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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두

  • 작성자 distodam
  • 작성일 2019-12-31
  • 조회수 768

상필은 메모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김 주임이었다. 한 손에 조끼를 벗어 들고 한쪽 팔엔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상필은 메모지만 들고 있는 게 민망해서 아무 펜이나 잡아들었다. 급하게 뭔가를 쓰는 척했지만 메모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빳빳한 질감에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나서야 상필은 조심스레 볼펜을 노크했다. 그사이 김 주임은 조끼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거울을 보았다. 상필에게 말했다. 박 간사님, 퇴근 안 하세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열쇠 놓고 가. 상필이 말했다. 김 주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에 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또 쿵 닫혔다. 상필이 펜을 집어 던졌다. 외투를 입었다. 창문 블라인드를 들춰 김 주임이 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음속으로 수를 아홉 쯤 세고 책상의 열쇠를 집었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2층 계단을 내려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열려있던 사람들의 외투 지퍼는 오늘은 굳게 잠겨있었다. 상필도 유리문을 나서기 전 외투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아까 김이 가던 방향을 보았다. 움직이는 머리들 사이로 김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상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보폭을 넓혔다. 아직은 상필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갑자기 김이 멈춰서 누군가와 인사했다. 김 주임의 웃는 옆얼굴이 보였다. 그러고는 한참을 그는 얘기하며 걸어갔다. 자연스레 걷는 속도도 느려졌다. 상필은 마음이 쿵쿵대면서도 걷는 속도를 줄이는 게 고역이었다. 차들은 도로를 사람은 인도를 메웠다. 행인들을 신경 쓰면서 김을 놓치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김이 방향을 틀었다. 상필은 가슴이 더 빨리 뛰면서 입이 마르는 걸 느꼈다. 이거라면 뭔가 단서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빠르게 걸었다. 근처 지하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길거리를 점령했다. 상필은 팔을 움츠리고 돌진하다시피 했다. 드디어 모퉁이였다. 큰길은 사람들이 꽉 메우고 있었지만 골목길로 가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중에 김은 없었다. 상필은 걷는 것도 까먹고 멈춰 섰다. 그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눈을 마주친 대부분은 동공에 초점이 없거나 의심하는 눈초리일 뿐이었다. 상필은 머리며 목을 쭉 뺐다. 그래도 김 주임은 보이지 않았다.

상필은 터덜거리며 낮은 언덕길을 올랐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별생각 없이 문고리에 집어넣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열쇠를 뒤집었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상필은 열쇠를 살폈다. 몸통에 견착지가 붙어있었다. 2층 사무실. 씨발. 내일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할 생각에 상필은 욕을 뱉었다. 다시 주머니를 뒤져 집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기는 건 적막이었다. 현관 등만 알아서 켜졌다. 문득 상필은 현관에 놓인 슬리퍼가 조금 틀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집안에 뭔가 바뀐 게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뚜렷하게 찾을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래도 상필은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리겠다는 생각도 했다.

상필의 의심병이 도진 건 며칠 전부터였다. 평범한 야근 후 퇴근길이었다. 방값 때문에 외곽에 있는 곳에 방을 구했어도 사무실과는 가까워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지만, 밤에는 전등이 몇 개 없어 바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채기 힘든 동네였다. 자연히 주변을 둘러보는 게 습관이었다.

상필은 공기가 조금 바뀐 것을 감각했다. 누군가 뒤에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느꼈다.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발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그의 소리에 수렴했다. 상필은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밖으로 던졌다. 떨어진 동전을 줍는 척하며 뒤를 살폈다. 보폭 소리가 멎었다. 주위는 아무도 없었다. 상필은 주머니 속 전화를 만지작거리다 굴다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다리는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꽤 길었다. 만일 따라오는 사람이 있다면 정체를 밝히지 않을 수 없고,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면 그를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상필은 멀리서도 보이는, 빛을 발하는 곳으로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빛이 걸음을 따라 일렁이며 커졌다. 굴다리 안은 차 몇 대만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발을 뗄 때마다 소리가 울렸다. 반쯤 가서 상필은 뒤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지나오자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그는 계단으로 집에 올라가다 어떤 남자와 마주쳤다. 입구쯤에서도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었다. 겨울이라지만 눈만 빼꼼 내놓고 다니는 게 흔한 차림은 아니었다. 이웃집에도 그런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상필과 눈을 마주치자 흠칫 놀라더니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상필이 소리쳐 부르려 했지만 그는 이미 계단을 넘어 어귀까지 달려 나간 후였다.

상필은 일련의 이상한 일들이 자신에게만 일어난 것이 예사로운 일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상필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큼 불량하게 살아온 적은 없었다. 되려 남들보다 더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살아왔는데.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 상필은 자신을 쫓는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자신이 역으로 찾겠다고 결심했다. 먼저 근처에 있는 사람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김 주임이었다. 별 혐의점이 없고 업무상으로도 잘 지내는 사이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의심을 피해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김은 집으로 향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집으로 왔더니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김이 샛길로 들어서서 집에 와 뭔가 뒤진 후에 감쪽같이 사라지는 건 알리바이가 부족했다. 상필은 마음속 리스트에서 김을 지웠다.

다음날 새벽 상필은 시계를 부술 듯이 알람을 끄고, 얼굴이 부은 채로 문을 나섰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해도 뜨지 않아서 춥기만 했다.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1층 유리문은 잠겨있었다. 경비원도 아직 출근하지 않은 듯했다. 상필은 일찍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추운 날씨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막막했다. 벌써 신발을 뚫고 발이 차가웠다. 조금 있으니 경비원이 뒤뚱뒤뚱 걸어와서 유리문에 걸린 자전거 자물쇠를 풀고 문 위에 열쇠를 꽂아 열었다. 상필은 2층 사무실 철문을 열었다. 불이 환했다. 상필은 다시 한번 가장 먼저 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필이 일하는 곳은 작은 시민단체였다. 정확히는 서울에 있는 시민단체의 지부였다. 보수 세가 강한 지역이라 회원을 모으기도 쉽지 않아 근무하기 꺼리는 곳이었다. 똑같은 전쟁터라면 이왕이면 공을 더 세우기 쉬운 곳에 몰리는 게 인간 심리니까. 상필은 그저 고향을 떠나기가 싫어서 여기에 남아있었다. 야심 있는 사람들이 떠나가도 상필은 별 상관하지 않았다. 이곳에 오래 남아 있는 게 상필의 소망이었다. 상필은 옷을 걸어놓고 보도 자료를 확인했다. 시청 공무원의 뇌물 수수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규탄. 언제나 규탄. 유감. 서울에서 누가 고문사하고 지하 운동단체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하루걸러 나왔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몇 달 전 시청에 누군가 테러를 했다고 여론이 들끓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저 무뎌져 갈 뿐이었다. 코딱지만 한 소도시에서 다 아는 사람들끼리 뭉쳐서는 바뀔 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그저 습관처럼 보도 자료를 만들고 배포할 뿐이었다. 히터를 틀어도 한기가 공기에 섞여 있었다. 쫓아내려 물을 끓였다. 커피 스틱 막대로 가루들을 물에 녹이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상필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박 간사님 어제 뭐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점심을 먹으며 김 주임이 물었다. 아니? 왜? 아, 어제 친구 만나러 카페에 들렀는데 박 간사님 지나가시더라고요. 되게 심각한 표정이던데. 무슨 안 좋은 일 생긴 건 아니죠? 상필은 김 주임의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김 주임이 아니었다. 심리적으로 김이 뭔가 켕기는 게 있었다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냈을 리가 없다. 그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말인 것이다. 아, 그게. 사실 요새 누가 나 따라다니는 것 같아. 김 주임만 들어라고 나지막이 말했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듣는 게 느껴졌다. 좀 있다 이야기하자. 상필이 말했다. 상필은 먼저 계산을 하고 국밥집 앞으로 나갔다. 김 주임이 뒤따라왔다. 그게 사실이에요? 김이 물었다. 응. 상필은 이제껏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굴다리부터 기울어진 슬리퍼까지. 김도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하나 고민 중이야. 상필이 말했다. 갑자기 김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안 돼요. 이거 생각보다 큰일일지도 몰라요. 시청에서 붙인 사람이면요? 그러면 경찰에 신고해도 아무 소용없을걸요? 김이 말했다. 상필이 김을 쳐다보았다. 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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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1과 강 팀장은 수사기록 차트를 살피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심히 보다가 나중에는 쉬악쉬악 넘기고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장 형사가 지나갔다. 으응. 강 팀장이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성주필 경장이 지나갔다. 야야. 성주필이. 강 팀장이 성 경장 팔을 잡았다. 성 경장을 옥죈 강 팀장의 손이 무심코 지나가려던 그를 기립 자세로 만들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너 인마 수사 이따위로 할 거야? 강 팀장이 아까 집어 던졌던 파일로 성 경장 머리를 쳤다. 이딴 거도 미제사건으로 만들면 세상에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 어딨냐? 그리고, 대공 혐의점이 있는 사건인데 어떻게 주모자, 동조자, 조직도 셋 중에 하나도 확보가 안 돼? 성 경장은 팔을 뒤로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게, 아무리 찾아봐도 목격자도 없고, 무엇보다 사건을 크게 만들지 말자는 기조라.. 성 경장이 대꾸했다. 시국이 무슨 시국인데. 서울에서는 해방구 결성한답시고 빨갱이들이 대학도 점거해. 내가 사건 잡을 테니까 오늘 회의 때 수사 보고 준비해. 알았어? 옙. 가. 가서 좀 열심히 준비해봐. 강 팀장이 성 경장에게 차트를 건넸다. 성 경장은 두 손으로 차트를 섬겨 들고 자리로 갔다. 강 팀장은 시계를 보았다. 아직 아침 회의까지는 한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잠바를 걸쳐 입고 옥상 둥근 손잡이를 돌렸다. 이제 떠오른 뻘건 해가 에폭시를 덮은 초록 천장을 비추었다. 검은 재떨이를 갖다 놓은 난간에 기대었다. 서장 주도로 건물 내 금연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서장도 가끔 여기서 담배를 태웠다. 강 팀장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내려가니 장 형사가 곧 회의 시작이라고 일러주었다. 간단하게 필기도구를 챙겨 회의실로 들어갔다. 성 경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 수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담자 및 조직의 실체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전단 작성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때까지의 사례들로 미뤄보았을 때, 전단을 작성한 사람이 주동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뭐 강철서신이야? 그게 뭐라고 실체가 안 밝혀져? 강 팀장이 비아냥거렸다. 몇 명 조사해봤는데, 용의자 몇이 있긴 한데 소재 파악도 어렵고... 장 형사가 볼멘소리했다. 박 팀장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명단 줘봐. 박 팀장이 말했다. 장 형사가 파일을 건넸다. 용의자는 네 명. 얘부터 일단 수배해. 박 팀장이 종이 한 장을 뜯어 보였다. 김영수의 프로필이었다.

며칠 뒤 강 팀장은 출근하며 게시판을 둘러보다 김영수의 얼굴에 붙여진 검거 스티커를 보았다. 분명 출근할 때만 해도 없던 표식이었다. 유치장으로 내려가서 명부를 살펴보니 김영수의 이름이 있었다. 신원정보를 살펴볼 때 보았던 주소와도 일치했다. 이 친구 좀 불러봐. 수사할 게 있어서. 강 팀장이 유치장에 앉아있는 순경에게 말했다. 강 팀장은 순경의 안내를 받아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얼마 뒤 김영수가 창살 문을 열고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풀썩, 쿠션 바람이 빠지며 쩔렁거리는 수갑 소리가 빈 곳에 퍼졌다. 턱부터 귀까지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 있었고 왼쪽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불그레했다. 강 팀장은 의자를 끌어 궁둥이를 붙이고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품에서 경찰 공무원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모든 과정을 김영수는 멍청히 지켜보았다.

어쩌다 잡혔어?

강 팀장이 침묵을 깼다.

김영수는 강 팀장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 팀장은 김영수의 눈을 쳐다보았다. 김영수도 눈을 부릅떴다. 보다 못한 순경이 강 팀장 옆으로 다가와 귀에 입을 가까이했다. 부산에서 중국으로 가려다 페리 터미널에서 직원 신고로 잡혔답니다. 처음에는 위조여권 때문이었는데... 강 팀장은 거기까지만 듣고 몸을 순경 반대쪽으로 일으켰다.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옆에서 순경이 다가왔지만 강 팀장은 왼손을 몇 번 털어 그를 쫓아냈다. 그러고 김영수에게도 담배를 건넸다. 김영수는 마치 담배를 처음 본 사람처럼 굴었다. 강 팀장이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말했다. 요새도 그런 극렬분자가 있나? 나도 그런 건 못 해봤는데.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야.

김영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강 팀장이 씩 웃었다.

나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런 신념 오래 못 가. 그래도 지금은 투철하겠지. 좋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할게. 빨리 빠져나가야 운동이든 혁명이든 할 거 아닌가?

김영수가 고개를 들었다. 강 팀장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

강 팀장은 자료를 챙겨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미 자신 빼고는 모두 앉아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팀장이 들고 온 사진을 화이트보드에 붙였다. 복사한 종이를 다른 형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자. 수사 윤곽은 어느 정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수월한데 니들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주요 용의자들 조사해보니까 새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박상필. 어디 시민단체에 있다는데, 그 자식이 문건 작성자라고 지목하더라고. 시청에서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방해하고 다니는 거 보면 좀 수상한 기가 보였어. 소환했으니까 오면 연락해. 우리는 그놈을 주동자로 보고 수사한다.

그러면 그놈이 용의자라는 건 어떻게 압니까?

성 경장이 손을 들고 말했다. 모두의 이목이 성 경장에게로 쏠렸다. 강 팀장이 피식 웃었다. 야. 니가 그러니까 경사 진급을 물먹는 거야. 이번엔 강 팀장 쪽으로 시선이 돌아왔다. 이미 김영수하고 또 잡힌 애들이랑 말을 맞춰놨어. 증거도 있으니까 밀어붙여서 자백만 얻어내면 사건 종결이야.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지금까지 안 하고 있었는지 답해보실래요, 성 경장님? 예? 성 경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주먹구구식입니다. 장 형사가 말했다. 그와 함께 주위도 술렁였다. 강 팀장은 들고 있던 봉을 던지고 장 형사에게 다가가 앞에 섰다.  야 이 새끼야. 너 경찰 몇 년 했어? 뭐 민중의 지팡이 그런 거 다 좆까라 해. 임마, 우리는 실적만 올리면 되는 거야. 빨갱이 새끼 잡아들이는 데 뭐 이유가 필요해? 그러면, 우리가 풀어준 애들은 빨갱이 아닙니까? 장 형사가 받아쳤다. 걔네? 걔네는 이제 우리 공모자인 거야. 사람 냄새 탄 고양이는 어미가 물어 죽이게 돼 있는 거야. 강 팀장이 말을 마치자 다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알아들었으면 다 꺼져. 해산. 강 팀장이 말했다.

강 팀장이 회의실을 나오던 중 건너편 사무실에서 누군가 손짓했다. 보안과장이었다. 강 팀장은 자기 책상에 자료들을 엎어놓고 사무실 앞으로 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문을 두 번 두들겼다. 들어와. 약간 쉰 목소리가 들렸다. 아유, 뭐 사무실까지 직접 불러내시고. 보안과장님 심기가 불편한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강 팀장이 비아냥거렸다. 보안과장이 다리를 꼬고 의자에 누워 있다가 픽 웃었다. 눈가에 주름 세 겹이 만들어졌다. 회의실이 너무 왁자지껄하네. 보고 파일 읽었다야. 재밌지 않냐? 뭐가요? 조직이라는 게 말이야, 붙여놓으면 졸라 세고 정의로운 척하는데, 개개인을 까보면 옹졸한 새끼들만 모아놨어. 강 팀장은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고 표정을 찡그렸다. 의뭉스러운 영감탱이. 몇 달 뒤면 은퇴인데 감각이 아직도 살아있다. 강 팀장은 생각했다. 일단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하기로 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랑 나하고, 옛날 생각나지 않냐? 그건 별개의 문제 같은데요. 말씀 끝나셨으면 가보겠습니다. 강 팀장은 문을 열고, 닫지도 않고 나갔다. 보안과장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강 팀장은 책상에 앉는 대신 다시 옥상으로 갔다. 담배를 꺼냈다. 초록색 땅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귀를 찢을듯한 함성, 정식아 하고 부르던, 얼굴만 기억나던 죽은 선배. 뜻도 모르고 불러대던 노랫가락들. 보안과장 때문에 그런 기억들이 소환되는 것이 불쾌했다. 될 수만 있다면 담배 연기에 그런 걸 다 태워 보내고 싶었다. 능구렁이 같은 보안과장은 강 팀장의 생각을 다 꿰뚫고 있었다. 강 팀장은 최대한 빨리 사건을 종결짓고 싶었다. 이럴 때는 회유와 협박이 유용했다. 죄를 사해주는 대신 한 사람에게 혐의를 집중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애매하게 걸쳐 있으면서도 혐의는 확실한, 그리고 저항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강은 박상필이 걸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상필은 곤두선 신경을 잠재우려 애썼다. 다행히 며칠간은 누가 찾아오는 일도 뒤를 캐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상필은 여전히 불안했고 그건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어도 가끔 뒤를 돌아봤고 한동안은 시간이 좀 걸려도 굴다리로 돌아서 다녔다.

상필이 불안해하든 말든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따금 김이 지금은 어떠냐고 소곤소곤 물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귀찮게 느껴졌다. 지금 아침이 되었고 또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을 지나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현관을 나가다 우체통을 바라보았다. 가져가기도 버리기도 귀찮아서 확인도 하지 않았던 홍보용 편지를 보관함이 뱉어놓았다. 용량을 초과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여 편지를 갈무리했다. 무슨 놈의 백화점 세일은 이렇게 잦은지. 상필은 편지들을 수거 박스에 넣었다. 보관함에 남아있는 편지들도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필요한 건 챙기고 나머지는 수거함에 버리니 하나가 남아있었다. 상필은 뒤집어진 편지 봉투를 꺼내 앞면을 보았다. 경찰청 마크가 선명했다. 상필은 봉투를 조심히 뜯었다. 종이 한 장이었다. 주소가 적힌 면을 넘기니 다른 면이 나왔다. 거기엔 상필이 일주일 뒤 소환에 응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지 않으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일단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하루 병가를 냈다. 주위에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좋지 않은 소문이나 나돌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상필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서류를 꼼꼼히 살폈다. 갑자기 며칠 전의 해프닝이 다시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신한테만 최근에 안 좋은 일이 겹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억세게 재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치더라도 그게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함이 밀려왔다. 일단 소환에는 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자신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한 번 들어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점심을 넘겼는데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내일부터 어떻게 표정을 숨기고 어디가 아팠냐는 동료들의 질문에도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음 날 상필은 지부 대표인 동훈에게 갔다. 동훈은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지부장님. 동훈은 반응이 없었다. 지부장님. 저 박 간사입니다. 그제야 동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필을 쳐다보았다. 어, 왜? 모레 못 나올 것 같아서요. 이제는 예고하고 아플 작정이야? 동훈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냥 일이 있어서 지방에 내려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동훈은 대답하지 않고 상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상필아, 너 이 일 몇 년 했냐? 사 년쯤 됐습니다. 그럼 질문 하나 하자. 우리가 털끝 하나도 사심 없이 순수한 공익만을 위하는 단체냐? 막 정의롭고? 뭐 대체로 그렇죠. 대체로, 대체로라는 게 백 프로는 아니지. 그거 봐. 난 이 일로 평생 밥벌이하면서 눈치만 보고 산 거 같아. 무슨 말이냐면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척 보면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가. 무슨 일 있는 거지? 지방에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이제 동훈은 걸려들었다는 표정으로 상필을 바라보았다. 상필은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도움이 훨씬 되겠지만 치부를 들키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상필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술을 움직였다. 경찰에서 조사받으러 오래요. 동훈은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김 주임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의 눈초리도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동훈이 낮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일단 조사받고 나와야 알 것 같아요. 동훈은 아까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았다. 상필에겐 이 시간마저 불편하게 느껴졌다. 일단 알겠어. 나중에 이야기하자. 다들 뭐해? 하던 일 해. 동훈이 말했다. 칸막이 너머로 움직이던 눈빛들이 사라졌다.

상필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경찰서 본청에 가려면 중심가로 나가야 했다. 너무 격식을 차리지도 너무 추레하지도 않은 복장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결국 간단하게 블레이저를 입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건 수백 번도 더 반복된 일이지만 이런 일로 버스를 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변 풍경마저 어딘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 정류장을 놓칠 뻔했다. 급하게 벨을 누르고 내렸다. 기사가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필은 모른 척했다. 시내 중심가에 경찰서가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더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상필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수많은 사람이 그와 보폭을 같이했다. 안으로 들어가도 사람이 많았다. 평일 오후임에도. 혼자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 활기찬 표정을 지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에겐 어떤 목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을 즐기는 것 같아 보였다. 상필에겐 목적이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 용의자 신세가 되는 것. 상필은 어쩐지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꼭 길마저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니 데스크가 보였다. 머리를 말끔히 빗고 제복을 입은 순경이 상필과 눈이 마주쳤다. 뭐 도와드릴 거 있을까요? 그가 물었다. 보안과로 가려는데요. 상필이 답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안내도를 보여주며 몇 층 어느 복도로 가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상필은 기분이 더 묘해졌다. 보안과로 가는 사람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수 있다는 걸 그는 전혀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범죄자와 경찰의 관계 같은 건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것도 시스템일 뿐일지 상필은 궁금해졌다. 데스크의 순경이 일러준 대로 가니 [보안 1•2과] 팻말이 보였다. 상필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상필 생각보다는 산만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몇몇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상필은 입구 근처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장 형사가 지나가다가 상필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상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조사받으러 오라 해가지고... 상필은 말꼬리를 흐리며 품에서 경찰 마크가 찍힌 편지를 꺼냈다. 장 형사가 받아 유심히 읽었다. 강 팀장이 말한 그 사람이다. 장 형사가 생각했다. 종이를 다시 돌려주고 말했다. 따라오세요.

장 형사를 따라 상필이 도착한 곳은 보안과 안쪽 복도였다. 문을 열면 나오는 복도였는데, 문을 닫으니 외부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실 문이 벽과 똑같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 상필은 가까이 가기 전까진 왜 벽을 향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방음벽 건너편에 문이 네 개 있었다. 장 형사가 열쇠를 꺼내 맨 끝에 있는 하나를 열었다. 여기로 들어가서 앉아서 기다리면 됩니다. 상필이 안으로 들어갔다. 참. 장 형사가 말했다. 상필이 고개를 돌렸다. 전자기기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제출해주세요. 상필이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끈 뒤 장 형사의 손에 건넸다. 그밖에 다른 건? 상필이 고개를 저었다. 장 형사가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쿵 소리가 나고는 정적이었다. 안에는 탁자와 전등 하나뿐이었다. 상필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 의심했다. 차라리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수사실이 꿈에서 나타난 거라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굳이 볼을 꼬집거나 하지 않아도 상필은 현실 속에 있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모든 게 차가웠다. 몸으로 데우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까만 책상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상필이 손으로 두드리자 텅텅 소리가 조사실 안에 울렸다. 생각보다 누가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상필은 손을 깍지꼈다가 풀었다, 조사실 안을 돌아다니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초반의 긴장도 누그러졌다. 상필이 다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을 때, 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상필의 눈에는 검은 실루엣만 보였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경찰청 마크가 찍힌 파일 더미였다. 자리에 앉았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났고 얼굴에는 팔자주름이 선명했다. 그가 상필을 보고 씩 웃었다. 안 그래도 진한 팔자주름이 더 부각되어 보였다. 너무 오래 기다렸나? 그럼 미안하고. 나는 보안과 2팀 강정식. 그냥 강 형사나 강 팀장이라고 불러요. 아까 여기까지 데려온 친구는 장 형사고. 내가 왜 소개를 하는지 알아요? 강 팀장이 갑자기 상필에게 물었다. 상필은 아니요, 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잠긴 것 같았다. 우리 한두 번 볼 것 같지는 않거든. 강 팀장이 말했다.

강 팀장은 서류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제가 뭐 때문에 여기 온 건가요? 상필이 먼저 물었다. 강 팀장이 서류를 내리고 상필을 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 정말 몰라요. 허, 요즘에는 전략이 다양하네. 강 팀장이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시 서류를 보았다. 아니 정말 몰라요. 좀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상필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상필은 정말로 알고 싶었다. 강 팀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진짜 이게 끝까지 잡아떼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줄게. 요번에 테러난 거 알지? 그거 때문에 골치가 아파. 근데 그때 살포된 전단을 쓴 사람이 너잖아. 잘됐네. 이제 니가 답해봐. 맞아, 아니야? 상필은 입을 벌린 채로 굳어 있었다. 그러다 미세하게 떨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다 상필이 입을 열었다. 시청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막 사람 붙여서 조사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이제는 강 팀장 쪽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대놓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다가도 쟁점은 결국 조사하는 사건에 대해 혐의가 있냐 아니냐를 인정하는 여부로 흘러갔다. 이렇게 모르쇠로 일관하다 다른 혐의를 늘어놓는 건 강 팀장에게는 박상필이 처음이었다. 강 팀장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실소가 나왔다. 무슨 개소리야. 뭐 신선한 혐의 부인이긴 한데, 여기 창의력 시험하러 온 거 아니잖아. 니가 썼어, 안 썼어? 이미 관련 애들이 다 불었어. 니가 썼다고. 혹시 뭐 기억상실증 그런 거 왔던 거는 아니지? 전혀요. 잘됐네. 증거 보여줄게. 그럼 좀 생각이 달라지겠지. 강 팀장이 봉투에서 종이 묶음을 꺼내 클립을 풀고 이리저리 살폈다. 종이 한 장을 중간에서 꺼냈다. 상필에게 건넸다. 어떤 전단의 복사본이었다. 상필이 건네받아 읽어보았다. 상필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분명 눈에 익은 문장이 지나가는 듯하지만 완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동화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보고는 미처 찾지 못했던 삽화나 문양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서 본 거 같아요. 낯이 익은데. 상필이 종이를 내려놓고 말했다. 그치, 기억이 나지? 강 팀장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이거 누가 줬어요? 상필이 물었다. 그걸 말해줄 수는 없지. 그건 그렇고, 그럼 니가 쓴 거 맞는 거지? 강 팀장이 자판에 손을 대고 상필을 바라보았다. 상필은 강 팀장의 표정이 너무 희망에 부풀어 있어서 차라리 예, 라고 말해버릴까 하는 충동까지도 들었다. 그냥 낯은 익은데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어요. 강 팀장이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쳤다. 아니 그걸 묻잖아. 예, 아니요로. 썼어 안 썼어. 모르겠다고요. 왜 윽박질러요? 상필도 이마를 찡그렸다. 강 팀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시 상필만 혼자 남았다. 밖 불투명한 유리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과 격한 말소리가 삐져나왔다. 잠시 뒤 강 팀장이 다시 들어왔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또 부를 거니까 재깍재깍 튀어와. 이제 용의자 신분이니까. 무슨 죄를 지어야 용의자죠. 죄 없는 사람한테 이래도 돼요? 상필이 대꾸했다. 강 팀장의 손이 어깨 위까지 올라갔다가 상필의 뺨을 쳤다. 상필은 잠시 멍하니 있다 장 형사에게서 낚아채듯 전화를 받고 빠르게 조사실을 빠져나갔다. 아오, 싸가지 없는 새끼. 하여간 정책이건 애새끼들이건 민주화랍시고 바뀌는 거치고 잘 된 거 하나도 없어. 강 팀장이 중얼거렸다. 순사질 하루 이틀 하십니까. 좀 참으십쇼. 옆에서 장 형사가 차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강 팀장이 조사실 문을 있는 힘껏 닫았다. 열쇠를 장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발뒤축부터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자기 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의자가 죽어갈 듯 끼익거렸다. 그는 그러고는 손을 깍지 끼고 눈을 감았다. 옆의 형사들은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하던 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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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상필이 사무실에 출근했다. 상필은 애써 다른 이들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누구든 눈을 마주칠 것 같았다. 다른 이들도 아는지 모르는지 상필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거나 늦었다고 핀잔 한마디라도 할 텐데, 아무 말도 없는 상황이 상필에겐 씁쓸하게 다가왔다. 점심이 가까워질 때쯤 해서야 옆자리의 김이 복사기를 왔다 갔다 하며 말을 걸었다. 뭐래요? 음?, 하고 상필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말하지 않아도 궁금해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제 말이에요, 하고 김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상해. 상필이 잠깐 생각하다 뱉었다. 난 쓴 기억도 없는 글을 나보고 썼대. 그러자 주변에서 말들이 삐져나왔다. 요새도 그런 게 있어요? 강압 수사 아닌가? 뭐 대책이 없어요? 변호사는? 상필은 잠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상필을 향하던 말들은 자기들의 수군거림이 되었고 이내 잦아들었다. 김이 나지막하게 죄송합니다, 그냥 궁금해서, 라고 말했다. 복사한 종이가 나오자마자 대충 갈무리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상필은 애써 일에 집중하려 했다. 관공서 홈페이지를 보며 특별한 사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어제는 화재가 일어나서 일가족이 죽었고. 오늘은 시의원 누군가 막말을 했고. 불현듯 상필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이런다고 사는 게 달라지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자신의 삶이 나아진 건 별로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나빠져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상필은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는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대신 사무실을 몇 바퀴 돌아다니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로 때웠다. 누구랑 대화할 필요도 없이, 컵라면처럼 수프 넣고 3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그냥 입으로 욱여넣기만 하면 요기는 가능했다. 그래서 입맛이 없을 때면 상필은 삼각김밥을 먹었다. 상필이 편의점을 나오자 상훈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대표님, 하고 상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옆으로 돌아보는지 봤는데 끝까지 안 돌아보더라. 상훈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저 밖을 보는 걸 좋아해서. 상필이 목을 만지며 시선을 회피했다. 상훈이 담뱃갑을 상필에게 건넸다. 상필은 전역한 뒤로 담배를 끊었지만, 충동적으로 한 대를 집어 들었다. 진짜 억울하냐? 상훈이 물었다. 상필이 연기를 한 모금 뱉고는 말했다. 네. 전 기억이 안 나요. 그럼 언론에 제보해. 상훈이 말했다. 네? 상필이 상훈을 돌아보았다. 내가 친한 기자 있는데, 걔한테 말해볼게. 기사 나가고 그러면 경찰들도 눈치 볼 거야. 아무리 이런 식으로 치적 쌓으려 해도 이미지 버려가면서는 못 해. 상필은 동훈의 두 손을 잡았다. 아이, 왜이래, 담뱃재 떨어진다. 잘 되면 일이나 다시 열심히 해. 상필은 담배를 던지고는 연신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진짜 감사해요. 진짜로. 됐어. 먼저 가 봐. 나중에 따로 연락할게. 동훈이 말했다. 상필은 가면서도 연신 동훈을 향해 꾸벅거렸다. 상필이 밝은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자 모두 상필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필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디 민원이라도 넣어야 하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하루에 몇백 개도 넘게 쌓이는 사연 중 한두 개나 기사화될까 싶었지만, 인터뷰한다면 무조건 신문에 실릴 수 있었다. 상필은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음을 느꼈다.

 

며칠 뒤 동훈이 인터뷰를 할 기자 명함을 건네주었고, 또 며칠 있다가 상필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상필이 물었다. 목소리 들으면 알겠지? 강 팀장의 목소리였다. 지금 시청 앞으로 와 봐. 그러고 전화는 끊겼다. 상필은 택시를 타고 시청 앞으로 향했다. 육교 근처에 강 팀장이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성이고 있었다. 상필이 택시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강 팀장이 상필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언론 같은 데 알리면 뭐 달라지는 줄 아나 봐?

강 팀장의 첫 마디였다. 상필은 놀라서 생각해 보았다. 회사에서 좀 떨어진 편의점이었고 듣는 사람도 없었다. 명함을 건넬 때도 동훈과 둘만 있는 상태였다. 상필은 혹시 명함을 바닥에 흘렸는지 불안해졌다. 지갑을 살피고 싶었지만 당장은 그럴 수도 없었다. 상필은 애써 강 팀장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처음 듣는 소린데요. 그러자 강 팀장이 코웃음을 쳤다.

경찰청에 출입하는 기자가 몇 명이나 될 거 같냐?

그제야 상필이 강 팀장의 눈을 쳐다보았다. 상필은 생각했다. 이 사람은 다 알고 왔구나. 강 팀장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떤 걸 원해, 순교자? 아니면 억울한 피해자? 뭐 그런 건 기자가 알아서 짜 주겠지만 말이야, 니가 간과하는 게 있어. 강 팀장은 그러고는 말을 잠시 끊었다. 잠시 고개를 위로 하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짐짓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마를 한 번 으쓱하고 말했다. 단서를 하나 줄게. 니가 왜 잡혔는지를. 김영수가 너한테 5월 20일에 입금한 기록이 있어. 그걸 좀 곰곰이 생각해봐. 그게 아무 문제 없다는 생각이면 한 번 언론에 떠들어 봐. 내가 너 같은 놈들 한둘 잡아넣은 줄 아냐? 증거 가지고 재판하지 어디 말만 믿고 재판하나? 너 같은 새끼들은 기사화될 가치도 없어. 그럼 또 연구해봐. 어디 도망가지는 말고. 강 팀장은 말을 끝내고는 유유히 육교 위로 올라갔다. 상필은 그대로 서 있었다. 육교를 한 반쯤 지나서 강 팀장은 상필을 바라보았다.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다시 걸어갔다. 상필은 다시 택시를 타려다 그냥 걸어가며 강 팀장의 말을 곱씹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은행에 들러 입출금 내역을 살펴보니 정말로 김영수의 이름이 있었다. 그제야 상필은 기억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동시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상필은 근처 택시를 향해 급하게 손짓했다. 영수는 상필의 대학 후배였다. 정확히 말하면 후배는 맞지만 동문은 아니었다. 상필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영수는 스스로 대학을 나왔다. 이미 대학 시절부터 영수는 학교 공부보다는 외부 활동에 열심이었다. 기업이 줄줄이 부도나고 선배들이 사원증을 받자마자 잘렸다는 소리에 학교에 있는 모두가 공포에 떨며 취업만을 목표로 삼았지만 영수는 그렇지 않았다. 가끔 상필은 영수에게 물었다. 왜 그런 데 관심을 가지냐고. 그건 이미 철 지난 일 아니냐고. 그럴 때면 영수는 그냥 제 신념이에요, 하고 말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영수가 대학에서 적을 정리하는 건 어느 정도 자명해 보였고 실제가 되었다. 사실 상필은 영수가 자퇴했는지 퇴학당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 후로는 상필은 영수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로 살았다. 그게 깨진 게 지난 4월이었다. 영수는 상필에게 갑자기 만나자고 했고, 갑자기 어떤 사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했다. 상필은 영수가 자신의 바뀐 주소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승낙했다. 어차피 상필이 하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상필은 자기 의견을 글로 써서 부쳤고 영수는 약속한 대로 돈을 보냈다. 아쉬울 때만 찾는 관계가 다 그렇듯 그러고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상필은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영수와 주고받은 메일이 보였다. 상필은 집 근처 공중전화로 갔다. 영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는 말만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메일 속 파일을 열어보았다. 그제야 상필은 왜 강 팀장이 내민 글을 기억할 수 없었는지 이해했다. 그가 보여줬던 글은 자신이 쓴 글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많이 손질된 상태였다. 사실 그 둘이 같은 글인지도 상필은 의심스러웠다. 상필은 컴퓨터를 껐다. 손을 깍지 끼고 베고 누웠다.

그럼 영수는 이미 잡혔을까? 모든 걸 실토했을까? 상필은 그것도 의심스러워졌다.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자신이 인터뷰를 통해 억울함을 표시해도 각본은 변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억울함을 폭로하는 것도 강 팀장의 계산 아래에 있는 걸까. 끝까지 인터뷰를 방해하려 했던 것을 보면 큭 계산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상필은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럼 이게 누구의 잘못일까? 멍청하게 글을 써준 나? 실토한 영수? 나를 옭아매는 강 팀장? 따지고 보면 셋은 아무 연관 관계가 없다. 각자의 일을 했을 뿐이다.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것뿐이다. 일단 상필은 새로 발견한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상필은 동훈에게는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청 관련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동훈이 걱정을 덜 것 같았다. 다음날 상필은 출근하자마자 동훈의 방으로 갔다. 굳이 출근 안 해도 되는데, 라며 동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필은 희망차게 말했다. 좋은 소식 있어요. 경찰이 왜 저를 조사하는지 알 것 같아요. 저번에 그 테러 있었잖아요. 저를 그 주동자라고 몰아가더라고요. 그거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상필은 이어 …해명하려고요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동훈은 상필이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턱을 괴고 굳은 얼굴을 하고 상필의 말을 들었다. 상필이 말을 멈춘 뒤에도 그 자세를 유지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상필은 그냥 서 있기 무안해 따라 앞의 의자에 앉았다.

왜 테러 관련이라고 말을 안 했어? 동훈이 굳은 얼굴을 한 뒤 꺼낸 첫마디였다. 상필은 동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말은 단순한 물음보다는 책망의 의미가 진했다. 왜 그러세요? 그런 이유면 내가 도와줄 수가 없겠다. 아니 왜요? 가뜩이나 폭력 사태 때문에 시끌시끌한데, 문제 있는 사람을 단체에 둘 수는 없어. 거기다가 내가 도와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사건에 우리 단체도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할 거야. 미안하지만 인터뷰는 없었던 일로 하고, 내일부터 안 나와도 돼. 동훈이 말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저 그냥 재수 없게 엮인 거예요. 확실한 증거도 있어요. 들어보세요. 상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동훈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동훈은 방을 나가려 했다. 상필은 동훈의 팔을 붙들고 있다가 동훈이 문을 열자 그만 놓쳐버렸다. 그리고 그가 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필은 다시 방문을 닫았다. 상필은 혼자 남았다. 방문을 다시 열기가 두려워졌다. 그렇게 애원하는 모습을 다른 직원들이 다 보았을 것을 생각했다. 상필은 등에서부터 땀이 났다. 문을 열면 모두가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볼 것 같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상필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문 여는 소리에 몇몇이 돌아보았지만 아예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나마 쳐다보는 이들의 눈빛에도 비웃음은 서려 있지 않았다. 그저 소리에 반응한 감각에 충실한 눈빛이었다. 상필은 그들을 애써 외면하고, 외면당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상필은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그들이 욕을 했다면, 경멸의 눈빛을 보였더라면 상필은 더 좋았을 것이다. 그들의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이제 상필과 자신이 아무런 사이가 아님을, 그게 자신에게 유리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상필은 자신이 속한 곳으로부터 튕겨져 나갔다. 이제 상필의 이름 옆에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호보다 범죄자라는 꼬리표가 더 익숙하게 될 운명이었다. 상필과 동훈의 만남은 짧지만 상필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상필은 아무것도 모를 땐 선의의 피해자였지만 정작 전말을 알게 되고선 용의자가 되었다. 상필은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며칠 뒤 상필은 언론사가 아닌 예의 경찰서의 그 컴컴한 방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강 팀장이 다리를 꼬고 상필을 훑어보았다. 상필은 며칠째 수염을 깎지 않아 턱이며 코 주변에 털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다. 살아는 있는 거지? 강 팀장이 말했다. 손을 상필 얼굴 앞에 갖다 대고 흔들었다. 상필은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왜 나한테만 그래요? 상필이 물었다. 내가 한 거 아니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끝까지 잡아떼면 어떡할래요? 뭐 그럴 수도 있지만 길게 끌어봤자 좋은 건 없어. 어차피 일이 커져 봐야 며칠 회자되고 묻히겠지. 어차피 지금도 충분히 곤란한 상황이잖아. 지금 혐의를 인정하면 내가 특별히 가볍게 처리해줄게. 그러면 서로 윈윈이잖아. 어때? 내가 너만 담당하고 있는 거도 아니야. 경찰이 얼마나 피곤한 사람들인데. 영수는 어딨어요? 만나봐야겠어요. 지금? 나도 몰라. 강 팀장이 손을 위로 들었다. 상필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애초에 영수는 잡히지도 않았던 거지? 그 미행도 당신이 시켰던 거고, 그냥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잖아. 미안하지만 어디서 그런 망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미행 같은 건 붙인 적이 없어. 나는 그냥 내 일에 충실할 뿐이야. 빨갱이 새끼들은 잡아서 실적 올리고. 이게 내 일이야.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그냥 공무를 수행할 뿐이야.

 

 

 

 

글틴에 올리는 마지막 글이네요. 이렇게 끝이 빨리 찾아올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성실하게 쓸 걸 하는 생각이 불쑥 듭니다. 글틴 덕분에 홀로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이 올려주셨던 글들이 제게는 최고의 자극제였습니다. 멘토분들의 조언 덕분에 제 글이 성장할 수 있었고요. 앞으로 글틴에 글을 올릴 수 없더라도, 여전히 글을 쓰고 글틴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disto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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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행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오른발을 딛다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발자국이 찍힌 빈 면이었다. 정석은 종이를 주웠다. 뒤집었다. 학교 교표가 옅게 찍힌 공문이었다. 정석은 계단을 내려가 학생회관 정문으로 나왔다. 매점 오른쪽 뒤 벤치로 뛰어갔다. 정석의 예상대로 편집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정석이 달려가서 편집장에게 자기 발자국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이러는 게 어딨어요? 편집장이 남은 담배를 발밑으로 던지고 밟았다. 이게 우리 신세야. 아니 이거보다 못하네. 반이라도 남았잖아. 우리는 필터도 타들어 가는 중이었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교수들이 결정한 거지. 그럼 우리는요? 몇 명만 교지편집부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만해야지. 취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 편집장은 입술을 기울여 웃어 보였다. 정석이 먼저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정석은 캠퍼스를 나왔다. 다음 수업은 오후 네 시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화가 나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저 캠퍼스 주변을 멍하니 서성거렸다. 시간이나 죽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정석을 불렀다. 두 사람이 걸어왔다. 대성과 명지였다. 오늘 뭐 하느라고 늦었어. 소식 들었냐? 대성이 물었다. 봤어. 둘이 밥 먹고 오는 길이야? 그냥 근처에서 때우고 왔어. 커피라도 마시자. 할 얘기가 많아서. 미정이 말했다. 교내 카페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옆 구내식당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뭐로? 아메리카노 차가운 거로. 얼음 넣지 말고. 정석이 답했다. 이 겨울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셔? 하긴 밖에 나가면 저절로 얼을 테니 얼음은 필요 없겠네. 명지가 비아냥거렸다. 음료만 마시던 침묵을 깬 것도 명지였다. 아니 학교에 돈이 그렇게 없어? 어떻게 50년이 넘은 학보를 폐간할 수가 있어? 명지는 열 뻗쳐서, 라고 중얼대고는 연갈색 싱글 코트를 벗어 대충 개어 옆 의자에 걸었다. 그럼 우린 다 잘린 거네. 깨끗하게. 정석이 말했다. 대성이 커피를 머금고 정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명지는 컵을 들고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아니야?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편집장 오빠랑 얘기했다며. 몇 명은 교지 동아리로 간다고 말 안 하든? 그게 나라는 거야? 그럼 누가 가겠어. 그럼 너랑 대성이는? 나도 교지 동아리로 가. 대성이는

  • distodam
  • 2019-10-31
파행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오른발을 딛다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발자국이 찍힌 빈 면이었다. 정석은 종이를 주웠다. 뒤집었다. 학교 교표가 옅게 찍힌 공문이었다. 정석은 계단을 내려가 학생회관 정문으로 나왔다. 매점 오른쪽 뒤 벤치로 뛰어갔다. 정석의 예상대로 편집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정석이 달려가서 편집장에게 자기 발자국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이러는 게 어딨어요? 편집장이 남은 담배를 발밑으로 던지고 밟았다. 이게 우리 신세야. 아니 이거보다 못하네. 반이라도 남았잖아. 우리는 필터도 타들어 가는 중이었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교수들이 결정한 거지. 그럼 우리는요? 몇 명만 교지편집부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만해야지. 취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 편집장은 입술을 기울여 웃어 보였다. 정석이 먼저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정석은 캠퍼스를 나왔다. 다음 수업은 오후 네 시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화가 나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저 캠퍼스 주변을 멍하니 서성거렸다. 시간이나 죽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정석을 불렀다. 두 사람이 걸어왔다. 대성과 명지였다. 오늘 뭐 하느라고 늦었어. 소식 들었냐? 대성이 물었다. 봤어. 둘이 밥 먹고 오는 길이야? 그냥 근처에서 때우고 왔어. 커피라도 마시자. 할 얘기가 많아서. 미정이 말했다. 교내 카페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옆 구내식당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뭐로? 아메리카노 차가운 거로. 얼음 넣지 말고. 정석이 답했다. 이 겨울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셔? 하긴 밖에 나가면 저절로 얼을 테니 얼음은 필요 없겠네. 명지가 비아냥거렸다. 음료만 마시던 침묵을 깬 것도 명지였다. 아니 학교에 돈이 그렇게 없어? 어떻게 50년이 넘은 학보를 폐간할 수가 있어? 명지는 열 뻗쳐서, 라고 중얼대고는 연갈색 싱글 코트를 벗어 대충 개어 옆 의자에 걸었다. 그럼 우린 다 잘린 거네. 깨끗하게. 정석이 말했다. 대성이 커피를 머금고 정석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명지는 컵을 들고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아니야?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편집장 오빠랑 얘기했다며. 몇 명은 교지 동아리로 간다고 말 안 하든? 그게 나라는 거야? 그럼 누가 가겠어. 그럼 너랑 대성이는? 나도 교지 동아리로 가.

  • distodam
  • 2019-08-29
운전의 기술(퇴고본)

민식은 12시간 운전대를 잡는 것보다 12시간 자는 것에 익숙해져갔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난 날부터였다. 민식은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맨발이라 신발에 뒤꿈치가 쓸리는 것도 모른 채 뛰었다. 쇠 냄새와 녹 슬은 간판들이 가까워졌다. 회사 앞에 도착한 민식의 눈에는 주차장이 보였다. 트럭들이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식은 속도를 줄이고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갔다. 3층에는 사무실이라는 글자가 박힌 유리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칸막이 너머로 사람들이 민식을 흘낏거렸다. 면식이 있는 대리가 민식에게 웃어 보였다. 연락 못 받으셨나 봐요. 민식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오늘인가요? 대리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오늘부터랍니다. 민식은 대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 뒤꿈치가 아파져 왔다. 민식은 계단에 앉아 신발을 벗어 상처를 보았다. 신발을 고쳐 신고는 그대로 앉아 생각을 반추해 보았다. 그러다가 왜 오늘 늦게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어제가 붉은 조끼와 구호, 돌고 도는 술잔, 그런 것들로 형상화되어 민식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밖으로 나와 공단이 즐비한 곳을 지나 8차선 횡단보도를 기다리면서 민식은 중얼거렸다. 파업이구나. 며칠 전부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식은 운전대를 잡은 지는 육 년이 넘었지만 트럭을 몰은 지는 일년이 조금 넘었다. 노동 강도나 그에 못 미치는 얄팍한 보상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웠다. 문제가 생긴 건 하루 이틀 미뤄지던 봉급이 석 달째 자취를 감추었을 때부터였다.  회사 사정이라며 며칠 지급이 미뤄지는 건 민식도 익숙했다. 그러나 3달은 아니었다. 사무실은 두 달을 시달린 끝에 아예 문 앞에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투의 종이를 붙여놓았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고 회사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거나 유리창을 부수고 경찰에 잡혀갔다. 퇴근길 지나가듯 던지던 말들이 진지한 대화로, 모임으로 구체화 되어갔다. 민식이 불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볼 즈음에는 모든 사항이 결정된 후였다. 어제는 확정된 결론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민식은 그 틈에 끼어 보기로 했었다. 회사에 충성한다고 내일이 보장된 일자리도 아니었다. 아저씨들 측에 붙는 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길이라고 민식은 결정했다. 그렇지만 민식은 파업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오늘부터 무직이었다. 민식은 군대 시절부터 모아둔 돈이 얼마 정도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한 몇 달은 버틸 수 있었다. 그 뒤는 장담할 수 없었다. 민식은 회사에 붙었다면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도 업계 사람들에게 밉보여 운전대도 못 잡는다면 큰 일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횡단보도 불이 켜졌다. 민식은 집 계단을 올랐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오늘은 놀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민식이 바닥에 눕자 마자 전화가 울렸다. 민식의 휴대전화는 아니었다. 민식이 사는 원룸 공동식당에 연결된 전화였다.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을 때 사용하거나 걸

  • distodam
  •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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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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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5 02:48:07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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