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괴물로 자라난다 –영화 ‘괴물’을 보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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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에 앞서, 본문에는 최신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 부탁드립니다.
** 노래와 함께 감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각자가 생각하는 괴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너부터 시작
괴물은 말야 초록색이고 이빨이 아주 커
다음
괴물은 말야 손톱이 길고 냄새가 나
다음
괴물은 말야 밝은 걸 싫어하고 검은 피를 흘려
다음
괴물은 말야 시끄럽게 기침을 하고 사람을 먹어
다음
괴물은 말야
……
괴물은 말야
……
긴 침묵이 지나고
하나둘씩 눈을 떴을 때
그 애는 울고 있었다
너 왜 울어?
모두가 그 애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흙을 파내려가는 뾰족한 손톱을 생각해 상처 입은 무릎을, 배고파 잠이 오지 않는 매일 밤의 뒤척임을,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해
백은선, 「진짜 괴물」 中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신작, 네가 좋아할 것 같아. 올해 여름, 일본에서 유학 중인 언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언니는 일본에서 우선 개봉한 영화를 보고 내게 연락한 것이다. 그 메시지는 내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된 것이다. 나는 여러 예술 중에서도 영화와 시를 가장 사랑하는데, 아무래도 각각 카메라로, 언어로 특유의 호흡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화는 러닝타임 내로, 시는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두 작품 모두 함축과 비유가 가득 담긴다. 이로써 관객과 독자에게는 극대화된 ‘이미지’가 다가오는데,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서사가 진하게 농축된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제한된, 약 2시간이라는 시간 내에서 가장 영리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는 영화이다. 단순히 강하게 주장하지 않고, ‘영리하게’ 주장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카메라의 이동, 시점, 편집과 같은 영화적 요소와 시놉시스와 대사 등 서사적 요소가 결합되어 진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 그런 것이 좋다. 특히나 나는 ‘그 무엇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영화가 좋다. 나는 사람의 가장 주된 원동력이 분노나 우울이기보다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감정들도 좋은 원동력이 될 수 있으나, 결국 우리가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또 어떤 것들에게 기꺼이 마음을 주면서 가지는 기쁨인 듯 하다. 그리하여 이 차가운 오늘날, 어쩌면 혐오와 냉소로 21세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하여 말하려는 영화가 좋다.
나는 언니가 말한 고레에다 감독의 신작, ‘괴물’이라는 영화의 정보를 나름대로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예고편과 간략한 줄거리를 볼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고, 이건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화겠거니, 생각했다. 어떤 시집을 요약해보라고 했을 때면 난데없이 장황하고 난해하게 말하게 되지만, 직접 읽을 때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비슷한 영화들도 있으니, 나는 직접 보는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3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고대하던 ‘괴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시월의 밤이었고, 비와 바람이 무섭게 불어왔지만, 영화 극장의 관객들 모두 뜨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고레에다 감독과 아역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할 때면 박수와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고 모두가 영화에 대하여 마치 나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지닌 채 모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쏟아져 나오는 박수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내가 흘린 눈물보다는 눈물의 구성 성분, 그러니까 눈물을 흘린 이유에 집중하는 사람인지라 계속해서 궁금했다. 내가 그 무엇 때문에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고,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11월의 끝자락에서, 국내 정식 개봉된 ‘괴물’을 다시금 보고 느꼈다. 잠잠히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다시금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고민하지 말자고. 더 시간이 지나버리기 전에 내가 느꼈던 그 최초의 감각들을 기록해 두자고.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짤막하고 파편적인 메모들과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이 났던 백은선 시인의 시 두 편을 남겨 두었고, 그 이야기들부터 이 글은 탄생하였다. 나의 사랑을 듬뿍 담아서, 그리고 어떤 말할 수 없는 비밀들과 그럼에도 사랑을 하겠다는 마음을 시로 잘 나타내는 백은선 시인의 시를 빌려서.
나의 감상에 말하기 전, ‘괴물’은 이러한 영화다. 싱글맘 사오리는 아들 미나토의 행동에서 이상 기운을 감지하고, 용기 내어 학교에 찾아간 날 학교의 선생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름을 감지한다. 그리고 사오리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미나토의 친구 요리를 찾아가는데, 그가 다른 아이들과는 무언가 다름을 어렴풋이 인지한다. 미나토와 요리의 담임 선생님은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사오리는 요리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뿐 자신의 아들은 그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따돌림을 당하는 요리를 도와주고, 곁에 있는 사람이 미나토다.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하고 있고, 그 마음의 농도는 무척이나 진하다. 요리 또한 그런 듯 해 보인다. 이렇게 얽힌 관계를 풀어내고, 그 풀어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앞서 나는 영화의 이미지가 영화의 기술적인 요소와 영화의 서사적인 요소에서 탄생한다고 했는데, 내가 남긴 메모들도 각각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바로 구조와 인물. 영화가 어떻게 지어졌는가 그 골조를 살펴보는 부분은 영화의 기술적인 요소에 해당할 수 있고, 그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숨을 쉬는가 읽어내는 부분은 아마도 서사적인 요소에 해당할 테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케이크를 자르듯이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을 찬찬히 나열할 뿐이다. 다만 내가 이 영화의 풍경들이, 그로부터 내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느꼈으므로 그 아름다움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영화는 각각의 부로 나눌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나 ‘헤어질 결심’과 같이 여러 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를 본 적 있다. 전자는 아예 영화 속에서 막이 바뀜을 알려주고, 후자는 굳이 제시하지는 않지만 감상할 때 관객들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괴물’은 ‘헤어질 결심’과 같이 관객들이 암묵적으로 부를 나눌 수 있다. 각각 0부, 1부, 2부, 3부로. 그러나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괴물’이 다른 점은, 이 영화는 경유의 형식으로 각각의 부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이 전개되는 장소에 따라 끊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을 살피며 테이프를 되감듯 구성되어 있다. 0부는 ‘요리’로 추측되는 남자아이가 잠시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1부는 주인공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의 입장으로, 2부는 요리와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 ‘호리’의 입장으로, 3부는 마침내 ‘미나토’의 입장으로 한 사건에 대해 각자가 바라본 것을 영화로써 전개한다. 나는 이것이 과감하면서도 영리한 구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한 번 벌어진 영화의 사건을 각자의 시선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관객은 3번씩이나 같은 장면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지루함이나 ‘굳이 반복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유연하게 장면들을 변주하며, 개인의 오해와 착각을 ‘경유’하여 영화를 진행시킨다. 이를테면 사오리는 미나토의 신발 한 짝이 없는 것을 보았고, 호리 선생은 요리의 신발이 뺏긴 것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리의 신발이 같은 반 아이들에 의해 버려져 함께 하교하는 미나토가 요리에게 신발 한 짝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들을 부수고 나가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구조에서 오히려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에 ‘절대적 진실’은 없다. 각자의 진실이라고 믿는 각자의 입장만 있을 뿐. 이런 입장들을 경유하며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대했는지 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함부로 타인을 재단해왔나, 알지도 못한 채 수면 위로 살짝 떠오른 면만을 보고 감히 내 멋대로 생각해 왔을까. 이렇게 말이다. 속이는 듯 말해주지 않는 ‘경유’ 구조는, 나에게 깊은 감동과 동시에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이 영화는 같은 사건을 세 번씩 보여줌으로써 장면 간의 함축은 적은 편이다. 대신, 나는 이 영화의 비유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이 비유들이 내게 다가오는 영화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앞서 말한 인물의 형태를 빌려 존재한다.
첫 번째로 1부의 주인공인 사오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좋은 엄마다. 가령 사춘기에 접어들어 ‘들어오지 마시오’ 팻말을 방에 걸어둔 것을 보자, 다그치기보다는 베란다에서 나와 보라고 한다거나 등굣길에 물통을 놓고 가려 하자 집의 바깥까지 나와 미나토에게 물병을 쥐여 준다거나. 그런 엄마가 사실은 아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정도는 클리셰적인 설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집중해서 본 것은 사오리의 또 다른 면이다. 사오리는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의도치 않게 압박을 준다. 이를테면 사오리는 미나토와 함께 걸으며 ‘선 밖으로 걸으면 지옥에 가.’ 그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가 어릴 적 했던 놀이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보도블럭을 밟으며 걸을 때, ‘노란 블록 밖으로 걸으면 으악, 죽는다!’ 같은 놀이.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이 대사 두 번이나 등장하는데, 나는 이것이 후에 등장하는 사오리의 대사와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말한다. 아버지처럼 여자를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 되라고. 이에 미나토는 충동적으로 차 바깥으로 몸을 던진다. 나는 이 장면이 굉장히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미나토는 같은 반 남학생인 요리에게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런 미나토에게 여자를 만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가정을 꾸리라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가올까 싶었다. ‘선의 바깥’으로 가면 지옥에 간다는 엄마의 농담은, 단순히 농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바라는 사오리의 말이, 미나토에게는 하나의 강박적인 선으로 다가온다고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미나토는 어머니인 사오리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생겼을 것이고, 자신을 ‘괴물’이라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에 영화의 제목이 왜 괴물일까, 의아해했으나 영화를 보는 동안 천천히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2부의 주인공인 호리 선생에 대하여다. 호리는 겉보기에 좋은 선생님으로 보이지만, 어쩐지 이상한 면 또한 보이는 선생님이다. 음침한 속내를 숨기고 있다기보다는 덜 성장한, 미성숙한 아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출판된 책에서 오타를 찾아내 출판사로 연락을 하는 취미를 지녔다던가, 자신의 아이가 학대당한다 생각하여 학교에 찾아온 사오리를 편모 가정의 어머니는 과보호가 심하다며 이야기하다, 사과할 때 어리숙하게 말하며 이야기 도중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사탕을 먹는다던가. 그럼에도 반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며 따돌림을 당하는 요리까지 챙겨주려 애쓴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키우던 금붕어를 변기에 버리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다. 그는 분명히 좋은 선생님이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이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호리 선생의 캐릭터성이 굉장히 좋았다. 그 이유는, 어쩐지 호리 선생이 미나토를 만나지 못한 요리, 요리를 만나지 못한 미나토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들의 진정한 마음을 알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압박을 주는 사오리 같은 어머니. 또는 일찍이 아들의 성향을 알아차리고 –요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미나토를 보고, 요리는 자신도 그런 적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아 추측하건대- 너는 인간이 아닌 돼지의 뇌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과 아내가 이혼한 것 또한 아들의 탓이라고 ‘가스라이팅’하는 요리의 아버지 같은 사람. 호리 선생도 작중에서 아버지가 없이 자랐다고 하는데, 그런 보호자 아래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호리 선생 역시 홀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다가 어른이 된 것 아닐까. 자신을 사랑해주는 미나토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한 채. 자신에게 두근거림과 소중한 순간들을 안겨주는 요리를 만나지 못한 채 말이다.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사회에서는 이상하고 음침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한쪽이 무너져 내린 채 자라서 그것이 기이하다 느껴지는 ‘괴물’로 자란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 ‘괴물’이 큰일을 하는데, 바로 영화 속에서 누구보다 먼저 요리와 미나토의 관계를 알아챈다. 출판된 책에서 오자를 찾아내길 좋아하는 습관을 토대로 말이다. 요리가 미나토를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암호를, 작문 시험지에서 두 사람의 관계성을 읽어낸다. 그리고 폭풍이 들이닥치는 날 미나토의 집 앞으로 가서 사과한다. ‘미나토 미안해, 선생님이 잘못 알았어. 너는 잘못한 게 없어.’
3부는 이렇게 호리 선생이 미나토의 집 앞에서 사과하는 장면 다음으로 시작한다. 미나토는 자고 일어나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3부의 첫 장면인데, 이후 사오리의 설명이 이어진다. 미나토는 어릴 적부터 자고 일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꿈을 꾸었다고. 러닝타임 내내 무뚝뚝해 보였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리고 사랑에 진심을 다하는 아이였음을, 관객들은 그제서야 알게 된다. 그런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한다. 같은 반의 남자아이들이 대놓고 요리를 괴롭힐 때, 그 상황이 싫어서. 그리고 나설 수 없는 자신이 미워서, 미나토는 분노를 발산한다. 역시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여’ 타인에게 미나토는 ‘괴물’이 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교장 선생님과 단둘이 있을 때, 미나토가 고백한다.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애와 행복해질 수 없는 걸 알아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이렇듯 내면의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미나토를 분노와 슬픔에 찬 ‘괴물’로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진정한 괴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고, 때리고, 피해를 입히는 이들은 괴물이 아니다. 그저 인간 이하의 나쁜 것일 뿐이다. ‘괴물’이란 타인에게는 두렵고 이상하게 보이며 자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그런 슬픈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영화에 ‘괴물’이라는 제목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중후반부에서는 요리와 미나토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오래된 기차 속에서, ‘괴물은 누구게’ 게임을 하는 것이 나온다. 하나의 생명체를 그려 카드를 만들고, 그 카드를 이마에 붙여 서로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그렇게 설명을 듣다 자신의 카드를 알 것 같을 때 정답을 외치는 게임인데, 게임 속 생명체는 느릿한 달팽이, 공격을 받아치지 못하는 나무늘보,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주 세뇌당하는 돼지 등 대개 요리를 나타내는 동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딱 한 번, 이 영화에서 정말로 괴물이 그려진 카드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괴물은 검은 색 하트에, 팔과 다리가 달려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건 그저 평범한 사람- 팔과 다리가 달려 있다-과 사랑-하트의 형태이다-을 가장 닮은 형태인데. 특별할 것 없이 그 무엇이든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요리와 미나토는 영화의 엔딩에서, 아지트 밖으로 나와 자신들만의 천국으로 향한다. 폭풍이 들이닥쳐 두 사람을 찾는 어른들은 뒤로 하고, 두 사람은 길고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들판으로 향한다. 요리는 ‘우리 다시 태어난 건가?’ 하고 묻지만 미나토는 그대로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요리는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고, 두 사람은 빛 사이를 질주하며 영화가 끝난다. 나는 이 엔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데,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는 빛과 점차 밝아지는 화면이 내게는 두 사람이 축복 받는다는 이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리와 미나토의 대사도 인상 깊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그러니까 돼지의 뇌를 가졌건 내가 괴물이건 어떠한가. 우리는 비록 ‘길고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지만, 결국 아름다운 들판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서로가 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뛰놀고 웃으며 사랑할 수 있다. ‘괴물’은 나쁜 존재가 아니라 슬픈 존재이므로, ‘괴물’이 마주하는 엔딩은 역시 아름답다. 영화의 해석에 따라 두 사람이 언덕에 간 것이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는 갈리겠지만, 결국 요리와 미나토가 두 사람만의 천국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게 큰 감동과 여운을 주었다.
‘괴물은 누구게?’ 예고편에서, 그리고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관객석에 앉아 있던 나에게도 깊게 다가왔는데, 괴물은 결국 앞서 느낀 것과 같이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녔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껴안고 앓고, 미나토와 같이 잠에서 깨어나 눈물을 흘리던 이들이 괴물로 자라난다고 생각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 숨겨야만 하는 비밀 같은 마음, 아직은 꺼내놓기 어려운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웃으며 달려 나가는 엔딩을 맞이하는 ‘괴물’들.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덩달아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또 가족 이야기를 할까?’라는 농담을 들었을 만큼, 평소 감독은 가족 서사에 충실하다. 그러나 이때까지 만들어온 작품들에 안주하지 않은 ‘괴물’이 나에게는 특히나 깊이 있게 다가왔다. 이것은 ‘정상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더 다양한 ‘사랑’을 노래하며,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나 역시 사랑이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말한 것처럼, 영화를 보고 난 뒤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메모를 작성하며 미나토의 마음을 되새겼다. 또 한 번 미나토가 지나온 순간들을 살펴보기도 하면서. 과연 무슨 마음이었을까 떠올려 보았다. 이건 미나토를 ‘괴물’이라고 만들 만큼 슬프고 비밀스러운 사랑이었지만, 그건 사랑을 버릴 수 없을 만큼, 자신을 ‘괴물’로 만들 만큼 끝까지 끌어안고 싶었던 소중한 마음이었을 거다. 또한 미나토와 그 순간들을 공유하던 요리를 떠올렸기도 했다. 더불어 한때 호리 선생에게도 그런 마음들이 있었을 것이고, 사오리나 교장 선생님에게도 꼭 특정한 누구를 사랑하는 순간은 아니더라도 자신이 ‘괴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순간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 지점에서 지나온 나의 사랑들을 겹쳐볼 수 있었는데, 이런 마음들로부터 오늘날의 내가 있구나, 나는 ‘괴물’이었지만 그건 아주 슬픈 일이 아니었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집에 도착하였다.
나는 이 글을 역시 백은선 시인의 시로 닫을 것이다. 반 아이들에게 ‘외계인’이라고 놀림 받던 요리를 생각하며. 외계인을 사랑하는 미나토를 생각하며.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해서 또 틀고 또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 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중략)
바다에서 떠내려온 닳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주웠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백은선, 「사랑의 역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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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코
- 2024-05-30
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 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 통증이 밀려온다. 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 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 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 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민음사 시집 특유의 간결한 만듦새와 옅은 초록빛 포인트,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산뜻하게’하겠다는 시집의 첫인상은 마냥 밝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웃기만 하는 아이처럼. 아직은 어떤 바람도 맞아본 적 없는 유목처럼. 그러나 얇지 않은 두께의 시집을 모두 읽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겹겹의 나이테를 둘러싼 나무와 같다고. 세월과 세월을 조심스레 겹치며 몸집을 불려 온 것만 같다고. 그러한 감상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은 상처 사이를 거닐어 본다. 보통 나이테라는 단어를 제시하였을 때 사람들은 나무가 훈장처럼 견뎌온 시절을 떠올리고, 이는 자연스레 좋은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러나 정재율의 시가 껴입은 나이테는 상처와도 같다. 계절마다 다른 속도로, 이따금 느리게 어쩌면 빠르게 자라나며 세포들이 분열한 흔적, 마음에 새겨진 상처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오며 어딘가 ‘터지는 소리’부터 ‘사람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물탱크」) 넘어졌을 때 얻은 상처. 그리고 그 곁으로 살이 ‘산뜻하게’돋아나기 위해, 정재율의 시가 존재한다.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에서 죽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죽음이 시적 화자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를 위해 과장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보호자의 마음처럼, 지금 화자가 있는 곳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시이자 시집의 첫 시 「물탱크」에서는 도입부부터 누군가의 자살을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는데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나는 장례식장에 들러상주와 대화를 나누고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쿵쿵 울리는 소리에몸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손이 빨갛게 달아오는 것을 보았다그 손으로 악수를 나눈 것까지 다음 날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물탱크가 터지는 소리였다그
- 모모코
- 2024-05-28
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
- 모모코
-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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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안녕하세요 멘토님! 늘 제 글만이 아니라 댓글까지 꼼꼼히 읽어주시고 피드백 달아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도 댓글을 빌려 몇 가지 말씀 드려보아요. 우선 멘토님 오신 이후로 이곳에 영화 관련 글은 처음 올려보는데요, 저는 문학 뿐만 아니라 제가 감각했고 사랑하는 모든 작품들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다양한 도전을 하고 있고, 우선은 천천히 영화에 대해 익히고 있어요. 근래 제 감상 감각을 일깨우는 영화가 없었는데... '괴물'이 저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답니다. 그나저나 저번에도 하나의 생각 덩어리, 단어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드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멘토님의 그런 피드백 방식이 정말이지 좋아요. 구체적으로 퇴고 방향을 알려주시는 것 같고, (늘 글을 올리면서 어딘가 부족하다 느끼지만 어디가 부족한지 아는 시와 다르게 그걸 인식하진 못하고 있었거든요.) 더불어 사유의 확장을 촉진 시켜주시는 것 같아 감사드려요. 멘토님을 만나고, 그저 가끔씩 쓰던 감상글들이 저의 취미의 일부가 되었어요. 나 자신-시=o 이었으므로... 꽤 고민이 되고 괴로운 날들을 보내 왔는데, 요즘은 매너리즘이 올 때 마다 감상글을 쓰고 멘토님의 피드백을 참고하여 퇴고하고 있어요. 전부 올리지는 않지만! 아무튼 저번 글 마지막에 남겨주신 코멘트가 인상 깊었어요.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읽어내야 한다는 글이요. 최근 강지이 시인 시집에 빠져 있는데, 멘토님의 해석글 부분을 읽으며 저도 이렇게 타인의 글을 깊게 읽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 정진해야 할 것 같아요. 강박적으로 쓰는 건 아니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며 더 많이 사유해야겠다는 생각! 이번에는 감상글을 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영화 '괴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괴물'이라는 제목에 집중하여 한껏 파고들어 보았고 제가 주장하는 느낌들이 잘 뒷받침되도록 문장들도 배치 시켰어요. 글의 구조도 촘촘히 짜려 노력했고요. 요즘은 적절한 단어를 적절한 위치에 놓는 일에 대하여 늘 고민해요!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벌써 12월이 다가와요. 멘토님도,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추신) 오늘 개봉한 영화를... 스포일러 해서 죄송해요 멘토님. 그치만 제 감상 욕구를 참을 수 없을만큼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