102동에 삽니다. 103동에 사시나요?”
    “예. 저는, 뭐…….”
    “……덥네요.”
    “네, 그러네요……. 7월이라.”
    대화는 짧고, 난처했다.
    작업은 십여 분쯤 지나서 재개되었다. 역시 누구의 지시도 신호도 없었다. 휴식의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한 명이 작업을 시작하고, 그것이 두 명, 여섯 명 열 명이 되었을 뿐이었다.
    승재는 부서진 수납장, 가스레인지, 커피포트를 날랐다. 두 사내가 그의 옆에서 그와 다를 바 없이 쓰레기를 나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내 중 한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물었다.
    “월요일에는 어땠어요?”
    그러자 다른 사내는 좀 난처한 듯이 “그저 그랬지요. 바리케이드 하나 부쉈어요. 또 짓겠지요 뭐.” 하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많이 왔던가요?”
    “많이 줄었어요.”
    “도장부에 계셨어요?”
    “아니 그쪽은 아는 형님이 일을 해서 좀 알구요. 차체조립부에 있었어요.”
    승재와 그들의 오가는 움직임에 따라 그들의 목소리는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했다. 승재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대성아파트에 거주하는 SS사의 생산직 노동자들이자 해고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SS사는 한때 경영진의 실책과 생산직 공원들의 대량해고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간에서 잊힌 채, 지도부는 철탑 위에 올라가고, 몇몇 노동자들이 국지적인 시위를 할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공원들이 공장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쳤고, 이제는 용역과 경비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승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지막 직장에서의 어느 하루를 떠올렸다. 그 어느 하루는 그가 퇴사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사무실은 고요했다. 밖은 어두웠고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케팅관리 1팀의 일곱 명의 직원들은 고요 속에 잠겨 자신들의 업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얼마 후 출입문이 열렸다. 황용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날 부장과 함께 사장실에 들어가 있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잠시 서서 “결렬됐다.” 하고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자신의 업무데스크로 걸어갔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업무데스크의 서류와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누군가는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직원들이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는지 사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요구안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그 희생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 결정하지는 않았다. 더 정확히는 누구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황용규가 짐을 정리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황용규와 입사 동기인 성낙명이 담배를 꺼내더니 업무용 데스크에 두 발을 올리고 의자에 드러눕듯이 하고는 불을 붙여 담배연기를 뿜어 올렸다. 사무실은 금연이었고, 비흡연자도 세 명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의 담배는 어떤 면에서는 상반기에만 70억 원의 순이익을 남겼음에도 그 돈을 레저스포츠 사업에 투자하느라 은행에서 빚을 내고 직원들의 임금은 동결시키고 여전히 10시간 이상씩 업무를 강요하는, 평생고용제는 사라진 지 오래에 너희들이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회사를 상대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반항, 들어 올릴 수 있는 횃불의 규모였다. 잠시 후, 담배를 모두 태운 성낙명 역시도 업무용 데스크를 정리했다.
    그날 승재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시위는 좀 효과가 있어요?”
    “웬걸요. 시위가 퍼포먼스 된 지 오래예요. 아시잖아요.”
    두 사내는 승재 옆을 지나치며 말했다.
    승재는 부서진 가구를 들어 올리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오른손 손바닥에서 번져 왔다. 목장갑을 벗었다. 작은 가시들이 손바닥 한쪽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4.

 

    작업은 열한 시 반쯤 다시 한 번 멈춰졌다. 음료수는 바닥나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담배를 태울 사람은 담배를 태우고, 그저 그늘에서 쉴 사람들은 쉬었다.
    누군가가 “물이 없나?” 하고 말했다. 하지만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점심때가 안 됐나?” 하고 말했다. 하지만 역시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작업은 십여 분 만에 다시 재개됐다. 승재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과 함께 사람 키만큼 쌓인 쓰레기 더미 쪽으로 가서 쓰레기들을 들춰내고 끌어냈다. 그는 커다란 원목가구 두 개를 세 명의 사내들과 함께 옮겼다. 그 다음에는 세탁기를 옮겼다. 대형 냉장고를 옮겼다. 몸에 열이 오르고 숨이 찼다. 그는 다시 쓰레기 더미로 돌아가 이제 1인용 침대 시트 하나를 끌어냈다. 그러다가 한순간, 그러니까 그것을 들어 올리기 위해 모로 세웠다가, 그 상태로 작업을 멈추었다. 그것은 갑작스레 발생한 작은 소란 때문이었다.
    그가 막 철근과 콘크리트가 범벅된 건축폐기물 밑에서 1인용 침대 시트를 끄집어냈을 때, 두 청년이 공터 쪽으로 다가왔다.
    두 청년 중 한 청년은, 얼굴은 스물 중반쯤 돼 보였는데 몸은 이미 중년의 형상에 접어들어 있었다. 키는 작달막했다. 통이 넓은 청바지에 체크무늬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크게 부풀어 오른 듯한 배의 윤곽이 부각되듯이 드러나 있었다. 또 한 청년은 여름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짧았는데 무스나 젤 따위로 앞머리를 치켜세운 듯 앞머리만 꼿꼿하게 하늘로 솟아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고, 왼손에 검정색 작은 가방을, 긴 줄을 손목에 감은 채 쥐고 있었다. 둘 다 구두를 신고 있었다.
    두 청년은 처음에는 쓰레기터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땅바닥이 더러운 것을 알고 한쪽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체크무늬에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쓰레기터 안쪽을 향해 귀찮고 짜증난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승재를 비롯해 몇몇 사내들은 어떤 본능을 쫓듯이 손짓이 향하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는 관리사무소 앞 선착순 줄에서 맨 앞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
    그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쑥스러워하는 듯하다 두 청년에게로 다가갔다. 두 청년은 냉정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내가 거의 가까워지자, 체크무늬를 입은 청년은 바닥에 침을 한 번 뱉고는 “아저씨, 우리가 열두 시에 온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하고 윽박지르듯이 물었다. 그 후에 돈과 채무와 변제라는 용어들과 함께 위협과 고함과 빈정거림이 뒤따랐다. 사내는 꾸지람을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저 목장갑 낀 손을 번갈아 주무를 뿐이었다.
    승재를 비롯해 아홉 명의 사내들은 자리에 선 채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키가 크고 몸이 마른 한 사내가 불쾌한 무엇인가를 떨궈내듯 가래를 길게 끌어 모아 뱉었다. 그 소리에 아홉 명의 사내들은 뜨거운 땡볕 밑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5.

 

    홍창일은 오후 한 시가 가까워져서야 다시 후문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는 이미 소란을 일으켰던 두 청년도 사라지고, 공터에는 어떤 적막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홍창일은 쓰레기 더미가 거의 사라진 공터를 바라보면서, 작업 진행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는지 “아이고, 많이들도 치웠네.” 하고 열 명의 사내 전체를 칭찬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벌써 한 시가 다 돼 가네요. 점심들을 드시고 봅시다. 식대는 따로 없으니까 집에 가서 드실 분들은 드시고 안 그럴 분들은 개인 돈으로 드셔야 돼요.” 하고 말했다.
    그 후에, 그는 “깨끗해졌네. 속 시원하다.” 하고 혼잣말을 내뱉고 또 자신의 발 앞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 파편을 집어서 멀찍이 던져 놓기도 하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슬금슬금 아파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는 사라졌다.
    열 명의 사내들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 명의 사내가 홍창일을 뒤쫓아 아파트 쪽으로 향했다.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려는 사내들이었다. 나머지 일곱 명의 사내들은 어찌하나 하고 서 있었다.
    “이런 날씨에 이런 일 하면 몸보신을 해줘야 되는데. 고기 좀 먹을까요? 저기 우미회관이라고 여기서 십오 분만 걸어가면 싸고 좋은 데 있는데. 거기 일인당 만 원이면 푸짐하게 먹어요.”
    한 사내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동조를 하지 않았다. 모두가 넉넉지 않은 살림에 실업자였다. 그리고 24시간 단위로 다가오는 미래에 얼마의 돈이 더 필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눈치를 보고 뭉그적거렸다. 그러다가 또 다른 한 사내가 “라면 한 그릇이면 됐지 뭘.” 하고 무엇인가를 체념하고 동시에 자조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는 다른 사내들의 안색을 살피더니, 다른 사내들이야 어떻든지 자신은 자신만의 식사를 찾아 떠나겠다는 듯이 후문 쪽 상가거리로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를 따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분 후 그들은 상가거리의 보도블록 위를 무리를 지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모두가 뜨거운 땡볕 밑에서 쓰레기 치우는 작업을 했기 때문에 상의와 바지에는 땀과 오물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들은 상가 끝에 이르러, 작은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에는 먼지가 끼어있었고, 내실은 협소했다. 테이블은 네 개였다. 일흔이 다 돼 보이는 주인 노파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은 사내 한 명뿐이었다. 그는 낮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청바지와 대명산업이라는 마크가 달린 공장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지저분했고 흰 머리가 희끗희끗 솟아나와 있었다. 얼굴은 붉었다. 눈이며 아랫입술은 축 처져 있었는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어딘지 무기력하면서도 비굴한 인상이었다. 눈빛은 흐릿해서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그 반대로 막 잠들려는 눈빛 같았다.
    그는 승재를 비롯한 일곱 명의 사내들이 분식집에 들어섰을 때, 막 소주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고, 젓가락 대신 손가락으로 깍두기를 집어 입에 넣고 있었다. 그의 손은 작고 투박했으며, 손가락은 굵었다. 손등은 나무껍질과 다를 바 없었다.
    승재를 비롯한 여섯 사내들은 어떤 본능을 따르듯이 사내로부터 멀찍이 떨어져(그래 봐야 실내가 너무 협소해 1미터 남짓이나 거리를 둘 수 있었지만), 두 테이블을 붙이고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앉자마자, 낯선 곳에 막 도착한 인간들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듯 하면서 벽에 부착된, 글자가 떨어져 나가고 또 매직펜으로 음식 값이 지저분하게 지워진 아크릴판을 훑어보았다. 메뉴는 서른 가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엇 하나 구미가 당길 만한 것은 없었다. 주인 노파는 주방에서 그런 그들을 한번 내다보더니 그저 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그랬던 대로 설거지를 해갈 뿐이었다.
    “난 국수나 먹어 볼까.”
    한 사내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럼 난 김밥을 좀…….”
    다른 사내는 얼버무렸다.
    어떤 사내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또 다른 어떤 사내는 누군가에게 의견이라도 구하는 것처럼 “여기 라면이 좀 맛이 있나 어쩌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저 “비싸다.” 하고 못마땅해만 하는 사내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것은 국밥집 노파와 대명산업이라는 마크가 달린 공장 유니폼을 입은 사내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깍두기를 한 접시 더 달라고 했다. 국밥집 노파는 벌써 세 번이나 가져다 먹었으며, 더 이상은 공으로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설거지 감을 거칠게 다루면서 말했다.
    “시쳇말로다가 누구는 땅을 파서 장사를 하나? 소주 두 병 팔아 주면서 음식은 공으로 축내니. 어디 가서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 그리 하는 벱이 어디 있나? 술안주를 시켜먹으면 좀 좋아? 그거 몇 푼 한다고. 그래, 밥반찬 하려는 것을 그렇게 야금야금 축을 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아무리 밥장사 술장사가 인심장사라지만 것두 하루 이틀이지.”
    그러다가 노파는 갑자기 발악을 하듯이 하며 사내를 향해 고함을 치기도 했다.
    “외상값이나 갚어! 외상이 얼만 줄이나 알어?”
    사내는 처음에는 “내가 뭘!” 하고 두어 번 응수했다. 하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다음에는 딴청을 피우듯 했다. 너는 짖어라 나는 술이나 마시련다 하는 태도였다.
    이윽고, 그는 두 눈을 끔뻑거리면서, 느린 동작으로 팔꿈치의 위치를 조금 바꿨다. 그리고 담배를 하나 입에 물더니 공들여 담뱃불을 붙이고, 입을 쩝쩝거리면서 흐릿하고 굼뜬 시선으로 가게 밖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태양이 이글거리고 뿌옇게 먼지가 낀 세상이었다. 그동안에도 노파의 잔소리는 계속됐다. 그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반쯤은 냉소적이고 또 반쯤은 이죽거리듯이 “병신같이”하는 말을 내뱉었다.
    승재를 비롯한 일곱 사내들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누가 좀 주문을 받아 적어야 되지 않나?”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승재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옆 테이블로 가서 테이블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모나미볼펜 하나를 챙기고 또 신문 한 귀퉁이를 찢어 왔다. 그리고 사내들의 메뉴를 받아 적어, 그것을 노파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주방에 가져다주었다. 노파는 두 손을 상의 자락에 아무렇게나 닦으면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조금만 기다리셔들.” 하고 말했다.
    승재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내들은 메뉴를 정할 때는 잠시 말을 섞기도 했으나, 잠시 후에는 고개를 떨구어 테이블 위를 내려다본 채 서먹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모두가 주눅 든 모습이었다. 승재는 그때 오후에 남겨진 배수구의 오물 치우는 작업을 생각했고, 노동의 대가로 주어질 8만 원을 생각했다. 하루가 팍팍했다.
    노파는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들을 하나씩 쟁반에 담아와 테이블 위에 놓아 주었다. 국수가 세 그릇, 라면 한 그릇, 어묵 국물과 김밥 여섯 줄에 생기 없고 쉰 냄새가 나는 오래된 반찬들이었다. 한 사내가 수저통을 끌어왔다. 그리고 승재를 비롯한 사내들은 각기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 침묵 속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오 분쯤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대명산업이라는 마크가 달린 공장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갑자기 주방에 있는 주인 아낙에게 “여기 생고기 한 접시만 줘보우.” 하고 고함치듯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승재와 두어 명의 사내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눈은 흐리멍덩했다.
    “생고기를 한 접시만 줘보우!”
    사내는 또 소리쳤다.
    주인 아낙은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화가 돋친 목소리로 “생고기는 뭐 하게? 생고기만 파는 법은 없어!" 하고 쏘아붙였다.
    “줘봐. 줘봐요. 내 값은 쳐드릴게.”
    사내는 말했다.
    “맨날 그렇지 맨날 말로만!”
    “아 글쎄 줘봐. 고기가 당겨서 그래.”
    사내는 집요하게 요구했다.
    주인 아낙은 두어 번 고함을 쳤다. 하지만 나중에는 구시렁거리면서 주방 한쪽으로 가더니 냉장고를 주섬주섬 뒤져 얼마 후 흰 접시에 생고기를 담아 가져왔다.
    “디스토마 걸려. 익혀먹어야 해.”
    주인 아낙은 탁자 위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다소 명랑한 기운이 돋는 목소리로 “그건 걱정 마우. 그런 거야 아무 걱정 없지. 그런 걸 겁내면 병균은 그걸 알고 찾아오는 거야.” 하고 말했다.
    이윽고 그는 턱 밑에 놓인 생고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얕은 웃음기를 얼굴에서 싹 지우더니, 맹렬한 공복에 시달린 것처럼, 한 조각의 생고기를 들어서는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턱으로 붉은 육즙이 흘렀다. 그때 그의 눈은 어떤 생기를 띤 채로, 거대한 환희를 느끼기 직전의 어떤 흥분 상태를 표출하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승재를 비롯한 일곱 사내들은 그저 덤덤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는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턱 밑으로 흐르는 붉은 육즙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생고기를 입안에 넣고 씹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저 노골적으로 천박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식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얼마쯤 지나자 이상한 슬픔과 연민이 분식집을 꽉 채웠다. 승재도 또 다른 사내들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승재를 비롯한 사내들은, 다시 천천히, 사내로부터 자신들의 조악한 음식이 놓인 식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어떤 커다란 고뇌에 입맛을 잃어버린 것처럼 힘없이 식사를 해나갔다. 그동안에도 사내는 생고기를 씹고, 또 입안의 생고기를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기 전에 다시 접시 위의 생고기를 들어 올려서 입안에 몰아넣었다. 그것은 흡사 거대한 처절함을 계속 삼키는 것과 같았다.
    사내는 생고기에 목이 막힌 목소리로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살아야 해. 다 쓸데없어. 살아야 해.”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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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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