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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라는 재생 목록에는 큐트보다 굴욕이 - 시집 '숙녀의 기분'을 읽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01-18
  • 조회수 1,195

‘숙녀’의 기분이라는 제목, 딸기 우유 빛깔의 시집과 그 뒤에 그려진 유리구슬의 삼 박자는 완벽하다. 책을 펼치면 어딘가에서 라일락 향이 날 것만 같고, 꽃잎과 함께 바람이 불어올 것 같다. 숙녀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볼까. 첫 번째, 교양과 예의를 갖춘 정숙한 여자. 두 번째, 성년이 된 여자의 미칭. 이것으로 우리는 얼핏 느낄 수 있다. 이 시집은 어쩐지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길 것만 같다고. 숙녀의 기분은 프릴 달린 양말을 신고 풀밭 위에서 피크닉을 가질 때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글쎄, 정말 이 시집은 그러한 이야기를 담아냈을까?

 

라운드 원, <교생 실습>. 시집에서 가장 먼저 오는 시의 제목부터 그리 아름답지 않다. 라운드 투, <기숙사 커플>. 여기는 더 가관이다.

 

아파, 당분간 너 못 만나

그런데도 방으로 들이닥치면 어떻게 해, 쩝쩝거리면서 왜 내가 먹던 어제 식빵을 먹고 있어, 룸메는 집에 올라갔지 방학이니까, 나는 이제부터 스터디에 갈 거야 그러니까

좀 가, 냄새나니까 좀 가

내 침대에 들어가서는 자는 척 하고 있구나 그렇게도 입지 말라는 늘어난 면 티를 입고서, 굴욕 플레이가 더는 싫어서 너를 만났지 스쿨버스에 캐리어 올려줄 사람이 없어서 너를 만났어 일주일 전부터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기어이 마구 해버렸다 넌 이불 밑에서 번민광처럼 중얼거렸지

내가 시험 떨어졌다고 이러는 거니?

<기숙사 커플> 中

 

아리따운 숙녀와 그의 천생연분 짝꿍은 어느 곳에도 없고, 지독하고 비린내 나는 말로 싸우고 있는 기숙사의 커플 뿐이다. 그런데도 시를 읽으며 웃음이 나오는 건, 이 커플들이 주고 받는 말들의 지독함 때문 아닐까.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날카롭기보다는 일상에서 ‘너 참 지독한 애다’할 때의 느낌에 가깝다,

세 번째 라운드로는 <좀 아는 사이>가 펼쳐진다. 레디, 파이트?가 울려 퍼지기 전부터 진 것 같다, 같은 미용실에서 머릴 했는데 나만 망했고 어른 흉내를 내는 중에다 얕보이는 게 싫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니. 게다가 ‘고개라도 끄덕이지 않으면 당장 나는 할 게 없어진다’니. 멀리 가지 않아도 세 편의 시를 읽으며 깨닫는다. 아, 숙녀는 화자에게서 너무나도 멀리에 있구나. 나에게서 숙녀가 멀리 떨어져 있듯이.

 

시집의 1부 내내 비슷한 광경이 펼쳐진다. 화자는 학생 식당에서 가방을 친구 삼아 홀로 밥 먹으며 아무도 자길 알아보지 않길 바란다. 유일한 친구에게 남자 친구가 생겨 버렸음을 원망하고, 팀플레이랍시고 술을 마시고 다른 아이들 뒷담을 한다. 또 스타크래프트 밴에서 갓 내려 선 스타일인, 나보다 세 살 어려보이는 아이를 노려본다. 영화로 치면 주인공 아가씨보단 그 뒤를 지나가는 조연 1과 같은 상황이다. 드디어 다사다난한 이야기가 막을 내렸나 싶은데, 그 뒤 이어지는 2부도, 3부와 4부도 다를 바가 없다. 화자는 교정기를 하고, ‘여자들만 아는 배’를 핑계로 조별 과제에서 빠지고, 구직 활동을 하러 돌아다니는데다 절교 선언도 한다.

 

현실적이고 마냥 웃을 수 없는 시어들에게 잔뜩 얻어 맞고선 눕는다. 그리고 이쯤되면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시집에서 ‘숙녀’는 화자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보단 화자가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시집에는 종종, 특히 각 부의 끝마다 아름다운 시어로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시들이 등장한다. 실크 양산을 사서 오데코롱 향수를 뿌리는 <로맨티시즘>, 펜던트를 나누어 가지는 <소울 메이트>. 문 뒤에서 히아신스가 피어오르고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크리스털이 떨어지는 <청춘>.

 

떠돌이 악사를 찾아가, 산악 전차를 타고 다시 여행을 시작해

하늘나라 미술관에선 하트 모양의 펀치를 찍고 있었지 라일락의 마지막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어, 사람들은 어떻게 여름을 살아갈까 마음이 지워질 때까지 얼마나 더 꽃잎을 모아야 할까

아무것도 미운 건 없었어 써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지워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나는 또 대문을 닫겠지만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만난 적 없는 눈망울과 이 여름의 공기와, 에테르의, 부서져 흩어지는 에테르의 바다

<여름의 에테르> 中

 

눈부시게 몽환적인 시들이 꿈을 꾸는 듯한. 또는 최면에 걸린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앞선 시들에서는 누군가와 부딪히고 또 넘어지면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화자를 보여주었다면, 이 시들로는 그 화자 내면에 깊게 잠재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이야말로 ‘무의식의 보고’라고 강조했다. 꿈을 제대로 분석하면 인간 행동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꿈은 개인의 욕망이나 의지를 담는다 말했다.

 

빙산의 아랫부분을 보아야 그 빙산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있듯이,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숙녀가 아니지만 화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이 숙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기에 우리는 이 시집을 ‘숙녀의 기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째서 화자는 숙녀를 통하여 굴욕감을 느낄까? 꿈꾸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만 하필 ‘굴욕’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화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숙녀와 이어져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집 속 화자들은 대개 대학생이거나 그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이다. 그러니 숙녀를 바라는 동시에 ‘숙녀가 되는 것에 실패한’ 나잇대의 사람이다.

 

그 실패로부터 오는 좌절감이나 상실감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테다. 앞서 언급한 조연 1이 된 것처럼,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주인공인것만 같은 삶을 살 것이다. 숙녀가 되는 것에 성공한 이 아닌 그러한 이들을 바라보기만 하며 굴욕감을 느끼는 사람, 그가 바로 화자이다. <합격 수기>를 작성하지 못하고, 작성하는 이를 바라보며 ‘오늘을 기억하자 절대로!’라고 외치는 사람 말이다.

 

멍 때리지 마요! 빨리 진도나 나가요 진짜

밟아주래, 원장님이 그랬어, 그래야 되는 인간들, 그래야 인간이 되는 인간들이 있다 특히 떠들어대는 너는 너희 엄마가 자다가 죽어버리면 아침밥도 안 차려놨다고 열 받을 아이로구나, 뭐라든, 그래도 학원에는 오겠지, 달리 갈 데도 없는 너희들, 와서 앉아 있으면 한 글자라도 얻어듣게 되겠지, 나도 지금부터 누가 죽어나자빠져도 너희들 합격률을 올려놓겠어

못할 것 같니?

못할 것 같아 내가?

<오픈 테스트> 中

 

이 시집에서 ‘숙녀’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형성했다가 허물기 위한 장치이자 화자가 선망하는 무언가이지만.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픈 테스트>에서는 숙녀가 되었건 신사가 되었건 상관 없이 ‘인간들’을 부르며 굴욕적으로 세뇌 당하는 기분을 알려 준다. 숙녀라는 이름으로 표상되는 하나의 이상을 주입당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짓밟히고 또 누군가를 짓밟는 우리의 굴욕 플레이를 보여준다.

 

함께 놀아요 보리수꽃차 나눠 마시고 어리광 피우기 놀이해요 나만의 부티크를 갖고 싶고, 여섯 배는 느리게 움직이지만 자꾸만 멍이 들죠 난 유일의 목소리를 가졌고 비밀이 많아! 외쳐보지만 행복해지진 않아요, 걸스카우트 매듭을 배웠는데 제대로 묶는 게 하나도 없죠 어리광을 좋아해요 사랑 얘기만 하고 세상을 몰라요.

<닌나닌나> 中

창밖의 세계는 궁금하지 않아

늘 혼자서 공깃돌을 손등에 올리는 아이

너희들에게 조금씩 웃음을 나누어주면

소켓에 손가락 집어넣은 아이들처럼

너희들은 빛나겠지만

어째서 나는

파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일까

<사춘기> 中

 

숙녀가 되길 실패하기 전, 화자에게도 조금 씁쓸하지만 달콤한 다크 초콜릿 같은 유년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마음이 아프다. 이러한 시들을 읽으며 한때 화자는 여리고 어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사회에 뛰어들어 ‘숙녀’이길 주입당하고 무한히 경쟁하는 지금은 그 시절이 모두 무용하다. 그럼에도 이 시들을 읽으면서 한때 이런 날도 있었지,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잠들고 있었던 기억을 깨우는 건 화자만이 아닐 것이다.

 

기분은, 비단벌레들이 털실을 다 풀면 돌아올 테고 영원히 살지는 못하겠지만 스카프를 두르고 오래된 그림책 위를 날아가네요, 꿀을 넣은 작은 홍차를 마실 거예요, 시간과 공간의 모눈종이를 펼치면 난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숙녀의 기분> 中

그리하여 혼탁한 <숙녀의 기분>, 시집의 마지막 시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두 페이지에 걸쳐 네 단어의 주문을 외운다는 사실이다. 유리공을 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화자 그리고 어쩌면 우리를 위한 주문일까. 이 ‘큐트’한 주문은 변신을 위한 주문일지도, 다 잊기 위한 주문일지도, 그저 한 번 외쳐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적나라하게 나와 우리 사회를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미묘하다. 불쾌하면서도 쌍둥이와 같이 닮은 모습에 정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이 '숙녀의 기분'을 펼쳐 드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중얼거려 본다. 더 나은 나로 변신하고 싶어서, 굴욕을 모두 잊어버리고 싶어서, 아니면 기분에 그저 한 번.

 

큐티 큐티 큐트

샤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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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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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5-28
수중에서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퇴고)

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

  • 모모코
  •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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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안녕하세요. 모모코 님, 사랑스럽고 폭신폭신한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숙녀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에 시달리며 좌절감을 느끼는 어느 나잇대 인물들의 감정이 매우 감각적으로 잘 형상화 되어 있는 시집이지요? 작품집을 꿰고 있는 시어와 감정의 의미를 매우 잘 파악한 글인 것 같습니다. 숙녀라는 표상의 표층 의미와 심층 의미를 모두 잘 살펴 그 낙차에서 오는 긴장감, 굴욕감을 등을 저 또한 모모코 님의 비평을 통해 더 잘 전달받게 된 것 같아요. 숙녀가 되지 못해 수치스러운 감정,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소중한 애틋한 감정 모두 말이지요.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성장 감정으로 전화되는 순간도 잘 파악해주셔서 시집이 더욱 풍부하게 읽히네요. 짧은 기간이지만 모모코님의 글을 보며 점점 글에서 모모코 님만의 개성이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자주 느끼는 감정, 특히 꽂히는 주제, 독서 체험 중 예민해지는 순간 등에 대해 스스로 관찰해본다면 앞으로의 독서도 더욱 즐거워질 것이라고 예상 합니다. 자기 감각의 알고리즘을 잘 살피시길 바라며, 앞으로도 정진하시기를 바랄게요.

    • 2023-03-22 19:35:14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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