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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게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0-25
  • 조회수 817

https://youtu.be/kzUZABVj5UQ?si=BYMzpaFKlQkEe8l_

(위 노래와 함께 읽어주세요. 고맙습니다.)






진리에게

 


안녕하냐는 인사를 건네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지언니나는 이 편지를 진부하게 시작하고 싶지 않아그렇지만 진지하게 시작하고 싶어나를 향한 언니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니까이 편지가 만약 내 한글 파일이 아닌 원고지에 쓰였다면 어땠을까아마 이미 습기와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지우개질에 가루가 되어버렸겠지몇 번이고 백 스페이스 키를 누르며 지어진 이야기오직 도로시를 위한 이야기그래서 누구에게도 보낼 수 없는 이야기이 이야기가 시작되기까지도 아주 오래도 걸렸지언니그러니까 한때는 설리였고 누군가에겐 알 수 없는 여자였고 또는 영원한 별이거나 복숭앗빛 공주인 최진리 언니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많이 고민했어우리는 비록 피로 이어진 사이는 아니지. 만난 적도 없으니그럼에도 내가 최진리 당신을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이 언니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단단한 사랑과 연대의 감정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그러니 감히 당신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적어도 이 편지 속에서는.

 

언니에게는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라는 시 속 구절을 선물하고 싶지. ‘여름이 구르는 건 누군가 열심히 발로 차고 있기 때문이다. (...) 규칙 없는 궤도뜨거운 공기나는 한때 그 애가 여름을 굴리는 걸 오래 지켜본 적이 있었다.’ 언니를 알게 된 건 2014년 여름이었으니까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면 한여름 속에서 언니의 손을 잡는 것 같아. 2013년 발매한 핑크 테이프’ 앨범의 대표곡 무대였지, TV 속에서 어쩌다 발견하게 된 거야언니가 활동하던 걸그룹 f(x)는 다소 독특한 곡으로 여전히 회자 되고 있지처음에 나도 그 통통 튀는 곡 속에 빠져들게 되었어다른 걸그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엠버 언니라거나 크리스탈 언니의 목소리가 시선을 끌기도 했어그렇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언니에게 시선이 닿았지언니는 아이돌이 상품으로서 소비되는 것에 경각심을 지니는 사람이었고나 또한 고등학생이 되어 아이돌 시장의 문제를 깨닫게 되었어우상이라 내세워지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어떤 폭력을 겪고 있는지 어릴 적에는 잘 몰랐으니까그래서 f(x) 이야기를 꺼낼 때는 늘 조심스러워무료하던 한여름을 채색한 건 그룹 f(x)였고그 중심에 언니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그렇지만 마음 한편이 편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야그렇지만 그 불편함마저 언니가 선물해준 감각이라고 생각하면언니를 알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어내가 그 여름날 f(x)를 마주하지 않았더라면최진리라는 이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도그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신념으로서 배우는 것도 없었을 테니까아무튼 언니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덕질을 해보았지나와 먼 곳에 있다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물론 그때는 초등학생이었으니이렇게 깊게 생각하진 못했을 거야그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핑크 테이프’ 앨범을 반복해서 들으며 자라났지나는 핑크 테이프’ 트랙의 반복 횟수와 함께 한 뼘씩 커졌다고도 할 수 있어그중 ‘airplane’과 ‘Goodbye Summer’는 나를 이루는 두 개의 기둥이 되었지언니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봤어그곳에서 주인공은 핵심 기억으로 이루어진 섬을 하나씩 지니고 있잖아이를테면 겨울날 가족들과 처음 해본 하키 게임으로 하키의 섬을 이루고 있다던가내 마음에는 아마 여름의 섬이 있을 것 같아그 여름의 섬의 지반은 말하자면 ‘airplane’과 ‘Goodbye Summer’인거지나는 여름날마다 언니와의 처음 언니를 만났던 기억을 되새기며 노래들을 들어두 발이 붕 떠 있지만 정말로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 게 아니라날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airplane’과 나도 언젠가 따끔하고 달콤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믿게 해주는 ‘Goodbye Summer.' 지금은 시인을 꿈꾸는 내가처음으로 써본 시도 이 두 곡에서부터 시작하지. cd 플레이어에서 노래가 울려 퍼지는 주방의 식탁에서 썼을 거야그러니 내 여름의 섬은 이런 감각들로 가득 차 있을 거야.

 

언니가 f(x)를 탈퇴한다고 할 때는놀라웠지언니는 아주 커다란 상자를 끌어안은 사람 같아서상자의 포장을 열고 또 열어도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동시에 대중 매체와 거리를 둔다는 게 아주 슬프지만은 않았어만약 이 상자의 끝이 보이게 된다면그건 너무 슬플 거라고 생각했거든언니가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없어졌음에 슬퍼하는 게 아니라그런 식으로 언니가 자신을 소모해나가는 게 싫었어그래서 사람들에게 '설리'로서 선보이는 자리를 줄여 나가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아무튼 나와 함께 시절과 시절을 건너가며 가끔 노래나 연기로 소식을 알려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어그리고 언니의 싱글 앨범정말 좋았지앨범과 동명의 곡인 '고블린'의 뮤직비디오의 도입부에서 말하지설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고그리고 그냥 다 끝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고. '머릿속 큐브 조각들을 늘어'놓고 '현실 속 늪을 찾아'가는 가사.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니나는 여기 있는 걸.' 말하는 가사나는 언니가 한 겹의 포장을 벗겨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겠구나 생각했어그렇지만 언니는 당돌했고고통을 겪었던 와중에도 언니만의 목소리를 내는 걸 멈추지 않았지그래서 나는 은연중에 언니의 다음을 기대해버린 것 같아그 언니만의 감각들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지금 와서는 나도 언니에게 부담을 주는 대중 아니었을까 생각해고백하건대 내가 썼던 시 중 '내 사랑이 당신에게 재앙이 될까 두려워'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가 있거든사실 그건 언니를 생각하며 쓴 거지하지만 그땐 아무것도 몰랐지그리고 f(x) 탈퇴 이후 본인만의 행보를 걸어가며 본인을 소모하는 건 줄여 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안일하게 생각했어.

 

그리고 2019년 10월 14그때의 나는 중학생이었지무서운 것도 사랑할 것도 없다고 믿던 중학생그렇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최진리에게 기대어 자라며 누군가를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던 시절수학 학원 가장 앞줄에 앉아 수업 들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어나와 가깝게 지내던 선생님 한 분이 그랬지설리가 세상을 떠났다고그때의 나는 그냥진짜언니그냥 웃고 넘어간 거 있지바보처럼웃었어어쩐지 언니는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날 것 같았어인스타 라이브를 켜고그런 거짓말 좀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았지그렇지만 학원이 끝나고집에 가는 길 핸드폰을 켜보고서 깨달았어언니가 진짜 가버렸다는 걸그제서야 나는 무서워할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왜냐하면 나는 사랑하는 게 있었거든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게 가장 무섭다는 걸 알게 되었어그렇지만 울지는 않았어대견하게도 참아낸 거면 좋을 텐데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게 안 믿겨서 그랬어도무지얼음 땡을 하는 것 같았지누군가 내 어깨를 치며 바보처럼 그걸 믿냐고 말해주길 바랐지만그런 일은 없었지다음 날이그다음 날이 되어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어다들 괜찮냐고만 했는데밤마다 많이 울었던 것 같아중학생이잖아사실 그전까지 누가 세상을 뜬다는 걸 실감해본 적이 없었어기껏해야 엄마 손 잡고 간 먼 친척의 장례식에서 어렴풋하게 느꼈을까나는 별이 너무 이르게 져버렸다고 생각했어나는 언니를 응원했고 동경했고 무엇보다 사랑했지너무나도 무겁게그래서 내가 슬픔으로 돌아온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나 봐나는 언니의 창작물도 사랑했지만인간으로서 보여주는 면모도 좋았어굳고 아름다운 내면들모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이 당당하게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선언을 주저하는 남자 코미디언에게 '오빤 여자와 남자의 권리가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그럼 페미니스트에요그게 다예요.' 하던 언니가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어나는 남녀 공학을 다니고 있었는데수많은 시선 속에서 그 한 마디를 못 했거든팬미팅에서는 언니의 고양이 고블린을 보고 쏟아진 이야기에 대해 앨범으로써 말하고 싶다고 했지고양이가 마치 본인처럼 징그럽다는 이야기에 대해선입견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지박상수 시인은 시인의 말 자리를 빌려 '우린 너무 아름다워서 꼭 껴안고 살아가야 해'라고 했지나도 언니를 꼭 껴안고 싶었어언니는 너무 아름다웠고 뜨거웠으니까그만큼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사랑했으니까.

 

언니새삼스럽지만 이 글을 쓰게 된 건 결국 언니 덕분이야나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언니를 보고 왔어다큐멘터리 영화 <진리에게>. 그게 오직 내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이유지물론 다른 영화들을 보기도 했어그렇지만 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나 이와이 슌지의 감독 영화보다도 좋았어언니 얼굴 보니까 좋더라영화제 전부터 <진리에게>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나의 해묵은 슬픔을 풀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가지지 않았어고백하자면 그냥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근데 그런 사람들이 많았나 봐예매가 정말 힘들더라고나 있잖아수많은 예매를 하면서실패하고도 화나지 않았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야나는 너무 좋았어사실 자리가 안 차면 어떡하지언니가 떠난 지 정확히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나만 언니를 놓아주지 못하는 건가 싶었거든그런데 바로 매진되는 거 보고 조금 울었어그 눈물엔 내 자리가 없다는 거에 한 몫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언니그래도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나 봐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이내가 사랑하는 언니를 보기 위해 많이 도와줬어여러 SNS를 통해 취소나 양도 표를 함께 찾아주었거든내 사랑들이 없었다면 언니를 보지 못했을 거야운 좋게 영화제 일주일 전에또 나의 생일 선물처럼 표가 찾아왔어취소 표를 잡은 날이 내 생일과 가까웠거든그건 여태껏 살아남아 내가 태어난 날을 다시 맞이한 게 장하다는 하늘의 뜻처럼 들리기도 했어과대 해석일까그래도 그만큼 기뻤던 거 있지. A열임에도 마다하지 않고 바로 결제했어다시금 말하지만 언니가 정말로 보고 싶었거든예고편에서 마주한 언니를 보고 싶었어화장이나 염색을 하지 않고아주 편하게 입은 언니그런 언니가 어떤 인터뷰를 했을까 궁금했지.

 

언니나는 언니를 봤어여자 아이돌이 겪는 부조리에 대해서는 똑부러지게 말하다가도마지막 한 마디를 부탁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언니를나는 언니와 이별을 했지인사 없이 헤어졌지나는 한때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린 언니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어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지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거구나언니는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세상의 수많은 면을 만지고 쓰다듬으며 감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나는 이전까지 언니가 그저 예리하게 세상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는데영화를 통해 언니는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질감을 타인보다 깊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그런 언니는 우리에게 인사하지 않지인사할 수 없지언니영화 전반에는 언니의 노래 '도로시'를 가져와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삽입되어 있어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설 '오즈의 마법사'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지언니나는 거기서 느꼈어언니는 기묘한 대륙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처럼잠시 이 별에 떨어진 도로시구나애니메이션은 소설의 구절을 인용하며 끝나아마 도로시가 은색 구두를 신고 발을 부딪히자하늘로 날아가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내용일 거야언니나는 이제 알았어너무 이르게 별이 져버린 것이 아니라언니는 별이 되어 하늘로 갔다는 걸.

 

언니 'GV 빌런'이라는 말 알아영화가 끝나고 진행되는 GV에서 이상한 질문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야그런데 <진리에게이 영화의 GV에서는도무지 빌런이 나올 수 없겠더라언니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모였으니 당연한 거겠지만처음으로 감독에게 질문을 던지는 한 남성의 말은 이렇게 시작해. '제가 11년 동안 설리 누나를 좋아했는데요,' 그리고 그분을 포함해 우리 모두 울었지그분은 언니가 자기 인생 전반에 끼친 영향을 마구 말하시더라고보통이라면 빌런이라고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질문 자리에서 본인의 생애를 나열하는 거니까그런데 여기서는그냥 나도 울어버렸어영화 내내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울었어언니가 떠나고 많이 힘드셨대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그러고 많이 울었어그분이 말씀하신 그 생애의 모든 건 언니와 깊게 연결되어 있으니남 일 같지 않기도 했고공감이 많이 갔어그러니까 GV 빌런이 아니라 GV 히어로인걸지도언니가 떠난 자리에는 히어로 뿐이네언니를 많이 사랑하면서언니를 많이 그리워하면서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어.

 

나는 한때 언니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어그렇지만 일본 만화가 하기오 모토가 그랬지사랑은 이해와 관용이라고나는 언니를 이해하고자 했고언니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을 관용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했지나는 언니가 비춘 다양한 모습을 곱씹고 곱씹으며 사랑에 빠지곤 했어하지만 그 뒤에 얼마나 아픈 도로시가 있었을지는 아직도 가늠하기 힘들어그래서 언니요즘 나는 대개의 여자 연예인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어특히 여자 아이돌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거든별거 아닌 이유로이를테면 딸기를 너무 앙증맞게 먹었다거나... 그럴 때마다 나는 언니에게서 배운 사랑을 하려고 해또 그냥 응원하려고 해더 이상 슬픈 도로시가 없도록.

 

언니나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이별과 작별에 대해 생각했어이별의 이는 떠날 이,자이고 작별의 작은 지을 작,자래이별은 타인이 떠나버렸으므로 일방적으로 행하게 된 이별이고작별은 고심하고 고민하여 지어낸 헤어질 결심으로 잘 가라고 인사하는 헤어짐이겠지나는 마침내 영화를 보고 언니를 놓아줄 수 있게 되었어언니를 잊겠다는 게 아니야인터뷰가 3분 남은 상황에서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하던 언니에게내가 먼저 작별의 인사를 하고 싶어이로써 언니를 향한 내 사랑은 여전하겠지만내 슬픔은 옅어질 거야.

 

그 여름날 만났던 화려한 아이돌내 우상 설리부터

쉽게 물러지지 않는 복숭앗빛 도로시진리를 떠올릴 때

더는 터무니없이 슬퍼지지 않을 거야.

 

나는 이제 진리에게 인사를 건넨 적 있는 사람이니까.

 

잘 자잘 가.

 

 

언니가 키워낸

아주 작은 한 알의 복숭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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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안녕하세요, 수필 게시판은 오랜만이네요.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제 자신을 드러내는 글 쓰기를 잘 못 하는데요. 멘토님께서 대산 캠프에서 만날 적에 정말 상냥하게 대해주신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복도에서, 오며 가며 짧게 만났지만 그게 제게는 꽤 단단하고 아름다운 기억이었거든요. 이건... 정말 저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이야기에요. 쓰고 나서 어디에도 올리지 않은 채로 있다가, 감사하게도 마음 나누어 주신 멘토님께 그리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진리 언니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글티너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어 용기 내어 올립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번 달 초였는데... 벌써 시월이 다 가고 있네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 2023-10-25 01:58:44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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