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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도와주는 추억 그리고 슬픔-{영화:인사이드 아웃}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4-07-05
  • 조회수 559

최근 나는 6월2주부터 몸이 안좋았다. 심했던 기침이 더 심해지고 몸살이 강하게 몰아쳤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시험이 7월 첫째주인데 큰일 났다 판단하여 6월 마지막주에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학교를 감기가 괜찮아질 때까지 쉴까?라는 생각도 했고 심리적인 이유인가 해서 정신과에도 갔다. 그러나 내 생각은 후자였다.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하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학교를 조퇴하고 조금 쉬다 정신과로 향했다. 정신과에서는 매번 똑같은 레파토리의 지겨운 질문만 던진다. "요즘 잘 지내나요? 요즘 스트레스는 있나요? 그 일을 생각하면 감정과 몸의 반응은 어떤가요?"   나는 위 질문들에 대충 답을 했다. "네, 뭐 나쁘지 않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스트레스는 있나요?"라는 질문에 내 감정을 답하였다. "요즘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질까 두렵고 무서워요."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정신과 의사는 내게 "이 일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으로 만든 부모님에게 무슨 감정이 느껴져요?" 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이 때 몸이 이상했는지 "안타까워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더니 "왜 안타깝죠? 화는 나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그렇다 이 의사가 듣고 싶었던 감정은 분노였다. 안타까움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분노였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나지만 가족이잖아요. 그리고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요."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의사는 "또 감정을 억누르고 있네요."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나를 설득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 몸이 안좋아서 그런지 평소였다면 진지하게 말했겠지만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의사에게 사실된 감정을 말하지 않은듯한 찝찝함을 말하고 빨리 진료실에서 나왔다. 그떄 의사가 마지막으로 한말이 "감정을 살펴보세요."라는 말 뿐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 놓이니까 질문이 생겼다. '감정은 무엇일까? ' 이 질문이 머리를 감싸돌았다.  이는 시험 준비 기간이었던 지난주도 그렇고 이번주도 그렇고 나는 공부가 머리에 돌아야 하는데 이런 사용할 곳 없는 잡생각이 가득찼다. 그러던 중 테레비에 <인사이드 아웃2>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순간 <인사이드 아웃2>를 보기 전 <인사이드 아웃1>을 기억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1을 보고나서 2를 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지난 2주 정도간 나를 공격했던 질문들의 답을 찾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되었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과거로 가버린 기억들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영화의 시작은 라일리가 미세소타에서 센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는 것부터 시작을 한다. 전학 온 학교 새로운 생활 새로운 집까지 11살의 라일리에게 있어 이 상황은 매우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정이 가득 들었던 미네소타를 떠났다는 슬픔까지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충분히 화나고 두렵고 슬펐겠지만 라일리의 감정 본부에는 기쁨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쁨이는 이런 라일리의 상황을 거부하고 그냥 신나고 즐거운 마음만을 라일리가 가지길 바랐다. 그러나 기쁨이의 뜻과 반대로 슬픔이는 자신도 모르게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기와 기억 구슬을 만지면서 라일리를 슬프게 했다. 그러자 라일리에게 슬픔의 구슬이 생겨났고 이를 버리려는 기쁨이와 슬픔이가 싸우다가 결국 본부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라일리의 감정은 버럭이와 까칠이 두렵이와 남게 되었다.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이와 기쁨이가 본부로 돌아가고 이들이 없을 때 라일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얼마나 망가질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여러 장면이 글을 쓰면서 스쳐지나간다. 빙봉이 떠나가고 기쁨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인정하는 장면 꿈 재작소에서 꿈이 만들어지는 장면 기타 등등이 떠오른다. 이 중 나는 기쁨이가 슬픔이를 인정하고 빙봉이라는 케릭터가 희생하는 장면이 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 장면들은 여러 의미들을 품고 있는데 이를 알기 위해서는 빙봉이라는 케릭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빙봉은 라일리가 어린시절 상상 속에서 함께 한 친구인 존재가. 예를 들어 잠을 함께 잔 인형, 집에서 어린시절 가지고 논 장난감 친구들 등이 있다. 나에게는 이런 친구들이 끼끼라는 원숭이 인형과 터닝메카드라는 장난감들이 있다. 아무튼 이런 어린시절 친구들이 누구에게나 존재했듯 라일리의 어린시절 친구는 빙봉이다. 이 빙봉은 노는 것을 좋아하고 라일리와 함께 있고 싶고 지워지고 싶지 않으려고 하는 존재다. 이런 그는 기쁨이, 슬픔이와 함께 동행하여 라일리의 감정 본부에 남겨져 있고 싶어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는 영화 후반부에서 기쁨이를 위해 희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바로 썰매 로켓트를 타고 "놀기 좋아하는 내 친구는, 빙봉 빙봉!" 하면서 로켓트에서 라일리의 기억 쓰래기장으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옛날에 봤을 때는 그냥 빙봉인 가엽다 정도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나이를 먹고 이 영화를 다시보니 위 장면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기쁨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옛날 추억과 기억들이 지워지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과 추억이 나중에는 우리의 기쁨을 다시 만들어 줄 수 있다 생각했다. 이 또한 나의 예시가 있다. 바로 동생이 가져오는 터닝메카드 장난감을 보면 옛날이라면 바로 다 맞췄겠지만 요즘 들어 "뭐얐냐, 그 그그그 요테?" 라고 말하면 동생이 "요타잖아."라고 짜증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추억은 기쁨을 도와주고 기쁨을 받쳐주는 존재가 되고 기쁨을 위해서라면 언젠가는 사라지는 감정이라는 것 까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쁨을 도와주고 우리 감정들을 하나씩 더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것이 또 있으니 바로 슬픔이다. 영화 중반부 빙봉의 썰매 로캣트가 기억 쓰래기장에 떨어졌을 때 기쁨은 "괜찮아"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만 슬픔이는 함께 슬퍼해주고 빙봉을 위로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는 기쁨이 하지 못하는 것을 슬픔이가 할 수 있고 이는 슬픔이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영화는 말하고 있다. 또한 기쁨이와 빙봉이  기억의 쓰래기장으로 떨어졌을 때 기쁨이가 발견한 기억 구슬에는 기쁨과 동시에 슬픔이 함께 나타났다. 이로서 기쁨이는 슬픔도 라일리를 위해서 필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쁨이는 이런 슬픔이를 찾고 슬픔이와 함께 망가져 가는 라일리의 삶을 다시 미네소타 때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만들고 엄마와 아빠를 향해 슬픔의 감정을 표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어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인사이드 아웃>의 주제는 나를 울렸다. 모난 나도 슬픈 나도 나 자신이다. 감정을 안고 갈 수 있는자가 성공한 것이다. 라는 말이 감동적으로 표현이 되었다. 나를 미워하고 아픈 나를 피하려고 했던 나로서 위 주제 의식은 나를 울릴 수 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 생각했던 질문이었던 "감정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정신과 의사의 질문에 숨은 뜻을 영화의 엔딩 크리뎃이 뜨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은 각자의 존재가 모두 함께 있을 때 시너지가 나타나는 존재다. 감정 하나, 하나가 주도권을 잡으면 인생은 망가지기 쉽다. 그러나 감정 여럿이 손과 손을 잡는다면 그 사람은 공감능력과 자기 성찰 능력등의 뛰어나게 발달해진다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정신과 의사가 내게 했던 말들은 내가 내 감정을 누르다 보니 내가 망가질까 두려워 보낸 말이라 판단이 되었다. 미운 나, 모진 나, 상처 받은 나 이들 모두 행복한 나를 위한 하나의 목표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영화였다. 

 추억이 기쁨을 위해 늘 희생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행복한 나를 위해 노력하는 감정들 이를 알게 해주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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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희찬
  • 2024-09-21
靑春 보다 圊芚(카임:청춘)

23년도 제 19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수상집인 을 글틴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나는 이 당시 장려상을 받아 우수작과 최우수작 그리고 대상작을 연구했다. 나는 신춘문예에서도 당선작보다 수상소감을 먼져본다.그 이유는 수상소감이야 말로 글쓰기를 배울 때 제일 기초적인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위 책을 읽을 때도 작품 뒤 작가노트를 제일 먼저 읽었다. 내가 제일먼저 읽은 작품은 문우인 모모코의 작품인도 아니고 시 부분의 최우수작인 도 아닌 소설부분 우수작 카임의 이었다. 내가 이 글을 제일 먼저 읽은 이유는 작기노트에 "저는 청춘 불신론자 입니다."라는 문구가 내 머리에 박혔기 때문이다. 청춘 불신론자가 쓴 청춘이라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제일 먼저 읽었다. 일단 청춘의 뜻은 푸를 청 봄 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주인공의 이름은 춘 그것도 봄 춘이 아닌 어리석을 춘이다. 또한 그의 형제인 청 역시 푸를 청 맑을 청이 아닌 뒷간 청이다. 위 소설은 이 둘이 진짜 靑春을 찾는 과정과 그들의 암울한 청춘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이 둘이 바닥에서 생활 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까움을 느꼈다."바닥을 기면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없다(109p)"를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춘 이 두 단어로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특히 동생인 청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불행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록 힘들게 살았다. 옛말에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했다. 이들의 이름은 노란색 미세먼지 더미였다. 그들의 청춘은 누랬고 그들의 절망역시 누런색이었다."우리의 절망은 중국산이야(111p)"라는 말로 그들이 누런 청춘을 버텨야 했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일했다. 정확히 춘은 열심히 일했다. 청이 도망갈까 전전긍긍하며 누구 부럽지 않게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날 춘과 함께 일하던 홍구가 사고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했다. 모두들 이 일로 불안해 하던 중 춘도 홍구의 뒤를 그대로 밟을뻔했다. 그러나 다행이 홍구보다 낮은 층에 떨어져 허리만 나갔다. 그러나 춘은 치료를 받지 않았다. 이름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청이 공사판을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순수했던 청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누렇게 변한 청 뿐이었다. 그들의 청춘은 이름 값을 했다. 소설의 결말은 청이 20살이 되면서 동료 인부들과 술을 마시며 깨닫고 암울한 그들의 청춘을 보여주고 진짜 청춘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난 과연 청춘이 靑春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청춘이라 하면 관념적으로 풋풋한 나이를 떠올린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청춘들은 과연 풋풋할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나라 10-30대 사망률 中 제일 높은 것은 자살이었다. 이 내용은 많이들 알 것이다. 그럼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청춘은 무엇인가 생각하면 10-30대를 말한다.

  • 송희찬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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