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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회의 마녀 시즌1

  • 작성자 아가씨
  • 작성일 2024-02-07
  • 조회수 302

바자회의 마녀

아가씨

 

 

프롤로그

 

그거 알아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마녀가 있는데글쎄 엄청 재미난 걸 팔면서 돈은 하나도 안 받는대.”

그래그럼 뭘 받는데설마목숨?”

연우는 소름이 돋은 척 두 팔을 감싸 안았다.

뭐어~? 그런 건 아니야나쁜 마녀는 아닌 건지사람들의 이야기를 받는다고 하더라고.”

이야기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

글쎄그거야 나도 모르지그런데 사실 더 모르겠는 건 그 마녀의 기준이야가격표에 분명 ‘8천 원어치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는데어떤 사람이 딸랑 한 줄만 적어내고 가져갔다나 뭐라나.”

화연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손가락에 걸린 열쇠고리를 빙빙 돌렸다단순한 걸 좋아하는 그녀답게 별다른 장식 없는 열쇠 하나가 다였지만 돌아가는 모습이 왠지 묵직해 보였다.

뭐야그럼 제일 비싼 거 고르고 대충 적어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근데 마녀잖아다들 괜히 으스스해서 성심성의껏 이야기를 적나 봐.”

에이겁쟁이들이나 그러겠지나처럼 용감한 사람은 안 그럴걸그보다너 지금 나랑 축제 가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이 세상에 마녀가 어딨어.”

연우는 며칠 전 화연이 축제 개요가 적힌 포스터를 가져간 걸 떠올렸다아마도 축제 마지막 행사인 불꽃놀이를 기대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직접 가봐깜짝 놀랄걸?”

그래네가 너무 가고 싶어하니까 내가 특별히 같이 가줄게몇 시에 만날래?”

“9시가 좋겠어.”

그렇게 말한 화연은 약속한 시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연우는 화연의 시계에 반사된 빛줄기를 따라 시선을 내렸을 때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으나 알지 못했다그녀의 그림자가 낯선 고깔모자를 쓴 여인의 모습이었단 걸.

 


주원 씨 이야기

 

*

 

어디 보자, 9시가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어제 수익금 정산이나 해볼까?”

마녀는 직접 만든 계산기를 연신 두드렸다일반적인 딱딱한 계산기와 달리 전체를 고양이 발바닥으로 감싼 듯 말랑한 자판이 손가락에 닿을 때마다 꾹꾹 찍혔다마녀는 계산기의 기능보다 촉감을 더 중요시한 것을 뿌듯해하면서도 후회했다손님들이 물건과 바꾼 이야기의 진짜 값어치가 얼마인지 알려주기도 하고 심심할 때는 가벼운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던 계산기가 요즘 따라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잇 참또 안 맞네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걸 만들어선.”

마녀가 핀잔을 주자 계산기에 달린 분홍색 날개가 억울하다는 듯 퍼덕였다억울한 표정마저 보기 싫었던 그녀는 나비 잡듯 날개를 집고 던져버렸다갑작스러운 비행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할 듯 위태로웠던 계산기는 땅에 닿기 전 책장에서 튀어나온 황금빛 쿠션 덕에 충돌을 면할 수 있었다그 모습을 본 마녀는 정산이고 뭐고 마음에 안 드는 것들 전부를 싼값에 팔아 버릴까 생각하다 이번 달 치를 대금을 떠올리고 정신을 붙잡았다.

그래일해야지 일보자, ‘낭떠러지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끈을 사 간 사람이…… 여기 있다구매자 김지연사용자 신주원또 대리 구매네내가 뭐 때문에 팔았더라?”

왜긴사람 살리려고 팔았잖아.”

화두가 바뀐 것을 눈치챈 계산기가 아기자기한 외형과 다르게 시니컬한 말투로 말했다처음에는 그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녀도 이제는 신경 안 쓴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걸 누가 몰라어떤 사람을 왜 살리려고 팔았는지 떠올리는 중이잖아카투스김지연 님 이야기가 얼마였지?”

“4만 원참고로 대금은 400페쿠니아야한 마디로 40만 원을 4만 원에 판 거지.”

마녀는 달에 한 번 대금을 치르는 31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부러 가격을 강조해 말하는 카투스를 노려보았다카투스는 그녀의 눈빛이 무섭지 않은 듯 황금빛 쿠션에 누워 날개를 퍼덕였다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을 읽고 한숨을 푹 내쉰 마녀는 쿠션이 날아온 책상 옆 커다란 서랍으로 갔다서랍에는 각각 만 원, 5만 원 이하, 10만 원 이하 등 금액을 나타내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그 중 5만 원 이하 서랍 중 김지연 님의 이야기를 찾은 마녀는 A4용지 세 페이지 가량 되는 종이 뭉치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마녀가 이미 판매한 물건의 구매자와 받은 이야기를 한 번 더 확인하는 건 곧 다가올 대금일에 만날 장인에게 어떤 손님이 물건을 사 갔는지 말해주기 위함이었다물론 오락가락하는 계산기 때문에 가격에 맞는 이야기를 받았는지 한 번 더 점검해볼 목적도 있었다.

제목이 주원 씨 이야기어디주원 씨가 뭘 했는지 한 번 읽어볼까.”

 

 

**

 

그럴 때는네가 소개팅에 나간다고 생각해 봐.”

진상이랑 소개팅을 하라고?”

무례한 손님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 고민하던 민니가 생뚱맞은 소리를 하자 지연은 그간 민니의 한숨 섞인 토로를 들어줬던 시간이 아까워졌다대단한 해결책을 바란 건 아니지만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늘어놓으란 건 아니었는데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정말로 하라는 게 아니라상상력을 좀 발휘하라는 거지상대는 평범한 소개팅인 줄 알고 나왔지만 사실 넌 소개팅 앱의 직원인 거야이상한 사람과 괜찮은 사람을 구분해야 하는데이용자들의 후기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좀 불공평하잖아그러니까 직원인 네가 직접 발로 뛰는 거지겸사겸사 최악인 사람을 찾아낼 때마다 보너스도 받고.”

민니는 한참 고민한 게 맞기는 했는지 나름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민니가 뜬 소리만 한다고 생각해 실망감을 느꼈던 지연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수당을 주는 방식부터 운영 방침까지 이상하지 않은 게 없는데?”

상상이 너무 현실적이면 그건 그냥 일기나 계획일 뿐이지그럴 거면 뭐 하러 상상하냐재미없게됐고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네가 알아서 수정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버티라고그러면 그 지긋지긋한 알바 생활도 버틸만 할 걸내가 그랬거든.”

여전히 지연에게는 해결책은커녕 장황한 헛소리일 뿐이었다반응이 없는 지연을 보던 민니는 급기야 영업 사원이 된 것처럼 굴었다결국 지연은 민니의 성화에 못 이겨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한 번 해볼게.”

 

민니와 술자리를 가진 뒤 지연은 늘 그렇듯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막 재고정리를 끝내고 쉬기가 무섭게 종소리가 울려 고개를 든 지연의 눈에 주원 씨가 비쳤다.

주원 씨는 벌써 3달간 늘 취한 채로 찾아와 술을 사 가는 손님으로지연의 진상 목록에 올라간 지 3달이 지났다오늘도 어김없이 별것 아닌 문제로 언성을 높이던 주원 씨는 늘 하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 나 몰라나 주원 씨야~!”

어제와 똑같은 자기소개를 마친 주원 씨는 술 판매대로 향했다반면 어김없이 솟구치는 화를 참던 지연은 속는 셈 치고 민니가 말해주었던 진상과 소개팅을 해보기로 결심했다물론 주원 씨가 자신도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며지금은 기회가 없어 그렇지 사업 아이템만 잘 떠오른다면 이딴 편의점 술은 먹지도 않을 거란 망언을 하는 바람에 시작부터 위태로웠지만지연은 더 볼 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나쁜 사람도 좋은 점 하나 정도는 있다는 민니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주원 씨주원 씨는 잘생겼어멋있어돈도 많아주원 씨가 최고야~”

그러거나 말거나 잘생긴 주원 씨는 새벽 4시에 편의점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그나마 다행인 건 만취 상태에도 감미로운 목소리 덕에 고성방가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지연은 정말로 최악인 사람도 괜찮은 점 한 가지 정도는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한 게 신기했다지연이 주원의 목소리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다가온 주원 씨는 늘 같지만 다르다고 주장하는 초록색 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봉투 드릴까요지연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내가 이걸 어떻게 들고 가당연히 줘야지.”

봉투 100원인데 괜찮으세요?”

얼른 달라니까!”

주원 씨는 그 말만 내뱉곤 지연이 봉투에 술을 채 담기도 전에 홱 낚아챈 뒤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지연은 주원이 신용불량자라 카드를 쓰지 못하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만약 주원 씨가 카드 사용자였더라면 결제가 되는 몇 초 동안 얼굴을 마주 봐야 하니까무엇보다 카드를 두고 가기라도 하면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님 물건을 훼손한 죄로 벌금을 물게 될 것 같았다.

주원 씨는 그 뒤로도 편의점에 올 때마다 진상 손님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지만지연은 주원의 좋은 점을 한 가지씩 알게 되었다가끔 그가 남은 잔돈으로 계산대 앞에 진열된 사탕 같은 걸 선물할 때면 소소한 감동도 느꼈다썸타는 남자에게 꽃다발을 받았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형편이 어려워 카드도 못 쓰는 사람이 소주병 3개 값인 사탕을 주는 걸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지연은 그렇게 생각했다사실 이것만으로 평소 주원이 지연에게 하는 막말을 상쇄할 수는 없지만 해가 빨리지는 시골에서 새벽에 편의점을 찾아올 사람은 주원 말고 없었으므로 좋든 싫든 주원을 기다리게 된 지연이었다.

뭐든지 6개월 정도 하면 적응이 되는 법이라 했던가주원이 편의점에 찾아온 지 6개월이 넘자 지연은 더 이상 어떤 불평불만을 들어도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이걸 좋아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지연은 자신의 꿈이 승무원이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하다 하다 진상에게 적응해버렸다며 슬퍼하기보다이것도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긍정적이니까입사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진상이 와도 미소를 잃지 않는 최고의 승무원이 될 거라고 상상하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좋았던 기분은 오늘따라 거나하게 취한 주원 씨가 술병을 깨트리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하고 곤두박질쳤다술병이야 가끔 주원 씨 말고도 깨트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괜찮았지만문제는 깨진 병을 치우는 지연에게 툭 던진 주원 씨의 밴드였다. ‘혹여 다치면 붙여라.’라는 말과 함께 깨진 유리병 위로 안착한 밴드는 붙이라는 것인지 함께 버리라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위생적이지 못했다포장지가 약간 벗겨진 채 구겨져 있는 모습을 보자 지연의 마음도 덩달아 구겨지는 것 같았다게다가 본인의 과오로 병을 치우고 있는 자신에게 사과나 배상과 관련한 말이 아닌 혹여 다치면 붙여라는 치우다 다치길 바라기라도 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지연은 자신이 면접은 못 봐도 사람은 잘 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상인 것 말고는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주원의 행동에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고민했다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을 많이 준 것인지 일말의 배신감까지 느껴지자어쩌면 그동안 재활용도 못 할 만큼 질 나쁜 쓰레기를 어떻게든 가공해 쓰려 했던 자신이 바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 지연은 맨손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다 손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다만 주원의 밴드 때문에 마음 곳곳에 푸른 멍이 들었다차마 주원에게 화를 낼 용기는 없었던 지연은 하필 마음에 난 상처가 멍이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원래도 주원의 밴드 따위 사용할 생각이 없었지만멍이라면 사용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 같아서그래서 억울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가 한계에 달했단 걸 주원 씨가 알기라도 한 걸까그날을 기점으로 주원 씨는 찾아오지 않았다대신 다른 손님들의 입에 오르내린 탓에 여전히 주원 씨란 이름은 편의점 안을 맴돌았다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는 달동네라 드라마를 볼 수 없던 사람들은 마치 주원 씨 이야기라는 드라마를 직접 쓰기 시작한 것 같았다파란 지붕 아저씨가 멀끔한 사람이 됐다는 것부터사업 중독자가 또 일을 벌였다가 이번에 제대로 망했다는 것까지전지전능한 작가들은 모르는 게 없었다심지어는 주원이 공병 보증금 문제로 주변의 마트를 들들 볶고 있다는 것도 말했다지연은 그 얘기를 듣자 자신의 것이 다른 술병보다 더 예쁘니 100원을 더 달라는 주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도대체 나이 50 넘은 아저씨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진상 짓할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했지만 이미 주원 씨 이야기를 밤마다 해대는 사람들에게 다음 화가 될 소재를 주고 싶진 않았다하지만 지연의 바람과는 달리 맞장구 하나 없는 그녀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던 사람들은 더욱 주원 씨 이야기를 편의점 안에서 해댔다.

그렇게 발길이 끊긴 후에도 계속해서 주원 씨가 찾아오는 것만 같던 어느 날에 정말로 주원 씨가 나타났다여느 날과 달리 맨정신으로평소보다 어두운 낯을 했지만 주원 씨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기에 지연 또한 별다른 내색하지 않았다.

봉투 드릴까요?”

너는 단골이 뭔지 몰라맨날 달라고 하는데 왜 자꾸 물어봐!”

역시나 주원 씨는 늘 왔던 사람처럼 굴었다. ‘맨날이라고 하기에는 벌써 8개월간 발길이 끊겼는데도지연은 새삼 자신이 한 편의점에서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따위를 체감하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이때까지 지연은 코가 석 자인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그것도 진상 손님 주원 씨’ 진심으로 걱정하게 될 줄 몰랐다.

봉투 100원인데 괜찮으세요?”

그럼잠깐뭐 얼마라고?”

“100원이요.”

그래이참에 내가 단골이 뭔지 제대로 알려줘야겠네오늘은 그냥 줘원래 단골이 오면 서비스도 주고 그러는 거야이런 것도 몰라서 일일이 가르쳐야 하는 알바는 왜 뽑은 거야돈만 아깝게.”

오랜만에 찾아온 주원의 낯빛이 어두웠던 건 그간 지연에게 진상을 못 부려서 그런 것인가 착각이 들 만큼 곱지 않은 말이 나올 때마다 주원의 얼굴은 밝아졌다지연은 좋은 놈도미운 놈도 아닌 그저 진상 손님일 뿐인 주원에게 봉투를 무상으로 주고 싶지 않았지만 실랑이가 길어지는 것이 더 싫었다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면 비닐 봉투를 무상 제공하다 적발되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주원 씨가 그걸 알 것 같지도 않았다.

지연이 봉투에 술을 담는 동안 주원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새고 있었다평소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지폐를 대충 계산대 위에 널브러뜨리는 것과 달리 느긋한 주원 씨의 모습에 지연은 의아함을 느꼈다주원은 공병 보증금을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이라 동전이 많을 것 같지만 늘 미리 편의점에 올 것을 계획한 것처럼 지폐로 바꿔왔기 때문이다그런데 오늘 본 주원 씨의 지갑 속은 동전으로 가득했다동전은 죄다 100원 혹은 10원짜리라서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중간에 수를 잊거나 동전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기다릴 만했다느긋하게 기다리던 지연은 자연스레 지폐가 보였던 주원의 지갑 속이 바뀐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 오늘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는데 충동적으로 온 건가?’ 진상 부리는 것도 일주일 옷을 미리 정해두듯 요일별로 바꿔가며 하는 것 같은 주원의 충동적인 모습은 지연에게 다소 낯설었다그사이 주원은 다 샌 동전을 지연에게 내밀었다지연은 대충 계산대 위에 흩뿌릴 줄 알았던 것과 달리얌전히 손 위에 있는 동전을 보고 놀랐다놀란 뇌는 실수로 기억 하나를 지연에게 상영했다기억 속 사장님은 재고 정리를 하는 지연에게 사람이 갑작스레 바뀌면 무슨 일이 있는 거야그럴 때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잘해줘 봐그럼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지연은 갑자기 이게 왜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왠지 사장님이 말했던 때가 지금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거 서비스예요돈은 다음에 오실 때 내세요.”

충동적인 주원의 모습에 전염이 되기라도 한 걸까사장님의 말을 떠올린 지연은 마음에도 없던 소리를 내뱉고 깜짝 놀랐다좋든 싫든 단골이었던 주원에게 서비스 한 번 줄 수야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누구 때문에 처음으로 편의점 일을 그만둘까 생각했는지 잊은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럴 때 때마침 진상을 부리는 주원에게 화라도 속 시원히 내면 좋으련만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섭게 쏘아붙였던 주원은 웬일인지 봉투 손잡이를 꽉 쥔 채 문을 열고 나갔다대출도 당기고 명줄도 당겨서 당기시오만 봐도 화가 난다던 주원 씨가그래서 몇 번이고 당기셔야 한다고 말씀드려도 꼭 밀었던 주원 씨가.

주원 씨가 어두운 낯을 하고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욱 강해진 기시감을 느낀 지연은 그것이 주원의 손에 있었단 걸 깨달았다정확히는 동전을 내밀 때 새끼 손가락에 감겨있던 다 헤진 밴드와주원이 나가며 떨어뜨린 깨끗한 밴드였다처음으로 편의점 근무를 그만둘까 고민했던 그날의 밴드가 사실 주원이 가진 것 중 가장 깨끗한 것이었겠단 걸 알았을 때 지연은 부정하고 싶었다설상가상 다른 취객이 깨트린 술병을 치우다 손바닥이 베어 바코드 찍는 게 느릴 때 주원 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조심 좀 했어야지젊다고 해서 다 치유되는 게 아니야그랬으면 내가 이 꼴로 다니지는 않겠지그리고 다치는 거 그것도 다 습관이라 내 나이 되어서도 못 고치면 더 큰일 나그러니까 넌 잘 하지도 못하는 알바 하지 말고 얼른 취직이나 해라.’ 그날 주원은 지연이 다치길 바라는 마음에 밴드를 준 것이 아니라 한 번 다쳤다는 걸 떠올리고 준 거였다자신은 다 헤진 밴드를 새로 붙일 수도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으면서.

주원 씨의 좋은 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나쁘게 바라보던 시선이 벗겨지자 자연스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야기가 맞는 퍼즐 조각을 찾아 붙기 시작했다이를테면 신용불량자인 주원이 어렵게 돈을 긁어모아 마지막 사업을 했다가 8개월 만에 말아먹었다는 것오늘은 주원이 8개월 만에 편의점에 다시 온 날이라는 것 등나쁜 사람이 아닌 나쁜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러자 손님이 없을 때 시청하던 다큐 내용이 생각났다사업 실패 후 실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일찍 등교하며 실종 전단지를 붙이는 아들이 카메라를 보며 했던 말이 지연에게 닿았다.

-아빠가 사라지기 전날 미팅 때 말고는 입에도 안 대던 술을 집에 사 들고 온 게 생각나요차마 술을 마시지는 못하고 잔에 따라만 놓은 채 성적이 낮다며 화를 내시다가 갑자기 사랑한다고 하셨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그때 조금만 더 아빠의 아픔에 공감했더라면 술 한 잔에 담긴 알아달라는 외침을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그게 가장 후회가 돼요.

지연은 갑작스레 변한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있다는 사장님의 말과 최근 사업이 망한 주원 씨그리고 실종 전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말한 아들의 말이 하나의 문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막상 별 것 아닌 헤프닝일지라도그래서 혼자 마음 졸이고 헛수고하게 될지라도 후회할 짓 하지 말자.’

 

제발제발 이상한 데 가지 말고 댁으로 가셨어야 할 텐데.”

메모를 남긴 후 편의점에서 나온 지연은 평소 주원 씨가 술을 사 들고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은 걸편의점에 온 손님들이 떠벌리는 주원 씨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지연은 주원을 찾으러 나선 것인지 자책을 하러 나온 것인지 헷갈릴 만큼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무시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주원 씨를 찾기 위해 편의점을 비운 지 5분쯤 지났을 때지연은 드디어 사람의 형태를 마주했다반가운 마음도 잠시파도를 마주 보고 난간에 아슬하게 기댄 이를 보자 겁이 난 지연은 침착하게 할 말을 정리한 것이 무색하게 얼어붙고 말았다그 사이 난간에 있던 사람이 용케 기척을 느꼈는지 지연에게 다가왔다가까이서 마주 본 그는 찾던 사람이 아닌 특이한 모자를 쓴 여성이었다이상하게 지연은 그 모자와 여성의 눈빛을 보자 서둘러 주원 씨를 찾아야 한다는 긴장감을 잊은 채 어디서 보았더라라는 생각만을 반복하게 되었다그러다 어릴 적 본 동화책 속 마녀 같다는 생각을 떠올린 지연이 입을 떼기가 무섭게한참 지연을 보고만 있던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지금급히 찾는 사람이 있죠꼭 구하고 싶고?”

기척 하나 내지 않고 얼어붙은 자신을 알아본 것도 그렇고차림새도 특이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았지만 단박에 상황을 맞힐 줄은 몰랐던 지연이 당황했다급히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는 순간 또다시 먼저 말하는 그 탓에 질문은 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빠르게 설명할게요제가 이 보라색 끈을 4만 원에 팔게요그러면 당신은 이 끈을 가지고 반대편 난간으로 가 그가 있는 쪽으로 던지면 돼요조건은 꼭 구하고 싶다는 마음을 유지할 것갈팡질팡하는 순간 시간은 흐릅니다.”

자신만큼 급박한 상황이기라도 한 건지 결제 방식조차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고 4만 원만큼의 이야기를 가져간다는 말만 내뱉은 그는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야무지게 일을 하던 성격이 튀어나온 건지 몇 미터 거리에서 던져야 하는지 묻고 싶었던 지연은 멋대로 물건만 쥐여주고 사라진 판매자에게 화가 났다돈이야 자신의 계좌도 모르고 편의점 문도 잠그고 나왔으니 가져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으니까하지만 판매자의 말처럼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으므로 화는 나중에 내기로 하고 서둘러 반대편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손님아니주원 씨저랑 잠시만 얘기 좀 해요.”

좀 전까지만 해도 난간에 상체를 기대기만 했던 주원 씨는 코너를 도는 사이 다리 한쪽을 걸치고 있었다그 모습에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한 지연은 더욱 거세게 흐르는 식은땀을 대충 닦으며 어떻게든 주원 씨를 설득하려 했다그러나 주원 씨는 개봉도 하지 않은 술병 두 개를 지연에게 닿지 않도록 던지며 가라는 말만 반복했다쉽사리 이야기하려 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지연은 믿음 하나 안 가는 끈 대신 직접 다가가 주원을 구하기로 마음먹는다그러나 천천히 다가가는 지연을 알아본 주원은 남은 다리 한쪽도 난간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결국 근거리에 도달하지 못한 지연과 그런 지연에게서 고개를 돌린 주원이 멀어지려 할 때밧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췄다풍덩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 눈을 뜬 지연은 난간에 걸터앉아 45도 기울어져 있는 채로 멈춰있는 주원을 바라봤다그리고 아까 만났던 특이한 모자를 떠올렸다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 모자가 말했던 망설이면 시간은 간다는 말이 떠오른 지연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밧줄을 있는 힘껏 던졌다그러자 검은색인 줄 알았던 밧줄의 주위가 밝아지며 그 어느 때 봤던 것보다 가장 진한 보라색의 밧줄이 주원의 몸에 감겼다지연은 여전히 영문 모를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홀린 듯 손에 쥔 밧줄을 힘차게 당겼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그깟 서비스 한 번 줬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젠장왜 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거야.”

지연이 밧줄을 어찌나 힘차게 잡아당겼는지 다시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주원이 엉덩방아를 찧었다하지만 그는 육신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마음의 아픔을 지연에게 토로하기 시작했다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빛 덕분에 주원의 안색을 살핀 지연은 붉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주원이 평소의 주원 씨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긴장은 놓지 않던 지연은 주원 씨의 집에 다다르자빛이 사라지며 저절로 풀리는 밧줄과언제 그런 밧줄에 묶여있었냐는 듯 아까 버린 술은 너 때문에 파손됐으니 환불 해달라는는 주원 씨의 말에 안심했다긴장이 풀리자 함께 풀려버린 다리에 넘어지려던 지연을 잡아준 주원은 잠시 지연을 쳐다보더니 별말 없이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보던 지연은 다큐에 나온 아들의 목소리와 함께 다 비워진 술잔을 떠올렸다그리곤 내일 이상한 모자를 쓴 손님이 온다면 서비스를 잔뜩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왔던 때처럼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

 

이런 사연이 있었지가만 보면 저 지연이란 얘도 참 불쌍해손님들한테 부리는 오지랖 10분의 1만큼만 본인한테 투자하면 그깟 편의점 알바 진즉에 때려치웠을 텐데공병 팔고 남은 거스름돈으로 어쩌다 한 번 사탕 사주는 진상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쫓아간담그리고 그 주원 씨란 사람도 그래젊었을 적에는 잘 나간 게 아니라 뭐 하나라도 더 벗겨 먹으려고 입에 발린 말 한 거 뻔히 알면서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아직도 나잇값을 못 하고 또 홀라당 넘어가 8개월 만에 쫄딱 망하고 그런대나도 200살 되자마자 고향에서 벗어나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며 대금 내느라 허덕이고 있지만적어도 평생 굶어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고우리 맥 간식 사줄 돈도 있고그렇지~?”

화연이 안고 있던 닭 모양 쿠션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맥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 때마다 하얀색 닭 볏이 실감 나게 움직였다그러자 반대쪽에 있던 노란색 벼슬 역시 흔들리며 방 안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웬일이래맥이 하는 말에는 늘 반대 의견을 내놓기에 바빴으면서뒤늦게 철이라도 들었나…….”

치는 그게 아니라는 듯한 번 더 우렁차게 울며 시계가 있는 쪽을 향해 부리를 쪼아댔다.

어머내 정신 좀 봐좋은 자리 선점하려면 7시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벌써 8시네오늘은 손님 많이 못 받겠다얘들아얼른 짐 챙겨!”

 

 

손님 맞이

 

*

 

하마터면 들어오지도 못할뻔했네카투스바로 장사 시작할 거니까 적당히 착하고 사연 있는 애 한 명 데려와.”

조금 전까지 마녀의 손에 있던 날개 달린 계산기는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검은 고양이로 변했다.

 

장사 준비는 이쯤하면 됐고카투스가 간 지 15분 정도 지났으니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거기 마침 잘 왔어요우리 가게는 다른 데처럼 비슷비슷한 물건 가지고 가격 흥정 안 해죄다 못 보던 것만 있을 테니까 천천히 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줘요?”

민니는 오가는 사람 많은 길에 작은 고양이가 지나다니다 밟히기라도 할까 걱정돼 따라가고 있었을 뿐이었지만한 번 보고 가라는 사장님의 말을 거절하기 어려워 예의상 둘러보기로 했다마녀의 가판대 위에는 대개 축제날 열리는 장이 그렇듯 신기해 보여도 옆 가판대와 비슷한 물건이 많은 다른 곳과 달리 정말로 신기한 게 많았다민니는 어느새 고양이도 잊고 처음보는 물건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그 사이 카투스는 민니와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계산기로 변해 마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사장님이 옥으로 만든 망원경처럼 생긴 건 뭐예요?”

그거요지옥 보여주는 망원경이에요그게 원래 화질이라고 해야 하나아무튼 잘 안 보였는데이번에 오페라 글라스 만드는 영감이랑 콜라보 해가지고 표정까지 생생하게 다 볼 수 있어요안 그래도 내가 그거 신제품이라 할인 이벤트 좀 하려고 했는데 어때요좋은 걸 싸게 살 수 있는 기회에요학생.”

민니는 잠시 고민했다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왠지 들을수록 빠져드는 화법만 봐도 장사 스킬이 상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민니는 이미 마녀의 장사 덫에 걸려들었단 걸 깨닫지 못했다어느 정도 티 나는 영업 멘트로 자신이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는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믿게 하지만이미 지옥을 보여준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것이 마녀의 교모한 수법이었다남들보다 조금 특이한 모습을 한 자신을 못 믿게 하는 대신 제품의 효과 같은 것은 비교적 덜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건 마녀가 인간들 틈에서 여러 해 장사를 하며 터득한 노하우였다.

지옥을 본다는 거면 지옥에서 벌 받고 있는 사람도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렇고 말고요사실 이 망원경은 그러려고 만들어진 거예요다들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처음 몇 번이나 궁금하지나중에는 지옥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도 없거든요그런데나를 괴롭혔던 인간들이 벌 받는 모습은 매일 봐도 부족할 거예요그것만큼 통쾌한 게 없거든그러니 당신도 지옥에 떨어졌으면 하는 인간이 있다면 얼른 가져가요정말 싸게 줄게요.”

마녀의 마지막 한 방인 인심 쓰듯 말하기까지 제대로 날리자 민니의 철통보안 소비 습관은 모래성처럼 가볍게 무너졌다괜히 이걸 지니고 있으면 누군가 지옥에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사지 않는다면 더 큰 후회를 할 것 같아 결국 사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아까 많이 깎아주신다고 하셨죠얼마에 주실 거예요?”

학생이 보기와 다르게 야무지네그래요이렇게 총명한 손님 만나 기분도 좋으니까 8만 원에 줄게요거기다 결제까지 내가 셀프로 하는 걸로?”

마녀는 지옥 망원경을 만든 장인에게 외제차를 장난감 자동차 가격에 팔았다며 욕 먹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옥 망원경같은 특수한 물건은 자칫 윤리적인 문제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얼마에 파냐보다 누구에게 파느냐가 더 중요한데민니가 얼마 전 읽은 주원 씨 이야기속 민니란 걸 알아보고 성품은 문제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간 인간에 관해 생각이 깊은데 그걸 이용해 누굴 벗겨먹으려고 하지 않는 자 중에 지옥 망원경같은 특수 상품을 악용하는 사람은 없었다작년에 특수 상품을 별 생각 없이 팔았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은 후로, 5분만 봐도 문제를 일으킬 사람인지 아닌지 훈련한 보람이 있었다.

결제를 셀프로 한다는 게 어떤 말이에요?”

그 앞에 놓인 가격 관련 안내판 읽었죠거기서 봤듯이 우리 가게가 돈 말고 값어치에 맞는 이야기를 받는 곳인데원래는 직접 가격 고민해서 적어내야 하거든요그런데 우리 손님은 내가 알아서 딱 8만 원어치 만큼의 이야기만 가져가겠다는 거예요설명 끝뒤에 다음 손님 기다리니까 얼른 가 봐요.”

잠시만요뭘 어떻게 가져간다는 거죠사장님!”

민니는 당황했다아까 전까지만 해도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던 가판대는 온대 간대 없고오직 구매한 지옥 망원경만이 손에 남아있었다이상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기서 그 특이한 사장님을 만난 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미니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 잡히기도 했고곧 있으면 기말고사가 시작되니 괜히 일 키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집으로 향했다물론 거기에는 신기한 물건을 계좌에서 1원도 빠져나가지 않은 채로 손에 쥐었다는 설렘도 한 몫 했다마녀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가져가서 무엇에 쓰는지 알지 못한 민니에게는 공짜로 얻은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그럼 까먹기 전에 값을 치러볼까우선 주변 이야기부터 훑어봐야겠다.”

민니가 집에 가는 동안 마녀는 정말로 그 뒤에 손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셀프 결제를 하기 시작했다.

음음이거면 되겠다이 정도면 우리 인간 싫어’ 마녀들에게 적당한 교훈이 되겠어가만이거 주원 씨 이야기랑 잘 엮으면 제법 괜찮은 교본이 되겠는데제목은 뭐로 하면 좋으려나카투스하나 추천해줄래?”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럽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니, ‘완벽한 것은 어때?”

좋아마음에 들어.”

 


완벽한 것

*

 

저기 대학생이시죠혹시 문창과?

어떻게 아셨어요?

아이손에 들린 책 보면 딱 알죠저도 문창과인데황정은 작가님 좋아하거든요.

같은 과이시구나.

네네혹시 같은 과 동기의 부탁 한 번 들어주실 수 있나요?

어떤 부탁이요?

저희가 대학생들 대상으로 유튜브 채널 <김금동희>에 올라갈 인터뷰 영상 촬영 중이거든요괜찮으세요?

촬영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너무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저희 막 그렇게…… 곤란하려나아 그러면 일단 들어보시고 곤란하시면 응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럼 질문 드리겠습니다조별과제 빌런테러 예고흉기를 동반한 난동 등갈수록 타인이 무서워지는 시대인데요그 중 조별과제 빌런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학생분께 묻습니다당신은 완벽하게 나쁜 타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고민도 안 하시고 답변해 주셨네요이유는요?

,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영화이자 유명한 말이 있죠그만큼 싫다때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 뭐 이런 의미로 하는 말이잖아요그런데 지옥이라는 곳이 정말로 나쁘기만 한 곳일까요말씀해주셨던 나쁜 놈들이 가서 벌 받는 게 지옥이잖아요그럼 지옥은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현실에서 그들을 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곳이 되기도 하죠더군다나 나쁜 사람들에게도 어찌 보면 반성과 참회를 위해 필요할 테고요그러니까 우리가 그토록 기피하는 지옥마저도 온전히 나쁠 수는 없으니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나는 그저 모르고알고 싶지도 않을 뿐이지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도 꼭 필요한 존재일 거예요그 필요가 나쁜지 아닌지에 관한 평가는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요.

그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그럼 말 나온 김에 질문 한 가지만 더 드려볼게요반대로, ‘완벽하게 착한 사람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뇨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이유가 무엇일지 더 궁금한데요?

우선 첫 번째 질문을 주셨을 때는 완벽하게 나쁜 타인이라고 하셨고 두 번째 질문을 주실 때는 사람이라고 하셨거든요타인도 사람도 결국 인간이지만 우리가 나도 사람이라서라는 말을 내뱉을 때의 맥락으로 바라보면 조금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결국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거죠능력적인 면으로든인간성이든어느 한 분야에서도 완벽할 수 없는 게 사람인데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도 많고 또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조차도 적은 인간성을 우리가 완벽하게 판별할 수 있을까요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는 것과 별개로 그냥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 물어보셔도 제 대답은 같아요결국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물론 그 안에 더 나쁜 놈도 있고 더 착한 사람도 있지만요.

역시문예창작과라 그런지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답변이네요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말은 저렇게 해놓고 지옥에 떨어졌으면 하는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나쁜 사람을 만났나 보네그러고 보면 참 아이러니해지옥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죽은 뒤엔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를 사람들에게 지옥 망원경이 인기가 많단 말이지어쩜 다들 그렇게 못된 놈을 만났는지 몰라꼭 N극과 S극 같네원하지 않은 만남이 성사되지 않으려면 역시억지로 떨어뜨려 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려나에이씁쓸하니까 오늘은 돌아가면 달달한 과실주를 마셔야겠어.”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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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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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씨
  • 2023-08-31
빛의 잔상

*아이는 무서워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시야가 가려지지 않는 것 같아 눈가 위로 두 손을 덮었다. “엄마, 눈을 감아도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아. 자꾸 뭐가 보여.”아이가 말했다.“그건, 무서운 게 아니고 빛의 잔상이야. 네가 이미 빛을 보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거지. 그러니 기억하렴. 너는 날 때부터 빛을 많이, 아주 많이 보았으니 완전한 어둠 같은 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거란 걸.”엄마는 땀에 미끄러지는 아이의 손을 추켜 올렸다.“응, 엄마.”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대답했다.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은 눈을 감아 보지 못했고, 떨리는 음성은 여기저기 떨어지는 폭탄 소리에 묻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터지는 소리와 터뜨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고, 아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가끔 모든 소리가 멈출 때마다 군화 소리와 철컥이는 총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다행히 아이를 향한 게 아니었다. 소리의 방향을 확인한 엄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때 아이는 가만히 앉아 풍겨오는 담배 냄새가 가까워지지 않길 기도했다. 한참 줄담배를 태우던 군인들은 예상보다 이르게 멎은 폭탄 소리에 다급히 사라졌다. 그들이 있던 자리엔 대충 밟아 불씨를 꺼트린 담배와 타다 만 잔디가 남아 비명을 내질렀다.아이는 또 한참을 기다리다 모든 비명이 멎음을 느끼고 눈가를 가리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볼품없이 누운 채 힘겹게 미소 짓는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아이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눈동자를 씻어버리면 다시는 엄마를 못 볼 것 같았다. 대신 엄마의 입꼬리가 더 이상 떨리지 않을 때까지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마침내 모든 떨림이 멎은 엄마의 모습도 담고 또 담은 아이는 코끝에 스쳐오는 담배 냄새를 맡으며 늦은 기도를 올렸다. 엄마가 마지막 잠은 편히 잘 수 있도록 덮을 것을 가져오는 동안, 담배 냄새가 더는 짙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시간이 흘러 아이가 아니게 된 아이는 그날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아마도 엄마는 그때 내게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지금 눈앞이 깜깜한 것 같아도 어딘가 빛의 잔상이 남아있을 테니 포기하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아이의 빛은 엄마였다. 그날 아이가 덮을 것을 구하러 떠난 사이 끝내 순찰하던 군인에게 발각된 엄마는 유품 하나 남기지 못한 채 기름에 젖어 활활 타버렸고, 아이가 힘겹게 담았던 엄마의 잔상마저 재에 뒤덮여 완전한 어둠을 만들었다. 아이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내어준 따스한 이불을 덮고 병실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이번에는 이름 모를 신이 아닌 하늘로 올라가 빛의 여신이 되었을 엄마에게. 정말 잔상이라도 좋으니 깜깜한 나의 어둠을 밝혀달라 빌었다. 그날 밤, 간절한 기도를 두 번이나 거절당한 아이를 불쌍하게 여긴 빛의 여신이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가씨
  •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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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희찬

    아가씨님 정말 오랜만에 오신 것 같아 기쁘네요~^^ 아가씨님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할게요~^^

    • 2024-02-07 16:49:49
    송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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