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기꺼이 모험하고 사랑하는 도로시 – 권누리의 『한여름 손잡기』를 읽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09-19
  • 조회수 733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도로시어느 날 태풍에 휘말려 마법의 대륙 오즈에 떨어지고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이것이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소설 오즈의 마법사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오늘날 우리 근처에도 도로시가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누워서 입안 훑어내면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세계가 (니팅레이스있을 만큼 이 별은 크고 넓으므로,

만약 당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면기꺼이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를 내밀고 싶다도로시가 다른 동료에게 내민 손처럼이곳에는 내 미래의 수신인은 단 한 번도 나인 적 없다’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씩씩하게’ 걷는 (한여름 손잡기」 79p) 시적 화자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여운 원피스 입고 만나자며 명랑하게 인사하면서도 불온한 신뢰와 불신으로 (도로시 커버리지이루어진 얄팍한 세계를 달려 나가는 도로시들이 살고 있는 한여름 손잡기.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허수아비양철 나무꾼겁쟁이 사자에게 각각 세 번의 손을 내민 것처럼이 시집에서도 세 번의 한여름 손잡기가 등장한다제목이 같은 각각의 시들은 고유한 온도와 리듬을 지니고 있다마치 사람의 손바닥에 머무는 온기처럼가슴팍에 살고 있는 심장 박동처럼그리고 이들이 맞잡고 껴안을 때면 타인들에게 전염되듯이 시 속의 요소들 또한 에 머물지 않고 시 곳곳에 배치된 ’ 또는 우리로 번져 가려 한다가령 의 옆에 나란히 누워 너는 행복할 것이라 속삭이는 것처럼. (한여름 손잡기」 39p)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하지만 그래서’ ‘내내 그것만 열심히’ 한 것처럼. (한여름 손잡기」 79p)

시인의 말에서 그러니까 이제 아무도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등장할 만큼, ‘불쑥 자라나는 유령들’ (카메라옵스큐라)들이 거리에 나타나고 조금씩 슬퍼지는’ (소유병을 앓게 되는 세상한여름 손잡기』 속 도로시는 태풍처럼 발목을 휘감고 먹구름처럼 그늘을 만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태풍에 휘말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층층이 나의 흔적을 남겨두는’ 일을 하는 (초월도로시그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그 시와 권누리 시인의 시적 세계에 흠뻑 빠지게 된다.

 

 

여름타바코

 

나는 이해할 수 있는 문장만 쓰고 싶어 리타가 타바코를 굴리며 말했지 하지만 어떤 인간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깨닫고 인정하는 법 알기를 쉽게 포기했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안전한 공간은 필요하니까

 

풀밭 위에 자리를 펼쳐 놓고 아무것도 걸지 않고선 내기를 시작했다 나는 칭찬받을 수 있는 거짓말만 하고 싶어 빛의 총량이 서서히 닳아가는 이곳에도 최소한의 낙관은 남아 있어 우리 원하는 만큼 잠들어 있자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랑만 하고 싶어

 

타바코가 굴러가고 여름은 등을 돌리고

 

리타는 아름다운 것을 끌어모아 잿더미로 만드는 취미가 있었고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물려주는 타바코여름타바코

 

오해할 수 있는 진심만 갖고 싶어?

 

인간의 뒤라는 건 왜 이렇게 단단하고 연약하게 만들어진 걸까 나는 이제 거절할 수 있는 미래만 갖고 싶어

 

사랑하는 것들 모여 있는 거대한 유원지 솟구치다 꺾어 돌고 바닥 치는 롤러코스터와 솜사탕 가게의 명랑한 음악 소리 물 담긴 붉은 대야 위 둥둥 떠다니는 엄지만 한 슬픔을 얇은 습자지 뜰채로 건져내는 놀이 다섯 번에 삼천 원 퍼낸 슬픔은 숨이 죽은 인형으로 교환해주는 귀여운 풍경 몰래 피어오르는 한 줌짜리 불씨 그건 누구도 모르게 타바코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작은

 

캠프파이어,

불꽃

 

 

위는 한여름 손잡기에서 가장 주목하여 읽었던 시편이다체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시인은 아이돌 덕질을 좋아하고더불어 아이돌의 노래로부터 여러 시를 써왔다고 한다그래서일까읽는 동안 나에게만은 아이돌인 인디 뮤지션의 노래가 떠오르는 시였다러블리서머쨩의 당신은 담배 나는 비눗방울 (ラブリーサマーちゃんあなたは煙草 はシャボン)이라는 곡으로, ‘매일 흐린 하늘이 비로 쏟아지거나’ ‘재가 되어버리는’ 세계 속에서도 비 냄새가 밴 그 여름을 떠올리며 담배를 물고 있는 당신을 그려내는 노래이 노래 속에서 당신은 어른스럽고 나는 둥둥 떠다니지만 무지개 빛깔로 공교롭게도 권누리 시인은 퀴어시에 대해 생각하며 쉽게 여성으로 느껴지는 인물들로 시를 써낸다고 한다무지개는 퀴어의 다양성과 평화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빛나므로당신은 담배이며 나는 비눗방울이라 칭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 시 속에서는 말 그대로 단단하고 연약하게 만들어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마치 앞서 언급된 비눗방울처럼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으면서도 한 번의 노크에 터져버리는그런 마음. ‘나는 이해할 수 있는 문장만 쓰고 싶다 말하거나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랑만 하고 싶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사실 깨닫고 인정하는 법을 보이거나 최소한의 낙관은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를 지닌 시적 화자는 에메랄드 시티의 마법사를 찾아 걸어가는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와 닮았다마법사 대신 마법 같은 사랑과 미래와 진심까지 당차게 걸어가는 사람.

 

한편 타바코즉 담배는 시 속 리타가 굴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종이 속에 연초를 넣어 만들어진다처음 시를 읽을 때엔 타바코를 굴린다는 표현부터 이 정물의 등장까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거듭 읽는다면 그 무엇보다 타바코를 아름답게 풀어낸 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독백하듯 두어 줄씩 쓰이던 시가 마지막에 가서 놀이공원의 풍경을 그려내며 줄줄 쏟아지는 이미지로 전환된다그리고 적힌 캠프파이어불꽃’. 타바코는 아름다운 것을 끌어모아’ 만든 것이자 지난 계절들의 추억이고여기에 불을 붙여 환하게 만들 수 있는 캠프파이어불꽃은 누구의 마음속에나 누구도 모르게’ ‘작은 풍경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이렇듯 비눗방울과 담배가 교차하며 그려내는 듯한 여름의 싱그러움은시 속 도로시의 마음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낸다.

 

 

구르는 여름과 도로시

 

여름이 구르는 건 누군가 열심히 발로 차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한때 그 애가 여름 굴리는 걸 오래 지켜보았다.

 

그 작업은 몹시 정교하고 명료하게 이루어졌고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가만 쳐다보면 그 애는 이곳부터 저곳까지 여름을 차며 걸었다여름이 구른 자리마다 축축하게 땀이 흘러 바닥이 짙게 젖었다.

 

규칙 없는 궤도뜨거운 공기

 

눅눅한

 

젖지 않는 커튼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더 단단한 여름을 위해.

 

물을 섞어준다천천히이따금 여름이 토하는 너무 많은 비는 그 애를 슬프게 했지만여름이 잘못된 길로 든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것을 바로 놓을 수도 있었다.

 

한번은 여름을 가방에 넣고 바다로 갔다그 애는 모래를 밟고 걸었다맨발발등은 까맣게 타가고

물에 닿지 않는 복판에 여름을 얌전히 내려두었다.

 

여름은 낯을 가리는지 작게 웅크렸고그 와중에 더욱 단단해졌고 그 애는 발가락을 접었다 펴며 간지러워하며 여름을 굴렸다.

 

여름은 모래투성이가 되었고 여름은 즐거워 보였고 여름은 제법 행복한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고,

 

나는 한때 그 애가 여름 굴리는 걸 오래 지켜본 적이 있었다.

 

 

한편여름은 싱그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규칙 없는 궤도와 뜨거운 공기가 공존하는 눅눅한 밤이 있고이를 자세히 다룬 구르는 여름과 도로시」 또한 인상 깊게 읽어냈다앞서 한여름 손잡기의 손잡기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봤다면이 시에서는 화자의 한여름에 대해 알 수 있다대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들은 시 속에서 추상적으로 발화되기 마련인데그러한 점에서 여름 또한 구체적이거나 섬세하게 표현되지 않고 하나의 개념에 머무르기 쉽다하지만 권누리 시인은 그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나아간다표제작과 시집에서 당당히 한여름을 내세운 것처럼여름을 내세우는데도 멈춤이 없다. ‘여름이 구르는 건 누군가 열심히 발로 차고 있기 때문이라며 모든 생명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여름의 뒷모습을 그려내거나, ‘여름이 구른 자리마다 축축하게 땀이 흘러 바닥이 짙게 젖었다고 말하며 여름의 질감을 텍스트로 나타내기도 한다.

동시에 시의 후반부에서는 여름을 하나의 물건이나 생명처럼 취급하는데이는 시적 화자가 여름을 애틋하게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정교하고 명료하게’ 여름을 굴리며 가는 그 애처럼시적 화자는 여름 풍경과 그 풍경 속에서 느낀 마음들을 눈사람처럼 조심히 굴리고모래성처럼 천천히 쌓아가며 시적 표현으로 발화한다. ‘여름은 모래투성이가 되었고 여름은 즐거워 보였고 여름은 제법 행복한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고,’와 같은 담담한 어조 또한 눈에 띄는데감정 과잉 상태에 접어들지 않고서 지난 계절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여름 모빌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 꾸미는 일을 한다

 

그것이 이번 생 내게 주어진 일이다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길게 내려도

물결처럼 들이치는 빛

이런 눈부심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죽음도 깨울 수 있겠지

 

나는 눈을 뜬 이 방에서 큰 계획을 만들어본다

 

더는 죽지 않을 것 단,

또 죽게 된다면 되살아나는 일은 그만둘 것

머리를 묶은 검은 공단 리본에 달린

모조진주가 달랑거린다

꼿꼿이 선 것만이 아름답다고 믿는다면

 

요람은 더욱 푹신해지고 몸을 구겨도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이용 침대 곁에서

웅크린 채 잠든다 높이 매달아둔 모빌은

 

파르르 돌아간다 소용돌이의 소용돌이의 소용돌이가 무수한 소문을 만들어내면 거기에는

 

여름의 조각에 비싼 값을 매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팔아대는 나의 영원하고

무용한 사랑이 있다

 

 

나는 이 시야말로 눅눅하면서도 고유의 온기가 있는 시라고 생각했고내가 생각했던 도로시’ 같은 화자가 떠오르기도 하는 시라 느꼈다.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 꾸미는 일을 한다는 첫 구절부터 굉장히 인상 깊은데우선 이제는이라는 수식어가 흥미로웠고 다음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을 꾸민다는 행위가 흥미로웠다한때 사람들로 북적였으나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여전히 이것을 가꾸고 꾸준히 장식하는 화자는 어떤 사람일까더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절망감보다는 누군가 올 수도 있다는 미래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화자는 아마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더불어 그것이 이번 생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한 여정의 주인공인 도로시’ 같다고 생각하게 했다. ‘나는 눈을 뜬 이 방에서 큰 계획을 만들어본다는 서술 또한 당차고 그럼에도나아가는 화자를 그려보게 되어 좋았다.

한편 이 시에서는 모빌이 핵심 정물로 사용되고 있다이 모빌 속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닿을 수 없는 세계인데, ‘높이 매달아두었으므로 만질 수 없고 무수한 소문이 웅성거리기만 하는 화자와는 먼 세계우리가 보았던 모빌은 대개 어릴 적 누워서 본 것들인데이때는 직접 만져보지 못하고 빙글 돌아가는 모습만 지켜보지 않았던가이렇듯 화자는 몸을 구기고 어린이용 침대 곁에서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어린 도로시가 바라보는 너무나도 넓고 복잡한 이 세계 같은 모빌을 지켜보는 것 아닐까싶었다.

 

권누리 시인과 그의 시가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사랑의 달인이거나사랑을 아주 잘 한다 느껴지지는 않는다다만 누구보다도 사랑을 등지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이 보인다대개의 시에서 ’ 또는 언니’, 그게 아니라면 특정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고그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화자들이 보인다시는 개인의 체험을 시적 언어로 빚어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 예술이라고 믿는다그러므로 보통 자신의 이야기자신만의 감정을 이야기하기 쉬우나 권누리 시인은 늘 누군가 함께 하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채널 예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스스로 공주를 사랑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유어마인드 홈페이지에서는 사랑과 애도를 연습하며 살아간다’ 고 밝혔다다만 생이라는 모험을 진행해나가며그 속에서 사랑을 찾고 찾아낸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누구보다 뚜렷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한여름 손잡기우연히 서점의 서가를 구경하다 발견한 책이었다이 시집을 처음 마주한 어느 겨울날봄날의 책 시인선을 처음 만나 보았다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표지수채화로 그린 듯 옅게 번진 물가의 빛들, ‘그러니 이제 더는 아무도 죽지’ 말아 달라고 하는 시인의 절박함모든 것이 새로웠다패딩을 껴입고 있던 한겨울에는 느낄 수 없는 기후태풍이 온 뒤의 세상처럼 혼란스러운 오늘날을 기꺼이 걸어 나가며사랑하는 한여름 손잡기』 속 화자들그런 화자들을 통해 시집마다 있는 고유의 기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금 눅눅해져도 좋으니 뜨겁게 맞잡을 도로시의 손이 필요할 때면 이 시집을 꺼내 읽게 되었다더불어 권누리 시인 또한 문장의 소리’, 이영주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이 시집은 용기를 주는 시집이 아닌가 말했을 때 타인에게 용기를 주는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가하며 권누리 시인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그가 앞으로 기꺼이 걸어 나가며 사랑할 것들이 기대되기도 한다그러므로 당신들 또한 이 멋진 시인의 기후를 한 번쯤은 맛보았으면 좋겠다다가오는 쌀쌀한 계절에한여름처럼 손을 맞잡으며.

 


추천 콘텐츠

피투성 또는 피투성이 존재들을 위한 시 – 정재율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읽고 (퇴고)

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 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 통증이 밀려온다. 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 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 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 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 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시인만의 단단하고 확고한 시선이 아름답다. 그런데 이때‘넘어진 이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표현의 명료함과 아름다움의 골조를 찾아보기 위하여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을 파고들어 보자. 피투성(被投性), 피가 범벅이 된 피-투성이가 아니다. 한자 그대로 피被라는 접두사에 던질 투投가 합쳐진 단어, 하이데거가 제시한 표현이자 하나의 개념으로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뜻을 내포한다.‘그곳에-있는''현존재', 그러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성질이 바로 피투성이다. 우리는 자의와 관계 없이 이 세계에 탄생했으므로‘던져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어렵다는 결론’(『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부표」)에 도달해 그냥 살아가기로 한다. 시집 속 「초판본 시집」에서 화자에게 ‘친한 선생님’이 ‘선택당한 거 아니에요? 별 수 없죠 계속 쓸 수 밖에 없겠다고’ 말한 것과 같이. 그런데 하이데거의 피투성과 정재율의 시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피투성은 기분 중에서도 불안을 통해 자각된다는 점에 집중해 보자.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공포가 아닌, 막연한 불안 말이다. 이를테면 ‘친한 선생님’에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묻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생의 순간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이렇게 의문을 던지고 한없이 헤매는 과정은 필연적인데, 하이데거는 이 과정에서 인간은 불안을 얻으며 자신의 피투성을 강하게 인식한다고 한다. 던져진 세계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언젠가 ‘그곳’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또 하나의 사실. 실 가닥이 복잡하게 꼬이듯 사고가 전개되며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까지 가닿게 된다. 우리가 마주한 아주 무거운 과제이자 언젠가 마주하게 될 현실, 죽음.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행위를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이라고 일컬었다. 이렇게 세계에 내던져진, 한 마디로 낳아지고

  • 모모코
  • 2024-05-30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피투성 또는 피투성이 존재들을 위하여 – 정재율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읽고

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 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 통증이 밀려온다. 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 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 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 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민음사 시집 특유의 간결한 만듦새와 옅은 초록빛 포인트,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산뜻하게’하겠다는 시집의 첫인상은 마냥 밝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웃기만 하는 아이처럼. 아직은 어떤 바람도 맞아본 적 없는 유목처럼. 그러나 얇지 않은 두께의 시집을 모두 읽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겹겹의 나이테를 둘러싼 나무와 같다고. 세월과 세월을 조심스레 겹치며 몸집을 불려 온 것만 같다고. 그러한 감상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은 상처 사이를 거닐어 본다. 보통 나이테라는 단어를 제시하였을 때 사람들은 나무가 훈장처럼 견뎌온 시절을 떠올리고, 이는 자연스레 좋은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러나 정재율의 시가 껴입은 나이테는 상처와도 같다. 계절마다 다른 속도로, 이따금 느리게 어쩌면 빠르게 자라나며 세포들이 분열한 흔적, 마음에 새겨진 상처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오며 어딘가 ‘터지는 소리’부터 ‘사람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물탱크」) 넘어졌을 때 얻은 상처. 그리고 그 곁으로 살이 ‘산뜻하게’돋아나기 위해, 정재율의 시가 존재한다.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에서 죽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죽음이 시적 화자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를 위해 과장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보호자의 마음처럼, 지금 화자가 있는 곳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시이자 시집의 첫 시 「물탱크」에서는 도입부부터 누군가의 자살을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는데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나는 장례식장에 들러상주와 대화를 나누고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쿵쿵 울리는 소리에몸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손이 빨갛게 달아오는 것을 보았다그 손으로 악수를 나눈 것까지 다음 날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물탱크가 터지는 소리였다그

  • 모모코
  • 2024-05-28
수중에서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퇴고)

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

  • 모모코
  • 2023-12-3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예리

    저번에 모모코님이 '좋은 곳에 갈거예요' 를 읽고 쓰셨던 감상문 덕에 시집이 궁금해져 구매하게 되었는데 이번 글의 '한여름 손잡기'도 시간이 되면 꼭 읽어보고 싶어요. 권누리 시인에게서 사랑을 등지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을 느꼈다는 부분이 시집을 읽고 싶다고 더욱 생각하게 하네요.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 2023-10-11 21:24:00
    예리
    0 /1500
    • 모모코

      @예리 ^___^ 저는 겁이 많아서 온전히 제 이야기를 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끼고, 늘 창작물을 가져와 이야기를 하지요. 하나의 창작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건, 단순히 감상을 노래하는 걸 넘어 저의 자기 표현이기 때문에 그리 말해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권누리 시인은 제가 한 손에 꼽게 좋아하는 시인이기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더욱 기쁘고요.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2023-10-16 18:16:48
      모모코
      0 /1500
    • 0 /1500
  • 모모코

    전에 멘토님께서 남겨주신 댓글 열심히 읽었어요. 에릭 로메르 영화와 비교하는 부분이 제일 좋아하는 부분인데, 말씀해주셔서 기뻤고. 다음에는 에릭 로메르 영화 감상평을 써볼까, 하는 용기가 생기기도 했구요. 주제를 '사랑'으로 포착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고 하셔서, 아 역시 비평이나 감상글은 하나의 주제를 잘 포착해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글의 전체 주제를 잡기 위해서 몇 번의 시집 재독을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아쉬운 점으로 추상적인 문장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요건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글티너 유로치카가 늘 해준 말이라 (멘토님 외의 제 유일한 독자네요.) 고쳐야지!!! 하면서도 못 고치고 있었는데요. 이제 멘토님 말씀 듣고 진짜 정신 차려서, 이번 글 쓸 때 많이 유의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름다운 단어들이 좋은데 그 아름다움이 남들에게까지 가닿을 수 없다면 그건 무용하니까요. 아무튼 기대해주신다는 댓글의 한 마디가 저를 움직인 것 같아요.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꽤 기념비적인 글인데요... 바로 제가 글틴 가입 이후 백 번째로 남기는 글이거든요. 백 번째 글을 시가 아닌 비평/감상글로 남긴 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시집에 대해 쓴 글이므로 기쁘기도 하고. 그래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글틴 졸업하기 전까지 꾸준히 쓰고 이 게시판도 자주 들려야겠어요. 읽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 2023-09-19 22:38:05
    모모코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