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네가 푸딩 빙수*를 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퇴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02-15
  • 조회수 410

 

선영이는 우리랑 노는 게 재미가 없대 혜리는 옆 반 애들이랑 같이 다니기 시작했고 윤서는 역시 연애를 하느라 바쁘구나

실없이 저물었다가 기울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얼굴들을 좀 봐 절대 안 받아주지 저리 가버리라고 하지 우리는 킥킥거리면서

어떤 아이들은 여자 아이돌 노래를 무한 재생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아이들은 끝내주는 록을 듣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우리가 화면으로 보고 있는 건 조잡한 분장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의 영화 흑과 백의 세계에서 지루하지 않은 게 없지만

너와 함께 있으면 슬래셔도 로맨스가 되고 호러는 아마도 멜로 상영이 다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낡아빠진 이야기를 반복한다

 

좀비가 별거 있나 어제는 우리였는데 오늘은 네가 되고 내일은 다시 우리가 되길 바라는 애들을 보고 좀비라고 해 너는 말했다

교문에서는 다른 애들이랑 팔짱을 끼고 대행진 저런 애들은 손톱 끝이 반짝거려 밤새 맞은 티도 나지 않고 아마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나 봐

창문 너머까지 푸르딩딩한 살점이 펼쳐진다 나는 네가 끝까지 남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마지막까지 사람이었으면 하는데

먼저 떠나버린 녀석들의 이름이 흐느적거리며 교탁 아래로 떨어졌다 선영이였던 것 혜리였던 것 윤서였던 것 그렇지만 너는 그대로구나

파랗게 웃어봐 바닐라 향보다 달콤한 미소 포토 카드를 들고 예절샷*같은 거 찍으러 다니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는 인간들이니까

 

나는 왜 아직까지도 좀비가 아닌지 궁금해하는 너에게 한 번 배어든 냄새만큼이나 지워지지 않는 항체 덕분이라고 하고 싶지

품이 맞지 않는 교복을 입을 때 하나 둘 생기는 항체 큰 언니 작은 언니 그리고 내가 세 번 쓰는 가방에 박혀 있는 항체

그렇지만 나는 알아 드러내지 않는 게 가끔은 지금을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걸

너는 잘 다려진 와이셔츠처럼 앉아서 나랑 이야기 나누지 깨끗한 분홍색 양말을 신고서 여기 있는 게 믿기지 않을 때도 있어

기울어진 어깨에서 거짓말처럼 흩날리는 꽃향기 가끔은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야

화면에서는 점점 강인해지고 있었다 햇빛은 굵어지고 달콤해졌다 좀비들은 단단해지고 우리는 손깍지를 꼈다

 

여자아이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

아이돌 포토 카드와 솜 인형들

그리고 온갖 근사한 디저트들

그런 걸로 만들어져 있겠지만...*

 

방학이 끝나도 우리는 계속 만나는 거야 (저기 대학생 언니들이 가는 카페, 더럽게 비싼 디저트 먹지 말고 우리는 늘 그랬던 대로 학교 앞 분식집에서 만나는 거야) 알겠지?

 

무한히 서로의 최선이 될 수 없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알고 있잖아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

 

학원 버스 도착했으니까 이제 가 볼게 하면 먼저 깍지를 풀었다 네가 아니라 버스가 놓은 손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팔을 크게 벌린 뒤에 좌우로 흔든다 손가락은 뒤죽박죽 흩날리고 구름은 창밖으로 날아갔다

운동장에서 점 하나가 되어가는 너 우리는 언제까지나 두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 커스터드 크림 위에 부드러운 푸딩이 올라간 디저트이자 선영이와 혜리 그리고 윤서는 한 번쯤 먹어봤을 법한 것.

**음식과 아티스트 포토카드를 함께 찍은 사진.

***마더 구스 변형.

추천 콘텐츠

우림의 눈

밤새 시를 썼어 열대 우림에 관한 시였어 노트북 한쪽에는 우림의 사진이 십 초마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어 울창해서 너무 울창해서 앞이 보이지도 않는 풍경이 등장할 때마다 떨었어 나의 손 떨림이 자판을 두드렸어 때로는 몰아치는 마음이 나를 시의 방향으로 밀기도 했어 창밖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어 물방울의 발자국이 창에 새겨지고 장마의 발목이 두꺼워졌어 이제는 아무도 장마라고 부르지 않는 순간을 위해 시를 썼어 이곳에는 1년 내내 비가 온다고 했어 그렇다면 장마가 아니라 우기라고 부르는 게 맞다는 말을 들었어 누가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시를 썼어 나는 구름처럼 흘려보내는 걸 못 했어 머금거나 토하거나 둘 중 하나였으므로 밤새 시를 썼어 사진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세상의 모든 우림은 다 가본 것만 같았어 나무는 계속해서 새로운 파문을 몸에 새겨가고 끝도 없이 안개가 흘러나왔어 넝쿨이 나의 손목을 휘감아서 내가 저 우림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어쩌나 싶었어 우림 중에서도 구름이 너무 많은 곳은 운무림이라고 한댔어 나는 마치 옅은 구름층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어 창밖에서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어 순간의 정적 고요해지면 나는 사진 속 우림과 눈을 맞추었어 녹색의 정사각형이 내 눈에서 한없이 커져가는 시간이었어 계속해서 시를 썼어 한 문장을 완성할 때마다 방의 습도는 올라갔지만 나의 눈동자는 맑아졌어 우림과 눈을 정교하게 맞출수록 빗소리가 커지고 내 눈에 고여 있던 모든 걸 쓸어갔어 그래서 우림으로 떠나는 시를 썼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땅을 밟고 저 멀리까지 달리는 시였어 열대야가 끓어오르면 사람들은 이게 또는 그게 시가 아니라고 했어 꿈이라고 했어 그렇지만 나는 밤마다 시를 썼어

  • 모모코
  • 2024-07-03
아스팔트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귀를 기울였지. 길도 울고 있는 것만 같아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검은 길의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울퉁불퉁한 표면을 곧게 깔아놓은 건 네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너를 닮은 것들은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넘어져서 얼굴이 쓸려도 아프지 않았어. 무르팍이 깨지지도 않았지. 아, 여긴 꿈이구나. 완전히 내가 만들어 놓은 상상의 안쪽이구나. 생각하다가. 나는 꿈에서도 너를 만나는구나. 맨발을 내려다보며 이 길 위에서 내가 자꾸만 넘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소리가 들리는 길은 처음이야. 울고 있는 길도 처음이지. 너는 분한 일이 있으면 울고야 마는 아이. 앞을 생각하다가 터져버린 울음, 나는 만나본 적 없는 것들 위에서 미끄러지고. 베개에 고개를 묻고 운 적이 있어. 너와 함께 울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힘껏 달려 본 적은 없어서. 아스팔트에서 눈을 뜨고서 알아차린 것들. 달구어진 길에 엎드려서 진동을 느끼고. 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깔아두었을까. 깔아두며 앞으로 나갔을까 고민하는 동안. 너의 발끝에서 질질 흘러나왔을 아스팔트를 쓸어내린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마음을 쥐어짠 뒤에 나오는 잔여물. 그러니까 울퉁불퉁한 눈물을 쓰다듬으며. 표정으로 포장된 심장. 검게 그늘 들이찬 얼굴 쏟아부으며 딱딱해진 길. 나 밤새 너를 생각했어. 단단하게 자리 잡은 아스팔트 뜯어내며 흘려보내는 한 마디. 너를 위해 우는 동안 실컷 미끄러졌어. 만나본 적 없는 길을 걸으며. 넘어지면 몰래 우는 소녀를 생각하며. 울음을 밑창에 끼우고 달리는 너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잘 이해하고 싶다는 다짐으로. 아스팔트는 나의 이야기를 먹고 부풀어 오른다. 조금씩 말랑해지다가 힘을 주면 뜯어져서 바닥이 보이고. 마침내 포장되어 있던 길의 안쪽을 만나고. 길게 펼쳐진 길을 끌어안을 수는 없지. 끝도 없이 달려가는 네 마음처럼. 다만 나는 귀를 기울일게. 말캉한 길. 너의 가장 내밀한 표정을 가만히 담아내는 상상. 알고 있지. 이 모든 건 내가 만든 상상의 안쪽. 나는 여전히 네 뒷모습을 보고 걸어가겠지만. 꿈에서도. 꿈속에서도 생각하고 있어. 악착같이 울부짖으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소녀를. 결승선보다도 뛰어가는 방법을 골몰하는 너를.

  • 모모코
  • 2024-06-30
에니아이오스* (下)

오늘의 너는 어떤 창틀에 도착하게 될까. 나는 사랑하는 너에게 무수한 창을 남기고 갔다. 일기장을 열면 쏟아져 나오는 나의 계절들. 너는 너머를 들여다보듯이 나의 어제를 살피는 사람. 내가 열대 우림의 풍경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너는 설원의 얼굴을 만난 적이 없어서. 멋대로 혹은 마음껏 머릿속에서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빚을 테지. 눈이 휘몰아치고 눈앞이 온통 새하얘지고 눈밭 위에서 굴러다니는 개들의 눈빛을 보고 네가 모르는 감각. 하지만 끝내 네게 건네주고 싶었던 감각. 너는 울창한 곳에서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찻잎을 보내 주었고. 나는 눈사람처럼 시간을 뭉쳐 너에게 보냈다. 일기장을 펼쳐 두 눈에 이야기를 새겨 넣고. 너는 너의 일기장에 다시금 새겨둔다. 언젠가 이걸 널어놓으려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가닿을 거라는 믿음으로. 마치 나의 순간들이 네게 그랬듯이. 너의 곁에 서 있지는 않지만 나는 늘 함께 있다, 기나긴 겨울밤을 닮은 기록의 형태로. 말하자면 창틀은 프레임. 창밖으로 펼쳐지는 수많은 컷. 서로를 꼭 껴안은 컷들은 장면이 되어서 나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단지 그걸 기록하고. 너는 기억하고. 나는 더 이상 설원에 없지만. 오랫동안 방에 머무는 찻잎의 열대 과일 향기처럼. 너의 눈동자에서 나는 영영 상영된다.-* 로버트 비버스가 제작한 영화의 사본은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테메노스’라는 공간에서 2004년부터 4년마다 꾸준히 상영되고 있다. 한 번의 상영회마다 작품을 전부 상영하지 않고, 일부 주기를 선택하여 상영한다.

  • 모모코
  • 2024-06-19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최백규 시인

    모모코 학생, 안녕하세요. 이 시 좋네요. 저 혼자 선정하는 것이었다면 장원으로 손색이 없는 듯합니다. 혹시 장원으로 잘 선정이 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심사위원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모모코 학생만의 이 감성을 잃지 않고 지키기를 기원합니다. 모모코 학생의 감성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번이 글틴에서의 제 마지막 합평입니다. 더 좋은 자리에서 웃으며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2023-03-09 01:14:34
    최백규 시인
    0 /1500
    • 모모코

      멘토님께서 알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그냥 무너져버린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다시 일어날 것이고, 그때의 저는 더 단단해져 있을 것 같아요. 요즘 대중성과 제 스타일 사이서 많은 고민을 해요. 이해한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깊게 다가올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저는 멘토님 덕분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또 덕분에 글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게 마지막 합평이라니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어딘가에서 더 성장한 모습으로 뵙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 2023-03-10 00:20:30
      모모코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