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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레이어를 파고들면서– 김리윤 『투명도 혼합 공간』을 읽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0-27
  • 조회수 802

1. 투명도

 

김리윤 시인의 시를 읽고 있자면마치 잘 세공된 유리 공예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빛을 투과하며투명하거나 때로는 불투명한 세계의 면을 다채롭게 보여준다투명도 혼합 공간의 첫 번째 시에서는 이것은 전기로 작동되는 신이 들려준 이야기’(재세계reworlding)라고 말하며 시집의 문을 연다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김리윤 시인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노래한다시인이 펴낸 시집으로는아직은 투명도 혼합 공간이 유일하다그러나 이 한 권의 시집 속에서도 그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매력이다. ‘투명도는 빛이 얼마나 통과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정해지곤 한다시인의 시 속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며 날마다 접하는 사람정물 그리고 사건들은 어떤 투명도를 지니고 있는지 정의된다.

 

이렇게 시 속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것들은, ‘여름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근미래) ‘우리가 이 날씨를 다 망쳐버렸다고 (사실은 느낌이다말할 만큼 유약하고 불안정하다동시에 전 재산을 모조리 잃고도 다음 칸에서는 끈적한 여름 바닷가에 드러누워 칵테일을 마시는 세계를 그려내거나 어디로든 전진하는 세계를 찾아 나아간다이처럼 희망 같은 빛을 받아 마시며 존재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그려내는 김리윤 시인의 시는 아름답게 빛난다.

 

 

2. 혼합

 

글라스 하우스* 

 

눈동자는 눈앞의 풍경을 비추고 연인의 눈동자는 등 뒤의 풍경을 비춘다 여름 숲에서 연인의 눈 속은 유리창 너머의 실내처럼 무성한 나뭇잎 사이 한 줌의 어둠으로만 보인다

 

인간의 불안은 벽 때문일지도 모른다고옆에서 발생하는 풍경의 모든 순간을 볼 수 있다면 불안하지 않을 거라고 치과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그의 연인은 말했다

 

그년 여름 내내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만 보다가 유리로 된 집을 지었다 그 집은 벽 대신 네 개의 커다란 창을 가졌다 눈동자의 실내 같은 그 집에서는 안팎이 사라지고 옆만 남았다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이 설계한 사면이 유리로 된 주택그는 반세기 동안 파트너 데이비드 휘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이 집에서 숨을 거뒀다.


 

얼굴의 미래 

 

우리는 매일 같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같은 햇빛에게 얻어맞으며 깨는 아침 우리는 아침 빛에 왼쪽을 맞으면 오른쪽을 내어주는 뺨 그 빛 아래에서 몰랐던 털의 존재를 알려주는 얼굴 같은 습도로 눅눅한 티셔츠 단어를 흘러넘치는 우리는

 

그릇은 물에 담길 수 있다 물이 그릇에 담기듯이

가족당 한 부의 신청서만 작성하면 됩니다. (“가족이란 같은 가정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조금은 더 무거워진 가방과 두 사람이 들어서는 하나의 문

이것은 휴가의 끝에 대해 종이 한 장과 두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장면

 

가족

(명사혈연결혼 여부젠더성적 지향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함게 살아가고자 하는 당사자 간의 의사에 따라 맺을 수 있는 공동체법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다신혼부부 전세자금대출공공주택마일리지 합산법적 보호자와 상속자이런 단어들 사이에서 얼굴의 미래를 헤아려 볼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시간의 이름.

 

두 편의 시 모두 시집의 2부에 속한 시이며내가 이 시집을 좋아하게 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글라스 하우스의 경우각주에 나와 있는 대로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이 설계한 주택을 모티프로 하여 쓴 시다이 글라스 하우스에서 필립 존슨은 그가 사랑하던 동성의 파트너와 함께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고 한다얼굴의 미래의 경우에는 시의 마지막에 나와 있는 것처럼 가족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는 시다이로써 두 시의 화자 모두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정상 가족에 들어맞지 않는 가족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럼에도 부조리에 분노하거나 절망하는 대신유리와 같은 문체로 시를 전개한다물론 분노와 절망의 결을 보이는 시가 나쁜 시라고 할 수는 없으나지난날 여러 번 정상 가족에 대해 고민하고 또 슬퍼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맑은 결의 시가 깊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사랑하는 사람을 유리에 비추어 보며 차갑고 단단한 세계 속에서 달구어진 채 부드럽게 일렁이는 마음을 껴안고 나아간다두 가지의 느낌이 드러나는 시는 가히 유리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불투명하게 보는 사람은 마음은 편할지언정 아무것도 모른다대신 세상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이는 가끔 좌절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들을 확실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이것이 김리윤 시인의 시 세계가 흘려보내고 있는 이야기다.

더불어 위 두 편의 시뿐만 아니라 이 시집 속에는 미래가 들어간 단어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시인이 다루고 싶어 하는 세계와 사랑에 나타내는 시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아도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세계를 사랑하기에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음을.

 

영원에서 나가기 

 

우리도 다 늙었나 봐

꽃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던 친구들아

우리는 열심히 웃느라 늙는 일도 깜빡한 것 같았네

 

그런데 다 늙는다는 건 뭐지?

우리가 자라온 시간

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잔뜩 가진 사람들

 

친구의 품에 안긴 작은 사람의 이마에서 꽃잎은 얼마나 거대해지는지

손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쉽게

두 손가락 사이에서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는지

 

나는 발이 없는 것만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다정하게 말하듯이 시작되는 이 시는짧지 않은 길이임에도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유지한다다양한 질감의 사물을 펼쳐 놓지만 단조롭거나 정신없지 않고 시 속의 문장들처럼 다채로운데이는 여러 색깔이 어울려 만들어낸 그라데이션 같다세 부분으로 나누어 시를 읽어볼 수 있겠다.

우선 도입부를 살펴볼까, ‘는 일만이 우리가 영원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우리는 영원하지 않아 변화할 수 있다이를테면 우리는 두 손가락 사이에서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는’ ‘손바닥에 떨어진 꽃잎’ 같지만, ‘친구의 품에 안긴 작은 사람의 이마에서’ 거대해지기도 하는 꽃잎처럼 작아 본 적이 있는 것만이 커질 수 있다. ‘발이 없는 것만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처럼그러므로 영원에서 나가는 우리가 성장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늙었다는 건 성장했음의 증거이고.

다음으로는 새가 창문에 치여 죽는 버드 스트라이크가 시적 소재로 등장한다이 등장은 조금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지만 김리윤 시인의 시편을 꼼꼼히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알 테다시인은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 가져와 우리의 세계가 아주 밝지 못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세계의 근원은 이제 전기라고’, ‘그런 빛에 마음이 기울도록 설계된 것이다 우리는그래서 아주 환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재세계reworlding)처럼 말이다. ‘집이 불에 타오를 때만 비로소 건축 구조를 목격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문장 또한 같은 맥락이다.

마지막으로 당혹스러운 세계의 레이어가 있음에도 화자와 우리는 환상을 보면서도 화면 바깥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다영원에서 나와 성장한 우리는 열매들이 썩어갈 때에도 다음 계절에 열릴 꽃의 모양을 본다’. ‘그런데 다 늙는다는 건 뭐지?’라는 도입부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세상을 좀 더 밝은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굳어버린 새의 형태를 살피고열매가 썩어가도 꽃을 기다리고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빛이 스며든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3. 공간

 

나 또한 그림과 그래픽 작업을 사랑하고한때 관련 분야에서 종사하길 꿈꿨던 적 있다그러므로 나에게 우리와 세계가 단단하게 묶인 레이어라면’ (영원에서 나가기)라는 시구가 깊숙이 다가올 수 있었다레이어는 사전적 의미로 층과 계층인데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레이어 위에 작업을 하고 이것을 쌓아 나가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다양한 물질로 이루어진 레이어가 모여 세계가 만들어진다.

 

김리윤 시인은 그 다양한 물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루는데, ‘이 이렇게 맑은데도 깊어지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유리를 통해 어둡게걸 신기해하거나, ‘사랑의 형식을 유리처럼 밟으며 와장창 웃으며’ ‘깨뜨리며’ ‘미래로’ (이야기 깨뜨리기가기도 한다이렇듯 시인은 세계의 다양한 면모-레이어-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이것을 사물의 물성으로 나타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모든 시 속의 여름연인미래세계빛 따위의 말은 허상으로 이루어진 거라고 믿었다좋아하지 않았다더불어 여름이라는 계절을 좋아할 수 없었다내게 여름은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는 여름이었다그러나 이 시집은 그러한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앞서 소개한 시이자 김리윤 시인의 등단작인 글라스 하우스를 읽고서는 내 마음의 온도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최승호 시인의 말마따나 나는 오랫동안 너무 춥게 살지 않았는가싶었다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이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을마음을세계를 위한 미래를 그려낼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그리고 다음 여름이 오면 나 또한 여름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시집을 들고 2022년 여름의 끝부터 2023년 여름의 끝까지 여러 계절을 건너왔다그 사이에서 김리윤 시인의 시집을 쥔 채 많은 걸 배웠다이 시집을 들고 간 교보문고 계성원에서 여름의 사랑스러운 구석을 찾아냈고연인이라는 게 더는 허상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의 사랑을 찾아보기도 했다친구들과 미래를 그려 내보며 세계를 기대하기도 했다그렇게 춥지 않게 살아가니 소중한 게 늘어났다그 사이에서 투명도 혼합 공간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다시 이 시집을 한 권 더 사게 된 올해의 팔월에는나 또한 이제 내가 사랑하게 된 여름그 여름에 대해 노래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믿고 싶지 않을 환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세계의 한 구석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도 생각한다그러나 김리윤 시인의 시는세계의 레이어만이 아닌 우리 마음까지 섬세히 파고들며 닫아 두었던 창을 열어둔다맑고 밝게.

 

우리는 그렇게 속눈썹 사이로 스며들었던 어둠을 거두어 낼 수 있을 테다김리윤 시인의 시를 읽으며, ‘글라스 하우스를 지나고 영원에서 나가, ‘얼굴의 미래를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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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에서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퇴고)

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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