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 겹의 어둠이 더

  • 작성일 2018-05-01
  • 조회수 4,042

[단편소설]



한 겹의 어둠이 더



김수온




해가 저문다. 소리가 사라지고 바람이 멎는다. 온갖 먼지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매번 같은 자리에 운반되어 쌓인다. 땅은 좀 더 단단하고 견고해진다. 일련의 성장이 진행되어 간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다. 밤은 매일 찾아온다. 몇 겹으로 된 어둠을 몰고서 온다. 늘 홑겹의 악몽을 동반한다. 때에 따라 불면이 된다. 그래서 어떤 밤은 길고 깊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있다. 어떤 빛도 산을 넘어오지 못해서 마을은 온전하게 고립되어 있다. 마을을 밝힌 빛이 한 겹씩 덮인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빛마저 어둠이 된다. 일곱 번째 집이다. 그 집의 불이 꺼져서 마침내 모든 빛이 사라지게 된다. 마을의 밤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일곱 번째 집은 어둡고 적막하다. 빛과 소리가 어디에도 없다. 몸의 감각들이 하나 둘 무뎌진다. 어둠 속에서 나른해지고 아득해진다. 사방에 크고 작은 사물들만이 얌전히 놓여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략의 윤곽으로만 존재한다. 천장에서부터 길게 뻗어 내려온 고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형광등을 켜고 끌 수 있게 줄로 연결된 고리다. 방금 누군가 당겨서 불을 껐다. 당겨진 고리가 채 멈추기도 전에 팔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다. 곧바로 검게 솟아 있던 상체가 쓰러진다. 머리에 괴인 베개가 서서히 낮아진다.
두 채의 이부자리가 있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놓여 있다. 그 간격은 여태 좁혀지거나 넓혀진 적이 없다. 이부자리를 갠 적이 없어서 매일 같은 자리에 깔려 있다. 그 위로 각각의 사람이 정자세로 누워 있다. 그들의 상반신은 모두 이불로 가려져 있다. 보이는 거라곤 두 쌍의 다리가 전부다. 뻗어 나온 다리가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발끝은 살짝 벌어져서 편안해 보인다. 그들은 조금도 뒤척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다. 깊은 잠이 들어 있는 것도 같다. 몸 위로 덮인 이불이 작게 오르내린다. 어느덧 흔들리던 고리가 멈춰 선다. 모든 게 멈춰버린 집에 나약한 초침소리만 꾸준하게 들려온다. 소리의 간격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어떤 기척도 없이 여자가 일어난다. 이불이 씌워진 상반신이 서서히 수직으로 선다. 여자는 방 한구석에 작게 솟아난다. 이불 아래로 두 다리가 여전히 곧게 뻗은 채로 놓여 있다. 그래서 다리는 상반신과 뚝 떨어져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전혀 다른 이의 다리가 놓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한동안 그렇게 앉아만 있다.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한다. 이불 너머를 빤히 바라본다. 이불 밖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이불 안은 한 겹의 어둠이 더 있다. 여자는 매번 같은 양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뱉어낸 숨은 이불을 통과하지 못한다. 모든 숨이 이불 안에 철저하게 갇혀 있다.
여자는 두 발을 짚고 일어난다. 순식간에 제자리에 우뚝 선다. 이불은 여전히 상반신을 다 가린다. 미완성의 조각상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완성되지 않은 것의 경우 보통 신체의 일부가 덜 자랐거나 부재한다. 그건 팔이거나 얼굴이거나 상반신 전체일 수 있다.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상관없다. 그저 이불이 아주 오래 덮여 있을 뿐이다. 고개를 숙이자 몸과 함께 이불이 앞으로 기운다. 앞자락이 조금 밑으로 내려온다. 앞과 뒤가 확연하게 구분되어진다. 여자는 그 상태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보이는 거라곤 발이 전부다. 두 발은 나란히 붙어 있다. 발의 길이나 폭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처음 발을 부여받은 사람처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든다. 기울었던 이불이 바로 서면서 앞자락이 슬그머니 올라간다. 앞과 뒤가 원래대로 평행을 이룬다.
여자는 정면으로 걸어간다. 일정한 폭과 속도로 발을 교차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걷는 걸음에 비해 여자의 걸음은 유독 작고 느리다. 한참을 걸어 겨우 이부자리에서 벗어난다.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 전체에 빈틈없이 스민다. 발목 위로 서서히 퍼져 나간다. 두 발을 붙이고 멈춰 선다. 한 발을 내디디면 닿을 만큼의 거리에 벽이 있다. 익숙하게 몸을 돌린다. 정해진 방향은 없다. 그저 벽이 없는 쪽으로 몸을 돌릴 뿐이다. 벽과 마주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돌아선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벽에 부딪힌 적이 없다. 여자는 그렇게 몇 바퀴째 방을 완주하고 있다. 매번 다른 걸음으로 방을 완주한다. 수백 걸음이기도 하고 수십 걸음이기도 하다. 가끔 한 걸음 만에 방을 완주하기도 한다.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해서 조금도 지쳐 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깊고 고른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꽤나 평온하다.


여자가 문턱을 넘어 가까스로 방을 벗어난다. 거긴 또 다른 방이 있다. 남자의 서재다. 서재는 아주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다. 그만큼의 먼지가 책상이나 책장에 가득하다. 여자가 곁에 지나가면 먼지는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가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불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여자가 숨을 쉴 때마다 몸과 함께 이불이 들썩거린다. 그게 웃거나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는 부지런히 걸어 책장 앞에 선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을 바라본다. 고개를 기울이거나 꺾어 가며 책을 고른다. 손이 이불 안에 있으니 기껏 고른 책을 빼내지 못한다. 그걸 뒤늦게 알아채고선 힘없이 돌아선다. 서재에서 또 한 번 문턱을 넘으면 다른 방이 나온다. 거긴 창고이거나 다락이거나 또 다른 서재다. 문턱을 넘기 전엔 방의 용도를 알 수 없다. 방의 크기나 구조, 방을 채운 사물들에 관해서도 물론 알 수 없으나 거기 방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여자는 몇 개의 방을 지나간다. 그중에 여자의 방도 있다. 정말 작은 방이며 단 하나의 사물만이 놓여 있다. 원목으로 된 원형 협탁이다. 처음 방에 들이던 모습 그대로다. 따로 유리를 맞추지 않았지만 흠집 하나 없다. 협탁에 딸린 서랍은 지금껏 열어 본 적이 없다. 상단에 자개거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거울은 이불의 한 부분을 비추고 있다. 그건 여자의 앞모습이기도 하고 뒷모습이기도 하다. 여자는 꽤나 오래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불이 미세하게 움직이다가 이내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단정하게 떨어진다. 그제야 부드럽게 몸을 돌린다. 이불자락이 함께 돌아가며 아름답게 펼쳐진다. 순간에 하얀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의 결을 따라 있지도 않은 향기가 퍼져 나간다. 벌이나 나비 따위가 결코 날아들지 않는다. 철지나 시든 꽃처럼 방 한가운데 축 늘어져 있다.
수십 개의 문턱을 넘는다. 그만큼의 방이 있다. 서로 다른 용도의 방을 여자가 지나간다. 방의 크기는 모두 다르고 방에서 소요되는 시간 또한 다르다. 크기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크기가 큰 방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거나 그보다 작은 방에서 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크기에 맞게 사물들이 배분되어 있지도 않다. 온갖 사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채워진 방이 있는가 하면 말끔하게 비워진 방도 있다. 어떤 방이든지 어렵지 않게 통과한다. 가끔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간다. 욕실은 물기가 전혀 없다. 작은 창문 하나 없는데도 잘 말라 있다. 차가운 타일에 발바닥이 착 달라붙는다. 발은 이미 타일만큼이나 차가워져서 어떤 냉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무릎을 굽히며 다리를 치켜든다. 작은 욕조에 들어가 쭈그려 앉는다. 이불이 여자의 몸을 모두 가린다. 욕조는 마치 텅 빈 요람처럼 보인다. 여자는 그 안에서 발을 젓거나 구르며 시간을 보낸다. 허공을 가르고 헤엄쳐 가지는 못한다. 몸을 둥글게 말고서 여전히 욕조에 잘 담겨 있다. 한참 후에 욕조를 빠져나와 들어올 때 넘었던 문턱을 다시 한 번 넘는다. 이불의 끝자락에 작게 물이 스며들어 있다.
끝이 없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방을 완주하면 또 다른 방이 기다리고 있다. 고로 끝과 시작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집을 다 걷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게 판단한 여자는 걷고 또 걷는다. 달리고 뛰어넘고 질주한다. 어떤 사물에도 이불이 걸리거나 몸이 부딪히지 않는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방을 통과한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이불은 흘러내리지 않는다. 여자의 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신체의 어느 일부가 되어 있다. 그런다고 자라나지는 않는다. 여자의 걸음에 맞춰 하염없이 펄럭일 뿐이다.


여자는 가끔 멈춰 선다. 잘 달려 다니다가도 속도를 줄이고 정지한다. 다시 출발하기 전까지 한참이 걸린다. 여자의 앞에는 높게 쌓인 젠가나 직육면체의 성냥갑이 있다. 나무 조각을 옮기거나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지는 못한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방에 난 창문 또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모든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다. 여태 바깥 풍경이 보인 적이 없다. 축 늘어진 커튼 앞을 여자가 서성인다. 커튼마다 달빛이 옅게 스며들어 있다. 그 위로 그림자 하나가 떠올라 있다. 창밖에 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창문만큼만 보인다. 바깥에서는 온전할 신체가 안에서는 사각형으로 완벽하게 잘려 있다. 그걸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봐도 커튼의 무게는 가늠할 수 없다. 커튼을 쥐거나 걷어내지 못하기에 지체되고 있다.
여자는 벽 앞에서 고개를 한껏 꺾은 채로 서 있다. 벽에 이름 모를 꽃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건드리면 꽃잎이 바스라질 정도로 바싹 말라 있다. 아무리 고개를 꺾어도 꽃이 똑바로 보일 리 없다. 여자는 쉽게 돌아서지 않는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매달린 꽃 아래를 지나간다. 이불에 슬쩍 마른 꽃이 닿는다. 꽃 부스러기가 이불 위로 떨어진다. 여자는 문턱을 넘는다. 여전히 고개는 꺾어진 채, 방으로 들어간다.


여긴 방이구나.
나는 다만 문턱을 넘은 것뿐이었지.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방은 어둡다.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차가운 냉기가 허공 가득 퍼져 있다. 묵은 먼지가 낮게 내려앉아 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서 그 상태로 정지되어 있다. 작은 시계 하나 없으니 더 그렇다. 그런 방에 여자가 발을 들인다. 여자의 작은 몸집이 온전히 방에 담긴다. 그만큼의 공기가 문턱을 넘어 바깥으로 밀려난다. 공기의 배열이 뒤바뀐다. 먼지가 허공에 낮게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온갖 사물들이 여자를 주시한다. 여자의 모든 행동을 심판할 것처럼 내려다본다. 금방이라도 문턱 너머로 몰아낼 것처럼 노려보고 있다. 여자는 구석에 서서 숨을 죽인다. 이불은 박제된 채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주위를 훑는다. 방 안에는 사물들이 어지럽게 배열되어 있다. 아무런 질서도 규칙도 없다. 그저 몸을 맞대고 길게 이어져 있을 뿐이다. 커다란 몸집 뒤편으로 자꾸만 어둠이 자라난다. 여러 겹으로 포개지고 쌓이며 견고해진다. 여태 살면서 처음 보는 방이다. 일곱 번째 집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런 방을 본 적이 없다. 본 적도 없으니 들은 적도 없다. 아무도 친절히 일러준 적이 없다. 방의 존재를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방의 존재를 알면서 숨긴 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여자가 보기에 방은 다른 방들과 다를 바가 없다. 천장에 형광등이 달려 있고 그걸 켜지 않는 이상 밤마다 어두워지는 그런 방일 뿐이다. 어찌 됐든 아무에게도 발설되지 않은 방에 여자가 있다. 여자는 방을 발설하는 최초의 사람이 될 것이다. 여자에 의해 방이 명명되고 마을 사람들에게 구전되며 산 너머에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방은 너무나 낮고 깊은 곳에 있다. 방의 온도와 습도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여자의 몸에 끊임없이 들어찬다. 지구 한 바퀴보다 더 길게 뻗은 혈관을 지난다. 중력에 따라 몸을 잠식하다가 마침내 발끝에 모인다. 발이 바닥 위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간 언젠가 발이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 땅 밑으로 추락하게 된다. 머리가 아래로 향한 채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땅속 깊이 묻힌 고대도시를 발견하고 세상에 없는 이들을 목격한다. 지구의 반대편에 도착하기도 전에 밤은 끝난다. 해가 떠오르면 꿈처럼 깨어난다. 키가 아주 조금 자라나 있다. 그건 분명 꿈이지만 두렵다. 꿈은 꿈이라서 더 두려울 때가 있다.


여자는 겨우 한 걸음을 내디딘다. 이불 위에 앉아 있던 꽃 부스러기가 등 뒤로 떨어진다. 여자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작고 마른 기척이 들려온다. 몸과 함께 이불이 미세하게 떨린다. 멈춰 서지 못하고 하염없이 걸어간다. 걸음마다 바짝 따라붙는 기척이 말끔히 사라질 때까지 차분하고 정확하게 달아난다. 한참 지나서야 완벽하게 따돌린다. 그제야 멈춰 서서 천천히 숨을 가다듬는다. 여자는 어느새 방의 안쪽까지 들어와 있다. 사방이 깊은 어둠이다. 방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여자는 마른침을 삼킨다. 티끌처럼 작은 부스러기가 끝내 떨어진다. 문턱에서부터 시작되어 길게 이어진 흔적들이 비로소 끝이 난다. 이불이 원래만큼이나 깨끗해진다.
여자는 발로 바닥을 더듬으며 천천히 나아간다. 여태 사물이나 벽이 앞을 가로막은 적이 없으니 정면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이대로 걷다 보면 뭔가와 마주치게 될 테고 그때 몸을 돌리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방을 나갈 수 있다. 여자의 걸음이 미세하게 빨라진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나간다. 그러다 여자의 몸에 뭔가 닿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의 몸에 뒤집어씌워진 이불이다. 이불자락에 뭔가 슬그머니 닿고 사라진다. 그 순간 몸이 움츠러들고 경직된다. 뱉어내던 숨을 참고서 입안에 머금는다. 내려놓던 한쪽 발을 여전히 들고 있다. 모든 행동을 섣불리 이어 갈 수 없다. 그 상태 그대로 정지해 있다. 흔들리던 이불이 멈추고 나서야 서서히 발을 내려놓는다. 두 발을 온전히 바닥에 붙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한참을 서 있던 여자가 걸음을 내디딘다. 여자의 걸음에 맞춰 이불이 흔들린다. 아무리 걸어도 벽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너무 작은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그걸 인지하지 못해서 방은 좀처럼 끝이 없다. 끝에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방은 깊어지고 있다. 깊게 걸어 들어갈수록 그것은 자주 여자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건 방의 일부다. 방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벽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다. 창문일 수도 있고 커튼 위에 떠오른 그림자일 수도 있다. 그게 어쩌면 방의 주인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지 여자가 방을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 방의 한 부분으로 남아 여태 방을 지키거나 감시했을 거다. 방을 떠나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너무나 오랜 시간을 방에서 보냈을 거다. 그 사정을 여자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별수 없다. 한시라도 빨리 방을 벗어나야 한다. 벽을 마주하고서 정확히 반대로 돌아서면 된다. 걸어온 길을 거슬러 가면 문턱이 있을 거고 그걸 넘어 방을 나가면 된다. 여자는 정면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간다. 여자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이불이 흔들린다. 여자가 걷는 걸음의 속도보다 빠르게 이불이 흩날린다. 그때마다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크고 작은 사물들이 전부다. 멈춰 서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좀처럼 안심이 되지 않는다.
여자는 자주 방을 둘러본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건 언제 어디서든 예고도 없이 나타난다. 이불의 끝자락만 겨우 스치고서 사라진다. 그 정도의 체고를 가진 아이를 떠올린다. 둥근 정수리가 손끝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이가 곁을 지나다니는 것 같다. 이불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나부낀다. 그런데도 조금도 흘러내리지 않고 상반신을 잘 가리고 있다. 여자는 자꾸만 걸음을 재촉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틈틈이 이불을 매만진다. 주름지고 접힌 부분이 없도록 펴낸다. 앞과 뒤가 서로 평행이 되도록 맞춘다. 그러다 보면 이불이 처음 모습 그대로 차분하고 단정하게 유지된다. 여자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방을 걸어간다. 고개가 꺾어진 채로 정면을 향해 간다. 한시라도 빨리 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쉬지 않고 걷는다.
처음 벽을 마주하고 선다. 몇 차례의 심호흡 끝에 몸을 돌린다. 발을 여러 번 굴려 반대로 돌아선다. 벽을 등 뒤에 두고 천천히 걸음을 뗀다. 그와 동시에 이불이 뒤쪽으로 당겨진다. 뒷자락이 허공에 걸린 채 팽팽하게 펴진다. 여자의 얼굴에 이불이 바짝 달라붙는다. 더운 숨이 이불에 옅게 스민다. 여자의 얼굴이 금방 축축해진다. 여자는 숨을 뱉어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만큼 이불이 더 당겨진다. 끝자락이 허벅지 위로 살짝 올라온다. 여자는 고개를 바로 한다. 그러자 이불이 원래의 길이만큼 내려온다. 들었던 발을 제자리에 얌전히 내려놓는다. 혹시나 이불이 뒤로 넘어가 버릴지도 모르니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서 있다. 여자는 전방만을 주시한다. 그런다고 뒤가 보이지는 않는다. 등 뒤가 서늘하다. 여자의 얼굴에 땀이 맺힌다. 이전의 상황을 곰곰이 되짚는다. 몸을 돌리기 전에 벽이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 몸을 돌린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게 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벽이 아니라 사물이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지금 뭔가가 여자의 뒤에 있고 그게 이불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여태 이불을 스치고 지나간 것일 게 분명하다. 뒤를 보기 전까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맺혀 있던 땀이 뺨을 타고 흐른다. 여자는 살며시 몸을 돌린다. 조금 전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선다. 동시에 이불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여자 곁에 축 늘어진다. 방금까지 이불을 쥐고 있던 게 말끔히 사라지고 없다. 눈앞에는 텅 빈 허공만이 남아 있다. 몸을 낮게 숙이고서 들여다본다.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발을 굴리고 주위를 여러 번 맴돌아 보지만 이불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거긴 정말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이불의 끝자락이 살짝 주름이 져 있다.


달아나 버렸어.
단지 뒤를 돌아보아서.


이불 안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맺힌다. 쌓여 있던 먼지가 표면에 떠오른다. 어디로든 흘러가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가라앉기도 한다. 여자는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방의 일부가 되어 간다. 방에 놓인 여느 사물들처럼 쓸쓸해진다. 모든 건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놓여 있다. 여자 또한 여러 번 몸을 돌린 탓에 방향을 잃었다. 그대로 걸어가더라도 거기 문턱이 있을 리 없다. 수중에 나침반 하나 없는 여자가 차분히 걸음을 내디딘다. 뒤를 돌아보거나 지나온 자리를 살피지 않는다. 걸음을 재촉하지도 멈춰 서지도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이불이 지그시 당겨진다. 그게 마치 힘없는 아이가 치맛자락을 잡고 붙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고 여린 울음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도 같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여자의 몸이 희미하게 떨린다.
그건 여자 곁에 있다.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잠자코 기다리며 때를 노리다가 방심한 틈을 타 나타난다. 가까이 다가와서 이불을 스치거나 잡아당긴다. 슬쩍 들추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한다. 여자는 가끔 비틀거린다. 위태롭게 휘청거리기도 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걸음을 늦추거나 무작정 달려 다닌다. 방 한구석에 들어가 숨을 죽이거나 사물과 사물 사이에 몸을 구겨 넣는다. 아무리 빠르게 달리거나 숨어도 완벽하게 따돌릴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여자의 몸에 뒤집어씌워진 이불을 흐트러뜨리거나 제멋대로 구겨 놓는다. 여자는 이불이 구겨진 것도 모르고 여전히 숨어 있다. 서랍 어느 칸에 담겨 입을 길게 찢고서 낄낄대며 웃는다. 턱으로 침이 흘러내린다. 허공에 길게 늘어진다. 서랍 안에 침이 고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서랍을 나와 이불이 구겨진 걸 알아채고서 울상 짓는다.
여자는 온갖 표정을 지어 가며 방을 활보한다. 그건 아무런 표정이 없고 표정을 지을 얼굴이 없다. 아직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없으니 당연하다. 모든 건 이름이 부여된 이후에 생겨난다. 이름에 뿌리를 두고 신체가 돋아난다. 이름이 불리는 만큼 자라난다. 모두가 다른 속도로 성장한다. 충분히 이름이 불리면 성장이 멈춘다. 반대로 성장을 마치기도 전에 더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미완성의 상태로 남는다. 아무래도 그건 슬픈 일이기에 여자는 나름대로 이름을 붙인다. 부르고 싶은 이름들을 모두 끌어와 찬찬히 발음한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기의 태명이나 마을에 살다 간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마을에 산 적 없는 남자의 이름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끝내 묵음한다. 단 하나의 이름도 이불을 통과하지는 못한다. 여자가 호명하는 건 모두 방 안에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서 여자의 곁에 있다.


그들은 함께 방을 누빈다. 방의 깊은 구석까지 들어간다. 묵은 먼지가 일제히 부양한다. 모두 제자리를 잃고 다른 자리에 내려앉는다. 아무도 그걸 모른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서로를 따르고 있다. 한시라도 멈추지 않고 걷거나 달린다. 일렬로 늘어선 몸을 옆으로 뒤집거나 앞으로 구르며 나아간다. 낮은 곳을 지나기 위해 기어가거나 높은 곳을 서로의 등을 밟아 오르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방의 끝에 도달한다. 그런다고 멈춰 서지는 않는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또 다른 끝을 향해 간다. 어떤 행동도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옷 하나 걸리지 않은 행거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선반 끝에서 가볍게 뛰어 탁자 위로 착지한다. 벽과 사물이 벌어진 틈에 모로 들어간다. 먼지를 뒤집어쓴 여자가 문 하나를 발견한다.
문은 크고 높은 사물로 완벽하게 가려져 있다. 방을 아무리 세심하게 살펴봐도 거기 문이 있다는 걸 알 수 없다. 그런 문 앞에 여자가 서 있다. 이불 너머로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문에는 문고리 하나 달려 있지 않다. 그래서 벽의 일부로 보인다. 여자는 그 문을 열 수 없다. 하물며 손이 있다 하더라도 문고리가 없는 문을 열기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문은 바깥으로 통한다. 문을 열면 집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건 정말 위험하다. 지금은 너무나 깊은 밤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특히나 마을은 더욱 그렇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작은 호수 하나 없지만 수시로 안개가 낀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오래 고여 있다. 가끔 산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에서 희미하게 이취가 난다. 마을 사람들은 산 너머에 바다가 있으리라 입을 모으곤 한다. 산 너머를 본 적이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말을 여태 믿고 있다. 섣불리 산을 넘지는 않는다. 산은 너무나 크고 높다. 아무리 일찍 산을 오른다 하더라도 넘기도 전에 밤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안 된다. 밤에는 덜 자란 아이들이 실종되고 산에서 가장 큰 나무에 여자가 목을 맨다. 길을 잘못 들어선 남자가 절벽에서 거꾸로 떨어지고 이유 없이 산불이 나고 번져 모든 게 다 재가 된다. 그런 일들은 어떤 예감도 없이 일어난다. 낮보다는 밤에 일어나고 아는 사람만 안다. 여자는 마을에 살면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기에 문을 열지 않는다. 여자는 몸을 옆으로 숙인다. 문고리가 있던 자리에 눈을 가까이 댄다. 홈은 먼지로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문 너머는 꽉 막혀 있다. 어쩌면 막다른 길이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킨다. 문 앞을 지나 틈 사이를 빠져나온다. 이불에 온통 먼지가 묻어 있다. 여자는 다시 방 안을 헤집고 다닌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 가며 걸음을 옮긴다. 온갖 사물들을 지나고 밟고 뛰어넘는다. 어렵지 않게 방을 다 완주한다. 먼지들이 어디론가 굴러 떨어졌는지 이불이 어느새 말끔해져 있다.


방은 여전히 어둡다.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모든 벽과 사물들이 이불 너머에 얌전히 놓여 있다. 여자는 방을 여유롭게 거닌다. 아무런 걱정 없이 걸음을 뗀다. 눈앞의 풍경들이 몇 걸음만으로 뒤로 밀려난다. 모든 풍경들이 등 뒤에 놓인다. 그렇게 여자는 방의 끝에 선다. 능숙하게 몸을 돌리고 걸음을 내디딘다. 주위를 둘러보지도 걸음을 주저하지도 않는다. 정면을 바라보고서 힘주어 걸어간다. 방의 끝에서 끝까지 몇 차례 왕복한다. 끝은 언제나 같은 곳에 놓여 있다. 동일한 보폭을 유지하고 걸으면 동일한 보수로 끝에 당도한다. 방의 면적과 구도가 헤아려진다. 방을 채운 사물들의 크기와 형태가 눈에 익는다. 사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문과 시계와 낙서의 위치까지 정확히 기억해 낸다. 방이 제법 익숙해져서 이제는 한눈에 훤히 보인다. 여태 지나온 수십 개의 방들처럼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 둘 떠난다. 그들의 방식대로 예고도 없이 떠나간다. 그렇다고 방을 떠나는 건 아니다. 여자의 곁에서 떠날 뿐이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지만 웃거나 울지 않는다. 여전히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없어서 기뻐하거나 슬퍼할 표정이 없다. 표정이 없으니 얼굴도 없고 신체 또한 없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게 된다. 그걸 여자는 전혀 모른다. 혼자서 태평하게 방을 완주하고 있다. 세상에 없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다리를 넓게 찢는다. 허공을 비집고 발끝을 밀어 넣는다. 이불이 바닥에 길게 끌린다. 방의 끝에 서 있던 여자가 또 다른 끝에 닿는다. 한 걸음 만에 방을 완주해 나간다. 그럴수록 혼자가 된다. 이미 다 떠난 뒤에야 그걸 깨닫는다.
여자가 방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지나온 것들을 하나 둘 짚어 가며 되돌아간다. 혹시나 놓치고 지나쳐 버릴까 봐 꽤나 조심스럽다. 지나치면 다시 돌아볼 수 없으니 걸음이 유난히 느리다.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속도로 걸어가고 있다. 닫힌 서랍을 들여다보거나 커튼이 쳐진 창밖을 내다본다. 벽이나 바닥 틈 사이에 눈을 가까이 대고서 훑는다. 소리 나지 않는 모빌에 매달려 하염없이 회전하고 바닥에 깔린 러그 아래로 머리를 밀어 넣고 포복한다. 자신도 모르는 새 방을 몇 차례 완주한다. 아무리 둘러봐도 방에는 여자뿐이다. 여자 혼자 방 안 곳곳을 헤집어내고 있다. 방은 그 어떤 것도 달라진 게 없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다.


이 집에 손님은 처음이었는데.
향긋한 차 한 잔 내어주지 못했잖아.


방의 풍경은 제법 익숙하다. 여태 그들과 함께 지나온 풍경 속에 여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방에는 여자가 남긴 흔적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없다. 사실 흔적이랄 게 이불자락이 먼지를 쓸어내며 생긴 무늬가 전부다. 그 아래로 희미한 발자국이 찍혀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발자국은 이불자락에 쓸려 지워지기 마련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발자국은 대개 온전하지 못하다. 그건 이어지지 않고 자주 끊겨 있다. 한쪽 발로만 발자국이 찍혀 있거나 모두 다른 방향으로 찍힌 발자국이 일렬로 이어져 있기도 하다. 방에는 그 정도의 흔적들뿐이다. 그들은 작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자꾸만 몸을 돌린다. 방향을 정하지 못했으니 어디로든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다. 여자가 서 있는 곳을 기점으로 수십 개의 발자국이 생겨난다. 발자국은 먼지 위로 떠 오르고 선명해지고 뭉개지고 으깨진다. 도저히 발자국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여자가 회전하는 방향으로 이불이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허공에 자유롭게 날리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더 이상의 방도 없다. 문턱이 없으니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방을 완주해 나가면서 그 사실을 깨닫는다. 너무 늦게 깨달아버려서 느린 속도로 멈춰 선다. 발아래 달처럼 크고 둥근 발자국이 생겨 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보폭만큼씩 멀어져 간다. 가까워지지 않고 멀어지기만 한다. 발에 무언가 밟혀 바스라진다. 꽃 부스러기다. 바닥에 길게 수놓아져 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에 하나 둘 달라붙는다.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흔적을 점점 지워 간다. 그걸 다 지우고서 문턱 앞에 선다. 발밑에 꽃 한 송이만큼의 부스러기가 있고 방 한 칸에서 나올 법한 먼지가 있다. 여자는 문턱을 넘어가지 못한다. 한동안 문턱 앞에 서서 입을 찢어 웃고 악쓰며 운다. 겁에 질려 흐느끼고 환호하며 기꺼워한다. 여자가 내는 어떤 소리도 이불 한 겹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불에 부딪히고서 다시 여자에게로 되돌아간다. 잘게 부서지고 일그러진 소리가 회신된다. 그게 거듭될수록 전혀 다른 음성이 된다. 다만 이불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문턱을 넘는다. 다리나 머리부터 순차적으로 방을 빠져나온다. 어느 부위부터 빠져나왔든 상관없다. 분명한 건 방은 여자의 등 뒤에 있다. 여자는 방을 등진 채 한참을 서 있다. 끝내 걸음을 떼고 또 다른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거긴 이미 예전에 여자가 지나온 방이다. 여전히 이름 모를 꽃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림자가 커튼 위로 조금 더 팽창해 있고 젠가가 무너져 있으며 직육면체의 성냥갑은 마찰면이 다 닳아 있다. 잊지 않고 멈춰 서서 들여다본다. 꺾어져 있던 고개가 어느새 바로 서 있다. 문턱을 넘고 방을 통과한다. 그렇게 하나 둘 역행한다. 방에 딸린 욕실도 가끔 들른다. 창문 하나 없는데도 여전히 잘 말라 간다. 전보다 더 말라버려서 이제는 다른 방들과 같은 습도를 유지한다. 차가운 타일 위를 걸어 안쪽에 놓인 욕조에 들어간다. 이불이 몸을 다 덮어서 여자는 하얗게 표백된다. 정말 물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숨을 참는다. 조금의 미동도 없어서 빈 욕조처럼 보인다. 그런다 하더라도 어디로든 벗어나지 못한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자 전과 같은 자리에 같은 양의 물이 스며들어 있다. 여자는 여전히 그걸 모른다. 그대로 욕실을 나와 수십 개의 문턱을 넘는다.
끝없이 이어진 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간다. 여자의 방이다. 원목으로 된 원형 협탁이 있다. 상단에 놓인 자개거울은 앞으로 넘어져 있다. 거울 앞에 선 여자가 한참 동안 이불을 매만진다. 이불이 앞뒤로 여러 번 움직이다 이내 자리를 잡는다.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제야 여자는 걸음을 옮긴다. 남자의 서재에 들어선다. 서재는 여전히 먼지가 가득하다. 여자는 책장 앞에 서서 책을 고른다. 자신이 골라두었던 책은 어디에도 없다. 그 자리는 책이 없고 텅 비어 있다. 옆에 꽂힌 책은 쓰러지지도 않고 제자리에 멀쩡히 서 있다. 여자는 더 이상 책을 고르지 않는다. 그래서 책이 더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 한 권의 책만 빼고 모두 제자리에 꽂혀 있다. 여자는 문턱 앞에 선다. 여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다시 원점이다.
방은 여전하다. 크고 작은 사물들이 사방에 놓여 있고 거길 제외한 공간에 두 채의 이부자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여자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천장에서부터 길게 뻗어 내려온 고리에 이불이 걸린다. 그런다고 고리가 당겨지거나 이불이 흘러내리지는 않는다. 그저 고리가 좌우로 흔들릴 뿐이다. 자신의 이부자리로 곧장 걸어간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걸었으니 지쳐 있다. 이부자리에 발을 들이고 선다. 베개를 등지고 몸을 돌린다. 슬쩍 고리를 쳐다본다. 고리는 이미 멈춰서 허공에 꼿꼿하게 서 있다. 여자는 이부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는다. 더러워진 두 발이 여자에겐 보이지 않는다. 상반신이 서서히 뒤로 넘어간다. 머리에 괴인 베개가 미세하게 낮아진다. 방을 돌아다니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다. 호흡이 균일하게 느려지고 온몸의 힘이 빠진다. 이부자리 위로 여자의 몸이 축 늘어진다.
그 순간 남자가 기척도 없이 일어난다. 이불이 씌워진 상반신이 서서히 수직으로 선다. 남자는 방 한가운데에 높게 솟아난다. 이불 아래로 두 다리가 길게 뻗어 나와 있다. 남자는 그대로 발을 짚고 일어선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첫걸음을 내디딘다. 그 걸음으로 이부자리를 다 벗어난다. 거긴 다름 아닌 문이 있다. 남자가 누워 있던 이부자리 바로 옆에 문이 나 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다. 그 문을 지나쳐서 남자가 걸어간다. 남자가 방을 완주해 나가는 시간이다. 여전히 방 안에 있다.


해가 떠오른다. 눈부신 빛이 만물을 균등하게 비춘다. 모두가 침착하고 고요하게 깨어난다. 홑겹의 악몽을 뒤집어쓰고서 기지개를 켠다. 하루 동안에 해야 할 몫의 일을 해낸다. 오래전의 일을 해내지 못해서 여태 그날을 살아가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하루쯤 있다.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날이 있기에 삶은 끝없이 되풀이된다. 모두의 삶이 그런 식이라서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산다. 오늘도 마을은 평온하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어둠이 걷힌다. 따스한 빛이 마을을 빠짐없이 비춘다. 집에 난 창에 빛이 들어차고 어둠을 몰아낸다. 일곱 번째 집이다. 그 집까지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진다. 그래서 마을의 밤이 이제 막 끝이 났다.















작가소개 / 김수온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문장웹진 2018년 05월호》


추천 콘텐츠

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