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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학/비평의 종말'에 대한 단상(들)

  • 작성일 2017-02-01
  • 조회수 3,706

[비평in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K문학/비평의 종말'에 대한 단상(들)



백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인간의 행위와 그것의 의미에 특히 몰두하는 행태를 '문학'이라는 닳아빠진 단어를 통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한다면, 우둔하고 완고한 일일까? "젊은 독자를 잃은 한국문학/비평은 장르화된 방식으로만 겨우 존재하면서 영원히 '그들'만의 은어 혹은 방언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애도의 대상도 되지 않을 것이다. K문학/비평이 없는 세계는 축복이며, 거기서 21세기의 독자들은 압도적인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1)라는 글을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이 없는 세계는 상상하기 싫고 어떤 '비평'에서 얻었던 선명한 기쁨을 어디선가 또 찾고 싶다면, 그래서 '한국문학/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면, 따분하고 지겨운 일일까? "작가들은 각자 자신들의 현실과 부딪치며 자신들의 자리에서 쓰고 또 썼다. 이 과정에 어찌 미진함이 없으랴. 그렇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섬세하게 가려 비판하고 대화하면 될 일이다."2)라는 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답답했다고 해도 말이다.

1) 이 글은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문화/과학}, 2016년 봄호. 83~105쪽)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숙고하면서 촉발되었다. 인용은 105쪽. 이후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병기한다.
2) 이 글은 또한, 오혜진의 글에 대한 정홍수의 반론, [당신은 왜 한국문학을 걱정하는가]({문학동네} 2016년 여름호. 566~575쪽)를 읽고, 두 시각을 동시에 생각해 보면서 진행되었다. 인용은 572쪽. 이후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병기한다.



#.


지난 1-2년 사이 흉하게 불거진 '문학' 관련 스캔들 - 신경숙 표절, 문단권력, #문단_내_성폭력 등 - 로 새삼 문제시된 측면이 크겠으나, 여하튼 이 시대 '한국문학'의 교착과 무능을 모른 척하기는 어렵다. 표절 프레임의 단순성을 넘어서, 권력 논쟁의 지리멸렬함을 벗어나, 자율성 논리의 옹색함을 피하여, 오늘날 '한국문학'이라는 집단적 총체는 무엇을 모색하는 중일까. 문학성, 문학적, 문학주의 등, '문학'의 재귀적 용법에 대한 다각적 점검을 통해 '문학'이라는 텅 빈 기호의 변화된 쓰임을 자각해 온 지 오래다. 문학을 특권화/권력화하고, 상업화/도구화하는 등의, 문학작품을 둘러싼 문학장의 행태를 타락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행위들도 집중적으로 또는 산발적으로 드물지 않게 있어 왔으며, 기실 현재 문학장은 다양한 형태로 해체/변화 중이다. 그래서인지, 문학 제도의 시대착오적 폐쇄성, 문학장의 후진성 등을 책망하는 말들은 정당한 그만큼 되려 진부하게 들릴 때가 없지 않다.


'한국문학이라는 집단적 총체'라고 말해보긴 했지만, '문학'을 상대로 불만, 한탄, 비난의 말을 던질 때, 그 말이 가 닿게 될 구체적인 대상을 실질적으로 포착하기는 쉽지 않다.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와 같은 그 퇴행의 내용들이야말로 지금의 필연적 '몰락'을 초래한 한국문학의 어떤 '체질'을 구성하고 있다"(91)는 진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소한 지난 10여 년간 내가 읽은 한국문학(들) 중에 '무엇'이 혹은 '어디'가 그러한지 떠올리려면 다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물론 저 '몰락'을 초래한 '체질'이 한국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모든 개별 텍스트에 적용되는 얘기가 아님을, 그것은 "시장패권주의와 결합된 한국문학의 부정적 성격 전반"을 "K문학"이라는 조롱의 기표로 한정하고 거기에 내린 진단임을, 즉 '한국문학≠K문학'임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문학적인 것'의 체질과 습성을 캐치하게 되기까지 개별 사례들과의 만남에서 발생한 어떤 감상과 비평이 우선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저 '퇴행'과 '타락'의 사례로 충분할지 확신이 안 든다.3)

3) 오혜진의 글에서, 'K문학'에 대한 대중들의 환멸을 드러낸 사례로 김광균의 [설야]에 대한 감상이 거론되었으나, [설야]로써 (이 시대) 한국문학의 퇴행성을 얘기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한국문학'의 퇴행과 무능을 살피고자 할 때, "한국의 주류 문학사가 '개저씨들의 문학사'라고 일컬어지는 이유"(90)들을 특히 들어 이런 것이 바로 '한국문학'의 큰 문제라고 말하기는 비교적 간단한 방식이 아닐까. "새롭게 갱신되는 지식과 정동, 윤리와 정치에 무관심한 '이성애자-남성-지식인'들의 문학(사)"(100)이 낡은 인식에 젖어 이 시대 현실에 대한 생산적인 설명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의 사실성을 인정하지만, 그런 문학을 곧 현재의 한국문학(일반)으로 - '주류'라는 한정어에 의해 소위 '문단 문학'이라는 범주에 한한다 해도 - 여겨도 괜찮을까. 낡은 인식에 안주하여 한국문학을 대변해 온 일부를 따로 'K문학'이라 명명하고 그 퇴행성을 질타하고 나아가 죽음을 예언하는 것은, 문제를 일갈하는 방편일지 몰라도 현재 한국 사회 문화의 다양한 맥락과 조건 하에서 산출된 문화적 생산물 중 유독 '문학'이 열세에 처한 까닭을 잘 알게 해 주진 못할 듯하다.


달리 말해, "한국문학/비평이 결코 재현하지 않거나 애써 해석하려 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독자들의 오랜 불만"은, 문학에 재현된 인식의 퇴행성이 아니라 퇴행적 인식의 재현에 익숙한 문학(의 기능)에 대해 터져 나온 것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 보자면, 이 시대 사회 구성원들의 변화된 감수성, 정동, 문제의식 등에서 도출된 새로운 비평적 의제들에 발맞추지 못하는 내용/인식의 퇴행성은 문학 외의 장소에서도 발견되고 비판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재현장치로서의 한국문학'이 지니는 무능 혹은 기능부전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란, 현재 문학 외의 다른 재현 장치들이 얼마간 잘 해내는 것을 현재의 '문학(제도)'이 특히 못 해내는 실정에 대해서일 터이다. 요컨대 '한국문학'이 '재현장치'로서 무능하다면, 어떤 것이 무능한가가 아니라 어째서 무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정리해보자. 이 시대 '한국문학'에 독자들이 냉담한 것은 '재현장치'로서 무능하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재현하는 데 안주해 온 문학(사)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젊은/변화된 독자들이 요구하는 학습과 경험에 필요한 지적, 문화적 자원에서 '한국문학'은 탈락했다. 거칠지만 신랄한 의견이다. 한편, 이를 "최근 한국문학 작품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연상 작용도 가능하지 않은"(568),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억견(臆見)과 단죄"(569)로 받아들이는 입장도 있었다. 지난 백여 년간 한국 근현대 문학의 주류를 이루어 온 어떤 지배적 인식(론) 혹은 "낡은 공통감각이 공모해 만든 지배적 문학 규율"이 오늘날 '한국문학'의 열세를 자초한 원인의 중요한 일부일 것이지만, 그것이 이 시대 다양한 미디어에 의한 '재현장치(들)' 중 유독 '한국문학'이 부진한 원인의 전부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K문학'을 뺀 한국문학은 이 시대 독자들의 외면을 피했는가 하면, 그렇다고 답하기도 딱한 형편이다. 그러니 재차 확인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재현장치'로서 이 시대 '한국문학'은 괜찮은가? "삶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571)로서 쓸 만한가, 아니면 "지적 문화적 호기심 충만한 오늘날의 독자들이 왜 구태여 한국문학/비평을 읽어야 할까."(100)



#.


(언어를 매개로) 인간의 삶과 세상을 재현하는 장치인 문학에서 어떤 '퇴행(성)'이 문제시되었다면 그것은 재현된 내용만이 아니라 재현된 방식도 그러하다는 뜻이다. '재현장치'의 무능은, 재현의 대상(소재), 목적(주제), 방법(서사)에 다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재현의 의도, 감성, 윤리 등과도 당연히 밀접하다. 바꿔 말해, 어떤 '문학'을 낡은 인식의 체현이라고 할 때, 문제는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맞지 않는 낡은 의제가 아니라 어떤 의제를 표출하는 언어의 (문학적이라고 여겼던) 사용 방식이 변화하는 시대에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낡음'을 문제 삼는 것이 세대 간 가치관의 '대립'으로, 또는 문학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문학에 대한 여러 시각들 간의 '차이'로, 간단히 처리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 점은 섬세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근대 한국 사회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테크닉 혹은 컨벤션으로서 '문학'은 여타 장르들에 비해 시간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더 많은 고민과 모색을 거쳐 왔을 터이다. 현실 세계를 근현대 한국어로 기술하는 문장의 주요한 어법들은 국어 교육의 단계에서부터 문학 텍스트의 문장들을 통해 이뤄져왔던바, '재현/표상representation'의 한국어 양식들에 대한 문학 텍스트의 기여는 적지 않다. 또한 이른바 '리얼리즘적 기율'을 오랫동안 의식해 온 '한국문학'의 관습은 '사물과 사건의 사실적 재현/표상'이라는 명제를 거의 강박적으로 의식해왔다고까지 할 수 있다. 통용되는 인식을 말로써 기술하는 방법의 누적, 한국문학의 기술(記述)에 관한 규범이 있다면 바로 그렇게 누적되어 온 재현/표상들의 더미 말고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다. 따라서, 가령 '여성에 대한 폭력을 경유한 여성혐오'와 같은 인식이 체현된 문학이란 '여성혐오'를 주장하는 문학이라기보다 여성혐오를 통용된 인식으로 재현/표상하는 '규범'에 충실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매우 거친 발상이지만, 통시적 변화를 가시화해보기 위해 편의적으로 구분해 말해보겠다. 지난 세기까지의 '한국문학'이 개인의 실질적인 삶과 사회의 현실적인 의제들을 반영하고 모방하는 재현/표상으로서 풍부해질 것을 꾸준히 요구받고 보완하는 큰 흐름 위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다면, 세기의 전환과 더불어 변화된 사회 문화적 조건 속에서는 현실을 재현하는(한다고 믿어 온) 자기의 언어적 실천이 언제나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한계와의 쟁투를 이면에 덧댄 실험임을 자각하고 그 성찰을 재반영하는 조류에 강력하게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꿔 말해, 대략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그 이전까지 누적되어 온 문학의 관습 또는 규범을 의문에 부치고 리얼리티 자체를 혁신하려는 시도와 운동으로 문학(성)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른바 탈이념, 탈적대의 시대였던 200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경향성이 '혼종', '접속', '무중력' 등으로 명명되고 이후 다수의 한국소설에 드러난 표상은 '환상', '종말', 비인간' 등으로 말해졌던 것을 떠올려 보라. 2000년대 중반부터 부각된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감각과 다른 서정을 '낯섦', '혁신', '전복', '타자' 등으로 사유하고 향유해 온 시간을 기억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200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이 이질적인 것, 타자적인 것, 불확실한 것 등에 기울인 관심은 기성에 대한 위반과 전복의 충동을 표출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중에는 '재현장치'인 문학 자신이 재현에 대한 위반과 전복으로서 존재하려는 욕망을 드러낸 텍스트들도 적지 않았다. 말하자면, 통용되는 인식을 담은 재현/표상들의 더미와 멀어짐으로써 이제껏 누적되어 온 '문학규범'을 탈피하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현실 재현의 서사가 주로 의지하는 '시각적 상상력'보다는 말들의 연결과 흐름으로 생성되는 '언어적 상상력'에 천착함으로써, 기존의 문학적 관습을 흔들고자 하는 의지도 감지되었다. 이는 재현/표상의 임계에 대한 고민과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시도였으나, 재현 가능성에 대한 의지보다 의심을,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극복보다 체념을 더 키우고 말 여지가 없지 않았다.


어쩌면 재현 너머를 의식하는 언어와 상상이 역으로 재현을 불신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령, '유교적 가부장제'라는 퇴행적 질서를 부정하는 문학이, 가부장제를 통용된 인식으로 재현/표상하는 문학규범을 철저히 거부해서는 다만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메시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데 그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낡은 인식을 부정하고자 할 때 그 인식을 재현/표상하는 낡은 말들의 더미를 거부하면 인식에 대한 입장만 겨우 그려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한국문학'의 부진이 (무능한) 재현 능력에 있다고 한다면, 어떤 퇴행적 인식을 다룬 것(통용되는 인식의 재현)이 무능한 게 아니라 어떤 인식이 재현(불)가능성으로만 표현되어 전달되었다는 게 무능한 측면이 된다.


'재현 너머' 혹은 '재현 아닌' 재현은, 서사를 주로 시각적 상상력에 의지해 수용해 온 대중적 감수성과 특히 멀어지는 결과에 이르기도 했을 것이다. 바로 그, '서사성의 결핍', '난해시의 불통' 등을 문제 삼았던 대중-독자들의 불만이, 오늘날 대중-독자들이 문학에서 자기 얘기를 못 찾겠다든가, 문학이 대중-독자를 교양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가 싫다든가 하는 불평에까지 이어진 것으로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현에 대한 탐구가 재현의 실패를 가져왔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대중-독자들의 불신과 냉담을 부른 문학의 무능도 이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요컨대 재현의 임계/한계/경계에 대한 문학의 첨예한 고민은 '대중적인 것'의 형질 변화를 유도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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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문학'은, 이를테면 '어떤 전체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별적 주체들을 가시화하는 미학적 형상'으로, '동일화되는 주체성의 확립에 저항하는 미학적 모험'으로, 의미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과 의미화는 주변적인 돌출이나 사소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전방위에서 '종말'을 알려온 '(근대)문학'은 이미 막다른 데를 지나친 듯한 분위기에서, 그것은 어떤 방향으로든 기존의 임계점을 성찰하고 '한 걸음 더'를 추구하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전위성을 띤 실천들이기도 했다. 당시로서 '한국문학'을 전망할 때 낙관적이라 하진 못해도 희망이 없지 않고, 자연스럽게 뚫고 가는 길은 모르나 불가피하게 닥쳐온 길을 회피하지 않는 중이라 생각했다면 나이브한 도취였을까. '문학'을 관리 감독하려는 세력들과의 시대착오적 마찰이 거추장스러운 소음을 일으키곤 했어도, 최소한 '한국문학' 전반이 "낡은 공통감각이 공모해 만든 지배적 문학 규율"에 종속된 것처럼 보일 까닭은 충분치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변화와 직시가 있었다. 시점을 콕 짚기는 어렵지만 지난 두 번의 정권을 지나오며, 또한 전지구적으로 확대되는 정치경제적 정세의 전환을 목도하며, 그간 "한국문학이 발견한 '개인적인 것'의 영역이 특수한 개체성 외에 '대표될 수도 재현될 수도 없는' 존재/공간으로 집중되어 있음"4)을 자각하게 된 사실도, 최근의 문학적 상황의 일부이다. 소설에 구체화된 개별 주체들의 형상이 "'개인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 설정에 철저히 무심했다는 사실"이 직시되었고, "'개인적인 것'의 바깥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인 것'의 내부적 차이나 비-인간의 면모들 사이에 놓인 간극과 그 처리가 한국소설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겨져 있음"5)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월호' 이후, 작가들, 시인들, 즉 말하는 입들이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곳의 말하고 글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이 그들의 호흡을 주관하는 공기 속에" 있음을, "작가의 글, 사건의 기록, 문학작품 등의 유형과 양식을 막론하고 우리의 말은 어떤 무형의 공론장을 호흡하는 가운데 나온 것"6)임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제 공적인 능력의 회복과 공론장의 작동이라는 사건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수행될지, 혹은 어떤 공적 능력과 공론장에서 포착된 사건이 문학으로 기술될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현재 '한국문학'을 심문하는 이 글과 이 지면도 그 답을 찾는 노력의 사례일 것이다.

4) 소영현, [소설과 공동체], {하위의 시간}, 문학동네, 2016. 46쪽.
5) 같은 글, 47쪽.
6) 졸고, [수평선이 보인다 - 공적인 능력의 회복과 공론장의 작동을 꿈꾸며],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440-441쪽.



#.


이렇게 2000년대 이후의 사정을 짚어본 까닭이 없지 않다. 아직도 '철지난' 문학적 규율에 기댄 비평의 복권을 외치거나 문학적 재현과 해석에서 '시대착오적' 인식의 수호를 주장하는 "퇴행의 양상"이 '한국문학'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첨단의 문화를 소화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는 독자-대중의 지적 문화적 호기심"(105)에 대한 현재 '한국문학'의 둔감을 통감한다. 다만, 이 문제들을 절감했을 때는 그렇게 판단한 바 그대로, 오늘날 문학적 규율 따위는 어디서도 작동하지 않을 만큼 '이미 낡았고', 습관처럼 비호되는 인식은 '이미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과소평가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다. 단언컨대 그런 규율과 인식은 오늘날의 독자와 작가를 지배하지 못한다. '문학계'의 어떤 퇴행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작가와 독자, 시민과 대중은 결코 '문학'이 시대착오적 인식을 수호하는 지배적 규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문학'을 지배해 온 규범이 안 통하게 됐으니 이제 새 시대에 걸맞은 새 규범을 창안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문학 규범 자체가 없어져야 하고, 문학에 규범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망각되는 게 나을 것이다. '문학'이란 용어가 텅 빈 기호라는 사실이 한두 해 전에 발각(?)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원래는 문학에 규율이 있었는데 서서히 또는 하루아침에 그것이 사라졌다는 뜻일 리 없다. 차라리 각종 문학이론, 문예비평, 문학작품 들을 섭렵할수록 제도와 관습에 의거한 역사적 규율과 기준에 의해 '문학'이 유동한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졌다는 뜻에 가깝다. 여하간 이 시대에 '문학'이라는 텅 빈 기호의 범위는 '읽고 쓰는 행위'의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그럼으로써 '문학'을 규정하거나 통제하는 특정 의지, 지향 등을 삭제하라는 요구가 (문학계 전반에) 관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은 신비화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대상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며, '문학성'이란 고정된 지식의 형태로 전수하거나 계몽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서지 않은 이가 흔하겠는가.


물론, '문학'이 텅 빈 기호일 때, 역설적인 듯하지만 이 용어는 이미 가치를 포함한 기호다. 가령, 누군가의 어떤 말이 '문학적'이라고 판단할 때, 그 말은 상대적으로 독특한 효과를 낸다는 평가를 함께 받은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행동에 대해 '이건 예술이야'라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문학적'이라는 평가는 평가한 '대상'을 문학으로 지정하는 게 아니라 평가한 대상의 '속성'을 풀이한다. 주지하다시피, '문학적'이란 말은 관형어가 아니라 서술어다. 그래서 '읽고 쓰는 행위'가 다 문학의 범위인 것과 별개로, 모든 말과 글을 '문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언어 행위 중에는, 상대적으로 더 적절한 어감, 더 효과적인 전달, 더 윤리적인 기능이 발휘되는 화행의 순간이 있고, 그런 때 이 닳아빠진 단어인 '문학'을 술어로써 사용할 수 있다.(다른 적절한 단어가 있으면 바꿔도 될 것이다.)


길게 말했지만, 이는 기존 문학장에 저항하여 힘겹게 일궈야 할 미래가 아니라 이미 '한국문학'의 이름으로 래디컬하게 작동 중인 현재의 일이다. 시스템이 벌써 움직였다는 얘기다. 민음사의 <릿터littor>가 '릿터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이고 그것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며 등장했고, 창비의 <문학3>은 "삶 속에서 발견하고 실천하는 문학"을 모토로 삼았으니, 거대출판사가 이렇게 움직인 마당에 '한국문학' 일반이 '주류인 거대악'에 휘둘리는 처지처럼 묘사되는 건 좀 졸렬한 모양새랄까. 유동하는 '문학'을, 마치 막강한 세력에 눌려 쇠약해진 대상처럼 취급하고 마는 태도는, '문학' 관련 담론을 비생산적이고 유행 지난 타령인 듯 혐오/폄하하려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문학은 내내 바뀌면서 강력하게 존속 중이고, 아니 바뀌면서 강력하게 존속하는 어떤 걸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고, 어쨌거나 그러니 이제부터 문학이 죽었네, 죽어야 하네, 살려야겠네 등의 얘기는 하등 문학적으로 중요한 비평적 의제가 아님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백지은
작가소개 / 백지은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2007년 「허무의 허무의 소설학-김훈 소설의 문장론」으로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비평집 『독자시점』등


《문장웹진 2017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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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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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 종말'에 대한 단상(들)>, 《문장 웹진》 2017년 2월 1일,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5136).   3)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

    • 2018-09-01 00:04:1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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