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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아이오스* (上)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4-06-18
  • 조회수 84

 단단한 창틀의 바깥으로 흘러가는 순간들. 흩어지지 않기 위하여 서로를 꼭 붙잡고 있는 설원의 풍경들. 설산을 보며 오래도록 우린 차를 한 모금 마시지. 그리고 연필을 든다. 


 언제나 눈이 내리는 곳이야. 이곳에서 겨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네가 보낸 소포에는 과일 향기의 찻잎, 비가 멎지 않는다는 이야기, 한 번도 겨울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목소리. 너에게 이 계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 하지만 창문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풍경들. 하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오래된 카메라처럼 창가에 앉는다. 부지런히 돌아가는 필름의 롤.


 두 눈을 굴리며 지금을 기록하고 있어. 짧아진 한낮을 비집고 한 뼘 길어진 밤에 걸터앉아서. 너에게 보낼 것들을 모으는 중. 오래도록 바깥을 바라보며 너를 생각하다가.


 눈을 감으면 하나의 파편이 완성되지. 나는 이렇게 조각을 만들어 너에게 부칠 생각이야. 안녕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니 그런 말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소리가 없는 필름처럼 조용히 설원을 살피는 시간. 나는 겨울 같은 단어 없이 내가 견딘 시간을 설명하는 법을 고민하지. 눈, 목도리, 장갑, 썰매, 스노 체인, 없이도 극지의 안부를 전할 수 있을까.


 잎을 건져내지 않은 찻물 색이 짙어지고. 있잖아. 나는 곧 이곳을 떠날 거야. 맨 끝 쪽 땅에 묶여 있지 않고. 그러니 너에게 기록을 잔뜩 전해주려고 한다. 사슴 가죽 일기장에 써내려가는 이야기.


 너무 슬퍼하지 않길. 많이 그리워하지 않길. 우리가 그래왔듯이 거리를 두고 잘 지내고 있다고 믿어주길. 네게 보내고 싶은 말을 창문에 적었다가 쓸어내린다. 눈밭 위에 새긴 마음처럼 금방 모습을 감추고.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마신다. 네가 보낸 찻잎만 남은 방을 떠올린다. 키도 몸집도 제각각인 일기장을 보내 줄게. 편지도 없이. 부언은 없이.


 내가 보낸 순간들이 가득할 네 방을 떠올린다. 택배 상자를 열면 겨울이 흘러넘칠 거야. 그때 너의 얼굴은 어떨까. 이제 연필을 내려놓는다. 



-

*마르코풀로스가 1992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작업한 모든 필름들을 22개의 주기로 편집한 영화로, 상영 시간이 80시간에 달한다. 해당 작품은 마르코풀로스 사망 당시에 편집은 완료되었지만 프린트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파트너였던 로버트 비버스가 기금을 모아 상영용 사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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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7-03
아스팔트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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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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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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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여담+멘토님께) 몇몇 분들과 모여서 하나의 주제에 맞춰 쓴 시... 입니다. 주제로부터 자연스럽게 멀리 가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주제는 비밀! ㅎㅎ 더 퇴고해서 올리고 싶기도 하지만, 고민하다 우선 업로드합니다. 연작시로 (하)편이 있는데요. 하루 1글인 것 같아서 내일 또 올려볼게요. 읽어주시는 멘토님들 글티너님들 늘 고맙습니다. 여담이지만 멘토님들 대구에서 공동 낭독회 하시는 거... 정말 가고 싶었는데 몸도 시간도 따라주지 않아서 아쉬워요. 멘토님들의 아지테이트 텍스트들, 댓글로 달아주시는 조언들 모두 잘 읽고 있어요. (최고의 감동... ㅠㅠㅎㅎ 창작에 힘이 되어요!!) 늘 감사드립니다.

    • 2024-06-19 00:33:56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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