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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종말은 올 거야 그렇지만 - 영화 ‘고스트 스토리’를 보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02-28
  • 조회수 1,195

https://youtu.be/hd1lKblspYM

 

 

죽음을 타고서 무엇까지 되어볼 수 있을까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갈까? 저 은하수 너머의 별이 될까, 아니면 자연으로 돌아가 한 줌의 먼지가 될까. 죽은 뒤의 세계가 있을까. 사람들은 심해나 우주와 같이 아득하고 캄캄해 알 수 없는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오랜 시간 전부터 많은 창작물에서 다루어진 이 사후 세계는 언제쯤이면 인기 없는 소재가 될까. 당장 OTT 서비스를 들어가 보면 영화 <식스 센스>부터 <신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와 <소울>까지 수많은 영화가 쏟아진다. 우리 죽음 이후 펼쳐지는 세계를 찾으려 하는 것은, 그저 우리가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슬퍼지는 이야기지만 누군가 영영 떠난 자리에 한 번 가볼까, 향냄새만큼이나 짙은 울음소리에 인간은 생각보다도 더 사회적인 동물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그저 죽어서도 제 몸을 잘 가눌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죽음 이후를 그려보지 않을 테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곳에 남아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사후 세계를 떠올려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미 먼저 가버린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일지도. 개인으로서 한 사람을 살펴보면 단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유한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만 꿈을 꾸게 된다. 오직 유한한 존재들만이 꿀 수 있는 꿈, 무한성을.

 

유령이 되었음은 이승에 남겨둔 것이 있다는 증거

 

죽은 뒤의 세상만큼이나 아득한 OTT 서비스를 유영하다 마주한 작품 <고스트 스토리>. 영화의 일부분이나 대사를 먼저 접하기보단 흑백 포스터를 가장 먼저 만나 보게 되었다. 그곳에 배치된 것은 고스트 스토리라는 영어 단어와 표정이 보이지 않는 유령 하나. 확실히 귀신보다는 유령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모습이다. 호러나 스릴러 영화를 싫어하고 무서운 것을 끔찍이도 기피하는 나조차도 제대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어쩐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두 개의 눈구멍이 난 하얀 천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보이는 유령이므로, 물 먹은 솜 같이 생겨서 어쩐지 정감이 간다. 더불어 스틸컷으로 본 영화의 분위기 또한 물을 잔뜩 먹은 솜과 비슷할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손끝이 버석해지는 겨울에 보면 좋을 것 같다는 핑계로 미루어 두다가, 작년 겨울의 초입에 시청하게 되었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꽤 마음에 들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인 줄 알았는데 기형도의 시 <빈집>이 생각나는 영화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작곡가인 C와 그의 연인 M은 교외의 작고 낡은 집에서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C는 사고를 당해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게 되고, C는 사망 직후 포스터에 있던 바로 그 유령이 되어 M의 주위를 배회한다. 그러나 C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M은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홀로 남은 C는 고독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생전 M과 함께 살던 그 집에서 말이다. 이것이 <고스트 스토리>에 담긴 서사의 전부다. 단편적으로 바라볼 때 이 영화는 죽음 이후 사랑하는 이가 남겨둔 마지막 말이 자신에게 닿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었다. 놀랍게도 이토록 단순한 이야기를 지닌 영상이 92분 동안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뒤를 돌아보면 열리는 기억과 시간의 서랍

 

영화를 보면서 가장 주목하게 된 부분은 바로 프레임이다. 흔히 쓰이는 비율이 아닌, 무성영화 시절에 쓰이던 4:3 화면 비율이나 화면의 끝부분을 어둡게 하는 비네트 효과가 함께하는 등 독특한 프레임이 등장한다. 덕분에 캠코더로 찍은 동영상을 브라운관 TV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는 예전에 함께했던 누군가의 흔적을 되새겨보는 느낌으로, 행복했던 두 사람을 비춘 뒤 한 사람만이 남는 것을 보여주며 C의 죽음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이 화면은 고스트인 C의 시점임을 암시하는데, 자신이 죽고 M과 이별하고 난 뒤 한껏 좁아진 시야를 표현하는 하나의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익숙지 않은 형태로 스크린을 스치는 장면들은 C의 고립감과 공허함을 극대화 시키고, 관객석에 있는 우리가 새삼스레 ‘기억’이라는 요소를 감각하도록 만든다.

 

다음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작중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영화에서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한 장면을 집요하게, 긴 호흡으로 찍어낸다. 이를테면 C의 죽음 직후 텅 빈 영안실에서 고스트 C가 탄생하는 장면이나 슬픔에 빠져 식사를 하는 M을 어떠한 대사나 배경 음악 없이 오 분 넘게 담는다. 요즘처럼 빠른 리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덩그라니 태어난 고스트 같은 장면들. 이 긴 호흡의 장면들은 답답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주기는커녕 카메라로 담아낼 수 없는 인물들의 심리와 현장의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C의 죽음 이후 느껴지는 고독한 시간이 얼마나 긴지, 그 긴 시간 동안 M은 얼마나 짙은 상실감을 지닌 채 살았을지, 두 사람이 만들어 냈던 사랑의 기억이 새겨진 집에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 정적이고 느릿한 장면을 곱씹으며 우리는 영화 속의 두 사람을 더욱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다.

 

표정은 죽고 음계만이 남은 세상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돈은 고작 십만 달러 남짓, 이 정도면 영화가 아니라 뮤직 비디오 수준이다. 이렇게 적은 비용이 든 이유에는 별다른 세트장이나 효과가 필요하지 않았음이 존재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령을 표현한 방법이 꽤 ‘저예산 영화스러운’데, 단순 경제적인 이유로 죽은 이의 혼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눈 구멍을 제외하고 온몸을 가리는 하얀 천은 서구권에서 흔히 유령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으로, 특수한 분장 대신 간단하고도 친밀하게 표현된 유령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찡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공포심보다는 친근함과 향수를 유발하는 이 비주얼의 유령은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무엇보다 적합한 모습이다.

 

더불어 이 유령의 형태는 C의 감정 표출에 제한을 두어 영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장치로도 작용한다. 죽은 뒤 황급히 영안실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온 C에게는 얼굴도, 목소리도 없다. 표정은 천 아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몇 없는 대사는 무음, 모두 자막으로 처리된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C의 감정을 읽을 수 없다. 감히 그 슬픔을, 분노를, 심해 아래에서 끓고 있는 듯한 마음을 어떻게 읽어내겠는가. 영화에서는 갑자기 연인과 이별하게 된 유령의 마음을 바로 보여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읽어낼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대사와 표정에서보다는 몸짓으로, 또는 음악으로 알 수 있다. C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살던 집의 새로운 입주자들에게 온몸으로 화를 내비치기도 하며,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얼굴로 앉아 있다. 이 순간마다 정적이, 효과음이, 또는 음악이 흐른다. 특히나 상단에 첨부한 OST가 흐르는 부분은 압권이다. I GET OVERWHELMED라니, 무엇에 압도된 것일까. 가사에서는 이곳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내가 너무 늦게 와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난밤에 죽어 버렸냐고 계속해서 물어보는 것은 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 그러니까,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는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지구 종말에 관한 기사를 보고서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두 연인이 이별하고, 집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C가 M이 남겼던 쪽지를 발견함으로써 소멸하는 것으로 만남이 있는 곳에 이별이, 이별이 있는 곳에 만남이 피어난다. 여기서 나는 니체의 근본 사상이 되는 영원회귀, 세계와 세계의 모든 것들이 반복해서 존재한다는 사상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살았던 집처럼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변화한다. 이 변화하는 상태가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덧없게 한다. 이 영원회귀사상은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마저 무력해지고 슬퍼할 만큼 사람의 허무하게 만든다.

 

그러나 니체는 이 허무함에 멈추지 않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삶을 긍정하기 위하여 영원회귀를 받아들이라고. 이 순간이 무수히 반복되어도 괜찮을 만큼 지금을 사랑하고, 모든 순간에 가치가 있으니 그 삶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계속해서 이러한 생각을 했다. 영원토록 반복되어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단란한 C와 M의 모습을 보면서, 일상적이지만 그만큼 소중한 순간을 함께 채워나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후 세계에 집중하려고 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때리며 현실 세계에 집중할 것을 당부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이번에는 동양을 살펴볼까. 공자는 제자에게서 사후 세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답한다.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죽은 뒤를 어떻게 알겠나? 이 대답은 마치 공자마저 사후 세계에 관해 알지 못하구나, 정도로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 대답은 지금 내가 걸어나가고 있는 현재 세계에 집중하라는 말이 될 수 있다.

 

오늘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서 좋아

 

인터넷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사진으로 돌아다니는 게 있다. 아이들에게 무서운 것을 물어본 Q&A 모음집 같은 것이다. 여느 어린이들과 같이 상어, 늑대인간, 그리고 귀신 -<고스트 스토리>의 C와 같은 존재라면 무섭기보다는 조금 슬프지만-과 같은 대답이 적혀 있는데, 그중 조금 특별한 대답이 있다. 한 어린이가 대답하길 ‘우리를 천천히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입니다’라고. 이 사진의 웃음 포인트는 전혀 ‘어린이답지 않은’ 대답에도 존재하겠지만, 이건 틀렸다고 부정할 수 없는 웃기고도 슬픈 사실에도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모든 것에는 유한성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래서 유한성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가 더 아름답다는 것 또한 안다. 무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소중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스트 스토리>를 비롯한 멋진 영화는 언젠가 OTT 서비스에서 제공하지 않을 것이기에 소중해 여러 번 봐두어야 하고, 지금 나의 옆에 있는 ‘애착’ 텀블러를 언제까지나 사용할 수 없으므로 소중히 여겨야 하고, 나의 주변 사람들 또한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더욱 소중하게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또, 영원회귀를 떠올리며 허무해지기보단 현재를 충실히 사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소중한 이들의 안녕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타인이 나를 미워할까 두려워하며, 어떤 것을 놓고 왔을까 자꾸만 뒤돌아보는 것보단 그저 내가 있는 지금을 사랑하고, 함께하는 이들을 사랑해야겠단 결심이다. 나는 나 자신을 좀처럼 믿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한 선택이 나의 발목을 잡을까, 후회하게 할까 두렵기도 하다. 그런데 인생은 선택의 연속 아닌가, 그래서 자꾸만 선택하는 삶 자체가 두려울 때도 있었다. 지금도 조금은 그런 기분이 들지만, <고스트 스토리>가 그 기분을 덜어낸 것 같기도 하다. 텅 빈 마음이 때로는 상실감을 불러오지만, 때로는 사람을 산뜻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상실감이자 산뜻함을 발판 삼아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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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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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5-28
수중에서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퇴고)

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

  • 모모코
  •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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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이 표정 없고 말 없고, 그러니까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는 하얀 천을 보고 참 많은 감정들이 이끌어진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눈에 구멍이 뚫린 저예산의 하얀 천을 보며 모모코님이 이끌어 낸 이 풍부한 감정들이 단지 우리 감정의 투사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 같아요. 표정과 소리가 아닌 하얀천의 주름을 보며 무언가를 짐작하게 하는데, 그 자체가 이미 영화라는 매체의 알레이기도 하고, 어쩌면 문학을 포함한 모든 서사 예술의 본질적인 특징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보이지 않는 유령이 새로운 집의 입주자들에게 화를 내다가 해독불가능한 얼굴로 앉아 있다는 대목도 비슷한 의미에서 재밌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과 실망과 종료를 다루고 있지만, 그 영원회귀의 덧없음음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주의, 명랑, 감사를 찾아내는 모모코님의 독법이 인상적이네요. 극단적인 체념과 냉소대신 생활의 면면을 돌아보는 모모코님의 느린 주의력을 저 또한 배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3-03-23 22:20:12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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