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의 「그것들」을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8-10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2,362
그것들
주머니는 감싸준다
실수할 때마다 주머니를 찾았다
아침에 나갈 때면
꼭 동전 몇 닢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카드만 쓰지 않아?
친구가 물었다
들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속으로 말을 삼켰다
고개를 끄덕일 때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짤랑짤랑 소리가 얼마나 안심되는 줄 아니
머릿속에 서릿발이 서고
가슴속에 빗발이 칠 때마다
나는 필사적으로 동전들을 만지작거렸다
식초 안에 벗어놓은 얼굴
입가에 묻은 흰 날개 자국
구리, 니켈, 아연, 알루미늄......
원소가 빛발이 되어 주머니 속에서 반짝였다
나갈 때
주머니는 하고 싶은 말들로 두둑했지만
돌아올 때
주머니는 상처투성이일 적이 많았다
속엣말이 불거지지 않게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매일 밤
상처를 입고 옷을 벗었다
매일 아침
상처 입은 옷을 입었다
온기를 내뿜으며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동전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것들을 감싸 쥔 손에 땀이 가득 맺혔다
짤랑짤랑
아침은 매일 찾아온다
추천 콘텐츠
봬요 숙희 내일 봬요 그래요 내일 봬요를 처리하지 못해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내일 뵈요 라고 썼다가 그건 또 영 내키지가 않아 그럼 내일 뵐게요 라고 적어보니 다소 건방진 듯해서 이내 그때 뵙겠습니다 라고 고치자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고 내일 봐요에 느낌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두 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갈팡질팡하는데 가벼운 인사를 가벼운 사람으로 당신이 나를 오해할까 잠시 망설이다 숨을 고르고 다시 봬요로 돌아온다 그런데 봬요를 못 알아보고 세상에 이렇게 한글을 이상하게 조합하는 사람도 있네 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면 봬요는 청유형 존대어라 어색한 걸 모르냐고 되물을까 봐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싶어져 내일 봅시다 라고 따따따 찍어보니 참나 이건 정말로 더 아니다 싶어 결국 내일이 기다려져요 라고 보내버리고는 손목에 힘이 풀려 폰을 툭 떨어뜨렸다 『오로라 콜』(아침달, 2024)
- 관리자
- 2024-07-11
환한 집 강우근 나의 어린 조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누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너의 그 칙칙함을, 무표정을 좋아해” 가족 모임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만화에 나오는 부기라는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고 많은 것을 무서워해 바깥을 안 나가는 부기 아저씨를 소피라는 꼬마가 매번 불러내어 모험이 시작된다고 나는 그런 조카를 하루 맡아주기로 하고 “나는 하얀 집에 살고 싶어” 조카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에 그린 집을 꺼낸다. 여름에는 태풍이 오고, 가을에는 은행이 터져 나가고, 겨울에는 폭설이 떨어질 텐데. 하얀 집은 금세 검어질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놓인 생크림 케이크는 작아질수록 포크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다. “삼촌은 어떤 집에 살고 싶어?” 나는 검은 집이라는 말을 삼키고 환한 집이라고 대답하며 애써 웃는다. 조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환한 집은 어떤 집일까, 생각에 잠기는 사이 생크림 케이크에는 검은 파리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나는 서둘러 케이크를 치우고 조카가 돌아온 테이블에는 새롭게 놓인 생크림 케이크 “······삼촌이 배가 고파서” “삼촌에게 추천해 줄 케이크의 맛이 아주 많아.” 환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 우리는 생크림 케이크를 아무런 근심 없이 나눠 먹는다. 『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 관리자
- 2024-06-14
- 관리자
- 2023-12-28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