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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 작성자 distodam
  • 작성일 2018-09-01
  • 조회수 527

부산으로 갔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적어도 사흘은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어쩌면 오래 머물러야 할 수도 있었다. 무언가 빼먹은 물건이 있는 것 같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면도기가 생각났다. 방이 엉망이라 무너진 서류 더미를 들어내고 틈새를 뒤져서 겨우 찾았다. 이리저리 흩어진 종이 뭉치들을 대충 갈무리했다. 이미 물결 모양으로 퍼진 잔해들은 그대로 두었다. 면도날을 뺐다. 화장실 찬장에서 새 날을 꺼내 갈아 끼웠다. 이틀 전이 기억났다. 가장 최근에 면도기를 쓴 게 그 날이었다. 모임을 앞두고 길렀던 콧수염을 밀어버린 오후였다. 날을 바꿀까 생각했지만 한 번 정도는 더 써도 괜찮겠다 싶었다. 면도기가 움직일 때마다 살에서 털이 분리되며 미세한 진동과 함께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거울에 푸른 수염 자국을 비추던 중 전보가 왔다. 부친위독. 순간 정신의 무게추가 한 쪽으로 넘어갈 듯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전보를 갈색 나무 책상 위 종이 더미 사이에 올려놓았다. 의자에 풀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검지와 엄지를 벌려 입을 감싸고 동공에 힘을 풀었다. 다음 며칠 간의 일정과 오늘 만날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십 년 만에 만나는 대학 동기들이다. 다시 언제 만날지는 모른다. 얼굴만이라도 비추고 나오기로 했다. 하루 동안 누레진 셔츠를 벗어 바구니에 쑤셔넣었다. 합판 옷장을 열었다. 새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다. 마지막 단추를 잠글 때 종이가 양철 바닥에 쌓이는 소리가 스쳤다. 갑자기 귀가 멍해지는 듯하더니 가슴 한가운데가 요동쳤다. 누런 종이를 뒤집어서 방 안으로 들고 왔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왼쪽 모서리를 천천히 돌렸다. 부친사망급래요망. 발신자 명의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주소는 내가 아는 아버지의 집 주소가 맞았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아버지 집에 찾아간 날 내게 어색하게 인사했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광대가 우묵하게 들어간 얼굴과 흰자위가 누런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첩의 자식이라고 속으로 욕을 했던걸까. 나는 무심코 옆얼굴을 만져보았다. 방을 몇 바퀴 빙 돌았다. 동시에 오른쪽 손목에 달린 단추를 잠그고 풀었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한숨을 내쉬고 멈춰 섰다. 물 반 컵을 마시고 광낸 구두를 신었다. 둥근 양철 손잡이를 돌려 밖으로 나섰다.

 

젊은 날 자주 다니던 술집에서 벌써 반쯤 늙어버린 이들은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통기타를 버리고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에는 침묵과 잔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전보 이야기를 하려다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이어지지 못하는 동정 어린 말들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이상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농담을 했지만 잠긴 목 때문에 거북하게만 들렸다. 취기를 빌려 억지로 자아내는 웃음들은 상투적이었다. 정적이 계속되고 누군가 입술을 들썩일 즈음 나는 일어섰다. 모두와 손을 맞잡고 건투를 비네, 따위의 덕담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도 끊긴 시각이었다. 억지로 들이킨 잔들 때문에 걸음이 지벅거렸다. 지축이 흔들리는지 내가 흔들리는지 알지 못한 채 구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엎어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그런데 어제 또 전보가 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소리를 들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잠바 하나를 러닝 위에 걸쳤다. 문을 열고 우체통 안에 손을 넣었다. 종이 질감이 느껴졌지만 손으로 쥐어지지 않았다. 전보를 양철 바닥에 붙이고 밀어 꺼냈다. 조카출생급부산행요망. 자형이 보냈다. 태기가 있다는 소식은 작년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들었다. 축하합니다. 누님, 하며 나는 누님과 자형의 손을 잡고 격려했었고, 양부가 내게 결혼을 언제 할 거냐고 물었던 것도 기억한다. 그게 지난 봄이었다. 지금은 해를 넘겼지만 아직 쌀쌀하니 열 달 정도 지난 셈이었다. 세 번째로 전보를 받은 날 회사에 장례 때문에 사흘 정도 못 오겠다고 말했다. 주말까지 몸 잘 추스르게. 차장은 내 어깨를 한 번 만져 주었지만 그가 인쇄소 뒤에서 담배를 피우며 툴툴거리던 것도 나는 보았다.

 

해가 뜰 즈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찬물에 얼굴을 비빈 뒤 양치를 했다. 새 셔츠를 입고 황갈색 코트를 걸쳤다. 검은 넥타이는 바랜 자주색 가죽가방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날을 갈아끼운 면도기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우체국으로 갔다. 공기가 바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직원들이 상자를 나르고 있었고 데스크에는 한 명만 앉아 있었다. 구석으로 가서 전보 발신지 한 장에 당일 도착. 이라고 썼다. 번호표를 뽑을 필요도 없이 바로 종이와 전보 값을 내밀었다. 급행인가요? 직원이 물었다. 예. 내가 대답했다. 직원은 손을 뻗어 하얀 대리석 위에 놓은 종이와 동전을 가져갔다. 나는 회전문을 밀어 우체국을 나왔다. 시계를 한 번 보았다. 다시 우체국으로 들어가서 한 장을 더 썼다. 급행으로 보내주십쇼. 직원에게 건넸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은 그새 제 자리를 찾아가고 거리에는 노파 몇 사람뿐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신작로 쪽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생각했다. 친아버지가 죽었다. 마땅히 슬퍼해야 한다. 양부의 딸이, 누님이 아이를 낳았다. 온 힘으로 축하해야 한다. 불행에 동정을 절반만 쏟아붓고 경축에 나머지 반을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감정을 반으로 나눌 수도 없다. 그럴 만한 조절력이 내게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았다. 부산으로 가면 마땅히 장례에 가서 혈육으로서 도리를 다해야 하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지언정 십수 년을 함께 살아온 호적상의 가족에게도 기쁜 낯을 보여야 했다. 두 장의 전보는 지금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누가 먼저 도착할까. 어쩌면 한 우체부의 가방에 모두 실리어 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병원 3층 산부인과에 한 장, 지하 영안실에 한 장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보도가 끝났고 아스팔트 앞에 섰다. 대로 횡단보도 반사경에 내 등 뒤로 달려오는 택시가 보였다. 몸을 돌려 오른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다. 초록색 차가 멈추었다. 터미널로 갈 것이다. 결별과 축복을 위하여.

 

disto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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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두

상필은 메모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김 주임이었다. 한 손에 조끼를 벗어 들고 한쪽 팔엔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상필은 메모지만 들고 있는 게 민망해서 아무 펜이나 잡아들었다. 급하게 뭔가를 쓰는 척했지만 메모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빳빳한 질감에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나서야 상필은 조심스레 볼펜을 노크했다. 그사이 김 주임은 조끼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거울을 보았다. 상필에게 말했다. 박 간사님, 퇴근 안 하세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열쇠 놓고 가. 상필이 말했다. 김 주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에 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또 쿵 닫혔다. 상필이 펜을 집어 던졌다. 외투를 입었다. 창문 블라인드를 들춰 김 주임이 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음속으로 수를 아홉 쯤 세고 책상의 열쇠를 집었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2층 계단을 내려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열려있던 사람들의 외투 지퍼는 오늘은 굳게 잠겨있었다. 상필도 유리문을 나서기 전 외투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아까 김이 가던 방향을 보았다. 움직이는 머리들 사이로 김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상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보폭을 넓혔다. 아직은 상필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갑자기 김이 멈춰서 누군가와 인사했다. 김 주임의 웃는 옆얼굴이 보였다. 그러고는 한참을 그는 얘기하며 걸어갔다. 자연스레 걷는 속도도 느려졌다. 상필은 마음이 쿵쿵대면서도 걷는 속도를 줄이는 게 고역이었다. 차들은 도로를 사람은 인도를 메웠다. 행인들을 신경 쓰면서 김을 놓치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김이 방향을 틀었다. 상필은 가슴이 더 빨리 뛰면서 입이 마르는 걸 느꼈다. 이거라면 뭔가 단서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빠르게 걸었다. 근처 지하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길거리를 점령했다. 상필은 팔을 움츠리고 돌진하다시피 했다. 드디어 모퉁이였다. 큰길은 사람들이 꽉 메우고 있었지만 골목길로 가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중에 김은 없었다. 상필은 걷는 것도 까먹고 멈춰 섰다. 그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눈을 마주친 대부분은 동공에 초점이 없거나 의심하는 눈초리일 뿐이었다. 상필은 머리며 목을 쭉 뺐다. 그래도 김 주임은 보이지 않았다. 상필은 터덜거리며 낮은 언덕길을 올랐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별생각 없이 문고리에 집어넣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열쇠를 뒤집었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상필은 열쇠를 살폈다. 몸통에 견착지가 붙어있었다. 2층 사무실. 씨발. 내일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할 생각에 상필은 욕을 뱉었다. 다시 주머니를 뒤져 집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기는 건 적막이었다. 현관 등만 알아서 켜졌다. 문득 상필은 현관에 놓인 슬리퍼가 조금 틀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집안에 뭔가 바뀐 게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뚜렷하게 찾을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래도 상필은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리겠다는 생각도 했다. 상필의 의심

  • distodam
  • 2019-12-31
파행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오른발을 딛다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발자국이 찍힌 빈 면이었다. 정석은 종이를 주웠다. 뒤집었다. 학교 교표가 옅게 찍힌 공문이었다. 정석은 계단을 내려가 학생회관 정문으로 나왔다. 매점 오른쪽 뒤 벤치로 뛰어갔다. 정석의 예상대로 편집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정석이 달려가서 편집장에게 자기 발자국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이러는 게 어딨어요? 편집장이 남은 담배를 발밑으로 던지고 밟았다. 이게 우리 신세야. 아니 이거보다 못하네. 반이라도 남았잖아. 우리는 필터도 타들어 가는 중이었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교수들이 결정한 거지. 그럼 우리는요? 몇 명만 교지편집부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만해야지. 취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 편집장은 입술을 기울여 웃어 보였다. 정석이 먼저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정석은 캠퍼스를 나왔다. 다음 수업은 오후 네 시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화가 나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저 캠퍼스 주변을 멍하니 서성거렸다. 시간이나 죽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정석을 불렀다. 두 사람이 걸어왔다. 대성과 명지였다. 오늘 뭐 하느라고 늦었어. 소식 들었냐? 대성이 물었다. 봤어. 둘이 밥 먹고 오는 길이야? 그냥 근처에서 때우고 왔어. 커피라도 마시자. 할 얘기가 많아서. 미정이 말했다. 교내 카페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옆 구내식당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뭐로? 아메리카노 차가운 거로. 얼음 넣지 말고. 정석이 답했다. 이 겨울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셔? 하긴 밖에 나가면 저절로 얼을 테니 얼음은 필요 없겠네. 명지가 비아냥거렸다. 음료만 마시던 침묵을 깬 것도 명지였다. 아니 학교에 돈이 그렇게 없어? 어떻게 50년이 넘은 학보를 폐간할 수가 있어? 명지는 열 뻗쳐서, 라고 중얼대고는 연갈색 싱글 코트를 벗어 대충 개어 옆 의자에 걸었다. 그럼 우린 다 잘린 거네. 깨끗하게. 정석이 말했다. 대성이 커피를 머금고 정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명지는 컵을 들고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아니야?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편집장 오빠랑 얘기했다며. 몇 명은 교지 동아리로 간다고 말 안 하든? 그게 나라는 거야? 그럼 누가 가겠어. 그럼 너랑 대성이는? 나도 교지 동아리로 가. 대성이는

  • distodam
  • 2019-10-31
파행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오른발을 딛다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발자국이 찍힌 빈 면이었다. 정석은 종이를 주웠다. 뒤집었다. 학교 교표가 옅게 찍힌 공문이었다. 정석은 계단을 내려가 학생회관 정문으로 나왔다. 매점 오른쪽 뒤 벤치로 뛰어갔다. 정석의 예상대로 편집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정석이 달려가서 편집장에게 자기 발자국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이러는 게 어딨어요? 편집장이 남은 담배를 발밑으로 던지고 밟았다. 이게 우리 신세야. 아니 이거보다 못하네. 반이라도 남았잖아. 우리는 필터도 타들어 가는 중이었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교수들이 결정한 거지. 그럼 우리는요? 몇 명만 교지편집부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만해야지. 취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 편집장은 입술을 기울여 웃어 보였다. 정석이 먼저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정석은 캠퍼스를 나왔다. 다음 수업은 오후 네 시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화가 나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저 캠퍼스 주변을 멍하니 서성거렸다. 시간이나 죽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정석을 불렀다. 두 사람이 걸어왔다. 대성과 명지였다. 오늘 뭐 하느라고 늦었어. 소식 들었냐? 대성이 물었다. 봤어. 둘이 밥 먹고 오는 길이야? 그냥 근처에서 때우고 왔어. 커피라도 마시자. 할 얘기가 많아서. 미정이 말했다. 교내 카페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옆 구내식당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뭐로? 아메리카노 차가운 거로. 얼음 넣지 말고. 정석이 답했다. 이 겨울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셔? 하긴 밖에 나가면 저절로 얼을 테니 얼음은 필요 없겠네. 명지가 비아냥거렸다. 음료만 마시던 침묵을 깬 것도 명지였다. 아니 학교에 돈이 그렇게 없어? 어떻게 50년이 넘은 학보를 폐간할 수가 있어? 명지는 열 뻗쳐서, 라고 중얼대고는 연갈색 싱글 코트를 벗어 대충 개어 옆 의자에 걸었다. 그럼 우린 다 잘린 거네. 깨끗하게. 정석이 말했다. 대성이 커피를 머금고 정석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명지는 컵을 들고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아니야?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편집장 오빠랑 얘기했다며. 몇 명은 교지 동아리로 간다고 말 안 하든? 그게 나라는 거야? 그럼 누가 가겠어. 그럼 너랑 대성이는? 나도 교지 동아리로 가.

  • distodam
  • 201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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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형

    안녕하세요? 서윤호 님. 반갑습니다. "전보"를 소재로 아버지의 죽음과 조카의 출생을 병치시킨 소설로 읽혀요. 삶이란 이렇게 결별과 축복 사이 어딘가쯤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소설에 흐르고 있는 어딘가 모를 권태로운 분위기 또한 인상적입니다. "두 장의 전보는 지금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좋네요. 첩의 자식이나 전보라는 소재로 미루어 볼 때 소설의 시공간이 현재라기 보단 과거의 어느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필연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첩의 자식"이라는 인물의 출생 배경 또한 인물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개 정도로만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웠어요. 소설을 조금 길게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부친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조카와의 에피소드를 대비시키면서 진행한다면 "결별"과 "축복" 사이에 선 인물의 모습이 더 잘 보일 것 같습니다. 다음 작품으로 뵙겠습니다:)

    • 2018-10-05 03:01:37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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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윤호

      반갑습니다. 소설을 쓰고 피드백을 받는 건 처음이네요ㅎㅎ 저도 이 소설을 쓰면서 서사를 확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는데, 정확히 짚어 주셨습니다. 사실 엽편 소설을 쓴다는게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짧으면서도 지나치게 함축하지 않고 분량 안에 끝내는게 까다로우니까요. 다음에는 더 좋은 소설 준비해보겠습니다.

      • 2018-10-10 14:30:11
      서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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