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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시유

  • 작성자 기누거누
  • 작성일 2023-08-19
  • 조회수 480


 

 










SEEYU

 

 

 

차례

 

프롤로그  

 

「은인」 

「반항아」

「집으로」

「공상인연」

「그을린 자국

「용의자」

「시유」

「오늘 하루도」 

 

에필로그  


 

 

 

 

일러두기 :

 기호 【◎】는 서술자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작중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와 가상의 장소들이 혼재되어 등장합니다.

 

 




시유란 이름은 본디 불을 낼 때 쓰는

땔감을 이르는 말이다.

땔감이라어딘가 어울렸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계속

타닥,           

타닥,

타오르고 있었으니.


 


 

 

 

 


 

 

 프롤로그

 

 

 식간에 차가운 바닷물이 나의 옷에 스며들었다무거워진 몸은 해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발은 닿지는 않고 코로는 물이 계속 들어왔다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차가운 물살이 쉴 틈 없이 이목구비로 몰아쳤다발 아래엔 지나가는 물고기 떼는 커녕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검은 심연만이 가득했다아무리 몸부림쳐도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었다나는 어떻게든 온 힘을 다해 헤엄쳐 위로 올라와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푸아아!”

그 순간 여객선이 유유히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 쉬지 않고 헤엄쳐 갔다숨이 점점 거칠어지며 불규칙해졌다그러나 여객선은 계속해서 멀어져만 갔다나의 사지가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팔다리만을 휘저으면서 떠 있으려고 하니 금방 무리가 온 것이었다머리도 토할 정도로 어지러워지며 시야가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헛구역질을 켁했다그럴 때마다 눈앞에서 물거품들이 떠올렸다나는 어떻게든 살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마지막 힘까지 다리에서 빠져나가자 몸체는 깊은 어둠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

사지에 힘이 풀렸다이제 몇 십 초 뒤면 나는 죽었다.

숨이 조여지면 조여질 수록 나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이리저리 뒤섞였다힘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01 은인

 

 

나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필름이 희미하게 끊겨져 버린 것이다하지만 자다 깬 것처럼 나는 다시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바다에 빠진 기억이 어젯밤 꿈을 꿨던 일처럼 몽롱하게만 느껴졌다나는 어떠한 곳에서 누워있었다양 옆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 설마무인도인가?'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나는 눈을 뜨는 데 뜸을 들였다그러나 내가 누워있는 곳은 모래사장이 아니라 또 다른 낚싯배의 내부라는 느낌이 강했다바닥은 딱딱했고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어떤 낯선 남자의 휘파람소리마저 들려왔다로빈슨 크루소 신세는 면한 듯 했다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나의 눈은 천천히 떠졌다나는 옆으로 기다란 시트에 누워져 있었고 나의 앞에는 근육질의 한 남자가 거대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이 배를 운전하고 있었다아재는 머리를 하얀 수건으로 매고 있었으며광택이 나는 검은 장화를 신고 때 묻은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뒷모습만으로도 친근함이 느껴진다 해야 하나여하튼 나는 의식을 잃은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기절한 채 물에 떠다니는 날 보고 이 사람이 구해주었나 보네…’

그 순간 기침이 튀어나왔다휘파람을 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눈이 마주친 남자는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왔는지 진한 눈썹에 수염이 풍성하고 볼에 여러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남자는 활짝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험상 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어조였다.

일어났구나낚시하려고 갑판에 나왔더니 네가 시체마냥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뭐니다행히 숨이 아직 붙어 있어 우선 거기 눕혀두긴 했는데어때 좀 괜찮니?”

감사인사를 하려는 순간 나는 짜디짠 바닷물을 남자의 얼굴에 뱉어버리고 말았다.

우악!”

… 이런.”

남자는 탄식했다나는 기침을 몇 번이나 내뱉고서야 남자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정말쿨럭감사합니다… 네 많이 따뜻해졌어요.”

"어허어쨌든 살았으니 된 거다만 어쩌다 이런 망망대해까지 떠밀려 온 거지이 주변에 해수욕장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심지어 그 교복은…”

?”

고개를 숙이니 정말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새하얀 반팔 교복이었다앞 주머니엔 등화라고 적힌 로고가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엔 반듯하게 김시유라고 써진 명찰이 붙어있었다.

고등학생이니?”

“…네 맞아요.”

세상에어쩌다가 교복 입은 채 그대로 바다에 빠질 수가 있던 거지심지어 이 인근에 등화고라는 곳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 여객선의 난간에서 떨어져서 그대로 바다에 빠졌던 것 같아요.”

어쩌다가?”

물에 빠질 때 다쳤나저도 잘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어쩌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는지…”

"떨어질 때 충격이 심했나 보네괜찮다푹 쉬면 금방 나아질 거야그나저나 지금 날이 이렇게 어두워져 가지고 우선 내가 사는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는데아무래도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쉬고 내일 아침 내가 너희 집으로 데려다 주도록 하지그래도 되겠나?"

"… 어차피 지금 제가 어디서 살았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그건 좀 심각한 거 아닌가?"

"뭔가 머릿속에서 떠올려지지가..."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인지하지 않을 때는 몰랐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제대로 기억나는 거라곤 배가 난파당한 직후의 순간뿐이었다.

"…죄송합니다지금 제가 좀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요."

"하하푹 쉬다 보면 나아질 거야조금만 기다리렴내가 집에 가서 뜨끈한 우동을 해주마."

다행히 나를 구해준 아저씨는 진심으로 좋으신 분 같았다호탕한 웃음 속에서는 다른 속내가 전혀 드러나 보이시지 않았다.

이것도 인연이구나시유야아저씨 이름은 윤범두야어찌 되었든 간에 살아남은 걸 축하한단다.”

“…감사합니다.”

"멀미 때문에 어지러운 것일 수도 있으니 갑판에 나가 바깥공기라도 좀 쐬도록 하렴오늘 마침 은하수가 보이더구나."

“…은하수요?”

원래 이쪽 지역 부근에선 날씨가 맑은 여름 밤엔 꼭 은하수가 보이지.”

조종실에서 갑판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밤하늘에 흩뿌려진 무수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마치 하늘이 기다랗게 갈라져 그 안에서 온갖 별들이 쏟아져 나온 듯한 풍경이었다그 광경을 보아하니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얼굴이 화끈거렸다정말 긴 시간 동안 찾아 헤매왔던 걸 이제서야 발견한 기분이었다한동안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기만 하였던 것 같다.

불현듯 고개를 돌려 어선의 조종석을 바라보니 아저씨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아저씨는 최대한 부가설명을 덧붙이시며 수신자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았다아마 아저씨네 가족분들이겠구나라고 유추하였다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통화를 끝낸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끄덕거리셨다.

 거무스름한 밤수평선 너머로 은은한 조명들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얼마 뒤 제법 크기가 있는 섬마을이 눈에 들어왔다섬마을의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봉우리와 함께 나무들이 빼곡하게 밀집되어 있었고해안가에 밀집되어 있는 주택가에는 집집마다 조명이 켜져 있으니 소소한 멋이 있었다게다가 빌딩이 하나도 세워져 있지 않아 아담하기까지 했다.

이윽고 보트가 선착장에 다다랐다.

"다 왔구나여기가 바로 내가 사는 마을이란다."

"우와경관이… 고층빌딩 하나 없는 게 너무 좋아요이 섬마을 이름이 뭐에요?"

"어제도인데육지하고는 좀 먼 외딴 섬이지다리 하나 신설된단 소식도 없으니뭐 이래봬도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고 있을 건 다 있어나도 태어날 때부터 여기서만 살아왔으니."

어제도….”

배로만 오고 갈 수 있단 점만 빼면 그리 살기 불편하진 않아자자내리렴.”

아저씨와 나는 갑판에서 내려 자갈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2층짜리 목조 건물 보이니저기가 우리 집이란다.”

복층 집이에요?”

아니, 1층은 내가 하는 우동집이고 2층이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이란다아 그렇지허기졌을 텐데우동이라도 한 그릇 끓여주마.”

아저씨는 어디선가 열쇠를 가져와 잠겨있는 식당의 문손잡이에 넣으셨다이윽고 철컥 소리와 함께 아저씨가 문을 드르륵 여시고 불을 키셨다짙은 나무 템바보드로 인테리어 되어있는 식당은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두웠지만테이블마다 올려져 있는 은은한 등불이 주위를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앉아 있으렴.”

아재는 주방으로 가 냄비에 물을 올리시고 나에게 물으셨다.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잘 모르겠어요.”

김시유라어디서 들어봤는데왜 익숙한지…”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등화고등학교가 있을 네가 살던 동네는 기억이 나니그걸 알아야 내가 데려다 줄 수 있을 텐데.”

“...전혀요제가 그 등화고에 다녔는지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부모님 전화번호나살던 집 주소나... 정 그것도 모르겠다면 배를 탄 선착장은 기억이 나니?”

“...아니요.”

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심각하구나게다가 여태껏 비바람이 계속 불어서 나는 오후가 돼서야 바다로 나왔는데... 이런 날씨에 배를 탔다고그러니까 사고가 나는 것 아니니...”

저도 어쩌다가 배에 올라타게 되었는지...”

아저씨는 냄비에 담긴 육수에 우동 면 사리를 풀고 휙휙 저으셨다차츰 깊고 진한 냄새가 식당 가득 번졌다    아저씨가 파를 가져오시며 넌지시 물으셨다.

혹시 너나이는몇 학년이니?”

... 고등학교 1학년이에요.”

그래우리 딸내미랑 동갑이네걔도 고1이란다.” “...그래요?”

지금 윗층에 있을 텐데부르기라도 해볼까어차피 이따가 밥 먹고 올라가면 만날 테지만.”

문뜩 심기가 불편해졌다동갑인 낯선 남자애가 자신의 집에서 자는 걸 환영할 여자애가 있을 란지허나 구태여 반대하지는 않았다.

“…불편해하진 않을까요?”

하룻밤 묵고 가는 건데투숙객이라 생각하라 해놨으니 크게 반발하진 않을 게다다만 애가 좀 툴툴거리는 성격이라 혹시 빈정 상하는 말을 해도 그리 상처받지는 마알겠니속은 생각보다 순하단다.”

아저씨가 고명을 우동 위에 올려놓을 무렵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그 아이가 들어왔다여자애치곤 피부가 비교적 까무잡잡했다고데기도 안 한 꼬불꼬불한 머리엔 캡 모자를 대충 눌러 쓰고 있었다외모에 신경 쓰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이목구미가 뚜렷해 얼굴은 꽤 반반했다그러나 눈초리는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지 살벌했다.

그 애는 아저씨에게 손을 슬쩍 들어올려 흔들고 이윽고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순간 그 애의 사나운 눈과 마주쳤다미간을 찌푸리더니 그 애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

여자애가 아저씨를 쳐다보자 아저씨가 끄덕였다그 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죽다 살아난 애치곤 멀쩡해 보이네걱정했는데.”

“….”

거친 말투에 기분이 푹 가라앉았다.

슬아이 시유라는 친구가 지금 기억도 잘 안 나고 그래서 푹 쉬어야 하거든막 사고에 대해 구태여 캐묻거나 그러진 마.”

아저씨가 우동을 식탁에 탁 놓으시며 말했다새하얀 김이 구름처럼 뭉실뭉실 피어 오르는 우동을 보자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그래명찰이 있네이름이 김시유?”

“….”

뭐야근데 왜 안 어울리게 교복을 입고 있어?”

윤슬은 눈을 고양이처럼 가늘게 뜨고 말했다.

등화고는 또 어디야.”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조용히 말하자 윤슬이 히죽거렸다.

용케 한국말은 기억하니까 됐네.”

범두 아저씨가 윤슬을 툭 치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일단 내일 날 밝으면 배를 타고 목포에 있는 파출소라도 가서 신원조회라도 해 봐야겠지이 섬엔 파출소가 없으니까내일 아침 내가 직접 배로 바래다 주마일단 지금은 잘 먹고 잘 쉬렴어서 먹으시오.”

부녀가 지켜보는 앞에 우동을 먹어야 되는 부담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그러나 으슬으슬 몸을 떨던 상태에서 마신 우동 국물의 따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마치 온천에 그대로 몸을 담근 것만 같았다숨을 내쉬며 내가 해탈한 듯 말했다.

“…몸이 녹아 내리는 것만 같아요.”

그지?”

그 말을 하고 난 직후부터 나는 우동을 먹느라 정신을 둘 곳이 없었다보드라운 우동 면들이 내 입술 사이를 스르륵 스쳐 지나갈 때마다 계속해서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불현듯 윤슬이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게걸스럽게도 먹네.”

그 말을 듣고 당황한 내가 고개를 들자 아저씨를 걔를 향해 분연히 큰소리를 내질렀다.

윤슬!”

아니 맞잖아김시유 너 부모님 이름은 기억나?"

“…아니.”

"그러면 뭐 아는 친구 이름은?"

“…전혀.”

이야너 대단하다.”

거의 모든 기억들이 지나가며 흘겨보았던 행인들의 얼굴들처럼 당최 떠올려지지가 않았다막연히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자 어느 시점부터 기억을 더듬어야 될 지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운도 좋네.”

그때 아저씨가 식탁에 김말이를 탁 내려놓자쫑알거리던 윤슬은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김말이를 입에 쏙쏙 집어넣기 시작했다나도 몇 개 집어 우동국물과 함께 먹었다.

으아진짜 너무 제 입맛에 딱 맞아요.”

"그지나중에 기억을 되찾아도 꼭 다시 오렴그때는 오늘의 우동 값에 이자까지 붙여 받도록 하겠어."

"?"

윤슬이 마지막 김말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사채업자.”

그러더니 윤슬은 곧바로 몸을 돌려 가게 문을 드르륵 열었다나가려던 찰나 윤슬이 나를 보고 외쳤다.

김시유너 혹시나 내 방 들어오면 죽인다다시 태어난 건 어쨌든 축하하고.”

문이 ’ 닫히고 아저씨는 그대로 긴장이 풀린 듯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말했지쟤 말은 별로 귀담아듣지 마렴다만 방은 프라이버시니 들어가지 말고아무튼 이자를 붙인단 건 그만큼 빨리 돌아오란 거지... 진짜 돈을 더 받는다는 뜻이 아니었단다이해했니?”

나는 애써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은혜를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꼭 다시 올게요.”

"그래고맙다어찌 되었든 시유 너는 오늘 마룻바닥에서 자야겠다다 먹었으면 따라 올라가자."


내가 식당에서 나오자 아저씨는 다시 문을 잠갔다문 옆 철제 계단을 올라가자 어스름 속에 현관문이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아저씨는 문손잡이를 슬쩍 당겨 안을 두리번거리시곤 내게 넌지시 말하셨다.

 ...지금 손님을 들이기는 그런데.”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방치된 옷들과 가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집이 거꾸로 한 번 뒤집히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아이고원래 사실 우리가 되게 깔끔하게 생활하는데오늘만 좀 그런 거니 양해 부탁한다."

.”

아저씨가 잡동사니를 하나 둘씩 줍기 시작하시며 얘기하셨다.

"안방에 가서 침대에 좀 누워 있으렴내가 금방 치워 놓을 테니 문 닫아놓고 푹 쉬고 있으렴!"

떠밀리듯이 안방으로 들어갔다그곳에는 오래된 집 특유의 꽃무늬 벽지와 나무장판이 도배되어 있었고부부용 침대 옆엔 누런 선풍기가 탈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맞은편 구석엔 복고 감성의 자주색 에어컨이 터줏대감마냥 놓여져 있었다그 얼굴에는 부적처럼 큰글씨 달력이 붙어있었는데무언가 향수가 도지는 듯 했다어이 없는 점은 이제 와서야 지금이 2014년이라는 걸 인지했단 것이다삭신이 쑤셔 푹신한 침대 시트에 벌러덩 누워버리고 구석에 잘 개어져 있던 두툼한 이불마저 염치없이 덮어버렸다.

분명 오늘이 피곤한 하루였던 것은 분명했다하지만 아직 잠이 쏟아지진 않았다차디찬 바닷물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는지 두 눈은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슬쩍 속눈을 뜨고 시선을 돌리니 화장대 위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져 있었다아저씨윤슬그리고 부인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나란히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아까 아저씨가 식구를 소개할 때 분명 자신과 딸아이만을 소개하신 것을 봐선부인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지금 두 사람 곁에 없는 듯 하셨다닫힌 문 너머로 안도의 한숨 소리가 어슴푸레 들리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이제 나와도 된단다.”

 마지 못해 문밖으로 나갔으나 기묘하게도 아까의 열대우림 같았던 장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려 있었다체감상 거실이 한 다섯 배는 넓어진 것 같았다.

"아까랑 딴판인데요?”

"크하하하!"

아저씨가 우렁차게 웃어대셨다근데 방금 전에는 활짝 열려있었던 장롱과 서랍의 문이 모조리 닫혀있는 걸 봐선 급하게 욱여 넣으신 것 같았다.

"졸릴 텐데안방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오따라오렴.”

아저씨가 장롱을 여시더니 아래쪽에 깔려있던 이불을 들어올리셨다순간 탁한 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꽤 안 쓴지 오래 되긴 했는데 일단 쓰렴.”

아저씨가 건넨 이불은 아주 오랫동안 사용했었는지 윤기나 뽀송함이 하나도 안 느껴졌다저 침대 위에 있는 게 훨씬 좋은데.

"좀 불편해도 감수해줘그럼 잘 자렴.”

정말 감사합니다!”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신원조회를 하러 가자꾸나서서히 기억이 돌아올 테이니 조급해하지 말고!”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아저씨는 손을 한 번 흔드시고 닫히는 문 뒤로 사라지셨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쏟아지기는커녕 정신이 아주 말똥말똥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뒤척거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열린 창문 밖으로 아까보다 더욱 선명해진 밤하늘의 은하수가 보였다그제서야 나는 그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았단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탈탈탈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선선하게 불어오는 풀 냄새를 실은 바람멀리서 들리는 매미소리까지비록 기억이 모두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적막한 분위기가 정말 아련하고 깊숙하게 느껴졌다.

이런 여름 밤의 잠잠함에 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나는 듯하였으나이를 의식하자 이내 어딘가로 쏙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분명 이름과 나이 빼고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음에도 마음이 편안하고 가벼웠다아니오히려 걱정거리들이 덜어지니 후련함이 느껴졌던 걸까.

기억을 되찾으면 이런 개운함을 다시 못 느낄 거란 것이 살짝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굳이 기억을 떠올리려고 머리에 안간힘을 주기 보다는 이 새하얀 눈밭에 누워 이 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마음이 푸근한 공기로 부풀어 올랐다.

 

시계바늘이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적적하던 나는 바람이나 쐬려고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분명 한여름이었고 바깥공기는 몹시 습했다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그 뜨거움은 선명함을 더해갔다건물 밖으로 나오자 온 섬을 축축한 공기가 덮고 있단 걸 깨달았다.

덥다.’

올려다 본 밤하늘엔 여전히 은하수가 흩뿌려져 있었다아까보다 좀 더 색이 진하게 변해 있었다나는 이 집으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순간 갈매기가 끼룩하고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새까만 암흑으로 뒤덮인 나무들만 그득했다나는 음산한 숲길을 피해 자갈 해변으로 내려갔다수많은 자갈들의 표면에 은은한 달빛이 반사되었다달빛이 밝았기에 가로등 없이도 주변이 어느 정도는 어슴푸레 보였다바다에는 잔물결에 달이 그대로 반사되고 있었다  

마침 어디선가 들었던 낱말 풀이가 떠올랐다본디 햇빛이나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한단 걸 들었던 것 같다그러나 포근한 뜻과는 너무 반대되는 저 집의 윤슬의 성깔에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름 진짜 안 어울리네.’

내 바로 맞은 편에서 파도가 부서졌다크고 작은 물결들은 자신이 마치 진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엎치락뒤치락했다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평안해졌다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렁이는 무언가가 가슴 속으로 잔잔히 스며들었다그러나 스며든 건 감동뿐만 아니라 끈적한 땀도 해당되었다옷 안에까지 습기가 차자 나는 서둘러 수평선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렸다.




 


 

 

 

 

 

 

 

 

 

 

 

02 반항아

 

 

결국 돌아와서도 나는 뜬눈으로 첫날 밤을 지새웠다하지만 피곤하진 않았다전날 낮에 기절한 채 계속 잠들어있었기 때문이었을까창가 바깥에서 햇빛이 들어왔지만 집 내부는 여전히 고요했다시계바늘이 6시를 향하자 안방 문 너머로 알람음인지 노래가 흥겹게 퍼졌다.

 너에게 난해질녘 노을처럼

그러나 아저씨는 하도 피곤하셨는지 전곡을 다 들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방문을 열고 나오셨다.

"으아암잘 잤니 시유야?"

"덕분에 푹 잘 잤습니다."

아저씨가 목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하셨다.

"크흠아침 먹고 경찰서에 가보자꾸나."

"…."

"슬아일어나라!"

"…"

"슬아!"

아저씨가 가까스로 방에 들어가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윤슬이 멍한 얼굴로 초췌하게 걸어 나왔다나와 잠깐 눈이 스치자 윤슬이 뭐가 그리 분한지 괜히 신경질을 냈다.

뭘 봐자다 일어난 애 첨 보냐?”

“...”

별 반응이 없자 윤슬도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지 그냥 날 지나쳤다그 사이 아저씨는 어느새 주방용 옷으로 갈아입으신 채 거실로 걸어 나오셨다.

"나는 먼저 가서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 너희 둘은 옷 챙겨 입고 이따가 내려오렴."

!”

윤슬이 서둘러 세수를 하러 가자 나는 창문을 열고 경치를 바라보았다하늘엔 어제와 달리 구름이 제법 껴 있었다순식간에 씻고 나온 윤슬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라도 되는 듯 캡 모자를 다시 눌러쓴 채 반팔 후드 티를 걸쳐 입고 나왔다.

빨리 그냥 내려가뭘 기다리고 있냐.”

윤슬이 귀찮다는 듯이 손짓하자 그대로 후다닥 내려왔다식당으로 들어서자 이른 아침인데도 식당은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섬마을 유일한 일식집이라 그런 것이었을까아저씨가 나를 보고 가리킨 주인 없는 식탁에는 카레라이스 두 그릇이 올려져 있었다나는 잠을 못 잤기에 어제 저녁을 먹고 대략 여덟 시간 동안 의식이 또렷한 상태로 굶은 셈이었다배가 신음하듯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곧장 달려가 감사인사와 동시에 밥을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카레라이스가 입안에서 황금빛 폭죽처럼 터졌다기억나지도 않는 부모님이 생각나는 맛이었다혼자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어느덧 내려온 윤슬이 말없이 옆에 앉고 숟가락을 들었다그러나 이미 질리도록 먹은 음식인 듯 질색을 하는 눈초리였다아저씨는 나가는 손님들의 계산을 돕고 곧바로 우리 식탁으로 걸어왔다.

아무튼 시유야.. 다 먹고 준비되면 일단 파출소에 가보자아마 너의 지인들이 네가 사라진 것을 보고 파출소에 실종신고를 해두었을 테니 신원조회만 하면 금방 다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게다.”

"그럴까요?"

내가 숟가락을 바쁘게 한술 더 뜨며 짧게 답했다.

"혹시 막 새롭게 떠오른 기억은 없니?"

"아직이요."

"그러니거참 큰일이구나."

옆에서 윤슬이 거들었다.

얜 파출소가 아니라 병원부터 가야 되는 거 아냐?”

"그래도 일단 가족부터 찾아야지어서 먹으렴.”

".”

재촉하지 마.”

북적거리는 손님들 사이로 가게 문이 또 한 번 드르륵 열리자 체구가 작은 두 사람이 들어섰다슬쩍 고개를 올려 쳐다봤을 때는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러나 무언가 기시감 비슷한 것이 느껴진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올렸다어느새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있었다백발의 할머니와 빼빼 마른 한 꼬마아이였다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사람의 용모를 자세히 들여다보려 눈을 찌푸렸다시선을 느꼈는지 꼬마애가 고개를 돌리자 난 그대로 머리를 숙였다윤슬은 내가 별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곧바로 내 시선을 향해있던 곳을 쳐다봤다.

너 뭐하냐왜 남 몰래 쳐다봐?”

“…아니뭔가 낯익어서...”

아는 사람이에요그럼 말을 걸어.”

아냐그런…”

저 꼬마 있지쟤도 너랑 이름 같다김시유 맞지쟤 이름도 김시유야.”

지금 뭔가가 잘못됐어잠시만…”

갑자기 윤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 사이에서 할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시유 할머니이 남자애가 할머니 찾는데요?”

꼬마 애가 돈까스를 먹는 걸 흐뭇하게 쳐다보던 할머니는 깜짝 놀라 우리 쪽을 급히 쳐다봤다.

나 말인겨?”

오히려 더 놀란 나는 수저통 뚜껑으로 얼굴을 급히 가리며 얼버무렸다.

아뇨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처음 보는 학생이고만무슨 일이여유?”

윤슬은 괜히 내 어깨를 툭 쳤다호명할 때 목소리가 쓸데없이 너무 컸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윤슬 얘는 그냥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 할머니와 꼬마 애 앞에서 얼굴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막이 흐르자 아저씨도 뭔 일인가 하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윤슬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 다시 자신의 카레밥을 야무지게 해치우기 시작했다할머니는 휘둥그래한 표정으로 우리 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혀야지.”

꼬마 애는 뭔 일인지도 모르는지 돈까스만 맛있게 입에 쏙쏙 집어넣고 있었다틀림없었다저 꼬마 애는 분명 어린 나였다그 옆에 분홍빛 티에 검은 조끼를 걸치신 파마 머리의 할머니는 분명히 우리 할머니였다.

다만대체 왜 두 사람이 이 외딴섬에 있는 건지 나로썬 알 턱이 없었다심지어 두 명의 내가 한 공간에 같이 있던 것이었다당혹함에 내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윤슬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는 걸 알아채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아저씨는 그런 윤슬을 보고 한숨을 또 내쉬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슬너 또 무슨 말실수했냐?”

나 진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손님들이 왜 다 네 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할머니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아니저 남학생이 우릴 찾는다고 해서...”

시유야아는 분이야?”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고 할머니의 맞은 편인 아저씨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니요잘 못 봤어요.”

뒤숭숭한 분위기와 상관없이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눈앞에 제시된 당혹스러운 상황에 맞게 어찌 행동해야 할지를 몰랐다.

충격의 여파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둥둥 울려댔다어린 나는 슬쩍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나는 애써 눈을 안 마주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수대로 걸어갔다몇몇 사람들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난 눈길을 끌고 있었다물을 계속 마셨다지금쯤이면 다시 식사를 이어가고 있을 줄 알고 몸을 돌린 난 그대로 할머니와 어린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학생은 누구여?”

아니...”

윤슬은 나를 보더니 히히웃었다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수년 만에 바라본 할머니의 얼굴이었다어째 내 몸이 서늘하게 떨리기 시작하며 눈가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난 대꾸도 없이 재빨리 식당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대로 문을 드르륵 열고 바깥으로 나와버렸다.

‘……여기 혹시 과거인가?’

나는 방랑자마냥 어디로 향해야 할 지 모르다가 우선 최대한 가게에서 멀찍이 떨어지려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발을 번갈아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뒤섞였다당최 생각지도 못한 일이 갑자기 닥치면 사람의 머리는 새하얘지기 마련이었나 보다      

가중되기만 할 줄 알았던 혼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냥 꿈이었구나싶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주변의 소리가 점차 미약해졌다그러나 그 적막을 깨고 뒤에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어서 빨리 이 괴상한 곳에서 벗어나야 했다그러나 너무나도 공기가 선명했다그 누군가가 무어라 웅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시유야왜 그러니?”

아저씨였다아니뭐랄까내 머릿속 톱니바퀴는 할머니를 마주친 그 순간에서 그대로 멈춰있었다난 대꾸도 없이 그저 아저씨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 할머니아는 분이시니기억이 나는 거야?”

아니요.”

그래차라리 그냥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누군가 귓속말로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얼빠진 내 상태를 본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해 가게로 되돌아 가주셨다가게에선 할머니와 꼬마 애가 식사를 마쳤는지 걸어 나오고 있었다아저씨가 살갑게 배웅을 하자 두 사람은 싱긋 웃으면서도 나를 빤히 쳐다봤다눈이 마주쳤다아이의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침식사를 급하게 마치고 뒷정리를 하시는 아저씨를 뒤로 한 채 다시 집으로 올라왔다윤슬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찰나였다거실 벽에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자 윤슬의 곱슬머리 사이사이로 빛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나의 어처구니없는 행보를 주도한 그 애였지만 이번 경우엔 어딘가 화나지는 않았다윤슬은 나를 보더니 기묘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너 갑자기 왜 나간 거야?”
“…아니너야말로 갑자기 할머니를 왜 불러서...”

네 할머니셨어?”

그건 아닌데…”

그럼 왜 힐끗힐끗 쳐다보고 난리인데하도 답답해서 대신 불러준 거다잘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슬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눈길을 거두었다혹시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유별난 애라면 내 말을 믿어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밑져야 본전이었고 난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진짜로 말해줘?”

.”

내가 갑자기 나갔던 이유.”

그냥 대인기피증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뭔데남의 시간 잡아먹지 말고 말해.”

“…방금 네가 부른 할머니는 내 외할머니야기억나.”

근데 왜 아는 척 안 했어?”
윤슬이 흥미가 생겼는지 리모컨으로 보고 있던 예능 프로그램을 꺼버리고 내 얘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 옆에 꼬마 애가 있었잖아… 걔는 어린 시절의 나였어.”

“….”

잠시 벙찐 채로 날 보던 윤슬은 다시 리모컨을 찾으려는지 손을 주섬주섬 더듬거렸다.

아니 잠깐기다려지금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여내 표정을 봐난 진지해!”

“…완벽하게 정신이 나간 것 같아.”

아니 내 말을 좀 들어봐나도 부분부분 생각나기억이 다 돌아온 건 아니야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래도 내가 예전에 이 섬에서 살았다는 거야어린 시절에.”
 “…어제는 처음 온 척하더니?”
 그때는 가물가물했어!”

윤슬은 키킥웃더니 엉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오리냐처음 본 할머니가 네 할머니면 우리 아빠는 네 아빠야나는 네 여동생이고?”

아니농담 따먹는 게 아니라고!”

순간 말의 끄트머리에서 삑사리가 나자 윤슬은 더 우습다는 듯이 깔깔거렸다내 얼굴이 또다시 금새 달아올랐다내가 생각해도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애 할머니를 뺏으면 어떻게 하니시유야!”

그리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니까내가 지금 과거로 온 것 같다고.”

아주 갈 때까지 가는 구나그냥.”

윤슬은 가엽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다시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럼 뭐 10년 후에서 오셨어요?”
정확한 연도까지는 모르겠는데확실한 건 2014년 이후야.”

예언 하나 해봐.”

“……예언아니내가 말한다 한들 네가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어떻게 알아?”

그러네.”

윤슬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이 애는 모든 일이 건성인 듯 했다어찌 설득을 이어나가야 할 지 싶었다.

그래내가 뭘 도와줘야 해?”

뜻밖의 말이 윤슬의 입 밖으로 나왔다.

?”
아니괜히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거 아냐나한테 숨겨야 되는 상황일 수 있을 텐데아빠도 아닌 굳이 나에게 그런 막중한 사실을 왜 알린 건데?”

분명 믿지 않는다는 말투였으나그럼에도 상대의 말은 끝까지 들으려고 하는 듯 했다오히려 역으로 당황한 건 나였다.

그니까…”
윤슬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누가 시켜서 온 건 아닌가 보네?”

“……”

아니나는 그냥 열린 마음인 것뿐이야.”
“…나는 정말 배가 뒤집혀 바다에 빠졌다는 것 빼고는 기억 안 나다만 여기가 내가 살던 시간대가 아닌 건 확실해심지어 어린 나까지 저렇게 덩그러니 있으니…”

윤슬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건 확실해?”

이 식당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 주택가들을 지나쳐 낡은 철물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가면 마을회관이 있어그 옆에는 슈퍼마켓맞은 편에는 오래된 횟집과 한식집이 있어여관도 그 사이 즈음에 껴있고… 맞나?”

순간 윤슬의 눈이 커졌다예상치 못한 답에 놀란 듯 윤슬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래진짜였어?”

맞지정말이라니까?”

윤슬은 그 상태로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게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지금 파출소로 간다 한들… 네 신원 확인이 되나?”
 “…그러네내가 그래서 도움을 요청한 거야!”

뭔 도움?”

“…나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 해봐서다만 지금 이 상태로 아저씨 손에 이끌려 파출소로 끌려가면…”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치 못하겠네.”

윤슬은 쩝소리를 내더니 건조대에 널린 내 교복을 빤히 바라보았다앞 주머니에 등화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그걸 본 윤슬은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뭐하게?”

네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보게기억 안 난다고 했지그 학교가 있는 곳이 분명 네가 살던 동네겠지근처에 네가 살던 집까지 있을 테고.”

속전속결이었다방금 전까지 툴툴거리기만 하던 애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태도가 돌변하자 나는 기겁했다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등화고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로 326-17, 갈 거야?”

?”

갈 거냐고묻잖아.”

“…너도 갈 거야?”

드디어 여기 이 섬을 나갈 그럴 듯한 구실이 생겼는데마다할 이유가 있나곧 아빠 온다.”

주저하는 나를 보더니 윤슬은 수납함에서 포스트잇을 꺼냈다그리고 네임펜으로 거기다가 이렇게 썼다.

 

 

나 김시유 집 데려다 주러

서울 갔다 옴내일까지는

돌아올 듯.’

 

 

“…됐다가자!”

네임펜 뚜껑을 뚝 닫으며 윤슬이 외쳤다.

제정신 맞아?”

?”
아니순식간에 자기 딸이 이런 쪽지만 남기고 훌쩍 사라져 버리면 나 같아도 가출로 받아들일 거 같은데.”

그러라고 해.”

맙소사이런 반항아랑 한 팀으로 움직여야 되는 상황이란 걸 인지하고 난 그대로 탄식했다.

안 움직이면 기회는 또 안 온다?”

윤슬이 지갑을 후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얘는 진짜였다당최 속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윤슬은 캡 모자를 뒤집어쓴 채 룰루랄라 신발끈을 묶고 있었다할 말을 잃고 내가 멀뚱거리고 있자 답답했는지는 걔는 나에게 소리쳤다.

빨리 안 오면 놓고 간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네가 나 따라오는 거잖아!”

철제 계단을 후다닥 내려가자 하필 식당을 임시 휴업하고 문을 잠그고 계신 아저씨를 보았다.

내려왔니미리 선착장 가있으면 곧 뒤따라 가마.”

오케이.”

윤슬은 내가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아저씨를 뒤로 하고 비탈진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갔다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슨 배 타게?”

우리 마을에 선착장은 두 곳이야아빠 낚싯배가 있는 곳 말고 다른 반대편으로 가야지안 되겠다뛰자.”

말 끝나기 무섭게 그 얘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정말 마이웨이 감성이 충만했다.

!!”

윤슬이 말한 또 다른 선착장은 마을을 쭉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덕분에 옛 기억을 되새기며 향할 수 있었다.

저기 예전에 내가 살았던 집이다!”

“…진짜 과거로 온 건가 보네.”

우와저 가게저기서 맨날… 할아버지가 아이스크림 사주셨는데그때는 설레임이 그렇게나 좋았었어.”
 지금은 안 좋아?”

지금은 더 좋아해.”

“…뭐야싱거워.”

어느덧 골목 사이로 선착장의 모습이 보였다수평선 쪽으로 아담한 보트가 유유히 떠나고 있었다불현듯 머리에 이성이 스친 내가 윤슬에게 말했다.

잠깐타는 데 돈 내야 되는 거 아냐?”

내가 내줄게.”

너 지금 얼마나 있는데?”

돈은 오랫동안 모아두어서 한동안은 문제 없어애당초 내가 이전부터 가출하려고 마음 먹고 있기도 했고…”

“…너 때문에 현기증 난다.”

 

 

 

 

 

 

 

 

 

 

 

 

03 집으로

 


어젯밤과 같이 난 또다시 갑판 위에 서있었다파르스름한 하늘 가운데 떠있는 태양은 온 사방을 후끈하게 달구고 있었다난간을 도저히 잡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하지만 바다 향을 담은 채 몸을 스치는 바람들이 흘러내리는 땀을 가라앉혔다사진을 찍던 윤슬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발신자는 아빠라고 적혀 있었으나윤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대로 통화종료를 눌렀다.

너 그렇게 막 나가도 돼?”
진심으로 걱정된 내가 묻자 윤슬이 말했다.

뭐가신경 꺼.”

아니너희 아버지 되게 좋은 분 같으셨는데자꾸 네가 그렇게 폐를 끼쳐도 되냐고.”

… 내가 어디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도 허락을 상세히 받아야 하냐가뜩이나 저 섬마을에서 지금 내가 얼마나 썩히고 있었는지는 알아? 4개월이야, 4개월.”
 윤슬의 표정은 과장 하나 안 보탰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4개월 동안 밖으로 아예 못 나왔었어?”

그런 일이 있었지어휴됐고 목이나 좀 축이자덥다.”

윤슬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판기 쪽으로 발을 옮겨 천원 두 장을 자판기에 집어넣었다이윽고 캔 음료 두 잔이 나뒹굴어지며 떨어졌다은술은 내게 슬쩍 음료를 건네 들었다.

건배해어찌 되었든 자유를 쟁취한 걸 축하하자고!”
나는 말없이 캔을 퉁 부딪혔다선선한 바람이 멀리서 불어오자 땀이 식었다. 윤슬은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른 듯 !”라고 말하며 내게 이야기했다.

너 그거 알아시유 있지아니 너 말고 네가 말하는 어린 시유 있잖아듣기론 걔 내일 서울로 간다 했어걔의 부모가 데려온다고 했데.”

“…여행으로?”

아니걔 부모가 뭐랬나… 전셋집을 몇 년 만에 구했다고 했을걸그니 이제 자기들이 데려간다는 거지.”

나는 왜 기억이 또 흐릿하지내 부모가 그랬다고?”

몰라나도 아빠가 손님이랑 대화하는 거 대충 흘려 들은 거였지.”

윤슬은 슬쩍 양손을 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더니 푹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멀어져 가는 섬마을에 두고 말했다.

너한테는 잘된 거였겠지나도 도시에서 고등학교 다니고 싶었는데.”

“…그럼 내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서울에서 부모님이랑 살았던 거네섬에선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랑 잠깐 같이 살았던 거고그럼 대체 왜 하필 저 마을 앞바다에 빠져있던 거야어쩌다가?”

내가 빠뜨린 줄 알겠네누가 들으면단순하게 생각 못 해그냥 여름에 근처로 휴가 와서 수영하다가 망망대해까지 갔나 보지.”

“…그럴 리가우연은 아닐 텐데.”

하여간 이렇게 바람까지 부니까 진짜 해방감이 지대로네나 사진이나 찍어줘라.”

윤슬은 무턱대고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나는 어영부영 카메라 셔터 버튼을 눌렀다찰칵 소리와 일탈의 한 순간이 고스란히 저장되었다.

 

여객선이 곧 선착장에 다다르고 탑승객들이 건널 판자 위를 밟고 우르르 내려갔다우린 가장 마지막에 그 행렬을 따라갔다확실히 바다에 있을 때보다 육지가 더 공기가 탁하고 후끈했다윤슬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지도 앱 아이콘을 눌렀다곧 이어 우리가 위치해있는 곳이 장소가 전라남도 목포시라고 손바닥만한 화면에 보여졌다그 축소된 지도에서도 서울은 여전히 아득히 위쪽에 있었다.

“KTX 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역이 목포역이네걸어서 가도 되겠다알아서 잘 따라오고!”

푹푹 찌는 더위인데도 윤슬은 지칠 줄을 몰랐다나는 괜히 뱃멀미가 나서 속이 메스꺼운데 걘 나 몰라라 하고 이미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었다분이 났으나 교통비의 주도권은 내 손에 원래부터 없었다.

휘청거리며 골목골목을 스쳐가자 곧 거대한 기차역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윤슬은 입을 그대로 떡 벌리는 듯 하다가도 이내 나를 의식하더니 넌지시 다물었다역사 내에는 그다지 사람이 많이 없었다커다란 창틀 너머론 주백색의 햇빛이 쬐어오고 있었고 먼지 알갱이들이 이리저리 나풀대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뭐야 쟤?’

윤슬은 개찰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델리만쥬 가게에서 주인장에게 이것저것을 캐묻고 있었다그러곤 순식간에 두툼한 한 봉지를 사 들고 왔다볼 때마다 간식을 사고도 저리 여유가 넘치니 당최 얼마나 오랫동안 주도면밀히 자금을 축적해온 지 알 법했다우린 서울행 표를 끊고 열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에 나란히 앉았다.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델리만쥬.”

윤슬은 그대로 입에 하나를 쏙 집어넣었다몇 번 오물오물 씹더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나도 하나 슬쩍 집어 들어 한 입에 넣었는데퍽퍽한 밀가루만 씹혔다.

뭐야왜 크림이 안 들었어어우목 멕혀.”

델리만쥬에 크림이 들어가?”

원래 슈크림 맛으로 먹는 게 델리만쥬인데?”

포장지에서 델리만쥬를 다시 하나 집어 들어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슈크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양심도 없는 주인장이 일부러 밀가루로만 내부를 잔뜩 채워 넣은 것이다그러나 이 가엾은 아이는 원래 델리만쥬에 크림이 없는 줄 알고 맛있게 먹고만 있었다그 무해함이 전까지 보여준 모습과 너무 달라 괜히 위화감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웃겨?”

오물오물 씹던 도중 입을 여니 안에 있던 빵가루가 튀었다.

윤슬은 순간 당황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아냐.”

그 애는 델리만쥬를 쓱 쳐다보더니 문제 없다는 듯이 그대로 하나 더 입에 쏙 집어넣었다 내가 실없이 웃자 윤슬은 미간이 찌푸리며 입을 괜히 조신하게 한 손으로 덮었다.

 

저 만치서 대기를 매섭게 가로지르며 KTX가 다가오고 있었다불현듯 윤슬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오는 기차 쪽으로 걸어갔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기차가 눈앞에서 지나가는 데도 윤슬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의 끄트머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이윽고 기차가 서서히 멈추자 윤슬은 내게 손짓하고 안으로 휙 들어갔다다행히 기차 내부는 서늘하여 땀은 금방 식었다두리번거리던 윤슬은 창가자리에 툭 앉고 나를 나지막하게 불렀다그 옆 좌석에 나는 넌지시 앉았다윤슬의 시선은 이미 창 밖으로 쏠려 있었다이윽고 기차가 찬찬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곧 속도가 붙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풍경들은 창틀 안에 자취를 새겼다가 이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우리 좌석 옆 창문의 방향은 때마침 햇빛을 향해 있었다윤슬의 곱슬머리 사이사이로 빛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어슴푸레하면서도 그 중축만은 선명한 지평선 뒤로 설산 같은 뭉게구름들이 피어나 있었다.

나로써도 오랜만에 보는 듯한 맑게 갠 여름하늘이었다.

미니어쳐 같은 사람들과 건물이 쏜살같이 지나쳤다시간은 멀리 있는 푸른 산자락들에겐 서서히알량한 크기의 사람과 건물에겐 빠르게 흘러가는 듯 했다.

불현듯 우리들도 잠시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점점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윤슬은 창가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있었다어제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였으나 여전히 나는 피곤하지 않았다높다란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더니 바닥에는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를 실은 기차는 침엽수림을 연상시키는 고층빌딩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그 직경을 곧게 가로지르는 검은 물거울엔 또 하나의 도시가 뒤집힌 채 비추어지고 있었다서울이었다곧 이어 경쾌한 반주가 함께 안내방송이 흘렀다.

이번 역은 서울서울 역입니다내리실 문은...”

서서히 눈을 뜬 윤슬은 창가 너머를 바라보았다검은  창문에 반사된 윤슬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북받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윤슬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실실 웃었다기차가 승강장에서 차분히 정차하자 윤슬은 곧바로 좌석과 좌석 사이를 가로질러 문으로 빠져나가며 외쳤다.

  서울이다!”

 온 주변이 사람에사람에사람뿐이었다잔잔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즐기다가 갑자기 수많은 인파 속에 둘러 쌓이니 정신이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사람들이 몰리는 방향으로 몸이 이끌려 우여곡절 개찰구로 나왔다좀 전에 있었던 기차역하고는 아예 다른 판이었다사방에서 예전 어릴 적에 흘러 지나갔던 온갖 발라드와 팝송이 다시금 상기되고 있었고 외국인들과 더불어 온갖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혼잡했다윤슬은 가지각색의 색을 품고 광명을 내는 수많은 식당 간판과 엑세서리 샵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아무리 가출 비용을 넉넉히 준비했다 한들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낯선 장소에서 흥청망청 돈을 붓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순간 진열대의 반짝거리는 휴대폰 케이스를 향해 윤슬의 시선이 꽂혔다집 문서라도 넘길 눈초리였다어쩔 수 없이 나는 걔의 팔을 붙잡고 군중들 사이를 지나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너 어딜 만져이거 놔!”

조용히 해일단 고등학교부터 갔다 와서 구경하든지 하라고경비아저씨가 퇴근해버리면 어떡해!”

답답한 새끼…”

윤슬이 투덜거리며 멀어지는 휘황찬란한 빛 줄기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출입구로 나오니 오히려 더 문제였다우리가 걸어 나온 서울역 건물 앞으로는 붉은 헤드라이트들의 자동차 수백 대들이 일제히 지나가고 있었다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시민들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상가와 백화점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윤슬의 이성을 마비시켰다걔는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껴졌는지 시선을 위로 꽂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진짜 화려하다정말.”

집중해줘바로 등화고로 가야 해.”

그러나 이미 번화한 도시의 장관에 윤슬은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걔는 갑자기 혼자 몸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꺄르륵!’하고 웃어 젖히었다..

김시유 우리 밥 먹자나 배고파!”

그러더니 뭐가 그리 좋은지 윤슬은 또 깔깔 웃었다.

“…그래그래고등학교 근처에서 먹자빨리 가자!”
윤슬은 껑충껑충 뛰며 거리를 활보했다그러더니 배낭을 맨 채 상가 앞을 배회하는 외국인들에게 슬쩍 다가가 어설픈 발음으로 말을 걸었다.

나이스 투 밑 유!”

“Oh, hello?”

단 두 마디에 윤슬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방방 뛰었다어느 순간부터 길찾기 담당은 내가 되어있었고 휴대폰도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그러나 넙적한 인터넷 지도와 내가 걷고 있는 현실은 한 차원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그 차이가 너무 심했다온갖 노점과 포장마차가 즐비한 거리에서 어디까지가 건물이고 어디까지가 한 블록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게 고등학교 근처에 다다랐다하나 둘 씩 밤 늦게까지 빛이 새고 있는 대형학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내 가운데 도로 하나를 끼고 쭉 늘어선 학원가가 눈에 들어왔다전과는 달리 숨이 텁 막히는 풍경에 윤슬은 약간 풀이 죽은 듯 했다.

“뭐야여기는 왜 거의 학원들밖에 없어?”

“아무래도 근처에 학교들도 많으니까… 등화고도 이 주변에 있는 것 같아.”

“잠깐그럼 여기가 네가 사는 동네인 거야?”

“뭐아니완전히 단정지을 수는 없지무조건 집 근처 학원을 다니지는 않잖아.”

건너편 학원가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게 보였다우리 학교 교복임이 틀림없었다그러나 얼굴들은 하나같이 다 낯설었다.

“어교복이 같은데 아는 애들이야?”

윤슬이 옆에서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때 서서히 어딘가 타는 냄새를 맡았다퀴퀴하고매스껍고코가 따가워지는 냄새였다냄새의 근원지는 멀지 아는 곳에 있는 듯 해서 난 고개를 들어올렸다.

 뭐야저 연기?”

상가건물들 사이로 새까만 연기가 하늘로 스멀스멀 솟아오르고 있었다특유의 탄내가 더욱 짙어졌다자동차 경적 소리가 ‘하고 울리자 난 그제서야 도로가로부터 멀어졌다.

“야김시유너 갑자기 정신을 어디다 두는 거야?”

“저걸 봐!”

내가 가리킨 방향엔 분명 검은 연기가 건물들 사이 틈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큰일이었다높다란 옥상 너머로 새빨간 불길이 힐끗힐끗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길을 따라 달려가자 시차로 벌어진 상가 건물들 사이로 불길들이 사방으로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거대한 잿빛 회오리는 달에 거의 맞닿아 있었다.

“어디 가!”

“저기 고등학교를 봐불이 났잖아!"

“생뚱맞게 뭔 불이야

난 그대로 차도를 가로질러 달렸다양쪽에서 경적소리가 들렸지만 난 애써 무시하고 지나쳤다불타오르는 학교에 온 시선이 향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은 보이지 않았다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연이어 울리며 나를 향한 윤슬의 말은 금방 묻혔다지나가는 학생들을 피해가며 그대로 학교로 향하는 골목가로 들어섰다학교의 전경이 주택들 사이로 선명하게 보였다자욱한 검은 연기를 쉬지 않고 내뿜는 시뻘건 불길은 별관 2층에서부터 창문을 통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거기 학생!”

그러나 내가 시선이 팔린 그 찰나에 갑자기 왼쪽 좁은 골목에서 승용차가 튀어 나왔다.

— 삐………!

경적과 함께 몸이 그대로 날아갔다.

 

 

 

 

 

주위는 캄캄했고 무어라 주변에서는 소리가 들렸으나 어슴푸레해서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차츰 주변이 환해지며 서서히 감각이 돌아왔다눈이 슬쩍 떠졌다낯선 천장의 형광등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지승용차에 치었지…’

그러나 차에 치였던 그 순간이 어젯밤 일처럼 흐릿하게만 느껴졌다고개를 들려 하자 들리지 않았다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지?’

다시 한 번 힘을 주었으나 오로지 지금 움직이는 건 내 눈동자뿐이었다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두 낯선 남녀가 양쪽에 나란히 쭈그려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문뜩 졸고 있던 남자의 감길 듯한 눈과 마주치자남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래 해졌다남자는 황급히 맞은편의 여성을 툭툭 건드려 깨우며 말했다.

“—여보시유 눈 떴어!”

“…?”

두 사람은 분명 기억 속의 그 사람들부모님들이었다이내 어머니마저 고개를 드시고 두 사람 모두 나를 향해 소리쳤다.

시유야우리 보여말 좀 해봐!”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 했으나 목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온 몸이 미동조차 하지 않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마치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그러나 다시 눈이 서서히 감기며 두 사람의 얼굴로 향해있던 초점이 흐려졌다주위가 금방 다시 어두워졌다.

시유야안 돼눈 떠!”

순식간에 그들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난 그대로 다시 의식을 잃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순간 눈이 다시 눈이 떠진 곳은 아까 그 아스팔트 골목길이었다난 그 한복판에 엎어져 있었다주위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윤슬은 내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나를 막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김시유죽었어...말 좀 해봐!'

‘…뭐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나에게 향해 있었다고개를 다시 뒤로 돌리니 학교는 여전히 불에 타고 있었다시뻘겋게 그 주위 주택들이 물들어있었다.

“…학생 괜찮아요

괜찮으세요?”

“….”

어째서인지 사람들은 내 뒤로 불타는 학교 건물보다 내

몸 상태에 더 관심이 많았다나는 몰려있는 사람들 쪽을 다시 쳐다보았다하나같이 모두 염려스러운 눈빛이었다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간신히 잡고 불길을 향해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제가 중요해요저기 학교에 불이 났잖아요!”

불이 대체 어디 있단 거야!”

윤슬이 바로 옆에서 외쳤다저 일렁이는 거대한 불길이 눈에 안 보일 리가 없었다다시 소리쳤다.

다들 저기 불 안 보이세요?”

사람들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

누가 전화 좀 해봐!”

뭐야 이거?’

내 후방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사람들의 얼굴은 불길에서 나오는 짙은 붉은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아무도 자신들 맞은 편에서 벌어지는 참사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윤슬은 진정하라며 천천히 날 향해 걸어왔다.

이어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다시 학교 일대로 뛰어갔다그러나 발걸음을 한 발자국씩 뻗을 때마다 느낀 건 이렇게 큰 화재임에도 그 누구도 시선을 저 불길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주택가와 가로등 앞의 사람들은 불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는 나를 힐끗 쳐다볼 뿐이었지막상 내가 향하고 있는 학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심지어 시끄럽게 울리고 있어야 할 사이렌 소리 하나 귀에 들리지 않았다바로 자신의 집 건너편에서 불이 나는데막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 또한 보이지 않았다어느 여타 밤과 다를 바가 없는 평온한 분위기였다.

마치 불에 집어삼켜진 저 학교와 주민들이 사는 이 주택가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단절된 것만 같았다.

위화감이 들었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나는 자칫 멈춰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나시 티의 아저씨에게 외쳤다.

“아저씨 저기 학교에 불 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무슨 불?”

나는 숨을 고르느라 횡설수설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저 학교 건물이 지금 불에 타고 있잖아요!”

“대체 뭘 보고 말하는 거야?”

“아니장난치지 마시고...진짜 안 보이세요?”

“새끼가 뭐라는 거야?”

아저씨가 침을 퉤 뱉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오자 난 하는 수 없이 다시 학교를 향해 달렸다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주변 공기가 뜨거워짐을 느꼈다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머리는 이미 젖어있었다언덕배기를 오르자 드디어 모든 학교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별관 2층에서 새빨간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짙은 유독가스 냄새가 사방에 퍼져있었다눈이 따가웠다그러나 고개를 뒤로 돌리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그 중엔 같은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도 있었다.

“거기!”

내가 소리치자 그 애는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지금저 건물 2층에서 불 나는 거 안 보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뒤 여학생은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주택가 사이로 사라졌다왜인지 모르겠으나 나만 별종 취급을 받고 있었다.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이글거리는 불길은 금방이라도 주변으로 확산될 것 같았다.

다만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인지하고 못하고 있었다내 앞뒤를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러나 말거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그때 멀리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윤슬이 달려오고 있었다나는 그 애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너저거 안 보여?”

“아 씨… 병신아뭘 말하고 싶은 거야도대체!”

윤슬의 윽박은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아 버렸다아침에 이어 또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나는 순간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카메라를 열고 불에 타오르고 있는 학교의 외관에 가져다 댔다분명 카메라 너머로도 불이 나고 있는 모습은 생생히 보였다.

“이래도 안 보인다고?”

촬영한 영상을 윤슬에게 가져다 댔다.

뭐가?”

“어?”

분명 내 눈에는 촬영된 영상에 화재 장면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그러나 윤슬은 아무런 특이점도 없다는 듯이 눈을 찌푸린 채 내가 들이댄 화면을 쳐다봤다.

“너 설마 귀신 보이냐?”

윤슬이 어이없는 눈초리로 말하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순간 현실감각이 다시 둔화되었다내가 다시 한 번 학교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윤슬이 순간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너 귀신이야?”

“뭐...?”

윤슬은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듯 계속 나릿나릿 뒷걸음질쳤다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윤슬의 동작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바다에 빠졌었다고.”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거야?”

윤슬은 슬그머니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신발이 땅에 착 붙어있었고 그림자가 진하게 드러나있었다그러나 그럼에도 윤슬은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그 애의 얼굴 좌측을 시뻘건 광명이 두르고 있었으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만 향해 있었다길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이 대치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교문 뒤편의 경비실로 다가갔다창가로 얼굴을 들이댔으나 경비는 한가롭게 예능 프로그램을 쳐다보고 있었다내가 창문을 툭툭 두드리자 그제서야 경비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 일이여?”

“할아버지저기… 별관에 뭐 안 보이세요?”

경비는 내 뒤로 보이는 학교를 쳐다보고 바로 답했다.

“뭐가 보인다는 겨?”

“아…”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저 불은 오로지 내 눈에만 보였다.

“왜 그리 땀을 많이 흘리니물이라도 한 잔 줘?”

아니에요감사합니다.”

 

 교문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나를 윤슬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만 있었다나는 그대로 도로에 주저 앉았다웅크린 내 뒤로 학교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04 공상인연

 

 

!”

인절미 팥빙수가 테이블에 올려지자 윤슬은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한 움큼이나 퍼 올렸다한 입 베어 문 윤슬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듯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 창문 너머로는 불길 위로 검은 연기가 멀리서 계속 피어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말거나 윤슬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며 흐느꼈다.

아름답다…”

나는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목이 쓰라렸는데윤슬은 신경도 안 쓰고 쉬지 않고 팥빙수를 퍼먹었다그래안 보이는데 어쩔 수 있나많이 먹어라나는 숟가락 한 번 들어올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커다란 빙산은 깎여나가고 누런 인절미 가루만 그릇에 소복하게 쌓여있었다아직 성에 차지 않는지 윤슬은 그대로 붕어빵까지 추가로 주문하고 걸어왔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내 얼굴을 보더니 윤슬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이제 어쩔 거야?”

“...”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지 오래였다단순히 추측일 뿐이었지만 확신은 더 짙어져만 갔다그러나 이 애에게 지금 내가 떠올린 생각을 말했다가는 어찌 반응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우나에서 잘 수 있나?”

윤슬이 물었다.

미성년자는 안 되거든.”

뻐기면 되잖아.”
“……”

내가 계속 말대꾸를 넘기자 윤슬이 답답했는지 숟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며 추궁했다.

너 자꾸 왜 그래 갑자기?”

“….”

그냥 말해라답답하다.”

이거… 내 꿈이야?”

순간 윤슬이 입을 다물었다그저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서늘함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말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

“…?”

윤슬이 되물었다나는 얼빠진 채 눈을 살짝 돌렸지만 윤슬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불현듯 어디서 들었던 이런 악몽에 대해 생각났다꿈속 인물에게 이게 꿈이라고 말했더니 그 인물이 너에게만 꿈이겠지!’ 라며 죽일 듯이 쫓아왔다는 그 꿈지금 내 상황과 맞닿아있었다그때 윤슬이 다시 킥킥웃었다.

뭐라는 거야?”

그러더니 윤슬은 마지막 남은 붕어빵마저 자신의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너 이상하게 아까부터 계속 왜 헛소리만 하냐제 눈에만 불이 보인다니 뭐니.”
 네겐 안 보이겠지만 내 눈엔 지금도 창문 너머로 건물이 타오르는 게 보이거든?”

너 그거 외상 후 장애야.”

“…?”

익사할 뻔한 충격으로 환각 같은 게 막 보이는 거야네 눈에만지금 불이 보이는 사람이 오로지 너뿐이잖아.”
 “…그거 알아아까 차에 치었을 때잠시 눈을 떴어내가 누워있던 곳이 웬 병실이었는데… 내 부모님이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고그러고 다시 기절해서 여기로 온 거야.”

멍청아그때 꿨던 게 꿈이겠지무슨 의식의 수준이 그래?”

“…너도 꿈이잖아!”

순간 언성이 높아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또 나에게 꽂혔다내 얼굴이 다시 화끈해졌다근처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윤슬은 빤히 내 눈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걸어갔다.

“…윤슬!”

오지 마자꾸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어아무래도 네 상태가 심상치가 않으니 어디 전화라도 해야…”

윤슬이 휴대폰을 꺼내 들자 나는 하는 수 없이 달려가 그걸 빼앗으려고 했다.

오지 마어딜…”

내가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윤슬의 손목을 붙잡았다윤슬의 눈동자에 창가 너머에 불꽃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꺄악!”

윤슬이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휴대폰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사람들이 술렁거리자 난 급히 휴대폰을 주워 윤슬의 손에 건네주었다.

거기 너지금 뭐 하는 거야?”

여자친구 막 때리는 거 아냐?”

사람들의 야유가 빗발치자 난 시선을 의식해 윤슬에게 손을 건넸다윤슬은 떨며 내 손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뭐가야야빨리 일어나기나 해!”

윤슬은 살며시 내 손을 잡더니 또다시 내 뒤로 보이는 창가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불 났어!”

너도 이제 보이는 거야?”

이 광경을 탐탁히 않게 보았는지 몇몇 불량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친구 지금 데이트 폭력하는 거에요?”
아니…”

윤슬은 여전히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내가 윤슬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이렇게 예쁜 여친을 막 넘어뜨려도 되는 거냐고!”

남자들이 나를 툭밀쳐내 넘어뜨렸다그 순간 잡고 있던 손이 놓아지자 윤슬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저기요남친 아니에요잠깐 다툰 거니까…”

아니에요저희가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학생은 거기 앉아만 계세요.”

남자들은 나를 막 걷어차기 시작했다.

아악!”

주변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각자 휴대폰을 들어 나를 넌지시 멀리서 촬영하고만 있었다.

저기요제가 언제 맞고 있다고 했어요?” 

남자들은 윤슬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나를 폭행하고만 있었다윤슬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살피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라고 이 새끼들아!!!”

귀가 찢어지는 소리에 남자들은 주춤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윤슬에게 말했다.

… 저희는 또 남친한테 맞고 계신 줄…”

남친 아니라고 미친 상또라이들아!!!”

남자들은 기겁하더니 이내 술렁이며 자신들의 자리로 어슬렁거리며 돌아갔다윤슬은 내게 손을 건넸다두 손이 맞닿는 순간 윤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우리 둘은 동시에 불이 보이는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여?”

세상에… 저게 대체 뭐야.”

 

우리는 쫓겨나듯 팥빙수 가게에서 나왔다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우리가 걷고 있던 길은 좀 전의 서울역 앞이나 학원들이 밀집돼있던 번화가와는 달리 칙칙했다곳곳엔 신발에 여러 번 짓밟힌 듯한 담배꽁초들이 떨어져 있었을 뿐 더러 낡은 가로등 아래엔 쓰레기 봉투들이 작은 언덕배기처럼 쌓여져 있었다벽돌 담벼락엔 온갖 난무한 욕들이 스프레이로 새겨져 있었다도시의 그림자와 같은 곳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와 윤슬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다어느덧 전망이 탁 트인 도로가로 다시 나오자 낮은 건물들 너머로 불길이 치솟는 학교가 한눈에 보였다윤슬이 내게 손짓했다.

손 줘봐.”
내가 손을 건네자 윤슬이 탁 붙잡았다순간 윤슬의 눈동자에 불길이 비춰지는 것이 보였다윤슬은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말했지불타고 있다고.”

… 학교가 아까 네 고등학교잖아잠만정말 우리 말고는 아무도 못 보고 있는 거야?”

아까 봤잖아그렇게 사람들이 학교 앞에서 몰려 있었을 때도 나만 보인다고 했던 거.”

“…정말 그럼 여기가 네

윤슬이 말을 잇지 못했다눈이 커져 있었다.

헛웃음을 한 번 하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양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부여잡았다시선은 정착할 만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뭐라 혼자 중얼거리는 듯 하더니 이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난 절대로 여기가 너 같은 놈의 꿈이란 걸 인정 못 해라는 눈빛이었다그러곤 입을 슬쩍 열고 말했다.

“…어떻게 할 건데그래서?”

모르겠어꿈이라 해도 눈을 감고 있는 느낌도 없고침대에 누워있는 기분도 안 들고… 그냥 현실 같아.”

기억은 다 돌아온 거야?”
아빠와 엄마의 얼굴… 그 정도까지만그마저도 잠에서 일어났을 때 마주치면서 알아차린 거지.”
 “…일단 그러면 우리 마을로 돌아가자여전히 백지상태인 상태에서 서울에 있어봤자 그리 도움도 안 되는 거 같으니… 아빠는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볼 테니까너 파출소 못 가도록.”

순간 윤슬은 추가로 무언가 떠올랐는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혹시나 깰 수 있어도 깨지 마네가 잠에서 아예 깨어난다면 이곳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잖아!”

“…알았어.”
눈 뜨기만 해봐…”
 

지금 어제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이미 자정이 넘은 지금 가장 빨리 서울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새벽 5시까지 기다린 뒤 첫차를 타는 것이었다우린 머물 곳도 없었기에 어딘가 밤을 샐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이건 내가 생각한 서울여행이 아니야.”
윤슬이 좌절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우린 24시 무인카페를 발견하여 그곳에 들어갔다.

믿을 수가 없네… 대체 언제부터 네 꿈속이었다는 거야난 여기서 쭉 살아왔는데.”

그러게…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그럼 네가 자고 있는 현실은 여기하고 달라?”

시간대만 다르지아예 똑같아.”

그럼 대체 현실하고 꿈하고 뭐가 다른 건데?”

평행세계 같다고 해야 되나… 분명 내 주변인들도심지어 어린 나조차도 그대로인데 나만 툭 떨어진 것 같아.”

“…어릴 적에 나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선명하게 남아있어나야 간간히 찾아오는 손님인 어린 너를 잘 챙겨줬다만…”

나도 네가 잘 기억나진 않아… 다만 무의식에는 남아있으니까 이렇게 지금 내 어릴 적 기억에 남아있는 거겠지?”

말끝 흐리지 마이 새끼야.”

미안.”

“…배 난간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졌다는 거그 사실은 진짜야 아니면 꿈에서 일어난 일이야?”
 그건 확실해진짜야그렇게 바다에 빠지고 의식을 잃어 이 꿈을 꾸게 된 걸 거야지금 다행히 침실에 누워있는 것 보면 구조되긴 했는데… 아무래도 혼수상태인 것 같아.”

그럼 네가 혼수상태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아니나로썬 더럽게 어이가 없네아니어쩌다가 서울 살던 애가 한밤 중에 배를 타고 어제도로 올 일이 있나?”

이상하게 어릴 적 기억부터 나는 거 있지가장 최근에 겪었던 일들은 아예 백지 상태고.”

그렇다면 저기 학교에서 나고 있는 불은어릴 적의 트라우마 같은 거 아닐까?”

트라우마?”

항상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나선 그 장면이 계속 떠올려지잖아생각하고 싶지 않아도네가 어릴 적에 봤던 불이… 아마 지금도 무의식에.”

순간 윤슬이 분했는지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들이마셨다.

아휴내가 뭐하고 있는 거야이 꼭두새벽에너 참되게 정상적인 꿈 꾼다?”
 “…?”

난 잠만 들면 그 상태로 생지옥인데넌 침대에서 발 뻗은 채 꿈에선 이렇게 카페에서 음료나 홀짝거리기나 하고아주 좋겠다고.”

“…그런가.”

섭섭하다내가 한낱 네 꿈 속 사람인 게.”
윤슬은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표정은 정말 퀭했다온갖 허망한 감정이 안색에 묻어나 있었다.

“…미안.”

뭐가?”
내 꿈이라서.”

“…그러게계속 미안하다고 해라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내게는 더 나았을 것 같은데 굳이 꿈이란 걸 말해야 됐니.”

윤슬은 다 마신 컵을 테이블에 탁올려놓았다.

어휴인생은 한바탕 꿈이라더니진짜다 덧없네파릇파릇한 고1인 내게 꼭 그 말을 해야 속이 후련했니.”

“……”
“…네가 일어나서도 이 세상이 남아있을까?”

내가 기억만 한다면 남아있겠지.”
“…나도 매일 밤 꿈을 꾸긴 한다만 막상 자고 일어나서 기억나는 꿈은 몇 개 없어끽해야 악몽 정도…? 너 정말이 꿈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 안 잊을 수 있겠어맹세할 수 있겠냐고.”

“…당연하지무조건 기억할게.”

나는 덧붙여서 윤슬에게 부탁했다.

  “…… 그럴 테니 최대한 빨리 깰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좀 도와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노력하다 보면 꼭 알 수 있을 거야제발지금 부모님이

나를 간호하며 울고 계셔내가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줄 아시고… 이대로 두 분을 내버려둘 순 없잖아.”

“…지극정성이시네아주부모님 잘 뒀네.”
제발… 두 분이 너무 걱정돼.”

윤슬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결국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나는 싱긋 웃었다.

고마워.”

윤슬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임에도 씩씩하게 잘 버텨주고 있었다첫인상은 별로였지만어쩌다 보니 꿈속에서 좋은 인연을 맺은 것만 같았다.

 

 

 

 



 



YUNSUEL

 

 

 

차례

 

프롤로그

 

「불청객」

즉흥

「집 밖으로」

「몽상」

「윤슬」

「고발자」

「시유」

「오늘 하루도」

 

에필로그 


 

 

 

 

일러두기 :

 기호 【◎】는 서술자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작중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와 가상의 장소들이 혼재되어 등장합니다.

 

 


 


윤슬이란 이름은 본디 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잔물결을 이르는 말이었다.

잔물결,

어찌 되었든 간에 내 겉모습은

멀쩡해 보였나 보지.

억지로 심연 깊숙한 곳에

밀어 넣은 것들은 부력으로

계속 떠오르고 있었는데.




 

 

 

 


 

 

 

 

 

 

 

 

 

05 윤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종종 있다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남들과의 비교에서 항상 느껴지는 열등감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처럼 말이다이런 것들은 끄집어낼수록 나를 갉아먹기만 하지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이 날 때마다이것들을 마음 속에서 가장 깊숙한 심연에 밀어 넣어 버렸다어느 순간 다시 스멀스멀 위로 떠오르는 날엔더 세게 밀어 넣어버렸다생각 자체를 억지로 거부했다.

덕분에 내 무의식은 그런 일련의 폐기물들이 해저 산맥처럼 쌓여있었다아무럼 상관 없었다해수면에는 잔잔한 물결만이 흐르고 있었으니까가끔 가다 그런 폐기물들이 부력으로 떠오를 때마다 주변인들이 깜짝깜짝 놀랄 뿐이었지일상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막상 바다 자체가 병들어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이 방법은 나를 아빠와는 달리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덕분에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도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내가 한낱 꿈 속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나서도 가볍게 받아들이려고 했다그래그럴 수도 있겠지… 내 이 모든 감정의 늪이 정말로 별 거 아니게 느껴졌다이곳에 빠져 허우적댈 필요는 없었다어차피 진짜 사람도 아닌 내가 혼자 가끔씩 빠지는 생각들인데무슨 의미가 있겠어고작 이런 게 내 행동에 영향을 주어서 되겠어나는 태연하게 김시유에게 잡담을 꺼냈다.

“…그나저나 이 커피 왜 이렇게 맛없지살면서 많이 먹어본 건 아닌데그렇다 해도 너무 인공적이야…”
 여기 원래 되게 맛있는 데로 기억하는데?”

몰라내 입맛 아니야.”

아니너 그러면……

 

 어느덧 시간은 새벽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역으로 슬슬 걸어가봐야 할 시간이었다내가 슬쩍 입을 열었다.

슬슬 가봐야겠는데시계 봐.”

“…그래가서 미리 표 예매해놔야겠네지금은 버스도 운행 안 하니 걸어가야겠지?”

용산역으로 가면 될까경로 보니까 서울역보다 여기가 더 가깝네.”

카페를 나와 거리로 걸어 나왔다가장 늦은 시간대길가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걸어 다니고 있지 않았다승용차 하나 안 보였다그저 사진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한 치도 미동도 없이 그대로 굳어있었다한 치의 바람도 불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 조차 흔들리지 않았다매미 우는 소리만 건물들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역 내부도 배낭을 맨 채 대기실 좌석에서 곯아 떨어진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항상 붐벼야 될 것 같은 기차역에 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없으니 이상한 괴리감이 물씬 풍겼다분명 아무도 없는데기둥과 기둥들 사이로 누군가 지나다니는 것만 같았다괜히 으스스해 재빨리 시선을 무인발매기로 돌렸다기차표를 다시 두 장 끊으니 여유 있을 것만 같았던 가출 비용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돈 얼마 안 남았어교통비로 다 써버리다니… 너만 툭 놓고 가면 그래도 여유가 생길 거 같은데.”

농담!”

 세상을 누빈다는 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값비싼 일이었다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일인 것 같기도 했다조그만 내가 활보하기에 이 세상은 넓었고심지어 이곳마저 한 사람의 머릿속의 세상이었다역설적이게도내가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닐수록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은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어디먹을 거 없나…”

김시유가 중얼거리자 내가 별 생각 없이 대꾸했다.

“…지금 먹으면 야식이야아침이야?”

간식이야.”
“…이런.”

불이 켜져 있는 곳이라고는 24시간 편의점밖에 없었다우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아르바이트생마저 대놓고 잠을 자고 있었다나와 김시유는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난 샌드위치를김시유는 컵우동을 집어 들었다아르바이트생을 간신히 일으켜 계산을 하고 우린 내부 테이블에 앉아 각자 배를 채웠다내가 샌드위치를 다 먹을 무렵김시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우동의 봉지를 뜯었다.

“…또 우동이야?”
내가 제일 좋아했던 편의점 음식이 아마 이거였을걸간편하게 배 채울 때 많이 먹었던 것 같아.”

난 아빠가 우동집 해서이제 우동이라면 속이 니글거려.”

아니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삼류 우동이 아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분명 남아있어.”

“…그럼 한 젓가락만.”

내가 일회용 젓가락을 슬쩍 들어 우동을 시유보다 먼저 한 젓가락 먹었다그러나 은근 기대를 품고 먹은 우동의 그 푸석한 면발은 도무지 내가 먹을 게 못 되었다.

“…뭐야 이거맛이 왜 이래?”

김시유가 이어 한 젓가락을 마저 먹었다.

“……확실히 아저씨가 해주신 우동이 몇 천 배는 낫다.”

아니어떻게 우동에서 이런 맛이…”
너 아저씨에게 고마워 해야 돼그런 우동은 아무데서나 못 먹는 거라고명품이지.”

“……그런 거였어?”

 

어느덧 사람들이 하나 둘씩 역사 내로 어디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우린 개찰구를 지나 바깥 승강장으로 나갔다하늘은 연한 남색 빛으로 물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일제히 세워진 주홍색의 가로등이 선로를 드문드문 비추고 있었다저 멀리 지평선 너머의 일렁이는 빛을 가로막으며 무궁화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온다!”

드디어…”
이내 승강장 앞에서 기차가 멈추고 우린 내부로 들어갔다.

열차 내부의 분위기는 영영 칙칙했지만그럼에도 상관은 없었다객실 내에서 탑승객은 우리밖에 없었다김시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거… 목포까지 가는 데 4시간은 넘게 걸려눈 좀 붙여.”

넌 안 졸려?”

이미 자고 있는데 졸릴 리가.”

불현듯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그렇지여긴 얘 꿈이었지그 사실이 좀처럼 머리에서 일렁이며 온갖 잡생각들을 불러일으키자 난 그대로 다시 생각을 거부했다김시유는 나보고 잠을 청하라 했지만 난 분명 피곤한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도무지 이 애를 믿을 수 없었다자고 일어나면 이미 이 세상이 김시유가 깨어나고 없어져 있을 까 봐불안해서 도저히 마음 편하게 잘 수가 없었다항상 깨어있는 상태로 김시유를 감시해야 했다.

진짜 안 자?”

“…잠 안 와.”

눈을 감았다 떼었을 때 이미 어디론가 김시유가 훌쩍 사라져 있을 것만 같았다결국 천천히 기울어지는 하늘을 막연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터미널은 인적이 여전히 드물었다누룽지마냥 남은 가출비용을 싹싹 긁어 모아 어제도 편 탑승권 2장을 마련했다미련 없이 모든 돈을 탕진하고도 찜찜한 구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대로 대책 없이 마을로 돌아가면 김시유가 곧 깨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만 같았다비록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걔가 약속했지만원할 때 눈을 뜨기만 하는 입장이라면 굳이 그 약속을 지킬 리가 있을 리가무슨 조치를 취해놓지 않는다면 곧 이 세상은 거품처럼 사라질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열차가 살짝 지연되어 배가 출항하기 직전이 돼서야 가까스로 탑승할 수 있었다우리가 배에 들어서자 이미 시트들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좁은 그 사이들을 파고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찾아냈다.

출항하겠습니다.”

미처 앉기도 전에 여객선은 서서히 물살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시계는 어느덧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왔다나는 가방만 슬쩍 내려놓고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그러자 김시유가 물었다.

어디 가?”

아빠한테… 그래도 전화해놔야지.”

걔가 슬쩍 웃었다.

잘 생각했어.”

“……”

나는 슬며시 휴대폰을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목포파출소입니다.”

“…여보세요혹시 제가 지금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나 동행하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이 사람이 불법체류자인 것 같아서요…”

 

【◎】 SEE YU

 

  배가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자 물방울들이 가루처럼 위로 훌쩍 튀어 올랐다해수면 아래 잔물결들은 늦은 오후의 햇빛 아래 평온히 찰랑였다정신은 여전히 맑았는데 대화 상대인 윤슬이 자리를 비우자 적적함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를 잠시 맡기고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난간에는 두 남녀가 바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불현듯 기시감이 들었다찬찬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엄마와 아빠였다.

'왜 여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 뒤로 걸어갔다소곤소곤 들리기만 하던 대화내용이 차차 선명하게 들렸다.

"...애가 분명 가기 싫어할 텐데어떻게 타이르지남들이 엄청 처다 볼 텐데."

"그러니 후딱 애만 픽업해서 다시 와야지돌아오는 배도 일부러 이른 시간대로 잡았어오래 있으면 불편할 거 같아서."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오히려 더 아쉬워하실 것 같아 마음이 영 편하지가 않네."

당최 무슨 내용인 듯 하다가 이내 윤슬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유 걔 내일 서울 올라가.'

마을로 나를 데리러 온 것이구나나는 몇 걸음 떨어진 난간에 서서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눈이 커졌다.

'이 얼굴...?'

승용차에 치이고 잠시 꿈에서 깼을 때 내 옆을 간호하던 그 사람들나의 부모님이었다.

"...그래도 시유는 좋은 대학 보내야지그 원장이 그러는데좋은 대학 간 애들은 다 초등학생 때부터 쭉 공부 해온 애들이라잖아."

"걔가 잘 버텨줄 수 있을지..."

"우린 학원만 잘 보내면 돼다른 건 선생님들이 알아서 다 케어해 줄 거야시유가 얼마 안가 힘들다고 해도... 흔들리면 안되는 거 기억해다 걔를 위해서야."

"차차 적응하겠지...?"

아버지가 고개를 차분히 끄덕였다.어머니는 여전히 심려스러운 안색이었다.

"의대에 보내자평판도 좋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니까."

'이게 그날이었구나.'

 심연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었던 기억들이 부력으로 인해 수면 위로 쏜살같이 떠올랐다.

 

서울에 가기 싫다는 나를 부모님이 억지로 끌고 간 날나는 강제로 부모님 팔에 붙잡힌 뒤 채 섬을 떠나는 배에 몸이 실렸다그 뒤로 검은 승용차에 실려 끝없는 고속도로를 지나 서울에 당도하니 나를 마주한 건 하늘까지 치닫는 높이의 고층 건물들과 사방으로 구멍이 송송 뚫린 빛 바랜 아파트 단지들이었다그날 뒤로의 기억은 거의 현재까지 이어졌다키가 날이 갈수록 커져갔지만 나의 하루는 매주매달매년 별반 달라지는 바가 없었다매일 똑같은 24시간짜리 교향곡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수년간 연주했던 것 같았다숨이 조여올 때가 간간이 있었지만 내 털어놓은 말들은 항상 묵살당했다두 사람은 내 말을 항상 묻어두고만 살려고 했다그리고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점차 나는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그건 집이나 학교나 학원이나 똑같았다둥그런 위성 궤도를 따라 나는 계속 빙빙 돌았다여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 궤도의 둘레의 범위는 몹시 좁고 고립되어 있었다난 그저 대학 주위만을 공전하였기에 저 만치서 각자의 커다란 호를 그리고 있는 다른 이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한 바퀴를 돌면 또 다른 한 바퀴가 연이어 반복될 뿐이었다내가 지치든 말든 간에 난 끊임없이 돌고 또 돌았다부모님의 바램 대로 정말 아무 일 없이 대학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과학경진대회를 하루 남기고 시간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기말고사와 수행평가학원 시험에다 과학경진대회까지 준비해야 하니 난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있었다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눈이 그대로 감겼다.

내가 앉아있는 곳은 과학실이었다눈에 힘이 안 들어가니 사방에서 온갖 주광색의 빛들이 번져 보였다머리가 너무 지끈거렸다내 앞에 있는 이 사람들은 내 조원들이었다가방에 책들을 집어넣고 있었다곧이어 누군가 내 어깨를 툭붙잡는다.  시유야이것들 좀 옮겨놓아 줘.”라고 부탁했다그러나 희미하게 들려서 잘 알아듣지 못해 더듬거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그러나 이미 그 아이는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다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내 왼편 책상으로 향했다어느새 푸른 바구니에 용액들을 하나 둘씩 담고 있었다들어올렸다무거웠다그러나 한 발자국 나아갔다나는 분명 휘청거리고 있었다그러나 회전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과학실 같았다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자 '..'라고 우물거리며 그대로 넘어졌다오색빛의 액체들을 담은 시약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쨍그랑'하고 깨지며 눈앞에서 불길이 치솟았다얼굴이 아릿했다불길은 바로 옆에 있던 원목 의자들에 하나 둘씩 늘러 붙었다새빨간 빛들이 눈앞을 메우자 주위가 환해졌다잿빛 안개가 자욱하여 뿜어져 나왔다막연히 ‘...’라고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다른 애들의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사방에서 들렸다다만 나는 졸려서 그대로 자고 싶었다불길 뒤로 네다섯 명의 아이들이 콜록거리며 소리를 마구 지르는 게 보였다놀란 교사가 행정실에서 놀라며 달려왔다점차 불길이 서랍장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나는 그냥 콜록거리며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 무릎에 손을 대고 일어났다넌지시 날뛰는 아이들과 그 주위를 매운 불을 바라보았다꿈결같았다그러나 오늘 밤 시험공부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탄내와 함께 물씬 풍겨왔다내가 저질러버린 것은 화재였다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이 형상은 헛것이 아니었다. ‘화르륵거리며 수납함에 불이 달라 붙었다나는 점차 뒷걸음질쳤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라고 생각이 들었다난 고개를 뒷문으로 돌렸다고개를 돌리니 그 새빨갛던 불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사라졌다그래이대로 가면 되겠구나그대로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지금은 아무데나 가도 될 것만 같았다점차 발걸음이 빨라졌다운동장으로 뛰쳐나오자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며 무수히 많은 유리조각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몽환적이었다나를 뒤따라 먼지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비틀거리며 하나 둘씩 걸어 나왔다경비가 급하게 숙직실에서 뛰어나오며 나를 불렀다다급히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 그 목소리를 난 그대로 지나쳤다어서 이 학교이 동네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거친 숨을 내쉬며 난 그대로 도로를 따라 달렸다간판들에서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계단을 재빨리 내려갔다지하철에 올라탔다퇴근하는 직장인들이 회색 빛 가루를 덮어 쓴 나를 노려다 봤다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나는 또 달렸다구매한 야간열차 표를 난 유심히 쳐다봤다. ‘이대로 떠나도 될까라는 이성적인 의심은 심연 깊은 곳으로 처박아 버렸다역사 내 모니터로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내가 방금 전까지 발을 딛고 있던 학교의 불타는 모습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러나 마치 다른 세상의 얘기처럼 느껴졌다자리에 앉자 이내 기차는 유유히 철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한강 위로 놓아진 다리를 건널 무렵창가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고층 건물들 사이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게 보였다멍하니 별 하나 없는 검은 하늘만 보고 있자니 기차가 곧 멈추었다바깥은 찬바람이 심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아득히 떨어져 있는 갈대밭에서 바람이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터미널로 여객선이 들어서고 있다주저 없이 올라탔다뱃고동 소리와 함께 육지에서 점차 멀어지자 지상을 널리 밝히던 광명들이 조그맣게 몸을 움츠리는 듯 했다사방이 금방 어두워졌다검게 물든 수면을 쳐다보다 이내 난간에 발을 딛고 올라갔다주변에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막상 뛰어들려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물이 너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소름이 끼쳤다.

아냐… 이건 아니야.’

발을 슬쩍 떼어 내려오던 그 순간배가 심하게 흔들렸다눈을 감았다 떼니 나는 공중에 떠있었다.

‘…?’

이내 바다가 순식간에 거대해지더니 나를 그대로 덮쳤다.

 

 풍덩.

 

 

 

 

 

 

 

 

 

 

 

 

 

 

 

 

 

 

 

 

06 고발자

 

 

두 사람은 바닷바람이 쌀쌀했는지 이내 멍하니 서있는 나를 지나쳐 객실 내로 들어갔다어슴푸레하게 수평선 위로 우뚝 솟아있는 섬마을의 봉우리가 보였다이윽고 나도 객실로 돌아갔다.

“…정말 부모님이 여기 타 계셔깨어나서 봤다는 그 사람들?”

윤슬이 묻자 난 넌지시 손가락을 구석에 행렬로 앉아있는 두 사람에게 가져다 대었다윤슬은 뻔히 그 둘을 쳐다보다 이내 나를 바라 보았다난 그 뒤로 상기된 기억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방화를 저지른 채 도망친 사람을 응원해줄 사람은 몇 없었다윤슬 또한 마음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다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때 걔의 휴대폰이 진동했다화면을 보진 못 했지만 아저씨인 게 틀림없었다.

… 잠깐 좀 받고 올게.”

윤슬이 휴대폰을 들고 유유히 갑판 쪽으로 걸어갔다.

여보세요아 네거의 다 와 가요.”

이내 낡은 스피커로 안내방송이 잡음과 함께 들렸다.

저희 여객선은 곧 어제도에 도착합니다가져오신 소지품을 두고 내리지 않게 모두 꼼꼼히...”

 

 선착장에서 내린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저씨였다아저씨는 우리를 보자마자 긴장이 풀리셨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 없이 다가오셨다그러고는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너희 진짜!”

바짝 긴장한 나에 비해 윤슬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아저씨는 입술을 한 번 깨무시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이셨다.

“…슬아제발 그러지 좀 말아줘내가 얼마나...”

살아 돌아왔으면 됐잖아쪽지도 남겼고다만 너무 무턱대고 나갔던 건 사과할게쏘리.”

“…!!! 네가 엄마처럼 될 줄 알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젯밤을 지새웠는지 알아?!”

아저씨의 고함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윤슬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그러나 오히려 역으로 성화를 내질렀다제발 날 사이에 두고 왜 이러는 거야.

한 번이라도 아빠가 날 데리고 밖으로 나왔던 적이 있어생각해 봐언제까지만 강박에 시달려 이 좁은 곳에서 안 벗어날 거냐고!”

그러나 윤슬은 속사포로 말을 내뱉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처음 보는 모습이었다눈물 한 방울 없을 냉혈한 같았는데어느새 윤슬의 눈가는 붉게 물든 채 촉촉해져 있었다물기 어린 절박한 외침에 아저씨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빠는 대체 언제까지 그 시간에 갇혀 살 건데?!”

잔잔한 물결이 점점 거세게 요동치는 것처럼 윤슬은 점점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우선 가라앉히고 봐야 될 것 같았으나 윤슬은 그 동안 쌓인 게 폭발이라도 하듯 더 기세가 살벌해졌다.

잊고 살자고제발그냥 묻어두라고허구한 날 액자 본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제발…”

윤슬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 하더니 순식간에 화를 가라앉히고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아저씨는 멍하니 그걸 바라보더니 나와 윤슬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배고프지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슬은 생각 없다면서 윗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아저씨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가게는 임시휴업을 하고 있었다자물쇠를 풀고 아저씨와 나는 적막 속에서 불이 꺼진 가게로 들어갔다조명을 다시 키니 은은한 빛이 식탁마다 다시 맴돌았다아저씨는 말 없이 주방으로 걸어가셨다.

“…라멘 해줄 테니이거 먹고 곧장 파출소로 가자꾸나.”

…”

아저씨는 참작하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슬이에게 들었어요불과 몇 달 전에 아내 분을 잃으셨다고… 저희가 철없이 나가 있는 동안 감히 얼마나 걱정되셨을지 저로써는 가늠이 안 가네요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더니 양손을 쥐고 식탁에 올려두셨다.

“…슬이는 그렇게 엄마를 잃고어느 순간부터 슬픔을 묻어두고 살려고 해왔어.”

아저씨는 넌지시 윤슬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들한테 자긴 다 이겨냈으니 끄덕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일부러 속마음을 숨겨가면서까지다 잊고 묻어두고 살면 차차 무뎌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저씨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내가 떠나고 나는 하루 종일 방에서 울기만 했단다몇 주 동안이나 말이다슬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이제 기댈 곳이 아빠밖에 없었을 텐데언젠가 내가 방에서 차츰 걸어 나왔을 때 슬이는 전과 많이 변해있었단다겉보기에는 정말로 멀쩡해 보였지근데 말이다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애써 무시한 채만 살면 어떻게 버티겠니표현도 없이.”

“……”

“…똑바로 그 사실을 마주하는 게 무서웠던 거야슬이는이게 전부 내 탓인 것만 같구나내가 그때 마냥 슬퍼할 게 아니라 슬이를 위로해줘야 했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저씨를 위로했다때때로는 침묵이 가장 큰 치료제가 되기도 했으니까아저씨의 눈이 붉어졌다어쩌면그 날의 기억에 계속 갇혀 있었던 건 아저씨가 아니라 슬이가 아니었을까그때였다.

저기실례하겠습니다목동파출소에서 나왔습니다.”

갑자기 식당 문이 드르르’ 열리며 경찰 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일제히 들어왔다당황한 내가 두 경찰을 쳐다보자눈이 마주치고 말았다경찰은 우선 시선을 아저씨에게 돌렸다.

현재 이 집 주소로 신고가 들어와서 그런데혹시 가게 주인인 윤범두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저 남학생은 아드님이시구요?”

아니요저 친구금방 데려 갈려고 했었는데저 얘가 조난당한 채 바다에서 떠있는 걸 보고 낚시하던 제가 구해온 겁니다.”

문뜩 아저씨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경찰 중 한 명이 살벌하게 얘기했다.

“…자신의 집에 신원 확인이 안 되는 불법체류자가 와있다는 한 여학생의 신고가 있어서요혹시거기 학생이리 좀 올 수 있겠어요?”

“…?”
맙소사윤슬이었다내가 여기서 꼼짝도 못하게 경찰에게

잡혀가게 하려고 이런 짓을 또 벌인 것이었다여기서 무슨 변명을 한들 신원 확인이 안 되면 상황이 더 악화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심장이 두근거렸다.

“…시유야?”

아저씨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 보았다으아여기서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아무 말 없이 식탁에만 앉아있자 경찰들은 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별 다른 방도는 없었다난 그대로 후문 쪽으로냅다 달렸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시유야!!!”

어어저놈인가 본데?”

뭘 쳐다보고 있어빨리 체포해!”

한 순간 만에 아저씨의 일식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온갖 단무지와 김치 통들이 바닥에 떨어졌다여기서 붙잡히면 꿈에서 깨어날 여지가 아예 없어질 게 뻔한데뭔 짓이든 못 하겠나아저씨는 어안이 벙벙해졌는지 풀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이윽고 난 후문을 열어 밖으로 뛰쳐나갔다눈앞에 들어오는 건 몇몇 주택들과 가파른 울퉁불퉁한 언덕길뿐이었다도시면 몰랐을까 여긴 너무나도 한적한 바닷가 연안의 시골마을이었다어딜 가든지 눈에 띌 것은 뻔했다.

그래서 마음이 이끌리는 데로왔던 길만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붙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무작정 뛰었다기다란 바닷바람들이 정면에서 휘몰아치며 땀을 씻겨냈다그때 마을 거리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안내방송이 흘렀다.

― 『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지방수사대입니다현재 불법체류자로 추정되는 한 남학생이 저희 마을을 배회 중입니다해당 남학생은 망상환각과도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며 이 때문에 주민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도 있으므로 현재 지방수사대에서 저희 마을을 수사할 예정입니다주민 여러분들은 속히 범인이 검거될 수 있도록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시고 안전을 위해 출입을 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상 마을 이장이었습니다

…”

순간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노부부가 나를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라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지저 언덕 위에 넌지시 있는 철제 건물이 보였다문뜩 그 건물이 어릴 적에 간간히 드나들었던 할아버지의 작업실이란 걸 떠올렸다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서서히 이 인근으로 걸어왔나 보다남은 힘을 쥐어 짜 경사면 위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 YUN SUEL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슬!!!”

이윽고 방문이 쿵하고 열렸다직접 보진 못했지만 분명 성난 표정의 아빠였겠지.

“…네가 시유를 그런 식으로 신고했어?!”

진상을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그럴 여유도 여력도 없었다난 입을 꾹 담고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아니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

시유가 서울에서 무슨 짓 했어?”

나는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그냥 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면 좋을 텐데.

“… 아빠 말 무시해야 윤슬!!!”

성화가 집안에 가득 울렸다아빠의 그런 목소리는 나조차도 살면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숨기려고만 하지 말고… 아빠에게 말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털어놓을 건데?”

“…아냐아무것도 안 했어.”

그럼 왜…”

걔 불법체류자라고… 경찰이 그랬잖아김시유가 그랬어자기 불법체류자라서 지금 신원 확인이 안 된다고아빠가 파출소 데려간다니까 나 꼬셔서 도망친 거야.”

“… 정말 시유가아니그렇다 해도 뭔가 사정이 있을 텐데.”

몰라… 난 잘 거야.”

네가 지금 잘 때야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네 친구를 그렇게 경찰에 신고하는 게 옳아?”

무슨 친구야내가 데려왔나… 아빠가 데려왔지.”

“…너 진짜.”

난 정직하게 말한 것 뿐이야… 그리고 같이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걔 자꾸 이상한 말 혼자 내뱉고환각도 막 보더라이상한 애였어.”
 “…그럼 넌 대체 왜 시유를 따라 집을 나간 거야?”

아빠가 날 계속 가둬두었잖아나가고 싶다고 계속 말했는데 아빠는 항상 방에서 울기만 하고…”

그건… 아니그렇다고 해도 진짜 너 제정신이긴 해?”

“…이제 와서 뭐 어쩔 건데김시유는 잡혀갔어?”

도망쳤어경찰들 오니까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더라.”

“…?”

그래서 지금 찾으러 가야 한단다나도아직 섬에서 나가지는 못했을 테니까.”

…”

“…우선 알겠다시유가 정말 그런 애일지는 모르겠다만.”

아빠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리셨다.

일단 그러면 아빠는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랑 같이 시유를 찾아야 되니까… 너는 나 대신 그 다른 시유 있잖니.”

다른 시유?”

언덕 위에 사는 꼬마 시유 있잖니단골인 어린애.”

…”

그 애가 오늘 서울 올라간다고 내가 얘기 했지지금 걔 부모는 이미 내려온 지 오래고… 5시에 마을사람들이랑 작별인사 하고 떠난다고 했어원래 같으면 내가 직접 배웅 나가서 간식이라도 전해주려고 했는데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네가 주고 와야겠구나.”

“… 알았어.”

아빠는 나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식당 안에는 두 경찰이 정말로 앉아있었다경찰들은 나를 보더니 눈이 커졌다.

신고자 본인이신가요?”

“….”

경찰들은 나를 앉혀두고 이미 내가 통화하면서 일러두었던 내용을 또 한 번 확인했다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학생 말대로라면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혹시 용의자인 그 남학생이 현재 흉기를 소유하고 있거나… 그러진 않아?”

아뇨그런…! 남을 해치려는 애는 아니에요다만그 애를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어디 가둬놓거나 그럴 수는…”

그건 이민 기관의 일이라 잘 모르겠다만미등록 이주 아동으로 분류되면 보호소에 강제로 구금될 수도 있지… 며칠이 될 지 몇 달이 될 지는 몰라근데 굳이 왜…’

됐다…’

“…다만 아직 네 말만 듣고 판별할 수는 없지만체포를 거부했다는 건 명백한 가중죄야… 일단 이 섬을 빠져나가기 전에는 잡아야 될 텐데.”

순경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며 밖으로 걸어나갔다아빠는 그 사이에 간식들을 모두 포장해놓은 상태였다멋쩍은 듯이 아빠가 내게 선물 상자를 건네자 내가 말했다.

여기 뭐 들었어?”

별 거 안 들었어그냥 서울 가면서 배고플 때 먹을 튀김 같은 거.”
 아빠는 그러고선 내게 얘기했다.

“…슬아난 네가 제발 묻어두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유네 주택 앞에는 마을 주민들이 여러 명 모여 있었다비록 뒤숭숭한 분위기였지만그래도 마을의 가장 막둥이였던 시유를 그냥 보낼 수는 다들 없었나 보다어른들은 훌쩍 거리는 시유에게 사탕이나 용돈을 주며 타이르고 있었다그 옆에 있는 시유의 부모는 주변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시유의 할아버지가 시유의 손을 꼭 잡고 말하고 있었다.

욘석아맛있는 것도 많이 못 먹여서 미안하다… 엄마아빠 따라 서울 가서 꼭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하렴잘 지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아쉬워 하는 눈치였다할머니가 시유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 녀석이 늠름하게 학생이 돼서 돌아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특하네안 그래요 영감?”

그렇지분명 잘 해낼 거야누구 손주인데.”

그러나 이런 어른들의 희망적인 얘기에도 불구하는 어린 시유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울 따름이었다염치가 없게도 난 그때 사람들 사이를 걸어 나와 어린 시유에게 걸어갔다.

“…시유야이거.”

내가 선물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

우동집 아저씨가 너 가면서 배고플 때 먹으라고 주셨어.”

그러나 시유가 손을 내밀 지도 않고 있자 그 애의 부모가 덥석 선물 상자를 집어갔다.

“…시유야이럴 땐 누나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해야지어서!”

시유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 애의 부모는 억지로 시유의 고개를 숙이려고 하려는 듯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그때 그 순간시유는 들고 있던 용돈과 간식을 순식간에 바닥에 집어 던졌다.

나 서울 가기 싫어!”

마을 주민들이 술렁이자 시유의 부모들이 당혹스러운 듯 시유의 머리를 어루만졌다하지만 그들도 시유의 반발이 심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시유야날 봐아빠야지금 사람들이 다 보고 있잖아… 왜 그래우리 따라가면 맛있는 것도 실컷 먹을 수 있어.”
 다 필요 없다고…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없잖아난 여기서 쭉 살고 싶어.”

아니야시유야이 마을은 비록 살기 좋은 곳이지만 너는 조금 더 큰 세상으로 가야 해할머니랑 할아버지도 너를 위해서 슬픈 거 꾹 참고 이러시는 거라고.”
 “…”

시유의 부모는 주변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도 할머니랑 할아버지처럼 울음 꾹 참고튼튼하게 이겨 내야지…”
 엄마는 떨어진 용돈과 간식을 하나 둘씩 다시 줍고 있었다.

“…새로 간 초등학교에서 2학기 보내고 겨울방학에 다시 내려와서 할머니랑 할아버지 만나면 되겠다그지?”

겨울방학은 너무 많이 남았잖아.”

아니야… 재밌게 놀고 공부도 열심히 하다 보면 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가 있을걸그죠장인어른?”

시유의 아버지가 다급한 눈초리로 시유의 할아버지를 올려다 보자 할아버지는 착잡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겠지.”

들었지시유야어서 가자배 탈 시간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었는지 시유의 아버지는 시유의 팔을 무작정 붙잡고 열린 차 문으로 끌고 갔다.

으아아아앙가기 싫어엄마아빠 싫어!”

마을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시유를 집어넣은 차 문이 닫히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시유의 아버지는 흐르는 땀을 대충 닦더니 주민들과 시유의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가보겠습니다우리 시유 모자란 것 없이 잘할 수 있도록 정말 저희 둘이 잘 돌볼 거에요!”

파이팅해김 서방!”

너무 엄하게 애한테 굴지 말고!”

나중에 시유 데리고 꼭 다시 와!”

감사합니다다들 아무쪼록 건강하세요!”

그렇게 시유와 부부는 언덕배기 아래로 유유히 내려가 이윽고 멀어졌다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이렇게 어린 나이에 서울로 끌려가 수년 간 그런 모진 생활을 한 거였구나오로지 남들을 위해 빛을 내며… 불현듯 어린 시유와 지금의 시유가 겹쳐 보였다.

그때 경찰이 군중들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저는 목포파출소에서 온 김건우 경위입니다아까 전 이 마을에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불법체류자가 들어왔다는 신고가 접수돼서요혹시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경위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보에 따르면 용의자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라 했는데저기 제보자가 있네요윤슬 학생?”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니…”

단지 모두를 위해 내렸다고 생각했던 내 판단이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시유를 묶어놓고내 마음이 편하자고 애써 그 아이를 묻어두고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와 저 부모는 다를 바가 없어지는 거잖아…’ 아무리 밀어 넣으려고 애를 써도 감추고 싶은 속마음이 수면 위로 계속 치솟아 올랐다.

“…윤슬 학생?”

“…….”

눌러 담아놓은 감정들 위에 올려둔 덮개가 들썩거렸다이내 점차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이 보았던 것에 대해 말해주세요.”

“…제가 보았던 거요?”

그니까용의자의 인상착의 같은 외관적 특징 말이죠.”

그 애는…”

멍하니 고개를 서서히 돌려 어린 시유와 부모가 내려간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다보았다시선을 슬쩍 치키니 수평선 너머로 들어오는 흐릿한 여객선의 형상이 보였다주위에 정적이 흐르자 차분히 입을 열었다.

“…교복이 아니라티셔츠를 입고 있었어요바지는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고 새까만 모자도 뒤집어 쓰고 있었어요.”

내가 말을 끝내자 경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보네요모두 들으셨죠?”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유를 찾아야 해.’

발을 나릿나릿 내디뎌 군중들에게서 차차 멀어졌다이윽고 그대로 담장과 담장 사이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 SEE YU

 

다행히 일시적으로 쫓아오던 경찰들은 따돌린 것 같았다녹슨 문에 급히 귀를 가져다 댔다다행히 아무런 미동 소리도 들리지 않자 난 작업실의 문을 당겼다다행히 잠겨 있지 않자 그대로 열고 작업실로 들어섰다여러 녹슨 공구함들이 헌 목재 수납함 위에 수두룩하게 올려져 있었다지저분한 시멘트 벽에는 온갖 흠집이 파여 있었다천장엔 낡은 에디슨 전구가 헐겁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빛을 밝히고 전구를 키는 스위치를 더듬더듬 찾았다툭 튀어나온 부분이 손끝에 닿아 누르니 전구가 켜졌다그러나 어슴푸레하게 깜빡일 뿐이었다하는 수 없이 우선 나는 열려있는 철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어두컴컴했다구석 끝자락에는 작은 벽난로가 있었으나 누군가 불을 이미 지펴놓은 상태는 아니었다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탁자 아래로 들어갔다.

여기 있으면 그래도 아무도 못 찾겠지...”

어느 순간 전구가 탁 하고 꺼진 채 불이 다시 들어오지 않자 방은 피아식별도 안될 정도로 주위는 완전히 새까매지고 말았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내 몸마저 보이지 않았다그런 그윽한 어둠 속에서 나는 여러 생각들을 떠올렸다.

학교에 화재를 일으키고 도망친 내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들 반길 이들이 몇이나 있을까오히려 피해자들의 유족들이 나를 타박하고 있으면 어떡할까피해자들 앞에서 뭐라고 사과해야 될까… 이런 사건이 뉴스에 어떻게 보도가 되었을까주변에 기댈 곳 하나 없다는 게 나는 너무 두려웠다점점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집념이 짙어졌다꿈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이리 환자로 병실에 누워있기만 하면 평안할 테지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쭉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불현듯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작은 한 가닥의 물줄기가 흘러 볼을 타고 뚝바닥에 떨어졌다다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얼마 뒤 눈이 암흑에 적응되자 흐릿하게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모두 새까만 잿빛으로 보일 뿐이었다.

 서울 강서구 한 고등학교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은 해당 학교 학생의 부주의였는데요이로 인해 #명이 숨지고 #명이 중상을

이런 보도가 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죄책감과 두려움에 나는 내 몸을 더 움츠렸다난 대체 왜 그때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을까가족들이 나를 과연 반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난 그저정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잿빛 물방울들이 몇 방울 더 툭떨어졌다.

그때였다노크도 없이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윽고 고장 난 스위치를 달칵거리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리더니 이내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오는 바깥 햇살이 그 사람의 신발부터 무릎까지를 역광으로 비추고 있었다주변의 잿가루들 같은 게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그 사람은 뭔가를 봉지에서 꺼내는 듯 하더니 벽난로 안에 내려놓았다장작이었다이윽고 라이터 소리와 함께 순간 땔나무들 위로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불현듯 나는 바로 불 맞은 편 탁자 아래 숨어있던 내 그림자가 바닥에 퍼져 아른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 사람의 신발이 주춤했다.

“……누구야?”

!”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또다시 난처한 상황이었다할아버지는 살며시 무릎을 굽혀 탁자 아래를 바라보았다난 시선을 피했지만 이윽고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는?”

할아버지의 동공이 커지며 이내 입이 열렸다.

혹시 시유 아니니?”
“…?”

할아버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근데 내가 알던 시유는 아니구나괜찮으니 일단 나오렴.”

나는 찬찬히 탁자 밖으로 걸어 나와 몸을 일으켰다나는 어느새 할아버지보다 키가 커 있었다할아버지는 !’하고 웃으시며 나를 보고 신기한 미소를 지으셨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뭐라 말해야 될까할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았기에 더 난처했다할아버지는 어느새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너를 떠나 보냈는데언제 이렇게 다 큰 거니?”

할아버지…!”

내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게 제 꿈이란 걸 아시죠?”

“…?”

할아버지의 표정이 금새 굳어졌다그러나 윤슬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아니었다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눈초리였다.

“…시유야이게 설마 네 꿈이니?”

?”

“…이럴 수가.”
순간 할아버지의 무릎이 비틀거렸다난 급히 할아버지를

부축했다할아버지의 숨소리가 불규칙해지며 거칠어졌다.

“…나조차도 꿈속 안의 세상이었다면그럼 걔는…”
할아버지가 눈가가 순식간에 적셔졌다.

왜 그러세요…?”

 

 

 

 

 

 

 

07 시유


 

 문이 닫히자 칠흑 같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던 건 오직 벽난로에서 쌓여있는 장작들이었다그것들의 위로 붉은 모닥불이 위태롭게 타오르고 있었다불길이 약해질 때마다 방 전체는 어둑해졌다 명랑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몇몇 장작들은 이전부터 계속해서 타올라왔는지 이미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었다할아버지는 땔감을 화로에 하나 더 던지시고 손을 탁탁 터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만 기억해온 건데..”

불길이 순간적으로 위로 솟구쳤다.

"나도 어느 날 밤 아주 오랫동안 꿈을 꿨지거의 꿈에서만 몇 주를 보낸 것만 같았어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정작 그게 꿈이었다는 건 며칠이 지나서야 알아차렸어철없던 나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이 꿈에서 나갈 수 있냐고 울부짖었지모두가 나를 정신 나갔다고 여길 때 오로지 몇몇 사람들만이 내 말을 끝까지 믿고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왔어나중에 가서야 안 사실이었는데난 수십 일 동안 잠만 잔 상태였고 가족들은 모두 내가 혼수 상태에 빠진 줄 알고 있었더구나.”

“...그런 거였어요?”

그때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은 이젠 흐릿해져서 떠오르지 않는단다하지만 그 잔향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지…”

할아버지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나도 네 꿈 속 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니정말 기분이 묘하구나.”

순간 화로에서 불꽃이 조그맣게 튀며 불길이 서서히 가라앉자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슬프지는 않구나다들 이런 기분이었을라나.”

할아버지의 표정은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 어딘가 더 후련해 보였다이내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울 가서는 잘 지냈고…?’

…”

여기서 숨길 게 과연 있을까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학창시절 동안 제대로 된 추억 하나 남기지 못했다할아버지는 말 없는 나를 보더니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었니?”

“….”

대체 왜…?”

그냥온전히 제 자신으로 살지 못했어요단지 부모님을 빛내기 위한 도구가 되어 해가 지날수록 망가져만 가고 있었다고요.”

불현듯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도 할아버지에게 소리질렀다.

그때 저를 대체 왜 떠나 보내신 거에요?!”

할아버지는 놀라셨다.

“…난 그저 네가 더 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널 위해서였다고.”

그게 정말 진심이세요…?”

불길이 거의 가라앉고 밤은 또다시 어두컴컴해졌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땔감을 상자에다가 꺼내셔서 잦아 든 불길 속으로 넣으셨다다시 한 번 불길이 새빨갛게 이글거리기 시작했다할아버지는 그걸 유심히 지켜보시더니 이내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네 이름 시유의 뜻이 뭔 줄 아니?”

?”

시유본디 불을 낼 때 쓰는 땔감과 기름을 아우르는 말이란다나는 네가 빛을 내며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혀주라는 의미에서 널 시유라고 지었단다.”

불꽃 속에서 조그만 땔감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린 어쩌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해어린 너에게 불을 질렀던 것 같구나미안하다…”

“……”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자책감이 묻어나 있었다몇 년 간

함께 한 손주를 떠나 보낼 때 당최 어떤 심정이셨을까난 정말 분하고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불을 냈어요.”

?”

저도 혼수 상태에요잠에 들기 전학교에서 실수로 불을 내고 그만 도망치고 말았어요너무 무서웠고 저 때문에 일어난 일들의 책임을 모두 피하고 싶었어요막연히 배에 올라 타 예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던 섬마을로 오던 중에 배가 뒤집혔고벌이라도 되는 듯 지금은 의식도 없이 병실에 누워 있어요깨어날 수도 없고요.”

“…네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게 아니야다만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야.”

“…준비요?”

잠에서 일어날 준비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그냥 이대로 침대에 누워있고 싶어요다만 지금은 경찰들이 쫓아 와서일단 할아버지저를 좀 숨겨주세요… 부탁이에요.”

“…꿈은 현실의 도피처가 아니란다시유야여기서 오랫동안 머문다고 바뀌는 건 없어비록 사람들이 널 손가락질할 지라도 네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돼.”

“……이대로 일어나면 제게 뭐가 이득인 데요서울로 올라오고 지난 수년 동안 부모님을 빛내기 위해서만 살아왔어요제 삶을 못 살고요심지어 그렇게 살다가 방화죄까지 저질러서 범죄자가 되었다고요심지어 난파  사고까지…”

그렇다고 네 삶을 그렇게 흘러가게만 내버려 둘 거야?!”

“…제 삶이 아니에요.”

돌아가돌아가서 그냥 네가 저지른 행동의 모든 결과를 방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여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을 지라도그제서야 비로소 삶이 네 것이 되는 거니까.”

“……”

 쿵쿵!!

그때였다누군가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 YUN SUEL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나는 헛되이 혼잣말을 하며 외진 골목들을 돌아다녔다상식적으로 김시유가 이런 곳에 숨어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야 김시유어딨어아깐 내가 너무 심하게 대꾸했던 것 같아그 동안 네가 도와준 것도 다 잊고 말이야일단 여기 숨어있다면 모습이라도 드러내 봐나 혼자 왔어 경찰들 없어!"

얼레리나 누구랑 말하니목이 터져라 외쳐댔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고 난 금새 제 풀에 지쳤다이미 초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각 집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느슨하게 군데군데 설치된 가로등도 점차 불이 켜졌다그러나 그런 부근에서 떨어진 그늘진 곳들은 영 거무스름해지며 뭐가 있는지 식별할 수 없었다순간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서 고개를 급히 돌렸으나 막다른 벽뿐이었다

"어딨어?"

방파제에서 아득한 파도 소리와 적적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마음이 점점 조여왔다이 상황이라면 김시유는 분명 오늘 밤을 넘지 못할 게 분명했다주위가 어두컴컴해져 앞이 잘 안 보이니 실수로 물웅덩이를 밟았다물방울들이 튀어 양말이 모두 젖고 말았다묵직해진 신발을 한 발자국씩 다시 내딛기 시작했다.

마을은 원래의 모습이 어둠에 파묻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그때 저만치서 한 무리가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경찰들이었다괜히 마주쳤다간 집으로 돌아가라는 소리 말곤 더 들을 게 없을 듯 하여 몰래 담장 뒤로 숨었다경찰들의 말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왔다.

“도저히 보이지가 않으니 이를 어떡하죠?”

“요즘 분위기 흉흉한 거 알지자칫 그 놈이 칼부림이라도 할 시 책임은 모두 우리가 지는 거야사전에 미리 예방을 해놓는 거라 생각하고 계속 수사 진행해.”

....”

반장의 말을 듣던 경찰은 이내 자리를 피하는 듯 내가 있는 골목 쪽으로 걸어왔다혼잣말로 투덜대며 경찰은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나는 담장과 골목 사이를 지나 그 근처에서 벗어났다그때 저 멀리 낡은 건물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수상함이 느껴져 가까이 다가가보니 시유네 할아버지의 작업실이었다.

그 전에 지나가본 적은 많았지만 막상 베일에 감싸져 있는 내부는 본 적이 없었다콘크리트 벽에 착 붙어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슬쩍 엿들으려 했다분명 소곤소곤 대화소리가 오고 가는 건 확실했으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아까 보았던 경찰이 내리막길을 내려오며 작업장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분명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으니 조사를 할 게 분명했다나는 서둘러 벽 뒤로 몸을 숨겼다이윽고 쇠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입니다혹시 안에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수사에 협조 좀 해주시겠습니까?”

파도소리만이 저 만치서 들렸다.

“거기 누구 계십니까?”

경찰이 더 세게 문을 두들겼다그런데도 문은 그대로 닫혀있었다경찰이 문고리를 돌리자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그때 건물 안에서 누군가 분주하게 문가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SEE YU

 

문소리를 듣고 할아버지는 다급히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시유야잘 들어라다시 서울로 올라가학교에 난 그 불꽃은 네가 그 자리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더 이상 피하려 하지 말고 불길로 뛰어들어라.”

“…?!”

그 불길이네가 일어날 수 없게 붙잡아 두고 있는 거야일어난 네가 감당해야 되는 게 바로 네가 저질렀던 불길이니까너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멈추더니 이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쿠빨리 탁자 아래로 들어가내가 시간을 어떻게든 끌어는 보겠다만…”

이내 문이 끼익 열리자 할아버지가 급히 달려나갔다.

“아순사님이었는가오밤 중에 웬일인고?”

“할아버지 안내방송 못 들으셨어요지금 어떤 정신이상자인 애가 이 마을 어딘가로 숨어든 상황이에요주민들을 해코지하기 전에 저희가 찾아내려고 지금 분주하게 조사 중입니다이 시간에 뭐하고 계셨어요?”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는가... 작업하다 깜빡 잠에 들어 부렸는데문 두들기는 소리에 깨버렸네이거뭘 그리 세게 두들긴데안 그래도 녹슬어 헐거워졌는데.”

“아죄송합니다.”

경찰의 멋쩍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혹시 하루 동안 어떤 학생이 이 건물에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나요?”

모르겠는데난 계속 잠만 자고 있었고만.”

“아그러세요?”

“더 물을 거 없으면 어서 가셔이왕 깬 거 남은 일이나 계속 해야 되겄네고맙수.”

순간 잿가루가 코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간지러워졌다난 애써 입가를 막아보았지만 기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늦은 밤에 실례가 많았습니다그럼...”

“에취!”

...?”

순간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잠깐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에헤이 뭐시기 조사 끝났으면 가셔 순사 양반!”

할아버지는 서둘러 힘으로 문을 닫으려 하셨다.

“아니어르신이러시는 거 공무집행 방해신 거 몰라요?”

“자네야말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의 집 문 열고 들어올려 해도 되는 기야?”

“어르신지금 안에 어르신 말고도 누구 또 있죠좋은 말로 할 때좋게 좋게?”

“모르겠고 빨리 돌아가기나 하셔어이공권력이 시민에게 이래도 되는고?”

악착같이 할아버지가 문에 바짝 붙어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이대로라면 답이 없었다.

“아바닷바람이 춥습니다어르신자꾸 이러시면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순간쾅 소리가 들리더니 할아버지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춥다니까거참!”

넘어진 할아버지가 곧장 경찰의 한쪽 다리를 팔로 붙잡았다.

“이놈아도망쳐!”

순간 나는 탁자 아래에서 뛰쳐나와 경찰을 밀치고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야이 새끼야!”

쏜살같이 후다닥 내리막길을 따라 달리는데저 멀리서 곧바로 누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김시유!”

윤슬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미안해!”

뭐랄까윤슬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가시나무에서 이제 막 빠져 나온 새처럼 자유로워 보였다금방이라도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해해나라도 그랬을 거야.”

윤슬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이전에 보았던 불에 타오르던 학교거기로…”

윤슬과 난 일단 함께 뛰었다가로등 몇몇이 우리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그러나 속도가 점차 더뎌졌다할아버지의 말씀대로,책임을 져야 하는데현실로 돌아가야 하는데내가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떠올리니 발걸음이 무거워졌다그 책임을 준비 없이 받다간 무릎이 부러질 것 같았다무릎에 힘이 풀렸다.

왜 그래?”

달리던 내가 멈추자 윤슬도 잇따라 멈췄다윤슬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외진 담벼락 뒤로 데리고 간 후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말했다.

너 갑자기 왜 그래부모님 만나야 된다며… 학교거기로 다시 돌아가면 깰 수 있는 거야?”
 “…왜 일어나야 되는 건지 모르겠어.”
 ?”

우리가 보았던 그 불은… 내가 냈던 불이야학교에 내가 실수로 불을 내버리고 그대로 도망쳐 바다를 지나던 도중에 난파사고를 당한 거였다고.”

“…네가 그랬다고?”
“…잠에서 깬다고 한들아무도 나를 안 반길 텐데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어.”

그러나 그때 경찰이 담벼락 너머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놀란 윤슬이 내 어깨를 꽉 붙잡고 말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확실한 건네가 이 섬에 남아있으면 곧 붙잡힐 거란 거야!”

윤슬이 나를 이리저리 흔들었다내가 힘없이 나풀거렸다.

일단 네 말마따나 그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면지금 당장 저기 들어온 여객선으로 가야 된다고!”

“……”

김시유!!”

다들 대체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대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일어나고 싶지 않았다이미 새까맣게 탄 자국들로 얼룩진 삶이었다지울 수도 없는 흉을 지니고 더 이상 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누구나 실수를 하잖아저 바깥에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려 봐.”

“…아냐없어.”

단 한 명도정말?”

내가 대체 누구를 위해 그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위해서도 아니었고미래의 나를 위해서도 아니었다고하고 싶은 것 없이 하고 있던 것만 많았어.”

그건…”

윤슬은 머뭇거리더니 이내 말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줘나 정말 안 일어날 거니까.” “……너 정말.”

내가 여기에 남아있는 게 맞아그 동안 내가 했던 말들은 흘려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가… 아저씨랑은 화해 좀 하고지난 이틀 동안 덕분에 즐거웠어.”

난 천천히 일어나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

윤슬이 소리를 질렀다깜짝 놀라 움찔했다.

 어제 내가 너 서울 가는 거 도와줬잖아그거 안 갚아?”

“…?”

내가 지금 서울을 갈 일이 생겼는데네가 좀 도와주면 좋겠어!”

뒤를 돌아보았다.

… 진심이야?”

그럼 아무런 보답 없이 어물쩍 넘어 가려고 했어내가 너에게 쓴 식비랑 교통비는 다 어떻게 하려고이걸로 갚아오늘 하루 나와 동행해준다면 퉁쳐줄게.”

윤슬이 다가왔다.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니야꿈속에서 쭉 있으려면 열심히 일을 해서 밀린 빚부터 갚아야지.”

 

 

 

 

 

 

 

 

 

 

08 오늘 하루도


 

내 머릿속의 격분하던 파도가 차츰 가라앉았다첫날 섬으로 왔을 때 밤을 지새우며 느껴졌던 그 평온함이 느껴졌다결국 껍데기뿐인 잡생각들은 아예 백지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까.

 저희 배는 곧 목포여객터미널에 도착합니다.”

좋아어제는 네가 사실상 길찾기 담당이었지오늘은 내가 앞장설 테니까 걱정 마.”

“…됐어.”

난 어제 우리가 지났던 그 학교를 훑어보고 싶은데…”

찬찬히 시야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자 뿌옇던 객실 내부가 좀 더 그윽하게 보이기 시작했다주위를 둘러싼 담청색 시트 너머에 있는 다른 승객들을 살펴보았다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단정한 노부부부터 캐주얼한 차림의 대학생들체크 무늬 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알록달록한 외투를 걸치신 뽀글머리 할머니들똑같은 모자를 쓴 여행객들단란하게 행렬로 일제히 앉은 가족남방셔츠를 빼 입은 젊은 여성헤진 민 소매만 훌쩍 걸치신 할아버지까지.

 그때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곱게 빚어 넘긴 앞머리 아래 검은 뿔테 안경을 걸쳐 쓴 남자단정하게 숏컷을 한 여자그리고 그들 사이에 불편하게 앉아있는 남자아이내 눈이 커졌다.

“…우리 가족이네.”
윤슬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너는 못 봤지오늘이 어린 네가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던 그 날이야아까 떠나는 걸 배웅하기는 했는데이렇게 같은 시간대의 배를 탈 거라곤 염두도 안 해놓고 있었네.”

이 날… 하도 예전이라 잘은 기억나지 않았는데분명 내가 저렇게 끌려가다가 도망친 순간이 있었어.”

“…도망쳤다고?”

하지만 어쨌든 간에 결국은 서울로 올라갔지… 뭔가이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어슴푸레한 무언가의 형상이 과거의 기억에 맺혔다.

“…맞아내가 자동차에 타기 직전에 그대로 아빠의 손을 놔버리고 배로 다시 뛰어갔어섬으로 돌아가려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승객 여러분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안전을 위해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계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꾸고 내 발로 다시 부모님에게 돌아갔던 것 같아왜 그랬던 거지?”

그럼 지금 이 순간이 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과거인 거잖아너는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윤슬이 어린 나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기차 시간 맞추기는 애매하겠지만 그래도 따라가볼래혹시 모르잖아네가 아예 잊고 있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을지.”

“……목적지에서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이내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윤슬과 난 일부러 자리에 남은 채 우리 가족의 움직임을 살폈다싫은 티를 내며 자리에서 버티려고 하는 어린 나와 끌고 가려는 부모님이 보였다실랑이를 벌이는 듯 했다아빠가 속삭이는 건지 압박하는 건지 내게 얼굴을 들이대고 뭐라 말을 하자 그제서야 내가 힘겹게 일어났다여전히 부모님은 성난 표정이었다.

“…지금?”

우린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세 사람을 따라 출입구로 나가는 행렬로 향했다그러나 우린 외진 자리였기에 우리가 다다르는 그 사이에 또 다른 승객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아 그만 그 가족을 놓치고 말았다분주한 인파들 사이에서 세 사람은 유유히 출입구 밖으로 걸어나갔다.

놓쳤다!”

아냐나가서 다시 찾으면 돼.”

좁은 복도의 겹겹이 늘어선 사람들을 비집고 바깥으로 서둘러 달려나갔다그러나 여객터미널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에 쉽사리 우리 가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으아여기서 어떻게 찾아?”

“……아까 말했지차에서 그대로 도망쳤다고주차장으로 가자!”

메아리처럼 울리는 안내방송지나가는 여객들의 잡다한 수다묵직한 짐 옮기는 소리사방의 발걸음들기둥의 번지레한 표지판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하나의 혼잡함을 이루었다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뭐라도 먹으면서 기다리……”

잠시만저기로 가면……”

 「안내말씀 드립니다……

 쿠우웅….드르르르륵……

 저벅저벅……

내가 넋이 나가자 윤슬이 툭툭 쳤다.

일단 서로 잃어버리지만 말자같이 다녀.”

그 혼잡한 인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그곳을 헤쳐나가는 건 마치 해수면 위에서 헤엄치는 것만 같았다. 쉬지 않고 뛰다 보니 숨이 점점 거칠어지며 불규칙해졌다팔을 휘젓고 몸을 이리저리 비트며 그 사이와 사이를 지났다바닥의 안내선들은 사람들의 신발들로 가려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문뜩 고개를 위로 드니 표지판 몇 개가 기둥에 달려 있었다.

주차장 왼쪽이다!”

간신히 주차장으로 향하는 화살표를 발견하고 따라갔더니 이윽고 출구가 보였다그대로 그 문을 밀어버리고 나갔다바깥은 분주한 내부와는 달리 비교적 한적했다아스팔트 도로 하나를 가운데 두고 주차된 차들이 옆으로 겹겹이 늘어서 있었다귀뚜라미들의 울음이 아득히 떨어진 곳에서 고요히 들려왔다불현듯 어디선가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렸다.

너 진짜!”

이윽고 모퉁이 너머로 탁탁하고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조그맣게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내가 달려오는 아이의 어스름한 형상을 보고 말했다.

“…쟤다.”

아이는 뒤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나와 윤슬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당황한 우리는 몸을 숨기려고 주차차량들 사이로 들어섰다그러나 미처 윤슬이 몸을 숨기기도 전에 아이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발목을 삐끗하더니 그대로 쿵하고 엎어지고 말았다.

 아!”

넘어진 아이는 발목을 붙잡은 채 바닥에서 울고 있었다그 아이가 허둥지둥 고개를 들자 불현듯 윤슬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아이가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이내 외쳤다.

“……우동집 누나!”

윤슬이 주차차량들 사이에 쭈그려 앉아있는 나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윤슬이 조그만 목소리로 숨어있는 내게 물었다.

 야이거 어떻게 해?

 모르겠어!

누나저 엄마아빠 따라가기 싫어요그냥 우리 마을에 계속 있고 싶단 말이에요…”

당황한 윤슬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를 쳐다봤다그러나 아이 부모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자 윤슬은 아이를 슬쩍 뒤로 숨겨주었다부모가 멀찌감치 서서 윤슬에게 물었다.

거기 학생혹시 뛰어다니는 남자아이 못 보셨나요?”

방금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아감사합니다.”

이내 자동문이 열리고 부모가 터미널 내부로 들어가자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누나.”

윤슬이 아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벌겋게 까진 무릎을 아이가 어루만지며 쓰라려 하고 있었다.

아야…”

윤슬이 넌지시 시선을 내게 돌렸다내가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윤슬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러곤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하더니 그 애가 아이에게 말했다.

“…시유야네가 아무리 겁이 나더라도 눈앞의 상황에서 도망쳐서는 안돼피한다고 모든 일이 사라지진 않잖아.”

움찔한 아이가 여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전 할머니 할아버지랑 살고 싶단 말이에요

서울 가기 싫어요…”

아이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윤슬의 시선을 피해 넘어진 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시유야날 봐.”

아이가 훌쩍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자 윤슬은 연하게 미소 지으며 그 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 애가 머뭇거리더니 이내 얘기했다.

우리가 자고 일어나는 건 그날 하루에 머물러있지 않고 다음 날로 들어서기 위해서잖아이렇게 제자리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는다면 넌 어제에만 갇혀있게 되는 거야…”

“…”

윤슬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어나야지일어나서 어제의 실수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고 추억에 남길 새로운 오늘을 만들어가야지.”

“……앞으로 제가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럼오늘 하루도 정말 수고 많이 했어.”

윤슬이 아이에게 손을 살며시 내밀며 말했다.

 시유가 서울 가서도 꿋꿋이 잘 버티고 누나처럼 고등학생 돼서 다시 찾아오면내가 그때 맛있는 돈까스 공짜로 해줄게.”

“…진짜요?”

아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생이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인데… 제가 누나를 잊으면 어떡해요?”

누군가를 잊고는 못 살아가.”

윤슬이 옆에 있던 나를 웃으며 바라보았다잊은 줄 알았는데 아직 기억 한 구석에는 남아있던 거였구나이날의 일들이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묵묵히 버텨올 수 있었던 건 바로 나도 모르게 매일 되새겼던 이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유야이제 일어날 시간이야마저 걸어가야지.”

윤슬이 내민 손을 잡고 아이가 슬며시 일어났다.

그럼… 열심히 해볼게요.”

그래나중에 또 보자!”

울음을 멈춘 아이가 이내 도망쳐왔던 길을 되돌아가자내가 슬며시 주차차량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윤슬이 떠나는 어린 나를 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말해준 거야?”

“…네가 방금 전 해준 말들 덕분이었어지금까지 지칠 때마다 묵묵히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부.”

윤슬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야기쁘네.”

혹시 괜찮다면…”

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제 나도 일어나도될까?”

 

 학교는 불길 속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뭐랄까물에 빠졌던 그날 해수면 아래에서 바라보았던 빛 같았다이미 교문을 지나쳤지만 더 이상 뜨겁게도매스껍게도 느껴지지 않았다별관 출입문 앞에 우두커니 섰다윤슬은 내 손을 잠시 넌지시 잡았다.

“…이렇게 너와 손만 맞닿아도 보이는 불길인데여태껏 아무도 못 알아봐 주었다는 게 되게 이상한 것 같아.”

내가 뜨겁다고 말 안 했잖아그러니 다들 괜찮은 줄 알았나 보지.”

얼굴에 미소를 품은 그 애가 나를 슬며시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손을 훌쩍 놓아버리며 얘기했다.

내가 너에게 했던 말아직 실효가 있을 거야내가 잊기 전에 후딱 찾아 와서 얻어먹고 가올 때 네가 말한 슈크림 듬뿍 든 델리만쥬 좀 사오고.”

“…네가 날 아직 기억할까?”

너도 날 아직 기억하잖아그런 걱정 말고 빨리 가내가 기다리잖아.”

윤슬이 내 등을 툭툭 쳤다계단을 차츰 올라갈 때마다 불길은 거세졌지만 더 이상 뒷걸음질치지 않았다마침내 그날 도망쳐 나왔던 과학실이 눈에 들어왔다그 앞에 섰다.

”…휴우.”

심호흡을 하고 과학실 문 손잡이를 잡아 돌려 열었다.. 순식간에 불길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다.

한 발자국씩 앞으로 찬찬히 내디뎠다몸이 점점 가벼워졌다불현듯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던 걸까뒤를 돌아보니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윤슬이 보였다앞이 점차 흐려지는 사이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멀리 떨어져있었지만그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깊고 선명했다.

일어날 시간이야!”

그러더니 그대로 푸욱 가라앉았다.

 

 

 

 

 

 

 

 

 

 

 

 

 

 

 

에필로그

 

 

 여름방학이 지나자 온 거리는 노랗게벌겋게 물들어있었다하늘엔 은행잎들이 나풀나풀 바람에 날리다가 이내 길가에 툭 떨어졌다수많은 가로수들의 붉은 행렬은 마치 이글대던 불길을 그대로 굳힌 것 같았다몇몇 장난스러운 아이들이 청소부들이 정성껏 쌓아놓은 단풍잎 더미에 풀썩 뛰어 들자온 사방에 홍엽이 흩뿌려졌다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름이 끝났구나가을이 왔구나.

 

의식을 되찾은 그날 이후 난 단 한 번도 꿈을 다시 꾸지 못했다어째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단지 이제는 눈을 감으면 얼마 안 가서 바로 아침이 밝아왔다는 것뿐이었다오늘 아침도 여타 다른 날들과 똑같았다다만오늘의 일정은 다소 특별했다달력에는 추석 연휴!!’라고 적혀 있었다숨이 턱 막히는 고속도로를 피해 우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그 동안 여러 핑계로 몇 년 간 방문을 미뤄왔던 외가댁으로 향했다창가로 내다본 서울의 하늘은 구름 한 점이 없이 새파랬다창가로 비춰지는 햇살 아래에서 잠시 낮잠을 잤더니 금새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해있었다바다 방향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원래 인적이 드문 작은 터미널이었지만 오늘은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섬마을 사람들을 태운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시유야아빠 봤어?”

… 아니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배가 떠날 시간이 거의 다 되서야 아빠가 저 만치서 후다닥 달려오고 계셨다손에 들고 계신 것은 델리만쥬 두 봉지였다.

늦었어요빨리 오세요!”

우리 가족은 급히 배 쪽으로 향했다섬에서 나온 사람들과 섬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비스듬히 가로질렀다수많은 사람들을 헤집고 끝끝내 배에 올라탔다간신히 숨을 돌리고 아빠가 갓 사오신 구수한 향의 델리만쥬를 한 입 베어 문 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다른 델리만쥬를 반으로 뜯자 역시나또 크림이 안 들어있었다.

뭐야이거 크림이 안 들어있는데요?”

무슨… 노렸네이거.”

 연휴가 끝나갈 무렵할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내게 맛있는 걸 사주시겠다고 내 손을 끌고 어딘가로 향하셨다우리가 도착한 곳은 마을 외딴 곳에 있는 한 일식집이었다.

시유야기억 나니너 예전에 할미가 여기서 돈까스 사줬잖아너 서울 올라가기 전날에.”

“…그랬었나요?”

어이구다 컸다고 기억도 못 하는 것 봐.”
다소 생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푸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식당이었다짙은 나무 템바보드로 인테리어 되어있는 식당은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두웠지만테이블마다 올려져 있는 은은한 등불이 주위를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그때 주방에서 거대한 중년 남성이 걸어 나왔다남자는 머리를 하얀 수건으로 매고 있었으며광택이 나는 검은 장화를 신고 때 묻은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이구할머니오래간만에 오셨네요저 옆에 있는 친구는… 손자?”

범두 아저씨시유 기억하시죠김시유그 우리 손주 있었잖아요쪼그맣던 꼬마애.”
“…그 막둥이 시유요?”

그 시유가 커서 지금 이렇게 고등학생이 된 거에요장하지 않아요?”

“……안녕하세요!”

그래진짜 많이 컸네네가 참 내가 해준 돈까스를 맛있게 먹어서 보는 나도 기분이 좋았지서울로 가서 아쉬웠건만다 커서 왔네 그래!”

그치이 할미가 많이 사줬는데.”

“…근데시유야 너 괜찮니표정이…”

“……혹시 아저씨어릴 적에 간간히 가게 드나들던 아저씨 딸 분이 있으셨잖아요그 딸 분은 혹시 지금 여기에 계시나요?”

… 슬이 말이니슬아!”

?”

“…배우에요?”
아니걔는 조명 감독으로 갔어원래는 배우가 된다고 하더니 갑자기 직업을 전향했지 뭐니하여간기특하지만 특이한 애야내 딸이라도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어이구슬이 걔 고생 많이 했어어린 나이에 엄마 잃고 그렇게 버틴다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잘 되었네요…”

“…시유야너 지금 우는 거니?”

아니너무…”

 

잔잔한 물결 아래에서 일렁이는 햇빛이

수면 너머로 온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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