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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행

  • 작성자 distodam
  • 작성일 2019-08-29
  • 조회수 751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오른발을 딛다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발자국이 찍힌 빈 면이었다. 정석은 종이를 주웠다. 뒤집었다. 학교 교표가 옅게 찍힌 공문이었다.

정석은 계단을 내려가 학생회관 정문으로 나왔다. 매점 오른쪽 뒤 벤치로 뛰어갔다. 정석의 예상대로 편집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정석이 달려가서 편집장에게 자기 발자국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이러는 게 어딨어요? 편집장이 남은 담배를 발밑으로 던지고 밟았다. 이게 우리 신세야. 아니 이거보다 못하네. 반이라도 남았잖아. 우리는 필터도 타들어 가는 중이었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교수들이 결정한 거지. 그럼 우리는요? 몇 명만 교지편집부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만해야지. 취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 편집장은 입술을 기울여 웃어 보였다. 정석이 먼저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정석은 캠퍼스를 나왔다. 다음 수업은 오후 네 시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화가 나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저 캠퍼스 주변을 멍하니 서성거렸다. 시간이나 죽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정석을 불렀다. 두 사람이 걸어왔다. 대성과 명지였다. 오늘 뭐 하느라고 늦었어. 소식 들었냐? 대성이 물었다. 봤어. 둘이 밥 먹고 오는 길이야? 그냥 근처에서 때우고 왔어. 커피라도 마시자. 할 얘기가 많아서. 미정이 말했다. 교내 카페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옆 구내식당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뭐로? 아메리카노 차가운 거로. 얼음 넣지 말고. 정석이 답했다. 이 겨울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셔? 하긴 밖에 나가면 저절로 얼을 테니 얼음은 필요 없겠네. 명지가 비아냥거렸다.

음료만 마시던 침묵을 깬 것도 명지였다. 아니 학교에 돈이 그렇게 없어? 어떻게 50년이 넘은 학보를 폐간할 수가 있어? 명지는 열 뻗쳐서, 라고 중얼대고는 연갈색 싱글 코트를 벗어 대충 개어 옆 의자에 걸었다. 그럼 우린 다 잘린 거네. 깨끗하게. 정석이 말했다. 대성이 커피를 머금고 정석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명지는 컵을 들고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아니야?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편집장 오빠랑 얘기했다며. 몇 명은 교지 동아리로 간다고 말 안 하든? 그게 나라는 거야? 그럼 누가 가겠어. 그럼 너랑 대성이는? 나도 교지 동아리로 가. 대성이는 아니고. 정석이 대성을 바라보았다. 대성은 슬쩍 어깨를 들어 올렸다. 이제 나는 미련 없다. 군대나 가려고. 대성은 컵을 비웠다. 휴대폰 줘봐. 명지가 말했다. 명지가 정석의 전화를 받아서 뭔가를 눌렀다. 정석에게 건넸다. 교지 편집장 번호야. 무슨 편집장? 정석의 말을 듣고 명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편집장이 그 두 명 말고 더 있어? 며칠 뒤 명지가 주었던 번호로부터 정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앳된 목소리였다. 새 편집장은 정석이 어떻게 그의 번호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정석은 지금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음을 깨달았다. 교지 편집장은 2주에 한 번 회의가 있고, 그때마다 아이템을 모아서 계절마다 잡지를 발행한다고 했다. 정석은 학보를 만들 때를 떠올렸다. 신입생들은 학보가 학주 비슷한 건 줄 알고 있었다. 그보다 좀 나이 많은 이들은 공짜 종이를 슬기롭게 사용할 줄 알았다. 화장실이 급할 때 혹은 학교 그늘에서 소주를 깔 때 돗자리가 필요할 때. 정석은 그들을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조차도 그런 방식으로 종이를 사용한 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정석은 차라리 그렇게 사용될 종이라면 대신 교내 곳곳에 돗자리를 대여해주거나 화장실에 휴지를 확충하는 게 더 나을 거로 생각했다. 교지는 그나마 대접이 나은 편이었다. 얼마 뒤 대성은 머리를 깎고 홀연히 입대한 듯 사라졌고 정석은 시험을 치르며 종강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정석은 강의가 끝나고 방학만 기다리다 편집회의가 이틀 뒤라는 걸 깨달았다. 여태까지 네 번 중 절반은 빼먹었고 당장 저번 회의도 인턴 면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던 그였다. 마침 전화가 왔다. 교지 편집장이었다. 정석아, 면접은 잘 봤어? 아니요. 떨어진 것 같아요. 정석은 속으로 가본 적도 없는 면접장 분위기를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고민했다. 근래에 어떤 면접 공고가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음, 그래 그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고, 다음 회의는 올 수 있지? 방학 동안에는 회의를 안 하고 대신 중요한 건 이번 회의에서 다 짜 놓을 거야. 여름 호 준비해야지. 아 그럼 당연히 가야죠. 그때 봐요. 그래. 편집장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석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위안이었다. 지금 거짓말을 한다면 나중에 어떤 눈덩이로 커져 굴러올지 모를 테니까. 며칠 뒤 정석은 회의실로 갔다. 정석은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3층 학보사가 있던 곳 문고리를 돌렸다. 굳게 잠겨있었다. 실소했다. 2층으로 가니 찾을 필요도 없이 회의실이 보였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었고 편집장만이 문소리에 정석 방향을 쳐다보고는 눈인사를 했다. 직접 여기까지 와서 맞아주기에 그는 바빠 보였다. 그가 말을 꺼낼라 치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모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문이 열렸다. 정석은 문 근처라 찬 공기가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명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토끼 눈을 한 거로 보아 모두 와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편집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왔어? 처음이라 찾기 힘들었구나. 애들아, 이번에 학보사가 폐간하면서 쓸만한 친구들은 우리 교지부에서 스카우트해왔어. 저기는 허명지, 여기는 김정석. 명지는 그대로 서 있었다. 정석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다. 명지는 아주 대꾸도 하지 않고 젖혀져 있던 간이 의자를 들고 와서 정석 옆에 앉았다. 너도 처음 온 거냐고 정석이 조용하게 물었다. 명지는 어, 라고만 말했다.

회의는 따분하게 흘러갔다. 얼마를 썼는지 회계가 이어졌고 지난봄에 낸 잡지가 어떤 반응을 얻고 있는지에 대한 장황한 분석이 이어졌다. 정석도 열심히 필기하고 대화에 끼어 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참여하지도 않은 잡지 분석은 남의 얘기였다. 명지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자고 있었다. 부원들의 시선이 보이면 정석은 명지를 건드려 깨웠지만 명지는 눈알을 부라리고는 다시 자세를 유지했다. 정석도 지쳐 졸고 있을 때 누군가 그를 툭툭 쳐 깨웠다. 편집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명지도 깨어 있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거. 이제 여름호 준비하려면 본격적으로 기사를 준비해야 해. 다음 주는 회의가 없고 다다음주에 회의가 있을 거야. 그때까지 전부 다음 잡지에 실을 글 초안은 준비해 와야 해. 2명이 한 조로 움직이고. 조는 자유롭게 짜고 대신 나한테 전부 보고하고. 이상. 2주 있다가 보자. 그때까지 준비 안 해오면 벌금 있는 거 잊지 마. 편집장의 말이 끝나자 서로 조를 짠다고 부원들이 움직이며 웅성거렸다. 그러다 저마다 몇 명씩 모이고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정석은 명지를 부르려 했지만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니 편집장과 명지가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편집장은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고 명지는 담배를 꼬나물고 응시했다. 정석은 잠깐 주저하다가 그대로 계단으로 내려갔다. 야 김정석, 하고 명지가 앙칼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명지가 뛰어와서 정석의 팔짱을 꼈다. 정석과 편집장의 눈이 마주쳤다.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일단 내려가. 명지가 말했다. 정석은 담배 냄새가 옷에 배지 않을까 걱정했다. 편집장의 떨리던 동공을 생각했다. 명지는 학생회관을 나와서야 정석의 팔을 풀었다. 정석은 오른팔 부분을 훔쳐 냄새를 빼려 했다. 그리고 말했다. 정신 나갔냐? 아침부터 술 마셨어? 명지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저 자식이 귀찮게 굴잖아. 이미 끝난 사인데. 너 저 사람이랑 사귀었어? 언제? 명지가 정석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너 진짜 둔하구나. 야, 내가 어떻게 본 적도 없는 편집장 번호를 알고 있겠냐? 정석이 그제야 고개를 조금씩 끄덕였다. 아까는 무슨 일인데 그런 거야? 자기랑 팀 짜서 하재. 옛날 생각난다고. 지랄. 지금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명지가 도리질을 했다. 불 있냐? 여기. 정석이 라이터를 건넸다. 명지가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돌려주고는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담배는 안 피우면서 불은 항상 들고 다닌다? 생존용 뭐 그런 거야? 선배들한테 사랑받는 비법이지. 정석이 말했다. 따지고 보면 생존을 위한 거 맞네, 그럼. 둘은 웃었다.

정석은 가방 지퍼를 잠갔다. 마지막으로 방을 한 번 둘러보고 주머니를 더듬어 지갑과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올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정석은 터미널로 갔다. 고향 이름이 적힌 표를 샀다. 경기도 끄트머리, 서울 근처라지만 그 이름이 무색하게 서울과는 너무 떨어져 있고 낙후된 곳. 정석이 도착했다. 그곳에 머무는 친구들을 만나고 잔을 기울이는 것도 며칠이면 끝날 일이다. 눈이 쌓여갈수록 정석의 권태도 깊어갔다. 한 번 얼굴을 본 이들은 이제 올해 안에는 볼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눈이 녹고 다시 눈이 내리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로 위하고 잔을 기울이는 짓을 반복할 게 분명했다. 정석은 서울로 돌아가는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이내 관두었다. 몇 시간 후면 새해였다. 광장에서부터 차가 꽉 막히고 사람들로 붐빌 게 자명했다. 혼자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정석은 너무 권태로웠고 우울했다. 새해가 오고 해가 세 번 바뀌었지만, 정석은 굳이 집 밖으로 나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새해라고 들어오는 전화와 문자에 답하고 성실하게 답장을 쓸 뿐이었다. 군대에 간 대성이 떠올랐다. 누군가 연락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대성이었다. 정석은 전화를 꺼냈다. 대성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군대 생활할 만하냐? 군대? 대성이 소리 나게 웃었다. 나 군대 아니야. 탈영이라도 했냐? 나 자취방 비었는데 거기서 잠시 살어 그러면. 탈영은 무슨, 군대에 가야 탈영을 하지. 그럼 군대에 안 갔다고? 그때 실컷 배웅까지 했잖아. 그러면 할 얘기가 많아지는데, 그냥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 어때? 그래 그럼. 내가 서울 올라갈까? 아니. 너 고향에 국수 유명하다며. 그럼 거기서 보자. 정석은 외투를 꺼냈다. 옅게 먼지가 이는 바람에 잠깐 재채기가 났다. 정석과 대성이 만나기로 한 곳은 고정석의 보잘것없는 고향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유명한 관광 가이드북의 추천 표시인 별을 받은 곳이기도 했다. 정석은 은행에서 아무 잡지나 뒤지다가 익숙한 이름에 페이지를 펼쳤었다. 별 하나와 함께 전통과 지역의 특색을 살린 한국적인 조화 운운하는 평가가 적혀있었던 것 같았다. 대성은 머리가 조금 길어졌다. 영락없는 휴가 나온 군인 차림새였다. 국숫집은 메뉴가 딱 하나였기에 뭘 시킬 필요가 없었다. 정석과 대성이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종이를 두 번 체크하고 가져갔다. 새해라 관광객들 많을 줄 알았더니 없네. 작년에는 되게 붐볐는데. 바보야, 작년에 제일 많았지. 그때 뭔 별인가 땄다고. 내가 여기 수도 없이 왔어. 정석이 말했다. 하긴. 국수만 먹으러 관광을 오는 사람은 없지. 대성이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가게에는 노인 하나만 앉아 있었고 그마저도 국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노인은 근처에 사는 듯 보였다. 널찍한 등산바지와 유광 패딩 사이로 내복이 언뜻 보였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러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왜 안 알렸어? 그냥. 부끄럽잖아. 그렇게 찐하게 배웅받고 갔는데. 훈련소에 들어갔는데 내 이름을 안 부르더라고. 그래서 조교한테 물어봤는데 이름이 누락됐데. 뭐 그런 일이 있나 싶었는데,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하더라. 나중에 병무청에서 연락 왔어. 뭐 한 일주일? 그쯤 있다 다시 갈 거야. 어떡하냐. 갈 때 연락해. 나한테는 쪽팔린 거 아니니까. 그래야지. 그러고는 둘은 딱히 할 말이 없어 물만 마셨다. 아무도 없는데 주문이 밀린 듯 국수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석은 노인을 관찰하며 시간을 죽였다. 노인의 젖은 듯 쭈그러진 손, 힘겹게 국물을 넘기는 목울대, 추운 길을 걸어온 데 대한 역치로 열이 오르는 빨간 발, 노인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쿵 소리가 났지만 일반적인 속도로 인한 소리는 아니었다. 주방에 있는 사람들과, 정 반대를 바라보고 앉았던 대성마저도 뒤돌아 쳐다볼 정도였다. 노인이 오천 원 하나를 패딩 주머니에서 던졌다. 이거이 국수가 아니야! 니남 국수는 이거이 아니야.  팔랑거리는 지폐를 뒤로하고 노인은 비틀거리면서 나갔다. 그릇 소리에 놀라 홀까지 뛰어온 사장 할머니는 잘 처묵고 지랄은, 하고는 지폐를 주워 주방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말대로 그릇은 국물 한 모금 없이 깔끔했다. 별 이상한 사람 다 있네. 정석이 말했다. 대성을 보았다. 대성은 정석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한 영감이라도 받은 얼굴이었다. 국수를 먹으면서도 대성은 내내 그 표정이었다. 자리를 옮겨서 정석이 대성 잔에 소주를 따를 때까지도 그랬다. 정석이 말했다. 뭔데? 뭐 전 애인이라도 연락이 왔어? 아, 그건 아닌데,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어. 빨리 명지 불러봐. 명지? 명지는 왜? 너희 교지 조사 관련된 거야. 그전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빨리 불러봐.  정석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명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으세여, 하는 명지의 발음은 이미 반쯤 혀가 꼬여 있었다. 아, 나 정석인데, 빨리 올 수 있어? 여기 내 고향 근처인데. 어! 나 어딘지 알아. 마침 그쪽 근처인데. 어떻게? 아무튼, 빨리 와봐. 정석은 자기만 알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고 느꼈다.

정석, 대성, 명지는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대성이 말했다. 들어봐. 너희 냉면을 이북에선 국수라고 하는 거 알지? 겨우 그거 때문이야? 정석이 말을 잘랐다. 아니, 그러면 쟤까지 왜 불렀어? 들어봐. 남쪽에도 냉면이 있다고. 내 고향 근처에 비슷한 거 복원해놓기는 했는데, 뭐 625다 뭐다 하면서 전부 망해버려서 그 원전은 못 찾는단 말이야. 그걸 찾자고. 미친 새끼. 명지가 중얼거렸다. 복원도 완전하게 못했다며? 전문가들도 못 한걸 대학생 둘이서 일주일 만에 찾으라고? 심지어는 연고도 없는 곳에서? 갈래. 명지가 일어섰다.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바닥을 긁었다. 술집 안 모두가 일행을 주목하고 있었다. 대성이 몸까지 뻗어 명지 팔목을 붙잡았다.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나도 같이 갈게. 나 그쪽 출신이라고 했잖아. 그래. 마땅한 주제 없으면 얘 군대 가기 전에 여행 한 번 하는 셈 치자. 명지가 자리에 앉았다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대성에게 삿대질했다. 그러고 보니 왜 여기 있어? 탈영병이야?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정석은 짐을 챙겼다. 어젯밤 찾아놓은 정보를 인쇄해놓은 프린트 몇 장, 갈아입을 옷가지 등등을 쑤셔놓은 배낭 하나. 그 옆에 휴대용 침낭이 놓여있었다. 정석의 부모님이 혹시 모른다며 굳이 정석의 짐 옆에 끼워놓은 것이었다. 정석은 배낭을 멨다. 잠시 주저하다가 침낭 가방을 들었다. 만나기로 한 곳에 가니 명지만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버스터미널 멀어? 꽤 멀지. 시내버스도 바로 가는 거 없어. 워낙 시골이라. 그러면 왜 강대성 이 새끼는 여기 모이자고 한 거야? 명지가 툴툴거렸다. 다마스 한 대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대성이었다. 이거 고속도로는 탈 수 있어? 정석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가봐야지. 평일이잖아. 대성이 웃었다. 이래 봬도 우리 아버지가 이거 타고 전국을 누비셨어. 그래서 더 불안해. 명지가 쏘아붙였다. 명지가 조수석에 타고 정석은 뒷좌석에 짐과 함께 앉았다. 차 안은 흙냄새와 페브리즈가 섞인 냄새가 났다. 차량용 페브리즈가 달리지 않은 거로 보아 여기 오기 전 대성이 급하게 뿌린 것 같았다. 뒤쪽 짐칸에는 바랜 과일과 채소 상자가 있었다. 흙도 조금씩 뿌려져 있었다. 정석 생각엔 저게 흙내음의 원인인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 위 거울에는 제법 알이 두꺼운 염주가 달려 있었다. 밑 기어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꽤 독실하신가 봐? 정석이 물었다. 차에 생계를 맡기면 그렇게 되지. 대성이 답했다. 내비게이션을 켰다. 몇 시간 걸려? 명지가 물었다. 아마 다섯 시간쯤? 국도로 가면 여섯 시간 반이고. 꽤 멀어. 중간에 휴게소 들러야겠네.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대성이 말했다. 다마스는 나들목을 넘어 교외로 향했다. 속도제한 100 표지판이 보였다. 평일이라 자가용은 드물었지만 트럭들이 빈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트럭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다마스는 덜컹거렸다. 경기도를 벗어날 때쯤 대성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경로를 재지정했다. 창백한 얼굴로 명지와 정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 되겠다. 여기로 가다간 차 뒤집어지겠어. 정석은 속으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80 킬로미터 제한을 준수하며 국도로 갔다. 산과 마을만 드문드문 보일 뿐 차는 보이지 않았다. 산맥 쪽이네. 대성이 중얼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이 지나갔다. 높이 세운 고장을 알리는 팻말은 약초 아니면 농수산물을 내세웠다. 정석은 처음 몇 개는 유심히 보았지만 이내 싫증이 났다. 눈코입 달린 과일이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들만 겹쳤다.

명지는 창문을 열었다. 히터를 세게 틀어서인지 찬바람이 되레 반가웠다. 대성이 춥다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명지는 무시했다. 귀가 조금 시려와서 묶고 있던 머리를 풀고 고무줄을 왼쪽 팔목에 끼워놓았다. 갈색 머리칼이 눈썹이며 턱을 찔러댔다. 귀신 같아 보여. 정석이 말했다. 차라리 귀신이나 되라지. 명지가 중얼거렸다. 아직 반도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여정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냥 편집장과 조를 이룰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잠적하면 알아서 해오겠지.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이 꼴 보기 싫었고 최대한으로 고통을 주고 싶었다. 적어도 사라지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명지는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지루함을 합리화하고 싶었다.

휴게소에 도착한 건 세 시간이 지난 오후 5시였다. 차에 음식 냄새 나는 건 질색이거든. 명지가 식당 메뉴판으로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메뉴판은 빼곡했지만 정작 주문 가능한 메뉴는 우동과 육개장뿐이었다. 우동 세 개를 시켰다. 밀가루 씹는 단맛이 진한 싸구려 우동이었다. 대성은 겨우 국물까지 들이켰지만, 명지와 정석은 면마저 남겼다. 휴게소 오른쪽 귀퉁이에 편의점이 있었다. 셋은 편의점 책상에 인스턴트 닭 다리, 땅콩 과자, 맥주 몇 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잠깐. 명지가 말했다. 그럼 누가 운전할 거야?  내가 운전할게. 지금까지 대성이가 했으니깐. 정석이 말했다. 아니, 너 밥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요기라도 해야지. 대성이 말했다. 정석은 입술을 한 번 다시고는 맥주캔을 땄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인지 아무것도 내키지 않았다. 반면 명지는 맹렬한 속도로 액체며 고체를 빨아들였다. 이제 두 시간 남았나? 정석이 대성에게 물었다. 그런 셈이지. 좀 천천히 출발하자. 눈 좀 붙이고. 해져도 오늘 안에만 도착하면 돼. 그래, 서두를 건 없지. 정석은 노트를 꺼냈다. 옆에 끼워놓은 볼펜을 잡았다. 뭐 하는 건데? 대성이 물었다. 그냥, 기록해놓으려고. 여정 자체가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에이, 패기 없게. 우리가 밝혀내는 거야. 흥분되지 않아? 전혀. 왜 네가 난리인지 모르겠다. 정석이 몇 자 휘갈기고 노트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그렇고, 도착하면 어떻게 할 거야? 특별한 계획 있어? 있지. 대성이 가방에서 얇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기사 스크랩한 건데, 여기 보면 대충 필요한 정보는 다 있더라. 집은 어디인지 아는 거야? 무슨 연구소인가 한다던데. 그런데 전화가 없대. 그냥 찾아가 보자. 정석이 종이를 건네받았다. 이건 내가 좀 읽어볼게. 가방 노트 옆에 끼워 넣었다. 명지는 그 사이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 있었다. 몸을 뒤척이니 맥주와 포장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석이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석은 명지를 조심스레 업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대성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정석이 패대기치듯 명지를 밀어 넣었다. 일행이 휴게소에 도착할 즈음 해가 산봉우리에 걸려 있었고, 이제는 해는 보이지 않고 하늘만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애써 밤이 되기를 거부하는 듯했지만, 십 분도 지나지 않아 하늘은 다시 검게 물들었다. 바람도 보조를 맞추어 불어왔다. 대성과 정석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비볐다. 차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며 작은 한기가 끼쳤다. 시동을 꺼놓아서 시트까지 얼어붙어 있었다. 정석은 짐 틈바구니에서 침낭 가방을 꺼냈다. 침낭 지퍼를 열어 이불처럼 만들었다. 대성은 깔고 있던 담요를 펴서 몸에 덮었다. 히터가 차 안에 퍼졌다. 눈꺼풀이 통제를 벗어남을 느꼈다.

명지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텁텁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슬라이드를 옆으로 밀어 히터 창을 닫고 차 문을 살짝 열었다. 술을 마신 데다 히터까지 직방으로 맞으니 목이 부은 느낌이었다. 갈증이 솟았다. 컵홀더에 한입 양의 생수가 있었다. 곧바로 입에 넣었다. 목이 찌르는 듯하면서 단맛이 감돌았다. 휴게소는 편의점과 화장실 정도 빼고는 불이 꺼져 반쯤은 어두웠다. 휴대전화를 보니 오후 열 시였고 전화가 몇 통 들어와 있었다. 명지는 알림 지움을 눌렀다. 다시 전화가 왔다.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명지가 아는 번호였다. 명지는 조심스레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왜 전화하는데? 잘 지냈어? 알 거 없잖아. 그냥 잘 지내나 해서. 다음 주에 얼굴은 비출 거지? 탈퇴하려고. 그런 식으로 구는 거 노골적이고 역겨워. 에이, 적어도 다음 주는 아니잖아, 나가더라도. 그냥 물어보는 건데, 정석이랑 같이 있는 건 아니지? 명지는 전화를 끊었다. 주머니에 라이터가 만져졌다.

정석아, 트렁크에 생수 한 병만 꺼내 봐. 대성이 하품했다. 정석이 트렁크를 보니 6개들이 생수가 포장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톱으로 비닐을 찢고 하나를 꺼내 그대로 들이켰다. 대성이 건네받았다. 명지가 들어왔다. 남은 물을 비웠다. 대성이 시동을 걸었다. 휴게소에서 시동이 켜진 차는 그들의 다마스 한 대뿐이었다.

주변에 가로등 하나가 없었다. 대성은 안개등을 켰다. 속도며 거리 표지판이 빛을 반사했다. 야생동물 주의 표지판도 보였다. 야생동물에 들이받으면 이 차 뒤집어지겠지? 정석이 중얼거렸다. 이거 에어백 없어. 대성이 말했다. 안개등 달고 에어백은 못 달았대, 아버지가. 우린 목숨을 내놓은 거지.

조금 더 가니 산청 30km 표지판이 보였다. 예상 시간보다 30분 정도 빨랐다. 도로에 아무도 없던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기어가 부러지는 그 사건이 발생했다. 밤 11시였다. 대성이 국도 코너를 돌다가 빠직, 하는 소리를 낼 때였다. 산 너머에 가스등 불빛이 은은한 것 빼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기어 부서졌는데. 대성이 반의반도 자라다 만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해? 우리 죽는 거야? 명지가 울부짖었다. 정신 나간 거도 아니고 왜 이래? 정석이 짜증을 냈다. 명지는 고개를 숙이더니 울기 시작했다. 아까는 멀쩡하더니 왜 갑자기 저래? 정석이 말했다. 술버릇인가 봐. 놔두자. 기어가 망가진 차를 운전하는 대성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사건이 생기기 몇 분 전, 정석은 목적지까지 30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리산 자락이라 동물도 튀어나오고 안개도 많다고 대성이 경고하고 안개등을 켜고 달렸다. 하지만 겨울이라 안개마저 말라버린 것 같았다. 정석은 창문을 열었다. 가습기 냄새가 났다. 명지는 조수석을 끌어안고 예전 남자친구 이름을 불렀다. 대성이 여기다, 하고 3차선 국도 옆 일방통행 우회전로로 들어갈 무렵 헤드라이트가 꺼지고 어둠만 남았다. 대성이 급하게 핸드브레이크를 잡았다. 정석이 물었다. 이 차 오토 아니야? 대성이 답했다. 오토면 기어가 왜 부러지겠어? 차는 가드레일에 살짝 닿으면서 멈췄다. 명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그 난리를 부리다가 유리에 머리를 찧었다. 그리고는 적막뿐이었다. 정석도 대성도 명지도 말을 아꼈다. 조금 있으니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정석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여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차는 못 쓰겠는데. 최소한 수리는 맡겨야 돼. 견인을 하던지. 지금 보험도 안 될걸. 대성이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하루 묵자. 침낭 가져왔지? 혹시나 했는데, 안 들고 왔으면 어쩔 뻔했어? 정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성이 삼각대를 꺼내 차 뒤쪽에 세워놓았다. 정석이 텐트를 폈다. 명지는 차 안에 재워두자. 내가 텐트 가져왔으니까 대성이 네가 텐트에서 자는 거로 하고. 그런 게 어딨어? 그럼 그냥 밖에서 자던지. 정석은 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쌓아놓은 짐을 헤쳐 평평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 보험을 불렀고 다마스는 견인차가 끌고 서울로 가버렸다. 정석과 대성과 명지는 짐을 들고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대성이 앞서 걷고 정석과 명지가 뒤를 따랐다. 흙길 밑으로 얕은 물이 흐르고 앞으로는 함석지붕을 씌운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자료 줘봐. 정석이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대성에게 건넸다. 사진 속 눈꼬리가 길게 늘어진 박칠두 옹은 개량한복을 입고 웃고 있었다. 도로 갓길에서 빠져서 논 사이 비포장길로 내려왔다. 차 한 대라도 온다면 논두렁 밑으로 내려가서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논은 바둑판처럼 정사각형이었고 길도 끝없는 직선이었다. 흙길을 벗어나니 자갈을 섞은 시멘트로 포장해놓은 길이 나타났다. 인가도 보였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도 파란 새 주소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대성은 코를 박고 지도를 쳐다보았다. 번지수가 안 나와. 일일이 살펴보는 수밖에 없어. 셋은 흩어져 주소를 찾았다. 세 갈림길에서 정석은 중앙으로 나아갔다. 정초면 원자리 47, 48, 49, 42. 갑자기 42번지가 나왔다. 순서대로라면 50번지가 나왔어야 했다. 여기야. 명지 목소리가 들렸다. 정석이 왔던 길을 돌아 나와서 명지가 갔던 중앙으로 갔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단층 가옥이 있었다. 기와와 마루가 있었지만 한옥이라고 하기에는 묘한 구조였다. 파란색 스티커에 크게 50이 보였다.

박 노인은 자주색 바지에 황토색 개량한복 윗도리 차림이었다. 그가 일행을 안내한 건 서재였는데, 그가 평생 모은 듯한 책들이 사방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정석은 지진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집은 내진설계가 되어있다네. 그리고 나는 서재에서 잠은 안 잔다네. 박칠두 옹이 말했다. 명지의 고개가 왼쪽으로 반쯤 꺾였다 돌아왔다. 이쪽 사람이 아니신 가봐요? 성저십리 토박이라네. 여생은 여기서 보내고 싶어서 왔지. 명지가 대성을 쳐다보았다. 대성은 오래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용건이 뭔가? 천천히 말하게. 은퇴하면 남는 게 시간이야. 새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순간이 소중해져. 노인은 껄껄 웃었다. 그 선생님이 쓰신 글 중에, 강주 냉면에 대해 쓰신 거 말입니다. 정석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언제나 그게 나를 찾는 이유지. 웬만한 건 언론에 다 말했는데. 아직 모르는 게 있나? 정석이 침을 한 번 삼켰다. 노인의 눈을 응시했다. 노인은 시간에 절여졌고 피부는 늘어졌다. 젊은 시절에도 눈매는 쳐졌었지만 이제는 입가에 닿을 듯했다. 정석은 사진과 지금 앞에 있는 얼굴을 겹쳐보았다. 진짜 강주 냉면은 어디 있는지, 복원은 가능한지 묻고 싶습니다. 솔직하게 답변해주십시오. 진실을 원하나? 노인이 물었다. 원합니다. 명지가 말했다. 거짓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진실이야. 자네 생각보다 진실은 보잘것없다네. 그게 사람들이 거짓을 만들어내는 이유지. 현실은 하잘것없으니. 정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가 대성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대로 밖으로 끌고 갔다. 마당에 와서야 정석이 주위를 살피고 대성의 목을 놓았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서울 올라가면 다 얘기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 대성이 바닥을 보며 말했다.

명지는 둘이 나간 사이 노인과 그대로 마주 보고 있었다. 자네들도 여기 사람이 아닌가 보구만. 서울에서 왔나? 그쯤에서 출발했죠. 두 사람은 실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미안하네. 나도 가진 정보가 없다네. 그래도 간만에 젊은 사람들을 보니 반갑구먼. 노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명지는 그럼, 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정석과 대성은 마당에 있었다. 돌아가자. 정석이 말했다. 이 개새끼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어.

정석은 택시에서 내렸다. 목적지를 훈련소라 말한 탓인지 지나치게 빙빙 돈 것 같았다. 비슷한 까까머리와 모자들보다 밝은 갈색 머리의 명지가 눈에 띄었다. 명지는 바로 앞 횡단보도에 있었다. 명지가 건너 정석 쪽으로 왔다. 그날 이후로 연락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결국 왔구나. 정석은 애써 대꾸하기보다는 턱만 살짝 흔들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갔던 때를 떠올렸다. 정석은 자취방 문을 열었다. 방바닥이 차가웠다. 숨을 들이쉬면 한기와 먼지 냄새가 느껴졌다. 짐은 던져놓고 노트북과 문서프로그램을 켰다. 던져놓은 가방을 다시 들고 와서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도착하기 전까지를 대충 기록해놓았던 노트를 꺼냈다. 정석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들어 자판을 네 번 두드리고 문단을 띄웠다. 다시 키보드를 누르기 전 장문의 문자가 왔다. 대충 명지에게는 알리지 말고 자기 입대 날 만나자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명지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걸까. 정석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명지를 달가워하지 않는 게 티가 날 게 뻔했다. 그저 아무 말 하지 않고 목을 빼 대성을 찾았다. 똑같이 생긴 사람들 속에서 대성이라는 존재는 휩쓸린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전화를 걸었더니 근처 카페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고 대성은 말했다.

미안. 여기 있다고 말하는 걸 깜박했네. 대성이 그사이 깎은 머리를 한번 훑었다. 과제 얘기, 선배 흉, 싸가지 없는 후배 이야기 같은 잡담이 오갔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하고 명지가 말했다. 유리창 너머로 담배를 무는 명지가 보였다. 나 화장실 좀, 하고 정석도 일어섰다. 대성이 팔을 잡고 앉혔다. 명지는 왜 데려왔어? 내가 데려온 거 아니야. 와보니까 근처에 있던걸. 그럴 거면 명지한테는 왜 알리지 말라고 했어? 따로따로 만나서 얘기하려 했지. 일단 들어봐. 대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콩알만큼 남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이켰다. 일단 미안해. 사실 그 말도 안 되는 여행 내가 생각한 거 아니야. 술 취해서 꼬장 부린거도 아니야. 편집장이… 대성이 입술을 한 번 핥았다. 편집장이 뭐? …시켰어. 우리 과 선배인데, 너하고 명지하고 과제 하는 거 감시하라고 하더라고. 그런다고 바보같이 그걸 해? 넌 자존심도 없냐? 나 명지랑 아무 사이 아닌 거 너도 알면서. 그럼 너도 알잖아. 나 학보사 다니면서 장학금 받았던 거. 시키는 대로만 하면 교지동아리로 들어가고 장학금도 주겠다고 했어. 나 좀 이해해주라. 명지가 두 번째 담배를 꺼내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정석이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하나만 묻자. 지금 이건 진짜냐? 조금 있다 저 문 안으로 들어가는 건 확실해?

갈데없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흘러 들어갔다. 그곳이 카페든, 바가지 씌우는 음식점이든, 1시간에 3,500원을 받는 pc방이든. 사람들은 사라지고 나타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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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두

상필은 메모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김 주임이었다. 한 손에 조끼를 벗어 들고 한쪽 팔엔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상필은 메모지만 들고 있는 게 민망해서 아무 펜이나 잡아들었다. 급하게 뭔가를 쓰는 척했지만 메모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빳빳한 질감에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나서야 상필은 조심스레 볼펜을 노크했다. 그사이 김 주임은 조끼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거울을 보았다. 상필에게 말했다. 박 간사님, 퇴근 안 하세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열쇠 놓고 가. 상필이 말했다. 김 주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에 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또 쿵 닫혔다. 상필이 펜을 집어 던졌다. 외투를 입었다. 창문 블라인드를 들춰 김 주임이 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음속으로 수를 아홉 쯤 세고 책상의 열쇠를 집었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2층 계단을 내려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열려있던 사람들의 외투 지퍼는 오늘은 굳게 잠겨있었다. 상필도 유리문을 나서기 전 외투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아까 김이 가던 방향을 보았다. 움직이는 머리들 사이로 김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상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보폭을 넓혔다. 아직은 상필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갑자기 김이 멈춰서 누군가와 인사했다. 김 주임의 웃는 옆얼굴이 보였다. 그러고는 한참을 그는 얘기하며 걸어갔다. 자연스레 걷는 속도도 느려졌다. 상필은 마음이 쿵쿵대면서도 걷는 속도를 줄이는 게 고역이었다. 차들은 도로를 사람은 인도를 메웠다. 행인들을 신경 쓰면서 김을 놓치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김이 방향을 틀었다. 상필은 가슴이 더 빨리 뛰면서 입이 마르는 걸 느꼈다. 이거라면 뭔가 단서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빠르게 걸었다. 근처 지하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길거리를 점령했다. 상필은 팔을 움츠리고 돌진하다시피 했다. 드디어 모퉁이였다. 큰길은 사람들이 꽉 메우고 있었지만 골목길로 가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중에 김은 없었다. 상필은 걷는 것도 까먹고 멈춰 섰다. 그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눈을 마주친 대부분은 동공에 초점이 없거나 의심하는 눈초리일 뿐이었다. 상필은 머리며 목을 쭉 뺐다. 그래도 김 주임은 보이지 않았다. 상필은 터덜거리며 낮은 언덕길을 올랐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별생각 없이 문고리에 집어넣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열쇠를 뒤집었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상필은 열쇠를 살폈다. 몸통에 견착지가 붙어있었다. 2층 사무실. 씨발. 내일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할 생각에 상필은 욕을 뱉었다. 다시 주머니를 뒤져 집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기는 건 적막이었다. 현관 등만 알아서 켜졌다. 문득 상필은 현관에 놓인 슬리퍼가 조금 틀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집안에 뭔가 바뀐 게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뚜렷하게 찾을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래도 상필은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리겠다는 생각도 했다. 상필의 의심

  • distodam
  • 2019-12-31
파행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오른발을 딛다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발자국이 찍힌 빈 면이었다. 정석은 종이를 주웠다. 뒤집었다. 학교 교표가 옅게 찍힌 공문이었다. 정석은 계단을 내려가 학생회관 정문으로 나왔다. 매점 오른쪽 뒤 벤치로 뛰어갔다. 정석의 예상대로 편집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정석이 달려가서 편집장에게 자기 발자국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이러는 게 어딨어요? 편집장이 남은 담배를 발밑으로 던지고 밟았다. 이게 우리 신세야. 아니 이거보다 못하네. 반이라도 남았잖아. 우리는 필터도 타들어 가는 중이었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교수들이 결정한 거지. 그럼 우리는요? 몇 명만 교지편집부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만해야지. 취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 편집장은 입술을 기울여 웃어 보였다. 정석이 먼저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정석은 캠퍼스를 나왔다. 다음 수업은 오후 네 시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화가 나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저 캠퍼스 주변을 멍하니 서성거렸다. 시간이나 죽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정석을 불렀다. 두 사람이 걸어왔다. 대성과 명지였다. 오늘 뭐 하느라고 늦었어. 소식 들었냐? 대성이 물었다. 봤어. 둘이 밥 먹고 오는 길이야? 그냥 근처에서 때우고 왔어. 커피라도 마시자. 할 얘기가 많아서. 미정이 말했다. 교내 카페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옆 구내식당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뭐로? 아메리카노 차가운 거로. 얼음 넣지 말고. 정석이 답했다. 이 겨울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셔? 하긴 밖에 나가면 저절로 얼을 테니 얼음은 필요 없겠네. 명지가 비아냥거렸다. 음료만 마시던 침묵을 깬 것도 명지였다. 아니 학교에 돈이 그렇게 없어? 어떻게 50년이 넘은 학보를 폐간할 수가 있어? 명지는 열 뻗쳐서, 라고 중얼대고는 연갈색 싱글 코트를 벗어 대충 개어 옆 의자에 걸었다. 그럼 우린 다 잘린 거네. 깨끗하게. 정석이 말했다. 대성이 커피를 머금고 정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명지는 컵을 들고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아니야?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편집장 오빠랑 얘기했다며. 몇 명은 교지 동아리로 간다고 말 안 하든? 그게 나라는 거야? 그럼 누가 가겠어. 그럼 너랑 대성이는? 나도 교지 동아리로 가. 대성이는

  • distodam
  • 2019-10-31
운전의 기술(퇴고본)

민식은 12시간 운전대를 잡는 것보다 12시간 자는 것에 익숙해져갔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난 날부터였다. 민식은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맨발이라 신발에 뒤꿈치가 쓸리는 것도 모른 채 뛰었다. 쇠 냄새와 녹 슬은 간판들이 가까워졌다. 회사 앞에 도착한 민식의 눈에는 주차장이 보였다. 트럭들이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식은 속도를 줄이고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갔다. 3층에는 사무실이라는 글자가 박힌 유리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칸막이 너머로 사람들이 민식을 흘낏거렸다. 면식이 있는 대리가 민식에게 웃어 보였다. 연락 못 받으셨나 봐요. 민식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오늘인가요? 대리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오늘부터랍니다. 민식은 대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 뒤꿈치가 아파져 왔다. 민식은 계단에 앉아 신발을 벗어 상처를 보았다. 신발을 고쳐 신고는 그대로 앉아 생각을 반추해 보았다. 그러다가 왜 오늘 늦게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어제가 붉은 조끼와 구호, 돌고 도는 술잔, 그런 것들로 형상화되어 민식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밖으로 나와 공단이 즐비한 곳을 지나 8차선 횡단보도를 기다리면서 민식은 중얼거렸다. 파업이구나. 며칠 전부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식은 운전대를 잡은 지는 육 년이 넘었지만 트럭을 몰은 지는 일년이 조금 넘었다. 노동 강도나 그에 못 미치는 얄팍한 보상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웠다. 문제가 생긴 건 하루 이틀 미뤄지던 봉급이 석 달째 자취를 감추었을 때부터였다.  회사 사정이라며 며칠 지급이 미뤄지는 건 민식도 익숙했다. 그러나 3달은 아니었다. 사무실은 두 달을 시달린 끝에 아예 문 앞에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투의 종이를 붙여놓았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고 회사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거나 유리창을 부수고 경찰에 잡혀갔다. 퇴근길 지나가듯 던지던 말들이 진지한 대화로, 모임으로 구체화 되어갔다. 민식이 불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볼 즈음에는 모든 사항이 결정된 후였다. 어제는 확정된 결론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민식은 그 틈에 끼어 보기로 했었다. 회사에 충성한다고 내일이 보장된 일자리도 아니었다. 아저씨들 측에 붙는 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길이라고 민식은 결정했다. 그렇지만 민식은 파업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오늘부터 무직이었다. 민식은 군대 시절부터 모아둔 돈이 얼마 정도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한 몇 달은 버틸 수 있었다. 그 뒤는 장담할 수 없었다. 민식은 회사에 붙었다면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도 업계 사람들에게 밉보여 운전대도 못 잡는다면 큰 일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횡단보도 불이 켜졌다. 민식은 집 계단을 올랐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오늘은 놀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민식이 바닥에 눕자 마자 전화가 울렸다. 민식의 휴대전화는 아니었다. 민식이 사는 원룸 공동식당에 연결된 전화였다.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을 때 사용하거나 걸

  • distodam
  •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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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형

    안녕하세요, 서윤호 님. 반갑습니다. 우리 오랜만에 뵙지요? 이번 소설도 문체에서 서윤호님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다소 건조하고, 단문의 호흡으로 전개되지만 그 안에서 일상의 재밌는 디테일이나 인물들 사이에 교환되는 재치 있고 깊은 사유와 감정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요. 이 소설은 학보사였던 세 친구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요. 훈련소에서 이름이 누락되어 다시 군대를 가야 하는 '대성'의 주도로 약간 황당한, 그러나 이들 사이엔 분명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냉면의 원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펼쳐지고 있네요. 이 여행은 아무것도 아닌, 허황된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또 이들 친구들에게 일종의 모험이자 그들이 무력하게 빼앗겨버린 "학보사" 시절을 정리하고, "학보사"의 부재를 견디어내는 의미 또한 가지고 있는 듯해요. 대개 이러한 여행이 그렇듯 이 황당한 여행도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함께 대화를 주고받으며 다마스에 오르고, 기어가 빠지고, 캠핑을 하는 부분 등등이 유머러스하기도 했고, 어딘가 모르게 문학적인 페이소스가 느껴지기도 했네요. '돈키호테'식 여행의 분위기 또한 소설이 진행될수록 충분히 무르익었던 것 같았습니다. 세부에서 특히 재밌었던 부분은 '명지' 캐릭터와 중간중간 등장하는 한심한 '전 남자친구'인 교지편집부 선배 에피소드였어요. 이 소설에도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특히 마지막 반전 부분이 굳이 필요했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소설은 여행 자체로서의 메시지와 재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오히려 이 세 인물의 아무것도 아닌 여행의 '실패'를 더 끈질기게 끌어가는 소설이 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반전이 소설 전체의 구성에서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탓에, 마지막 문장이 다소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여행이 소설의 중심부가 되어야 해요. "박 노인"을 만나고 난 이후 소설의 시간이 점프해서 군대를 가는 '대성'의 장면으로 뒤바뀌는데, 여기에서도 서사의 호흡이 빠르게 느껴졌어요. 박 노인 또한 갑작스럽게 출현하고 퇴장하는데 덜 쓰여진 느낌이 들었고, 박 노인을 만나고 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세 친구의 모습이 좀더 재치 있는 문장들로 늘여서 전개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입니다. 타이트한 문장 호흡과 안정감 있는 서술들은 좋지만 지금은 한 문단 안에서 사건이 전환되는 횟수가 많아 읽는 호흡이 다소 버겁고 빽빽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불필요하고 단순한 행위 서술이 많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문단과 문장에 숨구멍을 만들어 주세요. 퇴고한 버전 꼭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다음에 만나요!

    • 2019-09-06 03:14:32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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