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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벌룬 레볼루션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3-11-28
  • 조회수 564

고하은 형은 혁명가 기질이 있었다애초에 하느님의 은총이란 이름을 달고 꼬박꼬박 절에 다닌 것부터가 그랬다하느님이 알면 니 뒤통수 한대 후리고도 남겠네라는 말은 언젠가 실종된 형의 룸메이트가 남겼다그러면 형은 무감한 얼굴로 하느님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으셔하고 대꾸했는데 그러면서도 나무아미타불 하는 염불을 외우는 버릇을 버리진 못해서 결국 형은 이름을 바꿨다고나무물론 그건 형식적이라기보단 암묵적인 것이었고 대한민국은 형을 고하은으로서 통계를 낼 터였다왜냐하면 형은 성선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순자홉스그리고 고나무출판사에선 형의 생애를 인터뷰해달라는 요청을 수백 번도 넘게 했다그럴 때마다 번번이 거절한 건 언젠가의 형이 말했듯 인간은 항상 남이 가장 방심한 순간에 뒤통수를 후리는 족속이기 때문이다하느님은 뒤통수 같은 거 안 후릴 테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므로 후릴 수 있는 여지가 왕왕 있다는 것이 논리의 시작과 끝이었다물론 그 말투는 룸메이트에게서 옮아온 것으로 실제로 형은 그리 과격한 언어를 자주 사용하진 않았다그러니까 나는 도통 성악설을 믿은 고하은그는 대체 누구인가’ 따위의 인터뷰에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형은 성선설을 믿었으므로.

 

*

 

사람 좋은 인상의 남자가 카페로 들어온다. 180이 한참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성은 멀뚱히 앉아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하곤 크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살짝 올라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이건우 님 맞으시죠?”

.”

오늘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해요저 정말 연락받고 깜짝 놀랐잖아요누가 요청을 해와도 거절하신다고 들었는데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

이제는… 그만 썩힐 때도 됐죠부패하기 전에 놓아주고 싶어서요.”

잘 생각하셨어요저희 출판사가 소설류의 허구에는 좀 약하지만이런 사실 기반 평전 같은 건 기깔나거든요쓸데없는 편집도 없고.”

알고 있다그래서 선택한 것이다나는 몸을 반쯤 접어 내려둔 가방에서 힘겹게 노트북을 꺼내는 인터뷰어의 옆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잘 먹고 잘 자며 굴곡 없이 살아온 사람의 분위기 같은 게 그에겐 있었다노트북 세팅을 마치고 마우스를 몇 번 딸깍이던 그는 곧 휴대폰 녹음기를 틀고 눈알을 반짝인다.

그럼 시작할까요?”

 

*

 

형을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죽음을 언급해야 합니다그건 꼭 형이 살인자였기 때문은 아닙니다오히려 그건 제 쪽에 가깝죠생과 사그건 형을 가장 잘 표현하는 키워드가 될 겁니다.

 

그날은 많이 지쳤습니다평소랑 똑같은 노동이었음에도 유독 가라앉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어요얼른 돌아가서 씻고 싶었습니다아니씻기 전에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무엇보다도 휴식이 절실했습니다그리고 그날은 룸메이트가 목을 맨 날이었어요.

사람이 죽었습니다그곳은 가출한 놈들 몇몇이 살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는데 지나는 사람도 없고 관심 두는 이도 없었지요그런데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니요룸메이트의 이름이 병으로 끝나던가아무도 그 애를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혼자 죽은 거지요그걸 제일 처음 발견한 게 저였습니다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룸메이트가 불쌍하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런 기분보다는 그냥더러웠습니다기분이 더러웠어요피곤해 뒈지겠는데 그 새끼가 제 침대 옆에서 목매달고 죽은 게 너무 더러워서 베개와 이불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왔습니다그 애는 죽었지만 저는 잠을 잤어요안 잘 수가 없었습니다죽은 사람을 챙기기 전에 저부터 죽을 것 같았다고요자살과 과로사하루에 두 명이 죽는 건 아무래도 불유쾌합니다.

다음으로 귀가한 건 철이라고 합니다이 애도 풀네임은 기억나지 않고언젠가 그 애를 철아하고 칭하던 목소리만이 떠오릅니다철이는 우리 중에서 가장 어렸어요사리 분별 못 할 나이는 아니었는데 장애가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좋게 말하면 순수했고 나쁘게 말하면 영원히 세상 물정 모를 애새끼였죠열아홉이나 되어서도 언제나 형들의 도움 없인 자립할 수 없던 애였는데그 애를 가장 잘 챙겼던 것은 고하은 형의 이전 룸메이트로 현재 행방은 불분명합니다죽었는지 납치됐는지 알게 뭐냐고 했지만 실은 집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믿고 있지요그 형은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가장 연장자로 제일 어린 철이와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그래서 철이를 아주 많이 예뻐했지요그 형이 사라진 이후엔 다음 연장자이던 고하은 형이 그 애정을 이어받아 철이를 돌봤습니다물론 그 애를 옆에서 떠받혀준 것은 고하은 형뿐만은 아닙니다거기엔 병이도 있었지요그러므로 철이 입장에선 형제가 죽은 거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집에 돌아온 철이는 악취의 행방을 따라가다 병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죽은 병이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다가 숨을 쉬지 않으니까 글쎄 엉엉 울어버렸다고요저는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습니다어쩌면 제 코 밑에도 손가락을 대봤을지 모를 일입니다그렇게 엉엉 우는 일이 끝난 후엔 병이의 손가락 하나를 잘랐다고 합니다미친 발상이었어요철이는 그 손가락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말라비틀어진 모래 알갱이 몇 개를 파낸 후 그 속에 넣고 묻었다고 합니다나중에 물으니 병이의 커다란 몸뚱어리를 묻을 힘이 없어서 그랬다더군요집에 남아있는 유일한 보호자는 처자느라 깨지를 않고경찰에 신고하자니 우리의 행색이 합법으로 이루어진 꼬라지는 아님을 직감했던 거지요그런 이유로 잘린 손가락은 여전히 찾지를 못했습니다고하은 형은 철이가 묻은 손가락 위로 아주 예쁜 나팔꽃이 피었다는 말을 했고 그리하여 그것을 병이의 일부로 보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왔단 말을 한 적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안심하는 철이의 얼굴을 바라보곤 곧장 돌려 마주쳤던 눈깔이 심히 썩어있던 걸 보면 거짓말인 듯싶지만.

아무튼 이런 사달이 나고 있을 때쯤 도착한 건 드디어 고하은 형입니다형은 철이가 손가락을 심은 땅 위로 다시 모래를 덮을 때쯤 도착했습니다철이의 꼴을 본 형은 잠깐 굳었다가 곧장 철이를 안아 들고 안으로 들어왔어요그러곤 베란다에서 일주일 치 물을 떠다가 그 애의 몸을 벅벅 씻겼습니다나중에 당시 형의 심정을 물어보니 좆같았더랍니다피곤해서 뒈질 것 같은데 사람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어린 철이가 뭣도 모르고 손가락을 심었기 때문이 아니라제가 거실에서 퍼질러 자고 있던 게 좆같았답니다철이를 다 씻긴 형은 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건우하고 이름 석 자만을 불렀습니다매서운 손길이 날아든 것도 시끄러운 고함을 지른 것도 아니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던 건 어째서였을까요평소보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눈을 뜨니 형은 다짜고짜 저더러 차라리 죽으라고 했습니다.

-네가 말하던 가족이… 이런 거였니?

그 목소리는 요즘도 가끔 제 머릿속에서 리플레이 되곤 합니다.

 

죄송한데 이름이 익숙지 않아서 고나무로 불러도 되겠습니까행방불명의 룸메이트와 죽어버린 병이의 추억이 깃든 집그곳을 떠나는 날에 형은 개명을 했지요사람들은 전부 형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물론 그 말도 맞습니다동시에 독실한 불교 신자의 피까지 물려받은 건 아무도 모르겠지만형이 늘 칭하던 우리 집이 느그 집이 되는 순간 깨달았던 거라고 믿습니다하느님은 고귀하시고 고추 털이 무성하게 자란 어린 양에게 내어줄 자비는 없으시다는 걸하은이란 이름을 버릴 때가 온 겁니다이전에도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혼종 문장을 발음할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불필요한 것을 삭제할 때가 온 거였죠하느님의 은총이고 나발이고 하느님의 총에 맞아 뒈지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며 형은 하느님이 내려준 소중한 제 생명을 죽이는 방법 대신 조금 더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고동시에 고나무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살아만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는 문장은 형의 입을 통하니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 언제나.

라고 표현됐습니다그렇습니다정말 하느님이 있다면 형의 이름이 고하은이든 고나무든 알 게 뭡니까불교 신자는 영영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면 나 말고 느그 부처한테나 가라그런 쫌생이인 겁니까나와 철이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습니다차마 구청에 가서 개명 신청을 할 수는 없던 처지인 터라 사람들은 형을 고하은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요이후로는 쭉 고나무라 불러 제게는 고하은보다 이쪽이 편합니다.

 

고나무 형은 한동안 제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평소에도 자주 대화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서로의 생사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엇갈렸습니다묘하게 흐트러진 이불 끄트머리 정도가 서로의 존재를 알렸지요그렇지만 그건 형이 제게 심히 화가 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그저 대화할 겨를도 없이 바빴을 뿐이었어요우리는 룸메이트의 자살 트라우마가 짙게 밸 그 집을 버리고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 나설 필요가 있었습니다그리고 그 역할을 맡은 건 고나무 형입니다.

그곳에 둘만 존재했다면 우리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평생 거기서 살았을 겁니다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던 그곳을 버려야 할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어린 철이.

그날 이후로 철이에겐 귀가한 직후 곧장 우리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외양은 열아홉이지만 속은 일곱 살인 그 애에게 누군가의 죽음이란 상당한 충격이었겠지요이해합니다그렇지만 제가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얼굴에 다 헤져 누렇게 뜬 이불을 던진 고나무 형만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지금 떠날 거야짐 챙겨.

-너무 성급한 결정이에요.

-쟤를 보고도 그 말이 나오니.

철이는 그날도 돌아온 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손가락을 대보고 있었지요저는 그 애를 살짝 밀쳐내고 발밑으로 떨어진 더러운 이불을 주섬주섬 주워 올렸습니다.

-갈 곳은 있고요?

-아는 스님이 절 부근에 안 쓰는 방 하나를 내주시기로 하셨어.

짐이랄 것도 없는 생필품 몇 가지를 챙기며 형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여전히 철이는 제 몸보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서 제 곁을 알짱거렸고 고나무 형은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아는 스님이 내주었다는 방은 이미 누군가의 아지트였습니다철이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어린애는 방 한구석에 이불을 깔고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던 중이었지요그들은 우리가 들이닥치든 말든 관심도 없어 보였습니다고나무 형은 조용히 철이를 데리고 그곳을 피했고 저는 묵묵히 남아 가져온 짐들을 정리했어요하긴철이가 특이케이스였던 거지 그 나이대 남자애들은 한창 성욕과 생존 욕구가 맞먹을 나이이긴 했습니다제가 가져온 몇 안 되는 생필품과 철이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그 애의 애착 이불마지막으로 고나무 형이 가져온 성경책까지진짜 아멘이다 씨발… 하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보니 어느덧 섹스는 끝물이었고 둘은 말없이 엎어져 한참을 색색거리기만 했습니다정리를 끝내고 고나무 형을 부르러 그곳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에 계속 있으셔도 괜찮아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나체의 여자애는 풀린 눈으로 엎어져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곧 갈 거예요… 어차피 섹스 같은 건 오래 걸리는 게 아니니까괜히 저 때문에 눈치 보느라 떠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타인의 알고 싶지 않았던 성생활을 목격한 건 둘째치고 여자애는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지나치게 성숙한 말투였습니다한참 붙어먹던 남자애는 여자애의 옆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지요.

-그렇게 말 안 해줘도 어차피 계속 지낼 거였습니다.

-…….

-갈 곳 없거든요.

그 말을 하고 저는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고나무 형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철이와 함께 솔방울을 줍고 있었어요진짜 씨발…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제가 외우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철이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애가 담배를 꼬나무는 모습을 목격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담배와 솔방울이 오버랩되며 헛웃음만 나왔습니다.

-갑시다.

한참 뒤에 꺼낸 목소리에 고나무 형은 흙이 묻은 얼굴로 저를 쳐다봤습니다저 꼴은 또 뭐야 미친… 싶었지만 흙이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고나무 형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계속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는 철이를 보니 대충 사건의 경위가 짐작 가더군요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마주하니 불안한 마음이 더 커졌던 모양입니다.

-걔네 갔어?

-갔겠죠.

철이의 손을 꼭 붙든 형은 제 뒤를 따라 우리의 새 아지트로 향했습니다.

 

돌아오니 여자애는 보이질 않고 피우다 만 담배를 바닥에 벅벅 문질러 끄는 남자애만이 보였습니다.

-누구세요?

그 뒤늦은 물음은 남자애가 아니라 고나무 형에게서 튀어나온 것입니다남자애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우리를 훑더니 말했습니다.

-주지 스님 아들인데요.

그 얼굴이 너무 뻔뻔해서 하마터면 믿을 뻔했습니다구라도 정도껏 쳐야 구라지… 하고 생각했는데 웬일로 고나무 형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습니다아무래도 머릿속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영혼과 독실한 불교 신자의 영혼이 대치 중인 게 틀림없었습니다요즘 스님은 결혼도 하시나하는 말은 혼잣말이라기보단 벙어리가 된 형을 대변해 내뱉은 말이었습니다그러자 그 남자애는 피식 웃더니

-결혼을 해야 애를 낳나.

하는 말을 남기곤 바닥에 팽개쳐진 옷들을 주워입기 시작했어요생긴 건 존나 고지식하게 생겼는데 실제로도 그러시네요하는 말은 왜 덧붙였는지 모를 일입니다이래서 애새끼들은 안 됩니다세상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선 고지식한 얼굴이 필수라는 걸 깨닫지 못한 사람의 넋두리 정도로 치부하고 저는 고나무 형의 옆구리를 툭 쳤습니다.

-내쫓을 거예요?

그 말에 형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세상에 나고 자란 목숨 중 가치 없는 것은 없다는 언젠가의 소설 속 구절을 읊으면서요그러면 주지 스님이 혼전임신으로 낳은 저 애새끼랑 부대끼며 살게요하고 되물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대답이 돌아와 더 골 때리게 했습니다철이는 이제 고나무 형의 손을 슬금슬금 떼어내고 그 남자애의 옆에 슬쩍 달라붙고 있었습니다철이에게 시선도 두지 않는 남자애의 초라한 모습을 살피면서 형은 사실 주지 스님이 우리 같은 스트릿 출신이라는 존나… 궁금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줬습니다아니 그게 구라가 아니었다고요그놈은 지나치게 정직한 새끼였던 겁니다어쩌다 스님에게 버려져 이런 곳에서 나뒹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목 뒤를 덮을 정도로 길게 기른 뒷머리가 왠지 스님과 그 녀석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우리랑 같이 살자.

고나무 형은 그놈을 향해 외쳤습니다바닥에 지져 끈 담배를 다시 잘근잘근 씹고 있던 놈은 눈썹을 까딱였습니다그건 제가 할 말이고요그 목소리에는 이미 장소에 대한 주인 의식이 깃들어 있었습니다저 싹바가지 없는 새끼 좀 봐라… 하는 생각이 들 때 고나무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첫째,

형은 그렇게 말하며 놈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그 애가 씹고 있던 담배를 순식간에 낚아챘습니다.

-실내 흡연 금지.

-아니 지랄… 내놔 씹새끼야.

-둘째공용 공간에서 섹스 금지.

-웃기고 있네삼 년 전부터 여긴 내 집이었다고.

-마지막으로

형은 들고 있던 담배를 왼손으로 옮긴 뒤 크게 팔을 휘둘러 그놈의 뒤통수를 후렸습니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고 살자?

갑작스레 뒤통수 후림을 당한 그 애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습니다물론 그건 관전 중이던 저도 마찬가지였고요저는 살면서 고나무 형이 누군가를 때리는 걸 그때 처음 봤습니다사실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죠심지어는 철이마저 그 모습을 보곤 저에게로 후다닥 달려올 정도였으니까요그 충격의 분위기는 한동안 그 공간을 메웠습니다모두가 벙쪄있는 동안 고나무 형만이 폭력으로 인한 죄를 씻기라도 하듯 두 손을 모아 중얼거렸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철아얼굴 씻으러 가자.

멀쩡하게 철이에게 다시 말을 붙인 형은 아무렇지 않게 그놈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금 아지트를 빠져나갔습니다뒤늦게 얼얼함이 찾아왔는지 씨발만을 한참 중얼거리던 놈은 곧 고개를 치켜들더니 저를 야리더군요.

-너네 내가 신고할 거야 씨발.

같잖은 소리입니다이 나라의 경찰은 하느님만큼이나 고귀하시며 집도 없이 떠도는 고추 털 무성한 성인 남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으십니다저는 대답 대신 그 애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더군요저는 손을 들어 고나무 형이 후렸던 그 위치를 천천히 문질렀습니다.

-뭐냐.

-.

-넌 또 뭐냐고 씨발.

-스님 아들이라 그런지 두상이 예쁘네.

-아니.

야리는 그 눈길을 묵묵히 받아내며 저는 말했습니다놈은 몇 번 더 욕을 지껄이더니 곧 입술을 꾹 다물고 가만히 제 손길을 받기만 할 뿐이었지요저는 그걸 라포 형성 정도로 부르겠습니다야생의 동물을 길들이려면 며칠 안 감아 눅진하게 떡진 머리 정도는 쓰다듬을 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한참의 침묵 사이를 뚫고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이름.

-?

-이름 뭐냐고.

-…….

-내가 너를 언제까지고 애새끼라 부를 순 없지 않냐그렇게 불리기 싫으면 말하라고이름불러줄 테니까.

-상호.

-상호?

-.

-성은.

-남자.

-아니 병신아성씨 뭐냐고 김이박그런 거.

-없어.

-없어?

-너라면 버린 부모 성씨를 따르고 싶냐?

-…….

할 말이 없었습니다가만히 뒤통수를 문지르고 있다 보니 그 애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

-?

-이상호.

-이상한 이름이네.

-고지식한 게 아니라 그냥 늙다리 새끼였네죽여버리고 싶으니까 그딴 개그는 웬만하면 하지 마라.

-내가 늙다리면 너는 몇 살인데.

-몰라씨발.

-대충 가늠이라도 해봐.

-스물 좀 넘겠지.

-하긴그래 보이긴 해?

-이럴 거면 왜 물었냐 씨발.

-근데 난 몇 살 같냐.

-?

-.

-서른.

-뒈지고 싶나.

-니 액면가가 서른인 걸 나보고 어쩌라고.

-스물아홉이다앞자리 니 좆대로 바꾸지 마라.

-그거나 그거나.

그때쯤부턴 이상호의 머리를 문지르지 않고도 안정적인 대화가 가능했습니다개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손을 대충 옷에 비벼 닦고 기껏해야 스물 언저리의 그 애를 말없이 쳐다봤습니다그 분위기를 못 견뎠는지 이상호가 먼저 눈을 돌리더군요.

-쫄리냐왜 눈을 돌리고 그래?

-아까 그 새끼처럼 너도 내 뒤통수 갈길까 봐 그런다.

-그러게 니가 형한테 밉보이질 말았어야지.

-씨발 아주 끼리끼리.

-근데,

그리고 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이상호의 시선이 자연스레 따라 올라왔지요.

-너 아까부터 말이 짧다기본적인 예의는 지키고 살자?

그리고 제가 그 애의 뒤통수를 후린 건 고나무 형의 위치와는 좀 다른 곳으로그건 장유유서라곤 밥 말아 먹은 이상호에 대한 서열 정리였습니다야생의 동물을 길들이려면 때론 라포 형성보다 서열 굳히기가 더 중요하기도 하니까요사실 싹바가지 없는 모습이 꼬와서 아까부터 내내 후리고 싶었던 거기도 합니다만아 씨발하는 목소리를 뒤로 저는 고나무 형을 찾아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길들인 야생동물과 함께 사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스물 언저리의 해를 보내며 본능에 새겼을 생존 방법이상호는 굳이 우리와 척을 질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했습니다고나무 형이 내세웠던 세 가지의 조건을 어느 정도 존중하려는 듯 보였고 집 나간 존댓말 어미도 어느 순간 돌아와 있었습니다물론 이것이 그와 살갑게 지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병이와 지냈던 그 정도의 온도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정도로만 지냈습니다고나무 형은 저보다야 이상호와 친밀하게 지냈지요형의 눈엔 철이나 놈이나 자신이 지켜야 할 어린애였으니까요처음 뒤통수 처맞았던 기억은 내다 버렸는지 이상호도 고나무 형에게는 점차 마음을 열어가는 듯했어요형은 이걸 사랑 애자를 붙여 가족애라고 불렀습니다라포 형성 같은 되도 않는 단어가 아니라.

일은 두 달이 조금 넘어가던 때 터졌습니다웬일로 공장장이 조퇴를 했길래 저도 그 눈치를 살피다 뒤따라 이른 퇴근을 했습니다어차피 초과근무 횟수로 치면 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하루 정도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습니다공장장이 뒤에서 받아 처먹은 초과근무 일당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던 기억이 납니다하지만 집에 도착하자 마주한 건 발작이라도 하듯 발발 떠는 철이와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는 이상호였습니다철이는 제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이상호를 밀쳐내고 제게로 달려와 덥썩 안겼습니다저는 일곱 살 같은 철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먼저 진정시키려 했습니다뭐가 괜찮은지도 모르면서 괜찮다는 말만 수백 번 반복했습니다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지 않을 건 또 뭐란 말입니까철이는 어깨를 들썩거리다 곧 어물어물 물어왔습니다.

-건우건우 형도 죽어 버리나아.

병이의 트라우마가 단단히 자리 잡은 모양이었습니다나 안 죽는다니가 봐라두 발로 멀쩡히 서서 니 등 두드려 주고 있는 게 누군데지금그런 걸 위로라고 건넸습니다그러나 철이에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죽지 마아형이 죽으면 나는나는 혼자 살아야 하는 거잖아.

-안 죽는대도그리고 고나무 형은 어디다 갖다 팔았길래 내가 죽으면 넌 혼자 남겨진다는 거냐너한테는 나도 있고 형도 있고 쟤도 있는데.

-죽어버리면 형 눈알 틈을 비집고 벌레들이 막 기어 다닐 거래썩어 문드러져서 형을 묻으려 하면 피부 조각이 다 바스라 질 거래나는 형들이 그렇게 되는 거 싫어… 죽는 거 무서워.

시체에 대한 묘사는 이후로도 이어졌고 제발 좀 닥치라는 이상호의 목소리에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당연하게도 병이의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은 철이의 머릿속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득했을 겁니다죽음이라는 걸 처음 인식하게 될 때가 8살 언저리라던데철이가 죽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상하진 않습니다하지만 시체에 대한 묘사가 유독 잔혹하고 자세했던 건 아무래도 수상했지요범인은 뻔했습니다일을 때려치웠다며 일주일 째 방구석에 처박혀 잠만 자고 있던 이상호놈이 아니고서야 철이에게 죽음을 가르쳐줄 사람도철이와 종일 부대끼고 있을 사람도 없었으니까요공포에 질린 철이에게 성큼 다가와 웅얼대는 그 입을 우악스럽게 틀어막은 이상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내가 그만하랬지씨발아.

이상호를 밀쳐내고 철이를 제 뒤로 물렸습니다힘없이 나가떨어진 이상호의 얼굴은 유독 하얗더군요저는 여전히 철이를 노려보고 있는 그 애를 향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습니다.

-내가 예의는 지키고 살랬지.

이상호의 시선이 철이에게서 제게로 옮겨졌고 저는 그 형형한 눈깔을 피하지 않았습니다대신 철이의 손을 꽉 쥐었지요.

-얘가 그렇게 밉냐이렇게 정신까지 놓을 정도로너 대체 왜 그러고 사냐?

대답을 듣고 싶어 했던 질문은 아니었습니다뭔가를 뻐끔대려던 것도 같았지만 무시하고 철이만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어쩐지 일찍 퇴근해서 기분이 좋더라니좆같음 보존의 법칙은 유효하고 기분 잡치는 건 한순간입니다.

철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듬어진 등산로를 조금 걷던 중 퇴근한 고나무 형을 마주쳤습니다철이는 형을 마주치자마자 또다시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형 역시 철이와 시선을 맞추고 죽지 않겠단 약속을 수십 번 반복해주었고요뒤늦게 긴장이 풀린 철이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고나무 형은 그제야 제게로 시선을 돌리며 일찍 퇴근했네하고 다소 일상적인 말을 건넸습니다저는 형의 요청이 없었지만 목격한 것들을 그대로 전했습니다아마 형도 궁금했을 테니까요정신을 놓은 듯 보이던 그 창백한 얼굴과 형형한 눈깔을 묘사할 때쯤 고나무 형은 제게 철이를 안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안는 건 무리고 업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도와줄 테니까 철이 잠깐 업어줄래나는 상호랑 얘기 좀 해봐야겠다.

-밖에서 기다릴까요.

-여기서 잠시 기다려.

그렇게 형의 도움으로 열아홉 덩치의 철이를 업었습니다고나무 형은 잠깐이면 돌아올 것처럼 굴더니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에야 다시금 모습을 보였습니다저는 철이를 끔찍이 아끼는 형이라면 분노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어쩌면 뒤통수를 한 대 더 후렸을지도 모르고요최악의 경우 처음 제 의견대로 놈을 내쫓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습니다하지만 형은 아무 일도 없단 듯 등에 업힌 철이를 조심스레 깨워 손을 잡았습니다.

-나는 철이 데리고 스님한테 잠시 다녀올게너도 피곤할 텐데 인제 그만 집에 들어가.

-…….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저를 보며 형은 마지막으로 덧붙였지요.

-그리고 네가 지금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철이도 어리지만 상호도 어려알잖아.

 

집에 도착하니 이상호는 아까보다는 생기가 돌아온 얼굴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하고 부르니 올려다보는 눈가가 조금 벌겠고 그제야 어떤 생각이 뒤통수를 후렸습니다그치… 쟤도 어렸었지그렇다면 고나무 형은 어떤 의미에서 제 뒤통수를 후린 사람이겠군요저는 형이 철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상호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함께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췄습니다.

-울었냐?

-…….

-쫌생이 같이… 나한테 혼나서 울었냐아님 형이 혼냈냐?

-씨발진짜.

이상호는 아까보다 순해진 눈동자로 저를 야렸습니다하여간 이 새끼는 장유유서라곤 여전히 밥 말아 먹은 게 분명했습니다저는 얌전히 그 눈길을 받아 주다 나도 모르게 그 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이상호가 곧장 그 손길을 내쳤습니다그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하지만 그 애는 당황한 듯했어요그것도 생존을 위해 배워온 본능 같은 거였겠지요한참을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상태로요.

-죽었어요.

먼저 입을 연 건 이상호입니다대뜸 내뱉은 문장은 이해하기에 좀 버거웠습니다.

-?

-죽었다고요.

-누가?

-여자친구요걔가 죽었다고요.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저는 가만히 그 말을 곱씹으며 적당한 선의 대답을 찾느라 머리를 굴렸습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하냐?

기껏 뱉은 게 그거였습니다이상호는 제 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을 픽 뱉더니

-어차피 들어줄 생각도 없었잖아요.

하고 답했습니다.

-언제 죽었는데.

-일주일 됐어요.

-그래서 일 때려치운 거야?

-때려치웠다기보단… 무단결근.

-그게 그거지새꺄.

이제 이상호는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넓게 펴 퍼질러 앉은 상태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지탱하고 있는 손목이 심하게 꺾여 아플 법도 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요.

-그러면 걔는 이제 부모한테 돌아간 거냐?

-걔 부모 없는데요.

-…….

-모든 사람이 형들처럼 부모를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싶었지만 어떤 의미로 뱉은 말인지 모르지 않아서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걘 어떻게 했는데.

-뭐가요?

-죽었으면 시체가 있을 거 아냐그거 어떻게 했냐고.

그러자 이상호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습니다헛웃음의 경지를 벗어나 바보 같은 제 물음이 이제는 정말 유쾌한 듯했습니다.

-묻었어요.

-?

-제가 묻었다고요저기 뒷산에다가묻어버렸다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저도 모르게 이상호의 멱살을 잡았습니다이상호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였고 제가 멱살을 잡아야만 했던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진중하지 않았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요그렇다면 병이의 시체를 두고 잠이나 처잔 제 멱살은 왜 틀어잡지 않은 거였을까요모르겠습니다그냥 그놈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개소리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지랄개소리는 누가 하고 있는데.

이상호는 순식간에 웃음기를 거두고 다시금 저를 노려봤습니다.

-애초에 출생신고도 안 되어 있는 새끼가 어떻게 남 사망신고를 할 수 있겠냐고병신아.

순간 손에 힘이 풀렸습니다이상호는 뒷걸음질 쳐 벽에 툭몸을 기댔습니다.

-나라고나라고 내 손으로 묻고 싶었겠냐고 씨이이바알.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선 약해지기 마련입니다막무가내의 애새끼 같던 이상호 역시 마찬가지였지요충분한 시간을 두고 슬프고 싶었을 겁니다저는 아무런 말 없이 그 애의 곁에서 물러나 지저분하게 구겨진 이상호의 이부자리를 정리했습니다한참의 침묵 끝에 이상호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나무 형이 어떻게든 해주겠대요.

-…….

-그러니까 이제 걔 얘기는 그만 해요.

저는 천천히 이상호에게로 걸어갔습니다여전히 숙인 고개는 제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듯했어요조용하게 옮긴 걸음 끝에 저는 그 어린 애새끼를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꽉 껴안았습니다.

-너 정말… 어린애구나.

이상호는 한참을 품에서 울었습니다.

 

그 애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시겠죠말하자면 돌아갔습니다원래 그 애가 존재해야 할 곳이 어디였든… 그 애는 돌아갔어요죽은 그 애의 여자친구는 고나무 형이 알고 지내던 목사님의 지도하에 공동묘지로 옮겨졌습니다묘비에 새길 말이 없어서 고나무 형에게 외주를 맡긴 결과 그곳에는 나무아미타불이 적혔는데 그 황당한 조합은 괴로웠던 이번 생은 모두 잊고 극락에서 윤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라는 그럴싸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그 묘비명의 의미를 듣고 짧게 웃은 이상호는 다음 날 별안간 사라졌습니다남겨진 쪽지는 딱 한 문장만이 적혀있었어요고맙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이상호와 함께 철이마저 사라진 겁니다고나무 형은 곧장 경찰서로 향해 실종 신고를 넣었습니다철이는 물론 이상호까지도요하지만 경찰은 안타까운 표정만을 지을 뿐 수색을 시작하진 않았습니다그 이유는 나름대로 타당했는데 첫째이상호가 남긴 메시지는 자의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정황상 실종으로 보기는 어렵다둘째철이와 이상호는 동갑내기였으니 우리도 모르는 새 둘의 관계가 지나치게 친밀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경우 이상호와 함께 떠났어도 이상하지 않다셋째이 나라의 경찰은 하느님만큼이나 고귀하시며.

말하자면 결론은 이딴 데 쓸 시간은 없다라는 거였습니다철이가 이상호랑 친해지긴 개뿔이우리가 안 보는 새 놈이 철이 뒤통수나 안 후렸으면 다행입니다고나무 형은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이유를 대며 수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하지만 경찰에겐 형의 논리가 터무니없이 들렸나 봅니다아무래도 이상호의 필체가 지나치게 성숙하다라는 말은 우리에게나 논리적이었지 생판 남인 경찰에겐 뭐 그딴 이유가… 싶었을 겁니다그리하여 일주일 뒤에도 둘을 찾지 못하면 다시 경찰서를 찾아오라는 별 도움 안 되는 대사를 듣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종된 지 사흘 후에 둘을 찾았습니다살아있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요.

명백한 살인이라고 고나무 형은 주장했습니다이상호 혼자라면 사인이 자살이래도 이상하진 않았겠지만 철이까지 죽었다니요죽음이 무엇보다 두려웠던 그 애가 자살을 한다니차라리 해를 서쪽에서 띄우겠습니다형은 다시 경찰을 찾아갔고 흥분한 목소리로 이 살인 사건에 대해 얼른 수사를 해달라 요청했습니다하지만 경찰의 핀트는 이상호와 철이의 죽음보다는 살인이라는 단어에 꽂힌 듯했습니다.

-선생님이 주변에 그런 짓 저지를 사람 없어요아시잖아요.

지나친 인류에 대한 신뢰그것이 똘똘 뭉친 단단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고 없고는 추측이고요우리 애들이 죽었잖아요그게 팩트 아니에요?

-요즘 청년 자살률이 높은 거 아시죠솔직히 살인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 있어요애초에 처음 찾아오실 때부터 상호라는 친구가 쓴 쪽지 들고 오셨잖아요원래 그런 말 하던 애가 아니었다면서요그러면 더더욱 자살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면 철이는요철이는 그런 쪽지도 남긴 적 없다니까요상호가 안 되면 철이만이라도 수사해주세요.

경찰은 곤란하다는 듯 웃더니 형의 손을 꼭 부여잡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신지는 알겠지만 살인이라니요말도 안 되는 거 솔직히 인지하고 계시죠?

고나무 형을 따라 경찰서를 찾은 저는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경찰의 논리를 처음부터 조목조목 따져 들기 위해 선택한 문장은

-아니 애초에 이상호 그놈이 그런 글씨체를 가진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니까요.

였습니다그건 이상호를 직접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내용이었지만 경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한층 더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자살이라고 생각해요그게 더 마음 편할 겁니다.

 

고나무 형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우리의 안식처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고 형은 자신마저 살인의 피해자가 되기 전에 최대한의 증거를 남기고 싶어 했어요형의 부탁으로 그 조악한 일기장 위에 제 필체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그때 슬쩍 훑은 형의 일기장은 사실 일기라기보단 형의 철학관을 담은 내용들로 아마 형이 철학자였다면 그것은 철학자의 은밀한 일기장이라기보단 세상을 서술한 철학 서적으로 분류되었을 겁니다.

자신의 철학관을 열심히 나열해가던 고나무 형은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병이도 살해당한 거야.

그때 저는 막 잠들기 직전의 상태로 적당히 대꾸해줄 힘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보호할 힘도 없는 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이야분명해.

그 목소리를 기점으로 잠이 들었습니다병이의 죽음에 대한 근거는 형의 일기장에도 나와 있었지요맞습니다그게 형의 마지막 일기였죠이유는 딱 하나병이는 성선설을 믿었습니다.

그 애는 죽기 직전까지 사람의 선함을 믿었을 겁니다그래서 죽었을 거고요상당히 비약적인 논리이기는 합니다사람들은 성선설을 믿고 싶어 했으니까요병이만의 문제는 아니었단 뜻입니다하지만… 다들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습니까사람은 선하지 않다는 걸요병이는 그걸 미처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고요평생을 생존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사람이니 당연합니다성선이니 성악이니 하는 초라한 관념 따위 그 애에게 무슨 도움이 됐겠습니까.

사람들은 고나무 형의 마지막 일기를 보고 형을 대단한 반역자 정도로 생각합니다성선설을 근본으로 둔 나라에서 성악설을 믿었다니나라가 놀라 뒤집힐 정도긴 하지요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 외치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애초에 둘의 대결이 쓸모없는 한갓 관념의 대결이라는 것도 똑같죠.

하지만 당신들고나무 형이 지독한 성악설 신봉자였음을 어떻게 확신합니까지나치게 성숙했던 이상호의 필체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지만 성선설을 믿었기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내용의 일기장은 어째서 당연하다는 듯 형을 성악설이란 이름의 반역자로 몰아가느냔 말입니까까놓고 말할까요사람들은 성선설을 믿고 싶어 했습니다형도 성선설을 믿었고요물론 저도.

그 증거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죽어버린 형의 시신이 성선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냐고요형은 그간 확보한 증거가 무색하게 아무런 쪽지도 남기지 않고 죽어버렸지만 그것이 자살이 아닌 것만은 압니다세상에 스스로 목에 칼빵 놓고 자살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적어도 그 형은 아닙니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자살은 죄입니다생명은 고귀하고요형이 살해당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형은 성선설을 믿었습니다.

 

원하는 방향의 인터뷰가 아니었겠지요이 프로젝트의 제목부터 갈아엎으셔야 할지도 모르겠네요어쩌면 이제 주어는 고하은이 아니라 이건우가 될 지도요성악설을 믿은 이건우그는 대체 누구인가.

이제 모두 그만할 순 없습니까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거지 같은 논쟁은요살아남기 위해서 관념이란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평생을 생존을 위해서만 머리 굴리다 보니 알겠더군요이딴 것보다 소중한 것은 차고 넘칩니다선하든 악하든 알게 뭡니까사람은 태어날 때 선하더라도 훗날 악해질 수 있고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한데이제 전부 그만합시다이딴 논쟁 아닌 논쟁도죽어서까지 형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도.

이 인터뷰의 내용을 보고 있을 당신들은 성선설을 밟고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본능에 충실하게 살아온 인간들일 뿐이지요그러니 이제는 주제 파악을 좀 하고 살면 안 되겠습니까제발.

카임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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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코쿠료 묘

카미코쿠료 묘(1943.8.15.~1974.)는 한일 혼혈로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넘어와 죽을 때까지 일본 땅을 밟아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일본어엔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누군가는 그런 그가 일본인으로서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일제강점기를 보낸 것을 안타깝게 평하기도 한다. 한국은 묘가 3살이 되던 해 해방됐다. 이후 한반도에선 철저한 종족 분류가 이뤄졌다. 이분법의 분류 체계 속에서 묘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다만 양쪽의 피가 섞인 그가 한국에만 체류했던 까닭은 간단하게 설명된다. 카미코쿠료 묘에게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구매할 자격이 없었다.묘가 8살이 되던 해에 한반도에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그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거라 추정된다. 황폐해진 땅을 밟고 서는 데에는 이전과 다르게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생존을 향한 지독한 인간의 본능만이 꿈틀댈 뿐이었다. 누구도 그의 출신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기회로 여겨진다. 허허벌판 위에서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던 영역의 철학에 가닿기까지 걸린 기간은 단 1년. 이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각의 폭을 넓히지 않았더라면 이루어낼 수 없는 성과라는 평을 받는다.한국전쟁이 끝나고 황무지 같던 땅은 다시금 색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묘가 황무지 같은 영역에서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의 사상은 온통 비유로 가득하다. 그것은 흡사 철학 서적보다는 허구의 소설류와 비슷해 보이는 게 특징이다. 인간, 양철, 지푸라기, 사자로 비유되는 사상의 전개는 오즈의 마법사를 연상시키며 그중 사자만이 배척된다는 점은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철학은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구분될 수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이 레오폴드의 생태윤리로, 무생물까지 도덕적 대상으로 봤다는 점에서 양철을 인간의 수용 범위에 포함한 묘의 윤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사자가 배척된다는 점에서 생태윤리의 완전한 분류는 곤란했다. 카미코쿠료 묘의 처음이자 마지막 철학은 그렇게 어느 곳에서도 분류되지 못한 채 한동안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았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이를 두고 어린 시절부터 소속의 열망이 꺾여 자란 인간의 안타까운 무의식으로 묘사하기도 한다.사용되지 못하고 도태된 묘의 철학은 재밌게도 몇 년 뒤 정치계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분석될 수 없다는 한계를 완전히 벗은 그의 사상은 철학계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형성했다. 동물 배척주의. 무언가를 중심으로 삼았던 기존의 철학-이를테면 인간 중심, 동물 중심, 생명 중심 등으로 불리는 것들-은 그의 사상을 대변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배척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그러나 이런 네이밍에 묘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동물 배척주의는 여론몰이가 필요할 때면 항상 등장했다. 제일 처음 그것이 사용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의 일로, 뒤늦은 빨갱이 처단을 위해서였다. 그때 처음 묘의 철학을 인용한 정치인은 “그들은 우리와 같은 영역에 속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우리에게

  • 카임
  • 2024-01-15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말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영영은 말한다. 과장님 업무 다 끝냈습니다…. 1이 사라지지 않는 메신저 창을 바라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오랫동안 스크린을 바라본 눈꺼풀이 무거웠다. 뒤늦게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여전히 남아있는 1을 무시한 채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저 이제 퇴근해보겠습니다.흐트러진 양복 매무새를 다듬으니 영락없이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 영영은 목을 옥죄던 와이셔츠의 맨 윗단추를 풀었다. 그런다고 숨통이 트이진 않았다. 영영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을 느끼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선거철이라 곳곳에 대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영영은 이제 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태어나는 인구보다 탄생하는 관념이 더 많은 나라에선 매일 같이 새로운 관념들의 싸움이 울려 퍼졌다. 영영은 한갓 관념에 목숨을 바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만 하면 충분하고 그것조차 지켜지지 않은 때에 인권보다 앞서는 관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영영은 후보 15번으로 끝맺어진 대선 포스터를 보며 새삼스러운 권태감을 느꼈다. 이런 지독한 공허 앞에서 지끈거리는 머리 정도는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회사 앞 지하철역은 한적했다. 영영은 잠시 벽에 등을 붙이고 기대섰다. 그때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확인하니 과장의 답장이 뒤늦게 도착해 있었다. 그래, 오후에 보자. 라는 끔찍한 메시지에 따로 답장하진 않았다. 대화는 덧대어 갈수록 길어지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끊어낼 수 없어지기 때문에. 어쩌면 과장과 주말 식사 약속을 잡고서야 끝맺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영영에겐 입사 초기에 이러한 수법에 휘말려 부장의 등산 메이트로 두 달을 보낸 전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겨우 정상에 올랐었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장소는 다르지만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그때는 아마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던 중 저혈압으로 쓰러졌던 것 같다. 그 덕에 지금은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생각해보면 영영의 머리는 지끈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과거는 이유 모를 두통으로 인한 입원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 감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나. 언젠가는 고쳐질 것이라 생각한 믿음은 서른이 되어서야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영영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생각했지만 언젠가 무당을 찾아간 적은 있었다. 그건 아마 스물 초반의 일로, 점을 보러 간다는 여자친구에게 응당 건네야 할 대답을 했던 결과였다. 나 이번 주 주말에 점 보러 가려고. 궁금하잖아? 오 그래 궁금하네(안 궁금했다). 같이 가줄까? 그곳에서 무당은 여자친구보다 영영과 눈을 먼저 맞추었다. 하지만 1인분의 돈을 지불한 그들에게 따로 2인분의 서비스를 할 필요는 없었다. 여자친구가 한국인이라면 으레 궁금해할 것들, 이를테면 학업이나 취업이나 혹은 연애와 같은 것들을 질문할 때까지도 무당은 답변에만

  • 카임
  • 2023-12-17
모든 것이 부서진 밤에

이야기 하나 해줄까.옛날에 광대 하나가 있었다. 광대라는 게 너도 알다시피 으레 허연 얼굴에 빨간 코, 귀까지 찢어진 입술의 모양새가 아니냐. 걔도 다를 게 없었다. 얼굴은 허옇고 코는 괴상하게 빨갰고 입술은 누가 잡아 찢은 것처럼 째져 있었다. 그런데 그 꼴이 서커스 안에서는 먹혀서 보러 오는 관객마다 재밌다고 웃었다. 흉측한 얼굴로 공중그네를 타다 떨어져도 훈련 덜 된 호랑이한테 팔뚝을 물려도, 그게 그 사람들은 너무 재밌던 거다. 그게 다 개그인 줄 아는 거다. 그래서 광대는 웃었다. 허리가 나가고 팔뚝이 잘렸는데 웃었다. 여기까지는 서커스 안에서의 일.그런데 너도 들어보지 않았냐, 피에로 괴담 같은 거. 광대는 서커스 안에서나 유쾌했다. 허연 얼굴에 코 대신 달린 빨간 구, 길게 찢어진 입술 같은 건 그 좁아터진 줄무늬 천막 안에서나 허용되는 것들이었다고. 광대라는 것의 인생이 원래 좀 기구하다. 사람들을 웃기는 데 충실했었는데 그건 몸담은 범위 안에서의 일이고 실상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피에로 괴담으로 불리는 꼬라지를 봐라. 너라면 허무하지 않겠니. 와중에 더 비참한 사실은 뭔지 아냐. 사실 광대랑 피에로는 다르다는 점이다. 피에로 괴담에 등장하는 입이 찢어지게 웃는 기괴한 얼굴은 피에로가 아니라 광대. 그런데도 광대 괴담이 아니라 피에로 괴담이라 불린다. 광대는 비참한 소문에서마저 제 이름을 빼앗기는, 말하자면 이 시대의 실패자라는 거다.그런데 광대라고 실패자가 되고 싶진 않았을 거 아니냐. 그래서 광대는 입을 더 찢었다. 더 오래 웃었고 더 크게 웃었다. 그러면 사람들도 웃어줄 줄 알았던 모양이지. 그런데 막상 찢고 보니 사람들은 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괴담 같은 소문이 돌았고 서커스에선 쫓겨났지. 완벽한 실패자가 된 거야. 실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는데 오히려 더 망해버렸다. 덫에 걸린 토끼가 빠져나가려 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입는 것처럼, 물고기가 벗어나려 헤엄칠수록 그물은 더 단단하게 물고기를 가두는 것처럼, 그러니까 너랑 내가 이 거지 같은 인생을 조금이나마 잊어보려 입을 종알대면 종알댈수록 더 비참해지는 것처럼…그만할까.알았다, 조금만 더 할게.완벽한 실패자가 된 그 광대는 사실 좀 울고 싶었다. 서커스 단원일 때야 제 역할이 남을 웃기는 것이니 실실 쪼개고 있음 되는 일이지만 이제는 뭣도 아니지 않냐. 그래서 울어도 될 거라 생각했다. 이때까진 슬퍼도 넘어져도 놀림 받아도 하물며 팔이 뜯겨나가도 웃고 있지 않았니. 그래서 울기로 했다. 그런데 울 수 있었겠냐? 평생 진솔한 감정 따위는 모르던 입 찢어진 인간이 울 수 있었겠냐? 울 수가 없어서 웃었다. 막 웃었다. 제 딴에는 내뱉는 소리가 흑흑이었는데 찢어진 입술 새로는 하하가 되어 흘러나왔다. 아주 깊은 숲속이었다. 그 웃음소리가 둥글게 둥글게 퍼져 나갔다…왜 숲속이냐고 묻지 마라. 광대가 술에 절어 비틀대며 그곳까지 기어갔을지, 아니면 아주 단단한 나뭇가지에 제 목을 매려고 했는지 내가 알게 뭐냐. 너도 내가 종종 비 오는 날이면 강가로 가 노숙하는 이유

  • 카임
  •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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